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몇 가지

야스퍼스를 좀 더 읽고 공부할 필요성을 '급' 느낀다.
- 근대성에 대한 논의 (베버, 아이젠슈타트,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복수 근대성 논의와 연결시켜서)
- 종교다원주의 (칼 바르트 논쟁 등과 연결시켜서)

축의 시대의 핵심은 '내면의 발견'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야스퍼스 얘기인지, 암스트롱 얘기인지 구분해 봐야 할 듯)
종교와 철학이 꽃을 피운 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석가모니가 등장,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태어났다. 교류가 없던 네 민족이 어떻게 사유의 혁명을 일으켰는지를 탐구하는 것. 인류는 아직도 축의 시대 통찰을 넘지 못했다는 건 (야스퍼스는 모르겠고) 암스트롱의 주장이라고.

근대성 이야기 하면서 그걸 제2의 축의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Schluchter이야기라고 하는데 출전을 찾을 수 없다.) 근대성을 핵심을 '초월의 내재화'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1차 축의 시대가 인간 내면의 발견했고 초월적 설명을 지향했다면, 2차 축의 시대 (근대성은) 그 초월을 내재화 (인간 내면의 재발견인가?)시켜서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이해한다.

그런 매우 개인주의적, 심리적, 종교적, 문화적 근대성 이해는 (베버 냄새가 강하게 나는...)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 중 아주 특정적인 부분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하튼 복수의 근대성, 아시아적 근대성, 유교적 근대성을 이야기 할 때 근대성을 그렇게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 시민계급, 자본주의 맹아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근대성 논의를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심지어 야스퍼스 전통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공통적 조건을 가진 이상...)...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시기적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하고...
다시 표현하자면, 근대성에선 모든 문화, 문명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찾으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봤을 때 설명이 더 그럴듯해지는 지에 대해선 의문이라는 것!
아.. 복잡하다.

너무 종교 중심적 설명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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