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음악에 진심이 담겨져 있어야 하고, 심지어 음악이 곧 자신이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어제 본 EBS 프로그램 중에서...). 신앙에 투신하는 목회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을 하는 사람도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투신해야 할 것이고, 그 메시지가 곧 자신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소명의식' 운운하는 낡은 얘기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참신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너무 억누르지 말고, 욕망해도 괜찮고, 즐겨고... 스스로 설득되고, 즐길 수 있어야, 몰입할 수 있고, 자신을 던질 수 있고,  그래야 남을 설득할 수도 있고, 메시지에 힘이 있고... 뭐. 그런 선순환 관계인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하는 게 강요되는 순간! 그것은 '소명' '부르심'에 가깝고 그것은 강박, 억압, 억누름에 매우 가까이 있는 상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석될 수는 있겠으나... 출발은 '소명'이 아닌 자기 설득, 몰입, 즐거움, 유희... 뭐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2012년 8월 22일 수요일

박근혜에게서 이명박 냄새가 난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대통령 당선시의 그 냄새가... 2mb씨에게 BBK니 전과 몇 범이니 떠들었어도 결국 '경제' 이 한 마디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듯이... 근혜 누님께 대해선 '장준하' '5.16 쿠테타' 같은 얘기로 비난해도 '미래'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다. 게다가 누님은 mb씨가 갖추지 못한 통큰 모습까지 보여주니... 이대로라면 결과는...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이운회 교수가 프레시안에 실은 글에서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을 깔끔하게 잘 요약해 놓아서  옮겨 놓는다.

"사회구성체이론은 1985년 <창작과비평> 57호에서 국가독점(國家獨占) 자본주의론(박현채)과 주변부(周邊部) 자본주의론(이대근)이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을 만큼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주변부 자본주의론이 패퇴하고 식민지반봉건론(NL)이 등장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론(PD)과 맞서는 상황에서 다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나온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이론(1987)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식민지(植民地) 반봉건론(半封建論)은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지주제를 토대로 하여 식민지 국가권력이 상부구조를 이루는 특수한 사회구성체라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말 동학 혁명(1894)의 구호를 보는 듯하다. 동학혁명의 핵심은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투쟁이다.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이촌향도(離村向都)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노동자인 한국 사회의 현실을 봉건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차라리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구성체 이론'은 다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은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혁명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식민지 반봉건론에 입각한 운동 세력들이 북한과의 연계와 협력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생존'에서 '존중'으로... (장은주)

지당한 얘기다. '존중'도 '인간 존중'을 넘어선 '생명 존중'이어야 할 것이다. 반려동물이건 갯벌의 생명체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작은 생명체까지 존중받는 사회에선 인간도 당연히 존중받을 것이기에... 인간의 생존 혹은 존중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들이 이미 충분히 희생했으므로...

또 다른 차원으로 '미래 세대 존중'이라는 개념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내 자식의 세대, 그 자식의 자식 세대가 어떤 환경에서 살게 될 지를 지금 결정을 내릴 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중의 관계는 '나-너'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우연히 마주치는 길위의 '동료' 운전자도 존중해야한다. 동료운전자를 'du'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자동차 같은 괴물은... 사용 자체를 줄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것' 보겠다고 너무 멀리 다닐 일도 아니다. 한 번눈요기하고 오는 아름다운 경치 속 생명체들보다, 출근길에서 늘 만나는 나무가 'du'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사람, 그리고 기타 존재하는 것과 맺는 관계를 '나-너'가 아닌 '나-그것'의 관계로 만드는 모든 매체, 체계, 절차, 메커니즘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성)'사회라는 괴물이다. 특히 합리적으로,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체계, 조직들이고, 특히... '대도시'이고... '익명성'이고 '비인간적'인 속도고...
좀 사회비판적인 얘길 페이스북에 쓰려다 움찔 그만뒀다. '위선적'이란 비난이 들리는 듯해서... 내가 알게모르게 '성인군자' 행세를 했나보다. (비판적) 지식인을 지향한다면 철저히 절제하며 스스로에게도 엄격하던지 아니면 속물근성을 일관되게 드러내던지 해야할 것 같다.

어디 지식인 뿐이랴...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독하지도, 그렇게 얼굴이 두껍지도 못해서 그저 상황에 맞춰서 눈치보면서 이런 저런 가면을 번갈아 쓰다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일관된 게...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기에... 위로라면 위로가 된다.

얼마 전에 읽은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본인의 도덕적 엄격함 때문에 자식들이 힘들어 했다는... 일관되고 엄격한 삶을 살아서 존경받는 사상가, 종교인들이 막상 가까운 식구들에겐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를 자주 본다. 역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고로... 내가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꼭 손해만 보는 건 아닐 거라는 점.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뭔지... 한 번 따져볼까나...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성내천으로 혼자 산책길에 나섰다가 다리 밑에서 우글대는 잉어떼를 보다. 뭘 그렇게 잘 먹었는지 포동포동 살은 올랐으나 그래봐야 지들의 세계는 이 얕고도 좁은 개천일 따름인데... 그 모습에 겉은 번지르르하고 말은 좋으나 실상을 보면 영락없이 창살없는 감옥을 살고있는 한 사람이 생각나서 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오호 애재라......
표는 못내고 티는 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되었다. 급기야 저녁엔 내겐 도움이 되질 않는 소식을 들었고... 나를 많이 배려해주던 분이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집에 와선... 항공권을 예약할 일이 있었는데... IT 강국 대한민국의 인터넷 거래 절차가 얼마나 허접한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분노하고 짜증내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아이폰이 왜 아이폰이고, 맥이 왜 맥이고, 스티브 잡스는 왜 스티브 잡스겠는가, 이 대한민국의 IT 전문가들아... 기계가 복잡해진다고 매뉴얼, 절차, 운용방식이 덩달아 복잡해진다면 도대체 그걸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냐고... 이 사람들이 정말. 국민들이 모두 IT 천재줄 아나... 복잡할수록 직관적으로... 맥 출신 기기들엔 매뉴얼이 따로 없다구요 이 사람들아.
열받아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님은 오늘도 쉽게 오실 생각이 없는지... 어영부영 시간 보내기가 싫어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시간은 벌써 2시 반을 넘기고...
오늘 하루가 좀 부실했으니... 잠이 들 때까지라도 뭔가를 해 볼 생각이다.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고...

2012년 8월 14일 화요일

"지식인은 권한은 없고 책임은 많이 느끼는 사람이다. 권한은 많고 책임은 별로 지지 않는 현실의 실권자들은 현실을 비판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보편적 관점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인은 비판적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말 앞에는 '비판적'이라는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다."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84쪽)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페이스북에서는 너무 진지해서 무거운 얘기는 큰 환영을 받지 못한다. 더군다나 아침부터라면... 하지만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무거운' 시가 있어서 잊기 전에 이곳에라도 기록해 두려한다. 요즘 '주야로 묵상'하고 있는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나 거기 서 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후략)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논문이건 책이건 페이스북에 남기는 글이건... 글이건 예술작품이건 간에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하다 못해 메시지가  없다는 메시지라도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그 메시지는 분명해야 한다. 그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나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 정보나 지식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이해시켜야 한다. 그게 한국 사회에, 사회학 담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알려주고 설득시키는 과정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 내가 읽은 리영희, 이원복, 박노해의 글에는 그게 있다. 리영희는 우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이성의 빛을 비추려고 했다. 남들은 알고도 모른 체 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어 세상에 대한 우리 인식의 균형을 잡아주겠다는 것이다. 이원복도 분명하다. 문화민족, 존경받는 민족이 되려면 남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선진국 뿐 아니라... 특히 지금까지 널리 다뤄지지 않았던 지역을 더 잘 알아야 한다. 발칸반도, 동남아시아, 중동... 박노해...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분쟁지역에 대해서, 그 곳의 삶에 대해서 알리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그곳에도 사람이었네... 메시지가 분명한 책을 한 권 더 추가해야겠다.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놀라운 책, 반가운 책이다. 거기에서 정수복 선생은 현대 한국이 갖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 '개인주의'에서 찾는다. 개인주의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고, 건강한 개인주의를 살리는 일이 왜 긴요한지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내 논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문화의 비극. 구조와 문화의 불일치.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는 기능적 분화라는 서구적 틀을 좇아가지만, 거기에 맞는 문화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너무 서구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불편한 진실이다. 부인할 수 없는...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한국 문화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구 중심으로 세계화된 문화가 외피를 이루고, 한국적 근대성이 만들어낸 문화가 속살을 이루는... 문화의 비극은 이 두 문화 사이의 갈등, 불일치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서구화, 서구적 근대화를 더 충실히 이행하면 문화의 비극이 사라질 것이라는 순진한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근대성 역시 문화적 비극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그것은 그 다음 과제인 것 같다. 한국에 필요한 문화는 대단한 게 아니다. 그야말로 상식적인 것들이다. 개인주의, 인권 같은... 한 마디로 '상식' 혹은 '기본'. 기본이 갖춰져야 비로소 다양성, 복지, 윤리, 책임 등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상식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식은 출발점일 따름이다. 하지만... 출발선에 제대로 세우는 작업을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공정하게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게임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라는 게임, 기능적 분화라는 게임... 착한 혹은 공정한 자본주의, 자본가...

궁극적으로는 게임의 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지만...  내 논문에서 그런 얘기까지 꺼낼 수는 없는 일.

여하튼 한국은 정상 근대성, 정상 자본주의의 길을 밟고 있다. 정상 자본주의를 이르러야... 그 다음 단계를 고민할 수 있나? 반드시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성만 놓고 보면... 하지만 역사적 경험을 놓고서 판단할 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남이 밟은 경로를 밟고서... 충분히 소화한 이후에라야... 제 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2012년 8월 9일 목요일

공감... 共感...

낯선 사람 혹은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서로 잘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 몇 마디라도 덧붙여야 할 때... 이 어색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요긴한 얘기거리는? 그렇다... 고것은... 바로... 날씨.
날씨의 영향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범위 내에선... 날씨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또한 날씨처럼 몸의 감각기관을 이용해서 느끼는 일들이라면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몸... 몸은 그런 것이다.
오전 내내 남 일을 대신 해주었다. 아니... '대신'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내게 부탁한 일이니까... 같은 공간에 있으니 이런 일 정도는 도와줘야한다. 그에게 내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굳이 그런 계산을 하지 않더라도... 도울 수 있으면 도와주는 게 맞으니까... 좀 덜 노골적으로 계산을 해 본다면...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도 이 공간에서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에휴. 그놈의 잔머리 굴리기...

아무리 잔머리를 굴리면서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주더라도... No!할때는 No!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정직한 일이라면 거절해야 하고, 분명히 상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그것도 거절해야 한다. 그때문에... 불편해지더라도...

이제 내 공부를 해야 한다. 끊어진 리듬을 다시 찾기으려면 워밍업이 필요하다. 지금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워밍업이고... 내가 선호하는 다른 방식은... 컴퓨터 문서폴더나 책상을 정리하는 일. 아니면... 좀 더  가벼운 책을 읽는 일. 그래서 내 책상엔 항상 가벼운 책들이 있다. 요 며칠은... 가로세계세계사 3권. 너무도 사랑스러운 만화책이다. 이원복 선생을 다시 평가하게 만든... 소장하고 싶은...

한국에서 살면서 좋은 점이다. 한국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출판업자들은 어렵다고 하소연하던데, 독자로서 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뿐이다. 한국어로 나온 좋은 책들이 많다. 무척... 무척... 행복한 고민, 비명...

2012년 8월 8일 수요일

이 아침... 왠지... 집중이 잘 안된다.
남들은 여전히 덥다고 하지만... 난 한여름의 기운이 꺽이는 낌새를 예민하게 포착해내고선... 심지어 그 속에서 가을 냄새까지 맡아 내고선... 하여... 내 마음 한 켠은 벌써 서늘해지는 것이다. ㅠㅠ
어쩌랴... 대안이 없다 대안이... 다른 방법이 없다 방법이... 이런 감상(感傷)도 사치인 것을...

요즘 오며가며 지하철에서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고 있다. 아니... 묵상하고 있다. 구구절절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예를 들어...


무엇이 남는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그리하여 다시
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
나에게 사랑을 빼 보라
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

그래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2012년 8월 7일 화요일

근대사회의 구조를 혁명적으로 (영성 혁명, 사랑의 혁명) 전복시킬 수 없다면, 가능한 대안은 기존 구조가 '영성' Ich-Du 관계를 지향하고 그것을 지지하도록 고쳐 쓰는 것이다. 과학은 진리탐구를 위한 인간의 지적 노력이다? 그것이 영성을 지지하지 않는한 그런 과학은... 글쎄... 물론 목적지향적이지 않은 연구의 결과가 긍정적 적용으로 이어진 바도 적지 않지만... 어쩌면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선... 연구활동을 지나치게 영성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제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서 다시 떠오르는 질문은...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는 한 방식을 난 Ich-Du 관계에서 찾긴 했지만... 더 고민할 문제다.

여하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환경, 인간과 기술, 인간과 체계와의  관계가 생명, 영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구조화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불평등 구조의 재생산, 상업화 경제화 경향, 소외, 배제 같은 현상이 막아야할 혹은 치유해야할 대표적 현상이다. 윤리, 특히 제도화된 윤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윤리는 결국 기득권, 소수 특권층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것 아닌가? 윤리는 한편으로는 발전주의, 성장주의에 대한 성찰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과장된 윤리 주장도 별 도움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하버마스처럼 담론윤리... 내용 없는, 지배 없는 자유로운 토론, 담론이 가능할까?
복지국가가 그런 것처럼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에 완벽한 윤리가 있을까. 어설프더라도 과학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리고 여전히 과학을 지속하기 위한 목적에 경도되어 있더라도, 그런 논의를 통해서 윤리가 다양해지고, 일상과 더 밀접해지면 나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사실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면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윤리'를 수리해서 써 보자고...
'Ich-Es'와 'Ich-Du'의 구분을 중심으로 사회, 근(현)대사회의 작동 원칙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사회에서는 Ich-Es 관계가 지배적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만, 그 만남은 Ich-Es인 경우가 많다. 가게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심지어 직장에서 매일 얼굴을 보는 동료들끼리도 '직장동료'라는 가면(persona)를 쓰고서 관계를 맺으니까. '도시'라는 구조는 Ich-Es 관계에 친화적이고, 체계 합리성, 체계 이기주의를 지니는 기능체계로의 분화라는 근대사회의 기본 구조에서 인간은 고작 환경에 위치할 뿐이다.  '근대사회' (특히, '도시')는 인간을 연료로 쓰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다. ('기능적 분화'와 '도시화'의 친화성. 도시의 익명성과 기능체계에서 인간의 원천적 배제와 유사).
이는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구분하면서 얘기하려는 바, 즉 게마인샤프트의 상실이고,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고향 상실(Heimatlos)이고, 하버마스가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ebenswelt)를 구분하면서 얘기하려는 바에 따르면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이고...
매체(media)의 발달은 Ich-Du 관계에 대해선 대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맺는 관계가 Ich-Du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감 같은 원초적 매체 없이는 관계 맺기가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인간이 생래적으로 타고난 매체를 제외하면... 그런 것 같다는 말씀. 근대의 대중매체, 최근의 신미디어들은 Ich-Es 관계의 폭발적 확산에 기여하고 있고... 물론 인위적 매체들도 자-알 쓰면 Ich-Du 관계의 형성, 영성, 거룩함 등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알 쓰면...

체계, 기능체계, 게젤샤프트가 그나마 게마인샤프트적인 속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경우들이 있다. 그걸 어느 정도 성공한 지역을 우리는 복지국가, 선진국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Ich-Es 관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서 가능했다. Ich-Du 관계는 사실 - 부정적 의미로 - 봉건적, 전근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신비적, 정서적 관계... 근대사회의 질서에선 Ich-Du 관계를 강조하면... 오히려 전체적으론 Ich-Du 관계에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근대적 질서에선 Ich-Es 관계가 깔끔하게, 상식적으로 잘 굴러가는 것이 오히려 Ich-Du 관계를 회복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한국에선 Ich-Es 관계를 상식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다.
궁극적 과제는... Ich-Du 관계를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는 근대적 질서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킴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작은 규모에선 가능하나, 사회 전체, 특히 세계사회를 생각한다면... 실현 가능성은 뚜욱 떨어진다. 그 앞에선 복지국가, 선진국들도 크게 앞서가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지금 한국에서 시급한 과제는 분명하다. Ich-Es 관계를 제대로 세우는 일. 그리고 가능한 Ich-Du 관계를 중심에서 놓지 않기...

Ich-Du 관계에서 '평등' '자유' 같은 문제는 어떻게 이해될까? (Ich-Du 관계를 '영성이 충만한 관계'로 이해하자. 내 식으로...) 아마.. 평등, 자유 같은 개념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줌을 통해서, 베풂을 통해서 받는 그런 관계 아닌가? 아마 '선물(物)의 경제학'이 그런 얘기 일 것이다. '권리' 같은 것도... '권리'는 Ich-Es 관계에 적합하다. 계산이 분명해야 하므로. 인권 등 각종 권리가 중요하고, 특히 약자의 권리를 법과 행정력으로 보장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깔끔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Ich-Es 관계 정립을 위해서 그렇다. Ich-Du 관계라는 차원에서 보면 한계가 있다는 말씀.

Ich-Es 관계를 기초로 삼는 근대사회가 이루어 낸 긍정적 성과가 적지 않다. Ich-Du 관계로의 회복은 그런 성과를 긍정적으로 계승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퇴행적 혹은 문명도피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미국 아미쉬(Amish) 공동체처럼...  하지만 Ich-Es와 Ich-Du는 근본적을 다른 프레이밍, 혹은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제대로 접목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런 주제에 관해서 다양한 연구가 나와야 할 것이다.
괴테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Wer lange bedenkt, der wählt nicht immer das Beste.“

어떤 이가 이 말을 '장고 끝에 악수둔다"라고 아주 상쾌하게 번역했다.

이 아침... 논문 때문에 여러 모로 불안한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말이다. 아픈 곳이 찔리는... 여러 갈래 길을 다니다보면 최선의 길을 찾겠지 생각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한 자리에 서 있는 듯한... 그냥 좌고우면하지 않고 처음 생각한 길을 쭉 갔더라면...
하지만 그런 옵션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내게 있어서 아주 낮다. 왜? 그러지 않는 게 나고,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긍정적인 결과를 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내 정체성을 포기하는 변신을 시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잃을 수 있는 것을 계산해 보면 답은 나온다.
여하튼... 그래도 이제 bedenken은 참으로 lang, lang했다.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넘친다. 구겨넣어서라도, 주물주물해서라도 뭔가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
관심사를 다룬 영어 서적을 주문하려다 생각을 바꿔 먹었다.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학문과 관련된 책을 주문하지 않으리라... 더 넓히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서 정리하리다. 그리고 안철수가 했던 것처럼... 내 책상을 깨끗하게 치우고서 다시 시작하리라.

2012년 8월 6일 월요일

이슬람은 7,8세기를 거치면서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해 나간다. 이처럼 짧은 시기에 이슬람이 넓게 퍼진 것은 모든 종족이 형제가 되는 이슬람 공동체의식으로 인해 차별대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로세로세계사 3권. 89쪽). 어쩌면 이슬람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이슬람 밖)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변화 앞에서 너무 쉽게 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변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래 결론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능적 분화를 유지한다... 체계통합인데... 그게 지금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그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가? 그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물론 그 이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여러 분야들이 독립적, 자율적 성격을 띠게 된 건 분명 역사적 사실이긴 합니다. 종교나 정치 혹은 경제 등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합에 대해서 다른 체계들의 독립성을 갖게되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과학, 예술, 언론의 독립 등등. 기능체계의 자율성 유지는 대개 체계의 지배적 조직이나 지배적 역할 담지자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혹은 그 핵심적 역량을 소비할 수 있는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와 말입니다. 체계와 인간의 관계는 그러니까 사실 매우 불평등한 것입니다. 사회통합 혹은 포함/배제 논의가 그런 점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

2012년 8월 3일 금요일

"그래서 나의 결론은, 근대성의 핵심인 '기능적 분화'는 성과과 한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성이 이룬 성과의 열매만을 따먹으면서 한계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계를 극복하겠다고 기능적 분화라는 대원칙을 근본적으로 흔들 경우 -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지만 -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대안은 기능적 분화의 틀을 유지하고, 그것이 가져 온 장점을 살리면서, 개인화, 개인 이기주의, 체계 이기주의, 소외, 배제, 기대 인플레이션, 환경문제 같은 기능적 분화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여러 시도들을 하는 것입니다. 복지국가가 대표적인 그런 장치일 것이고, '제도화된 윤리'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얘기하는 경제민주화도 그런 것이라고 불 수 있겠지요." (리영희의 '대화'를 흉내내 봄 ^^)
리영희 '대화'

"나의 결론은, 인간의 이기심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물적 속성 그 자체이며, 그런 속성을 제도나 교양교육을 통해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구한 속성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었어. ... 자본주의는 인간의 속성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법과 제도로, '물질적' 생산을 극대화시켰고 그것으로 승리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인간과 인류의 진정한 승리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절반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지요." (683 - 684쪽)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는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제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 폭력주의 극심한 빈부격차 범죄 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지요" (687쪽)

존경받는 아름다운 나라

리영희 '대화'

"나는 통일된 국가가 반드시 '강대한 국가'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군사적으로 막강한 국가보다는, 평화지향적이고 주변국가들과 협조하면서 전쟁 위험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99쪽)

이원복 '가로세로 세계사'

"'나는 잘사는 부자 나라, 힘이 센 나라도 좋지만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 선진 대한민국은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여야 한다고 믿는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나라는 세계를 품어 안고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한 국민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들이 21세기 세계를 이끌고나가기 위해서는 세계를 알아야 하고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로세로 세계사'를 시작하는 가장 큰 이유다" (서문)

김구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武力)으로 정복(征服)하거나 경제력(經濟力)으로 지배(支配)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리영희의 '대화'를 읽으면서 눈에 좀 거슬리는 부분은 말하자면 '자기 자랑'인데 좀 심한 편이다. 특히 어학실력, 국제적 감각 등에 대해서... 다른 부분에선 겸손한 양반이...
의외였는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든 부분은 미국에 대한 태도..
"나는 미국의 일반적 성향으로서 흉악한 그 국가적 체질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그들이 크고 작은 모든 시도에서 일사분라하고 완전무결한 능력을 갖춘 집단이나 국가는 아니라고 생각해"(p.536)
미국의 한국에 대한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서 국내 정치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듯한 대담자 임헌영에게 타박을 주면서 한 말이다.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명저라면서 거듭 추천하고 있다.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급 솟는다.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확실히 '거룩함'인 것 같다.
'거룩함'은 '돌아 봄'이고 '거리 둠'이다.
돌아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주는 것이다. 그런 여지,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기대, 정보, 지식, 욕망의 인플레이션은 근대의 일반적 속성이기 때문에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말씀, 신학, 찬양 등이 인플레이션... 세상, 세속과 거리를 두도록 공간을 제공해줘야 할 교회에서도 자신들의 만들어 내는 정보, 지식, 음악으로 꽉 채워 놓는다. 교회 안에서 성찰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을까...
세일기간 백화점, 토요일 오후 마트처럼 바글바글 거리는 교회... 천정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를 통해서 쩌렁쩌렁 울리는 찬양 소리...
여백이 필요해... 공간히 필요해...

Anspruchsinflation

기대가 충족되면, 또 다른 기대가 생기고, 기대에 대한 기대가 생기고... 그럴수록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더 많아진다는 불편한 진실, 기대의 역설... 기대는 기대를 낳고, 더 많은 기대를 낳고... 기대 인플레이션은 근대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켜지 않는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모름지기 어떤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매진할 때가 좋은 법이다. 그런 분명한 기대가 있을 때가 좋은 법이다.
'기대'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은... 근대적 질서 속에선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아니... 기대를 줄이거나 기대를 달리 이해하고자 하는 '기대'조차도 커진다. 그것 자체가 새로운 '시장'으로 떠 오르고 있으니...
'기대'는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욕심' '욕망' '가치'이기도 하다. 반드시 물질적 욕망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더 생태적으로, 건전하게, 욕심을 줄이면서 살기... 그것도 하나의 기대고 욕심이다.
'기대'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문제는... 기대가 비대해질수록 만족은 더 멀어진다는 점. 그리고 기대와 기대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점... 어떤 기대를 먼저 충족시켜줘야 할까? 사회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기대는 억누른다고 쳐도 (현실적으로 그런 기대가 줄어드는 것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그런 기대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억누르기... 그 결과는 '이중적 태도' '눈가리고 아웅' 등으로 나타날 때가 많지만...) 정당한 기대가 많아지면서 정당한 기대 간의 갈등이 더 자주 등장한다.
한국 사회가 갈등이 많아지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들 때문이다. 정당한 기대 간의 갈등... 다양한 기대...
생명윤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고...
줄기세포연구는 한편으로 치료 가능성을 부풀리면 기대치를 높인다. 초기 생명을 좀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것 또한 정당한 기대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이 '윤리적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선진국에 대한 기대'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고전 10:12)

일어서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가 오히려 쉽다. 한 번 서고 나면... 선 상태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거나 다시 넘어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그랬고,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인권, 생명윤리 등이 그렇다. 민주화를 목표로 삼을 때는 적도 분명했고, 지향해야 할 바도 분명했다. 하지만... 87년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 상황은 더 혼란스럽다.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도 시작 단계에선 어렵지 않게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 워낙 배제되던 분야라서 적어도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는 정당한 일로 여겨졌다. 시간이 흘러서... 그런 운동도 제도화되고 자리를 잡으면...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런 저런 삶의 영역에서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정당성, 공감대를 확보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리가 잡힌 이후에는... 분명한 목적을 지향하던 시기라면 무시되었을 사건들이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민주화 세력, 시민단체의 도덕성 문제.

2012년 8월 2일 목요일

taming modernity through spirituality

영성, 감성, 공감 등이 중요해진다면서 미래는 영성/감성/공감의 시대다! 라는 주장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런 견해는 지금은 자주 쓰이진 않지만 80년대 말 이후 오랫동안 유행했던 '포스트모던 사회'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근대는 이성적, 개인중심의 시대였고, 탈근대는 이성에 반대되는 감성, 영성, 공감 그리고 집단, 공동체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시대라는...
루만에 따르면...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구분은 구조적 차원과 문화적/의미론적 차원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애기하는 포스트모던적 새로움은 대개 문화적 차원에 대한 것일 뿐, 기능적 분화 같은 근대사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본질적 단절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던적 특징은 근대의 구조적 진화가 진행되면서 그에 따른 결과, 특히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 예민해진 '근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개인화, 합리화 경향과 집단 중심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감성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경향은 서로 배척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이라는... 그 둘은 앞으로도 쭉 공존할 것이다. 시기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겠지....
그러니 포스트모던 사회 테제가 더 진지하게 다뤄지려면 문화적, 의미론적 차원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과연 근본적 변화가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영성, 감성, 종교, 공감, 새로운 공동체 지향... 같은 것으로 안된다는 것.  물론 구조적 차원의 변화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으로 네트워크사회! 탈분화사회!
기능적 분화가 지배적 원칙이 아니고, 영성이 사회구조적 측면까지 관통하면서 기능적 분화라는 특징을 전복시켜야 비로소 탈근대적 영성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성, 공감 등에 대한 관심은 근대화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어떻게든 처리해 보려는 문화적 안간힘이다. 영성이 탈근대사회로의 전환을 보여주기는 커녕, 근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용해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영성의 자본주의화 현상 (capitalization of spirituality). 영성에 대해서 접하려면... 교회에 출석하던지(종교 조직), TV 채널 등을 통해서 듣던지 (매스미디어), 책을 사보던지 (출판시장), CD를 든던지 (음악시장)... 어짜피 근대적 구조를 통해서 영성은 전파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본적이고 혁명적인 영성사회는 탈자본주의적, 탈시장주의적, 탈제도적...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가 확산을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근대적 성과와 그 성과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서...
아니면... 기존 근대적 질서의 작동 방식을 최대한 '영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던지... 예를 들어 관련 책들이 더 많이 팔리게 한다던지, 영성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은 방송프로그램이 많이 제작되던지, 영성의 원칙에 부합하는 제품들이 시장에 더 많이 나오게 한다던지... 그런 경우 그것은 탈근대적이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근대를 길들이는 정도...
 


"이제 이 시대는 '부흥'의 시대가 아닙니다.
부흥을 외쳐야 할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모토를 가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케 되는 '거룩'에 힘써야 함을 말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거룩'의 때입니다. 
회개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한 동안 정기적으로 찬양 영상을 봤던 마커스, 그 마커스 찬양시간에 설교하시던 마커스 지도목사님. 검색하던 중에 우연히 유투브에서 발견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부흥'의 시대가 아니라 '거룩'의 시대라는...
하지만... '거룩'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사회의 거룩? 거룩한 사회? 그건... 기대하기 힘들다.
니버가 얘기했듯이 인간은 도덕적이더라도 사회는 비도덕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씁쓸한 진실...

2012년 8월 1일 수요일

근대적 질서의 핵심은 신분제도에서 해방된 인간들이 사회적 질서 자체에서도 해방되어 사회의 환경으로 밀려난 일이다. 사회는 이제 인간이 아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재생산으로 지속되는 질서로 이해된다 (cf. 영화 '매트릭스'). 인간의 물질적, 실존적, 정신적 상태와 상관없이 사회는 지속되는 어떤 면에서는 '끔찍한' 그런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루만이 그려내는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물론... 그런 질서라도 제대로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의 윤리, 규범, 규칙, 상식, 원칙 같은 것들이 마련된다. 인권이 대표적이고... 하지만 그런 가치들은 대부분 추상적이어서 그 자체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들이지만, 실제로 적용하려고 하면 어떤 가치를 더 중시하느냐 등의 문제를 야기하는 등 뚜렷한 한계를 보인다. 여하튼... 그럼에도 이 상태로의 진화되는 과정 자체는 그 이전의 야만적인, 폭력적인 상태에 비하면 진보라고 부를만 하다. 여전히 야만적, 폭력적 상황이 지배적인 지역들이 아직 많이 있고, 그 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기술한 현대적 질서는 심지어 '이상향'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적 질서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인간의 소외 문제, 배제 문제, 인간의 정신, 영적 문제를 반영하지 못하는 질서... 그렇다고 근대 이전, 다시 주술화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비록 전근대의 부정이 근대라면 근대의 부정은 전근대와 유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저 회귀가 아닌 새로운 차원일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를 상상하는 견해를 통틀어서 탈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적인 버전들은 좀 심심하고, 겸허하다. 좀 과감하게 탈근대를 '영성의 시대'로 정의하면 어떨까. 그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도...
영성의 시대는... 근대 사회학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회학 자체가 근대적 틀을 벗어나지 않은 한... 아쉬운대로 근대 사회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영성의 시대로 문명사적 전환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근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는 합리화, 특히 체계합리화...
근대적 질서의 단초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가치, 감성, 공감, 인정 같은 요인들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언급하는 견해 정도...
일단... 과학과 관련해서 가치, 책임 등 정서적 측면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견해는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혼란을 야기한다. 왜? 가치의 다양성을 이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윤리는 그런 혼란을 처리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특히 제도화된 윤리, 법 등등.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임시방편일 뿐이다. 쉽게 윤리의 사소화, 형식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연구의 결론은 딱 여기까지!]
영성을 포함하는 그리고 살리는 과학 관련 질서는 무엇일까? 지금의 과학은 완전히 재편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기업화된 과학, 의학... 의료적, 기계적, 개인주의적 생명 이해...
대안적 과학, 의학이 필요하다!! 영성이 깃든 그런 의료, 의학, 과학!! 근대적 질서를 뛰어 넘는.... 기능적 분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1) 리영희의 '대화'와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는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고, 그 언저리에서 내게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다.

한반도, 즉 남한, 북한의 문제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남북한 현대사는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남북한 민중이 겪었던 고초의 크기가 과연 동남아시아나 발칸 반도 민중들의 그것보다 더 컸을까? 그런 면에서 난 예수의 고난을 적용해서 한민족의 고난을 풀이하던 함석헌 류의 민족주의에도 그닥 공감하지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한민족이 문명사의 전환을 이끌 선두주자가 될 거라는 김지하 류의 호들갑도 별로고... 어짜피 지금까지의 문명사도 어느 한 두 민족, 국가가 만들어 낸 것만도 아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주도하는 국가가 없진 않았지만 그건 특히 지역적 차이가 크고 지금 같은 수준의 세계적 연결망이 구축되기 이전 이야일 뿐, 앞으로는 어느 한 두 민족이나 국가가 세계를 주도하기는 힘들 것이다. 중국을 자주 얘기하던데...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중국의 부상을 가장 경계하는 미국이 특히 경제적으로는 중국가 가장 긴밀하게 엮여 있다고 하니...
물론 민족, 국가라는 단위는 오랫 동안 중요하게 남아 있을 것이니, 남한과 북한, 한반도의 이 두 민족국가를 잘 꾸려가야 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나라, 존경받는 나라가 되면 좋을 것이다. 요샌 북유럽 국가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디가나 예외적 사건들, 인물들, 집단들은 있는 법이니까... 몇몇 불행한 사건들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남한이나 북한이 그런 정도로 시대를 선도하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되면 좋을 것이다 (cf. 김구). 상식적인 나라, 합리적인 나라, 공존 공생하는 나라, 공존 공생엔 사람 뿐 아니라 동물, 자연환경까지도 포함할 줄 아는...

(2) 하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 왜? '사회'는 그런 합리적인 상태, 공존 공생의 상태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속가능한 '사회'), 인간은 그런 상태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회학과 인문학이 갈라진다. 사회학자들이 얘기하는 '근대 사회'는 그야말로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어 버렸다. 그 기계가 큰 탈 없이 돌아가도록 분석하고 기름칠하는 것이 사회학자, 정치가들의 역할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인간에겐 그 이상이 필요하다. 생존, 인정, 복지, .... 이런 것이 채워지면 만족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영성!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져야 할 지도... 영성은 좀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사랑, 공감 같은 정서적인 면을 포함하는... Ich-Du의 관계... 이 경우... 어쩌면 우선순위를 바꿔야 할 지도 모르겠다. 영적 갈급이 채워지는 그런 사회적 질서로... 영성을 정점으로 해서 사회질서를 재편하는 게 정말 근원적인 혁명일지도 모르겠다. 

(3) 영성을 정점으로 한 사회 질서는... (이것을  Ich-Du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을 지도...) 현대 사회학의 학문적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대안은... 그런 점을 전제로 삼고서, 그러니까 괄호치고 나서 그 나머지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의 경우... 현대 스포츠의 관계를 Ich-Du의 관계로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쪽에 응원하는 관중, 대중, 팬이 있고, 다른 쪽엔 그 기대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선수, 팀이 있는... 또 다른 한 쪽에 그 관계에 빌붙어서 사는 스포츠 언론, 관련 운영 조직 등이 있는... 그런 스포츠는 Ich-Es의 상태를 조장하니까... 
과학의 경우...  Ich-Du 관계를 지향하는 그런 과학! 과학 윤리도 Ich-Du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지금은 윤리도 Ich-Es 관계를 지향하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그런 것이다. 좀 더 일상적인 도덕 역시 Ich-Es 관계에 지배된다. 대중매체, 정치적 맥락 등에 의해서... 그런 점에서 더 일상적인 그런 가치 판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과학 윤리, 그 중에서도 생명윤리에 대한 연구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을 둘러싼 윤리적 혹은 도덕적 접근에서 드러나는 Ich-Es 관계를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을 지도... 다시 말해 불편한 진실!
아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야구를 보지 않기로 한 중요한 이유는 선수들에 대한 내 태도에 나 스스로 놀라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선수들, 감독 등에 대해서 미움이나 - 심지어 - 분노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 마음은 도대체 뭔가? 도대체 그들이 내게 뭘 잘못했다고... 관심이 있으니까 미워한다? 그런 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설명은 Martin Buber의 '나-너', '나-그것'의 구분이었다.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Grundwort) '나-너'의 '나'이거나 근원어 '나-그것'의 '나'일 뿐이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것'일 뿐이다. ... 경험으로 말미암은 인식은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사람과 세계와의 '사이'(Zwischen)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라는 말을 건넬 때 사람은 관계(Beziehung)의 상황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관계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역이 셋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공동 생활이다. ... 둘째는 사람과의 공동 생활이다. ... 셋째는 정신적 실재(geistige Wesenheiten)와의 공동 생활이다. 

부버에 따르면 나를 존재케 하는 상대로서 '그것'과 '너'는 반드시 '사물' '사람'으로 대칭될 수 있지 않다. 그러니 "만일 나에게 그럴 의사가 있고 또 은총의 개입이 있을 때에는, 나는 나무에 대한 나의 관찰을 계기로 하여 나무와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이에 이르면 나무는 내게 대하여 '그것'이기를 그치고 '너'의 그 독존성(獨尊性, Ausschliesslichkeit)으로 나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너'의 관계가 종국에 다다르든가 혹은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될 때에는 '너'는 하나의 대상으로 화하고 만다". 이런 경우를 '그것化한 인간'(Es-Menschenheit)'이라고 표현한다.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 경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Es-Menschenheit'! Du에 대해서 갖는 분노와 Es에 대해서 갖는 분노는 '질'과 '격'이 다르다.

운전할 때 내가 분노를 느끼는 운전자들도 전형적인 Es 혹은 Es-Menschenheit다. 운전자 Es가 운전자 Du가 되로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앞차가 너무 꾸물거려서 빵빵거린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승용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는데... 애기를 안고 있는 여인네. 약간 슬픈 듯한 그녀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이 운전하는 걸 모를 일 없건만 도로 위에서 마추치는 차량들은 그저 Es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내가 기대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분노의 대상으로 쉽게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나의 상대가 Du인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은 Es-Menschenheit다. 그게... 현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물론 다른 면에서 현대에서 비로소 누리게 된 열매도 많이 있지만...  현대의 특징인 합리화, 분업, 기능적 분화 등은 모두 인간을 원칙적으로 'Es-Menschenheit'로 상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런 현상을 개인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려면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얼굴없는 소비, 생산, 거래의 주체들이 있을 뿐... TV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그 존재를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나에게 대부분 'Es'일 뿐이다.

이런 양면성,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있을까? 야구야... 안 보면 되지만... 자동차를 포기할 수도,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고... 정말 Ich-Du 관계에서만 살려면... 모두가 자급자족하는 조그마한 공동체 생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혁명적 변화는 소수에게나 가능하니... 현대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가능한 Ich-Es 관계를 줄이고 Ich-Du 관계를 늘리는 수밖에... 티비에 얼굴 비치는 스타, 연기자들을, 프로야구 선수들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동료' 운전자들을... 'Du'로 여기고서 말을 건네는 수밖에... 
리영희, 이원복의 책을 보면서 많이 놀란다. 해방 이후 세계 정세 속에서 남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비로소 느끼기 때문이다. 남북한 현대사도 참 기구하지만...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현대 역사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다. 동남아 국가들은 가로세로 세계사 1권이 다루는 발칸반도 국가들에 비해서 인구수가 훨씬 많다. 근현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선... 그닥 흥미로운 얘기들이 없다. 세계사적, 혹은 지역사적 임팩트가 적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확보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얘기가 달라진다. 탈식민지 과정도 지극히 어려웠지만, 그 이후 독립국가로서 국가의 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도 그야말로 어려웠다. 대부분 군부 독재 등을 겪었고...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한의 경우 적어도 한국전쟁 이후엔 좌우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다. 북한의 존재 때문에 좌파의  싹은 애초에 자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갈등의 핵심은 군부독재에 대한 민주화 운동 정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좌우대립의 역사는 극적이다. 물론 순수한 좌우 이념대립이 아니라 인종간, 종교간, 계급간, 식민지 경험 등이 섞여서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이었지만...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유럽 국가들의 만행도 곳곳에 등장한다. 여하튼...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 흥미로운 사실들을 두서없이 몇 가지 정리해 놓는다.

- 인도네시아 1965년 9.30. 쿠테타 이후 수하르토 정권은 40여만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함. 대부분 자바, 발리 주민. 수하르토의 이념 판차실라, 인노네시아식 민주주의.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사실 그리 독창적이지 않다는... 아, 실제 박정희는 인도네시아에서 1972. 10월유신 모델을 찾았다고 하네.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수하르토의 판차실라.
- 필리핀은 동남아시아 동쪽 끝, 섬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종적으로 복잡하고, 종교의 영향을 덜 받았다. 종교, 강한 왕조에 대한 기억처럼 사회를 묶는 힘의 부재로 동남아시아를 주름잡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16세기 초 에스파냐의 침략 이후 필리핀 역사가 시작되고 가톨릭을 믿게되어 현재 인구 80% 이상이 가톨릭 교도.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빌려 필리핀이란 이름을 붙임. Felipe -> Filipin -> Philippines. 1898 에스파냐로부터 독립 선언, 미국-에스파냐 전쟁, 1901 미국 식민지. 1935. 필리핀 연방정부. 1965. 마르코스 취임. 마르코스의 독재는 경제를 망가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