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는 자유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로 쉽게 등치되는 것이다. 경제중심적 이해.... 이런 경제 환원적 사고를 비판하는데 루만이론은 매우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보수 혹은 극우파들이 자유를 경제적 자유로 '좁게 이해했다면', 진보 진영은 자유를 정치적 자유로 마찬가지로 '좁게' 이해했다.
"자유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과부하(過負荷)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최장집)
정확한 지적이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생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상생활, 사적 영역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정치가 들어와야 한다. 생활정치... 예술도 들어와야한다. 하우스 콘서트 같은 형식도 좋고... 어려운 이야기들도 들어와야한다. 사실 들어 오고 있는 것 아닌가? 누구보다 정치적이지 않은가? 토론? 정치토론? 칼부림이 나기도 하는? 잠재력은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일상생활 속의 그 많은 정치담론, 토론, 논쟁이 왜 생산적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했으니까 지금 이 정도 민주주의라도 누리는 것일까? 민도가 낮다는 것은 또 뭔가? 그 어느나라 국민보다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나? 오히려 그게 문제인가? 지나친 관심? 일상생활 속의 관심, 주제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
"사회기술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s) 관점, 접근이 있다. 대략... "기술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자신의 논리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공진화한다는 생각에 기초...." 이런 내용을 갖는... "체계" "시스템"은 주로 이런 의미로 이해된다. 연결되어있다는... 한 덩어리라는...
물론 루만의 '체계' 개념은 이와 다르다. 오히려 환경으로부터의 '분리'가 강조된다. '자신의 논리'에 따라 환경과 구분되는...
환경으로부터의 분리가 관계의 절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루만은 분리를 강조한다. 그것은 체계 간의 과도한 통합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한국에서는 분리에 대한 생각이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 '공공성'을 그런 방식으로 강조. 체계의 자기논리를 강조한는 것은 이기적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체계와 개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모두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는듯.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공적인데...
한국에서는 분리에 대한 생각이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 '공공성'을 그런 방식으로 강조. 체계의 자기논리를 강조한는 것은 이기적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체계와 개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모두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는듯.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공적인데...
1. 페이스북을 찾는 이유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지적 자극을 기대하는 것 같다. 시사적 이슈나 학문, 신앙 등 기타 내 관심사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는 새소식, 견해들을 살피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특히 아침에 그런 자극이 필요하다.
2. 똑똑한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더할나위없이 훌륭하고 산뜻한 이론들, 견해들, 대안들은 넘쳐난다. 홍수다 홍수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현실은 처참하다.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저열하고, 천박하고, 몰상식한 인간들, 행태들이 넘쳐난다. 홍수다 홍수. 이 둘 사이의 엄청난 간극.... 그것을 메꾸는 일이 필요하다. 대안과 실천의 단위가 너무 커서는 안된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진지전이다. 그런 일에 대한 담론이 더 풍성해지고, 더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런 실천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3.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라면.... 중간기술, 적정기술... 같은 대안이 있는 것 같다. 거대 과학 프로젝트를 비판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이미 있는 지식, 기술을 더 긴요한 일들에 사용하는.... 물론 기술에만 초점을 맞추는 접근의 한계도 분명하다. 그래서 "적정기술"이 아니라 "적정사회시스템"을 강조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생명과학 역시 마찬가지...
거대 기술을 선호하는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조건을 지적하는데 거시 사회이론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한국사회의 특징은 소용돌이, 중앙으로의 쏠림이다. 사회구조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중앙정부, 행정부, 국가 주도적.... 서울, 수도권 중심.... 재벌중심.... 발전주의, 성장주의, 업적주의 등등
"60년대 미국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위계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권력의 정점을 향하여, 공간적으로 서울로의 집중을 결과하는 '소용돌이의 정치'로 특징지은 바 있다. 이후 이 현상은 더욱 강화되어왔다." (최장집)
이런 쏠림 현상을 반대하자는 주장이 없진 않다. 아니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런 운동의 성과가 없지 않다. 허나 뭔가 불편한다. 그런 세력, 운동 자체가 새로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중심이 만들어낸 프레이밍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현실과 괴리가 큰 주장만 할 수밖에 없어서?
과학기술정책도 그런 것 같고... 생명과학윤리 정책도..
장애인 정책, 장애인 운동도 그런 것 같고...
기독교도 그런 것 같고..
세상, 아니 한국을 바꾸는 일은 변방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꾸변방에서 다양한 실험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준히... 스며들듯이... 요란한 소리 내지 않으면서....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실험, 그런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중앙'언론, '중앙'을 지향하는 학문이 떠들썩하게 주목하는 그런 현상이 아닌...
내가 떠들썩한 운동, 대안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뜩찮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중앙, 대형, 거대 지향을 - 내용, 지향점은 정반대일지언정 - 또 다른 중앙, 대형, 거대 지향으로 맞서는데 한계가 있다는....
아니 이미 그런 지점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변방에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심사, 그 기저에는 이쪽이건 저쪽이건 중앙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그런 실존적 조건이 내 지식,지향을 결정하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존재의 의미일 수 있으므로...
변방... 중앙을 흉내내려는, 중앙보다 더 중앙다운 그런 변방은 필요없다. 변방이 가치있는 모습은 중앙에서 할 수 없는 실험을 할 수 있다는...
"60년대 미국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위계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권력의 정점을 향하여, 공간적으로 서울로의 집중을 결과하는 '소용돌이의 정치'로 특징지은 바 있다. 이후 이 현상은 더욱 강화되어왔다." (최장집)
이런 쏠림 현상을 반대하자는 주장이 없진 않다. 아니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런 운동의 성과가 없지 않다. 허나 뭔가 불편한다. 그런 세력, 운동 자체가 새로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중심이 만들어낸 프레이밍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현실과 괴리가 큰 주장만 할 수밖에 없어서?
과학기술정책도 그런 것 같고... 생명과학윤리 정책도..
장애인 정책, 장애인 운동도 그런 것 같고...
기독교도 그런 것 같고..
세상, 아니 한국을 바꾸는 일은 변방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꾸변방에서 다양한 실험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준히... 스며들듯이... 요란한 소리 내지 않으면서....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실험, 그런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중앙'언론, '중앙'을 지향하는 학문이 떠들썩하게 주목하는 그런 현상이 아닌...
내가 떠들썩한 운동, 대안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뜩찮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중앙, 대형, 거대 지향을 - 내용, 지향점은 정반대일지언정 - 또 다른 중앙, 대형, 거대 지향으로 맞서는데 한계가 있다는....
아니 이미 그런 지점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변방에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심사, 그 기저에는 이쪽이건 저쪽이건 중앙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그런 실존적 조건이 내 지식,지향을 결정하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존재의 의미일 수 있으므로...
변방... 중앙을 흉내내려는, 중앙보다 더 중앙다운 그런 변방은 필요없다. 변방이 가치있는 모습은 중앙에서 할 수 없는 실험을 할 수 있다는...
2014년 6월 26일 목요일
최문순 지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 얘길 남겼다.
-야권에서 대권주자로 오르내리는 사람들, 안철수 공동대표, 문재인 의원, 안희정 충남도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지금같은 구조에선 잘해나갈 수 없다. 박 대통령보다 조금 더 나을 순 있더라도 근본적 차이는 없을 거다.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는 개인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이제 ‘제7공화국’을 열어야 한다고 본다. 1987년 체제가 최소한의 민주주의에 합의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제7공화국은 통일과 권력의 분산, 지역갈등 해소, 소선거구제 개정, 복지 철학을 담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새로 짤 때가 됐다. 다음 대통령은 개헌을 약속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장집 교수도 기회있을 때마다 대통령에 권한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 제도가 민주주의 발전의 가장 큰 적이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행정부, 국가기구에 집중되는 현상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독일의 경우 녹색당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비례대표제, 정당명부제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조성복, 독일 녹색당이 성공한 이유는? 비례대표제!)
문화가 먼저인가 제도가 먼저인가.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묻는 것과 같다. 함께 진화해간다고 봐야하겠지. 발전주의, 개발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인가? 현제도가 그런 문화를 강화하거나, 다양해진 문화를 반영하지 못해서 발전주의 문화가 과잉대표되고 있는가?
제도적으로 대통령, 중앙정부, 행정부, 국가(기구)를 향해서 소용돌치이치고 있다면, 문화적으로 이들 구들이 대표하는 지배적인 문화를 향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도와 문화가 연계되어 있다는 얘기는, 중심 지향적인 제도는 이런 중심지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배적인 문화를 더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중심지향성은 다양성을 빨아들인다.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따라서 발전주의는 자연스레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지향한다. 자연을 개발하여 보편적 가치를 조직화하는 발전주의에서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정체(政體)는 환영받지 못한다. 분권적 성격을 가지는 지방자치는 동일화의 사고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발전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혁, 김보경, 21C 녹색한반도, 발전과 녹색의 대립을 넘어)
지방정부, 지자체 차원에서는 오히려 더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도 거기에 해당하고..... 주변부의 변화를 통해서 중앙의 경로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주변부에서 묵묵히 그런 일을 감당하는 이들에 경의를 표한다.
어쩌면 중앙 차원의 민주주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자체 차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더 빠를수도... 아니 정당정치 활성화는 오히려 지방자치에 활성화, 지자체 역할 강화로 가야 할 것. 노무현 정권에서 시도했던 분권화는 확실히 방향을 잘 잡긴했다. 발전주의자들은 중앙집권을 강조하지만... (싱가폴모델?)
정책으로 따지면... 주변부에 해당하는 정책에서 오히려 다양한 실험들을 해볼 수 있다. 과학기술정책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시민참여'같은 시도... 혹은 생명윤리 같은 주제들로 문화에 균열을 낼 수도.... 이런 접근 역시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에서 더 시도해봄직하다. 실제로 탈핵 이슈는 지자체 차원에서 더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생명과학정책, 생명윤리정책을 지자체 차원에서 다루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지만...
여하튼 지배적인 경향은.... 우세한 발전주의 문화가 다양한 문화, 가치지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버린다.
발전주의는 변화를 통해서 지속된다. 변화된 형태를 신발전주의(혹은 신개발주의, 이 경우 강조점이 달라지긴 하지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야권에서 대권주자로 오르내리는 사람들, 안철수 공동대표, 문재인 의원, 안희정 충남도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최장집 교수도 기회있을 때마다 대통령에 권한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 제도가 민주주의 발전의 가장 큰 적이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행정부, 국가기구에 집중되는 현상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독일의 경우 녹색당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비례대표제, 정당명부제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조성복, 독일 녹색당이 성공한 이유는? 비례대표제!)
문화가 먼저인가 제도가 먼저인가.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묻는 것과 같다. 함께 진화해간다고 봐야하겠지. 발전주의, 개발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인가? 현제도가 그런 문화를 강화하거나, 다양해진 문화를 반영하지 못해서 발전주의 문화가 과잉대표되고 있는가?
제도적으로 대통령, 중앙정부, 행정부, 국가(기구)를 향해서 소용돌치이치고 있다면, 문화적으로 이들 구들이 대표하는 지배적인 문화를 향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도와 문화가 연계되어 있다는 얘기는, 중심 지향적인 제도는 이런 중심지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배적인 문화를 더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중심지향성은 다양성을 빨아들인다.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따라서 발전주의는 자연스레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지향한다. 자연을 개발하여 보편적 가치를 조직화하는 발전주의에서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정체(政體)는 환영받지 못한다. 분권적 성격을 가지는 지방자치는 동일화의 사고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발전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혁, 김보경, 21C 녹색한반도, 발전과 녹색의 대립을 넘어)
지방정부, 지자체 차원에서는 오히려 더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도 거기에 해당하고..... 주변부의 변화를 통해서 중앙의 경로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주변부에서 묵묵히 그런 일을 감당하는 이들에 경의를 표한다.
어쩌면 중앙 차원의 민주주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자체 차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더 빠를수도... 아니 정당정치 활성화는 오히려 지방자치에 활성화, 지자체 역할 강화로 가야 할 것. 노무현 정권에서 시도했던 분권화는 확실히 방향을 잘 잡긴했다. 발전주의자들은 중앙집권을 강조하지만... (싱가폴모델?)
정책으로 따지면... 주변부에 해당하는 정책에서 오히려 다양한 실험들을 해볼 수 있다. 과학기술정책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시민참여'같은 시도... 혹은 생명윤리 같은 주제들로 문화에 균열을 낼 수도.... 이런 접근 역시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에서 더 시도해봄직하다. 실제로 탈핵 이슈는 지자체 차원에서 더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생명과학정책, 생명윤리정책을 지자체 차원에서 다루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지만...
여하튼 지배적인 경향은.... 우세한 발전주의 문화가 다양한 문화, 가치지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버린다.
발전주의는 변화를 통해서 지속된다. 변화된 형태를 신발전주의(혹은 신개발주의, 이 경우 강조점이 달라지긴 하지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개발주의에서 내거는 개발의 명분은 환경보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균형발전, 문화향상, 복지증진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된다. 과거 성장과 개발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개발사업을 추진했다면, 오늘날 도시개발사업은 시민의 제한적 참여와 의회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따를 뿐만 아니라 녹색복원이나 문화향유와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신개발주의는 토건을 전면에 내세우던 과거 개발주의와 달리 시대적 가치를 표방하며 각종 사업을 추진한다. 사업추진의 결과가 토건사업과 동일하더라도 표방하는 가치 때문에 반대가 쉽지 않고, 추진주체는 더욱 강력한 힘과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구개발주의가 확대되는 경제활동과 새로운 계급을 담는 도시공간을 만들고 제조업에서 소비시장을 만들어주었다면, 신개발주의에서는 환경, 역사, 문화, 여가 등 다양한 테마를 활용해 차별성을 부각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장소 자체를 상품으로 바꾼다(강홍빈, 2004). 구개발주의가 필요를 채우기 위해 개발을 양산했다면 신개발주의는 다양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을 고안해낸다. 욕망은 개발주체에 따라 정
치권력 획득, 경제적 이익, 조직 팽창, 정치적 지지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욕망 충족을 위해 활용되는 신개발주의 논리에는 균형발전과 정의, 생태계복원과 지속가능성 확보, 역사문화복원, 사회복지증진, 혁신창출 등이 있다." (변창흠 2014, 신개발주의의 구조적 특성과 유산 극복을 위한 정책 과제)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현시점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언급하기 적절하지 않은 이유를 설득력있게 설명했는데, 그건 현실을 직시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최 교수의 그런 태도에서 배울 점들이 있다. (다만 정당정치를 대안으로 강조하는데 대해선 불만이다. 그건 오히려 교과서적인 태도 아닌가? 현실에 기초한 대안이 아니라?) 여하튼 현실에 대한 강조는 그의 다른 책 "어떤 민주주의인가"에서도 관찰된다.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처럼 큰 사회적 현상들의 경우,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그 내용을 자신의 문제로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때가 많다... '경험된 민주주의의 현실'이라는 기초 없이 민주주의를 책을 통해 상상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라는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민주화가 되고, 민주주의가 정말로 우리가 대면하는 현실이 되고 나니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야말로 현실의 경험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어떤 제도를 선택하고 어떤 내용의 정치적 실천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논의를 풍부히 해 나가야 할 때라고 본다" (최장집, 어떤 민주주의인가, 강유원,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에서 재인용, 103쪽)
2014년 6월 25일 수요일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1) 오전에 뭘 많이 먹지 않은 탓에 배가 고픈 상태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신우회에 참석했다. 허기져서 쓰러질 지경인데 웬 할 말들이 그리 많은지... (나를 포함해서 ㅎ) 느즈막히 내려간 식당... 과식을 하지 않을래아 않을 수가... 결과는! 오후를 망쳤다. 1시부터 4시까지. 잠을 잘 건도 아니고 멍하니 괴뤄워하면서... 일찍 집을 가 말아.... 고민하면서...
네 시. 이제사 정신이 조금 든다. 정말 과식은 금물. 특히 점심! 그러지 않도로 틈틈이 먹을 것!
(2) 아무리 생각해도 고층아파트 단지는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최대한 빨리 이사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어디서든 자리를 잡게되면... 지금 집이 집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는데... 답답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모습이 심지어 불쌍해 보이기까지... 설령 어린이집에 다니더라도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실내에서 보내게 될테니까... 자. 지금부터라도 힘을 낼 이유가 분명해졌다. 자. 더 시간 허비하지 말고 화이팅!!
네 시. 이제사 정신이 조금 든다. 정말 과식은 금물. 특히 점심! 그러지 않도로 틈틈이 먹을 것!
(2) 아무리 생각해도 고층아파트 단지는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최대한 빨리 이사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어디서든 자리를 잡게되면... 지금 집이 집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바로 그 점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는데... 답답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모습이 심지어 불쌍해 보이기까지... 설령 어린이집에 다니더라도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실내에서 보내게 될테니까... 자. 지금부터라도 힘을 낼 이유가 분명해졌다. 자. 더 시간 허비하지 말고 화이팅!!
어찌하디보니 페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나와 정치적 견해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들이 있다. '페친 다양성' 유지를 위해서 그냥 두고 있는데 가끔씩 '욱' 할때가 있다. 문창극 사태에 대한 페친 이모씨의 견해.
"오늘 대한민국의 일부 언론은
에구 그러셨어요? 한국 언론에 대해서 그렇게 애정이 많으셨어요? 문창극 영상 편집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언론의 왜곡, 편집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을 내셨어요? 진실을 훼손? 큭큭. 이런 건 뭐라고 해 줘야할까. 과대망상? 정신차리세요. 의사이신모양이던데.... 어디 가서 상담이라도 좀 받아보세요.
"오늘 대한민국의 일부 언론은
세계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을 제공했다
짜집기 편집(일명 악마의 편집)으로 국민들을
혹세무민한 것 이다
짜집기 편집(일명 악마의 편집)으로 국민들을
혹세무민한 것 이다
역사에 꼭 기록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부끄러운 일을 자행한 언론에 대해
철저한 심판이 남았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우리의 자손이 바른 길을 걷게 할 수 있다.
철저한 심판이 남았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우리의 자손이 바른 길을 걷게 할 수 있다.
진실을 훼손하는 언론은 버림받아야 한다."
에구 그러셨어요? 한국 언론에 대해서 그렇게 애정이 많으셨어요? 문창극 영상 편집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언론의 왜곡, 편집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을 내셨어요? 진실을 훼손? 큭큭. 이런 건 뭐라고 해 줘야할까. 과대망상? 정신차리세요. 의사이신모양이던데.... 어디 가서 상담이라도 좀 받아보세요.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 엣지 오브 투모로우
- 리스본행 야간열차
- 스틸라이프
최근 상영작 중 보고 싶은 영화다. 이렇게 이름이라도 한 번 불러본다.
읽고 싶은 책은 그때 그때 기록해 놓는다. 이 중 극히 일부를 사거나 빌려서 본다.
보고 싶은 영화, 읽고 싶은 책.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 중 내 욕망을 자극하는... 읽고 싶거나 보고 싶은 욕망. 어떤 욕망일까?알고 싶다는 욕망?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망? 아니 따지고 보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 가깝다. 남들의 이야기 속에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혹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보거나 읽는 것이니까. 물론 이 경우는 간접적이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을 내가 내 입으로 내 글로 표현해야 직접적일테니까.
그런 직접적 욕망이 있나?내 얘기를 하고 싶은 욕망?대리만족 정도가 아닌...
보고 싶은 영화, 읽고 싶은 책은 아마 항상 있을 것 같은데... 대리만족, 소비자 정도의 역할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 능력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그들의 욕망에 충실해사 만들어낸 결과물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좋은 글들, 좋은 영화들, 작품들이 넘쳐나니까... 소비를 통해서 대리만족?
네 이야기는? 당신만의 이야기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고?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다.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고, 뭐 그리 새삼스럽거나 새롭거나 기발한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소비만 하면서 살 것인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다가 가지 않는가?
삶의 의의는 다른 데서 찾으면 될 일이다. 사실 그렇게 좋고 훌륭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상식적인 이야기들, 지당한 이야기들, 멋지거나 조금 덜 멋진 대안들, 삶에 대한 충고들은....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낯설거나 -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 혹은 적용되지 않고 있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잘 소화해서 현실, 현장의 맥락에서 잘 소개하거나 적용하는 일은 필요하다.
똑똑한 사람들, 전문지식, 대안들이 모자란 것 같지는 않다. 언제나 그렇듯 막상 쓰려면 안 보이는게 문제지. 현장이 중요한 것을...
읽고 싶은 책은 그때 그때 기록해 놓는다. 이 중 극히 일부를 사거나 빌려서 본다.
보고 싶은 영화, 읽고 싶은 책.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 중 내 욕망을 자극하는... 읽고 싶거나 보고 싶은 욕망. 어떤 욕망일까?알고 싶다는 욕망?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망? 아니 따지고 보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에 가깝다. 남들의 이야기 속에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혹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보거나 읽는 것이니까. 물론 이 경우는 간접적이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을 내가 내 입으로 내 글로 표현해야 직접적일테니까.
그런 직접적 욕망이 있나?내 얘기를 하고 싶은 욕망?대리만족 정도가 아닌...
보고 싶은 영화, 읽고 싶은 책은 아마 항상 있을 것 같은데... 대리만족, 소비자 정도의 역할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 능력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그들의 욕망에 충실해사 만들어낸 결과물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좋은 글들, 좋은 영화들, 작품들이 넘쳐나니까... 소비를 통해서 대리만족?
네 이야기는? 당신만의 이야기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고?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다.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고, 뭐 그리 새삼스럽거나 새롭거나 기발한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소비만 하면서 살 것인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다가 가지 않는가?
삶의 의의는 다른 데서 찾으면 될 일이다. 사실 그렇게 좋고 훌륭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상식적인 이야기들, 지당한 이야기들, 멋지거나 조금 덜 멋진 대안들, 삶에 대한 충고들은....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낯설거나 -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 혹은 적용되지 않고 있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잘 소화해서 현실, 현장의 맥락에서 잘 소개하거나 적용하는 일은 필요하다.
똑똑한 사람들, 전문지식, 대안들이 모자란 것 같지는 않다. 언제나 그렇듯 막상 쓰려면 안 보이는게 문제지. 현장이 중요한 것을...
미야지마 교수의 논지였던 것 같은데...
동아시아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합리성이 관철되는 것이 어려웠다는... 동아시아가 비합리적이서가 아니라는 말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는 허성도 교수의 이야기...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합리성이 관철되는 것이 어려웠다는... 동아시아가 비합리적이서가 아니라는 말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는 허성도 교수의 이야기...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선동렬 감독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유형)이 있었는데 그걸 오늘에서야 알게되었다. 삼미 슈퍼스타스(언제적 삼미더냐)가 원년에 기록한 팀 방어율 6.23을 올 해 기아가 깰 것 같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서...
"SUN : 팀방어율은 투수 & 투수코치의 몫"
그렇다. 자신의 팀의 상징으로 무슨 신성불가침의 존재인양...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임을 잊는 그런 행태... 권한을 제대로 주지도 않으면서 책임은 철저하게, 과도하게 묻는... 누구겠는가. 그네지.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SUN은 이제 한 6개월도 남지 않았고 - 삼성에서도 눈치 못채는 척 버티다 쫓겼났다지 - 그네는 2년 반쯤 남았나? 요즘 내 기력 감퇴에 그대들이 기여한 바도 있소. 이것까지 책임지라고는 못하겠지만....
"SUN : 팀방어율은 투수 & 투수코치의 몫"
그렇다. 자신의 팀의 상징으로 무슨 신성불가침의 존재인양...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임을 잊는 그런 행태... 권한을 제대로 주지도 않으면서 책임은 철저하게, 과도하게 묻는... 누구겠는가. 그네지.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SUN은 이제 한 6개월도 남지 않았고 - 삼성에서도 눈치 못채는 척 버티다 쫓겼났다지 - 그네는 2년 반쯤 남았나? 요즘 내 기력 감퇴에 그대들이 기여한 바도 있소. 이것까지 책임지라고는 못하겠지만....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한국-러시아 간의 월드컵 경기를 보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사무실 나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은 터라... 집에서... 세 방송국이 모두 중계를 했는데 해설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차범근 씨의 경우 너무 격앙되어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내용도 썩... 캐스터 1인, 해설 2인, 모두 세 명이서 방송하는 경우엔 산만한 느낌을 갖게 한다. (MBC - 송종국, 안정환, SBS - 차범근, 차두리). 내 결론은 KBS. 이영표! 현역 때 별명이 꾀돌이 였던가? 차분하지만 듣기 좋은 적당히 높은 톤인데다, 해설 내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또 정확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전략, 전술도 다 소용이 없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공감했다. 어디 축구만 그럴까. 인생이 다 그렇다. 나만해도 감기몸살 때문에 어제 오후부터 아무 것도 못하고 있질 않은가. 지금은 약기운 때문인지 좀 낫다. 게다가 딸은 프로그램 참석하러 엄마와 함께 집을 비우고 있고. 모처럼 찾아온 평화와 안정의 시간... 딸은 잠을 자지 않는 한 계속 움직이고 같이 놀아주기를 요구한다. 특히 할머니는 조금도 못 떨어지게.... 그래서 어제는 야단을 좀 쳤다. 어머니는 두 둘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무슨 야단이냐고 하시지만.... 내가 보기엔 벌써 어지간한 상황 판단은 다 하는 것 같고, 칭얼거림, 떼씀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서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크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지만... 벌써부터 이런 문제들이 생기니 괴롭기도 하다.
(이영표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고: "월드컵 중계, 이영표만큼만 해라")
(이영표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고: "월드컵 중계, 이영표만큼만 해라")
페친 이택광 님 글에 달린 Onook Oh 님의 댓글. 시원한 글이라 옮겨 둔다.
"주류 미국 경제학은 (한국도 별로 다르지 않겠지만) 이코노메트릭스 혹은 복잡한 수학모델을 사용해서 정치 경제 등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게 멋있게 보이기는 한데 보통 사람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저게 뭔 소리인가 할 때가 다반사죠. 피케티는 이런 주류 경제학의 연구 방법론을 거부하고, 대신 역사적인 방법론을 선택했죠. 그러니까, 약 20여개의 나라의 200여년이 넘는 historical한 데이타를 구해서 그냥 간단한 도표를 그리죠. 복잡한 수학 혹은 통계공식을 사용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볼 때는 뭐 리서치 방법론이랄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도 아주 쉽게 고개가 끄덕여 질 뿐 아니라 비판할 구석을 찾기가 더 힘들어지죠. 피키티의 공헌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historical한 데이타를 통해 보통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 나간데 있다고 봅니다. 큰 공헌이죠. 어떻게 보면 신비화된 주류경제학의 리서치 방법론 (수학 + 통계 사용하기 좋아하는)을 보기 좋게 엿먹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수학공식으로 아무리 그럴 듯한 모델을 만들고 썰을 풀어봐야 역사적인 자료에는 못 이기겠죠. 장하준 교수가 맨날 그러잖아요. 수학공식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기를 경제학자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미국 뿐 아니라 한국 그리고 주류 경제학에서 수학 혹은 통계 못하면 대학 -연구소에 자리 잡기 힘들 겁니다. 저는 이것을 탈신비화시킨 것도 피케티의 공헌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피케티의 연구방법론이 더 많이 사용되서 일반인들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류경제학이 버티고 있는 이상 리서치 페이퍼 퍼블리쉬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피케티나 장하준교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제학을 접급한다면, 주류경제학은 연구방법론에 치여 복잡한 문제를 협소화 시키는 경향이 있는듯 합니다. 시도야 좋지만 사회가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수학-통계 모델로 사회-정치-경제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건 대박이죠. 프로그램화 하면 되니까? 복잡한 현상을 수식으로 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전제'를 만들거나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게 지나치다 보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수식만 가득찬 연구들만 나오게 되는 듯 합니다. 문제는 이런 연구를 몇년 하다 보면, 뇌구조가 수식으로 가득찬 '공돌이'처럼 변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수학-통계를 사용하지 않는 학자들은 멍청하고 게으로 학자처럼 보이나 봅니다. 이게 주류 경제학의 실상이고 사회과학도 전반적으로 이 추세로 변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미국 대학의 사회과학 박사과정 커리큘럼에서 통계 수업은 거의 필수가 되어가고, 유럽의 대학들도 점점 이런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구방법론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점을 알고 그 범위 안에서 떠들어야 하는데, '학자'의 자존심이란 것이 그걸 허락하지 않나 봅니다. 퍼블리케이션도 해야 하고... 제 발언이 수식을 사용하는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을 뭉퉁그려 비판한 경향이 있기는 한데, 수학과 통계모델에 의존하는 경제학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친구들이 '공돌이'인가 아니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학자들인가 하는 뭐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서 몇자 적었습니다."
"주류 미국 경제학은 (한국도 별로 다르지 않겠지만) 이코노메트릭스 혹은 복잡한 수학모델을 사용해서 정치 경제 등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게 멋있게 보이기는 한데 보통 사람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저게 뭔 소리인가 할 때가 다반사죠. 피케티는 이런 주류 경제학의 연구 방법론을 거부하고, 대신 역사적인 방법론을 선택했죠. 그러니까, 약 20여개의 나라의 200여년이 넘는 historical한 데이타를 구해서 그냥 간단한 도표를 그리죠. 복잡한 수학 혹은 통계공식을 사용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볼 때는 뭐 리서치 방법론이랄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도 아주 쉽게 고개가 끄덕여 질 뿐 아니라 비판할 구석을 찾기가 더 힘들어지죠. 피키티의 공헌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historical한 데이타를 통해 보통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 나간데 있다고 봅니다. 큰 공헌이죠. 어떻게 보면 신비화된 주류경제학의 리서치 방법론 (수학 + 통계 사용하기 좋아하는)을 보기 좋게 엿먹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수학공식으로 아무리 그럴 듯한 모델을 만들고 썰을 풀어봐야 역사적인 자료에는 못 이기겠죠. 장하준 교수가 맨날 그러잖아요. 수학공식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기를 경제학자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미국 뿐 아니라 한국 그리고 주류 경제학에서 수학 혹은 통계 못하면 대학 -연구소에 자리 잡기 힘들 겁니다. 저는 이것을 탈신비화시킨 것도 피케티의 공헌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피케티의 연구방법론이 더 많이 사용되서 일반인들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류경제학이 버티고 있는 이상 리서치 페이퍼 퍼블리쉬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피케티나 장하준교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제학을 접급한다면, 주류경제학은 연구방법론에 치여 복잡한 문제를 협소화 시키는 경향이 있는듯 합니다. 시도야 좋지만 사회가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수학-통계 모델로 사회-정치-경제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건 대박이죠. 프로그램화 하면 되니까? 복잡한 현상을 수식으로 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전제'를 만들거나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게 지나치다 보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수식만 가득찬 연구들만 나오게 되는 듯 합니다. 문제는 이런 연구를 몇년 하다 보면, 뇌구조가 수식으로 가득찬 '공돌이'처럼 변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수학-통계를 사용하지 않는 학자들은 멍청하고 게으로 학자처럼 보이나 봅니다. 이게 주류 경제학의 실상이고 사회과학도 전반적으로 이 추세로 변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미국 대학의 사회과학 박사과정 커리큘럼에서 통계 수업은 거의 필수가 되어가고, 유럽의 대학들도 점점 이런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구방법론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점을 알고 그 범위 안에서 떠들어야 하는데, '학자'의 자존심이란 것이 그걸 허락하지 않나 봅니다. 퍼블리케이션도 해야 하고... 제 발언이 수식을 사용하는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을 뭉퉁그려 비판한 경향이 있기는 한데, 수학과 통계모델에 의존하는 경제학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친구들이 '공돌이'인가 아니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학자들인가 하는 뭐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서 몇자 적었습니다."
2014년 6월 16일 월요일
"한국사회에서의 권위주의와 독재권력에 대한 부정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로 내면화되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민주주의야말로 한국의 정치 전통에서 가장 확실한 집합적 경험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95쪽)
최장집의 이 이야기는 내게 신선하게 들렸다. "집합적 경험"은 쉽게 바뀌지 않지.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지. 물론 대중추수주의도 문제지. 잘못된 표현이라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명실상부하게 만들도록 애를 써야지. 그게 지식인이 할 일이지. 하지만 정치 전통, 집합적 경험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지. 통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대중들이 좇아오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꼰대적 태도는 도움이 되질 않지. 정당정치을 강조하는 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그룹들의 태도는 그런 면에서 비판을 받는 것이다.
루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 루만이 그리는 근대사회의 작동 모습을 규범적 기준으로 삼아서 한국의 나아갈 방향으로 삼는다? 그런 꼰대적 계몽적 태도를 루만이 가장 싫어했을거야. 물론 루만 스스로도 꼰대 기질이 다분하긴 했어. 여하튼... 현실에서 출발하자고. 현실! 역사! 장기지속의 역사!
최장집의 이 이야기는 내게 신선하게 들렸다. "집합적 경험"은 쉽게 바뀌지 않지.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지. 물론 대중추수주의도 문제지. 잘못된 표현이라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명실상부하게 만들도록 애를 써야지. 그게 지식인이 할 일이지. 하지만 정치 전통, 집합적 경험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지. 통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대중들이 좇아오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꼰대적 태도는 도움이 되질 않지. 정당정치을 강조하는 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그룹들의 태도는 그런 면에서 비판을 받는 것이다.
루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 루만이 그리는 근대사회의 작동 모습을 규범적 기준으로 삼아서 한국의 나아갈 방향으로 삼는다? 그런 꼰대적 계몽적 태도를 루만이 가장 싫어했을거야. 물론 루만 스스로도 꼰대 기질이 다분하긴 했어. 여하튼... 현실에서 출발하자고. 현실! 역사! 장기지속의 역사!
2014년 6월 15일 일요일
어쩌다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 페북에서 김진균 선생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실천하는 지식인... 지식인이란... 뭐. 그런 이야기. 수도 없이 들었을... 매우 클래식한, 진부한 이야기인데... 원래 진리는 평범한 것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실천.... 내가 알게 된 것을 나누고 실천하는 것... 그게 지식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의의로 "좀 배운 사람들" 이야기를 잘 모른다. 워낙 똑똑하고 잘 나가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쉽게 빼앗겨서 그렇지 막상 주위에선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너무 복잡하게,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로 떠느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일은 정말 똑똑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그냥 내가 아는 만큼, 알게 된 만큼, 깨달은 만큼... 가까이에서 그런 지식과 깨우침을 공유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헌신하는 일... 그것만큼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일도 없는 것 같다.
장하석 교수가 어떤 인터뷰에서 "생각이 다 비슷하다, 트렌드를 좇아간다, 다 스마트폰때문이다... " 그런 이야기를 했다. 공감한다. 페이스북을 한 번 끊어볼까?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함석헌: 국가주의를 극복해나가는 길" (박노자)
"한국적 근대의 최대의 미(未)해결 과제라면 아마도 주체적이면서도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의 만들기일 것이다. 1920년대초반부터 “개인”이나 “인격”은 빈번히 쓰이는 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은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갇히기도 하고 “여성”으로 성별화되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체에 복속되기도 하고, “아동”으로 분류돼 훈육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특정 종교의 “신자”로서 종교 집단의 테두리에 갇히기도 했다. 물론 “민족”을 명분으로 삼은 국가가 자본가 계급을 창출시키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병영화 (兵營化)를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개발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는 민족/국가라는 전체성이 개인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지배하게 됐다. 오늘까지 와서도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가 “가장 인기가 높은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등장되어 보통 60-70% 안팎의 응답자로부터 조건부긴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 지난 시대의 내면적 주체성의 미(未)확립이 어떤 장기적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던 예수를 신앙한다 하면서도 “군대는 우리 울타리””라고 늘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의 수가 약 60만 명이나 되는 것 은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과연 이 60만 명 중에서 조 목사 설교문과 예수 가르침의 일치 여부에 대해 독립적 개인 판단을 시도해본 이들이 몇 명이 될까? 몰개성적인 “일체단결”은 일부 종교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전체의 하나의 “아비투스” (habitus: 관습)를 이룬다. 독도 관련의 일본과의 분쟁이든 월드컵이든 “국가”/”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하는 “이벤트”들이 잘 보여주듯이,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의 주술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가 거의 면역성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억압적 근대의 광기 속에서는 함석헌 (1901-1989)이 – 매우 드물게 – 민족적 전체의 전제 (專制)에 대한 종교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견제, 즉 개체와 전체 사이의 “균형 잡기”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시도해봤다. 그는, “민족” 내지 “국민”을 대신할 수 있는 “계급”과 같은 사회과학적 개념을 설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종교적 논리를 통해 “민족”의 상대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한국적 근대의 최대의 미(未)해결 과제라면 아마도 주체적이면서도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의 만들기일 것이다. 1920년대초반부터 “개인”이나 “인격”은 빈번히 쓰이는 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은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갇히기도 하고 “여성”으로 성별화되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체에 복속되기도 하고, “아동”으로 분류돼 훈육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특정 종교의 “신자”로서 종교 집단의 테두리에 갇히기도 했다. 물론 “민족”을 명분으로 삼은 국가가 자본가 계급을 창출시키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병영화 (兵營化)를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개발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는 민족/국가라는 전체성이 개인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지배하게 됐다. 오늘까지 와서도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가 “가장 인기가 높은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등장되어 보통 60-70% 안팎의 응답자로부터 조건부긴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 지난 시대의 내면적 주체성의 미(未)확립이 어떤 장기적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던 예수를 신앙한다 하면서도 “군대는 우리 울타리””라고 늘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의 수가 약 60만 명이나 되는 것 은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과연 이 60만 명 중에서 조 목사 설교문과 예수 가르침의 일치 여부에 대해 독립적 개인 판단을 시도해본 이들이 몇 명이 될까? 몰개성적인 “일체단결”은 일부 종교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전체의 하나의 “아비투스” (habitus: 관습)를 이룬다. 독도 관련의 일본과의 분쟁이든 월드컵이든 “국가”/”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하는 “이벤트”들이 잘 보여주듯이,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의 주술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가 거의 면역성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억압적 근대의 광기 속에서는 함석헌 (1901-1989)이 – 매우 드물게 – 민족적 전체의 전제 (專制)에 대한 종교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견제, 즉 개체와 전체 사이의 “균형 잡기”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시도해봤다. 그는, “민족” 내지 “국민”을 대신할 수 있는 “계급”과 같은 사회과학적 개념을 설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종교적 논리를 통해 “민족”의 상대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간 민주정부들이 추구해 온 정책모델은 '한국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레짐'이라고 할 만하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중심으로 하되 구 권위주의의 발전모델로부터 전수된 성장지상주의 이념 및 가치와 국가-재벌연합, 노동배제를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책레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부가 경제운용을 위해 취하는 정책의 기본적 틀 내지는 구조와 내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책을 주도하는 특정의 가치와 이념, 이를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독트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정책들, 이 정책이 가져오는 정치적, 사회적 결과 등의 요소들을 포괄한다. 그리고 이 정책레짐은 기존의 지배적인 정책에 도전하거나 이를 대체하는 대안으로서 등장하는 초기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우 광범한 국민적 컨센서스를 창줄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장기적으로 존손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책레짐의 형성은, 기존 정책노선의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의 하나로 특정 정치세력의 도전적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지만, 이것이 정책레짐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구성원 내지 투표자들의 광범한 지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배적 정책이 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정당들이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 268ff)
일반적으로 정책레짐의 형성은, 기존 정책노선의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의 하나로 특정 정치세력의 도전적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지만, 이것이 정책레짐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구성원 내지 투표자들의 광범한 지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배적 정책이 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정당들이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 268ff)
2014년 6월 12일 목요일
게르트 기거렌처, 막스플랑크협회의 인간개발연구소 소장의 책 "생각이 직관에 묻다"에 대한 페북 논의 중. 페친 전진권 님의 이야기가 유익해서 모아 놓는다.
"제가 보기에 기그랜저 형님은 강승욱님의 질문에 어느정도 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분의 heuristics 나 bounded rationality 개념은 ...님이 생각하시는 어느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직관을 믿어야 되느냐하는 식의 사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오류를 늘린다는 거지요. 우리는 적절한 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진화의 결과로 얻은 것이죠) 그걸 잘 활용하는게 오히려 좋다는 거죠. 물론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직관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겠죠.
"과학적 통계보다 직관이 더 정확하다는 증거가 책 내용의 태반인데요? 책을 안 읽어보셨나요? 불확실성이 짙은 문제(사회, 교육, 의료 등등)에 대해서 통계는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죠. 그게 정확하다면 주식 시장에서 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 주식시장에서도 데이터로만 판단해서 주식을 사고 파는 프로그램이 감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보다 수익률이 더 높은데요?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설마 프로그램 매도가 순수하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는건 아닐테고...다 인간의 직감이 들어가는 거지요. 물론 그런 프로그램이 시도되지 않은 건 아니죠. 블랙-숄즈 방정식을 만들어서 1997년 노벨상을 받은 분들이 그 방정식을 이용해서 주식을 거래했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처음 몇년은 잘나갔으나 한방에 날아갔습니다. 경제가 불안정해지자 바로 파산했죠. 그 회사가 망한게 최근 금융위기의 시발점 중 하나입니다(http://en.wikipedia.org/wiki/Long-Term_Capital_Management를 보세요).
"월가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누가 뭐래도 워렌 버핏이죠. 그는 수치를 보고 투자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죠. 기거랜저의 책에서 버핏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제가 보기에 기그랜저 형님은 강승욱님의 질문에 어느정도 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분의 heuristics 나 bounded rationality 개념은 ...님이 생각하시는 어느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직관을 믿어야 되느냐하는 식의 사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오류를 늘린다는 거지요. 우리는 적절한 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진화의 결과로 얻은 것이죠) 그걸 잘 활용하는게 오히려 좋다는 거죠. 물론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직관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겠죠.
"과학적 통계보다 직관이 더 정확하다는 증거가 책 내용의 태반인데요? 책을 안 읽어보셨나요? 불확실성이 짙은 문제(사회, 교육, 의료 등등)에 대해서 통계는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죠. 그게 정확하다면 주식 시장에서 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 주식시장에서도 데이터로만 판단해서 주식을 사고 파는 프로그램이 감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보다 수익률이 더 높은데요?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설마 프로그램 매도가 순수하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는건 아닐테고...다 인간의 직감이 들어가는 거지요. 물론 그런 프로그램이 시도되지 않은 건 아니죠. 블랙-숄즈 방정식을 만들어서 1997년 노벨상을 받은 분들이 그 방정식을 이용해서 주식을 거래했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처음 몇년은 잘나갔으나 한방에 날아갔습니다. 경제가 불안정해지자 바로 파산했죠. 그 회사가 망한게 최근 금융위기의 시발점 중 하나입니다(http://en.wikipedia.org/wiki/Long-Term_Capital_Management를 보세요).
"월가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누가 뭐래도 워렌 버핏이죠. 그는 수치를 보고 투자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죠. 기거랜저의 책에서 버핏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경제 민주화" "과학 민주화" 같은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인 수사, 그 자체로 매력적인 수사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 같아서다. "모든 것은 정치적"으로 볼 수 있다. 어떤측면에서 보면 경제도 정치고 과학도 정치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과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 않고 정치라는 거대 담론의 틀로 포함시켜 버릴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민' '시민권' 같은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애초에 보편성, 확장가능성이 큰 개념도 있다. '인권' '생명' '개인' '개인주의' '자유' '자유주의' '자율' '공공성' '정의' 같은...
ps) "민주화" "민주주의" 개념이 유난히 사랑받는 이유를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의 권위주의와 독재권력에 대한 부정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로 내면화되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민주주의야말로 한국의 정치 전통에서 가장 확실한 집합적 경험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95쪽)
예컨대 프랑스 등 서양의 경우 천분인권으로서의 개인의 권리와 자유 등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혹은 귀족제와 신분제와 비교되는 공화주의 전통이 집합적 경험으로 자리잡은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전통, 정치문화, 정치레짐이 자리잡으면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애초에 보편성, 확장가능성이 큰 개념도 있다. '인권' '생명' '개인' '개인주의' '자유' '자유주의' '자율' '공공성' '정의' 같은...
ps) "민주화" "민주주의" 개념이 유난히 사랑받는 이유를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의 권위주의와 독재권력에 대한 부정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과 가치로 내면화되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민주주의야말로 한국의 정치 전통에서 가장 확실한 집합적 경험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95쪽)
예컨대 프랑스 등 서양의 경우 천분인권으로서의 개인의 권리와 자유 등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혹은 귀족제와 신분제와 비교되는 공화주의 전통이 집합적 경험으로 자리잡은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전통, 정치문화, 정치레짐이 자리잡으면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2014년 6월 11일 수요일
결국 "인간" "생명" 중심주의로 가야 할 것이다 (이게 곧 인권인데,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많다. 이유가 뭘까... 곽노현이 주도한 '학생 인권 조례'에 대해선 무슨 반공주의자가 빨갱이 욕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세월호 참사도 그러지 못해서 생긴 것 아닌가? 복지도 그래서 필요한 것 아닌가? 무슨 대단한 사회주의를 하자는게 아니잖는가? "장애인 고용"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동할 수 있고, 또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만 공유되면 되는 것 아닌가? 성수자 문제 역시 인권으로 보면 된다. 생명과학 규제 논의의 중심에도 인간, 생명이 있으면 된다. 물론 그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발전을 중심에 놓고 생명윤리, 윤리적 규제를 도입하려니 모순이 생길 수밖에...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인간의 존엄성은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무시되고 있다.
(1)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하는 이들을 2천여명이 몰려가서 국가의 힘으로 몰아냈다.
(2) 문창극인지 문참극인지 총리 후보라는 이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생각을 얘기한다. 독실한 기독교인, 그것도 온누리교회 교인이라는데 이해가 된다. 한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발전주의, 경제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동안에 생명,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는데, 여전히 그러하다.
--------
(출처: 경향신문)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가 11일 서울대 초빙교수로서 마지막강연을 가졌다. 이 강연에서 문 지명자는 복지 정책, 성소수자 등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하는 등 극우 논객으로서의 ‘소신’을 다시 내비쳤다.
이날 문 지명자는 서울대 IBK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언론정보학과 전공선택과목 ‘저널리즘의 이해’ 종강연을 가졌다. 그는 “남한테 의지할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가 독립적으로 살아야 할 생각을 해야한다”며 “그런데 서로 기대서만 살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복지를 더해달라, 버스를 공짜로 태워달라’고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보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를 ‘남에게 의지할 생각’으로 평가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바른 생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면서 최근 신촌에서 있었던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내비쳤다. 그는 “‘게이퍼레이드’를 한다고 신촌 도로를 왔다갔다하는데, 이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 거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으면 집에서 혼자 하면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보수논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정관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여론에 의해 휘둘린다. 편견과 착각을 가지고 매일 고정관념이 쌓인다”며 “고정관념에 벌떼처럼 달려들지만 그런데 (보수논객이) 아니란 말이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인간의 존엄성은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무시되고 있다.
(1)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하는 이들을 2천여명이 몰려가서 국가의 힘으로 몰아냈다.
(2) 문창극인지 문참극인지 총리 후보라는 이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생각을 얘기한다. 독실한 기독교인, 그것도 온누리교회 교인이라는데 이해가 된다. 한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발전주의, 경제성장지상주의를 추구하는 동안에 생명,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는데, 여전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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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가 11일 서울대 초빙교수로서 마지막강연을 가졌다. 이 강연에서 문 지명자는 복지 정책, 성소수자 등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하는 등 극우 논객으로서의 ‘소신’을 다시 내비쳤다.
이날 문 지명자는 서울대 IBK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언론정보학과 전공선택과목 ‘저널리즘의 이해’ 종강연을 가졌다. 그는 “남한테 의지할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가 독립적으로 살아야 할 생각을 해야한다”며 “그런데 서로 기대서만 살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복지를 더해달라, 버스를 공짜로 태워달라’고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보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를 ‘남에게 의지할 생각’으로 평가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바른 생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면서 최근 신촌에서 있었던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내비쳤다. 그는 “‘게이퍼레이드’를 한다고 신촌 도로를 왔다갔다하는데, 이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 거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으면 집에서 혼자 하면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보수논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정관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여론에 의해 휘둘린다. 편견과 착각을 가지고 매일 고정관념이 쌓인다”며 “고정관념에 벌떼처럼 달려들지만 그런데 (보수논객이) 아니란 말이야”고 말했다.
발전국가 연구자들은 국가에 초점을 맞출 뿐 아니라 국가와 기업 간의 유계적 연계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연구는 배태된 자율성 embedded autonomy나 발전연합 developmental alliance같은 개념으로 드러났다. 지금은 덜 사용되지만 '정경유착'이라는 표현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이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가? 변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유지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했다.
(1) 변화라면... "정부-은행- 재벌-외국시장의 상호 우호적 관계에 입각한 박정희식 발전모델"은 얘기하기 힘들다. 정경유착도 예전만큼 강하지 않고... 오히려 정경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2) 옛 습성이 남아있는 경우는.... 소규모로... 인적 연결망아닌지... 최근에는 심지어 그네씨마저 문제삼고 있고, 세월호 사고에서도 드러난 각종 '피아': 관피아... 이는 경제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에 대한 설명을 위해 과학기술동맹 같은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이 경우는 ""황우석-관료-기업-언론"의 동맹. 이 개념이 황우석 아닌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지는 의문이지만...
"‘재벌(특히 삼성)-고급 관료(특히 재경부)-보수 언론(특히 조선·중앙·동아)’의 삼각동맹 체제"도 이야기한다. 정태인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동맹 체제는 노태우 정부 때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한국의 재벌이 공개적으로 재경부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조순 부총리 시절인 1988년의 금리 논쟁이었을 것이다. 권위주의 발전 국가 시절 관료의 일방적 우위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재벌 임원 월급과 관료 월급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경제 관료가 퇴임하거나 훗날을 기약하면서 중간에 그만둔 뒤 공기업이 아닌 금융권이나 기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조·중·동이 노골적으로 보수화한 것도 1987년 이후이니 이들은 적극적인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기관 시절에 미국에 유학을 가고 국장급이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 파견 나가는 것이 유능한 경제 관료의 출세 코스이니, 동맹 체제의 이념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면화된다. 구체적인 정책부터 철학, 출세를 위한 처세까지 삼각동맹은 대단히 유용했고 또 지금도 나날이 힘을 불려가고 있다."
발전국가, 혹은 발전(지배)연합의 구조적, 제도적, 네트워크적 형태는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그 문화나 지향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발전주의, 경제성장중심주의...
행위자와 이들 간의 네트워크를 개혁하는 것이 문제다. 무엇을 바꿔야 할까? 제도? 정책? 근본적으로는 문화를 바꿔야 할 것이다.
이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가? 변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유지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했다.
(1) 변화라면... "정부-은행- 재벌-외국시장의 상호 우호적 관계에 입각한 박정희식 발전모델"은 얘기하기 힘들다. 정경유착도 예전만큼 강하지 않고... 오히려 정경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2) 옛 습성이 남아있는 경우는.... 소규모로... 인적 연결망아닌지... 최근에는 심지어 그네씨마저 문제삼고 있고, 세월호 사고에서도 드러난 각종 '피아': 관피아... 이는 경제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에 대한 설명을 위해 과학기술동맹 같은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이 경우는 ""황우석-관료-기업-언론"의 동맹. 이 개념이 황우석 아닌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지는 의문이지만...
"‘재벌(특히 삼성)-고급 관료(특히 재경부)-보수 언론(특히 조선·중앙·동아)’의 삼각동맹 체제"도 이야기한다. 정태인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동맹 체제는 노태우 정부 때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한국의 재벌이 공개적으로 재경부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조순 부총리 시절인 1988년의 금리 논쟁이었을 것이다. 권위주의 발전 국가 시절 관료의 일방적 우위가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재벌 임원 월급과 관료 월급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경제 관료가 퇴임하거나 훗날을 기약하면서 중간에 그만둔 뒤 공기업이 아닌 금융권이나 기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조·중·동이 노골적으로 보수화한 것도 1987년 이후이니 이들은 적극적인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기관 시절에 미국에 유학을 가고 국장급이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 파견 나가는 것이 유능한 경제 관료의 출세 코스이니, 동맹 체제의 이념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면화된다. 구체적인 정책부터 철학, 출세를 위한 처세까지 삼각동맹은 대단히 유용했고 또 지금도 나날이 힘을 불려가고 있다."
발전국가, 혹은 발전(지배)연합의 구조적, 제도적, 네트워크적 형태는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그 문화나 지향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발전주의, 경제성장중심주의...
행위자와 이들 간의 네트워크를 개혁하는 것이 문제다. 무엇을 바꿔야 할까? 제도? 정책? 근본적으로는 문화를 바꿔야 할 것이다.
페친 김종희 님의 탄식:
"짐 월리스가 한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은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짐 월리스가 한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은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성경 구절을 칼로 도려내면 성경책 일부에 흠이 생길 것이다. 반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는 죄를 꾸짖는 성경 구절을 칼로 도려내면 성경책은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성경에 동성애가 죄라고 10번 쓰여 있으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는 죄를 꾸짖는 성경 구절은 1,000번 이상 쓰여 있을 것이다. 성경 구절 들이대서 동성애를 힐난하려면, 먼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부터 100배 이상 섬긴 다음에 씹든지 말든지 하란 말이다. 성경 구절 들이대는 니들이 더 역겹다"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프레시안에 연재되는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여기) 중에서...
발전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 등이 포괄적인 문화라면, 그 문화는 각 체계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부문화랄까, 그런 것을 나름대로 만들어냈다. 정치에 대해서는 '한국적 민주주의'! 서중석 교수 글을 보니 그게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네. '한국화된 복지 민주주의' 행정적 민주주의'. 이를 두고 '행정정치' '행정독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입국, 과학국가주의 등을 이야기했지. 아래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전혜 정부에서는 이런 기대마저도 없는 것 같지만...
발전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 등이 포괄적인 문화라면, 그 문화는 각 체계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부문화랄까, 그런 것을 나름대로 만들어냈다. 정치에 대해서는 '한국적 민주주의'! 서중석 교수 글을 보니 그게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네. '한국화된 복지 민주주의' 행정적 민주주의'. 이를 두고 '행정정치' '행정독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입국, 과학국가주의 등을 이야기했지. 아래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전혜 정부에서는 이런 기대마저도 없는 것 같지만...
"(...) '직수입된 민주주의가 한국 현실 속 깊이 뿌리박히지 못하고 실패한 해방 후의 역사가 교훈하듯이 한국화된 복지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복지 민주주의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는데, 앞에 있는 '한국화된'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복지'라는 말을 빼면 된다. '한국화된 민주주의',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유신 시대에 그렇게 많이 듣던 '한국적 민주주의'다. 이게 바로 그거다. 직수입된 민주주의, 서유럽 민주주의는 우리나라에 안 맞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분이 여기에서 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뒤에 여러 번 나오고,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또 여러 번 강조된다.
프레시안 :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울려 퍼진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시기였다.
서중석 : 그렇다. 가령 '혁명기에 있어서 민주주의' 같은 데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즉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알맞은 민주주의를 해나가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머리말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가 다름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다.' 이 양반이 다른 데서는 영어 안 쓰는데 여기서는 영어까지 써줬다. administrative democracy.
부제가 '혁명기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행정적 민주주의'다. 일부 정치학자가 이걸 주목해서 설명하고 그랬다. 뒤에 이걸 또 설명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뭐냐 하면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당장 달성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이 양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걸 하자고 하면서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걸 사실상 여기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양반의 기본 생각은, 유신 때도 그렇고, 민주주의가 우리한테 당장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하려는 건 민주주의인데 그 민주주의는 한국적 민주주의다, 이런 식으로 두 가지 논리를 항상 동시에 주장한다. 여기서도 그렇다.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당장 달성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어서는', 유신 시대에도 이런 말을 참 많이 썼다. 그 방법으로서 민주주의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할 것', 이런 주장을 편다. 초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1960년대에는 이걸 '행정 정치', '행정 독재'라고도 불렀다. 행정적인 처리라는 건 지시를 내려서 해나간다는 것이다. 주로 그걸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 중에는 '이 시기 인도네시아 지도자인 아흐메드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이런 식으로 바꿔 얘기한 게 아니냐',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페친 이승환 님 - 그렇다. ㅍㅍㅅㅅ의 그... - 이야기.
"페이스북이 개인의 편향성을 강화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구글이 더 심각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더 큰 문제는 마케팅적 측면에서 이를 버리기 힘들다는 것. 그래서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 그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감한다. 페이스북으로 보는 세상은 내가 보고싶은대로 내가 내 친구들과 더불어 만들어 낸 세상이다. 착시효과가 이만저만하지 않다. 달리 "친구들"이겠는가. 편향성이 강화될 수밖에... 애를 써서라도 다양한 견해를 접해야 한다. 교육도 중요하고, 오프라인 친구들, 동료들도 중요하다.
"페이스북이 개인의 편향성을 강화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구글이 더 심각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더 큰 문제는 마케팅적 측면에서 이를 버리기 힘들다는 것. 그래서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 그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감한다. 페이스북으로 보는 세상은 내가 보고싶은대로 내가 내 친구들과 더불어 만들어 낸 세상이다. 착시효과가 이만저만하지 않다. 달리 "친구들"이겠는가. 편향성이 강화될 수밖에... 애를 써서라도 다양한 견해를 접해야 한다. 교육도 중요하고, 오프라인 친구들, 동료들도 중요하다.
2014년 6월 9일 월요일
변화를 강조할 것인가,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할 것인가?
변화, 특히 긍정적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희망을 갖게 할 것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부정적 관성, 관행을 이야기하면서 채찍을 가할 것인가?
이 둘이 모두 필요하겠지? 이 둘이 모두 현실이겠지? 어디 변하기만 하던가? 어디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하던가?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해선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비로소 판단을 할 수 있다.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자신의 볼이 먹히는지 시험할 수 있다. 볼만 던지다간 승부도 못해보고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안타, 혹은 홈런을 맞더라도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할 때다. 그리고 안타나 홈런을 맞았다고 다시 볼을 남발해서는 안된다. 아직 경기를 내 준 것은 아니잖은가. 아니 한 경기를 내줬다고 시즌을 날린 것은 아니잖은가. 아니 설령 시즌을 날렸다고 다음 시즌이 없는 것은 아니잖은가?
물론 안타 홈런을 자주 맞는대도 고집스럽게 한 가운데로만 꽂아넣는 것 역시 미련한 짓이다. 그럴 땐 변화를 시도해야겠지.
쉽게 변하지 않는 문화를 강조하자. 변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고 조바심을 내지 말자.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 누가 변화가 불가능한다고 했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 아니던가. 변화가 그렇게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변화, 특히 긍정적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희망을 갖게 할 것인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부정적 관성, 관행을 이야기하면서 채찍을 가할 것인가?
이 둘이 모두 필요하겠지? 이 둘이 모두 현실이겠지? 어디 변하기만 하던가? 어디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하던가?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해선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비로소 판단을 할 수 있다.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자신의 볼이 먹히는지 시험할 수 있다. 볼만 던지다간 승부도 못해보고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안타, 혹은 홈런을 맞더라도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할 때다. 그리고 안타나 홈런을 맞았다고 다시 볼을 남발해서는 안된다. 아직 경기를 내 준 것은 아니잖은가. 아니 한 경기를 내줬다고 시즌을 날린 것은 아니잖은가. 아니 설령 시즌을 날렸다고 다음 시즌이 없는 것은 아니잖은가?
물론 안타 홈런을 자주 맞는대도 고집스럽게 한 가운데로만 꽂아넣는 것 역시 미련한 짓이다. 그럴 땐 변화를 시도해야겠지.
쉽게 변하지 않는 문화를 강조하자. 변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고 조바심을 내지 말자.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 누가 변화가 불가능한다고 했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 아니던가. 변화가 그렇게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변화의 기운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물뚝심송'의 블로그 글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의미를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판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역시 색깔론이 위력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지겹도록 행해진 종북몰이, 빨갱이 타령, 색깔 칠하기 등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략들은 거의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거 이제는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다.
지역구도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박정희 이래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지역구도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거판이 “현실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공허한 공약은 무시되기 시작했고, 비록 규모는 작아도 깨알 같은 공약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지킬 수 있는, 그러나 열심히 해야만 지킬 수 있으며 실제로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그런 공약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유권자들이 그런 공약을 찾기 시작했다.농약급식으로 대표되는 사실 무근의 네거티브 공세들은,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가며 잔잔히 퍼져나가는 박원순 캠프의 조용한 호소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박원순 후보의 재선은 당선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선거 문화를 바꾸고 캠프 전략의 트렌드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 우리 사회의 선거 문화는 그렇게 조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이번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를 여기에서 찾고 싶다."
이 글이 오늘 페북에서 자주 거론되는 걸로 봐서 이처럼 지방선거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당장 그렇지 않더라도 자꾸 그렇다고 이야기하면 현실이 되는게 인간사가 작동하는 원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발언만은 아니다. 그런가? 그럴까? 변화가 쉽지 않다고 볼 근거도 적지 않다. 여당과 청와대가 국정기조를 바꿀까? 정말 뭔가 느꼈을까? 노우. 네버. 그 무리들은 선거 결과에 매우 안도하고 있잖은가? 한겨레는 여권이 약속한 쇄신의 가늠자을 세 가지를 제시했다. (1) 세월호 국정조사 (2) 김기춘 등 인적쇄신 (3) KBS 길사장 후임. 청와대는 오늘 홍보수석에 YTN 출신 꼬붕을 앉혔다고 한다. 변화? 쇄신? 이미 물건너 갔다. 야당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교육에 대한 인식에 획기적 변화가 있었나? 그것이 교육감 선거에 반영되었나? 진보교육감 덕에 앞으로 바뀔까? 글쎄... 김대중, 노무현 당선, 촛불시위, 나꼼수, 안철수... 등등 등등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이러저러한 현상으로 예단하는 경우들을 워낙 많이 봐와서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한다. 물론 이러저러한 소동에도 제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랑비에 젖는다고 조금씩 변해왔는지도 모른다. 인간사는 모순되는 경향이 공존하는게 자연스러우니까 변하려는 욕망, 변화를 거보하는 관성이 함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속성, 어떤 경향을 강조하느냐의 문제일 것. 물뚝심송님의 해석대로 지역감정, 색깔론의 약발이 덜 먹히는 건 분명한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정치 세력들의 인적 구성이나 문화, 주장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인적쇄신? 청와대? 정당? 변화는 그렇게도 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판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역시 색깔론이 위력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지겹도록 행해진 종북몰이, 빨갱이 타령, 색깔 칠하기 등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략들은 거의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거 이제는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다.
지역구도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박정희 이래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지역구도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거판이 “현실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공허한 공약은 무시되기 시작했고, 비록 규모는 작아도 깨알 같은 공약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지킬 수 있는, 그러나 열심히 해야만 지킬 수 있으며 실제로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그런 공약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유권자들이 그런 공약을 찾기 시작했다.농약급식으로 대표되는 사실 무근의 네거티브 공세들은,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가며 잔잔히 퍼져나가는 박원순 캠프의 조용한 호소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박원순 후보의 재선은 당선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선거 문화를 바꾸고 캠프 전략의 트렌드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 우리 사회의 선거 문화는 그렇게 조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이번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를 여기에서 찾고 싶다."
이 글이 오늘 페북에서 자주 거론되는 걸로 봐서 이처럼 지방선거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당장 그렇지 않더라도 자꾸 그렇다고 이야기하면 현실이 되는게 인간사가 작동하는 원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발언만은 아니다. 그런가? 그럴까? 변화가 쉽지 않다고 볼 근거도 적지 않다. 여당과 청와대가 국정기조를 바꿀까? 정말 뭔가 느꼈을까? 노우. 네버. 그 무리들은 선거 결과에 매우 안도하고 있잖은가? 한겨레는 여권이 약속한 쇄신의 가늠자을 세 가지를 제시했다. (1) 세월호 국정조사 (2) 김기춘 등 인적쇄신 (3) KBS 길사장 후임. 청와대는 오늘 홍보수석에 YTN 출신 꼬붕을 앉혔다고 한다. 변화? 쇄신? 이미 물건너 갔다. 야당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교육에 대한 인식에 획기적 변화가 있었나? 그것이 교육감 선거에 반영되었나? 진보교육감 덕에 앞으로 바뀔까? 글쎄... 김대중, 노무현 당선, 촛불시위, 나꼼수, 안철수... 등등 등등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이러저러한 현상으로 예단하는 경우들을 워낙 많이 봐와서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한다. 물론 이러저러한 소동에도 제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랑비에 젖는다고 조금씩 변해왔는지도 모른다. 인간사는 모순되는 경향이 공존하는게 자연스러우니까 변하려는 욕망, 변화를 거보하는 관성이 함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속성, 어떤 경향을 강조하느냐의 문제일 것. 물뚝심송님의 해석대로 지역감정, 색깔론의 약발이 덜 먹히는 건 분명한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정치 세력들의 인적 구성이나 문화, 주장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인적쇄신? 청와대? 정당? 변화는 그렇게도 느리다.
2014년 6월 8일 일요일
사실 facts은 무엇인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저 전제아닐까? 실제적 구속적이 있다는 점에서 "Anything goes"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은 아니지만... 모든 사실은 관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관찰은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불변의 사실'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모든 관찰은 임시적이다. 임시적이라고 관찰 사이에 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그럴듯하게 관찰을 묘사해야 한다. 더 그럴듯하게...
진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리가 가능한가? 그저 잠정적인 진리만 있을 뿐인가? 절대적 진리라는 표현은 근대 이후로는 우습게 되어 버렸다. 진리가 절대적이라면 그것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인, 특정 집단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그런 진리는 없다. 불가능하다. 물론 근대 이전의 절대적 진리 역시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인정되었겠지만...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유럽의 중세... 정말 우리가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단일한 세계관이 철두철미하게 세상을 지배했을까?
성경은 과연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의 진술은 현대인들이 얘기하는 그런 '진리'와 관련이 있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그런 객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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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과연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의 진술은 현대인들이 얘기하는 그런 '진리'와 관련이 있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그런 객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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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진리’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엡 4:21)는 사도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된 것을 전제한 것으로,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보다는 복음을 가리킵니다(갈 2:5, 14; 골 1: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2014년 6월 6일 금요일
자기 교정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시끄럽고 또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시끄럽지 않고 일사분란하면, 그네씨가 얘기하는대로 국론이 분열되지 않는다면? 국모 혹은 공주님이 하라는대로 일사분란하게 국민이 움직이면? 국가개조가 그녀가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굴러가는 사회의 대표주자가 북한아닌가? 싸우면서 닮은 것인지... 그렇게 종북 딱지를 붙여대더니 이제 스스로 그 무리에 포함시키려나 보다.
아직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희미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달을 향해(?) 탐사용 로켓(?)을 쏠 때 경로를 계속해서 교정해야 한다는... 오차들이 있으니까... 목적지가 분명한 경우에 그러한대.... 심지어 예측불가능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오죽할까. 큰 목표를 향해 가더라도 경로를 계속해서 고쳐야 한다. 비판이 없으면 관성대로 가기 십상이다. 그러다 목표를 놓치겠지. 비판과 의견 충돌, 그리고 타협점을 찾는 것. 모든 게 필요하다.
시끄럽지 않고 일사분란하면, 그네씨가 얘기하는대로 국론이 분열되지 않는다면? 국모 혹은 공주님이 하라는대로 일사분란하게 국민이 움직이면? 국가개조가 그녀가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굴러가는 사회의 대표주자가 북한아닌가? 싸우면서 닮은 것인지... 그렇게 종북 딱지를 붙여대더니 이제 스스로 그 무리에 포함시키려나 보다.
아직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희미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달을 향해(?) 탐사용 로켓(?)을 쏠 때 경로를 계속해서 교정해야 한다는... 오차들이 있으니까... 목적지가 분명한 경우에 그러한대.... 심지어 예측불가능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오죽할까. 큰 목표를 향해 가더라도 경로를 계속해서 고쳐야 한다. 비판이 없으면 관성대로 가기 십상이다. 그러다 목표를 놓치겠지. 비판과 의견 충돌, 그리고 타협점을 찾는 것. 모든 게 필요하다.
"세계 최고 작가 17명의 글 잘 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야기들이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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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문서의 초안은 끔찍하다. 글쓰는 데에는 죽치고 앉아서 쓰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총 39번 새로썼다.
3.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반짝이는 한줄기 빛을 보여줘라.
- 현대문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소설가, 극작가 안톤 체코브(Anton Chekhov)
- 현대문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소설가, 극작가 안톤 체코브(Anton Chekhov)
5. 짧은 글은 한가지의 테마로 작성되어야 하며, 그 안에 모든 문장들이 그 테마와 일맥상통 해야한다.
- 미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 소설가, 편집자이자 비평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en Poe)
- 미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 소설가, 편집자이자 비평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en Poe)
6. 작가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이 있다면 반드시 ‘영어 글쓰기의 기본’ 부터 읽게하라.
- 위트에 가득 찬 시와 소설로 이름을 떨친 미국의 단편소설가이자 시인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 위트에 가득 찬 시와 소설로 이름을 떨친 미국의 단편소설가이자 시인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7.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메달 수상소감에서‘부모님께 감사 드린다. 매일 새벽 연습장으로 데려다 주셨다’등의 말을 한다. 글쓰기는 피겨 스케이팅이나 스키가 아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는 절대 늘 수 없다. 만약 글을 쓰고 싶다면 집을 나서라.
- 여행기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찬사를 받은 미국 소설가 폴 서루(Paul Theroux)
- 여행기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찬사를 받은 미국 소설가 폴 서루(Paul Theroux)
8. 재개념화, 탈대중화, 개인적으로, 결정적으로 등의 용어를 쓰지 말아라. 이런 전문 용어는 허세의 증거일 뿐이다.
- 거대 광고회사로 성장한 오길비앤매더 광고대행사를 창립한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빗 오길비(David Ogilvy)
- 거대 광고회사로 성장한 오길비앤매더 광고대행사를 창립한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빗 오길비(David Ogilvy)
9. 당신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라. 너보다 더 똑똑하고 우수한 작가들은 많다.
- 잉글랜드의 소설가, 만화책, 그래픽 노벨 작가, 오디오 극장 및 영화 각본가 닐 게이먼(Neil Gaiman)
- 잉글랜드의 소설가, 만화책, 그래픽 노벨 작가, 오디오 극장 및 영화 각본가 닐 게이먼(Neil Gaiman)
10.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글쓰기 재능을 연마하기 전에 뻔뻔함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앵무새죽이기’로 이름을 널리 알린 미국작가 하퍼 리(Harper Lee)
-’앵무새죽이기’로 이름을 널리 알린 미국작가 하퍼 리(Harper Lee)
12.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 ‘동물농장’과 ’1984′ 저자로 참여적인 언론인이자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를 구사한 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 ‘동물농장’과 ’1984′ 저자로 참여적인 언론인이자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를 구사한 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3. 글을 쓰기 전에는 항상 내 앞에 마주앉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라고 상상해라. 그리고 그 사람이 지루해 자리를 뜨지 않도록 설명해라.
- 미국에서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인기 작가 제임스 패터슨(James Patterson)
- 미국에서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인기 작가 제임스 패터슨(James Patterson)
"요컨대 국가보안법의 정신은 주민들에게 인접해 있는 '최악의 상황'(지옥과 같은 사회주의)를 들이대면서 "'차악(次惡)의 현실'(사상, 표현의 자유의 통제)을 감내하라" 혹은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차악의 현실'이 소수의 저항자들에게는 '최악'보다 더욱 심한 상황(테러와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김동춘, 200, 근대의 그늘. 30쪽)
차악을 용인하라는 윽박지름은 물론 소수의 실제적 '저항자들'에게만 위협이 아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정당화되고, 암묵적으로 그런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는 그 소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악을 용인하라는 윽박지름은 물론 소수의 실제적 '저항자들'에게만 위협이 아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정당화되고, 암묵적으로 그런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는 그 소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정에서 사라져보린 과학기술" (이덕환) (디지털타임스 2014.06.03)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기대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부침을 겪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정점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GNP 대비 과학기술투자비 같은 지표상으로는 2mb 정부나 심지어 그네 정부에서도 늘었을 법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같은 거대 담론이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조치(2004년)는 그 이후론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멩박씨는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쳐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 만들지 않았던가 (2008년). 아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그네씨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이 아닌 ICT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과학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무현 이후로 급 줄었음을 보여주는 현상 아닐런지. 과학과 기술을 선진국에서 수입하거나 좇아가던 시기가 지났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탈추격시대가 도래하면서, 특정 첨단 분야에서는 - 대표적으로 줄기세포연구 - 한국도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첨단과학에 기초한 기술개발, 경제화의 가능성을 보면서 지원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자 이제 그런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것 아닌지... 물론 기초과학연구소(IBS) 설립 자체는 "과학지원을 통한 경제성장에 기여"를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담론이 먹힌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앞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기대는 크게 높아질 것 같지 않다. 또 이러다가 특정 과학 분야가 급부상하면 그 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 이후로 분위기가 다름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모두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경제성장의 수단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 하강에 조응하는 정책기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우선주의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으로서 갖는 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수단을 선호하는 것 같다. 4대강이나 CIT. 어쩌면 "줄기세포연구"처럼 효과를 빨리 얻길 기대할 수 있었던 분야마저 실망감을 갖게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절대지원금액이 줄지는 않을지라도... 뭐든지 과도하게 부풀리면 곧 실망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이덕환 교수는 정부만을 탓하지만 과학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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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ICT(정보방송통신)와 함께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는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잊혀졌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진 창조형으로 도약시키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겠다는 목소리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 정책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고, ICT 정책은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동통신사에 끌려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미래부, 산업부, 교육부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출연연의 현실이 그렇다. 공기업과 함께 비정상적인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출연연은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출범 이후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미래부가 갑자기 물을 만난 듯 힘을 내고 있다. IMF 이후 어렵게 회복되고 있던 복리후생 혜택의 일방적인 축소를 강요하는 미래부의 정상화 요구는 그나마 남아있던 출연연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이다.
좀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는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기대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부침을 겪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정점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GNP 대비 과학기술투자비 같은 지표상으로는 2mb 정부나 심지어 그네 정부에서도 늘었을 법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중심사회'같은 거대 담론이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는 조치(2004년)는 그 이후론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멩박씨는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쳐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 만들지 않았던가 (2008년). 아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그네씨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기술이 아닌 ICT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과학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무현 이후로 급 줄었음을 보여주는 현상 아닐런지. 과학과 기술을 선진국에서 수입하거나 좇아가던 시기가 지났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면서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탈추격시대가 도래하면서, 특정 첨단 분야에서는 - 대표적으로 줄기세포연구 - 한국도 경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첨단과학에 기초한 기술개발, 경제화의 가능성을 보면서 지원했지만 그 성과가 그리 크지 않자 이제 그런 접근 자체를 포기하는 것 아닌지... 물론 기초과학연구소(IBS) 설립 자체는 "과학지원을 통한 경제성장에 기여"를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담론이 먹힌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앞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기대는 크게 높아질 것 같지 않다. 또 이러다가 특정 과학 분야가 급부상하면 그 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 이후로 분위기가 다름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 모두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문화의 산물이다. 경제성장의 수단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 하강에 조응하는 정책기조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우선주의 자체는 바뀌지 않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으로서 갖는 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인 효과를 갖는 수단을 선호하는 것 같다. 4대강이나 CIT. 어쩌면 "줄기세포연구"처럼 효과를 빨리 얻길 기대할 수 있었던 분야마저 실망감을 갖게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절대지원금액이 줄지는 않을지라도... 뭐든지 과도하게 부풀리면 곧 실망하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들통나기 마련이다. 이덕환 교수는 정부만을 탓하지만 과학계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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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ICT(정보방송통신)와 함께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는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잊혀졌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진 창조형으로 도약시키고,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겠다는 목소리도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 정책은 중소기업과 창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고, ICT 정책은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동통신사에 끌려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미래부, 산업부, 교육부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인 출연연의 현실이 그렇다. 공기업과 함께 비정상적인 공공기관으로 분류된 출연연은 강도 높은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해버렸다. 출범 이후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미래부가 갑자기 물을 만난 듯 힘을 내고 있다. IMF 이후 어렵게 회복되고 있던 복리후생 혜택의 일방적인 축소를 강요하는 미래부의 정상화 요구는 그나마 남아있던 출연연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출범도 출연연의 진정한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해서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 전략 수립, 융합 연구 기획, 중소기업 지원, 인력 개발 등을 총괄하는 지원형 연구회로 강화한다는 주장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전형적인 관료적 발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연구회를 통합한다고 미래 전략 수립과 융합 연구 기획 기능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것이다. 통합 연구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원장 선임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매년 평균 8명의 원장을 선임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출연연의 원장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독선과 무능은 도가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박 겉핥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출연연의 예산과 결산 심의는 더욱 부실해질 것이다. 출연연의 예산이 각 부처에 묶여있는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 통합 연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어렵게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초대 원장은 임기도 채우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 문제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형편을 고려하면 후임 원장의 선임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IBS가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의 건설도 우선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설픈 정치 참여의 후폭풍을 수습할 준비가 시급하다.
이공계 대학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가 공허한 특성화와 산학협력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위기 상황이다. 공학 교육을 산업 현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대학의 교육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도 위기에 빠져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최소한의 과학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ㆍ이과 구분 폐지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는 이공계 진학자의 과학 교육 약화를 걱정하고 있고, 과학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교육학자들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구걸해야 하는 과학기술계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고작 중소기업과 창원 지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연연과 대학의 획일적인 관리보다 자율성과 다원성을 보장해주는 노력이 훨씬 더 시급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문과 출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ICT 전문가를 과학자로 분류해서 중용하는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미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ICT가 분명하게 과학기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다."
어렵게 만들어놓은 기초과학연구소(IBS)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초대 원장은 임기도 채우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사 문제에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형편을 고려하면 후임 원장의 선임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IBS가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를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고,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의 건설도 우선순위에 밀려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어설픈 정치 참여의 후폭풍을 수습할 준비가 시급하다.
이공계 대학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가 공허한 특성화와 산학협력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이 줄줄이 문을 닫게 될 위기 상황이다. 공학 교육을 산업 현장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대학의 교육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도 위기에 빠져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최소한의 과학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문ㆍ이과 구분 폐지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과학기술계는 이공계 진학자의 과학 교육 약화를 걱정하고 있고, 과학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갖추지 못한 교육학자들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구걸해야 하는 과학기술계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다.
과학기술의 역할이 고작 중소기업과 창원 지원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출연연과 대학의 획일적인 관리보다 자율성과 다원성을 보장해주는 노력이 훨씬 더 시급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문과 출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ICT 전문가를 과학자로 분류해서 중용하는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을 흉내 내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미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ICT가 분명하게 과학기술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을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페친 이민규 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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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중요성에 새로운 흐름인 톰 라이트나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까지 결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글은 그런 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한 제자도는 초대교회부터 개혁주의자, 청교도 모두 언제나 강조한 내용입니다. 비록 실현은 더딥니다만 성장과 성과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가장 흉악한 원흉입니다. 제자도 없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고 강한 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없었습니다. 다 양적성장을 위해 필요한 돈, 성장, 성과 중심이여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물론 돈은 언제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가치에서 돈이 전부입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람의 명예나 인간미가 돈 못지 않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전부지요. 맘몬이 우상인 천민자본주의와 하나님 나라는 상극입니다. 이런 대립은 역사 속에 찾기 힘듭니다. 제가 굳이 ":따듯한 자본주의"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음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합니다."
"안일한 믿음주의는 미국의 경제성장주의와 함께 지난 수십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 신앙이 한국에 수입된 것도 대략 빌리그래험 시절인 70년대 이후입니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믿던 신앙아 이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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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중요성에 새로운 흐름인 톰 라이트나 독일 신학자들의 신학까지 결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글은 그런 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관련한 제자도는 초대교회부터 개혁주의자, 청교도 모두 언제나 강조한 내용입니다. 비록 실현은 더딥니다만 성장과 성과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복음을 왜곡시키는 가장 흉악한 원흉입니다. 제자도 없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고 강한 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없었습니다. 다 양적성장을 위해 필요한 돈, 성장, 성과 중심이여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상입니다. 물론 돈은 언제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가치에서 돈이 전부입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사람의 명예나 인간미가 돈 못지 않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전부지요. 맘몬이 우상인 천민자본주의와 하나님 나라는 상극입니다. 이런 대립은 역사 속에 찾기 힘듭니다. 제가 굳이 ":따듯한 자본주의"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음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합니다."
"안일한 믿음주의는 미국의 경제성장주의와 함께 지난 수십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 신앙이 한국에 수입된 것도 대략 빌리그래험 시절인 70년대 이후입니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믿던 신앙아 이니고요."
페친 홍익희 님의 제언 (단, 전기세 --> 전기요금)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바꾸어야 한다.(제언 1)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지상주의를 위해 그간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그 중에서도 원화의 저평가 정책은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희생시켜 왔다. 또 대기업의 전기료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들이 비싼 전기세를 물고 있다.
이제는 시정해야 한다.
1. 삼성그룹 등 대기업(중소기업 제외)의 전기세는 올리고 가정용 전기세는 낮추어 형평성을 맞추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대기업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2.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외평채 발행을 즉각 중지하라. 원화의 저평가는 수출기업에게는 유리하나 원유 등 수입가격을 올려 물가는 비싸진다. 그나마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채권을 발행해 외환을 보유해야 한다. 그 이자가 모두 국민의 혈세로 지불되는 것이다.
----------------------------------------------
외평채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약칭이다. 환율 안정(?)을 목적으로 ‘외국환 평형기금’ 조달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만기가 도래하는 외평채는 이제 외환보유고로 갚아라. 기준금리가 0% 수준인 미국에서 4%가 넘는 외평채 발행이 어떻게 자랑거리냐? 이 바보 같은 눔들아!!"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바꾸어야 한다.(제언 1)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지상주의를 위해 그간 많은 것을 희생해 왔다. 그 중에서도 원화의 저평가 정책은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희생시켜 왔다. 또 대기업의 전기료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들이 비싼 전기세를 물고 있다.
이제는 시정해야 한다.
1. 삼성그룹 등 대기업(중소기업 제외)의 전기세는 올리고 가정용 전기세는 낮추어 형평성을 맞추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대기업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2. 외환시장 개입을 위한 외평채 발행을 즉각 중지하라. 원화의 저평가는 수출기업에게는 유리하나 원유 등 수입가격을 올려 물가는 비싸진다. 그나마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채권을 발행해 외환을 보유해야 한다. 그 이자가 모두 국민의 혈세로 지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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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평채란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약칭이다. 환율 안정(?)을 목적으로 ‘외국환 평형기금’ 조달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만기가 도래하는 외평채는 이제 외환보유고로 갚아라. 기준금리가 0% 수준인 미국에서 4%가 넘는 외평채 발행이 어떻게 자랑거리냐? 이 바보 같은 눔들아!!"
2014년 6월 3일 화요일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 비중이 크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개신교 신자는 약 1억 7천만 명으로 인구의 55%. 성인교인 2천 명 이상을 가리키는 대형교회(mega-church)의 수는 1200-1500개로 추산됨.. 한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인구대비 18.3%로 약 8백 6십만명. 대형교회의 수는 거의 1천 개에 육박. 성인 출석교인 1만명 이상 되는 교회는 미국 70개, 한국은 13 - 14개. 2만명 이상되는 교회는 미국에선 7개 한국은 7-8개 (김진호, 탈성장주의 시대 '작은교회'에 대해 말하다).
이처럼 "대형으로 쏠리는 구도는 사회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대기업, 재벌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랄지, 서울집중현상이랄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 경제에 있어서는 대기업이...
대기업, 대형교회, 서울과 수도권 중심은... 초기 발전 단계에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누구나 그 혜택을 얻을 수 있어서 양극화가 감춰지는 착시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오히려 발전, 성장을 방해한다. 이런 논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분권화를 이야기하면서... 반면에 양극화 현상은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서양에서 "성장주의""발전/개발주의"가 시들한 것은 실제로 경제 성장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률을 줄이겠다"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인 것. 자연스럽게 사회통합을 성장이 아닌 다른 쪽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실제로 탈성장,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성장 신화" "성공 신화"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고. 물론 예전같지 않다는 점,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다는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럼에도 그 좁은 문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을 뚫을 수 있을거라, 적어도 그 대열에서 애초에 낙오되지는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한 때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생명윤리에 기초한 규제는 어렵지 않게 도입될 수 있었다. 왜? 그것이 생명과학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발전주의와 생명윤리의 어색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다. 생명윤리가 문화를 바꿀 것인가? 글쎄... 특별히 그럴것 같진 않다.
교회의 현상과 한국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상과의 유사성, 친화성을 김진호 목사가 매우 잘 지적하고 있다.
"대성장 시대에 한국사회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성장의 주된 양식 또한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권력 자원을 독점한 상황에서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성장주의적 총동원체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것이다.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들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한데 이 시기에 정착한 기득권 체제는 이후 대성장 시대가 지나고 저성장, 아니 탈성장 시대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지닌다.
이처럼 "대형으로 쏠리는 구도는 사회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대기업, 재벌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랄지, 서울집중현상이랄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 경제에 있어서는 대기업이...
대기업, 대형교회, 서울과 수도권 중심은... 초기 발전 단계에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전체 파이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누구나 그 혜택을 얻을 수 있어서 양극화가 감춰지는 착시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오히려 발전, 성장을 방해한다. 이런 논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분권화를 이야기하면서... 반면에 양극화 현상은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서양에서 "성장주의""발전/개발주의"가 시들한 것은 실제로 경제 성장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률을 줄이겠다"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인 것. 자연스럽게 사회통합을 성장이 아닌 다른 쪽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실제로 탈성장,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성장 신화" "성공 신화"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고. 물론 예전같지 않다는 점,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다는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럼에도 그 좁은 문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을 뚫을 수 있을거라, 적어도 그 대열에서 애초에 낙오되지는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한 때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생명윤리에 기초한 규제는 어렵지 않게 도입될 수 있었다. 왜? 그것이 생명과학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발전주의와 생명윤리의 어색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다. 생명윤리가 문화를 바꿀 것인가? 글쎄... 특별히 그럴것 같진 않다.
교회의 현상과 한국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현상과의 유사성, 친화성을 김진호 목사가 매우 잘 지적하고 있다.
"대성장 시대에 한국사회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성장의 주된 양식 또한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권력 자원을 독점한 상황에서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성장주의적 총동원체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것이다.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들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한데 이 시기에 정착한 기득권 체제는 이후 대성장 시대가 지나고 저성장, 아니 탈성장 시대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지닌다.
이와 같이 대성장 시대 교회와 사회는 ‘성공지상주의적 총동원 체계’라는 유사성을 지니며, 이 유사성이 그 시대를 운용하는 주된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그 시대 사회와 서로 연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빠른 변모는, 그 시대의 지배체제가 갖는 문제점 못지않게 심각한 많은 문제점들을 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사회와 불화하기보다는 잘 통합되어 있었고, 또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령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절에 아무런 보호망 없이 극한적 야만성의 도시공간으로 내던져진 이농자들의 대대적인 신자화는 그들이 사회적 불만세력 내지 전복세력이 되지 않고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 잘 흡수되는 과정과 병행했다. 또한 이 과정은 그이들 개개인이 성공한 이들에 대한 일탈자가 되기보다는 그들을 선망하며 열렬히 성공을 위해 매진하게 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이 시기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하는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풍요, 건강, 신앙의 동시적 실현으로서의 구원 담론)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통합요소로서의 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부유함은 증오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도달하려는 목표다. 3박자 구원론은 그 목표를 신앙의 목표와 동심원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사회통합적 담론의 특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교회가 보여준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망 없이 진행된 산업화로의 맹렬한 질주 속에 내던져진 도시 주변계층이 절망에 삐지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는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기독교 편에서 그런 흐름을 주도한 것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선망한 대다수 ‘짝퉁 대형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동성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그러한 교회들은 그 통합이 내포한 무수한 야만성과 폭력성을 방조했다."
문화...
'문화'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인터뷰. 구글의 첫 한국인 엔지니어로 최근에 ‘구글은 SKY를 모른다’(알투스)라는 책을 낸 이준영(43)씨의 조선일보 인터뷰 중에서.
-회사 관련 내용에 대한 제약은 없나. 애플이나 아마존 경우 보안이 철저한데.
“내부 지침도 있고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구글은 모든 것이 ‘상식’ 선에서 진행된다. 구체적 상황에서 판단은 직원이 자율적으로 내린다. 회사 기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히 얘기 안 한다.”
-회사 관련 내용에 대한 제약은 없나. 애플이나 아마존 경우 보안이 철저한데.
“내부 지침도 있고 교육도 받는다. 하지만 구글은 모든 것이 ‘상식’ 선에서 진행된다. 구체적 상황에서 판단은 직원이 자율적으로 내린다. 회사 기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히 얘기 안 한다.”
◆‘상식’에 의해 움직이는 구글 문화
-많은 것이 회사 내 ‘상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구글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규정으로 만들 경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큰 차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글 컬쳐’라 부르고 그것이 체화한 사람을 구글러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06년 내가 입사 3년차였을 때 한국엔지니어링팀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 온 적이 있다. 사람을 뽑고 난 다음에 곧바로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로 보냈다. 업무보다 구글 문화 체득이 우선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구글러’가 되지 않는다. ‘가서 구글 문화를 겪고 오라’고 했다. 거기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고 느끼라고 했다. 석 달 사이에 많은 게 바뀌어 왔다. 그 과정을 서울 지사 입사자 10명 때까지 반복했다. 자생적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지금은 2주 정도 본사 교육을 거친다. 본사 구글러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한국 오피스로 전락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뽑는 것도 굉장히 힘을 들인다. 아무리 똑똑해도 팀웍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안 뽑는다. 연못에 작은 돌만 던져도 전체에 파문이 일듯이 조직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팀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많은 것이 회사 내 ‘상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 구글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규정으로 만들 경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큰 차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글 컬쳐’라 부르고 그것이 체화한 사람을 구글러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 문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2006년 내가 입사 3년차였을 때 한국엔지니어링팀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 온 적이 있다. 사람을 뽑고 난 다음에 곧바로 마운틴뷰의 구글 본사로 보냈다. 업무보다 구글 문화 체득이 우선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구글러’가 되지 않는다. ‘가서 구글 문화를 겪고 오라’고 했다. 거기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고 느끼라고 했다. 석 달 사이에 많은 게 바뀌어 왔다. 그 과정을 서울 지사 입사자 10명 때까지 반복했다. 자생적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지금은 2주 정도 본사 교육을 거친다. 본사 구글러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한국 오피스로 전락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뽑는 것도 굉장히 힘을 들인다. 아무리 똑똑해도 팀웍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안 뽑는다. 연못에 작은 돌만 던져도 전체에 파문이 일듯이 조직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팀웍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잠언 1:7)
NRSV로는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영어로 읽으면서 'fear'라는 단어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경외'로는 잘 와 닿지 않던 의미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 무슨 뜻일까?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여호와를 두려워할 수 있을까? 불치의 병이나 재난 등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 신비를 체험하기 힘든 현대인들... 행인지 불행인지...
NRSV로는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영어로 읽으면서 'fear'라는 단어가 확 눈에 들어왔다. 한국어 '경외'로는 잘 와 닿지 않던 의미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 무슨 뜻일까?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여호와를 두려워할 수 있을까? 불치의 병이나 재난 등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 때? 신비를 체험하기 힘든 현대인들... 행인지 불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