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0일 화요일

재난과 정치 그리고 언론

오늘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중국을 보며 글라스노스트를 떠올리다"(Watching China and remembering glasnost) (음, 글라스노스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단어. 대학입학 전후로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 개방이라는 뜻의 낯선 러시아 단어가 연일 신문지면에 등장했었다). Internet판에선 제목을 약간 달리했다. "소련을 보던 눈으로 중국 바라보기" (Watching China with an eye on Soviet Union). (인쇄판 제목이 더 직설적인 것 같은데, 그게 제목을 바꾼 이유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최근 버마와 중국에서 스콜, 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각각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흥미로운 점은 두 국가의 대처 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 버마의 경우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구호활동가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고, 사상자수나 기타 재해 관련 소식을 외부에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 반면에 중국정부는 적극적, 개방적 태도를 보여 여러 언론 관찰자들을 놀라게 했다. P. Taubman이라는 기자는 이같은 중국의 모습에서 1980년대 말 소련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1986년 체로노빌사건이라는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발생한 후 소련 당국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사고발생 후 만하루를 넘기고, 사고지로부터 1,300km 떨어진 스웨덴에서 위험 수치를 넘어서는 방사능이 확인되었음이 알려진 수 시간 후에야 공식 발표를 했었으니까. 이건 현재 버마 군사정부의 대처방식과 유사하다. 체로노빌 사고에 충격받은 고르바쵸프는 이후 정부, 당에 대한 개혁, 개방의 속도를 높인다. 1987년에는 스탈린 시절,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점령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영화, 서적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88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십만여명이 숨지는 지진이 일어났다. 이 때 소련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여행제한 조치를 풀어서 서방 기자들은 정부 허가없이도 아르메이아 수도인 Yerevan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외국에서 보내는 물, 식량, 의약품 등을 실은 원조 물조를 실은 비행기도 환영받았다. 이건 현재 중국 대처방식과 비슷하다. 막상 80년대말 동구의 개혁물결이 일렁일 때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그 확산을 차단하려 했고, 언론 통제, 티벳 독립시위 진압 등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동안 중국 정부의 정책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재해, 재난과 관련해서도 "1976년 탕산 대지진 때 중국은 사태를 축소하고 국제사회의 구호 제의를 묵살하다가 결국 24만명이라는 생명을 잃었고, 2003년에는 사스(SARS) 발병 때도 피해 규모를 축소, 은폐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여기에서 인용)던 전력이 있다. 그러니 이번 지진 발생 후 중국 정부가 취한 신속하고, 개방적인 조치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 기자가 체르노빌에 혼난 후 아르메니아 지진 때 보여준 변화된 소련의 모습 떠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재난의 질적 차이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만약 지금 중국에서 지진이 아닌 핵발전소 사고가 나거나 사스가 재발생했었더라도 비슷한 대처방식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어떻게 전개될까? 기자가 진단(혹은 희망)한 것처럼 중국에서도 개방의 속도가 빨라지고, 권위적 정부 해체 수순을 밟게 될까 (slippery slope)? 흐음. 그건 중국과 소련의 차이를 놓치는 데서 나온 단견은 아닐까? (기자가 지적한대로) 여러 민족 혹은 국가의 연합체였던 소련에서는 개방이 곧 민족주의의 발흥 그리고 이어서 연방의 해체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소련과 다르게 한민족 중심국가이고, 티벳 같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양적으로 소연방을 이루던 민족들과 비교할 수 없다. 최근 성화봉송, 지진 등에 대한 중국민들의 반응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민족주의의 강화는 오히려 중국의 내적 결속력을 더 강하게 해 주고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악재가 잇따른다고 했는데, 이번 지진은 중국 정부에겐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 같다. 티벳사태 등으로 악화된 국제여론을 잠재울 수 있고, 또 국민의 단결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중국이라는 나라, 그 국가주의, 민족주의, 어떻게 전개될지 앞으로 주의깊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웬바오 총리가 지난 발생 두 시간 만에 현장을 방문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일부 성급한 관찰자들은 실제로 정치문화 변화까지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데 지켜봐야겠다. 재난이 정치 구조의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견인해낼 수 있다는 것, 강한테제이기 한데 그런 사례는 찾아보ㅈ면 적지 않을 것이다. 재난에도 미동치 않는 미얀마 같은 사례와 비교하면 나름 의미있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IHT 기사도 결론이 미덥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나름 신선한 시각을 담고 있다. 독일 일간지, IHT 등을 보면 이런 기사들이 널려 있다 (아, 오해마시라. 반드시 이들의 시각자체를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또 아무리 깊어봐야 신문아닌가. 한국 신문들과 비교할 때 그렇단 얘기다. 반면에 독일 티비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티비를 보던 시절 기억에 따르면 Arte나 3Sat 채널 정도가 탐나긴 했지만...). SZ를 구독하던 시절 스포츠면까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포츠 전문 기자들의 '인문학적 내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신문들이 가야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한국 언론들은 또 미쇠고기 수입 문제 처럼 큰 사건이 있으면 올인은 하되 (오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중계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식). 또 예를 들어 박지성 챔프 결승전을 앞두고 있으면 '아시아 최초', '박지성의 위대함'을 스토커 수준으로 달라붙어서 비슷한 기사를 반복해서 만들어 낸다 (편집증, 끈질김, 집착). 대단한 취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관련 정보, 견해는 인터넷만 '취재'해도 쉽게 얻어 낼 수 있고 (외국 싸이트를 '취재'하다 번역을 틀리게 해 망신을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생긴다, 혹은 연합신문 기사를 받아다 살짝 고치던지...), 일어난 사건을 분석할 해석틀도 이미 가지고 있으니, 굳이 애써서 공부하고 취재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각종 프레임: 애국주의, 반노무현, 친미 반북 등). 그러니 오죽하며 신정아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이슈를 감추려는 (잊었다, 뭐였는지는) 조중동의 음모라는 얘기가 돌았을까. 방송국의 그 피디저널리즘이 신문의 부족함을 일부 메꿔주는 것 같긴 하다. 돈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인가? 또 인터넷 언론의 경우 대부분 쓰레기 같은 기사들로 채워져 있긴지만, 특정한 이슈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는 경우 드물게 좋은 기사를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프레시안에서). 조중동, 그렇게 욕을 얻어 먹고도 안 바뀌고, 또 살아남는 걸 보면 신기하기조차하다. 이렇게 (내가 인터넷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한국 언론의 지체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진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은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정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퇴행적인 진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devolution). 음. 그러고 보니 한국 언론은 느리지만 경향상 좋아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굳이 언론의 지체현상이랄 것도 없다. 한국의 현상태인 것이다. 특정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런... 어쩌면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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