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2일 월요일

Being radical...

"지금까지 생명윤리 논의를 살펴 볼 때, ...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데서 시작하는 위기담론이 생명윤리를 논하는 가장 흔한 방식 중의 하나인 듯하다.... 문제는 새로운 현상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는 틀림없이 억압적이고 부당할 수밖에 없는 낡은 관념들로 종종 회귀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 상식... 상식... " (13)


이런 비판을 하지만 이 책은 모두 "위기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극단적인 사례들... 물론 누군가에겐 절실하고 간절한 일들이겠지만...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윤리"가 아닌 "개개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일상 속의 윤리"를 강조하는데... 이 책들이 얘기하고 있는 사례들은 일상에서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낯설다.

"흔히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 책은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우리의 일상과 자유에 관한 '질문'으로서 다시 읽어낸다. 우리는 해답이 과연 합당한가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바이오테크놀로지를 해답으로 보이게 만드는 문제설정,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달려있다." (18f)

흠. 훌륭한 지적이다. 일상의 관점에서 문제 자체를 다시 성찰한다. 일상. 도대체 어떤 일상인가?

이런 접근은 역시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위기담론이 자극적인 것처럼, 위기 담론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를 성찰하고 바꾸자는 주장 역시 자극적이기 그지 없다. 급진적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급진적 루만"이 생각났다.  "The Radical Luhmann". 놀랍지 않게도 마지막 결론 장의 부제가 "Nec spe nec metu: Neither Hope nor Fear"다. 이게 더 급진적이지 않은가? 위기를 강조하거나 위기담론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는 주장보다 말이다.

밴쿠버에서 열렸던 학회가 생각났다. 별 반향 없었던,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허접 발표를 마치고 다른 세션을 며칠 동안 기웃거렸다. 그 많은 세션의 그 많은 발표 중에서 듣고 싶었던 발표가 단 하나도 없었다. 억지로 들었던 발표들 중에서 지금 기억에 남는 발표 역시 단 하나도 없었다. 왜? 왜 관심을 갖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발표가 미시적인 주제에 대한 사례연구에 가까웠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치료불가능한 거시적 관점 선호자니까. (여기에서 '이론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으리라. 미시에 대한 이론가도 있으니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갖는 장점을 극대화하면 될 일이다. 극단적이거나 예외적인 사건들을 강조하거나 급진성, 규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만 내 길은 아닌 것이다. 잘하는 것을 잘하기. 그게 정답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