(앗시리아 - 바빌로니아 - 페르시아 - [이집트 BC 3C 소강기] - 헬레니즘(그리스) - [BC146. 로마공화정 그리스 병합]- [BC 2C] - [악티움 해전 BC 31년) - 로마제국)
- 페르시아 시대: 페르시아 제국 통치 틀 속에서 이스라엘 귀환 및 재건, 유대교 형성을 이해해야
- 헬레니즘 시대:
- 페르시아 시대: 바빌론 유수
바빌론 유수( - 幽囚)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기간
히브리어 성경에 따라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추방되었던 다른 사건을 합쳐 말하기도 한다.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면서 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과, 기원전 582년경 바빌로니아가 임명한 예후드 지방 총독인 게덜라이어 암살 이후 바빌론으로 잡혀간 사건을 포함하여 3차에 걸친 추방이 있었다. 이 경우 기원전 597년에 바빌론으로 추방된 시점부터 첫 귀환이 일어난 538년까지 약 59년이 된다.
특징
바빌론 유수기 동안 유대인은 고난과 고통으로 민족일치를 강화했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고, 이 기간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진보하고 화려한 문화를 체험하였다.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절대적인 신을 설정하였고, 그 신이 인간들을 심판한다는 개념으로 인간사에 윤리성을 도입하였다. 이 교리를 유대인들이 받아들여 그 때까지도 현세 지향적이였던 유대교를 선진화시켰다.[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과 역으로 기독교나 이슬람 처럼 유대교에 영향을 받아 창시되었다는 설이 양립한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후에도 유대인 중 일부는 바빌론에 남아 공동체를 유지하였으며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유래가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유대교 관계]
유대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축을 허락한 페르시아의 정복왕 키루스 2세가 조로아스터교도였다.당시 페르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경제,문화,군사,체제 정비 등 다른나라들을 압도하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자로 확고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로 유대인들 역시 종교 뿐 만 아니라 문명 전반에 페르시아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유대교의 주류 종파 중 조로아스터교를 계승한 것이 바리사이파(바리새파)이다. 바리사이(바리새)란 말 자체가 페르시아(파르샤)의 유대발음이며 이들이 주장한 천사, 사후세계, 부활, 최후의 심판, 구세주등의 교리는 조로아스터교의 그것을 그대로 흡수하여 바리새파 소멸 이 후에도 유대교의 주요교리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또다른 유대교 주류 종파인 사두개파는 모세율법에만 집착하는 교조주의파로서 구세주, 부활, 천사, 악마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두개파의 경우 사후세계의 개념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죽은 영혼은 그대로 무덤(셰올)에 거주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종교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동정녀에 잉태되어 태어날 구세주, 종말의 때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조로아스터가 광야에서 정진할 때 앙그라 마이뉴에게 시험받았다는 내용, 조로아스터의 탄생 때 그를 방문했다는 마기(Magi) 등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그 자체. 예컨대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사탄은 본래 '고발자'라는 뜻으로,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여 신을 조롱하는 천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5],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신에 맞서는 악마로 바뀌어졌다.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19세기의 학자인 제임스 다메스테터(1849~1894)는 오히려 유대교와 지배민족인 페르시아의 사상에 영향을 끼쳐 완성된 것이 조로아스터교라고 보는 주장했다. 조로아스터의 출몰의 시기는 대략 기원전 600년전후이고, 그 이전에 유일신 사상을 완성한 유대교가 페르시아에 역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이 역으로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으며, 메시아 예수와 비슷한 내용이 조로아스터교에 등재되기 시작한 시기가 되려 기독교보다 느리다고 보았다.
현대에는 아무래도 현대 사회의 관심 분야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와의 영향이 가장 주목을 끌지만, 아무래도 조로아스터 교와 좀 더 연관성이 깊으면서도 대립성이 강한 종교는 인도의 종교. 브라만교와 힌두교이다.
[페르시아 제국]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 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를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넓은 의미로는 1979년까지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개의 제국들을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그 곳에 아케메네스조의 수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으며,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1.1 메디아(기원전 728년 - 기원전 550년)
1.2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1.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1.4 파르티아(기원전 250년 – 226년)
1.5 사산 왕조(226년 – 651년)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키루스 대왕은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시한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를 물리침으로써 최고로 강한 나라에 이르게 된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한다. 제국의 영토는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된다. 아케메네스의 영토는 인더스강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때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가 격돌하는데 이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부른다(기원전 499년 - 450년). 잘 알려진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냈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이야기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년 – 기원전 25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 받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쉽게 큰 땅을 복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케메니아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제는 자신들을 페르시아의 계승자로 부르면서 다리우스 3세에게 장엄한 장례식을 해주었다. 또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딸 스타데이라와 결혼하였다.
파르티아(기원전 250년 – 226년)
사산 왕조(226년 – 651년)
사산제국은 로마제국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유지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영토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훗날 비잔티움 제국에게 크게 패하고 새롭게 일어나는 이슬람 제국에 의하여 사산제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된다.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야즈데게르드 3세가 이슬람 제국에게 패하여 제국은 무너지고 만다.
[헬레니즘 문명]
기원전 323년에서 146년 사이(혹은 기원전 30년까지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의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고전기 이후의 시대로, 이후 로마가 그리스의 정복지를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 시대로 넘어간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 문화, 예술, 문학은 로마 사회에 스며들어, 로마의 지도층은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서남 아시아(근동 혹은 중동)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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