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김덕영 2008)

음. 이런 책이 나온 걸 모르고 있었다. 한겨레 21 최근호가 2008년 상반기 인문교양서 중 하나로 이 책을 꼽은 걸 보고서야... (참고: 지난 2월 한겨레 서평). 그런데 기사 제목이 좀 '거시기'하다: "한국 지식사회여, 베버한테 배워라". 음. '한국 지식사회'가 뭔가? 기자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 볼까... (내 맘대로). '한국사회여...' 하려니 너무 포괄적이고 '한국 지식인이여..'라고 하기엔 베버의 충고를 들어야 할 사람들을 너무 한정시키는 것 같고.. 기자의 조어능력을 발휘해서 나온 게 '한국 지식사회여....'아닐지... 어쨌든 이 개념이 풍기는 느낌이 전달되긴 하는데 나름 그 정의에 대해서 진지한 학술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식사회'란 개념을 그렇게 비틀어서 쓰는 건 기자가 바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학습능력향상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임을 왜 모르시는지... 그런데 기사를 좀 더 살펴보니 기자만 나무랄 일도 아닌 것 같다. 기사인용: "그런데 지적 거인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한다고 해도 21세기 한국에서 왜 하필이면 막스 베버인가? 이 책의 저자 김덕영은 머리말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김덕영이 나열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는 그 항목만 해도 무려 2쪽 가까이 된다. 거대한 혼돈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러한 사회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다. 왜냐하면 베버가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 기준과 씨름했듯이 우리 지식사회 역시 ‘근대적인 합리성’을 둘러싸고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아하, 저자 스스로 '한국지식사회'란 표현을 쓴 모양이다. 기자의 소개로만으론 '학계'라는 뜻으로 썼던 것 같다. '학계 + (좀 수준있는) 일반 독자 = 지식사회" 이런 공식에서 나왔을까... '학계'가 좀 낡은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지식사회'는 사회학자가 사용하기에는 애매한 개념은 아닌지... 한국에 '지식사회' 외에 다른 사회가 있거나 (스포츠사회?), 아니면 독일에는 독일지식사회가 있는 것인가? 책 내용을 모르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개념 하나 붙들고 심한 태클을 걸고 있는 지도... 구글해보니 꽤 많은 검색결과가 뜬다. 어느 정도 반향은 있는 것 같다. 좋은 현상이다. 평소 내 관찰이기도 하지만 한국(지식사회?)엔 지적편식증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당위 혹은 욕구를 공유하는 층이 상당히 두껍다. 게다가 '한국지식사회'에 대해 던지는 학문적 거인의 충고라는 프레이밍도 시의절절하게 잘 만들어진 것 같고... 읽지않아 확인해 볼 수 없는 책 내용, 제시된 논지의 질과 상관없이 우선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을 '감명깊게'(!) 읽었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출간된 짐멜에 대한 수 권의 책과 이번 베버전기까지, 저자의 일련의 작업이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사회이론 연구에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연히 본 독후감의 일부가 걸린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는 저자의 바램과는 달리 베버의 위인전으로 읽히는 것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버의 긍정적인 면을 주로 보여주며, 베버의 사유와 행동을 통해 우리를 고찰해 보기 위한 지점을 조금더 신경써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아서일지도모르겠다..." '한국지식사회'에 충고를 해 줄 사람으로 베버를 프레이밍하다보니 '위인전'필을 띌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출판사가 사회과학전문이 아닌 '인물과 사상사'라는 점도 걸린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베버를 널리 소개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 것일까? 그런 면에서 내가 언젠가 교수신문에 소개한 1007쪽에 달하는 요하힘 라드카우의 저작 ‘막스 베버: 사유의 열정’(Max Weber: Die Leidenschaft des Denkens, Carl Hanser Verlag, 2005)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읽어보지도 않은 책에 대한 추리, 추측의 정도가 너무 심해지니 돌맞기 전에 이 정도로 그쳐야겠다 (당장 나가서 사올 수 없는 책이니 그 점 이해를 구함).

댓글 8개:

  1. 책을 읽지 않고서 뭔가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저자가 (김덕영씨...그 오랜기간 독일에 있으면서도 아마도 관심 분야가 달라 그의 논문을 한편도 접하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Max Weber의 삶과 그 삶을 가능하게 했던 (아마도) 독일의 학문풍토에서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얻자는 논지의 글이라는 전제하에 거기에 그저 하나를 덧붙여 보고자 합니다. (혹은 김덕영씨가 이미 해당 저서에서 언급했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Max Weber가 "Wissenschaft als Beruf"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지요. 석사학위를 고국에서 하던 당시에 당시 독일어를 하지 못해 "Science as Vocation"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글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거의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그래도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Vocation이라는 영어 번역이 독일어 Beruf를 번역한 것이며 Beruf는 단순히 직업이라기 보다는 Berufung (소명)이라고 해석해야 좀더 Max Weber가 그 글을 쓴 취지에 적합하다는 (타인에 의해서 Weberian이라고 지칭되었던) 담당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Berufung이라니 "학자는 이러저러 해야한다는 식의" 일견 상당히 규번적인 (Normativ)인 주장을 베버가 이 글에서 펼치고 있을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오히려 베버가 사회현상을 분석했던 어떤 일관적인 틀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베버의 또하나의 잘 알려진 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그가 보여주었듯 그리고 또 잘알려진 "전철수에의 비유"를 통해서 시사했듯 그는 "(본인의, 혹은 타인의) 행위에 지향된 (혹은 부여된) 주관적 의미"를 강조하는데 여기에 "종교적 세계관"을 위시한, 간단히 말하면 "가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관념"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그의 연구의 특징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베버가 이 글에서 언급한 일견 "Normativ"한 주장인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은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그렇듯 과학자들이 (혹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지향하고 있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련의 이상화된 Self-image (종교적 믿음에 준하는)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이 글은 일종의 "직업 내지는 조직사회학적인, 나아가서는 지식사회학적인 지극히 분석적인 논문"의 위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뭐 Weber가 학자는 이래야한다는 뉘앙스를 전혀 풍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 주장을 뒷받침 하려면 다시한번 Wissenschaft als Beruf를 정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찌되었거나 김덕영씨가 추측컨대 주장하셨듯이 Weber로 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베버가 예를들어 Wissenschaft als Beruf에서 그러했듯이 "한국지식사회(이것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는 정선생의 코멘트에 1000% 공감합니다만 일단 수사상 이렇게 사용합니다.) 에 대한 "사회학적" (그것이 베버리안의 그것이던 과학지식사회학자들의 그것이던 혹은 맑스주의자들의 그것이던 또 상상하기 쉽지는 않지만 진중권주의자들의 그것이던) 연구"들이 있고 또 그 사회학적 연구들 간의 열띤 논쟁들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에는 우리가 Weber로 부터 배워야 할 것은 (혹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김덕영씨가 다룰려고 했던 비슷한 주제나 문제의식들을 Weber가 어떤 식으로 접근했으며 그를 통해서 "사회과학자"가 이러한 주제를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일종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초딩의 코멘타 수준을 약간 넘는 좀 인간다운 댓글을 남겨보았습니다...ㅋㅋ

    PS. 만일 Wissenschaft als Beruf를 틈나는대로 읽고 이를 한국사회의 지성계 (? :))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켜보는 작은 실험을 계획해보실 의향이 있으시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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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가 정,장 선생의 갑작스런 베버에 대한 관심을 알게 되었고, 얼마전에 댓(덧)글을 남긴 일도 있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글을 남깁니다.

    정 선생은 베버로부터 한수 배워야 한다는 한국의 "지식사회"에 대해, 소개된 책의 저자와 대체로 같은 생각이신듯 하고, 장 선생 역시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놀랐던 사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베버를 정규과정으로 배웠다는 장 선생의 말이었는데, 물론 정 선생도 배웠겠지요? 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장 선생은 특히 베버의 normativ는 오히려 analytisch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냈고, 정 선생 역시 fram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밝힌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부분은 바로 제가 구성해 낸 것이지요. 정,장 선생이 실재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책을 소개해 주신 정 선생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부분이지만) 여기서 약간 곁가지의 논의를 조금 진행시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동안 루만이 말한 "Es gibt Systeme."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회학의 일반화된 상식(?)에 따라, 루만도 역시 사회학은 객관적(사회적) 사실-사회적 사실은 물론 구성된 것이지요, 연구자에 의해서-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루만의 학문대상은 System이라는 것을 피력한 것일 뿐이다 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루만을 비롯하여 몇몇은 다른 견해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System은 분석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연구자가 분석적으로 구성-혹은 그러한 점에서 분리-해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재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구성해낸 정,장 선생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다시 읽으면) 규범적이라는 것은 분석적이라는 것과 애초에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이 실재로서 연구자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Kommunikation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고, 학문적인 Kommunikatio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버는 학문적 Kommunikation이 자립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만든 사람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말은 그가 Grenzzieher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베버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 배운다는 것은, 더구나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제안으로 인해서- 사실은 공허한 반복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때 신 자신의 모습대로 만들었다면 인간이 신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아무것도! 그런 점에서 신학은 곧 인간학이지요. 그리고 신학은 결코 신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루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더군요. "Autoren werden zu Klassikern, wenn feststeht, daß das, was sie geschrieben haben, unmöglich stimmen kann." 한편으로는 그들 Klassiker는 과거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현재 부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버도 역시... 후속연구들 속에서 형해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신이 인간들 각자 속에 형해화된 것처럼... 우리는 그들 사회학의 신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만들어낸 피조물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속에서 신성을 찾아낸다고 하도라도 그것으로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학의 신에게서는 무엇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장 선생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베버에게서 무언가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학문하는 태도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지식사회"가 베버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러한 학문하는 태도가 아니라 장 선생의 말처럼 "깨끗한 (새로운) 물(줄기)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배워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을 nachvollziehen하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같이 외쳐봅시다. "사회학은 죽었다!" (메아리는? 무!!!)
    무엇을 쓰든, 번역,소개하든 그것은 쓰고, 번역하고, 소개하는 사람의 마음이겠지만, 궁금한 것은 왜 쓰고, 번역하고, 소개하는 것들이 System이 자립화한 이후에는 Anreicherung von "requisite variety"에 그치고 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하나의 혁명 이후에는 혁명적 질서의 진화만이 가능할까요? 아니, 적어도 루만은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요? 그런 점에서 베버에게서 무언가를 배우자는 김덕영씨는 진화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름대로 한국의 "지식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풍부화"하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Wer als Forscher mit seiner Sensibilität für Problemstellungen anderen nicht vorweg ist, wird dauernd im zweiten Rang bleiben und hinteranalysieren, was andere gedacht und geschrieben haben." (Luhmann, SA 3, 2005, S. 360) 따라 배우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몇몇 사회학의 신들-베버, 뒤르껭, 꽁트 등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하나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루만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회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영역으로 시야를 확대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System이 자립화하기 전에는 반드시 경쟁하는 체계의 맹아들(adaptive advance)이 존재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현재는 Umschaltpunkt von Vergangenheit und Zukunft이고, 현존하는 모든 것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Kultur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Semantik을 발견해 내어야 합니다. 베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사회학의 다른 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래서 승리한 것처럼... 우리는 그 승리자들의 방식을 selbstreferentiell reproduzieren하는 것 뿐입니다. 목줄이 매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목줄을 풀고 도망갈 수 없어. 그럼 너는 개가 아니라 들개가 되는 거니까..."

    자! 이제 다시 한번 힘주어 외쳐 봅시다. 사회학은 죽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길게 쓰는 것은? 나의 취미! 계기를 통한 스스로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중). 나는 본시 댓(덧)글을 안쓰는데, 어쩌다 보니 그만 두번이나 쓰게 되었다. 그리고 댓(덧)글-두번이나 괄호쳐가면서 '댓/덧'하자니 귀찮으므로 말나온 김에 정리를 해보자. 나는 댓글이 맞다고 본다. '덧'은 본시 덧붙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댓이나 덧이냐 하는 것은 글의 귀속에 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댓)글이 저자, 즉 정 선생에게 귀속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를 Adressat로 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댓'글이 옳은 표현이라고 본다. 애초에 '댓/덧'하게 된 것은 장 선생의 어떤 글에서 덧글이라고 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서없이 길게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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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s.
    저의 글을 하나의 의견(장 선생의 예의 "열띤 논쟁" -사실 별 의견은 없지만-)으로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p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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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두 분 의견 감사. 아마 큰 줄기에서는 모두 공감하는 것 같군요. 내 식으로 정리하자면: 베버를 소개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단 위인전'필'은 곤란하다. 100년 전 독일에서 활동했던 베버에게서 현한국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고, 대신 그의 학문하는 태도, 물줄기를 찾아가는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96년인가요, 하버마스 한국방문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희화화하자면) 이 대가가 과연 어떤 말씀을 내려주실지 기대하며 구름떼처럼 몰려든 '한국지식사회'... 심지어 남북통일에 대한 식견까지 구했다는.... 그 한국사회학사에 길이 남을 소동이 있은 지 10년도 넘은 지금, 그런 강박은 벗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지금 베버가 다시 '선지자'처럼 등장한단 말이죠. 어쩌면 일부 언론들의 호들갑일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가끔 어설프게 진지해지는 한겨레의... 사회학계에서 새삼 베버 중흥기가 도래할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우리 모두는 이 사태 자체에 대한 규범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한국지식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객관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때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드는 그 오래된 '경로(path)'... 박선생의 사회학의 죽음 선언은 신선합니다. 임제선사란 분이 남긴 말씀을 떠 오르게 합니다 (사실 이 양반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임제록).우리는 어쩌면 루만, 가핑클을 죽여야 겠지요 (으윽. 갑자기 으슬으슬 한기가 돕니다^^). 이렇게까지 얘기해놓고서 한국에 돌아가서 루만, 가핑클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뭐, 우리 박선생은 사회학까지 죽이자는 쪽이니, 덜 걱정됩니다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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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ㅋㅋ...짤막하게 Es gibt Systeme 혹은 Ich gehe davon aus, dass es soziale Systeme gibt라는 Luhmann의 (제 생각에는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다양한 해석들에 열려있을) 진술에 대해 박선생이 언급한 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부연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논지는 이러한 진술이 가지는 "실재론적" 뉘앙스는 한편으로는 한 학문분야의 연구대상을 만들어내는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구성주의자" 혹은 "사회 명목론자들"이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이 이러한 진술을 한 학자들의 (구성주의자들이 보기에 나이브한 :)) 실재론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상대주의적 주장을 정당화 하는 소스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비단 Luhmann의 이 진술 뿐 아니라 Durkheim의 유명한 (흔히들 얘기하는 방법론적?) 진술, 즉 "the objective reality of social facts is sociology's fundamental principle."라는 진술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사회학자들에게 social fact하면 흔히들 연상되는 것중 하나가 Normative Struktur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Normative Struktur는 또다시 Soziale Ordnung을 "인과적"으로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이른바 "사회질서" (이것 또한 사회적 사실이지요.)를 설명하는 실로 상식에 가까운 진술 방식이지요.

    재미있는 지점은 이 Normative Struktur가 "학자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중국적으로)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주장, 또 soziale Ordnung이라는 "현상 내지는 상태 혹은 과정"도 학자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며, 또다시 종국적으로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불가지론적인 상대주의"에 대한 입장이 되겠습니다.
    사회학교과서에 정말 빈약(?)하게 "요약" 되어 있는 "사회실재론자" 대 "사회명목론자"간의 논쟁구도는 동 주제에 대한 여러 입장들을 억지로 이 두개의 카테고리 안에 집어 넣도록 만들었는데요...(이런종류의 "요약행위" 자체가 따라서 저에게는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 희생자중의 하나가 바로 제 생각에는 Garfinkel로 대표되는 Ethnomethodology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들 Ethnomethodology를 사회명목론, 나아가 상대주의 및 종국적으로는 불가지론 을 주장하는 것으로들 분류하는데요.

    정작 Ethnomethodology가 문제삼고자 했던 것은 Normative Struktur와 Soziale Ordnung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바로 당시의 "주류" 사회학이 Normative Struktur를 Soziale Ordnung의 "원인"으로 간주한 부분, 그리고 이 Normative Struktur가 일종의 "목록화된 형태로 인간의 머리속에 프로그램된 형태로 사회화된다는, 그럼으로써 인간은 이 코드에 따라 행위한다는" 당시의 통상적인 설명방식이었습니다.

    즉, Ethnomethodology의 경우에는 통상알려져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오히려 "사회행위자들의 입장 혹은 시각에서" (당연히 사회학자들, 심지어 자연과학자들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Underlying Pattern이 있는 현상이라는 오히려 더 강조해서 인정하고 있으며 그 바깥세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질서잡힌 것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행위자들이 이 Underlying Pattern (거기에 Normative Struktur도 포함되는데요) 에 대한 "가정" (Es gibt Systeme도 저에게는 여기에 포함됩니다.) 을 일종의 자원 (Ressource)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이런의미에서 Ethnomethodologist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기술을 Explication (좀더 확연하게 드러내주기? :)) (explanation이 아니라) 이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행위자들 차원 (재삼 강조하지만 여기에 사회학자들도 포함됩니다.) 에서의 commonsense understanding of (socia)l order (이런 면에서 Alfred Schütz와의 연결점이 있기도 합니다.)가 어떻게 구체적인 사회적 장면 (Social Scene)들 안에서 어떻게 그 사회적 장면의 "질서잡힌 성격"을 추론 및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도록 해주는지를 Explication한다는 의미에서 사회학교과서에 나와있는 Macro vs. Micro 구분도 이들 Ethnomethodolgist들의 작업을 범주화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속방법론은 "사회학을 죽였다"기 보다는 사회학을 사회질서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활동으로서 그저 담담하게 지켜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좀 수사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질서"라는 "현상"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까요? 이러한 ethnoemthodology의 역사(?) 속에서 박선생님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셨던 혁명의 문제에서 제 생각에는 혁명이 반드시 구세력의 전복을 전제로 하는가라는 생각해보게 됩니다. 즉, ethnomethodology가 사회학 중 일부 (솔직이 파슨스 류의 구조기능주의)의 문제제기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위에도 언급했듯이 그와 (보기에 따라) 반드시 경쟁적일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도 지난 40년간의 기간동안 나름 (기존 주류(?) 사회학적 저널들과 독립되는) 독자적인 저널들과 조직적 틀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것을 전복하고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행경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즉, 들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죠...조직화 된 들개들말입니다. 경우에 따라 집개들과 놀수도 있죠...물론 공격할 수도 있고요. (:))

    만일 박선생께서 "규범적인 것과 분석적인 것이 애초에 같은 것"이라 주장으로 위에서 제가 묘사한것과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시려고 했다면 그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또한 Luhmann의 입장과 친화성을 가진다면 그또한 흥미로운 일입니다. 앞서서도 밝혔듯이 행위자들은 (사회학자들을 포함해서)은 바깥세계의 (질서잡힌) 현상에 대한 인식을 특정한 (규범적) 질서에 대한 가정을 그 자원으로 사용함으로써 하기 때문이라고 저역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길게 언급했지만 결국 제가 베버의 Wissenschaft als Beruf가 "Normativ하기 보다는 분석적이"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노골적으로" 자신이 제시하는 이상화된 과학적 Ethos에 기반하여 당시의 독일 과학계를 "진단"하고 개탄하며 이상적인 과학적 Ethos에 맞게 만들어 가자고 마구 선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제의 합리화에 대한 연구에 동원한 것과 유사한 일관된 틀을 지식생산의 합리화에 대한 연구에 적용했다는 것을 단순히 특히 부각시켜서 지적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

    "사회학은 죽었다"는 박선생의 진술을 현재 "하나의 사실에 대한 진술 내지는 진단"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정선생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사회학을 죽이자"는 선동으로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조심스럽게 질문합니다...(소심하기는...ㅋㅋ)....앞서 제가 "요약행위" (이것이 우리들 사이에 "실재"가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중 하나이기 때문에)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렸든데요...만일 박선생의 "사회학"은 죽었다가 사실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누구의 어떤 사회학이 죽었을까요? 좀 아이러니 하다고도 생각됩니다만 "사회학이 죽었다"는 주장과 논의 속에서 역설적 (사실 이건 역설이 아닙니다.)으로 그동안에 그저 "당연시된" 형태로 암묵적인 형태로 있었던 Grenze들이 그어지고 그 내용이 정의되면서 사회학이 부활(?) 아니면 있지도 않았던 "사회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래 그렇다면.."사회학"은 죽어도 마땅합니다... 박선생님께서 칼을 드신다면 저는 군량미를 대죠...ㅎㅎ (농담이기도하고 진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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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글을 써놓고 보니 갑자기 재미있는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서 다시 짤막하게 이렇게 올립니다.
    왜 누구네 집에 들렸다가 그 집에서 눌러 앉아 버리는 경우가 있죠...ㅋㅋㅋ...주인은 가라는 말도 못하고....ㅋㅋㅋ
    아무래도 개인 블로그는 이런종류의 "토론"이나 "논쟁"을 진행하기에 적절한 판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이고요. 올려진 글들의 개요 훑어보는 것도 쉽지 않고 말입니다.

    공동의 관심이 될만한 주제에 대해서 현재 3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지않이 공들인 (? :)) 글들이 올려지는 것을 보았을 때...(박선생이 2명이 지배하던 중원에 홀연 등장하신 것이 어떤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듯합니다...ㅎㅎ) 언제한번 3인이 만나서 지난번에 정선생과 했던 "새 판벌이기"와 관련한 얘기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왜 새삼스레 독일(발...ㅎㅎ) 사회학인가?", "왜 3인으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뭐...이런 종류의 얘기들로부터 "판벌이기"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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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하하, 이거 논의의 심도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깊습니다. 아울러 산만하기도 합니다. 표현의 추상성이 높은 탓인지 이중우연성이 마음 놓고 활개를 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이 표현도 역시 ^^). 어짜피 ego 스스로도 잘 모르는 발언의 의도를 alter가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공유하는 의미의 영역을 확장시키려면 이런 방식으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면커뮤니케이션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짜피 웹판을 벌였으니 시급히 대안을 구체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에 아이디어 모으는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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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본격적인 (어쩌면?) 논의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오늘은 정말 아무 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네요. 암울한 조국 현실이... -p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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