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8일 월요일

지난 포스팅 추신에서 썼던 얘기를 이어가 보면...

'균형잡기'의 핵심 작업은 무게 추가 기운 쪽에 대한 비판과 반대 쪽에 대한 응원, 힘 실어주기다. 하지만 이놈의 현대사회는 너무도 복잡해서 고려해야할 무게 추의 종류 자체가 너무도 너무도 다양하다. 이 복잡성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안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사안 자체는 물론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시대적, 지역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말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일관되게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아니 그럴 수록 일관성을 유지하긴 해야 하는데 그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원칙은 지독하게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높은 고도에서 유지되는 추상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낮은 고도에서 하는 얘기들에서 모순을 찾아내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공공성과 사적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 공공성이 너무 약하다는 평가를 내리면, 사적 자유를 억제하더라도 공공성을 진흥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왼쪽 지향 시민운동이나 기타 정치적으로 왼쪽에 있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특히 복지정책과 관련해서. 반면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에선 국가의 개입 정도가 너무 심하여 개인의 권리,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공권력 남용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은 정치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부류들도 자주 제기한다.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면서. 공공영역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직인 국가에 대해서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공존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사안에 따라 다른 평가을 내리고 다른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결론만 놓고 보면 때론 신자유주의자처럼 보이고 때론 국가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처럼...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상대가 대적하는 세력의 내부를 흐트러트리려고 의도적으로 다양성이란 외피를 입을 때. 일제 시대 문화정치, 80년대 3S 정책, 조선일보의 문화면 등이 그런 사례에 꼽힌다. 그런 경우 다양성, 유연성을 포기하는 게 전략적으로 긴요할 수있다. 그런 조건에서 '투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투사'란 이름을 얻게 되면 나중에 시국, 정국이 바뀌었을 때 잃게 되는 것도 많다. 보수적, 반동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도 '투사'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을 고수한다던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서 원칙, 입장을 바꾸었을 때 '변절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앞 사례로 백기완이, 뒷 사례로는 박노해가 떠오른다. 균형잡기는 바로 다양성, 균형잡기, 정당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원칙을 유지할 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적극적으로 입장을 수정할 지.. 그 두 전략 사이에서 균형잡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최상위의 균형잡기라고 볼 수 있겠다 (메타 균형잡기).
인생은 줄 타기고 줄 잡기다. 그런 줄타기가 시대와 잘 맞으면 영웅, 투사가 태어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은 선각자가 만들어지고, 마찬가지로 변절자, 보수반동도 만들어진다. 그러니 평가에 연연하지 말 일이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재의 평가를 너무 신뢰하지도 말 일이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