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부르는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한국도 당연히 그 일부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광우병'이라는 일상 경험의 지평을 뛰어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토론, 평가하고, 나아가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을 도모하기 까지 한다. 서로 다른 과학적 근거가 동원된다. 도대체 우리가 광우병과 미국 축산업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그리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프레임이 만들어 진 이후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 프레임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겐 이미 '2MB 프레임'이 주어져 있다. 누군지 기가 막힌 작명을 해냈다. 아마 본인은 '(불도저가 아닌) 컴도저 프레임'이 만들어 지길 기대했겠지만, 이번엔 수호천사역을 자처한 주류 언론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려 버렸다. 내가 평가하기에 지난 대선을 좌우했던 시대정신은 지난 10년 정권의 '연장'에 대한 거부였다. 이명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게 아니었덨 것이다. 허나 용량이 딸리는 우리 2MB는 그 시대적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정권을 넘겨받았다. 그 이후 이어진 삽질시리즈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번 '쇠고기 괴담'에 대해서도 그 양반은 '정치 논리'라는 표현을 자꾸 쓴다. 참. 광우병 걸린 소가 듣고 정신 멀쩡해질 소리다. STS쪽에서 특히 "boundary work"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도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 도대체 그 양반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여의도 정치? 국회? 행정부에 대해 거수기 노릇하던 그 '좋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는데, 그런 '정치적' 공세를 피하려면 다른 정치적 수단을 강구할 일이지, 지금 '경제논리'로 정치 논리를 대체하려고 하는가? 그 경제논리는 또 뭐지? 그 양반의 '경제 논리'란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레토릭인 것이다. 의미론적 자원. 불행한 것은 이 정권이 출범한지 삼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나마 다행한 점은 '실용정치'를 표방하기도 하고 경찰, 정보기관원을 풀 수 있는 시절은 아니라 여론의 저항에 직면하면 어느 정도 궤도를 수정하기는 한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번번히 등장하는 수사가 또 있지. "그건 오해였습니다. 원래는.... "
재미있는 건 이제 과학적 진술이 정치 논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 5월 6일 연합뉴스는 " '한국인이 인간 광우병에 더 취약하다'는 주장의 빌미가 된 논문을 작성한 김용선 한림대 교수가 해외로 출국한 데 이어 해당 연구실 소속 논문저자 전원이 연락이 두절돼 의문을 낳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해당 논문은 지난 2004년 '인간 유전학 저널(Journal of Human Gentics)'에 '한국인에서의 프리온 단백질 유전자(PRNP)의 다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고 한다). 매우 흥미롭다. 이제 STSer들이 덤벼들 과학정치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문조작, 생명윤리가 주 이슈였던 황우석 정치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지식사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식사회의 모습을 미리 그리고선 그 특징을 한국에서 발견해 내고 기뻐하는 모습. 우리도 드디어 지식사회에...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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