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1일 수요일

요즘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헨리 나우웬의 "Bread for Journey"를 읽고 있다. 매일 묵상용으로 쓴 짧은 글 모음이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기에 딱 좋다.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읽은 내용이 특별하게 다가와서 일부 옮겨 놓으려고 한다.

생명과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The most important question is not 'Do I kill?' but 'Do I carry a blessing in my heart or a curse?' The bullet that kills is only the final instrument of the hatred that began in the heart long before the gun was picked up."

수십명을 죽인 노르웨이 테러범 베링 브레이비크도 총을 쏘기 이전 오랜 시간 동안 그 속에서 증오오 미움을 키워왔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욱'하며서 '성질'이 나온다면 - 예컨대 다른 운전자들이 내 신경을 건드릴 때나, 내가 응원하는 팀이 정말 '거지같은' 플레이를 할 때 등등 - 그 이전에 내 속에 쌓여 있던 이런 저런 미움이 발하는 걸 게다. (실제로 총을 들지 않았더라도 미움은 그 자체로 이미 살인이다).

"But God asks us to choose life and to choose blessing. This choice requires an immense inner discipline. It requires a great attentiveness to the death-forces within us and a great commitment to let the forces of life come to dominate our thought and feelings"

훈련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미움과 살의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살펴보면서, 또 마음과 감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훈련시키는 수 밖에...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문제는 다시 도덕성이다. 근대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취하는 사회에서 정치는 선악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물론 정치적 경쟁자를 '적'으로 생각할지라도 공적으로 그런 표현을 써서는 안된다. 여하튼 정치계에선 동료아니던가. 누구든 선거 결과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선'이거나, 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치만큼 도덕화하기 쉬운 분야도 드물다. 도덕화는 개인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고, 선인지 악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집단 자체가 도덕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종북세력'이나 '극우세력' 같은 표현들이... 가끔씩 - '간첩단 사건' 처럼 - 실체적 불이익, 대미지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여하튼 도덕화는 개인을 대상으로 할 때 직접적 효과를 발휘한다).
도덕화, 특히 개인에 대한 도덕화가 관찰된다는 것은 흥미롭게도 제도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경쟁 상대, 집단을 도덕화하기 쉽지 않은 경우, 개개인의 행동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여 '나쁜' 인간/인격으로 몰아붙이기.. 그가 속한 집단에 타격을 주는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식이다.
도덕화에서 취약한 집단, 공격을 쉽게 당하는 이들은 주로 '가진' 집단들이었다. 덜 가진 자들이 제도적 권력에 진출하면서 그 동안 도덕화로 짭짤한 재미를 봤던 그들이 오히려 더 도덕화에 취약하게 되었다. 가카는 그 많은 도덕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푸른 지붕 아래로 들어가셨고, (관대해진 것이고), 이제 도덕화로 재미를 보는 쪽은 오른쪽에 치우친 이들이다.
여하튼 도덕화는 선/악에 대한 공통의 기준을 '상정'하는 것이고 - 그래야 비판이 의미가 있으니까... - 윤리화는 서로 다른 기준이 있음을 인정하자는 쪽이다. 그런 정의를 따르면 정치는 '윤리화'되기 쉽지 않다. 시장, 혹은 자본주의 경제 역시 도덕화하기는 쉽지만 (사회적 책임 강조 같은) 그것을 윤리화한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각종 윤리위원회의 존재는... 다른 판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인가? 그런 걸 두고 윤리화라고 할 수 있을까?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불분명한 것들을 참기 힘든 시대의 교회!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이견을 참지 못하는 개발독재, 발전주의자들!! "해 봤어? 해 봤냐고..." "안되면 되게 하라!!"
정답을 찾기를 강요하는 교육도 마찬가지고!
엄마, 아빠 말 잘듣도록 온 나라 어른들이 강제하고 훈육하는 사회!
불확실성, 의문, 불가지성 등등은 설 자리가 별로 없다.
아무리 과학 패러다임이 바뀌었네 뭐니 해도...
그것 자체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포스트모던 종교나 영성의 영역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학문의 의미를 '해석'에서 찾기 시작하면...'확실성'이 아니라...

2011년 8월 25일 목요일

"동양에서 뱀은 정말 상서로운 존재다. 중국 고대 신화의 복희와 여와(아래 그림)는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뱀이다.
우리나라에선 어떤가? 집에 구렁이가 들어오면 경사로 쳤다. 왜? 뱀은 쥐를 잡아먹으니까.
쌀농사를 짓는 정착 농업 문명인 동아시아에서 쥐는 인간이 먹기도 모자라는 쌀을, 그 힘들게 1년 내내 온갖 정성을 들여야만 수확할 수 있는 쌀을 빼앗아먹는 최고로 얄미운 짐승이었다. 그 쥐를 잡아먹는 뱀은 당연히 인간에겐 이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뱀은 그래서 중요한 문화상징이 됐다.

반면 한곳에 머물러 식량을 재배하지 않는 유목문명권에서 뱀은 사악한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신의 섭리란 동물들에게 다리가 있는 법인데, 다리도 없는 기괴한 모양이니 불길하게 보였고, 이런 관점은 기독교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악역으로 뱀을 캐스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뒤로 뱀의 이미지는 정말 최악으로 낙착됐다. 그래서 <해리 포터>까지 뱀은 주구장창 최악의 상징이다
."

내가 즐겨 찾는 한겨례 구본준 기자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무식해서 용감해지지 않으려면 - '하나님, 서울시민 다 투표하게 하소서' 같은 기도를 한다던지... - 마음을 열고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며칠 전 전자우편을 통해서 받은 광고 속에 등장하는 문구들. 이걸 읽는 순간! 손발 오글거림은 물론 온몸의 감각들이 일제히 기립하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 찬양감상이용권을 구입하시면 벨소리가 무료!"
"최고음질의 찬양감상과 함께 최신찬양을 벨소리로 설정하고 선물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은혜로움이 넘칩니다."


뭐... 전업 CCM 가수들, 뮤지션들과 또 그들의 음원, 음반 등을 유통하는 이들 역시 먹고 살아야 하고, 그 소비자는 대개 '교인'들이니까 저런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좀 덜 오글거리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less is more...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아시아 지역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강력한 국가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공존하는... '국익'을 위해서 난자까지 기꺼이 기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과 얼굴뼈 깍는 걸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할 수만 있다면 더한 수술도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그런데... 이건 예외적인 상황으로 볼 일이 아니다. 정통 혹은 본류가 서양에 있고 아시아는 예외적이어서 조금 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기에 지금 상황은 덜 따라잡은 상태인 게 아니란 말씀. 근대화의 모순의 가장 발전되고도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이처럼 대중가요들이 무더기로 ‘19금’ 목록에 오르게 된 것은 여성부가 이번에 유해물 심의를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 음반의 유해물 여부는 청보위 모니터요원의 기본 검토와 음반심의위원회(음심위)의 1차 심의를 거친 뒤 청보위가 매달 본심의를 열어 결정한다. 음심위 위원장은 기독교 음반·서적을 주로 펴내는 ‘라이트하우스’ 강인중 대표가 맡고 있다. 강 대표는 '대중음악, 볼륨을 낮춰라'라는 책을 쓰는 등 대중음악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기사 '술·담배 노래가사탓 약물남용? ‘취중진담’ ‘술이야’ 편곡도 19금' 중)

대중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할 때 쓸 소재들이 늘어나는구나.
새벽 1시 반... 잠들지 못하는...
와인... 붉은...
라디오... 유희열...
오늘은 음악을 계속 들려주는 날... 재수...
윤종신, 장기하와 얼굴들에 이어 디어 클라우드...
맥북에어... 날렵해서 무릎 위에 놓고 치기 좋은...
열린 창문... 9층...
맞은 편 52동... 어둠 속 창문을 통해서 나를 향하고 있을지 모를 시선...
초가을 바람...
적당히 듣기 좋은 자동차 지나치는 소리...
신호등으로 양 쪽이 막힐 때 찾아드는 조용함...
4분의 1 정도 보이는 달...
저 멀리엔 하얀 십자가...
그리고...
오늘... 아니 어제 겪었던 여러 일들...
내일... 아닐 오늘 해야 할 일들...
앞으로 수개월 내에 해야 할 일들...
그리고 내 나이...
갑자기 찾아 온 가을이, 그래 이건 분명히 가을이야, 무척 당황스러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든...
손님을 태울 수 있음을 알리는 빨간 표지가 선명한 택시들...
이 시간에 누굴 태울 수 있을까...
아, 어쩌면 방이동 먹자골목 쯤에선...
페북에서 내 정보를 보는 이들이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해서 프로필에 있던 소개글을 지웠다. 그래도 역사인지라 여기에 남겨둔다. 여긴 당분간 나와 소수를 위한 공간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을 듯.

신미디어 학습때문에 이 곳에 자리를 마련해 두긴 했지만, '本家'는 따로 있습니다.
http://teutosworld.blogspot.com
하긴 요샌 그 집도 방치해 두고 있다시피해서 잡초만 무성할테지만...
(some months later... 최근엔 좀 가꾸고 있다 ㅋ)

2011년 8월 19일 금요일

난 생각 없이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유하게 표현해서!). 운동은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절대! 네버! 특히, 야구같은 경기는 정말 지적이고 매우 심리적인 스포츠다. 공 하나 하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런 상황의 변화를 읽고 그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선수들, 감독들을 보면... 참... 한심하다 (물론 그 상황, 플레이에 대한 전문적 해설이 그런 판단을 하는 게 결정적이 도움이 된다 [해설가 중 허구연, 이순철을 높게 평가한다]. 내가 야구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생각없이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는다. 이전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타고난 야구 지능이 떨어지면 학습 능력이라도 있어야할 텐데 둘 다 모자라는 경우는 정말이지 '민폐'다. 야구를 보다보면 그렇게 호/불호가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고, 중계 사이트 '응원글' 남기는 곳은 그런 감정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배설되는 아주 지저분한 공간이다. 때론 내가 하고 싶은 얘길 대신 해주니 속 시원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결국 남는 건 씁쓸함이다.
도대체 그들에게 그런 악담, 저주를 퍼부을 권리를 누구에게서 부여받았단 말인가? 공인? 그 알량한 공인 타령? 공인이기 이전에 그들도 인격이다. 인간이다. 야구장 바깥에선 하나같이 모두 귀한 자식, 부모, 남편이다.
비록 직접 대면하진 않는 '공인'이라 할지라도, 때론 그들에게서 보고싶은 것만 볼 지라도, 그들과이 관계는 Ich-Es가 아닌 Ich-Du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동수 振動數'(여길 볼 것)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터.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물론 사람의 '진동수'엔 조정의 여지가 조금은 있는 법이기에 조율해 보려고 애를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실패할 때가 많고 그러다보면 '좌절감'을 맛보기까지 한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느끼게 되는 두 가지.
- 우선, 내 진동수가 아주 평범한 편은 아니라는 것.
- 그리고, 나와 비슷한 진동수 가진 사람을 드물지만 만날 수 있고 또 교류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연예사회학 (1)

한예슬 사태로 다시 공론의 대상이 된 드라마 제작 현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전제작이 최선인가? 사전제작을 못하는 이유가 제작비 때문인가? 질문을 바꿔보자. 시청자로서 당신은 사전제작된 드라마를 보고 싶은가? 글쎄...'그렇다'라고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맘대로 해석...). 거의 생방송처럼 제작되는 드라마가 반드시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생방송 드라마의 장점은 꽤 많이 찾아낼 수 있다.
- '라이브' 공연이나 '리얼리트 프로그램'이 주는 현장감
-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서 극 전개에 이미 참여할 여지까지 있다. (참여지향적 시대정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드라마 제작 방식 아닌가)
- 이번 사건도 그렇지만 드라마 제작과 관련한 사건이 기사화되면 드라마 홍보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등등.
한마디로 내용상 허구인 드라마의 이야기와 '리얼'인 드라마 제작현장의 이야기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
내가 제작사라면 돈도 절약하고 홍보 효과도 얻는 이런 방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게 스탭과 배우들에게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강도의 노동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선 안되겠지만, 내 말은 사전제작만이 최선은 아닐 수 있고, 한국식 드라마 제작방식이 어쩌면 대중이 드라마나 여러 티비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현장감, 참여 등의 요소를 포함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면서 생각나는 게 '프로 스포츠', 예를 들어서 프로야구.
프로야구는 야구장 내에서 벌어지는 게임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와 프로야구 경기, 선수, 선수단, 감독, 방송 자체 등에 대한 장외 이야기들이 버무러지면서 최대 효과를 만들어 낸다. 경기 자체로 즐긴다? 사회 현상으로서 야구를 보자면 그건 전체 야구 커뮤니케이션의 '밑밥'(혹은 '쏘스' [sauce가 아닌 source]) 정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한국은 해괴하게도, 피사용자가 사용자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전도현상이 너무 보편화되어 있다.'

한예슬 '사태'에 대해서 한 문화평론가(겸 교수)가 쓴 글에 나온 구절이다. 제작사 입장에서 한예슬 행동을 비판하는 '시청자들' (피사용자?)들을 가리키면서... 백번 공감!! 누구와 얘길 나누다가 들은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 얘기가 떠 올랐다. 서울을 강남과 강북을 대개 구분하는데, 강북이 낙후되었다고 해서 강북 우선 정책을 펴는 걸 막상 강북 주민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왜? 그들도 언젠가는 강남에 가서 살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희망 때문에 지금 강북 생활을 꾸역꾸역하고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와 직접 비교할 순 없다. 피사용자들/시청자들이 언젠가 사용자인 제작자가 될 기대를 가질 리 없으니까.
- 노동자들이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현상
- 노동자들 혹은 중산층 이하 시민들이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해서 사용자, 정부 편을 드는 현상

(...)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 잠시 후퇴....
며칠 전에 이런 얘길 남겼다.
- 애플의 아이폰이 천재의 창조물로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제품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 인재니까 성공하는게 아니라 성공했으니까 인재다
여기에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게 아니고) '는 얘기를 덧붙일 수 있겠다.
바로 밑에선 '진리/진실'의 복수성 (複數性)을 거론했다.
이 둘 같은 논리 구조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다.
난 역사가 하나의 정점을 향해 간다거나, 유일무이한 진리가 있다는 주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라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 단정적이라 피하고 싶다. 왜? 그렇게 믿을 때도 있거든...).
'역사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라거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거나... 바로 그게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다 (크흐! '진실'이라...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결국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해석자의 입장에서 다른 현실, 역사, 진리가 구성되는 것이다.
'근대성'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태동한 '근대성'.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고서 그 방향으로 가는 '근대화'만이 '진리'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비서양 지역 담론을 지배했고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최신 버전: "선진화"). '진리의 복수성' 그리고 '해석된/구성된 진리'라는 테제에서 설명하자면 이 같은 근대성 이해는 '서양이 발전했고 성공했으니까 그 서양의 특성을 근대성이라고 부르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근대성'은 그리 긍정적인 측면만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이룬다.
여하튼... 언제 다시 역전될 지 모른다. 만약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서 세계 차원에서 패권을 잡는다면... 강한 중국을 가능하게 한 것들을 또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중국 (혹은 아시아 국가들)을 발전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비근대적이고 비서양적인 요소들이 '기적'의 원인으로 칭송될 지도 모른다 (물론 이미 '아시아적 가치' '유고 자본주의' 논쟁이 있지만...).
역사와 역사 해석은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그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은 (어떤 형태의 진리이건 간에....) 이 복잡함을 처리하는 매우 손쉬운 방식일 따름이다.

진실들...

진실 혹은 진리는 단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늘 복수다. 진실들, the truths, die Wahrheiten... 등등 (cf. 내 다른 글).
한예슬 사건이 그렇고 김성근 감독 퇴진이 그렇다. 누구나 다 진실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진실을... '실체적 진실'이 아애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까지 부정하면 우린 한 순간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들다 (ex. 돈을 빌려 줬는데 다음날 상대방이 왈: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다르다. 그러니 돈을 갚을 책임이 없다. 그런 극단적 경우는 배제하자는 말씀) 대놓고 거짓말'치는' 이들이 '진리의 복수성' 운운할 수 있는 여지는 남기지 말자는 얘기다.
여하튼 실체적, 객관적 진리, 진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넓혀 놓은 다음 그 토대 위에서 진실의 복수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한예슬, 김성근... 모두 그런 경우라고 본다. 어쩌면 그들의 논쟁은 손가락일 뿐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또 다른 진실, 어쩌면 더 알 필요가 있는 진실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아웅다웅하면서 놓치는 그런 진실 말이다.

'최종병기 활'(2011)을 보다.

감독은 김한민. 그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은 괜찮았고, '핸드폰'도 나쁘지 않았다. '활'에서는 한 단계 오른 역량을 보여준다. 오락영화 (혹은 '액션활극')를 지향하는 이 영화는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딱 필요한 만큼만 역사를 이용한다. 역사를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절하게 숨어 있다 (심지어 '나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그럴듯한 성찰까지...). 주요인물 중 유일한 여성인 '남이'가 유약, 순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점도 신선하다.
몇 가지 흠을 잡자면, '만주어'어가 매우 충실하게 재현되는 반면 조선사람들이 쓰는 말은 '현대 한국어' 느낌이 충만하다. 화살 날아다니는 모습이 탁월한 반면, 호랑이 CG 장면은 너무 허접... 개성에 살던 사람들이 압록강 주위 지형을 너무 잘 아는 설정 등등.
결론적으로, 역사에서 소재를 취해서 만든 '오락영화'의 '좋은 예'! (빠른 전개, 긴장감... 이런 점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사'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대표적 나쁜 예는 '디 워' ㅠㅠ).

낯익은 장면들, 이야기 전개 방식의 출처를 오마이 뉴스 리뷰 기사는 '서부영화'에서 찾는다. 그런 것 같기도...

"'최종병기 활'은 역사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철저하게 할리우드 방식을 따른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결론을 향해 치달아간다. 그래서 미국영화 공식에 익숙한 한국관객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 가족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주제나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 총잡이들의 일대일 대결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서부영화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두 가지 부담을 극복하고(^^) '문재인의 운명'(2011, 가교출판)을 읽다. 두 가지 부담이란, 우선 엄연한(!) 근무시간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로는 시간이 있을 때 최고 우선순위를 배당받는 과제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점.
여하튼... 오백쪽에 이르는 내용을 모두 읽을 순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책이라 군데 군데 읽어 보았다. 읽고 나니... 먼저 노무현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데 한번쯤 봉하마을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요즘 '문재인 대망론'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그림이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노무현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의 감동이 있을 것 같다는... 아니 퇴임 이후가 오히려 더 기대되는 그런 대통령일 것 같다는... 그가 운명처럼 만나게 된 노무현처럼...
오바마 형님이 요즘 고전하시는데, 막상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동안엔 대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다. 현실 정치의 한계 때문이다. 하지만 당선 자체가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수는 있고, 또 임기 이후에 오히려 뭔가를 보여줄 수 있기도 하다.
여하튼... 과연 그가 또 다른 운명으로 여기고서 받아들일지, 그래서 결국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

2011년 8월 16일 화요일

"백청강, 한국 국적 취득 질문에 당황..고개 숙여 (파이낸셜뉴스)"

'위대한 탄생' 우승자인 백청강이 한국 국적 취득에 대한 질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16일 방송된 YTN '뉴스앤이슈-이슈앤피플'에 이대권, 손진영과 함께 출연한 백청강은 "한국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한국 국적 취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아직 그런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생각해 볼 문제"라고 간결하게 답변했으나 이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나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질문이 어렵다"라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

페이스북엔 왠지 좀 무거운 얘기, 특히 견해가 갈릴 수 있는 민감한 주제에 대한 얘긴 꺼내기가 힘들다. 아애 논쟁을 목적으로 삼은 그룹 성원들끼리의 대화가 아닌 이상... 사실 나도 부정적 얘기, 비판적 얘기가 지속되면 내가 그 얘기에 공감, 동조하더라도 왠지 좀 거리감을 두고 싶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설명, 이해할 수 있을까? 페북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성격일텐데... 하여 이 얘기는 여기에서 풀기로 한다. 더군다나 페북에서 오늘 기성용의 그 철없는 행동에 대해서 짧은 소감을 남긴 터라 비슷한 얘길 거기에서 또 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YTN 앵커라면 배울 만큼 배우고 또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엘리트라면 엘리트일 것이다. 그런 인간이 생각하는 꼬락서니가 딱 저 정도다. 다음 기사에 달린 댓글도 또한 가관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의 향연이다. 그래 가지고서 무슨 염치가 있어서 일본을 욕할까...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몇 가지

야스퍼스를 좀 더 읽고 공부할 필요성을 '급' 느낀다.
- 근대성에 대한 논의 (베버, 아이젠슈타트,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복수 근대성 논의와 연결시켜서)
- 종교다원주의 (칼 바르트 논쟁 등과 연결시켜서)

축의 시대의 핵심은 '내면의 발견'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야스퍼스 얘기인지, 암스트롱 얘기인지 구분해 봐야 할 듯)
종교와 철학이 꽃을 피운 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석가모니가 등장,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태어났다. 교류가 없던 네 민족이 어떻게 사유의 혁명을 일으켰는지를 탐구하는 것. 인류는 아직도 축의 시대 통찰을 넘지 못했다는 건 (야스퍼스는 모르겠고) 암스트롱의 주장이라고.

근대성 이야기 하면서 그걸 제2의 축의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Schluchter이야기라고 하는데 출전을 찾을 수 없다.) 근대성을 핵심을 '초월의 내재화'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1차 축의 시대가 인간 내면의 발견했고 초월적 설명을 지향했다면, 2차 축의 시대 (근대성은) 그 초월을 내재화 (인간 내면의 재발견인가?)시켜서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이해한다.

그런 매우 개인주의적, 심리적, 종교적, 문화적 근대성 이해는 (베버 냄새가 강하게 나는...)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 중 아주 특정적인 부분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하튼 복수의 근대성, 아시아적 근대성, 유교적 근대성을 이야기 할 때 근대성을 그렇게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 시민계급, 자본주의 맹아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근대성 논의를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심지어 야스퍼스 전통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공통적 조건을 가진 이상...)... 너무 높은 차원에서 접근하면 시기적 특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하고...
다시 표현하자면, 근대성에선 모든 문화, 문명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찾으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봤을 때 설명이 더 그럴듯해지는 지에 대해선 의문이라는 것!
아.. 복잡하다.

너무 종교 중심적 설명아닌가?

2011년 8월 13일 토요일

"전문가의 실력 = 전문지식 X 커뮤니케이션 능력" (안철수)

2011년 8월 12일 금요일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지역을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강력한 국가, 국가 중심주의다. 발전국가가 그 대표 브랜드고.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 중심주의의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국가가 도대체 뭐냐는 것... 근대국가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도대체 근대국가 이전의 국가와 무엇이 다른지... 좀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을까....

2011년 8월 11일 목요일

뭐지? 이 미묘한 기분은? 상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조절의 문제?
Buber 할아버지는 관계를 'Ich 와 Du' 'Ich와 Es (Er, Sie)' 관계로 구분을 하는데...
웬 걸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단계로 봐야 할 것이다. 한 쪽 끝에 Ich-Du관계가, 다른 쪽 끝에 Ich-Es관계가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되는 관계는 그 위 어디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다. 직장 동료 혹은 상사와의 관계는 학교 선후배, 교회선후배 관계와 다르다. 많이...
너무 많은 걸 고려하면, 너무 적게 고려해도... 좋지 않다.
처세에 능한 것도 무능한 것도 모두 좋지 않다.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기... 어렵다...

2011년 8월 9일 화요일

잠못드는 밤. 새벽 1시 반. 요즘 이런 현상이 자주 .... 몸은 피곤한대도 잠은 쉽게 오지 않는... 짜증이 부쩍 늘었는데 - 그 대상은 뭐 뻔하다. 사무실 '선배들'이나 오고가며 부딪히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그럴 순 없으니 대개 아내나 가끔씩 운전할 때 내 눈에 거슬리는 차량들(과 그 운전자들)이 된다 - 모두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늘 나우웬의 책을 한 권 주문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선 Martin Buber의 Ich und Du를 읽었고... 해결책을 그런 방향에서 찾아 오려 한다.
아... 이제 또 뭘 하지... 요샌 밤이면 눈이 먼저 피곤해져서 책을 보기도 힘들 때가 잦은데 오늘도...

2011년 8월 8일 월요일

"성서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유아적 수준에서 읽어서는 안된다" (박영식, 1970? ~ ^^)
"인문학자는 필연적으로 역사학자 일 수밖에 없다" (어윈 파놉스키 Erwin Panopsky, 1892~196, 예술비평가)
지난 포스팅 추신에서 썼던 얘기를 이어가 보면...

'균형잡기'의 핵심 작업은 무게 추가 기운 쪽에 대한 비판과 반대 쪽에 대한 응원, 힘 실어주기다. 하지만 이놈의 현대사회는 너무도 복잡해서 고려해야할 무게 추의 종류 자체가 너무도 너무도 다양하다. 이 복잡성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안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사안 자체는 물론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시대적, 지역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말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일관되게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아니 그럴 수록 일관성을 유지하긴 해야 하는데 그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원칙은 지독하게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높은 고도에서 유지되는 추상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낮은 고도에서 하는 얘기들에서 모순을 찾아내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공공성과 사적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 공공성이 너무 약하다는 평가를 내리면, 사적 자유를 억제하더라도 공공성을 진흥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왼쪽 지향 시민운동이나 기타 정치적으로 왼쪽에 있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특히 복지정책과 관련해서. 반면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한국에선 국가의 개입 정도가 너무 심하여 개인의 권리,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공권력 남용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은 정치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부류들도 자주 제기한다.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면서. 공공영역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직인 국가에 대해서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공존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사안에 따라 다른 평가을 내리고 다른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결론만 놓고 보면 때론 신자유주의자처럼 보이고 때론 국가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처럼...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상대가 대적하는 세력의 내부를 흐트러트리려고 의도적으로 다양성이란 외피를 입을 때. 일제 시대 문화정치, 80년대 3S 정책, 조선일보의 문화면 등이 그런 사례에 꼽힌다. 그런 경우 다양성, 유연성을 포기하는 게 전략적으로 긴요할 수있다. 그런 조건에서 '투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투사'란 이름을 얻게 되면 나중에 시국, 정국이 바뀌었을 때 잃게 되는 것도 많다. 보수적, 반동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도 '투사'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을 고수한다던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서 원칙, 입장을 바꾸었을 때 '변절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앞 사례로 백기완이, 뒷 사례로는 박노해가 떠오른다. 균형잡기는 바로 다양성, 균형잡기, 정당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원칙을 유지할 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적극적으로 입장을 수정할 지.. 그 두 전략 사이에서 균형잡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최상위의 균형잡기라고 볼 수 있겠다 (메타 균형잡기).
인생은 줄 타기고 줄 잡기다. 그런 줄타기가 시대와 잘 맞으면 영웅, 투사가 태어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은 선각자가 만들어지고, 마찬가지로 변절자, 보수반동도 만들어진다. 그러니 평가에 연연하지 말 일이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재의 평가를 너무 신뢰하지도 말 일이며.

2011년 8월 7일 일요일


3대 국제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8월 5일 오후8시(미국 현지시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추었다(고 한다). 신용등급 강등이 향후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한 얘기들이 많은 모양이다. 몇 가지 정리해 보면...
- 미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은 앞으로 미국이 돈을 빌릴 때 내는 이자(율?)이 높아진다는 뜻
- 미국이 매년 이자를 천억달러, 100조원넘게까지 더 물어야 한다는 분석이 있음
- 미국 국채 가치는 20~30% 낮아질 것으로 분석하고 있음
- 1조1600억달러에 이르는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그 미국 국채가치도 2300억~3400억달러 정도 떨어짐 (중국인 1인당 180~260달러의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계산)
- 달러의 기축 통화 지위가 무너진다면 2차대전 이후 이어진 미국의 최강대국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미국이 더 이상 예전의 그 미국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번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린 문명사적 전환기를 겪고 있는 지
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돌아가면서...)-미국으로 이어지면서 15세기 이후 이어져 온 서양 문명의 세계 지배가 끝나고 있는 듯한... 새로운 강자로 대개 중국을 얘기하는데... 일본, 한국까지 껴서 세트로 동아시아를 지목하기도 하지만... 관전 포인트는 과연 중국 혹은 동아시아가 새로운 문명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단지 주도권, 특히 경제적 주도권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가는 정도의 변화냐, 아니면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느냐는 변화냐는 점이다. 근본적인 변
화라면 예컨대 자본주의의 몰락 같은 것 말이다. 이미 자본주의화된 중국이 유일 강대국이 된다고 해도 세계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들, 투자가들에게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분주하게 대비하고 있을 지도...
문명의 전환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소설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나도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루만은 세계사회 같은 얘기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얘긴 더 이상 놀랄 거리도 못되니... 이 시점에서 루만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들로서는 답답한 일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근대 프로젝트가 여전히 진행중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의의가 없진 않겠지만....

p.s) 여하튼, 난 루만이건 푸코건 칸트건 헤겔이건... 그들을 무슨 성인, 성자 모시든 하는 '인간들' 경멸하는 편이다. 가끔은 '분노'까지 느끼곤 한다. 아, 그건 이쪽으로 와도 마찬가지다. 다산 정약용이건 퇴계 이황이건 노무현이건 자기 조상님이건... 멘토, 롤 모델 정도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분명히 해두는 데... 그러니까 나는 대개 중간자적 입장 혹은 전략을 취한다. 학문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균형을 잡는 일에 자질, 소질, 달란트, 탤런트가 있는 것 같다. 나쁘게 얘기하면 박쥐, 회색분자, 벨도 없는 놈, 비겁하고 남 눈치만 보는 녀석이 되겠지만...
학자 'L'에 대한 내 태도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면 이렇다. 한국에서 그 양반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를 열심히 소개해 볼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그 학자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서 소개, 번역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어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부에서 광신적인 태도로 L을 대하는 모습이 나온다면 난 오히려 그들을 진정시키는 일을 내 역할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관련된 조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조직 내부에선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테지만, 근거없는 외부 비난 앞에서 조직을 옹호할 것이고... 사람, 조직, 사상, 견해 등에 대한 '평가'가 문제가 되는한 난 늘 균형적으로 보자는 입장이다. 비슷한 얘기지만... 노무현의 경우. 지나치게 저평가 되거나 무시 당하던 시절에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만, 이미 대단한 지지그룹들이 이제 큰 물결을 이루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저건 아닌데 하며... 중간자, 균형자의 입장의 뿌리엔 '다수의 힘'에 대한 근원적 거부감, 저항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 생각의 진동수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운동이다. 그 거부감의 대상은 독재권력이 될 수도 있고, 학생운동이 될 수도 있다. 그럴 일이 있을 리 없지만 혹시 나중에 내가 해석의 대상이 되어 '정광진論' 같은 게 나온다면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의 틀을 갖게 되었을까? 뭐, 틀릴 확률이 적은 설명 공식은 '유전적인 요인' + '환경적인 요인' = '나' 일 것이다.
미국 신용등급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군. 바로 이게 혼자만 보는 일기도 아닌, 여럿이서 보게 되는 '페이스북'도 아닌, 찾는 이 많지 않은 '내 블로그'에서 글쓰는 맛 아니겠는가? Danke dir!

2011년 8월 6일 토요일

이게 내가 일하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뭔가 열심히 하고, 뭔가 아는 것 같긴 한대... 문장, 문서 형태로 써 놓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지금 쓰고 있는 보고서 얘기다.
-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열심히 읽고 고민한다.
- 이때까지라면 마감시간을 넘기지 않고 써 낼 수 있다고 믿는 그 시간까지 그 짓을 한다.
- 물론 그 마감시간을 넘긴다.
- 마감시간을 넘기니 조급해지고 막상 써 놓은 것은 마음에 들지 않고...
- 그 동안 많은 고민을 한 게 문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 같고...
- 도무지 뭘 했나 싶은 거지
대충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으면 덜 억울할 텐데...
결론은...
(1 ) 아직 멀었거나... (내공)
(2)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더 쉽게 표현하는 보고서나 논문의 새로운 형식을 고민해 봐야겠다는...

2011년 8월 4일 목요일

점심먹고 산책을 하려다 그냥 들어와 앉는다. 덥기도 하고, 같이 나설 사람도 마땅찮은 탓이다 (이곳엔 산책문화가 없다ㅠㅠ 괜찮은 산책 코스가 있는데도...). 모니터 앞에 앉아 그냥 하릴없이 여기 저기 들쑤신다. 조금 전에 봤던 페이스북 또 보고, 방금 들어갔던 미디어 다음 또 들어가고... '공식' 점심인 1시까진 그렇게 해도 좀 덜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집중을 할 수 없어 인터넷 방황을 하면... 짜증나기 시작한다. 이중 짜증... 집중 안됨과 시간 허비에 대한...
여러 사람이 들여다보는 페이스북엔 이런 얘길 적기가 뭣하다. 하여 인적 드문 이곳에 그냥 토로하는 것.

다양성 관리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영향을 극대화 하자! 다양성 관리가 그런 걸 지향할 터이다. 다양성 관리를 하고 그런 개입이 긍정적 영향을 가져오기 위해선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 SERI 보고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 다양성 관리의 목적이 차이를 관리해서 새로운 통일성, '화학적 융합' 만들어 내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융합과 다양성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이기 때문이다.
통일성, 융합을 얘기하는 이들은 대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의 '정상화'가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거나 아니면 은연 중에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은... 정상이 아니어서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들... 그러면 장애인을 정상화하거나 관리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보다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 액션 플랜으로 연결되기 쉽다. 우생학, 인종청소가 그렇고... 다름을 그 자체로 인정하자는 것.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상태가 아니고 그저 다를 뿐이라고. 차이의 인정, 그 영역이 넓어질 수록 사회가 뒤죽박죽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각종 근본주의자들이다. 종교근본주의자 (이슬람이건 기독교건), 이데올로기 신봉자들 (우파건 좌파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