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올린 설명은 Martin Buber의 '나-너', '나-그것'의 구분이었다.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Grundwort) '나-너'의 '나'이거나 근원어 '나-그것'의 '나'일 뿐이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것'일 뿐이다. ... 경험으로 말미암은 인식은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사람과 세계와의 '사이'(Zwischen)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라는 말을 건넬 때 사람은 관계(Beziehung)의 상황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관계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역이 셋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공동 생활이다. ... 둘째는 사람과의 공동 생활이다. ... 셋째는 정신적 실재(geistige Wesenheiten)와의 공동 생활이다.
부버에 따르면 나를 존재케 하는 상대로서 '그것'과 '너'는 반드시 '사물' '사람'으로 대칭될 수 있지 않다. 그러니 "만일 나에게 그럴 의사가 있고 또 은총의 개입이 있을 때에는, 나는 나무에 대한 나의 관찰을 계기로 하여 나무와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이에 이르면 나무는 내게 대하여 '그것'이기를 그치고 '너'의 그 독존성(獨尊性, Ausschliesslichkeit)으로 나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너'의 관계가 종국에 다다르든가 혹은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될 때에는 '너'는 하나의 대상으로 화하고 만다". 이런 경우를 '그것化한 인간'(Es-Menschenheit)'이라고 표현한다.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 경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Es-Menschenheit'! Du에 대해서 갖는 분노와 Es에 대해서 갖는 분노는 '질'과 '격'이 다르다.
운전할 때 내가 분노를 느끼는 운전자들도 전형적인 Es 혹은 Es-Menschenheit다. 운전자 Es가 운전자 Du가 되로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앞차가 너무 꾸물거려서 빵빵거린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승용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는데... 애기를 안고 있는 여인네. 약간 슬픈 듯한 그녀 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이 운전하는 걸 모를 일 없건만 도로 위에서 마추치는 차량들은 그저 Es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내가 기대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분노의 대상으로 쉽게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나의 상대가 Du인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은 Es-Menschenheit다. 그게... 현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물론 다른 면에서 현대에서 비로소 누리게 된 열매도 많이 있지만... 현대의 특징인 합리화, 분업, 기능적 분화 등은 모두 인간을 원칙적으로 'Es-Menschenheit'로 상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런 현상을 개인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려면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얼굴없는 소비, 생산, 거래의 주체들이 있을 뿐... TV나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그 존재를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나에게 대부분 'Es'일 뿐이다.
이런 양면성,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있을까? 야구야... 안 보면 되지만... 자동차를 포기할 수도,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고... 정말 Ich-Du 관계에서만 살려면... 모두가 자급자족하는 조그마한 공동체 생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혁명적 변화는 소수에게나 가능하니... 현대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가능한 Ich-Es 관계를 줄이고 Ich-Du 관계를 늘리는 수밖에... 티비에 얼굴 비치는 스타, 연기자들을, 프로야구 선수들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동료' 운전자들을... 'Du'로 여기고서 말을 건네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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