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2일 목요일

페친 이민규 님의 견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 말하지 마세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당신이 직접 나서세요.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욕먹고 심판받는 이유고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에 관해 참으로 오해를 많이 한다. 사도 바울도 이런 오해를 방어하는데(롬 6:1, 15),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사랑 안에서 삶의 행위로 나타난다(갈 5:6. 특히 갈 5:16-25). 
야고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른다. 어떤 이들에게 믿음이란 단지 신앙의 진리일 뿐이다. 그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와 같은 명제를 믿고 고백하는 것(약 2:19)은 사실 의미가 없다. 이러한 공식적인 교리에 대한 수긍과 입술의 고백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다(약 2:14). 이런 믿음은 귀신들의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도 하나님 한 분인 줄 믿고 떨기 때문이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역시 페친인 우종학 님의 견해

"기적 안에 신을 가두지 말라"

"... 흔히 우리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모습에만 익숙해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보는 신의 모습은 주로 기적을 행하는 신의 모습이다. 신의 역사는 너무나 기적의 세계에만 국한된다. 반면, 우리의 일상과 자연법칙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우주를 섭리하는 신의 모습은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 을 믿고 의지하기는 오히려 쉽다. 고민할 여지도 적고. 간절히 매달릴 여지도 많고. 내 문제에 대해서 또 이웃의 문제에 대해서 "기적"적으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기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은 꽤 과묵하신 것 같다. 아니면 "자유방임형" "방목형"이시던가... 내 문제, 내 이웃의 문제...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도워줘라... 그런 식인 것 같다.

개신교 , 특히 개혁주의, 복음주의, 오직 성경... 이런 접근은 종교개혁 이후 변화된 사회에 대응하는 교회의 대응이었다면, 이제 그런 접근은 역사적 의의를 차츰 잃는 것 같다. 고쳐 쓸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심지어 한 때 개혁의 대상이자 수구 꼴통 보수로 치부되었던 가톨릭이 요즘은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개혁주의 개신교도 그럴 수 있다. 다만 종교개혁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리다. 시대와 역사의 변화를 냉정하고도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나부터...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을 바라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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