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9일 월요일
일베의 전면적 등장을 환영하며...
한국에서 소위 좌파 혹은 진보는 "좌빨"로 흔히 비난받는다. 좌파 빨갱이라는 얘기다. 그게 억울하면 극우꼴통이라고 비난받는 일베 떨거지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의 존재는 역겹지만 필요하다. 일베, 그리고 2014년 서북청년단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
1. 요즘 작업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귀가하는 시간은 주로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가 된다. 그 시간에 종종 재활용쓰레기를 그 나름대로 "전문적으로" (동력장치를 단 손수레) 수거하는 분을 만날 때가 있는데 볼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절박함, 삶의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서. 분명히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있을 테고...
2. 아내가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걱정한다.
3. 지식인과 대중, 비전문가의 관계. 학문은... 학문일 따름이다. 그런 결론 때문에 내가 루만을 좋아한다. 지사적인 지식인상? 싫어하고 또 심지어 경멸한다. "발전된"사회에선 - 누구나 조금만 신경쓰면 엄청난 고급 지식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그런 사회 - 지식인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일반 대중이 아무리 애를 써서 접근하기 힘든 한계는 있지만.. 여하튼.. 너무 계몽적인 지식인을 나는 싫어한다. 아니. 경멸한다. 난 또 게으른 대중도 싫어... 아니 경멸한다.
2. 아내가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걱정한다.
3. 지식인과 대중, 비전문가의 관계. 학문은... 학문일 따름이다. 그런 결론 때문에 내가 루만을 좋아한다. 지사적인 지식인상? 싫어하고 또 심지어 경멸한다. "발전된"사회에선 - 누구나 조금만 신경쓰면 엄청난 고급 지식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그런 사회 - 지식인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일반 대중이 아무리 애를 써서 접근하기 힘든 한계는 있지만.. 여하튼.. 너무 계몽적인 지식인을 나는 싫어한다. 아니. 경멸한다. 난 또 게으른 대중도 싫어... 아니 경멸한다.
1. 내가 참여하고 있는 연구의 책임연구자가 호출했다. 한 시간 걸려서 가보니 결국은 저녁식사 파트너 노릇을 한 셈이 되었만... 예전에 머물던 곳을 다시 방문했다는 데서 의의를... 최근에 칼로이투입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그 탓인지 갸름했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옛 "동료들"로부터) 오늘 저녁엔 칼로리 폭탄을 맞았다. 잡탕밥, 오징어탕수육, 고량주... 곁들였던 알코올 기운을 연장하려 작업실로 돌아온 지금 "한국산 버드와이저"를 마시고 있기까지...
2. 원장님. 결국 1년 연장을 못하고 그만 두게 되었다고. 인간적인 애뜻함을 갖는 분이라... 안타깝다. 그 이전 원장님 = 멘토 1호. 오늘 내 논문 상황을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다. 나름 잘되고 있다나 좋아하신다.
3. 아이폰, 윈도우가 깔린 맥에어 11인치, 맥 ox가 깔린 13인치를 오가니 문자 입력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흠. 다양성 존중 차원에서 인내할 수밖에.
4. 후배가 모교 교수가 되었음을 며칠 전 확인하다. 기분이 묘함.
5. 오랜만에 분당선 탓 길에서 정태춘 노래를 듣다.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숱한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 정태춘 노래는 등장하지 않았다. 유투브 올라 와 있는 따라 부른 정태춘 노래는 대부분 '저렴하게' 들린다. 트로트적인 감성 그리고 전통적, 민중적 감성을 좀 더 고급스럽게, 그리고 깊이있게 표현하는게 정태춘의 매력이다.
2. 원장님. 결국 1년 연장을 못하고 그만 두게 되었다고. 인간적인 애뜻함을 갖는 분이라... 안타깝다. 그 이전 원장님 = 멘토 1호. 오늘 내 논문 상황을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다. 나름 잘되고 있다나 좋아하신다.
3. 아이폰, 윈도우가 깔린 맥에어 11인치, 맥 ox가 깔린 13인치를 오가니 문자 입력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흠. 다양성 존중 차원에서 인내할 수밖에.
4. 후배가 모교 교수가 되었음을 며칠 전 확인하다. 기분이 묘함.
5. 오랜만에 분당선 탓 길에서 정태춘 노래를 듣다.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숱한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 정태춘 노래는 등장하지 않았다. 유투브 올라 와 있는 따라 부른 정태춘 노래는 대부분 '저렴하게' 들린다. 트로트적인 감성 그리고 전통적, 민중적 감성을 좀 더 고급스럽게, 그리고 깊이있게 표현하는게 정태춘의 매력이다.
2014년 9월 28일 일요일
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의 행태를 잘 분석해서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악을 무너뜨리는 힘은 결국 선을 행함에서 나온다. 분석과 비판은 선을 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이해해야.
2. 주류에 진입하지 못한 재야 학자들과 그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전공 분야가 다르더라도 뭔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진입하지 못한 그 곳에 대한 시기, 질투가 과장된 언행을 만드는 것 같다. 어제 강연을 듣고, 또 출판사 관계자의 찬양글을 읽고서 든 생각.
3.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 다른 욕망으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려는 구도자들에게 구도는 그 자체가 욕망이다. 신기독(愼其獨)? 참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바보짓이다. 지금 나를 추동하는 욕망이 저급해서 피하고 싶다면 좀 더 고상한 욕망을 추구할 일이다. 모든 욕망에는 그 나름대로의 중독성이 있다. 고상한 욕망에 중독되는 일이 좀 더 나은 길이다. 물론 대개 '저급한' 욕망에 마음이 먼저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 정도 수준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산다. 작은 단위에선 핸드폰, 페이스북, 달콤한 간식이기고 하고,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성공, 치부, 명예, 타인의 인정 같은 것이기도 하고. 좀 더 고급스러운 욕망이라면... 배고픔, 인내, 달리기, 경건 같은 것이다. 나를 추동하는 것이 곧 신이요 하나님이다. 욕망=하나님? 어떤 신을 따를 것인가? 이왕이면 좀 더 고상한 신을 따르자.
3. 욕망을 끊어낼 수 없다. 다른 욕망으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려는 구도자들에게 구도는 그 자체가 욕망이다. 신기독(愼其獨)? 참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바보짓이다. 지금 나를 추동하는 욕망이 저급해서 피하고 싶다면 좀 더 고상한 욕망을 추구할 일이다. 모든 욕망에는 그 나름대로의 중독성이 있다. 고상한 욕망에 중독되는 일이 좀 더 나은 길이다. 물론 대개 '저급한' 욕망에 마음이 먼저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 정도 수준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산다. 작은 단위에선 핸드폰, 페이스북, 달콤한 간식이기고 하고,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성공, 치부, 명예, 타인의 인정 같은 것이기도 하고. 좀 더 고급스러운 욕망이라면... 배고픔, 인내, 달리기, 경건 같은 것이다. 나를 추동하는 것이 곧 신이요 하나님이다. 욕망=하나님? 어떤 신을 따를 것인가? 이왕이면 좀 더 고상한 신을 따르자.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Write drunk, edit sober" (Ernest Hemingway)
간결한 문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名不虛傳이라고 할밖에...
간결한 글을 높이 친다. 간결하면서도 맛도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런 글로 헤밍웨이, 오웰, 김현, 고종석, 김훈 정도가 떠오른다. 물론 김훈은 전형적인 간결체는 아니지만 간결한 느낌을 준다.
글쓰기에 대해서 최근에 읽은 책 두 권 이재룡의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남영신 "글쓰기는 주제다"는 문체로만 치면 모두 간결하다. 다만 남영신은 문장이 간결하기만 해서 매력이 없는 경우고 (국문학자 조동일 글이 그런 것처럼) 이재룡은 나름 읽는 맛도 준다.
As far as writing is concerned I have special respect for the brevity. It is even more respectful when brevity is coupled with style.
간결한 문장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名不虛傳이라고 할밖에...
간결한 글을 높이 친다. 간결하면서도 맛도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런 글로 헤밍웨이, 오웰, 김현, 고종석, 김훈 정도가 떠오른다. 물론 김훈은 전형적인 간결체는 아니지만 간결한 느낌을 준다.
글쓰기에 대해서 최근에 읽은 책 두 권 이재룡의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남영신 "글쓰기는 주제다"는 문체로만 치면 모두 간결하다. 다만 남영신은 문장이 간결하기만 해서 매력이 없는 경우고 (국문학자 조동일 글이 그런 것처럼) 이재룡은 나름 읽는 맛도 준다.
As far as writing is concerned I have special respect for the brevity. It is even more respectful when brevity is coupled with style.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페친 김호기 교수님 이야기
"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위해 지식(담론)을 동원한다는 것을 이론화한 이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입니다.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국정교과서 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북한, 베트남, 태국, 몽골, 스리랑카 등과 같은 국가들 뿐입니다. 교육부가 2018년부터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을 국정교과서로 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윤리와 사상, 법과 정치, 사회와 문화에서 결국 하나의 논리를 가르치겠다는 거의 파시즘과 유사한 발상입니다.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자연은 노랑, 갈색, 빨강 등 저렇게 다양성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사회를 보는 데 하나의 안경만을 고집하는 여기는 어디이고, 그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요."
윤리를 강조한다는 것, 윤리를 자주 듣게 되는 현상은 해석할 여지가 많다. 그저 기능적 분화가 불만스럽다고 성급하게 연대라는 윤리에 기대서는 곤란하다. 루 만에게서 출발해서 뒤르케임/ 혹은 파슨즈로 돌아가는.... 기능적 분화는 윤리에 의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기능적 분화 때문에 윤리화의 문턱은 낮아질대로 낮아졌다. 윤리 매체의 인플레이션. 윤리화를 교통정리하기 위해서 또 윤리가 동원된다. (...)
"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위해 지식(담론)을 동원한다는 것을 이론화한 이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입니다.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국정교과서 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북한, 베트남, 태국, 몽골, 스리랑카 등과 같은 국가들 뿐입니다. 교육부가 2018년부터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을 국정교과서로 발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윤리와 사상, 법과 정치, 사회와 문화에서 결국 하나의 논리를 가르치겠다는 거의 파시즘과 유사한 발상입니다.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자연은 노랑, 갈색, 빨강 등 저렇게 다양성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사회를 보는 데 하나의 안경만을 고집하는 여기는 어디이고, 그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요."
윤리를 강조한다는 것, 윤리를 자주 듣게 되는 현상은 해석할 여지가 많다. 그저 기능적 분화가 불만스럽다고 성급하게 연대라는 윤리에 기대서는 곤란하다. 루 만에게서 출발해서 뒤르케임/ 혹은 파슨즈로 돌아가는.... 기능적 분화는 윤리에 의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기능적 분화 때문에 윤리화의 문턱은 낮아질대로 낮아졌다. 윤리 매체의 인플레이션. 윤리화를 교통정리하기 위해서 또 윤리가 동원된다. (...)
나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생각의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피트케 이야기. 이외 분야에도 해당하는 얘기. 많은 부분 상식에 가깝지만 뭐 유명인사가 얘기하면 무게감이 다르니까.
"미국 경제학계에도 좋은 친구가 많고 그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미국 주류 경제학자들이 너무 자신만만하고(self-confident),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어서 역사학·사회학·언론학 등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들이 자신들처럼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점이 상당히 미성숙하다고 본다. 경제학자들은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경제 현안들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것이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데이터를 수집해 연구하면서 경제 현안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야만 조금씩이나마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책을 쓰며 알게 된 것은 경제성장률이 5% 수준으로 영구히 지속되지 않으며, 1%대로 떨어질 경우 과거에 축적한 부가 더 큰 힘을 갖게 되고 결국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가 새로운 규범(norm)으로 도래한다는 것이다. 세습자본주의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 과제로서 부의 재분배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송 : 세습자본주의가 영향력을 확대하면 청년세대에게 미래는 없다. 당신은 이를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라스티냐크 딜레마’로 논하는데, 한국의 현재 청년실업과 고령 빈곤층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피 : 발자크 시대보다는 소득수준이나 계급 간 이동의 용이성에 있어서 상황이 개선됐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 고성장 시대와는 달리 부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는 지금 조세 정책을 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노동소득 세율을 축적된 부에 대한 세율보다 낮추는 조치가 취해져야 할 때다."
"인구증가 침체율이 상속세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며 따라서 불평등도 심화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유럽의 낮은 인구성장률은 따라서 발자크의 19세기 때보다 앞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시장의 힘에만 맡기면 과도한 불평등이 초래될 수 있다. 불평등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그러나 과도한 불평등은 성장에도 악영향을 주며 과도한 부의 집중은 민주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그래서 강력한 민주주의, 투명한 소득과 부의 동학으로서 시장자본주의가 모두에게 득이 되는 공공이익의 관점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의 핵심이다.
"미국 경제학계에도 좋은 친구가 많고 그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미국 주류 경제학자들이 너무 자신만만하고(self-confident),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어서 역사학·사회학·언론학 등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들이 자신들처럼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점이 상당히 미성숙하다고 본다. 경제학자들은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경제 현안들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것이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데이터를 수집해 연구하면서 경제 현안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야만 조금씩이나마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책을 쓰며 알게 된 것은 경제성장률이 5% 수준으로 영구히 지속되지 않으며, 1%대로 떨어질 경우 과거에 축적한 부가 더 큰 힘을 갖게 되고 결국엔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가 새로운 규범(norm)으로 도래한다는 것이다. 세습자본주의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 과제로서 부의 재분배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송 : 세습자본주의가 영향력을 확대하면 청년세대에게 미래는 없다. 당신은 이를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라스티냐크 딜레마’로 논하는데, 한국의 현재 청년실업과 고령 빈곤층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피 : 발자크 시대보다는 소득수준이나 계급 간 이동의 용이성에 있어서 상황이 개선됐다고 본다. 그러나 과거 고성장 시대와는 달리 부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는 지금 조세 정책을 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노동소득 세율을 축적된 부에 대한 세율보다 낮추는 조치가 취해져야 할 때다."
"인구증가 침체율이 상속세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며 따라서 불평등도 심화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유럽의 낮은 인구성장률은 따라서 발자크의 19세기 때보다 앞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시장의 힘에만 맡기면 과도한 불평등이 초래될 수 있다. 불평등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그러나 과도한 불평등은 성장에도 악영향을 주며 과도한 부의 집중은 민주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그래서 강력한 민주주의, 투명한 소득과 부의 동학으로서 시장자본주의가 모두에게 득이 되는 공공이익의 관점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의 핵심이다.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회학 연구 유형 구분
Pitasi, Andrea (2014), The Metaconvergence Spiral Rethinking Sociological Working Styles Systemically, International Journal of Academic Research in Business and Social Sciences 4(9):160-165
요약하자면
(1) 특정 지역에 대한 질적 연구: 참여관찰이나 민속지학적 연구 (ethnographical)
(2) 중범위에 대한 양적 연구
(3) 비교사회학
(4) 거시사회이론
Abstract
In terms of working styles, sociological works can be categorized in relatively few kinds.
1. Qualitative local based works. They are rather focused on small scale ethnographical
information and participant observation. Probably the most famous and exemplary sociological research of this kind is White’ "Street Corner society".
2. Quantitative middle range works trying to balance theory and empirical research. Robert K. Merton’s Theory and social structure is the Masteppiece which embodies this working style at its top. Both these working styles had got great generalization standards Merton’s key work implicitly framed the problem of generalization when he considered the systematization of the most relevant theoretical-empirical findings to expand their range. The matter of comparison dramatically emerged also though the growing internationalization of what Elias called the civilization process.
3. Comparative Sociology, both diachronically and synchronically, emerged as a key vision to expand the sociological horizons beyond the specific territory and time limitations which features the two other working styles. Comparative Sociology generated high quality contributions to compare "entities"(social and institutional ones". This working style implied very broad but neat and simple scenarios in which the entities were compared thus very wide but simple scenarios in which complex interconnections were rather weak. Variety increases by hybridation and then comparisons become very unlikely and the convergence concept in the age of complexity scenarios is not a mere socio-cultural convergence. What is convergence
then? Before answering this question, one further step in mapping sociological working styles is required.
4. One forth working style is general sociological theory which is a great stream focused on the epistemological construction of conceptual and semantic systematiz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by letting converge the key foundations and findings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No convergence would never be possible without this kind of working style.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1. 오늘 멘토1호를 만났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내 탓이다. 완벽주의의 덫 혹은 늪...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간절함, 절실함, 헝그리정신 부족... 결론적으로, 내가 잘 알고 있고 또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방향이 정답임을 확인.
2. 그 하나는 루만의 체계이론이다. 특히 "기능적 분화"가 한국 사회구조의 변화 방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용하고도 설득력있는 이론적 틀이라는 확신.
3. 다른 하나는 과학 혹은 과학체계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기술보다는 과학이고, 과학과 경제의 관계보다는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관심이 더 간다. 과학과 과학정책의 관계라고 해도 좋고. 정확하게 말해 내 관심은 과학과 정치다. 과학은 과학 나름대로. 정치는 정치 나름대로. 우연히 이 둘이 어울리면 과학정책인 것이고.
4.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특히, 순수과학 혹은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인문학도 포함되겠지. 이런 분야는 예술, 특히 순수예술에 대해서 지원하는 것처럼 지원해야 한다.
5. 내가 배격하는 것은 정치화, 경제화 압력, 논리. 정치화나 경제화에 대해선 이른 바 좌우 혹은 진보, 보수가 모두 배격 대상이다. 우파적 개입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시민단체나 기타 좌파적 개입의 경우에도 탐탁치 않은 경우가 많다. 경제화 논리 역시 마찬가지. 천박한 자본가, 거대기업, 그 똘마니들의 탐욕스러운 졸부 근성과 거지 근성이 역겹지만, 분배와 재분배 논리에 매몰되는 좌파의 경제주의, 경제화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6. 이러저러한 규정이 마땅친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주의, 낭만주의에 가깝다. 루만에게는 그런 자유와 낭만이 느껴진다. 물론 루만의 입장은 그 자체로는 보수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조금 더 왼쪽을 바라보는 루만이라야 나와 시선이 부딪힐 것이다.
2. 그 하나는 루만의 체계이론이다. 특히 "기능적 분화"가 한국 사회구조의 변화 방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용하고도 설득력있는 이론적 틀이라는 확신.
3. 다른 하나는 과학 혹은 과학체계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기술보다는 과학이고, 과학과 경제의 관계보다는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관심이 더 간다. 과학과 과학정책의 관계라고 해도 좋고. 정확하게 말해 내 관심은 과학과 정치다. 과학은 과학 나름대로. 정치는 정치 나름대로. 우연히 이 둘이 어울리면 과학정책인 것이고.
4.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특히, 순수과학 혹은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인문학도 포함되겠지. 이런 분야는 예술, 특히 순수예술에 대해서 지원하는 것처럼 지원해야 한다.
5. 내가 배격하는 것은 정치화, 경제화 압력, 논리. 정치화나 경제화에 대해선 이른 바 좌우 혹은 진보, 보수가 모두 배격 대상이다. 우파적 개입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시민단체나 기타 좌파적 개입의 경우에도 탐탁치 않은 경우가 많다. 경제화 논리 역시 마찬가지. 천박한 자본가, 거대기업, 그 똘마니들의 탐욕스러운 졸부 근성과 거지 근성이 역겹지만, 분배와 재분배 논리에 매몰되는 좌파의 경제주의, 경제화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6. 이러저러한 규정이 마땅친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주의, 낭만주의에 가깝다. 루만에게는 그런 자유와 낭만이 느껴진다. 물론 루만의 입장은 그 자체로는 보수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조금 더 왼쪽을 바라보는 루만이라야 나와 시선이 부딪힐 것이다.
(1) 북유럽 한 나라의 장애인 고용 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다. 일종의 부업이다. 전자메일 인터뷰를 시도한 그 나라 교수가 답장을 보내왔다. 오늘 내일은 바쁘니 수요일에 답변을 주겠다고. 그 짧은 답변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걸 반가워하는 나를 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장애인 고용"이라는 주제는 사실 한국전체를 놓고 보면 변두리 중의 변두리에 속할 것이다. 도대체 몇 명이나 이 주제에 관심이 있을까? 게다가 북유럽의 그 작은 나라라니?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연구다. 비록 주업은 아닐지언정 어쨌든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연구 대상의 주변부성에 따른 외로움, 소외감을 갖고 있었는데, 연구 대상의 "모국" 그것도 "교수님"께서 친히 내 연구에 도움을 주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막연하게 이차, 삼차 텍스트를 통해서 혼자서 그리고 있던 덴마크가 '훅'하고 가까이 다가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또...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내 위치, 지위와는 상관없이 나는 한국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그 나라 장애인 고용 정책 전문가와 연결을 취하는 입장인 것이다. 일종의 국가대표? ^^
(2) 가깝진 않은 후배가 교수가 되었음을 오늘 확인했다. 흠. 묘한 기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난 내 길이라도 확실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도 속 시원하게 하리라.
(3)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기라도 하면 덜 억울할텐데. 도대체 그놈의 생각이 돌고 돌아 또 돌고 도는 일이 일상이다시피하니...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래서야 무슨...
(4) 일정이 바뀌어서 내일 멘토 1호를 만나기로 했다. 해 놓은게 워낙 없어서 오늘은 좀 늦게까지 작업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이 1시 11분인데...
(5) 만오천원 주고 산 호주산 와인을 마시고 있다. 어제는 와인잔으로 딱 한 잔 오늘은 그 나머지.
(2) 가깝진 않은 후배가 교수가 되었음을 오늘 확인했다. 흠. 묘한 기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난 내 길이라도 확실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도 속 시원하게 하리라.
(3)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기라도 하면 덜 억울할텐데. 도대체 그놈의 생각이 돌고 돌아 또 돌고 도는 일이 일상이다시피하니...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래서야 무슨...
(4) 일정이 바뀌어서 내일 멘토 1호를 만나기로 했다. 해 놓은게 워낙 없어서 오늘은 좀 늦게까지 작업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이 1시 11분인데...
(5) 만오천원 주고 산 호주산 와인을 마시고 있다. 어제는 와인잔으로 딱 한 잔 오늘은 그 나머지.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한국의 생명윤리 논쟁을 비판적으로 바라 볼 이유는 충분히 있다.
"규제와 제도 중심의 생명윤리" "보편성을 추구하는 생명윤리 논의" "좁은 의미의 개인주의적 윤리에 기반을 둔 생명윤리" "모든 '일상적' 문제들을 배제한 채 정보공개나 동의의 문제 등 절차에 치중하여 이루어지는 생명윤리 논의라면, 이는 결국 생명과학 연구나 의료를 무리 없이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역할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문제는 법이나 정책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러한 접근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개인의 자율성 등의 개념을 과연 어떻게 하면 개인들이 구체적인 일상의 장에서 갈등하고 경험하는 내용에 응답하고 조응할 수 있게 할 것이냐 이다" "물론 생명윤리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정보에 입각한 동의, 개인의 자율성가 사생활 보호 등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어 오게 된 데는 그 나름의 현실적 요구와 논쟁의 역사적 맥락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논의는 생명윤리를 일반인이 범접하기에는 추상적이고 학술적인 문제로 느껴지게 하거나 전문가들이 맡아 처리해야 할 절차상의 문제로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일상적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은 한국의 주류 학문적, 제도적 생명윤리를 서양의 주류 생명윤리와 등치하는 것 같다. 오히려 한국 주류 생명윤리, 제도와 정책이 갖는 특수한 성격을 보려하지 않고 서양의 인류학, 여성학 등에서 주류 생명윤리를 비판하는 논지와 근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같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양식의 비판적 논지를 가져와서 한국의 생명윤리 법, 제도, 정책 등을 서양의 것과 성급하게 등치시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 서양과 다른 한국의 법, 제도, 정책의 특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규제와 제도 중심의 생명윤리" "보편성을 추구하는 생명윤리 논의" "좁은 의미의 개인주의적 윤리에 기반을 둔 생명윤리" "모든 '일상적' 문제들을 배제한 채 정보공개나 동의의 문제 등 절차에 치중하여 이루어지는 생명윤리 논의라면, 이는 결국 생명과학 연구나 의료를 무리 없이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역할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문제는 법이나 정책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러한 접근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개인의 자율성 등의 개념을 과연 어떻게 하면 개인들이 구체적인 일상의 장에서 갈등하고 경험하는 내용에 응답하고 조응할 수 있게 할 것이냐 이다" "물론 생명윤리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정보에 입각한 동의, 개인의 자율성가 사생활 보호 등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어 오게 된 데는 그 나름의 현실적 요구와 논쟁의 역사적 맥락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논의는 생명윤리를 일반인이 범접하기에는 추상적이고 학술적인 문제로 느껴지게 하거나 전문가들이 맡아 처리해야 할 절차상의 문제로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일상적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은 한국의 주류 학문적, 제도적 생명윤리를 서양의 주류 생명윤리와 등치하는 것 같다. 오히려 한국 주류 생명윤리, 제도와 정책이 갖는 특수한 성격을 보려하지 않고 서양의 인류학, 여성학 등에서 주류 생명윤리를 비판하는 논지와 근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같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양식의 비판적 논지를 가져와서 한국의 생명윤리 법, 제도, 정책 등을 서양의 것과 성급하게 등치시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 서양과 다른 한국의 법, 제도, 정책의 특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Being radical...
"지금까지 생명윤리 논의를 살펴 볼 때, ...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데서 시작하는 위기담론이 생명윤리를 논하는 가장 흔한 방식 중의 하나인 듯하다.... 문제는 새로운 현상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는 틀림없이 억압적이고 부당할 수밖에 없는 낡은 관념들로 종종 회귀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 상식... 상식... " (13)
이런 비판을 하지만 이 책은 모두 "위기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극단적인 사례들... 물론 누군가에겐 절실하고 간절한 일들이겠지만...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윤리"가 아닌 "개개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일상 속의 윤리"를 강조하는데... 이 책들이 얘기하고 있는 사례들은 일상에서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낯설다.
"흔히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 책은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우리의 일상과 자유에 관한 '질문'으로서 다시 읽어낸다. 우리는 해답이 과연 합당한가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바이오테크놀로지를 해답으로 보이게 만드는 문제설정,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달려있다." (18f)
흠. 훌륭한 지적이다. 일상의 관점에서 문제 자체를 다시 성찰한다. 일상. 도대체 어떤 일상인가?
이런 접근은 역시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위기담론이 자극적인 것처럼, 위기 담론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자는 주장 역시 자극적이기 그지 없다. 급진적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급진적 루만"이 생각났다. "The Radical Luhmann". 놀랍지 않게도 마지막 결론 장의 부제가 "Nec spe nec metu: Neither Hope nor Fear"다. 이게 더 급진적이지 않은가? 위기를 강조하거나 위기담론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는 주장보다 말이다.
밴쿠버에서 열렸던 학회가 생각났다. 별 반향 없었던,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허접 발표를 마치고 다른 세션을 며칠 동안 기웃거렸다. 그 많은 세션의 그 많은 발표 중에서 듣고 싶었던 발표가 단 하나도 없었다. 억지로 들었던 발표들 중에서 지금 기억에 남는 발표 역시 단 하나도 없었다. 왜? 왜 관심을 갖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발표가 미시적인 주제에 대한 사례연구에 가까웠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치료불가능한 거시적 관점 선호자니까. (여기에서 '이론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으리라. 미시에 대한 이론가도 있으니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갖는 장점을 극대화하면 될 일이다.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사건들을 강조하거나 급진성, 규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만 내 길은 아닌 것이다. 잘하는 것을 잘하기. 그게 정답이다.
이런 비판을 하지만 이 책은 모두 "위기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극단적인 사례들... 물론 누군가에겐 절실하고 간절한 일들이겠지만...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윤리"가 아닌 "개개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일상 속의 윤리"를 강조하는데... 이 책들이 얘기하고 있는 사례들은 일상에서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낯설다.
"흔히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 책은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우리의 일상과 자유에 관한 '질문'으로서 다시 읽어낸다. 우리는 해답이 과연 합당한가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바이오테크놀로지를 해답으로 보이게 만드는 문제설정,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달려있다." (18f)
흠. 훌륭한 지적이다. 일상의 관점에서 문제 자체를 다시 성찰한다. 일상. 도대체 어떤 일상인가?
이런 접근은 역시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위기담론이 자극적인 것처럼, 위기 담론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자는 주장 역시 자극적이기 그지 없다. 급진적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급진적 루만"이 생각났다. "The Radical Luhmann". 놀랍지 않게도 마지막 결론 장의 부제가 "Nec spe nec metu: Neither Hope nor Fear"다. 이게 더 급진적이지 않은가? 위기를 강조하거나 위기담론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는 주장보다 말이다.
밴쿠버에서 열렸던 학회가 생각났다. 별 반향 없었던,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허접 발표를 마치고 다른 세션을 며칠 동안 기웃거렸다. 그 많은 세션의 그 많은 발표 중에서 듣고 싶었던 발표가 단 하나도 없었다. 억지로 들었던 발표들 중에서 지금 기억에 남는 발표 역시 단 하나도 없었다. 왜? 왜 관심을 갖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발표가 미시적인 주제에 대한 사례연구에 가까웠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치료불가능한 거시적 관점 선호자니까. (여기에서 '이론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으리라. 미시에 대한 이론가도 있으니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갖는 장점을 극대화하면 될 일이다.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사건들을 강조하거나 급진성, 규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만 내 길은 아닌 것이다. 잘하는 것을 잘하기. 그게 정답이다.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보편과 개별.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원히. 바윗돌을 굴리며 산을 오르내리던 시지프처럼. 타협의 여지는 없다.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착시현상의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그 그림에서처럼... 젊은 여자로 보거나 노파로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느 한 쪽을 줄곧 지지할 수는 없는가? 얼핏 그럴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관점을 확대시키서 보면 모순된 태도를 일관성있게 지지하고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시종일관 꼰대짓하는 어른이 다른 상황에선 자신이 얘기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경우라던지. 드물게 매사에 일관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바람직한가? 그런 것만도 아니다. 모두가 일관성있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선 공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상엔 어떤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고, 법칙이 있는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같은 소리, 구라요 판타지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모두 합쳐 논다면 그 중 인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0.00000......0001 % 정도일 것이다. 그런 알량한 지식 가지고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면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바꿔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갈등이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이 비정상이다. 통일, 통합, 단결, 하나됨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걸 자꾸 강조하는 사람은 의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 쪽으로의 통합을 얘기한다. 상대가 틀렸다는 것이다. - 어떻게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세계화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수렴, 확산, 강제되고 있는 글로벌 단일문화를 한 쪽에 두고 다른 쪽에 지역 혹은 국가 문화를 생각해보자. 세계의 단일한 문화? 그건 가능하지도 않지만,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역문화, 국가문화에 충실. 그것 역시 가능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북한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보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지역문화 자체가 다양하다.
주체적인 것? 타인의 주체적임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의 주체성 안에서도 무지막지한 모순이 있고... 모순과 모순이 만나는 세상은 갈등투성이다. 그런 갈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 그것이 문명이다. 갈수록 세련되어 왔다. 그래서 심리학이 필요하다.
과학과 관련해서, 생명과학, 배아연구, 생명윤리 등과 관련해서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짜피 모순투성이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고 함께 살아가지? 일시적으로 가능하다. 힘으로 강제하거나,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거나. 성찰을 하는 이상 그런 상태는 오래 갈수가 없다.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공존을... 차이의 공존.
한국의 사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세상엔 어떤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고, 법칙이 있는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같은 소리, 구라요 판타지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모두 합쳐 논다면 그 중 인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0.00000......0001 % 정도일 것이다. 그런 알량한 지식 가지고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면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바꿔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갈등이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이 비정상이다. 통일, 통합, 단결, 하나됨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걸 자꾸 강조하는 사람은 의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 쪽으로의 통합을 얘기한다. 상대가 틀렸다는 것이다. - 어떻게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세계화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수렴, 확산, 강제되고 있는 글로벌 단일문화를 한 쪽에 두고 다른 쪽에 지역 혹은 국가 문화를 생각해보자. 세계의 단일한 문화? 그건 가능하지도 않지만,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역문화, 국가문화에 충실. 그것 역시 가능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북한이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보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지역문화 자체가 다양하다.
주체적인 것? 타인의 주체적임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의 주체성 안에서도 무지막지한 모순이 있고... 모순과 모순이 만나는 세상은 갈등투성이다. 그런 갈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 그것이 문명이다. 갈수록 세련되어 왔다. 그래서 심리학이 필요하다.
과학과 관련해서, 생명과학, 배아연구, 생명윤리 등과 관련해서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짜피 모순투성이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고 함께 살아가지? 일시적으로 가능하다. 힘으로 강제하거나,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거나. 성찰을 하는 이상 그런 상태는 오래 갈수가 없다.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공존을... 차이의 공존.
한국의 사례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동성애에 대한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 좀 길지만...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피에서. 링크)
"바울 시대의 동성애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버리고 남자까지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롬 1:26,27, 공동번역). 비록 바울이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애 현상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라고 한다면 텍스트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동성애를 죄(Sin)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의 결과라고 진술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6절).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이런 망측한 짓을 한다는 진술만 보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을 논증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근원적인 것은 죄, 곧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는 동성애 이외에도 부정, 부패, 탐욕, 악독, 시기, 살의, 분쟁 등등,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2-24).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이 동성애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부패에 연루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문제 삼습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한결같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라는 게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바울의 진술이 동성애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자의 근본적인 의도를 놓치고 지엽적인 것을 중심적인 것으로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 성윤리에 근거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 동성애 문제를 신앙의 근본 문제로 삼아 깊이 성찰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건전한 윤리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인들은 출산을 목적으로만 아내와 성관계를 나누었고, 대신 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여러 방식의 연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플라톤도 성인 남자와 소년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는 거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동성애 현상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의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르타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로마 도덕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성애는 사치와 방탕에 연관된다는 점과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마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성애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동성애와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좀 구분되어야 하는데, 바울은 당연히 로마의 동성애 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성서윤리의 적용 문제
목사님께서는 그래도 동성애는 나쁜 게 아니냐, 하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설교할 때 이런 점에서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말고 너울로 가리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습관이 그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지금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바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곧 우리에게도 여전히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문제는 앞에서 ‘해석’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언급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의 동성애 언급은 그가 이것을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술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이해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규범’으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선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퍼니쉬(Victor Paul Furnish)의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이희숙 역, 종로서적, 1994>에서 제시된 결론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로마서 1:26,27을 취급해야 할 기준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내립니다.
1)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동성애의 주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거기서 찾을 수 없다.
2) 바울이 동성애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현대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시대와 달리 오늘은 동성애의 심리적 요소, 사회적 요소, 생물학적 요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근본적인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 역시 유효하다.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오늘 우리에게 타당하다는 말이다.
4) 동성애 행위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 맥락을 간과한 채 단독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동성애는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징후’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악의 하나로 언급되어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저는 퍼니쉬의 대답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논점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바울이 동성애를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게 하나이며, 이런 문제는 전체적인 신학 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하용조)라거나 “이 시대에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이즈입니다.”(이동원)라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동성애가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회 심리적 요인에 의한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동성애자들이 로마 시대의 동성애자들처럼 사치와 정욕에 치우쳐 있다거나 상대방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적 취향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아무도 바울의 비난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바울 시대의 동성애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버리고 남자까지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롬 1:26,27, 공동번역). 비록 바울이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애 현상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라고 한다면 텍스트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동성애를 죄(Sin)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의 결과라고 진술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6절).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이런 망측한 짓을 한다는 진술만 보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을 논증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근원적인 것은 죄, 곧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는 동성애 이외에도 부정, 부패, 탐욕, 악독, 시기, 살의, 분쟁 등등,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2-24).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이 동성애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부패에 연루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문제 삼습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한결같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라는 게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바울의 진술이 동성애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자의 근본적인 의도를 놓치고 지엽적인 것을 중심적인 것으로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 성윤리에 근거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 동성애 문제를 신앙의 근본 문제로 삼아 깊이 성찰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건전한 윤리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인들은 출산을 목적으로만 아내와 성관계를 나누었고, 대신 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여러 방식의 연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플라톤도 성인 남자와 소년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는 거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동성애 현상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의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르타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로마 도덕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성애는 사치와 방탕에 연관된다는 점과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마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성애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동성애와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좀 구분되어야 하는데, 바울은 당연히 로마의 동성애 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성서윤리의 적용 문제
목사님께서는 그래도 동성애는 나쁜 게 아니냐, 하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설교할 때 이런 점에서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말고 너울로 가리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습관이 그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지금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바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곧 우리에게도 여전히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문제는 앞에서 ‘해석’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언급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의 동성애 언급은 그가 이것을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술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이해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규범’으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선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퍼니쉬(Victor Paul Furnish)의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이희숙 역, 종로서적, 1994>에서 제시된 결론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로마서 1:26,27을 취급해야 할 기준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내립니다.
1)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동성애의 주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거기서 찾을 수 없다.
2) 바울이 동성애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현대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시대와 달리 오늘은 동성애의 심리적 요소, 사회적 요소, 생물학적 요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근본적인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 역시 유효하다.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오늘 우리에게 타당하다는 말이다.
4) 동성애 행위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 맥락을 간과한 채 단독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동성애는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징후’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악의 하나로 언급되어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저는 퍼니쉬의 대답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논점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바울이 동성애를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게 하나이며, 이런 문제는 전체적인 신학 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하용조)라거나 “이 시대에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이즈입니다.”(이동원)라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동성애가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회 심리적 요인에 의한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동성애자들이 로마 시대의 동성애자들처럼 사치와 정욕에 치우쳐 있다거나 상대방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적 취향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아무도 바울의 비난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도덕’이라는 말을 서양말의 모랄리티에 해당하는 말로서 의식 없이 쓰고 있는데, ‘도덕’이라는 말은 본시노자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은 도와 덕의 합성어이다. “도덕경” 51장에 보면, “도는 생하는 것이고 덕은 축하는 것이다.”라는 함축된 명제가 있다. 도는 생생하는 천지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라면 덕이란 그 천지의 생생지덕을 몸에 축적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교육이란 축적해 나가는 과정, 즉 덕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34쪽, 김용옥 2014, 도올의 교육입국론)
(34쪽, 김용옥 2014, 도올의 교육입국론)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1. 멘토 2호를 만나고 오다. 건국대는 오늘부터 축제기간이라고. 천막의 줄줄이 늘어서있고, 고기를 굽고 뭔가 먹을 것을 만들거나, 뭔가를 마시거나... 시끄럽고... 밖은 소란한데 마음 속에 미동조차 없었다. 음. 그렇게 어른이 되거나 꼰대가 되거나...
2. 멘토와 나눈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갈 길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다.
3. 페북에서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 책 10권을 소개하는 일이 이어지는데... 어떤 페친이 "수레바퀴 밑에서"를 언급한 것이다. 언젠가 읽으려고 미뤄만 두던 책인데... "데미안" 역시... 도서관에 모처럼 온 김에 두 권을 빌렸다. 예약해둔 성석제의 "투명인간"까지.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4. 내가 열 권을 고른다면... 떠오르는대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혹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루만의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조정래 "태백산맥", 이문열의 "변경", 저자가 생각나지 않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안병무의 "민중신학탐구"(?),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잡지) (혹은 "뜻으로 읽는 한국사")... 음. 더 떠오르지 않는다. 루만, 라임오렌지 나무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학부 시절에 읽었던 책들이다.
영화에 대해선... "펄프픽션" "매트릭스 1,2" "마라톤맨" "터미네이터 1", 홍상수의 여러 영화, 김기덕의 여러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군.
2. 멘토와 나눈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갈 길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다.
3. 페북에서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 책 10권을 소개하는 일이 이어지는데... 어떤 페친이 "수레바퀴 밑에서"를 언급한 것이다. 언젠가 읽으려고 미뤄만 두던 책인데... "데미안" 역시... 도서관에 모처럼 온 김에 두 권을 빌렸다. 예약해둔 성석제의 "투명인간"까지.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4. 내가 열 권을 고른다면... 떠오르는대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혹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루만의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조정래 "태백산맥", 이문열의 "변경", 저자가 생각나지 않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안병무의 "민중신학탐구"(?),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잡지) (혹은 "뜻으로 읽는 한국사")... 음. 더 떠오르지 않는다. 루만, 라임오렌지 나무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학부 시절에 읽었던 책들이다.
영화에 대해선... "펄프픽션" "매트릭스 1,2" "마라톤맨" "터미네이터 1", 홍상수의 여러 영화, 김기덕의 여러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군.
페친 김요한 목사님의 글. 두고두고 읽으려고 가져왔다.
"제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개신교 목사로서 지금까지 1만명이 넘은 사람들을 안수 기도하면서 확실히 배운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아픈 자와 연약한 자들을 학대하고 멸시한 죄에 대해서는,
당대에 찾으시든지, 후손들에게 찾으시든지, 반드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상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학대한 것의 대가를 후손들이 지불하는 것도 아주 많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아픈 자와 연약한 자들을 학대하고 멸시한 죄에 대해서는,
당대에 찾으시든지, 후손들에게 찾으시든지, 반드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상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학대한 것의 대가를 후손들이 지불하는 것도 아주 많이 봤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죄들에 대한 묘사와 경고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우상(탐욕의 우상)을 숭배한 죄와,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학대한 죄에 대해서는 가중치를 묻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서 죄라고 생각하는 술담배 문제는 성경에는 이중적으로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고, 동성애는 6회 정도 언급하고, 십일조 준수에 대한 언급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억울한 자를 학대하고 멸시하는 죄의 엄중함에 대해서는 수천 번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해서 제정된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지키지 않았기에,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는 징벌을 당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상(탐욕의 우상)을 숭배한 죄와,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학대한 죄에 대해서는 가중치를 묻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서 죄라고 생각하는 술담배 문제는 성경에는 이중적으로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고, 동성애는 6회 정도 언급하고, 십일조 준수에 대한 언급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억울한 자를 학대하고 멸시하는 죄의 엄중함에 대해서는 수천 번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해서 제정된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지키지 않았기에,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는 징벌을 당했다고까지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국가의 정부를 세우신 목적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회적 공의를 실현하고 약자들을 보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리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실현되게 해야 할 책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특정한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경제성장이나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왕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얼마나 신실하게 우상숭배를 억제하고 가난한 자를 보호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심지어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뉘앙스로 자주 오독되고 남용된 로마서 13장에서도, 정부가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공평과 정의를 집행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나아가 요한계시록 17-18장은,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이 가난한 자들의 피와 눈물을 착취한 결과로 얻어진 부와 향락을 즐긴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신정 안에서의 왕정'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리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실현되게 해야 할 책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특정한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경제성장이나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왕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얼마나 신실하게 우상숭배를 억제하고 가난한 자를 보호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심지어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뉘앙스로 자주 오독되고 남용된 로마서 13장에서도, 정부가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공평과 정의를 집행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나아가 요한계시록 17-18장은,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이 가난한 자들의 피와 눈물을 착취한 결과로 얻어진 부와 향락을 즐긴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국가-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학대하고 멸시하는 일체의 행위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영적이고 정치적인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학대하고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본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지만,
이러한 죄들이 누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국가-사회 전체가 받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학대하고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본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지만,
이러한 죄들이 누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국가-사회 전체가 받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일찍부터 남과의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돕는 고가의 사교육이나 조기 유학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의 정신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나 가능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니 반드시 물려주어야만 하는 가장 바람직한 유산은,
기성세대가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도 함께 존중받고 보호받으며 살 수 있는,
슬픈 자와 아픈 자들의 억울함이 공정한 절차와 방법으로 신원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국가-사회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부터 남과의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돕는 고가의 사교육이나 조기 유학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의 정신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나 가능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아니 반드시 물려주어야만 하는 가장 바람직한 유산은,
기성세대가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도 함께 존중받고 보호받으며 살 수 있는,
슬픈 자와 아픈 자들의 억울함이 공정한 절차와 방법으로 신원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국가-사회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그리고 개신교 안에서,
자신은 지극히 비정치적이라고 둘러대면서도, 실제로는 특정한 이념과 계급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가난한 자와 아픈 자들을 외면하고 학대하는 설교와 발언을 남발하는, 지극히 정치적 목사들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엄중히 따져 묻고 싶습니다."
자신은 지극히 비정치적이라고 둘러대면서도, 실제로는 특정한 이념과 계급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가난한 자와 아픈 자들을 외면하고 학대하는 설교와 발언을 남발하는, 지극히 정치적 목사들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엄중히 따져 묻고 싶습니다."
2014년 9월 15일 월요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
포퍼가 비판하고자 하는 '역사주의'란, '역사적 예측'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역사진보의 밑바닥에 있는 '규칙적인 흐름', '패턴', '법칙'이나 '경향' 등을 발견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회과학 접근법 중 하나이다.
포퍼에 의하면 이 책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역사 과정은 인간의 지식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합리적 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 과정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즉, (역사는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이론화하는) 이론 사학 또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방법의 기본 목표는 잘못된 것이며 역사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포퍼는 역사주의(historicism)를 논박하기 이해서 먼저 1장과 2장에서 역사주의를 매혹적인 지적 구조로 만들어 놓기로 한다. 그리고 나서 3장과 4장에서 이에 대해 반박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겠다고 한다.
역사에 흐름, 패턴, 법치, 경향이 있을까? 없을까? 사회이론 논의에서 핵심 중 핵심을 이루는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회이론은 이를 전제하고 있지 않나? 아니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나? 심지어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에 별로 관심없어보이는 루만의 접근마저도 매우 역사주의적 아닌가? 역사주의를 피하는 것... 포스트모던인가... 역사주의를 피하자는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게 사는게 재미있을까? 역사주의를 피하자는 포퍼의 주장 자체가 역사적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주장은 반복해서 등장했으리라.
불확실성, 무지를 못견뎌하는 것. 확실성의 추구. 그것은 인류의 특징 아니던가? 확실성의 근거가 바뀌고 있을 뿐. 포퍼 역시 합리성에 의한 확실성을 추구한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거부하면서...
불확실성을 어떻게든 처리해주지 못하면 학문의 존재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 불확실성, 무지, 다원성을 안고 살아가라고 얘기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것으로, 그저 심리상담 차원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학문은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주장, 지식...
여하튼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든 확실성을 만들어 살아오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그때로 따라서 기술하면 된다. 전제할 필요도 없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은가? 관찰을 관찰하기! 루만은 바로 그런 접근 아니던가? 포퍼가 비판하는 역사주의에서는 빼줄 수 있지 않을까?
포퍼가 비판하고자 하는 '역사주의'란, '역사적 예측'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역사진보의 밑바닥에 있는 '규칙적인 흐름', '패턴', '법칙'이나 '경향' 등을 발견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사회과학 접근법 중 하나이다.
포퍼에 의하면 이 책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역사 과정은 인간의 지식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합리적 또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 과정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즉, (역사는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이론화하는) 이론 사학 또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가능성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방법의 기본 목표는 잘못된 것이며 역사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포퍼는 역사주의(historicism)를 논박하기 이해서 먼저 1장과 2장에서 역사주의를 매혹적인 지적 구조로 만들어 놓기로 한다. 그리고 나서 3장과 4장에서 이에 대해 반박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겠다고 한다.
역사에 흐름, 패턴, 법치, 경향이 있을까? 없을까? 사회이론 논의에서 핵심 중 핵심을 이루는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회이론은 이를 전제하고 있지 않나? 아니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나? 심지어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에 별로 관심없어보이는 루만의 접근마저도 매우 역사주의적 아닌가? 역사주의를 피하는 것... 포스트모던인가... 역사주의를 피하자는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렇게 사는게 재미있을까? 역사주의를 피하자는 포퍼의 주장 자체가 역사적 배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주장은 반복해서 등장했으리라.
불확실성, 무지를 못견뎌하는 것. 확실성의 추구. 그것은 인류의 특징 아니던가? 확실성의 근거가 바뀌고 있을 뿐. 포퍼 역시 합리성에 의한 확실성을 추구한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거부하면서...
불확실성을 어떻게든 처리해주지 못하면 학문의 존재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 불확실성, 무지, 다원성을 안고 살아가라고 얘기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것으로, 그저 심리상담 차원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학문은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주장, 지식...
여하튼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든 확실성을 만들어 살아오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그때로 따라서 기술하면 된다. 전제할 필요도 없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은가? 관찰을 관찰하기! 루만은 바로 그런 접근 아니던가? 포퍼가 비판하는 역사주의에서는 빼줄 수 있지 않을까?
2014년 9월 13일 토요일
내가 공적으로,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히 있다. 그 이야기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한 번 정리해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터무니 없이 빈약한 것이다. 중복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정말로 빈약하다. 어찌되었건 그 요지 하나 하나를 제대로 풀어내려면 분량은 어렵지 않게 늘어나겠지만... 그 논지의 빈곤에 민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그런 이야기하려고...
사실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그런 분명한 철학을 기초로 삼고 있지 않다. 많은 경우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고, 그냥 목적, 의미도 따지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행위하는 것이고 그런 행위들의 연결이 일상이고 삶이다. 의미, 목적, 일관된 가치관... 그런 것 너무 따질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시콜콜히 의미, 목적 따지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일지도...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 경험한 바를 늘어 놓을 수 있을 것이고, 이러저러한 현안과 구체적 주제에 대한 내 견해를 풀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그리 풍성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런 것들을 관통하는 내 생각의 요체, '철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그런 핵심적 내용은 창피하리만치 빈약하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그런 분명한 철학을 기초로 삼고 있지 않다. 많은 경우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고, 그냥 목적, 의미도 따지지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행위하는 것이고 그런 행위들의 연결이 일상이고 삶이다. 의미, 목적, 일관된 가치관... 그런 것 너무 따질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시콜콜히 의미, 목적 따지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일지도...
윤리의 기능
Krohn이 지적하듯이... 윤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저항, 안정.
"저항" "저항윤리"는 과학의 자율성 관점에서 보면 양면성이 있다. 경제나 국가 등에 의한 과학의 과잉통합 경향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저항 운동 스스로 과학의 어떤 활동을 제약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잉통합의 원인이기도 하다.
"제도화 윤리" 역시 과학의 자율성 측면에서 양면성이 있다. 과잉통합으로부터 보호해서 과학을 지속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자율성 확보에 도움이 되지만, 과잉통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저항을 약화시키면서 과학을 지속적으로 식민지화하면서 약탈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자율성 유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학에 대한 비판과 과학의 자율성 보호하는 두 측면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에 덧붙여... "사회적 성찰"같은 기능은 어떤가? 물론 '사회적'이란 표현이 좀 모호하지만... 여러 사회체계를 거쳐서 발생하는 성찰...
1960년대 미국 생명윤리의 기원 (cf. 의료윤리)
"Prior to the 1960s, medical ethics had largely been the “doctors’ preserve,” Rothman believed. Established medicine insisted that “medical ethics should be left entirely to medicine, and whatever public policies flowed from these ethical principles were not to be contested or subverted.” In the 1960s a new set of questions developed over issues surrounding experimentation with human subjects and revolutionized this state of affairs. For Rothman, “human experimentation served as the magnet bringing outsiders to medicine.”(68) The public and bioethical response to revelations of ethical abuses in experimentation with human subjects in the 1960s
accounts for what Rothman believed to the hallmark of the origins of bioethics, that is, bringing public critical examination to bear on medical decision making." (p.37, Stevens 2000, Bioethics in America)
68. David Rothman, “Human Experimentation and the Origins of Bioethics in the United States,” in Social Science Perspectives on Medical Ethics, ed. George Weisz (Dordrecht, The Netherlan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0), 185–200, at 187, 198
(+ Rothman, Strangers at the Bedside)
68. David Rothman, “Human Experimentation and the Origins of Bioethics in the United States,” in Social Science Perspectives on Medical Ethics, ed. George Weisz (Dordrecht, The Netherlands: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0), 185–200, at 187, 198
(+ Rothman, Strangers at the Bedside)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직접 경험했던 터라 더 절절하게 들리는 이야기...
바다 무덤
손택수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멎었다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 아기를 위해
아내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아마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나는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막막하게 유영하는 우주 공간을 더듬고 있었다
그 후 아내는 어란을 먹지 않는다 꽃도 꺾지 않고, 나뭇잎 하나도 딸 수가 없다고 한다
세월호 뉴스 앞에 아내가 며칠째 넋을 놓고 있다
부푼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배 곁을 좀처럼 떠나질 못하고 있다
버리지 못한 초음파 사진 속 웅크린 태아처럼 바닷속을 둥둥 떠다닐 아이들
이틀이 아니라 두 달이 넘었다
자신의 배를 무덤으로 내어준 바다는 실성한 듯 혼자사 자장가를 부른다
파도 소리 뭍을 할퀸다
아내는 이제 생선을 먹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피해 다닐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멎은 배를 끌어안고
자장자장 들려줄 수 없는 자장가가
흘러나오는 바다
[출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고은 외, 실천문학사, 2014, pp. 87~88)]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 아기를 위해
아내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아마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나는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막막하게 유영하는 우주 공간을 더듬고 있었다
그 후 아내는 어란을 먹지 않는다 꽃도 꺾지 않고, 나뭇잎 하나도 딸 수가 없다고 한다
세월호 뉴스 앞에 아내가 며칠째 넋을 놓고 있다
부푼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배 곁을 좀처럼 떠나질 못하고 있다
버리지 못한 초음파 사진 속 웅크린 태아처럼 바닷속을 둥둥 떠다닐 아이들
이틀이 아니라 두 달이 넘었다
자신의 배를 무덤으로 내어준 바다는 실성한 듯 혼자사 자장가를 부른다
파도 소리 뭍을 할퀸다
아내는 이제 생선을 먹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피해 다닐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멎은 배를 끌어안고
자장자장 들려줄 수 없는 자장가가
흘러나오는 바다
[출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고은 외, 실천문학사, 2014, pp. 87~88)]
"탈무드의 인맥관리 17계명"이라고 떠돌아다닌다는... 그냥 "인생지침"으로 삼으면 좋을...
1. 지금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힘 없고 어려운 사람은 백번 도와줘라. 그러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2. 평소에 잘해라. 평소에 쌓아둔 공덕은 위기때 빛을 발한다.
1. 지금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힘 없고 어려운 사람은 백번 도와줘라. 그러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2. 평소에 잘해라. 평소에 쌓아둔 공덕은 위기때 빛을 발한다.
3. 내 밥값은 내가 내고 남의 밥값도 내가 내라. 남이 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4.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소리로 말하라. 마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다. 남이 내 마음속까지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5. 남을 도와줄때는 화끈하게 도와줘라. 도와주는지 안 도와주는지 흐지부지하거나 조건을 달지 마라. 괜히 품만 팔고 욕만 먹는다.
6. 남의 험담을 하지 마라. 그럴 시간 있으면 팔굽혀펴기나 해라.
7. 직장 바깥사람들도 골라서 많이 사귀어라. 직장 사람들하고만 놀면 우물 안 개구리 된다. 직장 그만두면 고아가 된다.
8. 불필요한 논쟁, 지나친 고집을 부리지 마라. 직장은 학교가 아니다.
9. 회사 돈이라고 함부로 쓰지 마라. 사실은 모두가 다 보고 있다.
10. 가능한 한 옷을 잘 입어라.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11. 남의 기획을 비판하지 마라. 네가 쓴 기획서를 떠올려봐라.
12. 조의금을 많이 내라. 사람이 슬프면 조그만 일에도 예민해진다.
13. 약간의 금액이라도 기부해라. 마음이 넉넉해지고 얼굴이 핀다.
14.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음식점 종업원에게 잘해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나중에 네가 어려워지면 배신할 사람이다.
15. 옛 친구들을 챙겨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느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을 소홀히 하지 마라.
16. 너 자신을 발견하라.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17.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순간은 나중에 네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이다.
2014년 9월 11일 목요일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1. 추석을 모처럼 처가에서 보내고 귀경. 막힐까봐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일찍 오긴 했는데, 오후에도 정체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줄 알았으면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올 걸... 오늘 귀성길 운전의 백미는 교통상황을 확인하면서 고속도로를 갈아 탄 것. 정체를 피해서 택한 고속도로에선 사고 때문에 정체가 발생했다. 때마침 정체 발생 지점에 IC가 있었는데 과감하게 빠져나갔다. 운전 중 지도를 확인하며 국도를 통해서 다음 IC로 진입. 정체를 피했다는 쾌감이... 그렇게 소소한 일에서라도 성취감을 느껴야...
2. 인간관계의 문제와 어려움 대부분은 자기 중심적 사고와 오해 때문이다. 식구들끼리도...
2. 인간관계의 문제와 어려움 대부분은 자기 중심적 사고와 오해 때문이다. 식구들끼리도...
2014년 9월 7일 일요일
1. 추석 전날 밤. 옆으로 난 베란다에 나와있다. 바깥 풍경은 좋은 편이나 큰 길 바로 옆이라 차소리가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다. 추석이라 차량 통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시끄럽다. 차소리와는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다. 자동차와 고층 아파트... 이 기가 막힌 조합이라니. 정태춘의 노랠 배경음악으로 틀어 봤으나 도무지 어울리질 않는다. "한 여름 밤의 고요한 정적"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어울릴 턱이 없다.
2. 여름으로 회귀한 듯한 날씨다. 한 여름 밤의 그 무더위가 생각나는... 물론 새벽녘에 급 선선해지긴 하지만... 감기 걸린 것처럼 콧물이 흘러 내린다. 환절기다.
2. 여름으로 회귀한 듯한 날씨다. 한 여름 밤의 그 무더위가 생각나는... 물론 새벽녘에 급 선선해지긴 하지만... 감기 걸린 것처럼 콧물이 흘러 내린다. 환절기다.
1. 딸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 용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그런데 사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 용기, 희망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사실 멀게 생각할 일만은 아니다. 당장 식구들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뭔가 허전한 것이다.
2. 교환교수로 런던에 가 있는 선배, 멕시코 여행 사진을 올린 지인, 학술대회 참석차 자메이카에 다녀온 노교수님.... 꼭 이들 때문만은 아니고 평소에 생각하던 바지만... 두 세계가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공유되는 세계와 그렇지 못한 세계. (여기서 '페이스북'은 일반명사다.) 페이스북의 세계를 살고 싶어서, 애를 쓰고 또 써서, 위기관리를 하고 감정관리를 해서 겨우 그 세계를 유지하지만, 수시로 불시에 그 세계 밖으로 내밀려난다. 아니 끌어내려지는 느낌이다. 네가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야. 이 아래야... 그 세계의 비참함을 피하려고 페이스북 안의 세계에 더 몰입하는지도... 그래서 내가 페이스북 내 담벼락을 외면하는지도...
3. 사랑의 어려움, 페이스북 안과 밖의 두 세계... 이 언저리에서 겪는 문제들 대부분은 "관계"의 문제나 "돈'의 문제, 혹은 이 둘이 동시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4. 아 그리고 이기심, 자기중심주의, 편의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받거나 신세지는데는 관대하고 -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 반면에 보답하거나 베푸는데는 인색한 성향 말이다 - 왜 그러 내게 기대해? 같은 반응...
5. 이런 우중충한 생각을 어떻게 페이스북에서 나눌 수 있으랴.
3. 사랑의 어려움, 페이스북 안과 밖의 두 세계... 이 언저리에서 겪는 문제들 대부분은 "관계"의 문제나 "돈'의 문제, 혹은 이 둘이 동시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4. 아 그리고 이기심, 자기중심주의, 편의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받거나 신세지는데는 관대하고 -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 반면에 보답하거나 베푸는데는 인색한 성향 말이다 - 왜 그러 내게 기대해? 같은 반응...
5. 이런 우중충한 생각을 어떻게 페이스북에서 나눌 수 있으랴.
2014년 9월 6일 토요일
2014년 9월 5일 금요일
1. 오늘은 선배인 멘토 2호를 만났다. 1호가 해결해주지 못했언 문제가 속시원히 풀렸다. 할렐루야! 늘 돌고 돌아, 또 돌고 돌아.... 출발점을 벗어나지 못한 했다면 오늘 비로소 그 출발점의 그 endless circle 밖으로 한 발짝 내딛은 느낌이다. 그렇다. 아직까진 느낌일 뿐이다. 여하튼 한 단계 올라선 것만은 분명하다. 업그레이드.
2. 건국대 앞에서 선배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건국대 앞의 그 먹자골목 혹은 유흥가 포스는 실로 엄청났다. 대학 앞 먹자골목이라고 얘기하기 뭣할 정도로 잘 '발달된'... 그래서 짜증났고 좀 심하게 표현하면 역겨웠다. 그렇다. 꼰대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 앞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 즈음에도 대학가가 왜 이리 향락적이며 퇴폐적이냐고 지적질하던 꼰대들이 있었으니까. 그 바통을 내가 이어받은 셈인가? 여하튼 보기 좋지 않았다. 족발집엘 갔는데 격은 또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분당에서 직장인들과 가던 곳에 비해서 훨씬 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2. 건국대 앞에서 선배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건국대 앞의 그 먹자골목 혹은 유흥가 포스는 실로 엄청났다. 대학 앞 먹자골목이라고 얘기하기 뭣할 정도로 잘 '발달된'... 그래서 짜증났고 좀 심하게 표현하면 역겨웠다. 그렇다. 꼰대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 앞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 즈음에도 대학가가 왜 이리 향락적이며 퇴폐적이냐고 지적질하던 꼰대들이 있었으니까. 그 바통을 내가 이어받은 셈인가? 여하튼 보기 좋지 않았다. 족발집엘 갔는데 격은 또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분당에서 직장인들과 가던 곳에 비해서 훨씬 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2014년 9월 4일 목요일
1. 오늘 멘토를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방향 전환을 시도하면서 내가 던진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서 지난 몇 주 동안 얘기를 나누는데 뭔가 내가 감당하기 힘든 방향으로 쏠리는 것이다. 오늘 그 방향을 바로 잡았다. 내가 한고집하니까... 다시 출발점 그 언저리로 돌아온 셈이다. 헛수고를 한 것 아닌겠지만 지난 몇 주 동안 애쓴걸 생각하면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걸 피할 수 없다. 불안함도 있다. 방향을 또 다시 틀게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가장 잘 알고 잘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건 분명하다. 다만 그동안 집요함이 부족했는데, 이젠 좀 끈질기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걸 못해서 또 다시 방향을 트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2. 약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모처럼 달리기를 나섰다. 몸도 운동을 간절하게 원하는 상태였고, 의욕도 있어서 10km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왠걸... 몸이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뛰다 걷다 애초 목표의 절반 정도만 달성했다. 역시 몸은 거짓말을 못하나보다.
3. 어떤 것을 강조 또 강조하고, 또 애써서 가르친다면 그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탓일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 대한 존경,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반면에 '자식에 대한 사랑' '손자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굳이 강조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그건 덜 중요해서? 노우. 그건 시키지 않아도 잘 하니까. 하지말라고 해도 잘 하니까. 하기 어려운 것,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앙 역시. 그 본성을 거스르고, 본성의 장벽을 뚫고 그 경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뭔가 초월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 묘한 기분의 정체는? 원인은?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한 선배와 맥주나 한 잔 해야 풀릴 모양이다.
2. 약간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모처럼 달리기를 나섰다. 몸도 운동을 간절하게 원하는 상태였고, 의욕도 있어서 10km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왠걸... 몸이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뛰다 걷다 애초 목표의 절반 정도만 달성했다. 역시 몸은 거짓말을 못하나보다.
3. 어떤 것을 강조 또 강조하고, 또 애써서 가르친다면 그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탓일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 대한 존경,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반면에 '자식에 대한 사랑' '손자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굳이 강조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그건 덜 중요해서? 노우. 그건 시키지 않아도 잘 하니까. 하지말라고 해도 잘 하니까. 하기 어려운 것,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앙 역시. 그 본성을 거스르고, 본성의 장벽을 뚫고 그 경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뭔가 초월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 묘한 기분의 정체는? 원인은?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한 선배와 맥주나 한 잔 해야 풀릴 모양이다.
정용섭 목사님의 언제 들어도 명쾌한(?) 설명!
"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나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쯤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공부하고 경험한 세상은 초월적 인격신의 개입이 불가능하다. 세상이 자체의 내재적 작동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지금 나타나는 교회 현상에 국한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짚겠다.
우선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때의 그 인격은 반드시 인간의 한 속성인 그 인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고대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철학이 밝혀보려 했던 그 근원의 총체가 곧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인격 개념이라도 봐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은 장자가 말하는 도나 자연일 수 있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일 수 있고,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일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철학이 세상의 궁극적인 것을 여전히 다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인격신이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관계다. 그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나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집단적 히스테리 현상쯤으로 보일 것이다. 특히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공부하고 경험한 세상은 초월적 인격신의 개입이 불가능하다. 세상이 자체의 내재적 작동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지금 나타나는 교회 현상에 국한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짚겠다.
우선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때의 그 인격은 반드시 인간의 한 속성인 그 인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고대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철학이 밝혀보려 했던 그 근원의 총체가 곧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인격 개념이라도 봐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은 장자가 말하는 도나 자연일 수 있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일 수 있고,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일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철학이 세상의 궁극적인 것을 여전히 다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인격신이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관계다. 그 하나님은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주제를 장악하는 글쓰기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만난 글.... 역시 문제의식 혹은 관심과 주제, 주장을 구분하라는 이야기.
" - 목차를 구성하는 게 더럽게 어려웠던 이유는 쓰고자 하는 주제를 장악하지 못해서 였다
" - 목차를 구성하는 게 더럽게 어려웠던 이유는 쓰고자 하는 주제를 장악하지 못해서 였다
이강룡,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서 시작하여 한국어 실력에서 완성된다." (10)
"나는 이 책에서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뿐 아니라, 외국어 투 표현을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바루는 일이라든지, 전문 영역의 용어를 교양 영역의 용어로 바꾸는 과정까지도 번역이라고 넓게 규정했다. 한국인이 한국어 문장을 읽고서도 쉽게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둘 중 한 군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원문의 언어인 출발어의 맥락이 잘 옮겨지지 않았거나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인 도착어의 맥락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이 책의 주제는 공부하는 번역자가 되자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양편을 두루 살펴야 하는 고된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려면 꾸준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12)
"좋은 글은 주제가 뚜렷하다. ... 좋은 글은 문제의식에만 머물지 않고 주제를 잘 반영한다. 구상과 기획이 다르듯 문제의식과 주제도 다르다. 문제의식은 넓고 희미하지만 주제는 좁고 뚜렷하다. 언론 매체의 속보 기사가 문제의식을 반영한 글이라면 기획 기사는 주제를 표출한 글이다. 저자의 바람과 글의 목적이 주제에 집약돼있다."(15)
"문제의식은 거창한데 주제는 소박하다. 사회를 조금씩 개선하는 힘은 이 소박한 주제에서 나온다. ... 문제의식이 바로 주제라도 되는 양 혼동하여 논지를 전개하면 곤란하다. 조리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에서 이 문제를 적절히 지적했다. 상대 진영을 헐뜯거나 반박하는 데 머물지 말고 새로운 개념틀을 짜고 제안하라는 것이다." (18 - 19)
"추측이나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서 주제를 도출하는 작품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노고가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20)
"위기 관리 능력이란 미련 관리 능력이나 욕심 관리 능력... 문제의식을 잘 파악한 다음 범위를 좁히고 덜 중요한 사항을 버리다 보면 주제라는 고갱이만 남는다."(20)
"주제는 대상의 한계를 소상히 지적해 주려는 태도에서도 나온다. 토론이나 논설에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그 대상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밝혀 드러내면 된다. ... 한계를 지적하면 생산적인 비판이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비판하면 자기 한계도 함께 노출하게 되므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다시 지적해 줄 수 있다." (21 - 22)
"당신이 얻고자 하는 지식을 담은 국내 저작물이 없으면 당신이 하나 만들라. 아니면 당신이 하나 번역하라. 그러면 최초로 만든 그 자료의 내용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거나 제안할 것이며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적 자산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24)
"나는 이 책에서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뿐 아니라, 외국어 투 표현을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바루는 일이라든지, 전문 영역의 용어를 교양 영역의 용어로 바꾸는 과정까지도 번역이라고 넓게 규정했다. 한국인이 한국어 문장을 읽고서도 쉽게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둘 중 한 군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원문의 언어인 출발어의 맥락이 잘 옮겨지지 않았거나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인 도착어의 맥락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이 책의 주제는 공부하는 번역자가 되자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양편을 두루 살펴야 하는 고된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려면 꾸준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12)
"좋은 글은 주제가 뚜렷하다. ... 좋은 글은 문제의식에만 머물지 않고 주제를 잘 반영한다. 구상과 기획이 다르듯 문제의식과 주제도 다르다. 문제의식은 넓고 희미하지만 주제는 좁고 뚜렷하다. 언론 매체의 속보 기사가 문제의식을 반영한 글이라면 기획 기사는 주제를 표출한 글이다. 저자의 바람과 글의 목적이 주제에 집약돼있다."(15)
"문제의식은 거창한데 주제는 소박하다. 사회를 조금씩 개선하는 힘은 이 소박한 주제에서 나온다. ... 문제의식이 바로 주제라도 되는 양 혼동하여 논지를 전개하면 곤란하다. 조리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에서 이 문제를 적절히 지적했다. 상대 진영을 헐뜯거나 반박하는 데 머물지 말고 새로운 개념틀을 짜고 제안하라는 것이다." (18 - 19)
"추측이나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서 주제를 도출하는 작품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노고가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20)
"위기 관리 능력이란 미련 관리 능력이나 욕심 관리 능력... 문제의식을 잘 파악한 다음 범위를 좁히고 덜 중요한 사항을 버리다 보면 주제라는 고갱이만 남는다."(20)
"주제는 대상의 한계를 소상히 지적해 주려는 태도에서도 나온다. 토론이나 논설에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그 대상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밝혀 드러내면 된다. ... 한계를 지적하면 생산적인 비판이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비판하면 자기 한계도 함께 노출하게 되므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다른 사람이 다시 지적해 줄 수 있다." (21 - 22)
"당신이 얻고자 하는 지식을 담은 국내 저작물이 없으면 당신이 하나 만들라. 아니면 당신이 하나 번역하라. 그러면 최초로 만든 그 자료의 내용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거나 제안할 것이며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적 자산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24)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예수의 메시아 사건도,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건도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유일회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해나갈 뿐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야 드라나게 될 것입니다." (정용섭, 기독교가 뭐꼬?, 63 - 65)
이게 최선의 설명일까? 모를 일이다. 알다가고 모를 일이다.
십자가, 부활 사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의 모임이 기독교가 된 것인데... 근거가 그것 뿐이라면... 너무 빈약한 것 아닌가?
"예수의 메시아 사건도,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건도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유일회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해나갈 뿐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야 드라나게 될 것입니다." (정용섭, 기독교가 뭐꼬?, 63 - 65)
이게 최선의 설명일까? 모를 일이다. 알다가고 모를 일이다.
십자가, 부활 사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의 모임이 기독교가 된 것인데... 근거가 그것 뿐이라면... 너무 빈약한 것 아닌가?
강한 것은 오히려 잘 부러진다. 어느 정도까진 외부 압력에 잘 버티지만, 압력이 조금만 더 세지만 바로 그 강함때문에 쉽게 부러지는 것이다. 단박에... 깨긋하게...
고위공직자나 정치인들의 삶이 사회적 검증이 대상이 될 때 평소에 도덕성을 강조했고 또 완벽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은 작은 허물이 드러나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그래서 때를 일부러 묻히기도 힘들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유지하는 그 강함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정도는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고위공직자나 정치인들의 삶이 사회적 검증이 대상이 될 때 평소에 도덕성을 강조했고 또 완벽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은 작은 허물이 드러나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그래서 때를 일부러 묻히기도 힘들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유지하는 그 강함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정도는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글은 주제의 범위는 좁히고 깊고 끈질기에 물고 늘어진 글이다."(이강룡) 페친이 극찬을 해서 훑어 본 허타도의 대작 "주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났다.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처음 몇 페이지에 논의 배경과 자신의 논지를 잘 소개해주어서 그 부분만 읽고서도 책을 이해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하지만 몇몇 리뷰 들을 읽어보니 국역으로 1199쪽이나 되는 분량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김요한 대표의 경우 100쪽으로 줄여서 논증할 수 있다고 하기도 했고... 이런 평도 있다.
"너무 두껍습니다. 너무 방대한 양을 다루다보니 논지가 흐려지고 곁가지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큰 틀에서는 모두 관련된 본문과 논의들이지만 전체적 그림을 그리고 논지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큰 방해가 됩니다."
그렇다. 테제는 분명하고 간명하지만, 논증이 너무 늘어지는 것이다. 독자로선 길을 잃기 쉽다. 이강룡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주제의 범위는 충분히 좁고 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는 것. 과유불급.
여하튼 핵심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는 것만큼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주장을 핵심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이 핵심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기독교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단순해 보이고 너무도 분명해 보여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주장일지라도 깊게 파헤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말 특별해 보이고, 새로워 보이고, 신선해 보이고... 그런 이야기들에 혹하기 쉽지만 사실 그런 주장들은 대개 현상의 말단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핵심,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뻔해 보이는 것들을 깊게 생각하기 힘들고 귀찮으니까 더 가깝고, 쉽고, 눈에 띄는 이슈들로 눈길을 주는 것이다.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듯. 예를 들어 민주주의, 자본주의 중심으로 사회를 본다고 할 때...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개념에 안주하느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거버넌스, 자본주의 3.0, 피로사회 같은 개념들은 반면에 얼마나 신선해 보이는가... 핵심적인 개념에 안주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핵심에 대한 천착없이 유행에만 휘둘리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현대사회는 기능적 분화 사회다" "과학은 사회의 기능체계다" 같은 주장 역시 너무도 상식적이거나 아님 고리타분해서 그냥 전제로 삼거나 아니면 쉽게 비판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단순해보이는 주장을 깊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루만 이론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핵심을 놓치고서 지엽적이거나 유행하는 주제로 - 예를 들어 복지, 문화, 의미론, 위험 등등 - 만족해선 곤란하다.
"너무 두껍습니다. 너무 방대한 양을 다루다보니 논지가 흐려지고 곁가지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큰 틀에서는 모두 관련된 본문과 논의들이지만 전체적 그림을 그리고 논지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큰 방해가 됩니다."
그렇다. 테제는 분명하고 간명하지만, 논증이 너무 늘어지는 것이다. 독자로선 길을 잃기 쉽다. 이강룡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주제의 범위는 충분히 좁고 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는 것. 과유불급.
여하튼 핵심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는 것만큼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주장을 핵심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이 핵심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기독교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단순해 보이고 너무도 분명해 보여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주장일지라도 깊게 파헤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말 특별해 보이고, 새로워 보이고, 신선해 보이고... 그런 이야기들에 혹하기 쉽지만 사실 그런 주장들은 대개 현상의 말단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핵심,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뻔해 보이는 것들을 깊게 생각하기 힘들고 귀찮으니까 더 가깝고, 쉽고, 눈에 띄는 이슈들로 눈길을 주는 것이다.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듯. 예를 들어 민주주의, 자본주의 중심으로 사회를 본다고 할 때...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개념에 안주하느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거버넌스, 자본주의 3.0, 피로사회 같은 개념들은 반면에 얼마나 신선해 보이는가... 핵심적인 개념에 안주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핵심에 대한 천착없이 유행에만 휘둘리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현대사회는 기능적 분화 사회다" "과학은 사회의 기능체계다" 같은 주장 역시 너무도 상식적이거나 아님 고리타분해서 그냥 전제로 삼거나 아니면 쉽게 비판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단순해보이는 주장을 깊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루만 이론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핵심을 놓치고서 지엽적이거나 유행하는 주제로 - 예를 들어 복지, 문화, 의미론, 위험 등등 - 만족해선 곤란하다.
2014년 9월 2일 화요일
이강룡 강연 중
좋은 글이란?
1. 좋은 글은 주제의 범위는 좁히고 깊고 끈질기에 물고 늘어진 글이다.
ex. 왼쪽 무릎 연골 파열에 관한 보고서.
2. 좋은 글은 시간과 노고가 많이 들어간 글이다. ex. 괴테의 파우스트는 20대 초반에 구상을 시작하여 82세에 완성했다. 60여년의 노고가 들어간 글이다.
3. 좋은 글은 주장이 담겨있지 않다. 근거만으로 주장을 담는다.
ex. 환경을 보호합시다 (X) -> 저는 텀플러를 쓴 지 1년이 되었습니다.(O)
ex. 중국산 제품을 쓰지 맙시다 (X) -> 중국산 제품없이 일주일 살아보기 (O)
좋은 글이란?
1. 좋은 글은 주제의 범위는 좁히고 깊고 끈질기에 물고 늘어진 글이다.
ex. 왼쪽 무릎 연골 파열에 관한 보고서.
2. 좋은 글은 시간과 노고가 많이 들어간 글이다. ex. 괴테의 파우스트는 20대 초반에 구상을 시작하여 82세에 완성했다. 60여년의 노고가 들어간 글이다.
3. 좋은 글은 주장이 담겨있지 않다. 근거만으로 주장을 담는다.
ex. 환경을 보호합시다 (X) -> 저는 텀플러를 쓴 지 1년이 되었습니다.(O)
ex. 중국산 제품을 쓰지 맙시다 (X) -> 중국산 제품없이 일주일 살아보기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