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중요한 사건들이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수준에 터무니 없이 못미치는 방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중심이 되는 어떤 행사들에 대해서... 최소한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막상 닥쳐서 치루고 보니 예상보다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웠다던지...  내 나이 얼마가 되면 적어도 이러저러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깨진다던지...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면 난 내 기대수준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상 그렇게 당연하지 않다는... 가슴 아픈 현실... 인식...

2013년 11월 28일 목요일

멘토만나고 가는길. 어제 소파에서 잔 탓인지 어깨가 아프다. 만남은 유익했다.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났으니까. 생각 정리하는게 큰일이지만 글로 쓰는 것도 큰일이다. ㅠㅠ

2013년 11월 27일 수요일

George Winston의 앨범 "December"를 듣다. Thanksgiving...

비에 가까워 눈이 많이 쌓이진 않았지만... 한겨울 추위다. 공공기관이라 여름엔 냉방을 아끼고, 겨울에 난방을 아낀다. 대신 여름에 개인용 선풍기를 겨울엔 개인용 난방기를 거의 모두 가지고 있다. 그걸 금하지 않는 걸 감사해야... 난빙기를 켜면 공기가 건조해지고, 그러면 눈이 더 쉽게 침침해진다. 해서 잘 사용하지 않으려는 편인데 지금은 전열기의 온기가 고맙다. 위스턴의 음악과 잘 어울린다. 이렇게 추운 날... 서울이 아니라 유럽이나 북미 어디쯤에  있었으면 좋겠다. 바깥 거리가 보이는 카페 창 쪽에 앉아서 카푸치노를 마시면 좋겠다. 지금처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그 시간이면 좋겠다. 카페를 나서서 집으로 가면 좋겠다. 아내가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놓고서 기다리는...

노교수님과 함께 살던 그 집 냄새가 그립다. 겨울이면 그 양반이 자주 해먹던 스프 냄새... 자주 초대해주던 형님네의 특유한 냄새...

Not so much snow, but it's just really cool outside. Listening 'Thanksgiving' played by George Winston goes well together. I wish I were sitting in a window seat in a cafe in Europe or North America. With the lingering glow of the sunset in the downtown...
(내가 보기엔) 눈 같지도 않은 눈인데다 제대로 쌓인 것도 아닌데... 예쁘다고 난리다. 이럴 때 일찍 가서 아이와 사진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내 마음은 전혀 동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눈이 예쁜 건 아니(라고 믿는)다. 여하튼... 감동, 감탄할 일은 줄어들고, 대신 지적하고 타박하고 짜증 낼 일이 늘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꼰대가 되는 '거시다'.
나는 아내에겐건 식구들에게건 아니  누구에게건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한다. 도대체 '사랑'이 뭐고 '사랑한다'는게 뭘까? '좋아한다'는 건 좀 더 분명한 것 같다.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좀 더 강한 상태를 가리키는 걸까? 그런 감정은 설령 있다손치더라도 지속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대부분의 부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계속 살고 있는 것일까? 왜 그렇게 '사랑'에 목매달고, '사랑'을 확인하려고 할까? '낭만적 사랑'과 '열정적 사랑'과 결혼의 조건으로 당연시되는 현상도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결혼한지 십년된 부부 이야기를 읽었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사랑한 적도 없는 것 같다고 선언했다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자고 했다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이가 이런 글을 남겼다.

"남푠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사랑이란 단어를 오해하는 것 같아요. 사실 현대에 와선 다들 오해하는 듯. 끌림이 사랑이라면 이년에 한 번씩 다시 결혼해야할 겁니다. 감정이 얼마나 잘 변하는데... 스캇 펙은 사랑을 의지라고 정의했었죠. 벨 훅스의 책도 그 정의를 따르고... C.S.루이스는 순전한기독교에서 사랑하는법을 이렇게 말하죠. 사랑한다치고 행동을 먼저 하면 감정이 따라오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거라고.."

사랑은 의지다... 사랑한다치고 행동하면 감정이 따라온다...

흠. 이런 접근도 그렇게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는다. 사랑을 감정과 연결시키려는 접근 자체가...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오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모인 신우회는 '모처럼' 유익했다. 모세의 광야생활 40년... 가시떨기가 불타는... 거룩한 곳... 광야의 의미, 거룩함의 의미... 대해서 생각했다. 이집트 왕궁에서 광야로 나갔다가... 수십 년... 어쩌면 그렇게 양치기로 생을 마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 거룩함... 인식... 신을 벗고... 못하겠다고 발을 빼는 게 아니라 정말 할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 것도 없는, 볼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광야에 나서야 비로소 겸손할 수밖에 없을 것. 그제서야 하나님의 눈에 들어 올 것이다. 
거룩하심, 인정, 내려놓음, 겸손.... 부족하고 ...교만함, 뻣뻣함이...
아직도 내가 의지할 데가 있어서 내려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정말 광야로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까... 흠... 흠... 
어쩌다 보니 요즘 '꼰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우연히 발견했다. '꼰대'의 어원...

"흔히 나이많은 사람을 일컬을 때 꼰대라는 표현을 쓴다. 아버지나 선생님 등에 붙이는 말로, 청소년들이 연장자의 고리타분함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사전은 꼰대에 대해 ‘늙은이를 이르는 말’ 또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은어로 부르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꼰대, 어디서 온 말일까. 이에 대한 어원풀이는 아직 정설화된 것이 없다. 다만 일부 국어학자들이 사견임을 전제로 번데기에서 왔다는 설과 곱방대에서 왔다는 설 등 2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다. 전자는 번데기의 주름살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 속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표현이 있듯이 번데기는 주름살이 많다.
 사람도 이와 비슷, 나이가 들면 이마를 시작으로 얼굴 전면에 주름살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번데기가 왜 꼰대라는 표현으로 발전했을까. 지금도 일부 지방에서는 번데기를 ‘꼰데기’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번데기’가 ‘꼰데기’를 거쳐 지금의 ‘꼰대’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후자설을 제기하는 학자는 ‘곰방대’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얘기하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곰방대는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사용하던 담뱃대로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빨리 발음하면 ‘꼰대’와 같아짐을 알 수 있다. 후자를 지지하는 학자는 여기서 ‘꼰대’의 뜻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꼰대와 비슷한 말로 ‘노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언뜻 생각하면 ‘노인네 털’의 준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말 의외지만 노털은 중국어에서 온 말이다.
   중국어에는 ‘老頭兒’(노두어)라는 단어가 있다. 중국 발음으로 ‘라오투얼’로, 뜻은 한국의 ‘꼰대’와 비슷하다. 이것이 변음화돼 ‘노땅’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다. 이중 끝말 ‘아’는 뜻은 없고 발음에 관계되는 글자로, 영어로 하면 ‘er’ 발음이 나타난다. 이른바 ‘얼화현상’ 이다"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들어주기 힘들다. 게다가 그 판단기준이  좀 생뚱맞아 주위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힘든데도... 하지만 그런 방식의 판단을 고집하는 걸 보면 일관성이 있긴 한데... 자신의 생뚱맞은 판단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서 불편하다.

그이도 이 경우 나름 소수자라면 소수자일텐데... 그런 경우를 잘 수용하지 못하는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 공감대가 부정적으로 확산되면 '왕따'를 시키게 되고... 더 심해지면 '반유대주의' 같은 방식의 배제운동이 될 테고... 인지상정을 거슬러야 할 모양이다. 그냥 마음이 가게 놔 두면 안 될 모양이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욕망, 마음 가는 것을 허용하고, 언제 억제해야 할까? 어디까지가 로맨스가 어디서부터 불륜인가?
트친이 소개한 얘기. 그렇다. "빨갱이" -- "종북"

"강우일주교 -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추었으나 이 말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등장한 것이 종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파괴적인 호칭은 자기와 생각과 삶이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솎아내고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외국 출장 준비를 도와주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부탁을 해와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모저모 요청할 때는 낮은 자세로 감사를 연발하고 후사하겠다더니 다녀와서는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는다.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다른 법인가? 물론 그게 인지상정이긴하다. 이해는되지만 그런 성향이 너무 날 것으로 드러나서 적잖이 당황스럽다. 과연 뻔뻔함은 시대정신이던가...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의 중심은 내면 치유도 아니고, 병든 몸의 치유도 아니고, 심리 안정도 아니고, 기복은 더더욱 아니고, 도덕재무장 운동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와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마음 수련을 하라거나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게 아니라 믿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뭘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본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페친(?) '다비아봇'에서 가져왔는데 아마 정용섭 목사님 설교의 한 부분일 것이다.  기독교... 이래저래 이해하고, 믿기 힘들다. 그저 '종교적 본능'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 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예수에게 집중하지도 못하고... 매사가 이런 식이다. 복잡함이 현실이더라도 언제까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인데...참...
내 안의 꼰대기질.... 어떤 현상에 대한, 그리고 그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혐오감' 그리고 때로는 '분노'... 비록 상식적으로 정당하다 하더라도... 사실... 위험한 면이 있다. 상식은 대개 다수의 견해를 대변하기 때문에 틀리기 힘들고, 고치기도 힘들다. 그런데...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유대인,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감... 그것이 다수에 의해 공유될 때,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이고 때로는 치명적인 억압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소수자의 목소리, 권리... 횡단보도를 좀 넘어서서 차를 세우는 운전자... 등을 "기본적으로" "원칙적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군자, 성인이 되어야 할 일이다. 다수의 목소리, 견해, 상식, 혹은 강한 자, 역사를 이겨낸 습관의 힘이 정말 정당한지 늘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꼰대가 되기는 너무도 쉽다.
나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그 원칙대로 사는 사람을 좋아한다. 경멸하는 사람은 원칙 없이, 혹은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원칙을 바꾸는 사람이다. 물론 이는 두 극단을 얘기하는 것이고 현실은 대개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누구나 두 극단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 조그마한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하니까...

여하튼 나는 굳이 고르라면 좀 융통성 없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고지식한 쪽을 좋아한다 (내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 그렇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쩌면 내가 못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쪽은 원칙 없거나, 원칙을 바꾸는 사람, 특히 사람에 따라 다른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 이중잣대... 강자 혹은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매우 경멸한다. 매우 천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직 상사에게는 아부하고 부당한 지시에 대해서 아무 소리 못하다가, 짜장면 배달부는 타박하는 그런.... 혹은 자기 상태에 따라 태도가 조변석개하는 사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모르게 만드는... 반대로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형평성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만 되어도 좋겠다.

이 얘기도 몇 번 쓴 것 같다. 얼마 전에 쓴 "사랑" 얘기도 그렇고. 그런 걸 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할 수 있는 이야기 레파토리란게 몇 개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학문에 대해서도... 결국 공부를 하고 지식을 넓히는 과정은 그 그 몇가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좀 더 그럴듯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보수 교단 목사님들은 '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술, 담배, 섹스, 점보는 것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얘길 들으면 이젠 심지어 화가 치민다. 상상력의 빈곤인지 상상력의 차단인지... 원...  

세 주 동안 간증을 매일 듣는 행사라...  신학이나 성경 등을 공부하자면야 세 주로도 짧겠지만... 간증을 세 주 동안 듣는다고? 그리고... 간증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 상당한' 스펙, 지위를 자랑하는 인사들. 그 얘기의 핵심은 뭐겠는가. 좀 과장해서 요약하자면... 이러저러해서... 요차저차 되었는데... 결국 내가 나된 것은 (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여러분도 큰 은혜받고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받으세요 (하나님 졸라서 잘먹고 잘사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이웃과도 나누세요.)...  성도들은 큰 아멘으로 화답하고, 이어지는 뜨거운 기도시간에 간구한다. 저런 축복과 은혜를 허락해 달라고.... 주일예배에서 목사님은 큰 은혜받은 성도들이 받은 은혜를 쉽게 쏟지 않기를 당부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죄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고... 술, 담배, 섹스!!! 할렐루야~~ 은혜의 도가니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분노, 화냄에 대하여...

내가 화가 나는 경우 중 하나는 새누리당, 정부 언저리 인사들의 뻔뻔한 발언들을 접할 때...  오늘 보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하야 주장 미사, 민주당 지금 "민생"을 챙길 때라나...  그놈의 민생... 정쟁... 그런 얘길 들으면 '욱'하지 않을 수 없다. 저런 쓰레기들에게 정권을 안겨 준, 혹은 여전히 지지하는, 그래서 저런 쓰레기 같은 소릴 뻔뻔하게 지껄일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쓰레기 같은 정신세계를 보이는 '국민들'에 대해서도 '욱'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경우로 운전하면서 혹은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 횡단보도를 침입하는 차들,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어져 있을 때, 또 그것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자건거 도로와 보행로가 그어져 있으나 뒤섞여서 다니는 풍경,  넓지 않은 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고서 뭔가를 파는 사람들, 보란듯이 길거리 침 뱉는 사람들, 담배꽁초나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 뒷사람에게 담배연기를 한껏 안겨주는 흡연자들, 산책길에 휴대용 라디오 들고다니며 볼륨 높이는 사람들...

내가 화를 내는 대상은 대개 원칙을 지키지 않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들에 대해서다. 언제가 이런 요지로 쓴 적도 있다. 그저 '공중도덕'이니까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내 속에  '꼰대'기질이 없진 않지만, 꼰대도 좀 융통성 있는 꼰대를 지향니까... 이른 바 공중도덕의 근본정신은 타인을 배려하자는 것 아닌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그런 뻔뻔함이 역겨울 뿐이다. 타인에게 특별한 해가 되지 않는 한 불법유턴을 하건, 침을 뱉건, 욕을 하건... 그런 건 용납한다는 얘기다 (이는 내가 하는 행동이기도 하고...^^).

원칙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도... 원칙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런 꼰대적 발상을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편한대로 말 바꾸는 경우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물론 시종일관 극우파... 이런 인간들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리저리 말바꾸면서 자기가 편한대로 지껄이는 이들보다는 더 낫다. 예측가능하니까... 남들 비판할 때 쓰는 잣대는 자신에게, '자기 편'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내가 얘기하는 원칙은 그거다.

자기들이 법을 어지럽히고, 못 가진 자들, 약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공격이나 비판을 받을 때 '법치' '민생' 운운하고, 불편한 얘기 하는 사람들은 전부 '종북'으로 낙인찍는... 그런 저열한 인간들이 대한민국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대한민국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화나고, 억울하고, 토나온다.
"사랑한다"의 가장 강력한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 (강신주)

이 양반 지상파까지 진출했다. 정녕 국민의 '멘토' 탄생이다. 헐~

사랑=알려고 함... 그런 이해 자체엔 동의한다.

순서를 바꾸면...  내가 무척 알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그건 사랑의 대상이다.... 내게도 알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다. 그 대상은 다양하지만... 그러 대상과의 관계는 사랑이다. 알고 싶지 않은 대상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좀 과격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부하고 싶은 생각도 올라오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결혼은 한 후... 부부 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난 차라리 '사랑'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이 근대적 상황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루만, Liebe als Passion). 김용옥 선생은 요즘 누구나 떠드는 '사랑'이란 의미태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나도 그런 쪽인 것이다('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역사... 그런 책이 있음직도 한데... 한 번 보고 싶다)

어떤 관계가 설정되면 사랑이 생겨나는... 그런 자동적인 감정이 아닌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하나님/신에 대해서도...

사랑=알고싶음... 을 생각하면서 떠 오른 옛노래... 이선희의 알고싶어요.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주세요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후회하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말고 그렇게 살려면 후회하지말라.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아래는 페친 권오재 님의 글
그렇다. 의미의 추상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해석적 유연성을 갖는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해석적 갈등에 부딪히지 않는 나라가 건강한 나라다. '법치'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을 위법자로 모는 경우, 민주주의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반대자들을 체제전복세력으로 모는 경우... 그런 몰상식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의미를 아예 대놓고 무시하거나 몰상식한 방식으로 왜곡하는 일... 이것들이 모두 decoupling의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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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에게 감히>

1. 국회에서 한바탕 벌어진 사건때문에 시끄럽다. 나는 이 사건에서 생각해볼 점이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국회의원이면 다냐"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2. 국회의원에게 감히,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첫 번째 날것으로의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 대세인것 같다. 이 말에서 사람들은 특권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3. 나는 이 말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해석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내가 국회의원인데 말이야, 어디서 지까짓 것들이 감히"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4. 그러나 이 말은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즉 국회의원에게 감히는 "내가 국민의 대표인데, 이것은 나를 국회로 보내준 국민들에 대한 무례"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가 있다. 내가 잘 나서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민이 권력을 위임해 준 존재라는 자존감 속에서 국회의원의 권위와 예우를 요구하는 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5.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을까. 글쎄 그건 측정할 수 있는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눈들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국회의원에게 감히 라는 말에서 '아 어떻게 나의 대표에게 저럴수가' 보다 '국회의원 니들 특권의식에만 절어가지고'라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국회의원들이 국민과의 일체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반성을 해야할 일이다.

6. 하나 더, '언론의 자유'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언론사가 자신들의 보도와 행태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주장할 때, 그것이 국민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언론사가 취재한 사실들을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는 자유라면 그것은 옹호되어야 한다.

7. 그러나 그것이 '언론사의 자유'로 포장되어, 무슨짓을 하더라도 언론사는 치외법권에 존재해야 한다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비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또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아직은 건강하지 못한 우리의 사상의 자유 시장, 언론 시장의 성숙을 기대해봐야 하는 것인가.

8. 분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친 정용택 님의 견해. 공감...

"요즘은 사회적 영역에 속한 문제이든 정치적 영역에 속한 문제이든 문화적 영역에 속한 문제이든 그것이 정녕 '정치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일개의 정치적 '논란꺼리'가 되는 순간 이미 싸움은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우파의 전략이 바로 모든 것의 '논란꺼리화'라고 보기 때문인데).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십 여년 동안 숱하게 겪여 봤듯이, 논란꺼리는 그 이름 그대로 '논란'으로 시작하여 '논란'으로 끝날 뿐 어떠한 변화도 발생시키지 않았다(고 나는 판단한다). 논란이 발생하는 것은 진보와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논란꺼리화'가 체제 유지의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오기는 커녕, 도리어 체제가 발견한 위기관리의 메커니즘의 안전한 장치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논란꺼리를 통해 체제의 '생명력', 그 원활한 운동성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현행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연 정치적인 것이 얼마나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고.. 나아가 대부분의 정치적 사회적 논란꺼리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의 사법화"(중요한 정책결정이 정치과정이 아닌 사법과정에서 해결되는 현상)만 강화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사법부가 그 비대해지는 위상과 영향력만큼 제대로 된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의문스럽고.."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내 속에 있는 '나'가 여럿 있다. 수시로 이 여럿인 '나'가 충돌한다. 의사인 페친이 전하는 사연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또 부모님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프레시안 인터뷰 기사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이 언급되자 다시 읽고 싶어서 안타까워 하고.... 수년째 붙들고 있어서 신물나는 주제들... 이야기들... 도대체 이게 사는 건가 싶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래 글은 페친이 소개한 글이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바와 일치한다. 일정 규모 이상 커지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기 쉽다.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관료제적 조직이 만들어지고.... 조직이 만들어지고 정교하고 복잡해지면 이제 그 조직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 교회가 활동하는 것이 되고 정작 사람은 그 조직의 부속품 같은 지위로 전락하기 쉽다. 일요일마다 이른 바 '주차 봉사'하는 분들을 볼때마다 느끼는 소회다. 대형교회 목자들은 그들이 '큰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리 겸손한 제스춰를 취해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자수성가한 대기업 사장이 내뿜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감추긴 힘들다. 큰 목회라...

"100주년기념교회 방문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한 사실은, 교회가 다른 면에 문제가 없을지라도 또 목사의 인격과 자질이 뛰어나고, 설교가 은혜로우며, 재정 관리가 투명하고 교회 운영이 민주적일지라도, 인격적인 교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교회 규모가 비대해지면 교제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너무도 분명한 교회론적인 진리를 목회 현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규모가 적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결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대형 교회가 목회 성공의 증거이자 이상적인 교회라는 인식은 심각한 교회론적 오류이며 탈선이다. 결국 ‘대형 교회 현상’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는 부실한 교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영돈,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p.18"

2013년 11월 18일 월요일

두 번째 보고서 발표회를 마쳤다. 내가 기여한 바를  따지면 그동안 참여한 연구 중에 가장 높은 경우였다. 한 편으로 시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허전하다. 내년에도 이곳에 있게 될까? 이런 연구에 참여하게 될까? 이번이 마지막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탓이다. 이 공간에 확실히 머물 수 있는 12월 말까지 이 공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빨리 내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의 이름으로 프레시안에 실린 글이다. 아래에 소개한 "rule of law"와 일맥상통한다. 한국 사회를 생각할 때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이야기들은 대개 이런 논지 근처에서 나온다.

"'작은' 민주주의의 실천

1

한국방송공사(KBS)의 한 프로그램에 진행자를 바꾸는 문제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났다. 외부 사람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진행자를 바꾸면서 담당 피디와 상의도 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인사권자의 고유한 권리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2

비슷한 일이 하도 많아 그러려니 하지만, 며칠 전 검찰의 감찰이라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외부 사람으로 감찰위원회라는 것을 열었다는데, 결정은 '마음대로' 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그저 '물어는 봤다' 식의 정당화 기능에 동원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민주주의 비슷한 세례를 받은 결과인 그 형식은 허물만 남았다.

3

또 있다. 모두가 그렇게 오래 반대해도 경제 부처의 의료 서비스 산업 짝사랑은 끝이 없다. 얼마 전에는 부총리가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때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는 보건복지부까지 나서 돈벌이용 원격 의료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걱정, 반대, 여론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 식의 발전주의 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겉으로는 이 세 가지가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영역이나 양상은 제법 다르다. 하지만 어쩌면 같은 흐름을 상징하는 사건들인지도 모른다. 바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궁핍한 현실.

요즘 들어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대충 봐도 크게 틀렸다고 부인할 자신이 없다.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설득력이 충분하다. 권력기관이 대놓고 선거에 개입한 것도 그렇지만, 법을 어긴 책임을 따지고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공안과 종북 몰이도 보태야 한다. 그래도 30년 가깝게 조금씩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은 쓰레기 꼴이 되었다. 이념의 자유로운 시장에 맡기자는 소리는 사치라 치자. 이젠 보수의 금과옥조인 '법치'의 가치조차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싶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법외 노조로 만든 희한한 결정이 대표 격이다.

국가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통치의 '사사화(私事化)'는 더욱 심해졌다. 여론 재판부터 해 놓고, 법 너머까지 법을 끼워 맞추는 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가 말한 새로운, '전도된 전체주의'를 떠 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이것을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을까?>(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그래도 국회나 검찰, 정당 같은 것은 여러 사람의 관심 속에 있다(피상적이라 하더라도).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일부 언론의 일탈과 전횡은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한다. 가끔 눈치는 봐야 하니 알아차리기는 낫다.


사실 교묘하고도 은밀한 후퇴가 더 아프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여기에 더 크게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민주주의는 물러서고 삶의 토대는 곳곳에서 허물어진다.

집권 세력의 반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널리 파급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현실의 후퇴는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권력에 시그널로 작동한다. 직접 말하고 강제하지 않아도 그렇다. 눈치로, 알아서,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 권력이 작동하는 시장적 방식이다.

아마도 관료들이 가장 민감할 터. 이들만큼 최상위 권력층의 시그널에 민감한 집단이 또 있을까. 그나마 형식은 남아 있던 여론, 참여, 민주 등등은 벌써 잊었다. 밀양 송전탑 공사에서 보듯, 가장 격렬한 갈등 상황 속에서도 참여는 '공작'이나 동원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슨 위원회, 자문회의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쯤에서 성찰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신으로의 회귀, 공안 세력의 복귀 때문인가.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벌써 한참 전부터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경향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한다.

이 정부만으로 돌리면 너무 좁다. 이명박 정부만의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한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특히 위험하다. 사람의 동기와 지향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의인화'해서 심리와 행태를 찾는 일은 핵심을 벗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의 후퇴는 경향적이다. 마녀 사냥보다는 구조와 기제(메커니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자. 이런 사태를 과연 후퇴라고 할 수 있을까. 혹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채 자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 민낯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래 모습이 그런 것이라면 할 일은 분명하다. 다시 씨를 뿌리고 길러야 한다. 사실, 후퇴인가 아예 없었던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는 일이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현상이 후퇴이든 부재이든 꼭 같다.

실천의 공간과 국면은 실로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거시적일 수도, 미시적일 수도 있다. 그 오래된 구분을 따르자면, 중앙도 지역도 모두 제외되지 않는다. 토대가 아예 허술한 만큼, 작은 실천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집중하자면, 다시 '작은' 민주주의를 주목하자고 하고 싶다. 각 사람이 만들고 실천하는 것으로야 다른 대안이 없다. 물론 전망은 드넓어야 하고 높고 낮은 곳을 모두 꿰어야 할 것이다. 보편성에 흐름을 대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깊은' 민주주의도 없다. (...)"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the rule of the law" 법에 의한 지배... 를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근대를 가능하게 한 핵 중의 핵 아닐까?

우연히 오늘 페친 권오?님의 글에서 '법에 의한 지배'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공감백배. 무단 전재해 놓는다. 

"나는 민주주의, 법에 의한 지배(법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예측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적인 사회는 사람들의 뜻이 왜곡없이 정부와 정치에 반영되고, 제대로 된 법치 사회는 예외나 특혜없이 모두가 합의한 룰이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합당한 처벌이나 대가를 받고, 일반의 상식과 합리가 국가적인 수준의 정책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래서 이런 사회는 신뢰가 높다.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다는 것이 그려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모적인 에너지의 낭비없이 자신들의 삶을 계획하고, 꾸리고, 사회적인 활동을 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민주와 법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예측가능성이 좀 처럼 보이지 않는다. 멀리는 왕조시대에 왕이 기분이 나빠서 "저 놈을 매우 치라"거나, "당장 목을 베라"고 하면 그냥 끝이니까. 불과 몇 십년전에도 사람들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실종되고, 죽고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나쁜 짓을 해도 법에 있는대로 공평하게 처분을 받기 보다는 권력에 줄을 대고 있거나, 돈이 많으면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예외의 특혜를 받는 일이 너무도 많이 있다.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아무리 나쁜짓을 해도 대통령쪽 사람이면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불법노조가 되고 해산 당할 처지에 놓인다. 민의는 왜곡되고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고 있다. 도무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측가능성이란 없다.

그런 사회에 신뢰는 없다. 그냥 복불복의 삶이 있을 뿐이니까. 땀흘려 일하는것, 정당한 논리와 입장을 가지는것, 상식에 맞게 사는것의 가치가 똥값이 된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며 룰을 믿지 않고 힘쎈 사람과 돈을 믿게된다. 

복불복 사회의 결론은 각자 "나만 아니면 돼"를 주술처럼 외우면서 살아갈 밖에.
아수라장이다."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Freedom은 타인이나 특정 권위의 통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Liberty는 어떤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이 정부로부터 보장받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권리의 총합을 의미한다. Freedom이 국가나 타인으로부터 얻어내는(extract) 것이라면 Liberty는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사회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해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집회의 자유는 일반적으로 Freedom이라고 생각되지만 시살 Liberty의 한 측면이다."

검색해보니 아래 얘기가 나온다. 좀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독일어에선 freedom, liberty 같은 구분이 없고 모두 Freiheit이기 때문이다.


"It's yet another example of this double foundation/richness of English

The Saxon root : German Freiheit => Freedom.
The Norman root : French Liberté => Liberty.

As in other occurrences of this double origin, there is a subtle distinction of freedom being more an everyday thing (because words from Saxon origin were preferred by common people) and liberty a more institutional thing (because Norman words were preferred by the ruling class). I think it becomes more apparent if one says jokingly "Whenever people demand Freedom, all what they can hope for is actually Liberty
""

영어의 어원은 독일어 쪽 (앵글로?)색슨계와 불어 쪽 노르망? 계열이 있는데, 거기에서 각각 유래한 영어 단어가 freedom과 liberty. freedom은 좀 더 일상적이고, liberty는 좀 더 추상적이다. 왜냐... 독일어 계열은 평민들, 시민들이 더 많이 썼고, 프랑스어 계열은 지배계급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쓰고 책임연구자의 피드백을 받아서 고친 글을 저녁에 다시 읽어 봤다. 낮에는 그럭저럭 의기양양했지만... 이제 보니 종이였다면 찢고 싶었을 것 같다. 모니터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문장이 어색하고 낯설고... 에휴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정확하게 일주일 동안 논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공동연구자로 이름을 올려놓은 연구의 결과물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에 참여했지만 그 기여도라는게 사실 우스운 정도였다. 내 시간을 그렇게 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사실 연구수당 챙기는 것도 미안할 때가 많았다. 이번 연구는 달랐다. 거의 1/4 정도 분량을 내가 집필했으니까. 물론 copy and paste 한 부분도 적지 않게 있지만... 정말 지난 1주일, 아니 토,일을 제외하면 5일을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렸다. 이제 놓임을 받았다. 저녁도 먹고 조금 여유있는 시간을 갖는다. 이제 내 공부로 전환해야 하는데.... 벌써 8시다. 세 시간 남았다. 끙...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침대 위의 신", 대럴 W 레이 지음 김승욱 옮김, 어마마마 408쪽, 1만8000원

원제는 "Sex & God"이라고... 이경희 기자의 소개글 중에서...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지은이는 성적 억압은 종교의 가장 효과적인 생존법이라고 주장한다. 성적 금기를 깨뜨린 이는 강한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이 죄임을 알려준 종교로 돌아가 신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성적 에너지를 종교 생활에 돌리며 더욱 신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왜곡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혼외정사도 서슴지 않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과 달리 유일신은 기본적으로 무성적인 존재다. 하나뿐인 신에게 어떻게 섹스 파트너가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도 ‘동정녀’ 마리아가 홀로 잉태할 수밖에. 예수에게 형제 자매가 있다는 것도 종교사를 수없이 고쳐 쓰는 과정에서 누락되고 무시되는 건 당연한 과정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진 건 농경사회의 정착과 함께 자리잡은 가부장적인 문화다. 정착된 땅에선 재산 분배 때문에라도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가 중요해졌고, 성은 통제 대상이 됐다. 특히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이 강조됐다. 종교는 2000년 전에 그려진 그러한 성 지도(sexual map)를 지금까지 적용하고 있어서 온갖 모순을 빚는다는 것이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꼬박 이틀을 개발원 연구에 바쳤다. 주말엔 다른 일들 속에서 내 공부할 틈을 찾아야하고, 오는 월요일엔 다시 개발원 연구에.. 월요일로 끝나면 다행...ㅠㅠ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독일인들이 정지선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

http://www.ddanzi.com/ddanziNews/1641851

역시 개인보다는 제도가 문제다. 
약자에게 법, 원칙, 공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다. 강자가 법, 법치를 강조하는 것은 대개 법의 이름을 빌어서 약자, 소수자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갑을 관계에서 제일 말단에 있는 이들에게는 조항 하나 하나를 들어서 꼼꼼하게 요구한다. 별 시덥잖은 것까지... 윗선에서는 초규범적 행태들이 만연하지만... 그런 꼬락서니가 보기 싫으면 (1) 손해를 감수하고서 저항하던지 (2) 갑의 자리에 오르면 된다. 이도 저도 아닌 대부분의 을들은 그냥 속으로 삭히면서 행여 지금 자리라도 잘릴까 못들을척 하루 하루 조용히 살아갈 뿐이다.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원칙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고, 그런 원칙이 세워졌으면 공정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때로는 제재도 가해야 한다(소심한 제재로 '눈흘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나라다.
윤리로 표현하면....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의무론적 윤리다. 목적론적 윤리, 덕 윤리의 과잉 상태기 때문에.... 다만 의무론적 윤리의 추상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배아도 생명이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생명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같은 구체적인 윤리는 분쟁만을 일으킬 뿐이다. 

2013년 11월 2일 토요일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의 교훈

"내일을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보는 놈한테 죽는다" (원빈) (관련기사)

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워낙 '삼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팀색깔도 좀 이상해서 '삼성 라이온즈'의 코리안 시리즈 우승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런데 두산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니들 져도 할 말 없겠다 싶다. 단기전에서 감독은 올인할 것인지 그렇게 해서 졌을 때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김진욱 감독은 매번 후자를 택했다. 어쩌다 그게 잘 맞아 떨어져서 코리안시리즈까지는 올라왔는데 이제 그 운이 다 했는지 마지막 경기들에선 패착이었다. 물론 야구는 모든 이야기가 결과론이다. 결과를 놓고 거슬러 올라가서 원인을 찾아 내는 식이다. 여하튼 결과를 떠나서 마지막 경기는 수준 자체가 많이 떨어진다. 실수 연발에... 덜 못하는 팀이 이기는 그런... 두산은 너무 많은 경기를 했다. 그 전에 올인했어야 그나마 우승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존속살해와 자살, 종이 한 장 차이

"청소년들의 경우 자살하는 경우, 부모를 차마 못 죽이고 자신을 죽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사례는 '사실상 존속살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소개한 이야기인데...

"지난해 일어난 살인사건의 40%가 ... 가족 간 살해였다는 사실"... (이건 잘못된 정보인듯...)


자살 원인 중에서도... 가족구성원과 연인을 한 범주로 묶어놓아서 해석에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질병관리본부가 2006~2008년까지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회복된 자살시도자 1천5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족구성원 또는 연인과 갈등'을 원인으로 든 사례가 46.5%를 차지했다고 한다."


"존속살인 최근 3년 새 54%나 증가" (2013)"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1734건의 살인사건 중 존속살인은 72건으로 전체 살인사건의 4.2%를 차지했다. 정 검시관은 “연평균으로 보면 매년 50건 내외의 존속살인이 발생, 전체 살인사건에서 약 5%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 2%, 프랑스 2.8%, 영국 1% 등 외국보다 많게는 5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수치다."

"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매년 40~50건 일어나던 존속살인이 2012년 195건으로 약 4배 가까이 급증했다. 또한 지난 5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어나는 등 외국과 비교해 한국의 존속살인의 증가세가 유난히 두드러진다는 통계도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존속살인은 2008년~2009년 전체 살인사건의 4.1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5%를 넘어섰다. 미국과 영국에 비해 두 배가 넘는 높은 비율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2년 살인 사건 발생건수가 986건이었다.  검거건수는 1056건. 검거 건수 중 친족간 살해는 259건이다. 검거건수 중 친족간 살해 비율은 25% 정도 된다. 2012년 발생한 살인사건 중 친족간 살해가 40%라는 주장의 근거는 모르겠다.  "살인사건"은 검거되지 않는한 그 원인도 밝혀낼 수 없다. 발생한 살인사건 건수 중에서서 친족살인의 비율을 확인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니 검거건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옳을텐데...

여하튼 5% 정도라고 해도 많게는 다른 나라보다 5배라고 했는데, 25%면 이건 뭐 압도적인 일등 아닐까? 아니면... 2012년 통계 수집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