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에 대한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 좀 길지만...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피에서. 링크)
"바울 시대의 동성애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버리고 남자까지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롬 1:26,27, 공동번역). 비록 바울이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동성애 현상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라고 한다면 텍스트를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동성애를 죄(Sin)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죄의 결과라고 진술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6절).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이런 망측한 짓을 한다는 진술만 보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는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을 논증하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근원적인 것은 죄, 곧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는 동성애 이외에도 부정, 부패, 탐욕, 악독, 시기, 살의, 분쟁 등등,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본문이 포함된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22-24).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이 동성애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부패에 연루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문제 삼습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나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한결같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결국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라는 게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바울의 진술이 동성애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자의 근본적인 의도를 놓치고 지엽적인 것을 중심적인 것으로 끌어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로마 성윤리에 근거해서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이 동성애 문제를 신앙의 근본 문제로 삼아 깊이 성찰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건전한 윤리관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습니다. 원래 헬라인들은 출산을 목적으로만 아내와 성관계를 나누었고, 대신 소년이나 젊은이들과 여러 방식의 연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플라톤도 성인 남자와 소년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완전한 사랑의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는 거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동성애 현상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의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르타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로마 도덕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성애는 사치와 방탕에 연관된다는 점과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마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성애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동성애와 로마 시대의 동성애는 좀 구분되어야 하는데, 바울은 당연히 로마의 동성애 현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우상 숭배의 결과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성서윤리의 적용 문제
목사님께서는 그래도 동성애는 나쁜 게 아니냐, 하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설교할 때 이런 점에서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말고 너울로 가리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습관이 그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지금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바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곧 우리에게도 여전히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문제는 앞에서 ‘해석’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언급했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의 동성애 언급은 그가 이것을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술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이해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규범’으로 강요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선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퍼니쉬(Victor Paul Furnish)의 <바울의 네 가지 윤리적 교훈- 결혼, 동성애, 교회와 여성, 정치, 이희숙 역, 종로서적, 1994>에서 제시된 결론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로마서 1:26,27을 취급해야 할 기준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내립니다.
1)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동성애의 주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거기서 찾을 수 없다.
2) 바울이 동성애의 심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현대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시대와 달리 오늘은 동성애의 심리적 요소, 사회적 요소, 생물학적 요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근본적인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 역시 유효하다.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오늘 우리에게 타당하다는 말이다.
4) 동성애 행위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그것과 관련이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 맥락을 간과한 채 단독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동성애는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징후’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악의 하나로 언급되어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저는 퍼니쉬의 대답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논점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바울이 동성애를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게 하나이며, 이런 문제는 전체적인 신학 안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하용조)라거나 “이 시대에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에이즈입니다.”(이동원)라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동성애가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회 심리적 요인에 의한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의 동성애자들이 로마 시대의 동성애자들처럼 사치와 정욕에 치우쳐 있다거나 상대방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적 취향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아무도 바울의 비난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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