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수모는 나의 힘.

2015년 1월 30일 금요일

1. 아시아라는 범주

아시안컵을 보면서... 동아시아, 중동, 호주가 하나로 묶여있다. "아시아"라는 범주가 얼마나 작위적인지 새삼 확인한다.  세계 스포츠를 지배하는 "선진국들의 고뇌"가 느껴진다. 지구를 어떻게든 나누기는 해야겠는데...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 경계를 나눠야했던 식민국가들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도대체 어디에서 국경선을 그어야 할까...

2.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했다(고 한다). 신문 대신에 과학(책)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고도 하고. 셋 다 들어야 할 것 같다. 성경, 자연, 사회...


3. 역사에 대한 해석 싸움을 보면서... 몰상식적이고 편향된 게 표나는 저렴한 주장들을 빼고서라도... 이 얘기를 들으면 이게 옳은 것 같고,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도 옳은 것 같고... 그런 상황을 자주 겪게된다.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2차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서 뿐아니라 성경, 신학 이야기, 학문적 담론에서도 무수히 경험하는 일이다. 원전, 1차적 경험의 중요성!

2015년 1월 28일 수요일

1. 요세미티 업데이트를 했다(10.10.2). 사실 그동안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터라 어떤 점이 개선되었는지 아직 체감하진 못하고 있다. 그럴거면서 언제 업데이트되는지 그렇게 노심초사 기다렸는지 몰라.

2.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있다. 집중력 지속 시간이 짧다. 그나마 오전이 조금 낫다. 이럴 시간에 더 해야...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페친 이민규 님의 견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 말하지 마세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당신이 직접 나서세요.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욕먹고 심판받는 이유고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에 관해 참으로 오해를 많이 한다. 사도 바울도 이런 오해를 방어하는데(롬 6:1, 15),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사랑 안에서 삶의 행위로 나타난다(갈 5:6. 특히 갈 5:16-25). 
야고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른다. 어떤 이들에게 믿음이란 단지 신앙의 진리일 뿐이다. 그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와 같은 명제를 믿고 고백하는 것(약 2:19)은 사실 의미가 없다. 이러한 공식적인 교리에 대한 수긍과 입술의 고백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다(약 2:14). 이런 믿음은 귀신들의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도 하나님 한 분인 줄 믿고 떨기 때문이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역시 페친인 우종학 님의 견해

"기적 안에 신을 가두지 말라"

"... 흔히 우리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모습에만 익숙해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보는 신의 모습은 주로 기적을 행하는 신의 모습이다. 신의 역사는 너무나 기적의 세계에만 국한된다. 반면, 우리의 일상과 자연법칙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우주를 섭리하는 신의 모습은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 을 믿고 의지하기는 오히려 쉽다. 고민할 여지도 적고. 간절히 매달릴 여지도 많고. 내 문제에 대해서 또 이웃의 문제에 대해서 "기적"적으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기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은 꽤 과묵하신 것 같다. 아니면 "자유방임형" "방목형"이시던가... 내 문제, 내 이웃의 문제...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도워줘라... 그런 식인 것 같다.

개신교 , 특히 개혁주의, 복음주의, 오직 성경... 이런 접근은 종교개혁 이후 변화된 사회에 대응하는 교회의 대응이었다면, 이제 그런 접근은 역사적 의의를 차츰 잃는 것 같다. 고쳐 쓸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심지어 한 때 개혁의 대상이자 수구 꼴통 보수로 치부되었던 가톨릭이 요즘은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개혁주의 개신교도 그럴 수 있다. 다만 종교개혁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리다. 시대와 역사의 변화를 냉정하고도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나부터...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을 바라지 말아야겠다. 

2015년 1월 21일 수요일

고민 끝에 독일에 가는 대신 한국에 머물러 있지만 마치 독일에 있는 것처럼 살리라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주중에는... 식구들과 집안 일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나왔다 잠만 자러 들어갈 생각이다. 집중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장점이 많다. 독일에 있을 때처럼 식구들, 집안일에 신경을 덜 쓰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반면에 독일에 있으면 불편했던 점들은 - 주거 환경, 옷가지들, 장보기, 이동의 불편 - 겪지 않아도 된다. 화이팅!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오늘 하루 독일행을 고민했는데 결국 최대한 한국에 머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대신 주중에는 독일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기로... 식구들과는 일요일만 함께 보내는 것으로...
페북이 갖는 장점이 많지만 그 중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오프라인에서라면 만나기 힘든, 특히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도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 분명 나는 혁명을 포함한 운동 자체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치우쳐진 것인지 몰라도 내가 읽은 수많은 논문들은 혁명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보여주었고 나는 그것을 견딜만한 “강철인간”이 아니다. 맑시즘의 급진성을 옹호하는 것이 반드시 혁명을 옹호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걸 인정하는게 오히려 지적으로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체제가 있는가. 나는 현생 인류에게는 그것을 실현할 지적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일종의 자연사적인 과정, 그러니까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앞으로의 변동과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그러려면 일단 자본주의 내에서 생산력이 가장 고도로 발전한 선진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자본주의화에 포섭된 국가는 불가역성이라는게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지금 근대라는 레일 위에서 중간 수준에서 뛰고 있다. 우리 앞에는 선진국들이 뛰고 있고. 선진국들과 같은 레일에서 뛰어야 그 앞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단선적으로 본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근대 사회라는 것 자체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던 수많은 문명들을 모두 근대라는 단일한 기준의 레일 위에 갖다놓고 그 위에서 뛰게 강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한번 자본주의에 포섭된 이상 그 법칙 위에서 뛰어야 한다. 아무리 노동자를 옹호하고 그래도 노동자는 해고를 당해야 하고 자본에 의해 착취를 당해야 경제가 성장한다. 근대 자체가 이렇게 “폭력적인” 체제다. 다만 그 폭력의 정도는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노조의 동의를 받거나 산업에로 빠른 재투입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는 식으로. 어찌됐든 내 입장에서 근대란 모든 것을 단일한 기준으로 통합해가는 진정한 전체주의 체제다. 하지만 그 폭력적인 단일화야말로 해방의 조건이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해방을 얻어낼 수 있다. 이게 맑스가 했던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맑스도 그것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혹시라도 그 방법을 알고 계시는 분은 내게 알려주시라. 나부터 그 분의 충실한 제자가 되겠다. 
1.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거울을 보고선 허걱 놀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잠을 죽음에 많이들 비유하던데... 재생, 부활...

2. 이런 식이라면 다시 독일에 가야 할 것 같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비행기 티켓도 알아봤다. 유가 하락 탓인지 지난 번 보다 더 싸졌다. 무비자 체류 등이 걸렸는데, 알아보니 크게 문제될  없는 것 같고... 외적인 조건이 크게 나쁜 건 아닌데 마음을 못잡는게 문제다. 긴장도가 뚝 떨어져서... 아무래도 여러 가지를 동시에 누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3. 부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교수에게 짧은 요약문을 보냈는데, 오늘 그에 대한 논평을 보내왔다. 본문에서 잘 풀어서 설명해야 할 점 두 가지를 지적했고, 전체적으로 긍정적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가지 숙제는 덜었다.

2015년 1월 19일 월요일

한국에 갈등이 더 심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제 식민지화 이후 한국 근현대사는 갈등으로 점철된 역사 아니었던가. 일제와의 갈등, 권위적 정부, 독재자 치하에서의 갈등이 지금보다 양적으로 적었다거나 덜 집중적이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갈등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더 많은 갈등, 적은 갈등 등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한국에서 특히 민주화 이후에 갈등의 양상이 복잡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이전에 없거나 큰 의미없던 전문적 주제에 대한 갈등이 증가하고 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현상들 때문에 갈등 관리가 더 어려워졌다는 점, 그리고 갈등 관리를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갈등"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으면 가족관계, 조직 활동, 사회문제, 역사적 과제, 국가 간 비교 등 서로 다른 상황과 맥락에서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갈등"... 갈등을 만들어내는 원이는 무엇인가? 갈등의 성격은? 서로 다른 맥락의 갈등에는 서로 연결되는 점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갈등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갈등하면서 공존하고, 잠재력을 계발하면서 존엄하게 살기 그리고 죽기...
성경/ 계시

"18세기 신학자... 바움가르텐 Sigmund Jacob Baumgarten)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이 증거하는 이스라엘의 고대 종교와 구별했다. ... 히르쉬Hirsch에 따르면 '독일 개신교 신학은 바움가르텐과 함께 결정적인 단게에 도달했다. 즉 성경에 근거한 믿음으로부터 계시에 근거한 믿음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계시에 근거한 믿음의 입장에서, 실제적으로 성경은 예전에 주어진 기록에 불과했다.' 바움가르텐에게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여러 가능한 반응 중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읽는 책이라기보다 종교적 유물에 불과하다." (세일해머, 모세오경신학, 86f) (John H. Sailhamer, The Meaning of the Pentateuch)

"성경에 근거한 믿음"과 "계시에 근거한 믿음"을 구분한다면 나는 "계시에 근거한 믿음" 쪽을 더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얼마 힐링캠프 하정우 편을 무척 재미있게 봤다. 그 양반 얘기에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열정을 갖는 분야에 대해서 후회없이 파고드는 모습에 대해서... 나와 다른 점도 있다. 무엇보다 활동하(려고하)는 분야가 다르고, 그 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열정의 정도에 대해서다.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충실히 사는 것 같다. 그렇다. 엉덩이의 힘... 백지 앞에서 엉덩이로 꿋꿋이 버터내는 힘... 돌아가고 싶은 유혹, 쉬운 생각, 가벼운 생각, 덜 중요한 생각으로 빠지고 싶은 유혹에서 버티는 힘... 그게 필요하다. 크게 반성해야...

오마이 뉴스 인터뷰 중에서...


"제가 죽기 직전 인생을 돌아보면서 진짜로 후회할 것 같은 게 하나 있어요. 내가 어떤 위치에 올랐나, 돈은 얼마나 벌었나 이런 게 문제가 아닐 거 같더군요. 살면서 내가 무엇을 해보지 못했나 이게 가장 마음에 걸릴 거 같아요. 다들 마음 속으로 원하는 게 있잖아요. 그걸 모르겠다면 마음을 한 번 들여다 보는 것도 좋아요. 무언가 올라오는 게 있을 겁니다. '나 지금 이거 해보고 싶다' 이런 거요."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건 내 재능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점입니다. 그럼 노력밖에 없어요. 그걸로 신뢰를 얻어야겠다고 다짐했죠. 연극배우로 시작해 지금의 하정우가 될 때까지 했던 노력 그대로, 신인감독 하정우가 하고 있어요. 엉덩이의 힘으로 가는 거죠."
종교와 과학. 이것도 결국 갈등 아닌가? 체계 간 갈등. 내 주요 관심사... 내 깔대기...
아니 공공 장소에서 재채기 할 때는 그 더러운 입 좀 막으라고!!
"종교"와 "과학"은 야구와 축구처럼 서로 다른 규칙을 갖는 다른 리그라는 신재식 교수의 - 상식적 - 설명.









원칙적으로는 수긍할 수 있지만 어디 그런가. 

(1)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어찌 그 "전능"하심의 영역을 종교적 세계 속으로 제한할 수 있겠는가. 과학이란 영역도 당연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 속에 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 진리를 기준으로 자연, 역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진리니까. 결국 과학은 종교적 신학적 진리의 시녀일 따름이다.

(2) 이 시대의 진리는 과학이다. 과학만큼 확실한 진리가 어디있나? 종교는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미신일 따름이다. 종교와 과학을 대등하게 둔다? 그건 현대 종교의 위치에 오른 과학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내 견해는 존 호트 (그리고 신재식)에 가깝겠다.

"존 호트는 현대 과학 특히 진화론과 대화하면서 다윈 이후의 '진화론적 신학'을 적극 모색하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과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30여년 가까이 신학과 과학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 '생태 신학', '진화론적 신학'에 관련된 10여 권의 저서는 그가 진화론에 가장 정통한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윈 안의 신>,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같은 책들이 번역 출간되어 있지요.)




호트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할 때 발생합니다. 그는 창조 vs 진화 논쟁도 바로 이 '독법의 문제'를 둘러싼 두 문자주의 대립 때문으로 봅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의 '성서적 문자주의'와, 진화 생물학의 '우주적 문자주의'이지요. 두 문자주의 모두 우주와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 문자주의'로,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 문자주의'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창조과학자"였던 양승훈 교수도 "젊은 지구론"을 포기했다. 꽤 꼼꼼하고 성실하고 또 겸손하신 분이라 가볍게 보이지 않는 일이다. (학자들은 대개 우주 역사를 137억년, 지구 역사는 47억년 정도로 보는 모양이다). 젊은 지구론을 포기하면 곧장 제기되는 문제가 창세기 1,2장 해석, 나아가 성경 해석이다. 논리적으로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나머지는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물론 양승훈 교수처럼 젊은 창조론을 포기하지만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그 시도는 매우 어설프고 그래서 심지어 안타까워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 양 교수는 그 많은 동물들을 어떻게 먹이고 관리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동면"의 가능성을 제기할 정도니까. 그 상상력이라니... 내 결론은? 하나님을 성경 속의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된다.
순서 상 "젊은 창조론" 다음에는 "진화론"의 문제에 부딪힌다. 진화론은 좀 더 논쟁적인 것 같다. 젋은 지구론을 포기하지만 진화론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양승훈 교수도 그렇고.
여하튼 우주의 역사, 진화론, 그리고 성경해석의 문제... 이는 매우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매우 민감한 주제다.
페북에서 얻은 이야기를 모아둔다.

I. 성경보다 크신 하나님.

"6. (좀 더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성경이 클까,하나님이 크실까? 당연히 하나님이 더 크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경 내용과 의미를 달달 꿰차면 그걸로 하나님을 모조리 다 파악하고 해독한 줄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에 놓든지 혹은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는 자들이다.

7.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 '모든'이란 말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이란 뜻이지, 하나님에 관한 모든이란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은 성경보다 더 크시다. 그러니 심지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완벽하게 주석하고 주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가 알 수 있는 만큼만의 하나님이다.

8. 그러니 기도 좀 한다고, 성경 좀 읽었다고, 신학공부 좀 했다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 쌍둥이라도 되는 듯이 설치는 일을 조심해야 하다. 이것이 교만 중에 가장 큰 교만이다.

9. 내가 아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내가 알 수 있는 만큼의 하나님일 뿐이다. 우리는 진리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부스러기를 소유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진리의 다른 파편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성경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합당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10. 개혁주의, 복음주의, 정통주의, 진보주의 등등 모든 '주의(ism)은 말 그대로 하나의 (해석학적)입장에 불과하다.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곧바로 우상이 된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신학적 입장 혹은 진영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김요한)


II. 제국주의 대한민국


"제국주의?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스스로를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윤해동은 거의 10년 전부터 조선인들은 제국 내에서 이등국민으로, "새끼 제국주의자"로서 동남아에서 다른 민족들을 '핍박'하는 제국주의자로 행동하고 기억되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 나온 안병직의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에서도 배경이 버마인데 조선인이 버마 노동자들을 부리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조선인들은 엄연히 "제국의 일원"이지 핍박받는 식민지인이 아니다. 동남아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매우 안 좋다. 내 기억으로 리콴유도 그의 자서전에서 한국인들이 매우 거칠고 위압적이라 첫인상이 별로 안 좋았다고 언급했었다. 일본인이 될 수 없는, 하지만 동시에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새끼 제국주의자"로서의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는 지난 60년의 역사서술에서 사장되어버렸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동남아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한다. 예전에 시사인의 어떤 기사를 읽다가 해외에서 한국 기업이 현지 노동자들을 현지 정부에게 요청해 군을 동원해 탄압하고 노동착취하고 그런 일이 있다는걸 발견했다. 현지 노동자의 인터뷰에는 "그래도 한국은 우리와 같이 식민지 경험이 있으니 우리를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연 한국인들이 그런 "양심"이 있는가? 이미 타국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지닌 한국이 과연 가해자로서의 반성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의 도덕성을 너무나도 손쉽게 정당화하지 않는가? "새끼 제국주의자"로서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가? 뭐 이런게 나는 궁금한 것이다.. 2등 국민이면서 동시에 1등 국민을 열망했던 그 복잡한 내셔널리즘적 욕망이 과연 없어졌는가?"(만석)

댓글 중.. .

저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박노자 선생이 본인의 책들에서 1세계 중심부를 갈망하는 1세계 주변부로서 대한민국사를 많이 언급했지요. 저도 만보산사건과 민생단 사건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구요.(이우종)
이런 기사를 보면 짜증이 확 밀려온다. 물론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 맞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더 나쁜 사회가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 역시 한국 사회의 큰 문제라고 본다. 사실 이런 경향은 한국 뿐 아니라 근대사회에 내재된 문제다. 해석적 중심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기능체계든 모두 자기 중심적으로 세계를 묘사하니까. 언론, 사회운동, 야당 등은 대표적으로 사회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서 체계를 지속시키는 체계니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서양에 비해서 해석적 중심이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적 쏠림 현상도 더 심하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어… 자정기능 상실" (세계일보) 

[침묵하는 사회] (1) 울리지 않는 경보음 

한국 사회가 ‘침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둑에서 물이 찔끔찔끔 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모르는 체하는 사이에 구멍이 점점 커지고 있다. 책임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이 회피하는 사이에 가정이, 정부가, 사회가 균열을 키워가고 있다. 위기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면서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땅콩 회항’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이제는 이 늪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호통치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곽혜원의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을 드문드문 읽고 있다. 논지가 분명한 것은 장점이고, 그 분명한 논지가 반복되고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주는 것은 단점이다. 내용이 풍부해서 수업 교재나 입문서로 쓰기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부럽다. 무엇보다 분명한 논지, 그리고 이 책의 의의. 내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기 때문에. 자극받아서 한 번 더 한국어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언어의 한계때문에 생각이 흘러가지 못하고 자주 삐걱거린다. 그래. 이런 핑계거리라도 있어야지.
1. 눈이 꽤 많이 왔다. 그러고보니 이번 겨울 들어 눈을 제대로 처음 본 건가. 새삼스럽네.

2. 어제 남양주 딸기농장에서 딸기 따고 쨈 만드는 체험하고 나서 양수리에 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는  그 곳. 전망좋다는 카페를 찾아갔는데 전망은 정말 좋았다. 커피 맛은 별로. 한강과 산이 어울린 풍광, 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아. 그런 곳이라면 매일 찾아가고 싶다. 바깥 경치 구경하고, 사람 구경하고,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그런 풍경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

3. 오늘 K팝스타를 못봤다. 정승환, 박윤하 듀엣 기사가 여럿 보여서 그 영상만 찾아봤다. 좋았다. 아주... 특히 박윤하. 정승환은 뭐랄까 벌써 전형적인 성향이 느껴진다. 그 전형성은 익숙해질수록 호소력이 떨어지는 유형인 것 같다. 박윤하도 물론 전형성이 있지만 여전히 신선한 느낌을 준다. 여하튼.... 둘이서 무대를 준비하는 영상을 보니 오늘 노래가 왜 좋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리하게 잘 준비했다. 그 둘을 한 팀으로 엮은건 양현석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영리한 사람이다.

4. 어제 오늘 공부한다고 시간을 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적지 않았는데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마음이 불편하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우주의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글의 일부인데 과학/학문에 대한 좋은 표현이라 옮겨 둔다.

"Science seeks to make progress in understanding the physical world through inductive reasoning, rather than the watertight proofs found in mathematics. This means that scientific understanding advances through an enormous amount of focused, incremental efforts with many consistency checks in the context of a mutually accountable scientific community. Drawing sound conclusions about a general question such as the age of the universe cannot be done on the basis of one argument alone but requires many different independent experiments including tests that could falsify competing claims. Any conclusions, along with an evaluation of their certainty, are then made on the basis of the overall weight of the available evidence. There will often be some data that appear to disagree with the rest of the evidence; this does not automatically provide evidence for alternative hypotheses but often means that our theoretical understanding is not yet entirely complete."

특히 "consitency checks"란 표현이 와 닿는다. 그렇다. 일관성이 중요하다. 한 두가지 사례, 주장으로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다. 어디 과학만 그런가. 성경해석, 신학 그 자체도 그렇지 않은가. 성경의 특정 구절만 가지고 신앙의 정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의 여러 부분을 놓고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 인가? 게다가 신앙의 근거를 성경으로 제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성경의 언어, 문자에 제한되어 있는 분이 아니잖은가? 역사 속에서, 또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는가? 또 인간의 인식, 상식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여하튼 일관성 체크... 다양한 접근을 통한 일관성 체크... 
"자기충족적 예언"(혹은 자기 실현적 예언, 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상황에 대해 잘못된 판단이나 정의를 내려 다음 행동들이 처음의 잘못된 생각을 현실화하는 현상'으로 정의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

머튼의 이 개념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리학에서는... 타인의 기대와 관심으로 능률이 오르거나 좋은 결과를 낳는 현상을 가리키고 (피그말리온 효과, 로젠탈 효과, 의료계에서 쓰는 비교할만한 개념으로 플라시보 효과) (믿는만큼 이뤄진다, 말이 씨가 된다)

경제학적으로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에 유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견에 대중적 심리가 반응함에 따라 해당 현상이 발생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 개념의 출처, 관계에 대해서 한 번 찾아볼 필요는 있겠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한 출판사를 알게되었다. 그 출판사 대표의 페북 글과 출판사 운영 철학에 크게 공감했고, 그 출판사가 책을 계속 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작은 돈이지만 후원도 하고 있다. 최근 그 양반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책을 두 권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 모양이다. 취향의 문제에 관한한 개인 차가 꽤 크다는 점도 새삼 느꼈고. 기대와 만족도의 관계... 참 인간 심리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상식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상식이다. 기대가 크면 그 기대에 부흥해서 실제로 이뤄진다.  "믿는만큼 이루어진다. 말이 씨가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무엇에 대한 기대냐에 차이가 있다. 나(ego), 너(alter) 등 개인에 대한 기대가 아닌 제 삼의 대상에 대한 기대치! alter에게 제 삼의 무엇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 놓으면, 그 alter는 실망하기가 쉽다. 하지만 ego가 alter의 어떤 속성, 특징, 성취 등에 대해서 갖는 기대치가 높음을 알면, 그 alter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대의 대상의 문제인 것 같다. 무엇에 대한 기대냐. ego, alter가 서로의 관계와 무관하게 접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것인지... ego, alter의 관계에 대한 것인지... 출판사 대표와의 관계를 예로 들면, 그 대표가 책이 아닌 나에 대해서 어떤 기대치와 믿음을 표현했다면... 난 그 믿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더 애를 쓸 것 같기도 하니까.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를 ego/alter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alter에 대한 ego의 기대가 너무 크다면... ego는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또 ego, alter 관계가 제 삼의 대상의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alter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alter의 기대치에 맞게 제 삼의 대상을 평가할 수도 있으니...

에고... 무슨 소리인지... 결국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뭐 그런 건가? 더 깊고 정교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2015년 1월 15일 목요일

위스컨신-매디슨 대학 과학사, 의학사 교수 Ronald L. Numbers의 "Galieo Goes to Jails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and Religion"(2009, Harvard University Press) 번역본을 훓어봤다. 우리말로는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로널드 I. 넘버스)로 뜨인돌에서 나왔다. 번역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번역본에서 이게 뭔가 싶었던 부분은 표지 등에 있는 영어 원제 "Other Myths about Science and Religion". "Galieo Goes to Jails and"를 뺀 것이다. 이 표현 때문에 "Other"이 가능한 것인데, 무슨 배짱인지 무식해서인지... 

여하튼... 이러저러한 신화, 통념을 깨는 내용을 좋아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었다. 새삼 느끼지만 이래서 역사는 원전, 원자료가 중요한 것 같다. 신화라고 주장하는 것고 신화를 깼다는 주장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전, 원자료 혹은 거기에 준하는 기초 자료, 지식 없이는 판단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학자나 이론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만... 원전, 원자료 읽기의 중요성! 
오전엔 "예수와 다윈의 동행"(신재식)이란 책을 읽었다. 바쁜 와중에... 좀 덜 엉뚱하게 논다는 게 이런 시급하지 않은 책을 읽는 일이다. 시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내 궁극적 관심, 호기심, 내 인생의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방향을 향해 있는 책이다.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진화"에 대한 관심이야 늘 한 켠에 있었지만, 최근에 각별한 관심을 다시 갖게 된 계기는 - 내 또래인 - 우종학 교수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란 책이었다. 독일 행 비행기에서 읽을만한 - 너무 무겁지도 적당한 집중할만한 - 책으로 골랐었다. 다만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든 책이다. 무엇보다 문체 때문인데, "대화체"가 어떤 독자들에겐 내용을 전달하는 효율적 방식이 될 수 있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튼... 진화론, 진화과학과 기독교, 종교. 재미있는 주제다. 성경이라는 책, 자연이라는 책. 자연을 좀 확대하자면 인간, 문화, 사회라는 책. 하나님의 언어는 성경 뿐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면 많은 질문,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 여하튼 내 궁극적 고민을 그것을 향해 있으니까 이런 시간이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위로하자면... 위로할 수도 있다. 굳이... 위로하자면...

무엇이 그리 급한가. 천천히 가도 된다.

한국 사회. 문제가 많다. 한두가지가 아니다. 언론 기사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 의견 보면 그런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물론 나도 그런 목소리를 낼 때가 있다. 아니. 잦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 일색일 때는 오히려 좀 자제하자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어디 그렇게만 볼 일이냐고. 뭐 그런 태도는 나쁘게 얘기하면 "회색분자",  좋게 이야기해 봐야 "중재자"나 "균형을 잡는 사람" 정도일테다. 여하튼 난 한국 사회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특히 한국민이 밟아 온 역사를 돌이켜 볼수록 그런 확신이 강해진다. 물론 이명박, 박근혜라는 두 꼴통, 머저리 정부의 이 시기를 살면서 짜증나고, 화나고, 치욕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이 시기가 후퇴기는 아니며 일종의 조정기라고 본다. 기대와 현실 간의 간극, 분야 간의 속도 차이 등을 조정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슈틸리케 감독과 지금 국가대표 축구팀에 대해서 시간을 좀 주자는 "개념 기사"를 읽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슈틸리케호, 천천히 가도 된다")

2015년 1월 13일 화요일

1. 죽음: 아내와 친하게 지내던 (최근엔 이러저러한 일로 좀 소원해졌다고 하지만) 후배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아... 요즘 죽음을 너무 많이 겪는다. 주위에서 또 언론을 통해서... 직접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으면서 이야기만 많이 듣게 되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 무감각이 더 두렵다.

2. 오늘 저녁엔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로 와 봤다. 좋은 걸. 더 싸고, 오늘은 게다가 손님도 적다. 다만 난방을 과하게 해 놓았는데 지난 해까지 흡연실로 사용하던 "별실"로 들어오니 온도도 적당하다. 다만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어머니는 대구에 가셨고, 아내는 상가에...  지금은 "먼 이모들"이 딸을 봐 주고 있는데 곧 교대해주러 가야한다.
"나이가 들어 열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서 나이가 든다"

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인터뷰]KIA 주장 이범호, "분위기 최고..KIA 약하지 않다"

이맘때 늘 보게 되는 유형의 인터뷰. 시즌 개막 전 일반적으로 강팀이라고 인정되는 팀은 강팀이기 때문에, 약팀은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우승까진 아니더라도 4강 후보 정도로 대부분의 팀이 거론된다. 거의 매해 반복되기 때문에 몇 년전치 인터뷰를 가져다 놓아도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 이런걸 두고 클리셰라고 하던가... 관성, 관행, 습관, 루틴.... 불성실한 저널리즘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사례다. 손쉽게 기사 생산해내는 기자들, 그것을 장려하는 구조적 조건들...
'갑질'이라고 하지... 을의 입장에 대해서는 '감정노동'이라는 표현도 쓰고... 평소에 식당, 카페 등에서 종업원,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난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대화하면서 또 일상생활에서 사소해보이는 잘못, 실수를 꼼꼼하게 따지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물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꼰대기질"이 올라올 때가 가끔씩 있지만... 오늘 세번째 들린 카페에서 어제처럼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참았다. 불편하고 '억울한' 감정을 다 털어내지 못해서 조금 뭣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했다. 아. 조그마한 권력만 가져도, 그럴 위치, 상황이 되기만 한다면 갑질, 꼰대질하고 싶은게 인간 본성인 것을... 참을 수 있으면 참아야지...
오늘 운전할 일이 있었는데 내가 전형적으로 싫어하는 상황... 우측 끝 차선을 달리고 있을 때 오른쪽 길에서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차량들.... 에 직면했다. 그런 경우에는 꼭 경적 등으로 "응징"을 하고 하는데, 오늘 역시... 앞으로는 그냥 참아야 할 것 같다. 내 기준으로 볼 때 눈에 거슬리는 일, 현상에 대해서 느끼는 분노, 답답함... 모든 경우에 침묵하진 않겠지만, 일상적 일에 대해선 가능한 참야할 것 같다. 그런데 갑질, 꼰대질과 같은 맥락에서...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1. 노동으로서 글쓰기: 어떤 글쓰기 책의 소제목 중 하나가 "글쓰기는 노동이다"라고 한다. 공감 또 공감... 글쓰기는 철저히 노동이다. 천재? 영감? 일필휘지? 설령 그렇게 보이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것은 철저한 노동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2. 어제 그 카페: 어제 온 카페에 다시 왔다. 오늘은 스피카 바로 밑에 앉았는데 잡음이 너무 심하다. 어제도 느끼긴 했지만 오늘은 가까이 앉아 있어서 그 소리가 매우 거슬린다. 어제도 좀 느꼈지만 직원들이 그리 친절한 편인 것 같진 않다. 어제도 그랬지만 손님들 중에서도 아주 "저렴한" 인간들이 좀 보인다. 그런 인간들은 목소리가 크다. 아니 목소리가 크니까 값어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주는 셈이지. 저렴한 인간들, 저렴한 언사... 이 카페의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다음에 또 오게 될까?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흐릿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략 어떤 이야기인지 느낌은 온다는 느낌적 느낌... 불트만이 이런 사람이었어? 급호감이...

“여기서 인간의 본래성 곧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질문 속에서 인간은 사실상 하나님에 관해 질문한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과 나 자신에 관한 질문은 동일하다“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불트만의 신학에서 신학과 인간학, 하나님에 관한 진술과 인간에 관한 진술이 결합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없이 중립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중략) 하나님은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현실이요, 모든 인간이 찾고 질문하는 존재로서 모든 인간과 이미 어떤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_김균진, <현대 신학사상>, “불트만의 실존신학” 중에서


1. 치과: 치과에 다녀왔다. 예약일 안내 문자메세지를 받고 간 것이었는데, 사무 착오로 예정보다 수 개월 일찍 가게 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일찍 잘 갔다. 썩고 있는 부위, 치석이 낀 분위를 발견했으니까. 불과 2개월 전 진찰하고 치료할 땐 없었던 것이다. 이빨이 좋지 않아 삼십대 이후로 늘 고생했던 것 같은데,  3년 전 크게 치료했고 이후로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관리하고 있다. 평소에도 이빨 관리에 신경을 나름 많이 쓰는 편이고. 그런데도 썩는 분위가 생겼다는 점은 작은 충격이었다. 관리의 한계랄까... 원래 약한 이빨들... 통풍도 그렇지만 요즘 내 몸 내 건강에 대해선 더 겸손해야 할 계기들이 자꾸 생긴다. 관리의 한계... 자신하지 말 것... 물론 최대한 잘 관리해야겠지만 자신만만해하진 말 것.

2. 투썸 1: 치과 다녀오느라 어수선하게 오전 보내고, 오후도 또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버렸다. 저녁마저 비생산적으로 보낼 수는 없어서 분위기 쇄신할 목적으로 카페에 왔다. 집 근처 투썸... 새로 생긴지는 벌써 6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 처음 와 봤다. 무엇보다 널찍해서 좋다. 커피 값은 물론 비싼 편이다. 공간이 넓으니까 여기 저기서 이야기 소리들이 들린다. 하지만 그 소리들이 서로 간섭현상을 일으키는지 이야기 내용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소음인데 딱 적당한 정도의 소음이다. 오래 앉아 있는다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비싼 편이지만 그 값을 한다고 봐도 좋을듯. 자주 이용해야 할듯.

3. 투섬 2: 자리를 옮겼다. 오. 이 자리는 최상이다. 내게 최적화된 그런 책상이다. 놀라운 발견. 구석이라 좀 더 조용하고, 책상도 작업용이고... 도서관과 카페의 장점이 만나는 지점이다. 200원 적립금을 고려하면 아메리카노 실제 지출은 3,900원...




4. 리액션: 일상적인 관계에서건, 리더의 역할에 대해서건 간에 인간관계에선 "액션"보다는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한다. 말을 주도하기 보다는 잘 들어주는 것의 중요성... 나는 잘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다. 싫증을 잘 낸다. 내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귀와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대일 대화가 아닌 경우엔 딴 짓도 곧잘하는 편이다. 리액션을 더 잘하고, 더 잘 들어주고, 마음과 귀를 더 크게 열어야겠다.

2015년 1월 9일 금요일

"국가가 강하면 우리를 짓밟고 국가가 약하면 우리는 멸망한다"
 If the state is strong, it crushes us. If it is weak, we perish.  (Paul Valéry)

from: The Collected Works of Paul Valéry: History and politics. (1971)
흔히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로 알려진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기도문.

니버의 책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Selected Essays and Address)과 그의 딸(엘리자베스 시프턴, Elisabeth Sifton)의 책 (The Serenity Prayer: Faith and Politics in Times of Peace and War)에 있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진화론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학이 임시적인 것임을 알게 해 줄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잊고 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동일화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 진화론과 그에 뒤따르는 도전들은...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었던 '신'을 재고하거나 더 나아가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진화론을 전제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매일의 선택이며 어떤 일에라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영적으로 충만한 행동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상기시킬 것이다."("아담의 진화" Peter Enns 350쪽)

2015년 1월 7일 수요일

딸, 야단...

1. 딸을 야단쳤다. 칭얼거림, 어른 말 안 듣기 등의 정도가 요즘 심해진 듯해서 벼르고 있다가... 딸 야단치는 것은 여러 이유로 마음 불편한 일이다.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 권위적 어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내실 때 아버지 얼굴이 생각난다. 내가 꼭 그런 얼굴이었을듯.... 나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이 꼭 내 어렸을 때 바로 그 마음일 것 같아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빠 눈치를 보게 되고, 아빠를 불편한 존재로 여길 것 같아서... 큰 소리내고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그냥 알아서 예쁘게 잘 커주면 좋으련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으리라. 이 불편한 상황에서 나는 좀 달리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오늘 또 확인된 것이다.

2. 후기: 이틀에 거쳐 모든 세 번 야단을 쳤다. 흥미롭게도 세번째 야단 이후론 오히려 딸과 더 친밀해졌다.  독일에 다녀온 이후로 좀 멀어졌는데... 딸이 아빠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다행이다.
1. 다양한 분야,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내가 읽고 싶고 알고 싶은 학자, 주장, 책이 다양한 것은 또 아니다. 최근 올 해 나올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을 몇 읽었는데 참으로 으리으리한 저자의 으리으리한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아니 아직 한 권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지?
(1) 일단... 역사에 대해서는 꾸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 사실들, 해석들...
(2) 언어에 대한 관심도 꾸준하다. 특히, 동서양 고전어에 대해서... 글쓰기, 언어학 등에 대한 관심도... 고종석을 그래서 좋아한다.
(3)  신학, 신앙에 대한 관심도 크다. 성경 해석, 신학 등에 대한 책들은 꾸준히 읽고 있다. 최그엔 새물결플러스 책들을 자주 사는 편.
(4) 시는 좀 덜한데 소설에 대한 관심도 늘 가지고 있다. 많이 읽진 못하지만... 영화, 미술 등에 대해서 갖는 관심과 비슷한 종류인 것 같다. 역사와 예술이 결합된 예술사, 미술사 같은 책들도 매우 좋아한다.
(5) 사회이론, 철학에 대해서는... 우선 현대 사상, 철학은 잘 안 읽게 된다. 루만과 그와 연결된 사회이론, 철학을 제외하면... 고전사회학자들 대한 관심은 있는 편이다. 베버, 짐멜, 맑스 정도. 근대 언저리의 지성사, 사회사상사에 대한 관심도 큰 편이다. 반면  아리스토렐레스, 플라톤 같은 고대철학자들도 별로... 칸트는 좀 더 제대로 읽고 싶긴 하다. 푸코도 좀 더... 뭔가? 근대, 근대성, 근대인에 대한 관심인가?

어쩌면 이 모든 관심사의 교차점은 "나"인 것 같다.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나를 둘러 싼 환경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 알고 싶은 욕망... 그 정체성의 핵심을 '근대''근대성'이라고 보는 것 같고, 역사적 맥락에서 그 근대성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서, 이리저리 튕겨져 나가는 최신 이론,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근대성을 직접적으로 다룬 학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이차, 삼차적 해석을 덧붙이는 저작들은 지금 상태로선 소화하기 힘든 것이다.

2. 딸의 짜증이 요즘 부쩍 늘었다. 집 밖으로도 잘 안나가려고 하고... 긍정적인 일에 대해서 누구 덕분인지 굳이 따지지 않지만,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상, 결과에 대해선 누구 책임인지 따지게 된다. 인지상정이다. 늘어난 딸의 짜증의 원인이 뭘까? 누구 탓일까? 겨울이라서 너무 집에만 있게 했나? 좋아지겠지? 양육자들 간의 긴장, 짜증도 함께 늘었다. 내 탓도 크다.

3.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더 긴장, 집중해야 한다. 걱정이다.

2015년 1월 2일 금요일

진실의 순간, the moment of the truth, die Stude der Wahrheit...

이 표현의 유래가 이렇다는군...



  '진실의 순간'은 스칸디나비아 항고사의 사장인 얀 칼슨(Jan Carlzon)이 'Moments of Truth'라는 책을 펴낸 이후 널리 알려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 항공에서는 대략 한 해에 1000만 명의 고객이 각각 5명의 직원들과 접촉했으며, 1회 응대 시간은 평균 15초였다고 한다. 고객의 마음속에 1년에 5000만 번 회사의 인상을 새겨 놓게 된다는 것이다. 
  칼슨은 15호 동안의 짧은 순간 순간이 결국 스칸디나비아 항공의 전체 이미지를 , 나아가 사업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진실의 순간'개념을 도입한 칼슨은 스칸디나비아 항공사를 불과 1년 만에 연 800만 달러의 적자로부터 7100만 달러의 흑자 경영으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칼슨은 '진실의 순간'을 설명하기 위해 접시를 자주 예로 들었다. 만약 승객들이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접시가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같은 순간에 그들이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가 불결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딸이 짜증을 내거나 울거나 하면 내 짜증지수가 급격히 올라간다. 분을 못 참아 화를 낸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지낼수록... 별로 좋은 대응방법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만 손해라는 느낌... 정확하게 표현은 못하지만 짜증내고 울 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를 모른 채 부모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윽박지르고 야단치면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소리친다고 울음을 쉽게 그치지도 않고. 아이는 아이대로 판단하고 크는 것이다. 짜증내고 울 때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모로선 아이의 심리를 잘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이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냥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하며 넘겨야 할 것 같다. 참을 인자를 여러 번 새겨야 할 일이다. 대부분 그러면 결과적으로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좋은 것 같다.
나는 간접적으로만 관련된 일에 대한 메일을 하나 받았다. 핵심은 본인 주장 재방송.
사람은 참 바뀌지 않는다.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완곡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내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아니. 직설적으로 얘기해서 바뀔 것 같았다면 나도 그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
물론 생각, 태도, 성향 등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점은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경우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사람보다 분명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더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아집에 가깝다면? 그래서는 대화가 진전되질 않는다. 본인이 이해하고 싶은대로 사태를 이해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재구성한다면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공감대 없인 차이도 없다.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해 놓고서 정신 승리하고 있는... 안타깝다. 재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래서 어느 정도 기여하는 부분도 없진 않은데... 기본 태도에 근본적 하자가 있어서 별로 성원해 주고 싶지 않다.
지독한 몸살감기에서 거의 회복되었다. 잔기침을 조금 할 뿐... 덕분에 새해를 기념해서 짧은 나들이를 다녀올 수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북한강 쪽으로 검색해서 찾아간 곳. 양평 카페 엔로제... 썩 멋진 풍경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풍경과 카페분위기가 10점 만점 중 9점이라면, 커피 맛은 7점, 음식은 6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카페"를 지향하는지라 음식은 종류도 많지 않고... 여하튼 별로다. 커피 맛을 극찬하는 방문기를 여럿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린 평소에 집에서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시기 때문일까? 딱 그 정도 맛이었다. 그래도... 바로 그 풍경과 분위기 때문에라도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