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 2008)

음. 이런 책이 나온 걸 모르고 있었다. 한겨레 21 최근호가 2008년 상반기 인문교양서 중 하나로 이 책을 꼽은 걸 보고서야... (참고: 지난 2월 한겨레 서평). 그런데 기사 제목이 좀 '거시기'하다: "한국 지식사회여, 베버한테 배워라". 음. '한국 지식사회'가 뭔가? 기자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 볼까... (내 맘대로). '한국사회여...' 하려니 너무 포괄적이고 '한국 지식인이여..'라고 하기엔 베버의 충고를 들어야 할 사람들을 너무 한정시키는 것 같고.. 기자의 조어능력을 발휘해서 나온 게 '한국 지식사회여....'아닐지... 어쨌든 이 개념이 풍기는 느낌이 전달되긴 하는데 나름 그 정의에 대해서 진지한 학술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식사회'란 개념을 그렇게 비틀어서 쓰는 건 기자가 바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학습능력향상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임을 왜 모르시는지... 그런데 기사를 좀 더 살펴보니 기자만 나무랄 일도 아닌 것 같다. 기사인용: "그런데 지적 거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한다고 해도 21세기 한국에서 왜 하필이면 막스 베버인가? 이 책의 저자 김덕영은 머리말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김덕영이 나열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는 그 항목만 해도 무려 2쪽 가까이 된다. 거대한 혼돈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러한 사회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다. 왜냐하면 베버가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 기준과 씨름했듯이 우리 지식사회 역시 ‘근대적인 합리성’을 둘러싸고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 저자 스스로 '한국지식사회'란 표현을 쓴 모양이다. 기자의 소개로만으론 '학계'라는 뜻으로 썼던 것 같다. '학계 + (좀 수준있는) 일반 독자 = 지식사회" 이런 공식에서 나왔을까... '학계'가 좀 낡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지식사회'는 사회학자가 사용하기에는 애매한 개념은 아닌지... 한국에 '지식사회' 외에 다른 사회가 있거나 (스포츠사회?), 아니면 독일에는 독일지식사회가 있는 것인가? 책 내용을 모르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개념 하나 붙들고 심한 태클을 걸고 있는 지도... 구글해보니 꽤 많은 검색결과가 뜬다. 어느 정도 반향은 있는 것 같다. 좋은 현상이다. 평소 내 관찰이기도 하지만 한국(지식사회?)엔 지적편식증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당위 혹은 욕구를 공유하는 층이 상당히 두껍다. 게다가 '한국지식사회'에 대해 던지는 학문적 거인의 충고라는 프레이밍도 시의절절하게 잘 만들어진 것 같고... 읽지않아 확인해 볼 수 없는 책 내용, 제시된 논지의 질과 상관없이 우선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을 '감명깊게'(!) 읽었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출간된 짐멜에 대한 수 권의 책과 이번 베버전기까지, 저자의 일련의 작업이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사회이론 연구에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연히 본 독후감의 일부가 걸린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는 저자의 바램과는 달리 베버의 위인전으로 읽히는 것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버의 긍정적인 면을 주로 보여주며, 베버의 사유와 행동을 통해 우리를 고찰해 보기 위한 지점을 조금더 신경써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아서일지도모르겠다..." '한국지식사회'에 충고를 해 줄 사람으로 베버를 프레이밍하다보니 '위인전'필을 띌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출판사가 사회과학전문이 아닌 '인물과 사상사'라는 점도 걸린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베버를 널리 소개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내가 언젠가 교수신문에 소개한 1007쪽에 달하는 요하힘 라드카우의 저작 ‘막스 베버: 사유의 열정’(Max Weber: Die Leidenschaft des Denkens, Carl Hanser Verlag, 2005)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읽어보지도 않은 책에 대한 추리, 추측의 정도가 너무 심해지니 돌맞기 전에 이 정도로 그쳐야겠다 (당장 나가서 사올 수 없는 책이니 그 점 이해를 구함).

2008년 5월 29일 목요일

Old Friends

우선 음악 감상부터...

마땅히 떠올릴 기억이 없는 옛 음악듣기처럼 심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135분 동안 밥 딜런 노래 59곡이 나온다는 영화 'I'm Not There'(2007)를 도저히 좇아갈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밥'과 친할 기회가 없었고, 심지어 그의 대표곡이라고 할 'Blowin’ in the Wind'마저도 낯설기만 하다. 반면에 이 'Old Friends'는.... 아, 기타 반주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풋내 풍기던 그 더벅머리 시절... 그 때 나이 곱절을 넘긴 지도 한참인데 여전히 남아 있는 이 느낌의 정체는...


내친 김에 한 곡 더 듣기로 하자. 사실은 울림이 더 큰 노래,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아, Central Park 저 무리들 속에 있을 수 있다면...

2008년 5월 27일 화요일

문학

"문학은 써 먹을 수가 없다; 문학은 써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써 먹는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김현, 1975년 겨울호부터 '문지'에연재하기 시작한 "한국문학의 위상" 중)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비억압적인 현실 초월의 기능 때문에 억압적인 세계를 '추문'으로 만들고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을 낳는다. 문학의 비억압성은 문학이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체계이론 관점에서 문학을 조명한 책들이 그 동안 몇 권 나왔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현의 문학관을 듣다보니...

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사회학자들의 TV 토론회....

[웃기는 일과는 멀어도 한참 멀 것 같은 사회학자들이 등장하는 유머라... 우연히 발견했는데 희소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올려둔다. 내가 찾은 곳은 http://junie.egloos.com/445486 인데, 그곳에서는 출처를 다시 '싸이월드 클럽, 책마을, 작성자 : 주차영준'으로 밝히고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도 몇 군데 있지만, 이 정도면 잘 만들었다. 그런데, 님, 우리 루만 형님을 빼 놓는 실수를... 아니면 '아직도 한 마디 해 보지 못한 수 많은 학자들'의 하나로 처리하셨나. 루만이 등장했다면 무슨 말을 남겼을까? 그러고 보니 '민방'쪽도 안 보이고. 이거 너무 편파적으로 섭외한 것 아니야? ㅎㅎ]

사회학자들의 TV 토론회....
<수많은 방청객과 패널로 둘러싸인 한 토론장. 세계 곳곳의 사회학자들이 한 마디 헛소리를 찌끄리기 위하여 포진한다. 중앙에는 나름 사회학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석학이라 알려진 기든스님이 마이크를 쥐고 사회를 보고 있다. 시끌벅쩍. 웅성웅성. 세상에서 가장 실용성 없는 학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란 대체로 이렇다>
사회자 멘트 : 자. 모두들 어떻게 지내십니까? 먼저 사회학계의 원로이자 사회학의 양대 산맥인 두 분에게 묻습니다. 베버씨, 그리고 맑스 씨,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가? 사회자인 저는 제 3의 길로 책도 많이 팔아먹고 명예도 얻고 욕도 많이 먹은 후학, 앤써니 기든스입니다. 선배님들, 어떻게 지내십니까?
베버 : 아 그게 참,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맑스 : ㅋㅂㅅ . 제가 한 마디로 대답해 드리죠. 돈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격투에 들어간다. 양측의 수많은 지지자들이 격투에 달라붙어 삽시간에 그들 주변은 아수라장이 된다>
기든스 : 하여간. 두 선배님들 그만 좀 싸우십쇼들. 제가 두 분의 입장을 대표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제가 서른이 되기 전에 쓴 논문에서 보면.....둫ㅂㄷ해ㅔㅂㄷㅈ후ㅇㅎㅁㅇㅎㄷㅎㅁㄷㅎ.
<방청석에서>
뒤르껭 : 둘이 맨날 싸움질이라니, 이거 완전 아노미로군. 짜증이 나서 자살하고 싶어지네.
스펜서 : 그러게, 대체 저 치들은 진화라는 걸 모르는군!
모스 :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양보하고 살면 될 것을.
레비스트로스 : 선배님, 맞는 말입니다. 사회학의 역사 이래로 저 둘은 매일 싸우는군요. '사회학'이라는 구조가 저 둘을 투쟁하게끔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슬픈 사회학이로군요.
밀즈 : 하여간 저 놈들, 저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야!
로크 : 어짜피 역사란 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데, 싸움은 필연 아닌가?
다윈 : 그리고 승자가 살아남는 거죠.
파슨스 : 그리고 저처럼 만사 오케이인 겁니다. 참고로 저는 언제나처럼 잘 지냅니다.
알튀세르 : 파슨스 선생, 안 물어봤습니다. 지금 제 앞에서 답부터 놓고 질문을 찾아보자 이겁니까.<그리고는 돌연 춤을 춘다>
후쿠야마 : 알튀세르, 이 지저분한 공산주의자 같으니! 자네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이가 어떻게 이 토론회에 참여했는 지 모르겠군. 공산주의는 종언을 고한 지 옛날인데! 너 같은 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려!
<찌질이 후쿠야마는 묵살당한다>
하버마스 : 저색히는 하여간 대화라는 걸 모르는군.
그람시 : 진지 깊숙한 곳에 묻어버릴까요? 아이구 허리야. 맨날 진지작업 하다보니 허리가 휘어서 이것 참.
데리다 : 그런데 나는 잘생겼지롱. 게다가 축구도 좋아한다구. ㄷ루멛ㄻㄷ함ㄷㄷ. 두헤댛ㅁ?
<데리다가 외계어를 시작합니다>
고진 : 쯧쯔. 저 인간 또 이성을 상실했군. 하여간 저 치들은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아도르노 : 하지만 이성이 세상의 모든 답이 될 수는 없지요.
루소 : 이성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망쳐놓았는지 보시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오!
<루소는 다섯 병째의 포도주를 비웁니다>
페스탈로치 : 선배님, 술 좀 작작 처먹으이소. 그 시간 있으면 나랑 농사나 지으러 가지 그것 참. 교육학 망신은 다 시키네.
푸리에 : 자네, 나와 함께 공동 농장 프로젝트를 하지 않겠는가? 크고 아름다운 공동 농장을 세워보자구. 자네 돈은 좀 있나? 여기 내 계획서를 한번 보라고. 일단 이 정도 규모의 땅에......
<장황하게 설명하는 푸리에 앞에서 페스탈로치는 빚쟁이들에게 끌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강인한 표정의 대머리 친구가 푸리에에게 접근한다>
레닌 : 어이 푸리에씨, 그런 공상주의적인 방법으로 세상이 바뀔꺼라 생각하나? 세상을 바꾸는 건 체계화된 혁명이야!
트로츠키 : 체계화되고, 국제적이고, 영구적인 혁명!
스탈린 : 그리고 피의 숙청!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뒷통수에 얼음 도끼를 꽂습니다>
조지오웰 : 저런 돼지같은 색히!
크로포트킨 : 국가적이고 체계적인 사회주의란 고작 저 정도지. 해답은 아나키라니까.
일리히 : 그러췌. 체계가 병폐를 만드는 거지.
마오 : 공허한 망상은 좀 집어치우시게. 그래서 자네들이 한 게 뭔가? 이상한 이상주의적 글이나 몇줄 찍 써 놓은 거 말고 또 뭐 한 일 있나? 나는 대륙적 기질로 일국 내 혁명을 위해 많은 일을 해냈네만.
네그리 : 하! 국가. 국가. 국가. 대체 국가라니, 아직도 그런 철지난 단어를 입에 올리는 촌스러운 사회학자도 있나?
<네그리의 얼굴로 모형 비행기가 날아온다. 그의 옆에 앉은 하트의 얼굴에도 모형 비행기 한대가 날아와 그들의 얼굴을 강타한다. 그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허물어진다. 남녀노소와 분야를 막론하고, 촬영장에 있는 전원 긴장하여 그 둘의 무너짐을 지켜본다>
보드리야르 : 저 둘, 무너진 것 같겠지만 사실 무너진 게 아냐. 그건 단지 이미지일 뿐이라고.
<일동 야유>
프레데릭 제임스 : 저색히 또 헛소리질이군. 요즘 헛소리꾼이 너무 많아졌어. 역시 제대로 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우리 마본좌님이신데 말이지. 문제는 돈이란 말야.
프루동 : 당연히, 소유는 도둑질이지!
<일동 조소>
H미드 : 그런데 왜 빨갱이들만 말하고 있나? 이래서 빨갱이들이 안된다니까. 대화로 미뤄봐도 쉽게 알 수 있지.
M미드 : 잘 만났다 조지 허버트 미드! 네놈 때문에 내 이름이 헷갈린다는 사회학도들의 투서가 있다르고 있다. 내일 오전 여덟 시 까지 사모아 섬으로 나오도록. 여성의 힘을 보여주마.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는 나오나 대학 사회학 교재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마가렛 미드와, 대학 사회학 교재에서는 나오나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지 허버트 미드는 옥신각신을 시작한다>
프레이리 : 또 싸움인가. 잠시 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세계에 대해서 훨씬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왜 또 싸움질인가.
니체 : 그러는 당신의 교육론도 터무니없는 이분법이잖아?
슈펭글러 : 결국 말싸움으로 치닫는 건가. 하여간 토론이든 뭐든 이렇게 막장으로 끝나기 마련이지.
할쉬베르거 : 이쯤에서 누군가가 토론을 좀 정리했으면 좋겠는데.........
들뢰즈 : 토론에 시작과 정리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크리스테바 : 아. 이런 식의 발상이란. 남성적 말하기의 한계지.
<여전히 한 구석에서는 마본좌와 베본좌를 위시한 두 세력이 사투를 벌이고 있고, 아직도 한 마디 해 보지 못한 수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말하기 차례를 기다리며 한껏 폼을 재고 있다. 사회자인 기든스는 방청객들을 상대로 자신이 저술한 교재의 우수성에 대해 논증하고 있으며, 토론은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08년 5월 25일 일요일

미래의 음악, 음악의 미래

한겨레 Esc에 인디 밴드 소개 기사가 올라왔다. 제목은 좀 '복고풍'인데.... "열정과 풋풋함. 봄햇살처럼 다가오는 인디 밴드 둘".

기사는 두 밴드를 이렇게 소개한다: "데뷔 음반으로 ‘명랑음악’ 이미지를 확고히 한 ‘페퍼톤스’, 그리고 젊음의 순수함이 두드러지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다."

열정, 풋풋함, 순수, 젊음, 봄햇살... 아, 이런 닭살 돋는 어휘들의 향연이라니... 이런 꾸밈어가 어울리던 세대가 있지 않았던가? 소위 청바지, 통기타 세대, 대학가요제 세대? 81년생에서 85년생 사이인 현역 대학생들을 묘사하는데 다시 이런 어휘가 동원되다니... [이론적 근거가 없지는 않다. 돌고-도는-게-유행론부터 비코, 슈펭글러 등의 '역사순환론'까지 ㅎㅎ]. 아닌게 아니라 페퍼톤스 애네들 사진을 보고 있으면 머리모양 탓인지 70년대의 그 장발족 형님들 필(아니 휠)이 확 온다. 외모까지 복고풍인 것. 그게 전부가 아니다. 팀 이름도 '페퍼톤스'더니 2집 이름이 '뉴 스탠다드'란다. 역시 70년대 그룹 '블랙테트라', '샌드페블즈', '휘버스'와 한 가족이다. 혹시 '복고'를 '컨셉'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아,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더 강한 판단은 잠시 유보.

어쨌든 이런 21세기 대학밴드들이 선배밴드와 다른 점은? 음반을 낸다는 점 아닐까? 혹은 “평생 음악을 하기 위해 먹고 살 직업을 찾을 겁니다”라는 각오? (이 아이들은 대개 '1류대'에 다니고 있단다. 공부 못하고 직장 얻기 힘들어 음악한다고 나선 대딩들로 오해당하지 않도록 우리 기자 선생님 친절하게 언급해 두신다. 이런 엘리트형 밴드, 이전에도 없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동물원'... ). '브로콜리 너마저'의 싱글 음반은 집에서 녹음했다고 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음향, 녹음기기들, cd 굽기, 컴퓨터, 인터넷 등등) 음악을 만들고 유통하고, 가수로 나서는 일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다. 이런 새로운 환경은 '저렴하게' 음악활동 하고 싶어하는 대학밴드, 인디밴드들에게는 더 없이 귀중한 장치들이다. 추세를 보아하니 이런 음악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대중음악이 양분되는 현상까지 보여줄까? 기획사를 통해서 '사육'되며 주로 티비에 얼굴을 비치다 좀 뜨면 가수가 아니라 엔터네이너라고 강변하는 아이들(혹은 '아이돌')과 스스로 작곡, 연주하고, 저렴하게 음반제작, 판매하고, 콘서트하기 즐겨하는 아이들로? 아님, 콘서트 고집하는 이들이 한 켠에 늘 있었던 것처럼 비주류로 남고 말 것인가?

'위기'는 근대 이후로 익숙한 단어다. 약간 불편하지만 안전하긴한 신의 정원[혹은 왕의 정원]을 박차고 나와서 인간들끼리 뭘 해보겠다고 작당한 이후로 말이다. 위기 시리즈는 끝이 없다. 최근에는 경제위기, 에너지위기, 또 다른 영역에서는 한국영화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등등. 음악관련해서도 p2p를 통한 음원 공유로 음악활동이 위축되며 가수들 굶어 죽는다는 위기담론은 오래 전부터 유통되고 있다. 위기담론 유포는 대개기득권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음악의 위기는 음악인들의 위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음반장사 혹은 기획사들의 위기인가? 특히 한 두곡에 집중하고 나머지 곡은 부록같은 그런 앨범들 팔던 장사치들에게 위기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음악활동 자체가 위축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한겨레 기사는 음악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이 달라지는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예로... 나름 자리를 잡은 가수들 중에서 자신들 노래 파일을 인터넷에 올리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미국 그룹 누구였더라...). 문화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그런 대중음악시장이 형성된 이후로 음반을 만들고 파는 것이 음악 커뮤니케이션의 물적 토대가 되었는데, 그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그런 메카니즘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지금같은 지배력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다. 무엇보다 인터넷 정보 공유 메카니즘 때문에...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된 현상을 도덕, 법에 호소하거나 위협한다고 바꾸기는 힘들다 (배아연구 규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식도 상품이고, 소유권, 재산권을 붙이고 보호하고 하지만 우리 인식 속에서 mp3 파일 주고 받는 행위는 음반가게에서 cd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 오는 행위와는 다른 범주로 분류한다. 음악을 즐기고, 음악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은 이들은 기획사, 방송국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존재를 알리고, 심지어 음반도 적지 않게 팔 수 있는 메카니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페퍼톤스 1집은 1만3000장 넘게 팔렸단다).

여기서 제시하는 내 테제: '질이 좋은 음악은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어있다.' 그러니 사육된 아이들의 매끈매끈한 '사운드'보다 인디밴드들의 거친 생소리를 훨씬 높게 평가하는 나로서는 p2p로 음반시장, 가수 사육메카니즘이 완전 무너진다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진단의 근거도 좀 분별해 볼 필요가 있다. 내 테제를 이 쪽에 적용하면: '좋은 인문학은 살아 남는다'.] 생각해보면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활동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는다. 과거를 비춰보아 현재의 차이를 드러내고, 그러면 미래도 예측해 볼 수 있다. 그게 사회학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니까 뒷북치기, 기득권 유지는 특히 사회학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접미사 '딩': 의미론적 진화

요즘 한국 영화 제목을 영어로 만들어 붙이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세상에 "원스 어폰 어 타임"이 한국 영화라니... 제목만 봤다간 속기 십상이다. 나름 한국 영화를 열심히 본 독일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가 영어제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정체를 밝히는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제목을 '이딴 식'으로 달면 한국영화에 대한 인터내셔날 커뮤니케이션시 덜 혼란스럽긴 하겠다 (허나 역설적인 사실은 그런 제목을 단 영화치고 세계시장에 '진출'할 영화는 드물다는... ). 아, 영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마이 뉴 파트너"란 진부한-티-팍팍나면서-게다가-어울리게-영어제목을-달고있는-한국 영화에 대해 누군가가 네이버에 올린 질문을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해서 몇이나-될지-모르는-내 블로그-독자들과 나누어 볼까 하고 인용하려던 차에 영화제목에 대한 생각이 침입했던 것이다. 자, 이제 본론...

"오전에 마이뉴파트너를 보러갈건데요, 친구 두명이랑 같이 가는데 이 영화 괜찮을까요? 제가 되게 보고 싶어서 고른 영화인데.. 중딩이고요,친구들이랑 볼 수 있는 영화 좀 추천해 주세요?" (강조 인용자).

흠. 스스로 중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구나... 원래 초딩, 중딩, 고딩은 약간 깔봄의 뉘앙스가 진하게 풍기는 신개념이었는데... 예를 들어.. 서로 신분, 나이를 확인할 수 없는 인터넷 댓글놀이 마당에서 만약 어떤 참여자(네티즌, 최근엔 누리꾼이라고도 하더구만)이 약간 논리가 달리는 발언을 날리면 대번 거기에 대해서 '너, 초딩이지...'라는 덧글이 달라붙는다. 반면에 '너, 중딩이지...' 이렇게 반응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첨가: 이 글 쓰고 나서 새로 발견한 용례: "개념 탑제 하세요 중딩님" ('탑재'가 맞겠지만... 어쨌든 '너 초딩이지'라는 공격적 멘트를 날리기 힘든, '착한' 멘트들이 주로 오가는 분위기에서 상대를 가볍게 '갈구고'(음. 문자로 표현하니 어색하다 ㅎㅎ) 싶을 때 '초등' 윗등급인 '중등'에 '님'까지 덧붙여 주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저, 초딩인데요...혹은 '저, 중딩인데요'라고 지칭 혹은 고해하는 경우도 본 적이 없었는다. 위에서 인용한 것이 내가 관찰한 최초의 사례되겠다. '-딩'의 개념사라고나 할까? 그런 접근, 해 볼만하다. 내 관찰에 따르면 우선 '초딩'에서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서 '중딩', '고딩'으로 응용범위가 확대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용처는 약간 다르다). 이후 '대딩'이라는 표현도 등장하긴 하지만 그러기까지 오래 걸리기도 했고 널리 쓰이는 것 같지도 않다. '딩'은 초중고에 연결될 때 더 잘 어울리는 접미사인 것이다. 또, 원래 상대를 깔아 뭉게기 위한 뉘앙스를 지닌 단어에서 위의 용례가 보여주듯이 상당히 중립적인 보통명사로 진화해 가는 것 같다 (역시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는 대딩인데요...'까지 확대되지는 않을 것 같다). 진짜 궁금하다. 누가 처음 '-딩'을 쓰기 시작했을까? 도대체 어떻게 그런 깜직한 발상이... 우리 고유어에서 '딩'이 들어가는 경우는 정말 드문 것 같은데... 고작 생각해 낸 게 '문딩이' ([문둥이] 를 이르는 말로 전라도 지방에서 쓰는 말이다. 이말을 경상도에서는 [문디] 라고한다. Daum 참조). 그러고보니 '딩'은 '둥'의 변형일까? 그밖에 '둥'이 들어가는 단어: '막둥이', '귀염둥이', '재롱둥이' ... 그 밖에 초'등' -> 초'딩' 가설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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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장선생이 언급한 곳에 가보니 아닌게 아니라 설득력있는 '초딩기원설'이 제시되어 있다. 일부 인용 [일단 이 '~딩'이라는 어원의 유래는, 아무래도 고등학생의 그것에서 유래된듯 합니다.통신어체중. 그러니까 인터넷이 아주 많이 보급되기 전의 그 시절. 말을 줄여쓰는것이 진정한 통신어체로 빛을 내던 그시절이지요.뭐 가볍게 예를 들어서, '서울->설' 이 있군요. 이런 축약시스템에 고등학생을 삽입하면.고등학생->고딩 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 지난 1993년부터 몇년간, 통신어체는 빠르게 발전합니다.당연히 '~딩'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중딩,고딩,대딩,직딩 이런식으로 줄여쓰기도 생활화가 되기 시작하지요.문제는, 당시의 초등학생은 국민학생이였으므로, 초딩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자아, 이 시기를 지나서. 대망의 인터넷 세대. 1997년부터 피시방의 본격적인 도입으로.(그리고 스타크래프트의 호황으로)인터넷은 바야흐로 미친듯이 퍼져나갑니다. 스타크래프트는 많은 사람들을 PC방으로 몰리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동시에, 무한한 정보의 세계.PC통신사들은, 차츰차츰 인터넷으로 그들의 자금을 이동하기 시작합니다.이시기의 어린 아이들. 즉 현재의 초등학생들은, 그런 제한이 풀린 인터넷이라는 환경을 접하게 되죠. ... 그렇게 빠르게 인터넷을 접한 아이들.호기심가득 찬 어린아이들이 들여다보는 그 몇십인치 모니터는, 그어떤 놀이보다도 재미있는 도구. 그 아이들은 인터넷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 완성되지 않은 예절지식과 개념으로 커뮤니티에 참가하는 그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초딩'이라는 악명을 붙이기에 이릅니다.어른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댓글, 글, 태도, 말버릇. 현재에는 그런 행동을 하는 인물 전체를 비하해 '초딩'이라는 악명을 붙입니다. 굳이 초등학생이 아니고 어른일지라도.'어른인 주제에 행동거지나 사고판단이 초등학생수준이다' 라는 평가의 대답이 바로 이 '초딩'입니다.] 음... 난 '초딩'이 먼저 시작된 후 용례가 확대되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나도 파란색에 흰색 메뉴가 박혀있던 초기화면, 거기에서 얻어 낸 자료를 가위질 해서 레포트 제출하던 일 등 피시통신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채팅, 토론에 참여한 편은 아니었다. 이른바 '통신언어'를 습득할 기회는 없었던 것. 그 때 '고등학생 -> 고딩'으로 음운축약되는 현상이 있었구나. 생각이상 접미사 '딩'의 역사가 길고 그 의미론의 변화도 훨씬 역동적이다.

2008년 5월 22일 목요일

oh my 언론 때리기 (1)

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 준 글이 있어서 올려 둔다. 제목은 "종잡을 수 없는 박지성 관련 보도" . 블로그에 쓴 글인데 (김영민), 조선일보 대문에 올려져 있었다. 읽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던 한 대목만 인용한다:

" '결승 간다!' '일낸다!' '필승다짐!' 뭐 이런 식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추측기사를 날린 뒤 우리팀이 패하면 바로 그 다음날 '졸전!' '총체적 부실!' '한국축구 내일이 없다.' 어쩌고 하며 곧바로 안색을 바꿔 김구라 처럼 막말을 퍼부어버리는 것이 우리나라 몇몇 스포츠신문, 뉴스들의 전형적인 보도태도였다.
한국민들이 현지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하다 못해 거의 벼룩신문 수준의 현지 신문까지 메이져 급으로 둔갑시켜 가며 그들이 내뱉은 온갖 자질구레하고 쓸데없는 코멘트 하나 하나 까지 모조리 확대재생산 해서 바람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조는 인용자. '김구라'를 연상할 수 없어서 그 부분은 웃기지 않았음.)

"왜 대통령 되기만 하면 실패하나?"

"왜 대통령 되기만 하면 실패하나?" (한겨레). 적절한 지적이다. 얼마 전까지 ‘모든 게 노무현 탓’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이명박 탓’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나치게 그리워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현상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그렇게 미워하더니 지금은 ‘노간지’라고 한다. 낯이 좀 간지럽다"(성한용). (노[전]통도 지금 고향마을에 손님들 미어터진다고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결국 본인이 입에 달고 다녔던 한국정치구조 개혁, 정당정치 못 만들어낸 탓에, 후임자도 자신과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는 것 아닌가?) 한겨레의 성한용 기자는 ‘메시아 증후군’의 부작용이라는 설명을 내 놓았다. 그렇다면 이명박을 묻지마 지지했다가 이제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그 변덕스러운 국민들에게 잘못을 물어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국민을 탄핵하기라도 해야 할까? 왠지 찜짐하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난 평소에 한국민들의 정치의식(그런 걸 평가할 수 있다면 ㅎㅎ)은 어느 국가보다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지식인들, 전문가들이 이럴 때 등장해서 좀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줘야 한다. 이명박 때리기에 신나있는 언론들도 좀 자제하고, 이런 방향으로 논의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비판에서 자유로운 편이니까 이렇게 '무책임하게' 발언하련다). 그런 걸 해주는 언론, 전문가들이 있느냐 없느냐, 앞으로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22일 대화문화아카데미(이사장 박종화)가 열었다는 ‘헌정 60년, 새로운 정부 형태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제1회 여해포럼,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시기적절한 기획이었다 (박수! 짝짝짝!!). 한겨레 기사를 인용해 본다. [민주화 이후 왜 모든 여당은 집권과 동시에 급락하는가?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왜 반드시 소멸하거나 권력을 상실하는가? 책임성·효율성·안정성을 갖춘 정당체제는 왜 존재하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유능한 리더십의 등장을 기다리며 제도의 문제를 방기하고 회피할 것인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정당이 탄생하고 좋은 정치가 가능할 것인가?” ... 박명림 교수(연세대)는 현재 이명박 현상을 "이는 단지 이명박 ‘정부’의 무능이라기보다는, 정당정치에 기초하지 않는 한국 ‘정치 제도’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정당·탈정당·비정당 민주주의의 반복이다.” ... 박찬욱 교수(서울대)도 발표문에서 “18대 국회에 헌법개정 조사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대통령 4년 중임제 및 대선과 총선의 동시 선거 등을 우선 검토하자”고 밝혔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한국 민주주의의 정부 형태였던 대통령 중심제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를 아마추어 정부라고 했다. 이번에 이명박 정부도 그런 소리를 듣는다. 이 말은 통치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될 준비를 제대로 못한 사람이 그렇다 쳐도, 서울 시장도 지내고 나름 충분한 대통령 준비기간을 가진 이명박 정부가 이 정도였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 대통령 후보이건 후보가 속한 정당이건 대통령 당선을 무슨 로또 당첨처럼 생각한 것이다. 당첨금 나누기는 곧 공직나눠 먹기이고... 그것 말고 5년 동안 뭐 할지 제대로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이다 (공약이라고 있긴 하다. 대운하 같은... ). 많은 언론과 국민들도 집권하면 어떤 인물들과 함께 어떤 정책을 시행할 지 물어보지도 않고 묻지마-지지를 보낸 것이다. 어쩌면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무르익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최근 현상을 비관적으만 볼 일이 아닐 수도.... 지금까지 정치세력들이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고 논의할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던가 (제도적 민주화, 지역감정 등등). 이제 묵은 숙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정책, 이념 중심 정당정치 해야 할 시기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문국현, 이명박씨 혹은 여러 정치인 등이 입에 달고 있는 실용, 탈이념, 중도...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그 때 그 때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요즘 매일 경험하고 있지 않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는 반갑지 않지만,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그래서 어떤 정책, 어떤 프로그램이 나올지 예측가능하게는 해 줘야 한다. 이명박 정부도 예측가능하긴 하다. 친미, 친일, 친대기업이라는 틀에 넣어보면 답이 나온다 (좋은 사례가 대북정책. 이번 정권 내내 미국입장에 따라 대북정책이 춤을 출 것이다). 실용은 그 포장지일 뿐이고. 허나 그 정도 틀에 정책이란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다. '친박연대'를 정당이라할 수 없는 것처럼... [누가뭐래도 한국에서 정체성이 가장 강한 정치세력('정당'이라는 이름은 과분)은 뭐니뭐니해도 '친박연대'다. 세계 정치사, 정당사에 길이 남을 작명이다. 벗뜨... nicht mehr und auch nicht weniger als 박근혜 팬클럽...]
생각해보니 수 개월전까지만 해도 대선, 총선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이 자민당처럼 장기집권하는 공룡정당이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다른 한편 야당이 되고 정부를 접수하는 순간부터 무엇을 하건, 하지 않건 훨씬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니 5년을 거치며 지지도가 떨어질 것을 예상 혹은 기대하기도 했었다. 지금으로선 후자 쪽이 맞는 것 같은데, 다만 5년은 커녕 5개월도 걸리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든 '삽질' 덕에 집권 전보다 정책 중심 정당정치에 대해 논의해 볼 여지는 더 넓어졌다. 이제 열쇠는 오히려 이른바 진보, 개혁세력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여당의 몰락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라, 좀 정비를 해서 대안세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텐데 민주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직... 민노당, 진보신당도 그다지... 큰 틀을 바꿔서 내각제 개헌을 하면 사정이 달라질까? 글쎄.... 정당정치... 다 좋은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갑갑해진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2008년 5월 21일 수요일

영국: 법개정으로 이종간 체세포핵이식 허용

또 한 번 영국이 앞서나갔다.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지난 19일 영국 하원에서 인간-동물의 교잡배아(이종간 체세포 핵이식)를 허용하는 법안이 찬성 336, 반대 176으로 통과되었단다 (관련 한계레 기사). 이 같은 이종배아는 연구목적으로만 만들 수 있으며 핀 머리 정도의 크기가 되는 14일 이전에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한다. "하원은 또 희귀병을 앓는 자녀의 치료를 위해, 시험관 수정을 한 배아 중 건강한 유전자를 지닌 배아를 골라 맞춤형 아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구세주 형제’(saviour siblings) 법안도 통과시켰다". 흠. 구세주 형제 법안이라... 어째 원어도, 번역도 좀 거시기하다. '맞춤형 아기법'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들리긴 한대, 설마 그게 정식명칭은 아니겠지. 둘 다 새로운 건 아니다. 탈핵 동물 난자에 인간 체세포 핵을 이식하는 건 한국에서도 2003년 12월 생명안전윤리법이 통과되기 전 황우석, 박세필 같은 연구자들이 소난자를 가지고 해 본 적 있고, 중국에서도 토끼 난자를 사용해 실험한 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혹은 숨어서 이 실험을 하고 있다가 영국인들의 '선구적' 결정에 조용한 지르고 있을 연구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런 실험에 그리 대단한 설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탈핵난자에 동물의 핵을 이식했다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아마 이번에 통과된 영국법에서도 당연히 금지대상일 것이다. 이런 이종배아를 만드는 건 무엇보다 인간 난자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또 인간DNA를 가진 줄기세포를 얻는 게 목적이니까. '구세주 형제 법안'의 내용이 되는 착상전유전자검사(PGD, PID)도 수 년전부터 여러 국가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다른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물론 영국이 이 연구를 법을 통해 명시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국가인 것은 틀림없지만 - 이종간 체세포 허용은 확실, PGD는 아닐 수도 - , '세계 최초'라는 문구에 너무 현혹될 필요 없다. '박지성의 아시아인 최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참여'처럼 뭐든지 '최초'는 뉴스가치가 높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후 맥락도 좀 공부해서 소개해주면 좋으련만, 그냥 외신 받아 번역하는 수준이니... 똑똑한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해라? 그렇지. 우리 한국인들 황우석씨 덕에 세계 그 어떤 국민보다 이 분야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사실일테니... (나의 반복되는 매스미디어, 특히 신문 비판 혹은 비아냥이 언론인 개개인을 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둔다.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하신 분들 아닌가? 물론 주로 포탈에 낚는 글 올리는 언론인이라고 불러주기 민망한 그런 이들 제외하고. 한국 언론인의 지능, 역량이 특별히 낮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없다. 구조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지금 딱 꼬집어서 뭐라 얘기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한국 매스미디어의 취약성을 자꾸 강조하는 건 만만한게 언론이라서가 아니라 공부하고 관찰할수록 매스미디어의 중요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쪽, 그러니까 생식보조술, 배아연구 분야에서는 늘 앞장서서 나가기는 했다. 대표적인 게 1978년 최초 인공수정 아기 브라운 탄생, 1997년 돌리 탄생. 영국은 자신들이 앞서나가는 분야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길 원하기 때문인지 공공 논의나 법제정이 늘 앞서 나간다. 법으로 허용하면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법 제정을 피하거나 미루면서 관리도 되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상태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에서는 '실용적' 결정이다. 굳이 동물난자를 쓰는 이유는 인간 난자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 황우석씨가 논문에서 수백개의 난자를 사용했다고 발표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난자를 모을 수 있었을지 그것 자체가 이슈였으니까 (결국 1000개 이상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umso erstaunlicher!). 숨어서 하더라도 일일이 통제하기 힘들고, 찬성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이런 이슈에 대해서 차라리 허용하고 관리철저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긴하지만,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가능하고, 하고 싶고, 필요하다고 다 해야 하는가? 현대사회의 악몽은 그런 경계 긋기가 매우 힘들다는데 있다. 과학자들은 연구하고 싶거나, 연구비 타낼 수 있으면 하려고 하고, 기업들은 돈 벌 수 있다면 투자하려고 하고, 언론은 뉴스가치가 있는 방향으로 보도하면서 여론조성하고, 정치는 여론을 통해 유권자들을 관찰하고.... 딱 우리 울리히 벡 선생이 얘기한 'die organisierte Unverantwortlichkeit'가 어울리는 '시츄에이션'이다 (내가 벡선생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 양반 제목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재주 하나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형적인 사회진단형 사회학자, 저널리스트에 가까운...).

적절한 비유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한다'고 비판했다. 비슷하게 말해 본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후진기어를 넣고 앞으로 달린다고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 말로는 '선진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후진화'가 맹렬히 진행되고 있다." (홍성태)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위험관리 유형

딴지일보에 1990년대 초 광우병에 대한 영국의 대응과 2008년 한국의 대응을 비교하는 총수의 글이 실렸다 (이미지로 만들었는데 너무 긴 탓인지 올라가질 않는다). 축산업 보호를 위해 소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강변했던 당시 영국 정부와 현재 한국 정부의 모습이 중첩된다는 것이다. (딴지 기사는 기사의 좋고나쁨의 변동 폭이 매우 큰 편인데 이건 좋은 쪽에 속한다. 특히나 황우석 사태 때 총수와 딴지가 한 뻘짓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기사를 보는 일은 반갑다. 전반적으로 딴지가 지금 침체기에 있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틈새시장이 있어 명맥을 유지하긴 하지만, 글쎄 오래 갈 수 있을까...). 1990년 초중반 영국과 서유럽이 경험한 BSE 사건은 이후 영국 정부와 EU의 위험관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한계야 항상 있겠지만, 위험관리에 있어서 정보공개, 시민참여 등을 통해 투명성과 신뢰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말 유럽 GMO 정치는 이 같은 BSE 경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90년대를 거치며 각국의 위험규제 정치 유형의 차이를 지적하는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미국, 유럽의 차이를 강조하는 논문들이 많았었는데 몇 년 전부터 일부학자들은 수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규제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일부 경향이 그렇다는 얘기). 지금 한국 정부의 위험관리정책은 90년대 초 영국식이나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이다 (위험관리 유형을 국가별로 구분할 수 있는가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저널리스틱한 구분으로 사용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도 하지만, 굳이 전철을 밟아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다른 나라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위험 연구가 한국에서 한 때 유행이었는데 그 많던 위험 사회학자들, 위험연구가들은 다 어디 가셨는가? (이런 진술을 용감하게 할 때마다 늘 찜찜하긴 하다. 극히 제한적인 범위의 담론을 좇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식하니까 용감하다는 말, 이런 경우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관찰 범위에 들어온 드문 경우가 서울대 홍성욱 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지난 5월 14일에 "광우병 민심 '확률'로 풀 일 아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미국식 위험관리, 위험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고 한국 관료, 전문가들이 배울 것을 충고하는 내용이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위험'에 대한 오랜 연구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과학자나 전문가는 광우병 같은 경우 확률로 위험을 계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은 시민이 위험을 확률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재앙의 정도, 통제 가능성, 형평성, 후속 세대에의 영향을 고려해서 총체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위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대화의 의지, 투명한 정보의 공개, 신뢰의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버드대 Jasanoff 교수 팀에 있는 김상현 박사가 STS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이 칼럼에 대한 짧은 비판적 논평을 돌렸다.


"따라서.. '광우병 민심 '확률'로 풀 일 아니다"라는 홍성욱 교수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미국에선 안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은 그러고 있으니 큰 일"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계신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국이 위험평가, 위험관리에 대한 미국식 기준과 미국 스타일의 실천들을 더 열심히, 더 강하게 받아 들이면 들일수록, 홍성욱 교수님께서 우려하는 상황이 강화될 수도 있지 않나 합니다". 

홍 교수가 언급한 위험관리유형은 유럽에서 더 쉽게 관찰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위험관리정책 연구 결과에 대한 지식에 비쳐 보더라도 김상현 박사 견해가 옳은 듯하다. 한국의 위험관리정책의 사례로서 이번 사건을 연구하고 다른 국가들의 경험과 비교하면 재미있겠다.

p.s.) 김명진씨가 한겨레 21, 5월 22일자에 광우병 발생에 대한 과학지식은 불활실하고, 위험 판단에는 결국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는 전형적인 STS 시각에 기초한 글을 기고했다. 제목: "광우병 걸릴 확률? 아무도 모른다"

재난과 정치 그리고 언론

오늘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중국을 보며 글라스노스트를 떠올리다"(Watching China and remembering glasnost) (음, 글라스노스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단어. 대학입학 전후로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 개방이라는 뜻의 낯선 러시아 단어가 연일 신문지면에 등장했었다). Internet판에선 제목을 약간 달리했다. "소련을 보던 눈으로 중국 바라보기" (Watching China with an eye on Soviet Union). (인쇄판 제목이 더 직설적인 것 같은데, 그게 제목을 바꾼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최근 버마와 중국에서 스콜, 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각각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흥미로운 점은 두 국가의 대처 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 버마의 경우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구호활동가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고, 사상자수나 기타 재해 관련 소식을 외부에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 반면에 중국정부는 적극적, 개방적 태도를 보여 여러 언론 관찰자들을 놀라게 했다. P. Taubman이라는 기자는 이같은 중국의 모습에서 1980년대 말 소련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1986년 체로노빌사건이라는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발생한 후 소련 당국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사고발생 후 만하루를 넘기고, 사고지로부터 1,300km 떨어진 스웨덴에서 위험 수치를 넘어서는 방사능이 확인되었음이 알려진 수 시간 후에야 공식 발표를 했었으니까. 이건 현재 버마 군사정부의 대처방식과 유사하다. 체로노빌 사고에 충격받은 고르바쵸프는 이후 정부, 당에 대한 개혁, 개방의 속도를 높인다. 1987년에는 스탈린 시절,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점령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영화, 서적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88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십만여명이 숨지는 지진이 일어났다. 이 때 소련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여행제한 조치를 풀어서 서방 기자들은 정부 허가없이도 아르메이아 수도인 Yerevan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외국에서 보내는 물, 식량, 의약품 등을 실은 원조 물조를 실은 비행기도 환영받았다. 이건 현재 중국 대처방식과 비슷하다. 막상 80년대말 동구의 개혁물결이 일렁일 때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그 확산을 차단하려 했고, 언론 통제, 티벳 독립시위 진압 등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동안 중국 정부의 정책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재해, 재난과 관련해서도 "1976년 탕산 대지진 때 중국은 사태를 축소하고 국제사회의 구호 제의를 묵살하다가 결국 24만명이라는 생명을 잃었고, 2003년에는 사스(SARS) 발병 때도 피해 규모를 축소, 은폐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여기에서 인용)던 전력이 있다. 그러니 이번 지진 발생 후 중국 정부가 취한 신속하고, 개방적인 조치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 기자가 체르노빌에 혼난 후 아르메니아 지진 때 보여준 변화된 소련의 모습 떠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재난의 질적 차이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만약 지금 중국에서 지진이 아닌 핵발전소 사고가 나거나 사스가 재발생했었더라도 비슷한 대처방식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어떻게 전개될까? 기자가 진단(혹은 희망)한 것처럼 중국에서도 개방의 속도가 빨라지고, 권위적 정부 해체 수순을 밟게 될까 (slippery slope)? 흐음. 그건 중국과 소련의 차이를 놓치는 데서 나온 단견은 아닐까? (기자가 지적한대로) 여러 민족 혹은 국가의 연합체였던 소련에서는 개방이 곧 민족주의의 발흥 그리고 이어서 연방의 해체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소련과 다르게 한민족 중심국가이고, 티벳 같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양적으로 소연방을 이루던 민족들과 비교할 수 없다. 최근 성화봉송, 지진 등에 대한 중국민들의 반응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민족주의의 강화는 오히려 중국의 내적 결속력을 더 강하게 해 주고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악재가 잇따른다고 했는데, 이번 지진은 중국 정부에겐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 같다. 티벳사태 등으로 악화된 국제여론을 잠재울 수 있고, 또 국민의 단결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중국이라는 나라, 그 국가주의, 민족주의, 어떻게 전개될지 앞으로 주의깊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웬바오 총리가 지난 발생 두 시간 만에 현장을 방문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일부 성급한 관찰자들은 실제로 정치문화 변화까지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데 지켜봐야겠다. 재난이 정치 구조의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견인해낼 수 있다는 것, 강한테제이기 한데 그런 사례는 찾아보ㅈ면 적지 않을 것이다. 재난에도 미동치 않는 미얀마 같은 사례와 비교하면 나름 의미있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IHT 기사도 결론이 미덥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나름 신선한 시각을 담고 있다. 독일 일간지, IHT 등을 보면 이런 기사들이 널려 있다 (아, 오해마시라. 반드시 이들의 시각자체를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또 아무리 깊어봐야 신문아닌가. 한국 신문들과 비교할 때 그렇단 얘기다. 반면에 독일 티비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티비를 보던 시절 기억에 따르면 Arte나 3Sat 채널 정도가 탐나긴 했지만...). SZ를 구독하던 시절 스포츠면까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포츠 전문 기자들의 '인문학적 내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신문들이 가야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한국 언론들은 또 미쇠고기 수입 문제 처럼 큰 사건이 있으면 올인은 하되 (오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중계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식). 또 예를 들어 박지성 챔프 결승전을 앞두고 있으면 '아시아 최초', '박지성의 위대함'을 스토커 수준으로 달라붙어서 비슷한 기사를 반복해서 만들어 낸다 (편집증, 끈질김, 집착). 대단한 취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관련 정보, 견해는 인터넷만 '취재'해도 쉽게 얻어 낼 수 있고 (외국 싸이트를 '취재'하다 번역을 틀리게 해 망신을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생긴다, 혹은 연합신문 기사를 받아다 살짝 고치던지...), 일어난 사건을 분석할 해석틀도 이미 가지고 있으니, 굳이 애써서 공부하고 취재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각종 프레임: 애국주의, 반노무현, 친미 반북 등). 그러니 오죽하며 신정아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이슈를 감추려는 (잊었다, 뭐였는지는) 조중동의 음모라는 얘기가 돌았을까. 방송국의 그 피디저널리즘이 신문의 부족함을 일부 메꿔주는 것 같긴 하다. 돈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인가? 또 인터넷 언론의 경우 대부분 쓰레기 같은 기사들로 채워져 있긴지만, 특정한 이슈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는 경우 드물게 좋은 기사를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프레시안에서). 조중동, 그렇게 욕을 얻어 먹고도 안 바뀌고, 또 살아남는 걸 보면 신기하기조차하다. 이렇게 (내가 인터넷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한국 언론의 지체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진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은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정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퇴행적인 진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devolution). 음. 그러고 보니 한국 언론은 느리지만 경향상 좋아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굳이 언론의 지체현상이랄 것도 없다. 한국의 현상태인 것이다. 특정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런... 어쩌면 역사적...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애국주의, 그 의미론적 혹은 구조적 변화

오늘 인터넷으로 접한 한국 기사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옮겨 놓는다.

"맨유, 오늘 모스크바 입성…아시아선수 최초 유럽챔스리그 결승전 출격 가능성"
"2007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시간'에 이어 '추격자'로 3년 연속 칸 영화제에 참석하는 쾌거를 이룬 하정우는 5박6일의 일정을 마치고 오는 21일 귀국한다"

특히 하정우에 대한 기사는 정말이지 '안습'이다 (기사작성: 뉴스엔 홍정원 기자, newsen은 방송연예전문신문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찌질'의 정도가 좀 심하다.). 칸 영화제 3년 연속 참석하는 쾌거라... 이런 멘트가 생각난다. '조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들 (혹은 태극 용사들) .... 이제 ... 쾌거를 이루고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 그런 프레이밍의 원형은 스포츠 경기 결과에 대한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순위가 분명히 매겨지는 스포츠 경기, 특히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대회 등에서 1등을 하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제패로 표현된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정당성 결핍, 국민 통합 등) 스포츠민족주의 형성에 애쓴 이후로 만들어진 해석틀은 그 이후 다른 맥락에서 변주된다. 우선 국제기능올림픽이나 세계수학올림피아드 등 스포츠 외 다른 국제적 경쟁의 결과에 대한 해석, 보도에서 발견된다. 또 세계적인 성취인지 불분명한 경우에도 적용된다. 세계적인 결과라고 우기는 것이다. 황우석 연구에 대한 프레이밍이 대표적이다. Science지에 논문싣기는 과학계의 올림픽 (혹은 월드컵이) 되었고, 두 번이나 논문을 실은 황우석은 올림픽 2연패를 한 것이다. 박지성의 활약도 이제 세계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진다. 세계최고 수준인 영국 프리미어리가의 일등 팀에서 뛰니까 그 팀의 우승으로 박지성은 이미 금메달을 딴 셈이다 (경기출전회수가 모자라 팀이 리그에서 1등을 해도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던 기사가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챔피언스컵 결승전까지... 챔피언스컵은 유럽프로팀간의 경기이지만 유럽리그 수준이 가장 높으니 명실상부한 세계최강팀을 가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시아 선수 최초'! '한국인 최초'는 '아시아 최초'라는 타이틀에게 쉽게 자리를 내 준다 (당연하다. 뉴스가치가 더 있으니까). 한 가지 질문! 여기에서 '아시아'란? 음... 그렇게 딴지 걸었을 때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정도로, 우리 (우리는 또 누구? ㅎㅎ)는 이런 프레이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동양 최초', '동양인 최초', 이런 표현이 사라졌다는 것. 동양과 아시아는 지리적으로 굳이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서양/동양' 이분법으로 처리되지 않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같은 세계가 우리 인식의 범위에 들어 온 결과일까?] 챔피언스리그가 명실상부 세계 최고 프로팀을 가리는 경기이고, 박지성이 아시아인 최초로 그 결승전에 참여하는 것이 뉴스거리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준결승 이후 그 얘길 반복해서 들어야 하니 괴로울 따름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정보가 아니다. 물론 반복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정보이긴 하다. 한국기자들 참 끈질기고, 공부안한다는 그런 정보 말이다 (앗차차. 사실 그것도 이미 알려져 있긴 마찬가지 ㅎㅎ). 한국 언론, 아니 다시 정확히 표현하자, 인터넷을 통해서 관찰한 한국 언론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 (한국 언론계에 몸 담고 계시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 그러니, 별로 열받으실 필요없다. 읽을 리도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하정우. 칸영화제에 3회 연속 참석하는 신기록 혹은 대기록을 세운 모양이다 [아시아 운운하는 게 없는 걸 봐서 한국신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왜 '한국인 최초...' 같은 이틀을 붙이지 않고, 소심하게 '쾌거'라고만 표현했을까. 신기록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던 탓일까? ㅎㅎ 칸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하나라고들 한다 (이런 '세계 .. 대' 운운은 주로 '후진국'에서 자는 등장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 해석틀의 원천은 일부 잘 나가는 나라의 서구중심주의자, 혹 민족주의자들이 지들 중심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영화제에 3회 연속 '참석'(sic! not 수상!)이라니. 대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naming, framing (혹은 titling?)은 그런 기록이 많아질수록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주지 못하게 된다. 스스로 후진국으로 느끼고, 그런 기록이 드물어야 '세계최초' '아시아 최초'라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사건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미 아시아에서는 잘 나가는 나라가 되었으니 아시아 최초, 동양최초라는 표현은 벌써 퇴조기에 있는 해석틀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 탓인지 박지성의 아시아 최초는 반갑기까지 ㅎㅎ), 세계최초도, 글쎄, 왠지 진부하단 느낌이 든다. 이런 변화는 루만의 이론에 따르면 전형적인 구조와 의미론의 공진화 현상이다. 세계 차원에서 평가하기라는 의미부여작용과 세계 차원에서 평가받는 성취이루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당기면서 함께가는것. 구조적 차원에서 한국의 위상에 비쳐볼 때 칸 영화제 3회 연속 참석을 두고 쾌거 운운하는 건 의미론적 지체현상일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런 프레이밍도 역시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의미론적 변이(variation)가 덜 활발해질 것이다.

2008년 5월 15일 목요일

Edward Hopper (1882 - 1967)

몇 년 전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여하튼 베를린에서 MoMA 전시회가 있었다. 포츠담광장 근처였던,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전시관에서 뉴욕의 MoMA, 그러니까 The Museum of Modern Art 소장 작품이 대거 전시되었던 것이다. 뉴욕 그 미술관을 대폭 뜯어 고치는 중이어서 일부 작품들이 독일로 오게 된 것이었는데 독일 내 반향이 대단했다. 우리가 갔던 날도 입장까지 2시간 가까이 기다렸어야 했을 정도로. 그런 집단화된 행동의 근거는 뉴욕까지 가지 않고서 미국이 자랑하는 소장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합리적' 판단이었을까? Rational choice? 그 보다는 유명세, 호기심, 분위기 탓이 아니었을까? 나를 보더라도... 어찌되었건 그 일원이 되어 관람한 결과, 오랜 기다림에 비해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일단 전시 작품의 수가 - 내 기대 혹은 예상에 비해 - 턱없이 부족했고, 대개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것이었고 원본만이 갖는다는 그 아우라도 (W.Bejamin)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게 현대미술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장르 혹은 표현형식 개발이 중요해져서 처음에는 충격을 주는 신선한 시도였겠지만 다른 매체를 통해서 익숙해지면 원본을 봐도 그저 그만이거나 심지어 촌스럽게 느껴지는... (대표적으로 앤디 워홀). 그나마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게 바로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었다. "Gas" (1940)라는 주유소 풍경을 그린 그림을 비롯 몇 점 선 보였던 것 같다. 대번 "아, 미국이구나..." 그런 생각을 들게하는 그림들이 었다. 미국식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로치면 코엔 형제들 작품들). 어떤 요소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까? 최소한의 소리만 들릴 것 같은 그런 한산한, 심지어 스산한 분위기, 그러다 한 방 총소리가 갑자기 정적을 깰 것 같은... (cf. 영화 'no country for old men'). 그리고 표정없는 얼굴들, 심지어 인물이 중심에 위치한 그림에서마저도... 움직임도 그리 많지 않아서, 대개 사람들은 그저 배경을 이루는 다른 사물들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정지해 있다 (그나마 'Gas' 속 주유소 직원 아저씨가 움직임을 보이는 편). 익명성? 파편화된 개인? "호퍼의 그림 속에서 인물들은 최소한의 언어만 사용할 듯하다."(정윤수). 우리에게 익숙한 뉴욕이나 헐리우드 같은 겉옷을 벗기면 드러나는 미국의 속살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호퍼 스스로는 ‘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도시의 고독을 그렸다’고 말했다는데... 대도시? 소도시?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오늘 5월 15일이 이 호퍼의 사망일이란다. (요즘 내가 즐겨 보고 있는 정윤수씨 블로그에서 얻은 정보. 태어나고 죽은 날짜가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정윤수씨는 지금 그 날짜를 실마리삼아 365일 동안 매일 뭔가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나는 그 블로그에서 가끔씩 쓸 거리를 줏는 것이고... 아래는 호퍼 그림을 모아 놓은 영상물. 그 중에 나오는 인용구가 인상에 남아 옮겨 적는다. 호퍼씨 왈, "If you could say it in words there would be no reason to paint")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사회학은 경험학문, 하지만 '경험'이란?

"사회학은 의심의 여지 없이 경험학문으로 이해되는데, '경험적'이라는 개념은 대개 데이타 수집과 분석, 즉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에 대한 해석으로 좁게 이해된다. 분명하게 관찰되는 事態를 다양한 이론과 구분방식을 사용해서 다른 식으로 記述하는 가능성은 이 같은 좁은 이해에 따르자면 고려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다루려는 주제에 대해선 상당한 이론기술적 지식을 전제로하는 이런 방식을 적용할 때 더 많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Denn] Soziologie versteht sich ganz vorherrschend als empirische Wissenschaft, versteht dann aber denn Begriff des 'Empirischen' sehr eng als eigene Erhebung und Auswertung von Daten, also als Interpretation einer selbstgeschaffenen Realität. Die Möglichkeit, unbestrittene Sachverhalte mit variierten Theoriekonzepten, mit anderen Unterscheidungen anders zu beschreiben, kommt ihr dabei nicht in den Blick. Gerade diese Methode, die allerdings ein erhebliches Maß theorietechnischen Wissens voraussetzen würde, könnte aber für unser Thema die ergiebigere sein."

Luhmann, Niklas (1992), Beobachtung der Moderne.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S.19)

조깅 중에 만난 풍경




유채꽃이 지기 전에 디카로 담아두려고 했는데 오순절월요일에 실행했다. 노란색이 실제보다 어둡게 나왔는데 햇볕 탓일까. 채도 조절 기능이 있을텐데 그걸 써야 할 듯. 꽃 위에 '떠 있는' 대학 건물은 꼭 항공모함같다 (혹은 누구 표현대로 '포항제철'. 굴뚝까지 보이니 더더욱...). 외모가 참 거시기한 우리 학교 ㅠㅠ (그렇담 성격이라도 좋아야 할텐데 그런가...)

과학, 정치

미쇠고기 수입 논쟁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등 3개 교수 단체는 13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환경재단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을 즉각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기사 참고). 이 기자 회견문에는 경제학, 정치학, 의학 등 각 분야 교수와 연구자를 포함해 총 1008명이 서명에 동참했다는데... 음. 교수 단체가 어떻게든 움직이는 건 시의적절한 것 같은데 전략적으로는 좋은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번 광우병처럼 서로 다른 지식주장이 정치이슈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교수 정도 되는 전문가들이, 그것도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며 개입할 때 가장 영향력 있는 방식은 현재 관련분야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과학지식을 건조하게 알려주는 것 아닐까. 언론이나 기타 논쟁의 당사자들은 마음먹으면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 전문가를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의 발언에는 특별한 힘이 실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성명서를 발표한 주체인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는 너무도 정치색 짙은 조직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프레시안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다: "지난 3월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2500여 명의 교수들이 이름을 걸고 나선 데 이어 다시 한 번 교수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전문지식이 아닌 교수단체의 정부정책에 대한 반대가 부각되는 것이다. 이 조직들은 또 늘 정부의 결정에 반대할 때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가.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되는 것이 도움이 될까? (국제 협약 통상문제 전문가들로 표현되지는 않는 그냥 경제학, 정치학...).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나 같은 학교 수의대 우희종 교수가 그나마 해당 분야 전문가로 등장하지만 좀 약하지 않은가? 더구나 의학자, 수의학자라고 해서 광우병에 대한 전문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렵지 않은가. 나름 광우병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판이니...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외국 전문가들의 발언, 의견을 따와서 전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광우병 연구자 네트워크가 세계적으로 분명히 있을 텐데. 광우병을 연구하는 관련 학자들이 정말 어떤 견해를 더 지지하는지 '탐사'하지 않고, 그저 늘 그렇듯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만 구색맞춰서 보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반대하는 이들도 어째서 그런 일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단호하게 얘기할 정도로 내가 언론보도를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닌긴 하다. 하지만 여러 티비 토론 프로그램의 경우 인터넷 신문들 보도보다 그리 사정이 나은 것 같지 않고, 혹 피디수첩 정도가 관련 학계의 견해를 심도있게 보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경우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과 정치를 분리할 필요가 있겠다. 과학적 논증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글쓴이 일단 사라짐. fade out...)

(다시 등장). 이렇게 써 놓고 또 다른 기사를 보면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지금 미쇠고기수입 '사태'는 "광우병 괴담"운운하며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 논쟁하던 단계를 지나 '재협상' 국면으로 넘어간 듯하다. 이미 '충분히' 알려진 과학지식, 반대여론 등을 등에 업고 재협상을 촉구하는 측과 협상은 기본적으로 불가하고 광우병 발생시 GATT 조항에 의거 수입중단할 수 있다는 정부 측 입장이 대립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과학정치' 진행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건 아닐까? 황우석 사태 때도 초기에는 논문의 진위 여부가 핵심 논쟁거리였지만, 논문의 조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이후에 지지자들은 쉽게 다른 이슈로 (예를 들어 원천기술) 논쟁의 방향을 틀 수 있었으니까. 그럼 결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정치는 정치요 과학은 과학? 과학정치도 결국은 정치?

2008년 5월 12일 월요일

루만, 부르드외, 기든스

"루만은 심리체계와 사회체계의 기본구분을 기초로 데카르트, 후설, 뒤르카임에 의지해서 의식과 사회 사이의 내부/외부 차이 위에 이론을 세운다. 그에 반해서 부르드외와 기든스의 문화이론은 소쉬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지해서 이 내부/외부 차이와 거리를 두고 대신 지식구조와 행위실천의 분석적 기본차이에서 출발한다. "

Reckwitz, Andreas (1997), Kulturtheorie, Systemtheorie und das sozialtheoretische Muster der Innen-Außen-Differenz. In: Zeitschrift für Soziologie 26: 317-336.

이런 식의 프레이밍(혹은 범주화)엔 늘 왜곡의 위험이 따르는 법이지만 그걸 감수하지 않고서야 도무지 이론들을 비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두 문장에 8명의 학자를 등장시켜 편을 가르는... ㅎㅎ). 아주 신선한 구분이고 설득력도 있다는 '심증'은 가지만... 글쎄...

2008년 5월 10일 토요일

그 많던 시장주의자들은 다 어디 갔는가?

이명박 정부 출범 무렵 새정부의 철학부재를 걱정했었는데 (아래 "실용주의, 레토릭 혹은 현실"을 볼 것) 최근 그 걱정이 속속 물질화되고 있다. 사실 노무현 정부도 만만치 않았다. 좌측 깜빡이를 넣고 운전대는 우측으로 틀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은데, 대표적 두 가지 사례만 언급하자. 대연정 제안과 FTA (FTA는 나도 잠시 혹 했다가 이번 쇠고기 사태를 겪으면서 정신을 차렸다는 점 고백한다. 요새 노무현 형님 쪽 분위기가 집권 때 보다 훨씬 더 좋지만 언제가 이 점 꼭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태인씨 파이팅!). 이 정부는 시장주의자인척하다가 (대표적 발언: '경부운하 민자사업이다, 민간에서 사업 제안하면 검토할 것'. '쇠고기 수입해도 소비자가 안 사 먹으면 된다'), 필요하면 박통 때인양 물가관리 대상을 임의로 선정해 관리하려 든다. 최근 미쇠고기 수입도 그런 사례인데, 이런 점을 꼬집은 시원한 글을 읽었다. 문화평론가 (근데 뭐하는 직업?) 김헌식씨가 데섶에 올린 (이 정도는 돼야-)칼럼이다. 제목: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도 웃을 MB 정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시장 민주주의에 반한다. 몇 대목만 인용한다: "이명박 정권은 지겹도록 시장의 역할을 강조해왔지만, 정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에서 시장의 원리를 스스로 위반했다". "이명박 정권의 구성자들은 시장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는 많은 시장주의 매체들과 학자들은 이러한 시장주의의 기본원리도 지키지 않는 이명박 정권을 내버려 두고, 오히려 소비자주권을 찾으려는 국민들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그 어떤 정치이데올로기보다 급진적일 수도 있고, 최소한 지향해야 할 여러 가치를 담고 이는 정치철학라고 생각한다. 고맙게도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수십년동안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국가이데올로기 중 하나였다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국가로 기술(記述)되지 않았던가. 자유주의 + 민주주의). 문제는 그 자유주의를 '자유총연맹'같은 친미극우세력 (친외세와 극우는 친하기 힘든 사이인데 한국전쟁 탓인지 우리 나라에서는 찰떡궁합이다)들이 독점하고 있었다는데 있다. 사이비 아닌 자유주의자들의 커밍아웃은 최근 현상이니까말이다 (고종석, 유시민 등).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 그리고 정치의 비극은 인류역사 최근 수세기를 거치며 정련된 시장주의자들이 아니라 ('시장에 맡겨라'를 주문처럼 외우는) 천박한 시장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많던 시장주의자들은 다 어디 갔는가? 어쩌면 그 많던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중에 막상 자유주의자가 없었던 것처럼, '제대로 된' 시장주의자 찾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A: 가가 가가 가가?
B: 아닌 것 같은데요...

다시, 대중

'대중'이란 단어를 자주 쓰긴 하는대 쓸 때 마다 좀 걸리긴 하다. 사실 대중이란 표현으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실체가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국민의 뜻'에서 그 '국민'도 그렇고. 그런 위험을 피하려면 이름이 길어진다. 미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 혹은 대중들. 음.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특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수입을 반대하는 것 아닌가. 촛불집회에 수 만이 모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대중인가? 대한민국 인구수에 비하면 턱 없지 적은 수 아닌가? 여론조사? 직접 물어 본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그들의 의견마저 언론 등을 통해 조작을 반영한 것이라고 얘기하면 할 말 없다. 대중은 철저하게 언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언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통제 메카니즘이 있으니까. 대중은 합작품이다. 언론, 인터넷, 정치, 사회운동 등등이 합작해서 만들어 낸 새로운 질서이다 (emergenz). 그 어느 단위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는 현대 사회이론에서 이런 co-evolution 적 시각이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생각한다. 가장 래디컬하다고 여겨지는(것 같은) Latour가 얘기하는 human/non-human 간의 관계도 결국 co-evolution아닌가?] 대중을 우선 대략 그 정도로 정의하자.
이 대중은 이슈에 따라 매우 다르게 조직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만 생각해 보자. 금모으기, 월드컵, 반미, 탄핵반대, 황우석, 디워, 이번에 미쇠고기. 내가 아래 글 '그 때 그 사람'에서 쓴 것처럼 다른 혹은 같은 사람들이다. 왜, 언제 동원이 될까? 우회하도록 해보자. 황우석씨의 경우 광우병내성 소를 만들려고 했늗네, 그 내용은 결국 유전자 조작이다. 일부가 그런 점을 지적했지만 그 때문에 반대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없다. 반면에 유전자조작식품(GMO)에 대한 거부감은 한국에서도 상당하다. 학자들은 GMO 반대여론 형성의 이유 중 하나로 소비자들에게 실제적인 유용성이 없음을 들고 있다. 미쇠고기의 경우 대중은 위험의 가능성만 높아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명박씨는 초기에 싼 소고기를 먹을 수 있게되었음을 강조했다. 한국 소비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고 본 것 같은데, 참 생각이 짧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한우가 비싸다고 한들 광우병 위험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수입되는 소고기를 환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참 절망스럽다. 푸른기와집에서마저 그 많은 여론전문가, 위험연구자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구는 얼리버드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잠이 부족하다보니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대중은 쇠고기에 그리 목매달지 않는다. 대체제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어떤 실제적 이익이 떨어지는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어야 했다. 한국에서 대중이 형성되는 메카니즘을 보자.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석틀은 여전히 경제성장, 잘먹고 잘살기다. 2MB는 왜 자신이 당선되었는지를 성찰해 봤어야지. 이명박씨가 너무 경제만 밝혀서 국민들이 질렸다? 천만의 말씀. 취임전후 지속된 이명박 정부의 여러 헛발질은 그 몰경제성, 비실용성 때문이다. 영어 몰입교육, 대기업친화적이기, 미쇠고기수입, 혹은 미국, 일본과 관계 개선이 왜 실용적이며 어떻게 잘먹과 잘사는 것과 연결되는지를 설득시킬 수 있었어야지. 대중은 그리 지고지선하지 않다.

진중권의 대중

수 년전부터 진중권 교수의 발언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고, 대한민국의 그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열렬한 안티팬을 거느리는 인사가 되었다.특히, 황우석, 디워 논쟁에서 대중의 선동성을 까칠하게 지적하면서 '대중'을 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요즘 미쇠고기 사태와 관련해서는 - 스스로도 낯설게 느끼는 - 그 어느 때보다 그에게 우호적인 대중들 속에 있는 것 같다. 재미있는 건 그 '와중에' 대중에 대한 그의 견해도 달라진 것 같다는 점. 황우석, 디워 때는 대중의 광기를 지적하던 그다 (그가 대중독재, 대중파시즘 같은 표현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그런 해석틀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번 미쇠고기 사태처럼 자신의 주장과 대중의 주장이 일치할 때 그는 이제 대중을 보호하는 기사로 등장한다. 다음은 인터뷰 일부 (출처).

-전에 지식인의 중요성을 언급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
"전문가, 지식인이 대중의 '사수대'가 돼야 한다. 대중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중이 마음껏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게끔 그들이 도와줘야 한다. 대중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 보수 언론은 계속해서 색깔론을 펴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옆에 있는 학생을 가리키며) 누구의 사주 받았나? (웃음) 학생들은 성숙하다. '빨갱이'의 사주에 현혹될 애들이 아니다. 아직도 그들은 학생들이 대중을 이끌고 길거리로 나온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은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갖고 있다."

오. 대중에 대해 그리 강한 신뢰를 가지고 계셨나? 지식인은 대중을 보호해야 한다? 왜 황빠, 디빠들은 보호해야 할 대중이 아니었고 그의 독설의 대상이 되었을까? [지식인, 대중, 이런 이분법도 애매하긴 하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대략 동의하는, 만들지고 있는 경계는 있는 것으로 생각하자]. 그러다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와 대중의 반응이 일치할 때 대중은 지켜줘야 할 무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양반 늘 안티를 몰고 다니다가 - 말, 행동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 이번에는 모처럼 폭넓은 지지를 받으니까 많이 느슨해진 건 아닌가 모르겠다. 많은 발언을 하는 사람일수록 분명한 관점, 세계관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 세계관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을 때 '실용주의' (2MB 식)에 빠져드는 것이다. 지식인은 대중과 긴장관계를 풀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은 언제나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먹물(평론가) 노릇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출처는 모르겠지만 디워논쟁 때 진중권씨가 어디에선가 한 얘기다. 진중권씨가 성숙하다고 인정한 고등학생들. 과연 그런가? 왜 그 아이들이 몇 년 전 황우석에게 기회를 주도록 요구하던 그이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2008년 5월 9일 금요일

과학적 불확실성

광우병 관련 논점 중 하나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광우병 사망자가 200여명이라는 것. 이는 '광우병 걸릴 확률은 벼락맞을 확률보다....' 이런 진술로 연결된다. 하지만 - 언제나 그렇듯 -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이 인간 광우병이라는 것이 치매 증상과 원체 유사해서,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낮은 아주 젊은 사람들 외에 한 4~50살만 넘어가도 그냥 치매로 치부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 "‘매드 카우보이’ 라는 책으로 유명한 하워드 라이먼"가 이런 근원으로 인용되고 있다 (아카데믹 과학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개...). 미국에는 450만 명의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있는데, 피츠버그 노인병원이 예일대와 함께 사망한 치매 환자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의 13%나 되는 노인들이 치매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 광우병 증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13%를 450만에 대입하면 물경 50만 명이 넘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사실은 광우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말이 되어 버린 것. 이상은 영국에서 살다 온 것 말고는 광우병과 별 관련 없을 이가 딴지에 (이런 것도-)칼럼이라고 올린 글의 앞부분 내용이다 (딴지스럽긴 하다). 이런 건 참 '광우병 괴담'스럽다. 그 피츠버그 노인병원과 예일대 연구 내용을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저런 딴지스런 진술로 그들의 연구가 해석된다는 걸 알면 분명 펄쩍 뛸 거다. 과학은 좀 과학으로 놔두면 안되나. 우리의 네티즌들 황우석사건 때 모두 줄기세포연구 전문가가 되더니 이제는 다들 광우병 전문가들로 전향하시는구나. 그 배후에는 ... 음... 내가 보기엔 ... 언론과 정부가 있다. 의도적으로 함량미달 기사들을 양산하거나 어설프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우리 '네티즌'들의 탐구욕, 어린 시절 이후 숨겨져 있던 '과학'에 대한 열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중 몇이라도 전문가의 길로 나서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식사회로 가는 길에 어쨌든 도움이 되는 일 아닌가.ㅎㅎ 안타까운 일은 '진짜' 전문가들 쪽 사정도 크게 나아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 전문가다운 발언이 희귀한 세상이다.

광우병 논쟁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인간광우병에 취약하다는 논란의 시발점이 된 논문을 냈던 한림대 김용선 교수는 9일 '유전자가 질병 발병의 중요한 한 요인이지만 유전자 하나 만으로 인간광우병에 잘 걸린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단다. "핀란드로 출국했던 김 교수는 이날 오후 1시 10분쯤 KE906편으로 귀국, 최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에 대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사실 이런 언급은 8일 KIST 신희섭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아니다. 그는 '김 교수의 논문은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vCJD)이 아니라 아직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산발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sCJD)에 대한 것'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교수의 언급도 애매하긴 하다. vCJD와 sCJD가 단지 감염경로만 다른지 아니면 발생기전이 다른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선 교수는 유전자와 광우병 발생 관계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번복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요인이 광우병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것만 놓고 보면 '미쇠고기 수입업자'들이 그리 좋아할 발언도 아니다. 언론은 워낙 지들 맘대로 과학 진술을 보도하니까 (무식하니까 쉽게 왜곡한다), 언론보도를 가지고 과학적 논쟁을 재구성할 생각을 포기하긴 해야 한다. 김용선 교수는 9일 '전세계적으로 광우병 발생 환자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아직 발병 기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대응이다. 과학적 사실은 흔히 대중들에게 사실로 알려지나 - 언론은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 조금만 다그치면 대개 불확실한, 잠정적 지식으로 '후퇴'한다. 언론 혹은 '정치적' 목적에 써 먹으려는 이들은 논쟁적인 주제일수록 쉽게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과학'사실'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언론이 누구를 광우병 전문가로 만들어 가는지도 지켜 볼 일이이다.
또 대한의사협회(의협)도 9일 광우병에 대한 학술적 견해를 내놓았다고 한다. 연합신문 보도를 보니 나름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는데, '좋은 얘기'는 다 해 놨다. 그러면 누구나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연합은 기사제목을 "의협 '광우병ㆍCJD 등 프리온 질환 감시시스템 구축'"로 뽑았다. 건조한 편. 다른 신문들은 더 논쟁적인 이슈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전하면 대문에선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의협 '광우병 소 먹는다고 인간광우병 걸리는 것 아니다' (기사의 제목은 연합 그대로). 한겨레나 많은 언론싸이트는 같은 기사를 전재(轉載)하면서 [의협 "한국인 ‘사람광우병’ 취약 결론 낼 수 없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언론이 실제를 전달하면서 왜곡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언론 없이 우리는 실제에 접근할 수 없다. 언론을 통해서 실제가 비로소 실제가 되는것(cf. N. Luhmann 1996, Die Ralität der Massenmedien).

프리온

신문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광우병 이야기를 듣지, 아니 보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후반 영국에서 한참 광우병으로 시끄러울 때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최근 수입 쇠고기 사태 덕에 배우는 것이 많아진다. 인터넷에는 찌질이들이 아는 척 써 놓은 것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데 믿을만한 내용이 한글 위키피디아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큰 품 들이지 않고 파악할 수 있다 . 광우병을 이해하는 핵심은 프리온(Prion)인데 이는 단백질성 감염성 입자(Proteinaceous Infectious Particle)의 줄임말이다. 단백질을 뜻하는 'protein'에서 pr을, 감염성을 뜻하는 'infecious'에서 i를, 입자를 뜻하는 접미사-on을 붙여 만들었다. 1997년 미국의 스탠리 프루시너가 프리온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하였고 하니 참 최근 일이다. 프리온은 바이러스와 대단히 흡사하긴 하지만 살아있는 세포가 아니라 단백질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살아있지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이 단백질은 좀 특이하다. 유전자 없이도 증식을 할 수 있다. 정상적인 형태일 때는 문제가 없으나 어떤 이유로 분자구조가 미세하게 바뀌게 되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분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수백 도의 높은 온도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기타 자외선, 소독물질, pH의 변화 등 외부환경에 대단히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바이러스를 포함한 일반적인 미생물의 소독 방법으로는 불활화가 불가능하다. 고압증기멸균(autoclave)기에서 134도로 18분 이상 가열하면 성질이 변형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주변의 정상 프리온들까지 물들여버린다는 사실. 똑같은 변형 프리온으로 바꿔버린다. 이 변형 프리온이 소의 몸 안으로 들어간 경우를 생각해보자. 결코 대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주변에 같은 형태의 변형 프리온들을 늘려나갈 것이다. 이 현상은 뇌세포에 치명적이다. 정교한 기계에 난데없이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꼴이 된다. 그 구멍들은 점점 커질 것이다. 뇌 기능을 마비시킬 것이고 결국 생명을 위협할 것이다. 이것이 광우병이다. 이 불행의 메커니즘은 인체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프리온 인자는 단백질 구조를 다시 접음(refolding)으로써, 정상적인 단백질 분자를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진 단백질로 변환시킨다고 알려져있다. 가설이 있다. 알려진 모든 프리온들은 아밀로이드 접힘(amyloid fold)을 형성한다. 프리온은, 중추신경계에 쌓여서 아밀로이드라고 알려진 반점(plaque)을 형성함으로써 정상적인 조직구조를 붕괴시켜 신경퇴행성질환(neurodegenerative disease)을 일으킨다. 이런 현상은 뉴론의 공포(空胞; vacuole) 형성으로 하여 생기는 스폰지 모양의 구조로 인해 조직 내 “구멍”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바뀐 구조는 극히 안정적이며 감염된 조직에 축적되어, 조직손상과 세포의 사멸을 일으킨다. 프리온 질환의 잠복기는 상당히 길지만 일단 증상이 발현하면 질병은 신속히 진행하여 뇌손상과 사망에 이르게 된다. 신경퇴행성질환의 증상은 발작이나, 치매, 운동기능장애 및 성격이나 행동의 변화 등이 있다.
알려져 있는 모든 프리온 질환들은 치료방법이 없으며 치명적이다. 하지만 쥐에서는 백신이 개발되었는데 사람에서의 프리온 감염을 막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더해 동물에서 프리온 단백의 발현을 막는 유전처리를 함으로써 프리온 감염에 내성을 갖게 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물건너 간 황우석 씨의 광우병내성소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 되겠다].
프리온은 포유류에서 몇 종의 질환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흔히 광우병(mad cow disease)이라 부르는 소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과 사람에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 등이 있다. 다른 종 간의 프리온 단백질 간에는 작은 차이가 있어 종간의 프리온 질환 전파는 흔하지 않긴 하지만 인간의 프리온 질환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의 경우는 소에서 감염을 일으키던 프리온이 감염된 육류를 통해 사람에게 질환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우병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쓴 김기흥 박사에게 얻어들은 바에 따르면 영국에서 그동안 양이나 염소에서 발병하는 '스크래피'란 질병에 대한 기록이 오래 전부터 (그 양반 인터뷰를 보니 250년전부터였던 모양이다) 있었다고 한다. 그건 우리가 흔히 광우병이라고 하는 소해면상뇌증(BSE)의 원조 격으로 보는 것이고. 책으로 출간된 그 논문의 제목이 The Social Construction of Disease. From Scrapie to Prion (2006, Routledge) 인데 부제가 좀 거시기 하다. 스크래피는 질병이름이고 prion은 발병인자인데 from...to.. 호응이 안되는 것 아닌가? From Scrapie to BSE 라고 해야 더 논리적일 것 같은데...
이 양반을 손석희 시선집중에서 인터뷰했는데 누군가 친절하게도 그 녹취록을 올려놓았다. 녹취록을 읽어보니 한 편으로 씁쓸하기도 하다. 광우병 자체가 아닌 광우병의 사회사 혹은 사회학을 대중들은 어디에 연결시켜야 할 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도 어쩌다 보니 과학, 기술 관련된 주제를 디플롬 시절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데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내 디플롬 논문 주제가 유전자조작식품 (GMO)였는데, 정확하게 이야기하지만 GMO 규제 논쟁이었지만, 어쨌든 한국에 가니 가족 중 한 명이 묻는 것이다. "그래, 도대체 GMO가 안전한 거야, 먹어도 되는거냐구?" 당연 나는 거기에 대해 별로 해 줄 얘기가 없었지만... 또, 언젠가 베를린에서 열렸던 생명공학 반대운동가들 컨퍼런스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사회학도로서 생명공학 문제 연구하기'가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확이할 수 있었다. 생명윤리학과 구분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고, 생명공학에 대한 의식조사를 떠 올리는 이도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과학 혹은 학문에 대한 기대는 경험적으로 확정된 지식 제공인 것 같다. 아무리 과학 지식의 불확실성, 전문가들 간의 의견불일치를 경험했더라도, 여전히, 지지치 않고, 자연과학자들에게 전문가적 소견을 묻는다. 한번도 예측이 맞은 적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다음 분기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반복해서 경제학자들에게 묻는다. 거기에 대해 전문가적 아우라를 가지고서 소수점 아래까지 숫자를 제시하는 경제학자들. 그렇게 자신있게, 분명한 확률, 수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학문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왠지 찌질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학문의 유용성, 실용성에 대한 기대의 변화... 중세 때 신학은 매우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복잡성을 척척 감소시켜 주었으니까. ...

2008년 5월 8일 목요일

과학 정치

며칠 전 최근 광우병 논쟁에 '과학'적 진술이 자주 등장한다고 썼었는데, 이제 본격적인 과학논쟁으로 접어 드나보다. 조중동은 촛불문화제 혹은 시위로 고조된 저항을 광우병 '괴담'으로 프레이밍하더니 이제 그 근거로 과학적 진술을 가져오고 있다 (언론이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는지가 더 재미있다. 정부 쪽의 그 찌질한 발언, 대책보다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발언을 강화한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이현구)이 주최한 ‘광우병과 쇠고기의 안전성’ 원탁토론회가 열렸단다 ('과총'도 9일 설명회를 열 예정). 이런 민첩하게 대응하는 모습, 평소 과학자들답지 않다. 황우석 사태 전후 그 여유로움은 어디 가고 ㅎㅎ 그 동안 이런 '정치적' 논쟁 (im Sinne von '2MB')에 과학자들이 앞장서거나 과학지식에 대한 발언이 정치적 논쟁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갑다 '지식사회'. 사회학자 혹은 STSer들이 분석할 made in Korea 논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을 보여주는 전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길지만 논점을 남겨둔다는 점에서 기사를 대폭 인용하기로 한다.
우선 초기 한국인이 광우병에 유독 취약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 한림대 김용선 교수 연구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인간광우병이 아니라 다른 질병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희섭 신경과학센터장은 8일 오후 KIST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교수의 논문은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vCJD)이 아니라 아직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산발형 크로이츠펠트야곱병(sCJD)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vCJD는 광우병에 걸린 소에서 비롯된 질병으로 주로 영국 20대에서 발병했다. 반면 sCJD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발병하는 질병으로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발병한다".
문화일보는 또 서울대 이영순 교수의 발언을 이렇게 보도한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 인터넷 기사에서 인용된다. 조선은 문화에선 안 보이는 사진까지 덧붙였다. 두 기사를 비교해 보니 '사진'의 효과도 있을 것 같다. 나이지긋한 점잖[아 보이]는 남성의 모습 발언의 근거에 신뢰감을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국내 학계에서 광우병 관련 최고 권위자인 누가 최고 권위자라는 지위를 부여했을까? 이영순(서울대 인수공통질병연구소장·전 식품의약품안전청장 이전 경력 꼭 써넣을 필요는 없는데 왜? 알 만한 사람은 안다ㅎㅎ)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광우병은 원인이 밝혀졌고 곧 사라지게 될 질병'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특히 '광우병 감염 위험성이 있는 소라 하더라도 고기나 우유는 안전하다'고 강조했다.이 교수는 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원장 이현구)의 ‘광우병과 쇠고기의 안전성’ 원탁토론회 주제 발표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의 살코기와 우유의 경우 아무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다'며 '문제가 되는 뇌 등 특정위험물질(SRM)의 경우도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이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 앞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프루시너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프리온 단백질이 광우병의 원인임을 밝혔고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동물성 육골 사료를 모두 금지시켰다'며 '이에 따라 광우병은 1993년 3만5000건에서 2007년에 141건으로 급격하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우병은 호흡기, 접촉 등으로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 아니라 프리온이 든 물질을 먹어야만 걸릴 수 있는 전달병(transmissible disease)'이라며 '따라서 이미 밝혀진 SRM이 축적되는 부위만 전 세계가 통제할 수 있다면 광우병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수억 마리의 소가 도축됐지만 그중 3마리만 광우병에 걸렸을 뿐'이라며 '식품에서 100% 안전한 것은 없으며 이 정도 확률이면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식품보다도 더 낮은 수치'라고 말했다." 위험논쟁에서 전형으로 등장하는 수사다: '100% 안전은 없다'. 또 친근한 위험과 문제가 되는 위험을 대비시키며 얼마나 확률이 낮은지를 보여주는 방식도 애용된다 (이미 여러 번 그런 주장을 읽은 것 같다. '광우병 걸릴 확률은 ...' 운운하는 ). 이와 대척점에 있는 레토릭은? 대표적으로 '사전예방의 원칙'(의심스러울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과학지식의 불확실성' 논변이 있다. 그리고 이 쪽 진영에서는 위험이 새로운 것임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관전 포인트를 이후 저항 진영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두어야 한다. 다른 과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할까? 저항 쪽에 있는 이들은 어떤 과학지식을 근거로 삼을까? 특히 초기에 한국인이 광우병에 취약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 연구결과를 발표한 김용선 교수 팀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주목된다. 이들이 다른 학자들의 반론을 인정하는 순간 저항의 근거는 급속로로 약해지리라. 이들이 '잠수'를 탄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까?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다른 학자들은 없는가? 적어도 과학계에서는 그가 소수 입장을 대변하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 지금 상대는 과학한림원, KIST, 서울대, 식품안전청 아닌가? 아무래도 무게 중심이 그 쪽으로 쏠려있는 형국이다. 지난 밴쿠버 STS 학회에서 김모박사가 한국 광우병 연구자의 의심쩍은 행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었는데 ,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연구자는 강원도 쪽 대학에 재직중이었다. 흐음. 그렇담 더 흥미로와진다. STS 쪽 논문 쓸 거리들이 그냥 여기 저기 널려있다.

여백

꽉 채우지 말고 늘 빈 공간을 조금 남겨둬야 한다. 노골적으로 다 드러내 버리면 매력이 떨어진다. 사람이 그렇고, 영화, 그림, 음악도 그렇다. 호/불호를 감추지 못하고, 입에 걸린다고 다 뱉어내면 속은 시원할 지 모르겠지만... 예술작품도 해석의 가능성을 남겨 둬야 한다.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는 것 그건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포르노, 이발소 그림). 글을 쓸 때나 읽을 때도 여백을 남겨 두어야 한다. 어짜피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 아닌가.

2008년 5월 5일 월요일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날. 1818년 이 날 트리어에서 맑스 선생이 태어났고, 2008년 오늘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셨다.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냥 우연히 날짜가 겹칠 뿐이다. 굳이 내 안에서 연결시켜보자면, 둘 모두 내가 나름 애정을 들였지만 제대로 읽지 못했던 책을 쓴 이들이라는 정도. 공교롭게 그 책들은 그들의 주저였다. 맑스의 "Das Kapital". '이론과 실천사'에서 나온 그 번역본을 사서 방학을 맞아 고흥 외가에 바람쐬러 가던 길에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서 읽어보려던 호기가 가상할 따름이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사회학도로서 대략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은 '토지'다. 나름 한국 현대문학을 섭렵하던 대학 시절 유독 '토지'는 읽기가 힘들었다. 그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던 토지가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세로쓰기판이었던 탓이기도 했다. 이후 가로쓰기판이 곧 나왔고, 또 그무렵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TV로 방영되기까지했지만 난 책도, 드라마도 찾지 않았다. 대하소설은 줄거리를 쫓아가야 하므로 아무데서 내키는 대로 읽기가 힘들다. 시간과 인내력을 갖고 읽어가며 발동이 걸리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토지에서는 그 '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이병주, 이문열, 조정래 등이 쓴 대하소설은 큰 어려움 없이 밤을 새워 가며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고 보니 호평을 받는 최명희의 '혼불'도 못 읽었다.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쓴 '대하소설'의 문체에 뭔가 독특한 게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잘 좇아가지 못하게 하는...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또 재미있게 읽었으니 아무래도 혐의를 그 쪽에 두게된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런 책들은 늘 부담으로 남는다. "아니 독일에서 그 오래동안 사회학을 공부했으면서 '자본론'도 안 읽었어요?" "세상에 '토지'를 안 읽었다니... 문학 얘기랑은 아애 꺼내지도 마세요" 분명히 이런 시츄이션을 경험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읽은 척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쿨 2

21세기형 인간으로 살 일이다. 시류에 영합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란 말이다. 또 쿨하게 살 일이다. 쿨하게 사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일들을 쿨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아니 그런게 귀찮아서라도 이웃을 더 배려해야 한다. 쿨하게 사는 걸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내 적이다. 그것들을 모두 포용해 버릴 일이다. 그게 쿨한 삶이다.

그 때 그 사람?

미제 쇠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는 촛불시위 등 각종 집회가 열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촛불시위가 드문 드문 벌어진다. 효선,미순 사건, 노무현 탄핵반대 까지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허나 광기 서렸던 황우석 지지자들의 그 촛불시위를 경험하고선 촛불 왠지 반갑지 않다. 거리에 나서진 않았지만 디워 옹호자들의 그 열광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머릿수로 결정되지 않는 법임을 각인시켜 준 계기였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문제가 많은 건 분명한대 이 무리들이 그 때 그 무리들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씁쓸해진다. 일종의 '학습효과'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촛불집회(혹은 촛불시위, 촛불문화제? 어떻게 이름붙이느냐가 [naming] 벌써 '정치'행위다, im Sinne von 2MB)의 발생 구조를 좀 더 복합적으로 볼 필요는 있다. 그 사람이 그 때 사람? 분명히 아닐 것이다. 최근 '쇠고기 사태'(내 나름으로 이름붙여본다)의 원인으로 들 수 있는 두 가지 (진중권). 우선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쇠고기에만 촛점을 맞추어 대응하면 이 불 끄기 힘들다. 반대여론이 높아지는 다른 이유는 야당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두번째,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을 들고 서로 싸우는게 정치이고 대신해서 싸워달라고 선거를 통해 국회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들이 그런 역할을 못할 때 '사람들'(민중, 대중, 시민,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는 것이다. 여하튼 대중의 집단적 의사표현 방식은 6-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과 확연히 달라졌다. 운동에 지속성을 부여해주던 "민주화"라는 이슈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저항양식을 관찰하게 된다. 이슈에 따라 다른 대중이 조직된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황빠’, '디빠'로 전환하기도 하는 것이다. 투쟁으로서의 정치 시대가 지나가고 있고 '놀이로서의 정치' 시대가 열렸다고도 진단한다 (진중권). 촛불시위가지고 사회운동의 변화에 대한 재미있는 논문을 쓸 수 있겠다. 사회운동 연구하시는 분들 뭐하시는가? 이런 것 다룬 논문, 설마 있겠지, oder?

2008년 5월 4일 일요일

미쇠고기 수입

현대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부르는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한국도 당연히 그 일부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광우병'이라는 일상 경험의 지평을 뛰어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토론, 평가하고, 나아가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을 도모하기 까지 한다. 서로 다른 과학적 근거가 동원된다. 도대체 우리가 광우병과 미국 축산업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그리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프레임이 만들어 진 이후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 프레임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겐 이미 '2MB 프레임'이 주어져 있다. 누군지 기가 막힌 작명을 해냈다. 아마 본인은 '(불도저가 아닌) 컴도저 프레임'이 만들어 지길 기대했겠지만, 이번엔 수호천사역을 자처한 주류 언론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려 버렸다. 내가 평가하기에 지난 대선을 좌우했던 시대정신은 지난 10년 정권의 '연장'에 대한 거부였다. 이명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게 아니었덨 것이다. 허나 용량이 딸리는 우리 2MB는 그 시대적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정권을 넘겨받았다. 그 이후 이어진 삽질시리즈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쇠고기 괴담'에 대해서도 그 양반은 '정치 논리'라는 표현을 자꾸 쓴다. 참. 광우병 걸린 소가 듣고 정신 멀쩡해질 소리다. STS쪽에서 특히 "boundary work"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도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 도대체 그 양반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여의도 정치? 국회? 행정부에 대해 거수기 노릇하던 그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는데, 그런 '정치적' 공세를 피하려면 다른 정치적 수단을 강구할 일이지, 지금 '경제논리'로 정치 논리를 대체하려고 하는가? 그 경제논리는 또 뭐지? 그 양반의 '경제 논리'란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레토릭인 것이다. 의미론적 자원. 불행한 것은 이 정권이 출범한지 삼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나마 다행한 점은 '실용정치'를 표방하기도 하고 경찰, 정보기관원을 풀 수 있는 시절은 아니라 여론의 저항에 직면하면 어느 정도 궤도를 수정하기는 한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번번히 등장하는 수사가 또 있지. "그건 오해였습니다. 원래는.... "
재미있는 건 이제 과학적 진술이 정치 논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 5월 6일 연합뉴스는 " '한국인이 인간 광우병에 더 취약하다'는 주장의 빌미가 된 논문을 작성한 김용선 한림대 교수가 해외로 출국한 데 이어 해당 연구실 소속 논문저자 전원이 연락이 두절돼 의문을 낳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해당 논문은 지난 2004년 '인간 유전학 저널(Journal of Human Gentics)'에 '한국인에서의 프리온 단백질 유전자(PRNP)의 다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고 한다). 매우 흥미롭다. 이제 STSer들이 덤벼들 과학정치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문조작, 생명윤리가 주 이슈였던 황우석 정치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지식사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식사회의 모습을 미리 그리고선 그 특징을 한국에서 발견해 내고 기뻐하는 모습. 우리도 드디어 지식사회에... ㅎㅎ) .

사회평론가?

앞으로 시사적인 풍경에 대한 스케치를 좀 자주 해 볼 생각이다. '풍경'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사회학도에게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게 사회학적 진술의 근거이고 재료다. 늘 곁에 있어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 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전문적인 활동의 소재인 것처럼... 스케치만 해도 될 것 같다. 지금 정밀화, 세밀화를 그리겠다고 덤벼들 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실'에서 기술을 갈고 닦았으니 이제 바깥에 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훈련을 해 볼 생각이다. 또 사실 이건 마음먹지 않아도 늘상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보며 분석, 평가하는 것을 좋아할 뿐더러 안 그럴려고 해도 안 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이동진). 사회학자들의 작업을 '좀 더' 진지하고 엄밀한 진술과 시대진단적인 진술로 구분하고, 그 차이를 논문주제로 삼는 동료가 있다. 에세이적인 글도 사회이론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친구는 그런 사회학내 흐름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평론가'와 '사회학자' 정도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는 이념형적 구분이고 대개 현실은 언제나 그 중간 어드메쯤...). 역시 언제나 그렇듯이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내리막길 위에 있고 얼마나 더 내려가야 바닥을 보게될지 알 지 못하는 사회학이란 학문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오히려 '사회학자'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어설픈 사회평론, 사회참여보다 차라리 더 진지한 '사회학적' 성찰을 내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반드시 사회통계학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형식일 필요는 없다) . 혹 사회평론가로 나설 때에도 가능하면 평소 이론적 입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스케치할 때도 사회학적 성찰 (사회의 자기기술의 일부)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

공부총량 불변의 법칙

"경험 -> 이론세우기 -> 검증 -> 이론 확인 --> 공리, 법칙".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정립'한 법칙 하나가 있다: 이름하야 "공부총량 불변의 법칙". '공부량'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양화시켜 계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특정한 단위 내 개인 공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 하루나 1주일 단위로 실험해 본 결과이지만, 1달 혹은 심지어 1년 단위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일 기준으로 오전에 놀았다면 오후, 저녁에 집중하게 되고, 1주일 기준으로 주중에 놀았으면 주말에도 공부가 잘 된다는 것이고, 결국, 1일, 1주일 단위로 보면 전체 공부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일, 1주일 단위의 적용사례는 바로 내 생활 자체되겠다. 이 이론이 널리 알려진 이후 한 건의 반증사례가도 제기된 적이 없어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법칙의 첫 예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음. 널리 알려져 있다는 말은 과장이긴하다. 법칙의 발표가 점심시간 동안 Uni 와 FH 를 오가는 동안 이뤄진 그 대화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니까. ㅎㅎ). 이 이론은 최근 이 착상을 확장한 결과 1일, 1주일이라는 사소해 보이는 단위를 넘어서서 수년 간의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사례가 발견되어 이론 적용의 범위가 기대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 사례는 바로 군제대후 복학한 대학생들. 이 법칙에 따르면 '복학생들의 엄청난 공부량'도 바로 군대라는 수 년 간의 공부 공백기라는 변수도입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학계는 공부 총량의 개인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가지 이론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뇌 용적 한계설' 과 '양심설'이 그것이다. 뇌용적설은 인간이 저장,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개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설명인데, 개인차를 유전 등 외부적인 원인에 돌리는 것으로 공부양이 적은 이들이 적극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심설'은 이런 유전환원론을 거부하는 사회구성주의라는 인식론에 기초한 이론으로, 공부에 대한 압박이 특정한 심리적 메카니즘을 형성해서 - 양심이라고 표현된다 - 그것이 공부 집중력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의 원인을 시대상황, 부모님의 기대치, 개인의 비전 등 다양하게 언급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 변수들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득력있는 모델을 나오지 않았다.
흠흠. 이상,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에까지 줄창 논 것에 대해 일요일 오전 컴 앞에서 양심찔려하는 한 늙은 학생의 신세한탄이었슴다.

2008년 5월 1일 목요일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관계'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라도 써 놓아야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자판에 손을 맡긴다. 타인 혹은 상황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이 갖게된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의 결과로 우리는 대개 그런 감정 표현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된다. 물론 그 조절의 정도, 방식 등은 각양각색 다를 것이다. 타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 나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에 대해서 평정심을 잃지 않는 능력 등은 깊은 인격에 연결되는 성질이다. 좀 쿨하게 살 일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쿨하게...

루만 저서 목록의 끝은 어디인가?

루만 선생이 1998년 11월 6일 돌아가셨으니, 이번 가을이면 서거 10년이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도 그의 새 책이 출간되고 있다. 매년 꾸준히 나오더니 최근에 세 권이 한꺼번에 선을 보였다. „Die Moral der Gesellschaft“, "Ideenevolution“, „Schriften zu Kunst und Literatur“ (모두 Suhrkamp). "Schriften..."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권은 논문에 참고할 필요가 있는 책이라 당장 구입했다. 소감은? 한 마디로, 실망. 두 책 모두 이미 다른 곳에 발표했던 논문을 모은 것이었다 (한 논문을 제외하고). 특히 "Die Moral der Gesellschfaft"에 실린 논문은 내가 모두 복사해서 가지고 있는 논문들이라, 흩어져 있덛 논문을 그냥 보기좋게 한 권으로 제본해 놓은 것 외에 큰 의의를 찾을 수 없다. 일부 선입견과 다르게 루만이 도덕, 윤리, 규범, 가치 등의 주제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남겼음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도덕도 ".... der Gesellschaft" 시리즈의 하나로 기능체계인양 오해할 수 있게 되었지 않느냔 말이다. 예상보다 일찍 찾아 온 죽음 때문에 순서가 좀 얽히긴 했지만 루만의 사회이론은 'Soziale Systeme' 에서 시작해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로 끝나도록 계획되어 있었고, 도덕은 그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루만이 살아 있었다면 결코 이런 제목으로 책을 내지 않았으리라 (편집인 스스로 루만에게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Soziologische Aufklärung' 시리즈에 포함되었음직하다). 또, 이 책에서는 그 동안 어떤 루만 저서에서도 볼 수 없었던 편집자 해제(Nachwort)가 붙어있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다. 루만 저서 출간을 총괄하는 편집위원회 같은 게 있었다면 이런 식의 제목달기와 편집은 아마 불허하지 않았을까. 편집자 Detlef Horster 교수가 출판사 사장과 친한 건 아닌지... Kieserling 교수가 편집을 맡은 "Ideenevolution"은 그나마 좀 낫다. 첫 논문 "Sinn, Selbstreferenz und soziokulturelle Evolution"은 짧은 버전이 "Luhmann und die Kulturtheorie" (2004, Suhrkamp)에 실리긴 했지만 이 책에 실린 버전은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특히 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를 명확하게 Coevolution으로 규정한 점이 눈에 띄인다. 또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Rationalität in der modernen Gesellschaft"는 처음 소개되는 논문이기도 하다. 편집인이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책은 애초에 루만이 "Gesellschaftsstruktur und Semantik"의 시리즈 중 한 권으로 펴낼려고 했었던 만큼 "Die Moral ..."에 비해 루만 저작으로서 딛고 설 자리가 더 단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계획은 사랑의 의미론에 대한 글이 너무 길어져서 독립된 책으로 출간하면서 틀어졌다고 한다). 아마 앞으로 구조/의미론 관계가 체계이론 내적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라라 개인적으로 전망하는데 이 책이 거기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사후에 출간된 책들은 몇 권의 "... der Gesellschaft"(Politik, Religion, Erziehungssystem)를 제외하고는 대개 논문모음집이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 어떤 책이 나오더라도 크게 반가워하거나 놀랄 일은 없지 않을까? Zettelkasten이 어떻게 정리되거나 해서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그의 이름을 단 책이 앞으로 몇 권이나 더 나올 것이며 그러면 그의 저서는 도대체 총 몇 권이될 것인가? 우선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세어보니, 번역본을 제외하고도 32권이다 (이 정도면 출판사 뿐 아니라 루만과 그 후손들의 살림에 나도 어지간히 공헌한 셈이다). 흠. 어쩌면 루만 저작은 단행본으로 100권에 육박하거나 어쩌면 그것도 넘어설지 모르겠다. 루만 저서에 중복이 많음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 이는 독자가 자신의 다른 저서를 읽었음을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루만은 밝힌다. 또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러 번 반복되는 부분도 새롭게 표현하려고 애쓴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 초인적인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