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30일 월요일

감정 노동에 대한 이원적 태도?

가끔씩 들르는 파리바케트. 친절하지 않다. 특히, 젊은, 아니 어린 여직원들이... 손님이 와도 인사는 건성, 뭘 물어봐도 대부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불만이 가득한 듯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애써서 친절하지 않기" "감정노동에서 자유롭기"가 그 매장의 '문화'라도 되는 양... 심지어 며칠 전 방문에선 이 매장은 왜 이 모양이냐고 따질 마음까지 먹을 정도였으니... 앞으론 급한 일  아니면 가지 않는 것으로 내 반감을 '표현'하려고 한다.
난 이들에게서 손님은 왕이니까 왕같은 대접을 해 주길 기대한 것일까? 그들이 '감정노동'을 해주기를?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감정노동(Emortional Labor)은 "직장인이 사람을 대하는 일을 수행할 때에 조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행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자면 난 그들에게 감정노동을 요구, 아니 적어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러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인가? 아침에 남편, 아내와 싸우고 온 직원이 그 심리상태를 애써서 감추지 않고 매장을 방문한 손님에 대한 태도에 '반영'하는 것?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노동, 특히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감정노동은 좀  더 좁게 정의되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어떤 심리상태로 출근을 했건 간에 손님에게 (가능한 밝은 얼굴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는 게 감정노동은 아닐테니. 이런 인사 혹은 손님 응대 '노동'은 그저 '상식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상적, 의례화된 행위일 뿐이다. 손님이 뭘 물을 때 가능한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 역시...

감정노동이 정말 반갑지 않은 노동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예를 들어 진상 손님, 부당한 고객의 요구나 태도에 대해서도 그저 수용해야만 하는 그런 경우 아닐까? 어떤 요구가 부당한지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대부분 '상식'선에서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저 내 상식이 지켜지길 기대하는 것일 뿐이고, 그런 상식이 깨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다. 지하철에서 내가 내리기도 전에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내리는 문 옆에 서서 미동도 않는 사람들을 볼 때처럼... 혹은 좌회전, 후회전 깜빡이를 너무 아끼거나, 좁은 도로 1차선에서 무작정 정차하고 있는 차량들을 볼 때처럼...  대한민국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살려면 '상식'의 수준을 떨어트려야 한다. 저 아래 쪽으로...
아. 물론 이런 일상에서 얻는 스트레스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도 뿌끄러움은 커냥 큰소리를 지르는 이들을 볼 때...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한 정권이라는... 언어 모욕을 하는 낯짝들을 볼 때는 내 스트레스 지수는 급상승한다. 그런 기준도... 낮춰야 한다. 저 아래 쪽으로...
늦은 밤. 어제 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 난 탓에 오늘 저녁에 또 늦게 자게 된다. 다른 일 때문에 못 본 'K팝스타' 마지막 회를 뒤늦게 챙겨봤다. 깨끗한 목소리를 가졌고 고음을 탁월하게 내는 박지민이 우승을 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박지민의 노래를 찾아서 두 번 듣게 되지는 않는다. 이하이는 개성이 강하고 대신 깊이가 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는다. 그 나이에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도대체 뭘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런데 그 나이에 그런 깊이 있는 소리를 내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지? 그건 정말 신이 내린 능력일까? 생각이 나름 있다고 하더라도 저 나이의 한계가 분명한데.... 여하튼 목소리와 연령이 도저히 연결이 안된다. 나이도 적당히 있으며서 그 친구만큼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팬이 될텐데...

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약속시간에 쫓겨가면서 본 야구경기. 결국 지다. 이런저런 일로 복잡한 심사에 청량제가 되길 기대했건만... 짜증만 더 쌓인다. 야구 같은 운동경기야말로 결과론이 지배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결과에 따라 과정이 해석되는... 대부분의 경우...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모든 근대국가는 발전국가다". 이런 견해는 자본주의의 지속성 그리고 지배성 - 결국, 발전, 성장 같은 지향점은 모든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이 있다 -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 국가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니 좁은 의미의 발전국가, 즉 아시아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국가의 친화성이 이해된다. 황우석 사태 이후에도 그런 혼란은 발견된다. 도대체 성장, 발전에 대한 그 집착은 발전국가의 유산인가 - 박정희 패러다임! - 아니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인가?

ps) 기능/성과 (Funktion/Leistung) 구분을 적용하자면... 발전국가적 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서구적 모델에서는 '기능'에 대한 고려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태이고, 한국의 경우는 '성과'에 대한 지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질투가 사랑에 앞서는 건, 부정성이 긍정성보다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뭔소리?)"

어떤 페친의 글. 비슷한 어디에선가 내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정의 힘'이라고 했던가? 긴 긍정적인 좋은 이야기에 부정적인 언급이 조금 섞여있다면 그 조금 섞이 부정적인 내용이 다른 내용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남는다는... 페친은 부정성이 더 '근원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것 같다. 질투가 사랑에 앞서는 것도... 같은 맥라겡서 이해할 수 있겠고...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놀이터로서 이야기판

"놀이터는 내가 즐겁게 놀 수 있는 곳"

한국 사회의 현실 분석!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 대개 사회과학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그런 것일 테다. 어떤 현실에 대한 것인가가 중요하다. 학자가 제시할 전문지식, 전문적 식견의 대상이 되는 그런 현실은 대개 구체적으로 구획지어져 있다. 그 구획은 매우 다양한 기준으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뉠 수 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복지정책, 고용정책, 과학정책, 과학사회학, 루만의 사회이론, 한국 근대성, 국가론, 국가연구, 사회통합연구, 정치사회학 등등.
중요한건 어떤 이야기판이건 기본적으로 놀이터여야 할 것이다. 전장, 싸움터, 일터... 뭐 그런 점들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이야기판이 없다면, 놀이터를 하나 새로 만들면된다. 함께 놀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어 모으면 되고...
원하진 않았는데 어떤 놀이터에 끼게 될 수도 있다.  그 안에 있는 동안 최대한 재미있게 놀면 된다. 꿔다 논 보리자루 마냥 있어봐야 나만 손해. 다만 가능한 내가 주도할 수 있고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터로 빨리 옮겨 갈 필요는 있다.
봄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난 다음 날.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청명한 하늘과 약간은 초여름 냄새나는 햇볕을 즐기며 사무실에 나오다. 들뜬 마음에 시급한 일이 있음에도 여유를 한 번 부려본다.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세상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세상은 한 두가지에 집중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재벌이 모두 망하면, MB가 물러나면 세상이 눈에 띄게 좋아질까? SNS가 과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노우, 네버!! 경제중심주의/결정론, 정치중심주의/결정론, 미디어중심주의/결정론...

정치의 과잉, 정치중심주의적 시각으로 최근 수년 동안 체제론 논쟁이란게 지속되고 있는 모양인데... 아마 창비가 바람을 넣은 듯. 87년 체제, 97년 체제, 08년 체제 등등. 글쎄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근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나보다. 도대체 2012년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올 겨울 정권교체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많다. 정권교체로 세상이 확 바뀌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네씨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ㅠㅠ
맑스주의 등 경제결정론을 비롯해서 결정론에는 다양한 버전이 있다. 여하튼 어떤 결정론으로든 그런 방식으로 재단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다.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결정론이 있다면 그것은 복잡성 결정론...

거시적으로 보면 오히려 미시적인 이슈 혹은 사건의 의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결정론적 시각으로 볼 때 놓치는 지점들을 지적할 수도 있고... 때로는 너무 미시적이거나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이라 큰 '임팩트'를 줄 수는 없겠지만...

생명윤리, 연구윤리 같은 주제도 그러하다. 그 주제에서 우리는 복잡해져가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읽을 수 있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 장기적인 전망도 가져볼 수 있다.
雨中 집안이다. 조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수년 전 고향 논산에 내려 가서 살고 있는 소설가 박범신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양반 왈. "돌아간다는 건 없는 것 같아. 여기만 하더라도 예전의 그 동네가 아니거든..." 박 선생을 찾아간 소설가 천운영씨 왈. "서울 근교 경기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옛 동네의 모습 자체가 남아있질 않아요. 여긴 그나마 나은 것 같네요. 변한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그런 게 현대 한국 작가들에게 자양분이지 않을까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렇다. 돌아간다는 건... '시간'변수를 고려할 때 불가능하다. 변증법 얘기할 때 등장하던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 같은 강물에 발을 두번 담글 수 없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 같다. 그러니... 첫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다.
"모든 근대국가는 발전국가다"라는 명제에 충실하자면 발전국가인가 아닌가는 성립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발전국가라는 개념을 쓰면서 논의를 전개하려면 더 좁은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발전국가라고 할 때 그것은 강한 국가 개입이라는 점에서 복지국과 일부 공유하는 점이 있고, 이 두 국가 개념의 다른 편에 신자유주의 국가가 있다. 물론 실제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최소한의 간섭만을 하는 그런 국가는 이상에 가깝고 실제로는 국가의 개입의 분야나 방식이 달라지는 '규제국가'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신자유주의국가나 규제국가의 특징은 발전국가나 복지국가처럼 개입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데 있다. 그 방향은 '시장'에서 정해질 뿐이고, 국가는 기껏 시장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교통정리만을 할 뿐이라는 것. 현실에서 순수한 신자유주의국가나 규제국가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발전, 성장을 지향하지 않는 국가가 과연 있을까?
여기에서 한 가지... 신자유주의국가는 참 애매한 개념이긴 하다. 한편으론 자유방임, 최소간섭, 탈규제 같은 점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지향점이 없는, 굳이 있다면  최소간섭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밑엔 그렇게 했을 때 경제가 가장 잘 성장한다는 이념을 깔고 있다. 그러니 발전지향이라는 점에서는 발전국가와 다르지 않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점은... 발전국가가 경제성장이 국가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우고 결국 구성원 전체에 이런 저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을 지향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성장의 열매는 누구에게나 돌아가지 않는다. 불평등한 분배 정도가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 경향이 더 심화되는 것이다. 양극화!
복지국가는 낙오자나 배제된 이들에 대한 포함과 참여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발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그 역시 복지를 위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경제 발전, 성장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보면 신자유주의국가와 복지국가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개념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서 '부'를 키우되 대신 국가가 그 부의 열매를 충분히 거둬서 취약계층에 나눠줄 수 있으니까. 바로 이런 방식이 '제3의 길' '생산적 복지'로 표현되는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국가는 시장과 생산 측면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고, 복지국가는 분배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니까 굳이 상충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생산과 분배, 두 차원에 대해서 모두 일관된 접근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물론 발전국가와 신자유주의국가의 혼합도 가능하다. 싱가폴 같은 경우를 그렇게 볼 수 있을 듯.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장 독특한 입장은 '규제국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규제국가의 이념을 교통경찰 같은 역할로 이해한다면... 관계들이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소통의 흐름을 규율하는 그런 역할이라는 점에서 굳이 발전이나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루만이 이런 '쿨'한 국가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실 국가에선 이런 다양한 측면들이 대부분 동시에 구현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 어느 시기에서 어떤 점들이 더 강조되고, 어떤 점들은 퇴행적인 요소가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발전국가는 복지국가 그 이상의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

ㄱ) 국가 기구의 동원
- 강력한 산업정책의 존재 (즉 시장과 시장에 참여하는 행위자의 관계에 정부가 개입하는 정도가 크다는 점).
- 합리적 경제 발전/성장 계획을 세우고 관철시키는 강력한 경제계획기구와 관료제의 존재.
- 산업정책이 아닌 분야의 정책도 궁극적으로 이 경정성장, 산업발전을 위해서 조정된다는 점 [국가 내부의 동원]

ㄴ) 경제 주체의 동원
- 기업(자본)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기
- 금융 통제를 통해서: 기업 조정의 수단은 세율 조정 같은 간접적 수단보다는 정부의 보조금 지급 같은 직접적... 자본의 부족한 당시 기업이 형편...
- 노동은 억압하고...

ㄷ) (경제를 제외한) 국가 외부의 동원
- 정치, 정책 뿐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발전, 성장을 위해서 동원됨 (과학, 출산 등등)
- 이 경우 발전 이데올로기 교육이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점. 국가주의/민족주의를 띠기도 한다.  (과학국가주의)

2012년 4월 23일 월요일

'발전주의' '성장/성공/출세제일주의'가 결국엔 종말을 맞이하길 기대하지만 (탈근대!) 그게 하루 아침에 될 일이 아니니, 과도기 전략으로 발전주의 길들이기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발전주의를 잘 길들인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물론 선진국이라고해도 발전주의를 벗어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선진국에선 발전주의가 야만적으로 활개치지 못하도록 이런 저런 족쇄를 채워 놓는다. 물론 선진국, 그리고 선진국의 이런 저런 조직들은 그런 족쇄를 피해서 '덜 선진국'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덜 선진국을 착취하는 것... 때로는 이런 저런 족쇄를 이들 덜선진국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왜? 어느 정도로는 통일되어야 착취하기 더 편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도입된 족쇄가 발전주의를 길들이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좋건 싫건 간에 이런 저런 까닭에 선진국이 발전주의를 길들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족쇄 자체를 외면하기는 힘들다. 발전주의를 국가가 앞장서서 전파하는 발전국가의 경우 전형적인 야만적, 초기 발전국가의 시기를 보내고 후기 발전주의이 모습을 띠게 된다. 후기발전주의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전기발전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발전주의를 제한하는 족쇄의 도입으로 정치지형이 바뀌고, 행위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더 넓어지게 된다. 하여... 혼란스러움은 더해지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족쇄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수밖에... 어떻게? 저항으로, 계몽으로, 교육으로...
'발전주의'를 길들인다는 건 결국 발전주의를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주체를 길들인다는 말씀! 하지만 발전주의를 매개로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하고 있거너 그렇지 않거나 간에) 어느 한 주체만을 집중적으로 길들이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발전주의적 국가를 길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국가(행정부, 의회)의 주요 결정권자들은 선거에 의해서 뽑히거나 선거의 영향을 받는다. 일상적으로는 여론에 영향을 받고... 여론은 주로 매스미디어에 의해서 형성되고... 무엇인가를 정치적으로 바꾸려면 이 모든 메커니즘, 권력의 순환방향 등이 순조롭게 작용해야 가능하다. '발전주의'는 근대 정치에 태생적으로 배태된 문화이자 이념이다. 그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피가 필요했다. 대표적인 도전이 '좌파' 이념이었고, 최근에는 '녹색' 이념도 강세고... 한반도에서는 남북분단 때문에 '좌파' 전통이 근절되다시피했고 그 이후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고... (한국 주류 여론의 노동운동, 파업 등에 대한 저 부정적 견해를 보라!)... '녹색'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소수 중 소수이고... (이번 총선 비례대표를 위한 정당투표에서 녹색당은 0.43%를 얻었다). 복지를 새누리당, 그네씨도 입에 올리지만 그건 그야말로 '립서비스'일 뿐, 실제 정책에 대한 주류 여론은 부정적이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문제는 이런 발전주의에 발목을 잡히면 그렇게 좋아하는 발전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 그 점을 알아챈 국가가 발전주의에 가벼운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런 국가들을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한국이 처한 상황도 모른 채 그저 철 지난 '발전주의'만 노래하는 이들이 멩박씨... 디제이나, 무현씨도 본질적으로 발전주의 지향이지만 그들은 그래도 좀 세련된 발전주의를 해보려고 애를 썼다. 실용주의, 즉 '아무 생각없음 주의'를 임기 내 실천해온 멩박씨와 그 무리들은 발전주의도 아닌 것이, 신자유주의도 아닌 것이... 그야말로 여기 저기 좌충우돌하다가 임기를 마친다. 유일하게 한 짓은 삽질! 그들에겐 '발전주의'란 이름을 붙여주기조차 아깝다.
여하튼... 발전주의는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발전 이상의 가치 실현을 위해서라도 길들여져야 하고, 언젠가는 무가치한 가치로 여겨져야 한다.
한 단계 높은, 아니 한 단계 더 복잡한 발전 (예를 들어 지식경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 입장에서 발전주의를 길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생명과학 거버넌스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론적으로... 후기 발전주의 국가는 '혼란스러움','어디로 튈 지 예측하기 힘듦'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발전주의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노골적으로 국가가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전주의'이지만 예전처럼 '발전주의'만 가지고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전기 발전주의 국가와 구분된다.

발전, 성장 없는 근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발전주의'일 것이다. 이는 근대성, 근대 정신의 고갱이이기도 하다. '개발주의','성장주의', '성공'지향... 혹은 -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 '진보'라고도 표현되기도 하고...
체계이론의 관점에서도 '발전'은 근대 기능체계의 형성 및 재생산에 필수적인 개념이다. 발전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발전', '성장' 없이는 당장 무너지는 구조를 갖고 있고, 민주주의 정치 역시 발전을 약속하지 않으면 정권 획득 혹은 유지를 보장받을 수 없고, 의료체계는 더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제공해야 하고, 심지어 '발전주의'와 상극에 있을 것같은 생태주의도 발전주의의 터치를 받으면 '웰빙'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대표적으로 성공, 성장 지향이고, 루만은 이를 '기대의 인플레이션'(Anspruchsinfl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발전' '발전주의'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었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다. 근대는 발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장치를 만들어 내었다. 사회운동(특히, 생태운동)은 일방적인 방향을 조정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중요한 구조이고, 복지 제도들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 각종 '책임' 담론 (예컨대 '책임의 원칙')이나 윤리적 접근 (최근 버전으로 '윤리 경영')도 이런 문제점 때문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도한 일방향적 근대화가 근대의 근거자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보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발전, 성장 지향이라는 근대의 본질적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발전 없는 근대는... 그러니까 성립불가능한 형용모순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의 단계를 우리는 '탈근대'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탈근대는 그러니까... 무엇보다 성공, 성장, 발전, 진보를 포기해야 하는 시대다. 그런 시대의 도래를 얼마든지 꿈꿀 수 있다.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런 커다란 이야기,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깨끗하고 안전하고 생태적으로 부담주지 않는 방식으로 의식주를  누리고 (기대치에 차이가 있겠지만 그 수준을 낮춘다면 현 생산력으로도가능하지 않을까?), 충분한 여가시간을 갖는...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의미의 죽음이다. 그러니 적절한 다툼과 갈등, 긴장은 필수요건이기도 하다. 다만 그런 차이가 악화되어서 배제, 죽음, 억압, 기타 파멸적 상태로 이어지지만 않도록...

'발전주의'/'개발주의'라고 이야기하는 맥락은 조금 다르다. 이 경우 발전이나 성장은 대개 '경제적'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경제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발전국가, 발전주의 국가는 그런 경향의 확산에서 국가가 지도적 역할을 하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이런 유형의 국가가 관찰된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발전 없는 근대가 없는 것처럼 근대의 국가는 모두 어느 정도는 발전국가일 수밖에 없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들에만 발전국가라는 특별한 이름을 줘서는 안된다. 물론 발전국가라고 다 같진 않다. 그래서 유독 동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발전국가'라는 이름을 부여할 때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고, 이 경우 어떤 특징을 갖는지 별도로 구분해주면 된다.


ps)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발전국가다"라는 견해를 지원해줄 응원군을 모셨다. 왈러스틴과 칼 폴라니! 여기에 장하준의 이름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인터넷 속 어드메...)

"왈러스틴이 지적했던 것처럼, 경제 발전은 세계 모든 국가들의 공통된 목표였다. 비록 경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은 동일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정권들은 경제 발전을 추구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모든 정권들은 일종의 발전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폴라니를 비롯하여 여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국가의 시장 개입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 내재되어 있었다. 재화와 용역의 생산, 분배와 소비 같은 경제 활동은 정치와 국가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국민 국가가 지배적인 정치체제가 되면서 국가의 경제 개입은 더욱 세련되었고 또한 더욱 포괄적이었다. 비록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정도가 시간적으로 또한 공간적으로 달라졌지만, 경제 활동을 위한 기본적인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국가의 역할이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2012년 4월 21일 토요일

이거 날씨가 원... 벌써 여름 기운이...  좁은 방에 창문을 닫고 있었더니 세상에 땀이 난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낮에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치과에 머무르며 갈아 댄 이빨 쪽이 쑤신다.
분명히 쉽게 잠들기 어려운 그런 밤이다. 아애 맘 편히 먹고서... 몇 시간 어떻게 유익하게 보낼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
호랭이들이 오늘은 졌다. 몇 회 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수준이 낮은 경기였다. 특히 투수들이 볼넷에 폭투에... 호랭이들은 4월을 리빌딩의 기간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지는 경기엔 이런 저런 선수를 시험해 보고... 그렇게 하라고 연습경기, 시범경기가 있는 법인데 그것과 실제 경기와는 차이가 큰 모양이다. 그러니 이번 시즌에 대한 예측이 그렇게 다 빗나가지... 야구는 보면 볼수록 오묘하다. 변수가 많은 운동경기. 1강이라던 삼성이 지금 꼴찌를 다투고 있으니... 야구에 관련된 평가는 대부분 '결과론'이다. 성적이 시원찮은 선수를 끝까지 기용해서 결과가 좋으면 '감독의 뚝심'이고, 좋지 않으면 '팀내 경쟁 부족' '안이함'이다. 선구 교체 시기도 마찬가지이고... 신종길 같은 친구를 보면 참 안될 선수는 안되나 싶다. 희한하게 매번 시범경기를 거치며넛 기대를 갖게 하는데 막상 시즌에 들어서면 안되는... 시즌 경기과 시범경기 혹은 2군 경기간에 실력 차이가 있을텐데 이 선수는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리해도... 내가 언젠가 인용했던 문구가 생각난다. Fail fast and learn from it! 안될 것 같으면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아무나 못하거든...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아침에 지하철 9호선 요금 인상 문제를 언급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비슷한 사례를 소개한 짧은 글을 읽었다. FTA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시장개방, 민영화, 국가의 역할 등등. 이 주제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그 성격과 내용이 매우 분명하다. 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안을 기대하게 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모름지기 연구자라면 자신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주제에 대한 담론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도 그런 점이 명쾌하게 이해되어야 하고...
시작이 반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반'씩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시작은 제대로된 시작이어야 한다. 주제를 단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연구라야 시작만으로 이미 반은 달성한 연구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
루만의 경우... 그의 일생의 주제는 매우 분명했다. '사회에 대한 이론'! Theorie der Gesellschaft! 고전의 뼈다귀만 핧아먹고 있는 사회이론의 퇴행성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사회이론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
많은 연구자들은 연구 주제를 훨씬 더 소박하게 설정한다. 사회학을 예로 들면 각종 분과학문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과학사회학, 정치사회학, 사회운동, 복지 등등. 혹은 특정 주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자살, 생명윤리, 과학거버넌스, 사회통합, 위험, 환경문제, 장애인 고용 등등.
자. 그럼... 내 연구의 주제는 무엇인가? 과연 어디를 향해 시작한 연구인가? 도대체 어떤 주제에 대한 학문 담론과 논쟁에 기여하는 연구인가? 어떤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연구인가?
어제는 졌다. 호랭이들.. 졸전이었나 본데 다행히 꼼꼼히 보지 않았다. 결과를 떠나서 재미있는 경기를 보고 싶은데 요즘 프로야구 경기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이는 것 같진 않다. 호랭이들을 포함해서... 시즌 초라서 다들 너무 몸에 힘이 들어 가 있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시즌 시작 전에 군불을 얼마나 세게 땠는지 생각해보면... 특히 이름값 나가는 해외파들의 대거 귀국으로... 무슨 일에겐 과유불급! 그렇게 바람을 잔뜩 넣은 이들도 언론이고 잘 못한다고 책망하는 것도 언론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게 언론의 숙명이긴 하지만... 그들의 그 천박함에 치를 떨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언론만 나무랄 일만도 아니다.  언론은 당연히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언론의 수준은 독자의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언론의 천반함은 곧...
물론 언론이 덜 천박한 지역, 이른 바 선진국에도 천박한 언론들은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빌트(Bild)지나 상업방송들... 다른 점은 그런 '천박한' 매체가 있는 반면에 '수준 높은' 일간지와 방송채널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한국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언론의 질이 전반적으로 매우 떨어진다. '막장'이라는 표현은 드라마에게만 쓸 일이 아니다. 막장 언론...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이는 언론만의 탓이 라고 볼 수 없으니 결국 한국 사회 전체가 '막장'이라는 볼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은 영역에서 한국 사회는 좋아졌고, 부침은 있겠지만 앞으로도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역도 적지 않고, 결론적으로 한국사회의 전체적 수준이나 질이 향상되고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지식인들의 담론의 수준을 예로 들어도 그렇다. 2012년 지적 담론과 논쟁의 수준이 일제강점기 이념논쟁이나 1960- 1980년대 정치 논쟁의 수준보다 높다고 얘기하기 힘들다. 물론... 대중화의 정도나 논쟁의 다양성 같은 측면에선 더 높게 평가할 여지가 있겠지만... 
'호랭이들' 얘기를 하다가 샜다. 샛길로...
여하튼 난 나름 '팬'이라서 응원하는 팀의 경기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길 하고 싶었을 뿐이고...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문화적 차이, 동일성(정체성)

오랫동안 경제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정체성이 지배적이었다. 빈민, 민중, 노동자 등. 물론 다른 쪽엔 재벌, 자본가 등이 있고. 정치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정체성도 못지 않게 강했다. 독재자, 독재정부가 한 쪽에 있다면 다른 쪽엔 민중, 시민 등이 있고... 최근엔 비정치, 비경제적인 차이가 중요해지고 있다. 인류학적 차이, 출신 국가 차이, 성별 차이 그리고... 소수자들의 권리...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등.   이런 여러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 '인권'이다. 인권이 없었으면 어찌할뻔 했누...

'인권'이라는 개념, '국가인권위원회'같은 조직, '차별금지법' 같은 법률... 등으로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자리잡을 수 있을까? 그리 쉽지 않을 것. 우선... 소수자엔 눈에 두드러지는 그런 소수자 외에도 다양한 소수자들이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맥이나 리눅스 등 윈도우가 아닌 다른 컴퓨터 운영체계 사용자들.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 환경이 이런 비윈도우 사용자들에 대한 비우호적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졌지만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한국은 왜 이렇게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적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한 마디로 '돌진적 근대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집단주의, 그것과 잘 어울리는 성과지향주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긴급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가차없이 배제되는...

서구의 경우 인권, 그리고 소수자의 권리 등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럴까? 워낙에 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이라서? 노우! 네버!! 그들의 근대화 방식에선 개인의 권리, 인권 (그리고 나아가 '복지') 같은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자유, 평등, 개인주의 등이 변화하는 사회구조 유지와 안정에 필수적인 장치로 자리잡은 것이다.
'자살'에 대해서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측면을 '자살의 사회적 형성/구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은 객관적인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사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자살 아님과 구분되는 상태로서 이해되는 사태라는 이야기. 자살과 자살 아님의 경계는 매우 매우 흐리다는 점 (심지어  죽음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죽음과 죽음 아님의 경계는 생각보다 그리 분명하지 않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자살'이라는 '개념' 혹은 '정의'가 존재함으로서 비로소 '자살'이라는 '사태'가 존재한다고... 
물론 이런 '사회적 구성'이라는 견해는 거의 모든 사회적 사실, 현실, 현상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다. '장애'는 또 어떤가? 장애, 장애인의 정의도 마찬가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장애는 달리 정의된다. '장애인'을 위한 최선의 상태는 아마 '장애'라는 개념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그저 많은 차이 중 하나로 여겨지는 그런 상태일 것이다. 키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고 얘기하는 그런 맥락에서 인간의 어떤 능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얘기하는 상태 말이다.

2012년 4월 15일 일요일

조직차원의 통합에 충실하면 오히려 체계통합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조직통합에 충실한 것이 체계통합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러러면 조직의 작동 원리 혹은 지향점, 정체성과 체계의 작동원리 정체성, 지향점 간의 간극이 적어야 하지 않을까? 조직과 기능체계 간의 관계... 기능체계가 상상의 단위라고 해서 그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조직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조직이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하게, '정제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기능체계다. 과학활동과 관련된 조직이라면 과학이란 체계의 의미, 정체성, 지향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그것은 기능체계 차원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다. 조직 자체는 그야말로 다양한 지향점과 작동,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매우 복잡한 체계이지만... 어쩌면 그럴수록 기능체계의 경계, 특히 지속가능한 기능체계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제재 등이 분명하게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어제 선거 결과는 참 실망스럽다. 동시에 이리 저리 해석할 여지를 많이 남기기도 했고.
우선 페북과 트위터 타임라인 위의 그 '설레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그리 높지 않은 점이 의외였다. SNS 정치의 피로감일까? 혹은 SNS의 주류인 '진보'적 경향에 대해서 '보수'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결집한 것일까? 어떤 식으로든 결정론적 접근을 싫어하는 탓에 뉴미디어가 정치문화를 바꿀 것이라는 류의 주장에 심한 반감을 느끼는 편인데, 어쩌면 이번 선거는 SNS 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실망스러운 점은 뭣 같지도 않은 이들이 당선되었다는 사실. 이재오, 정두언 같은 이는 그나마 봐줄만하지만 웬 이인제? 김종훈, 문대성, 김형태의 당선이라니... 정치체계의 코드가 정치권력을 갖느냐 마느냐, 민주주의의 경우엔 선거에서 이기느냐 마느냐라고 하지만 그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선거에 이겨서 정치권력을 갖는 활동을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그랬다고 하던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고... 물론 지나친 도덕화가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향은 피해야 하지만, 한국은 도덕적 판단기준이 정치권력 획득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 아니... 이중적 기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적에 대해서는 도덕적 판단과 판단의 도덕화를 시도하고, 자기 편의 문제에 대해선 탈도더적, 정치적이 너무도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한국 정치의 문제는 그 중간지대, 상식의 영역에 대한 공감대가 터무니 없이 좁다는 점.
민주당 '참패'의 원인을 '정치공학적'으로 따지는 일보다, 정치적 상식의 영역이 터무니 없이 좁다는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다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문대성 논문표절의 경우... 일종의 체계통합 문제인데 어느 한 체계의 판단 기준이 반드시 다른 체계에서도 적용되지는 않는다. 물론 정치체계에서 학문적 판단이 담론 자원으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강조하는 상식, 공공성 같은 개념은 바로 체계 간에 판단의 기준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 물론 그런 합의, 공감대는 한국 정치에서도 있고, 확대되고 있는 것 같긴하다 (다행스럽게도...). 예를 들어 공천기준이 강화되는 현상. 공천 여론조사 과정의 문제가 불거지자 사퇴한다던지.. 그러니 한국 정치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다만 그런 기준이 확대되어서 문대성이나 김형태 같은 경우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몇 번 썼지만... 프로야구는 지적인 능력, 판단력, 스마트함 같은 요소들이 경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종목이다. '게임을 읽는다' '상황에 맞는 플레이' '생각하는 야구'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공 하나 하나, 아웃 카운트 하나 하나에 따라 완전히 다른 퍼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야구 관전의 독특한 재미가  바로 그런 점에서 비롯한다. 퍼즐을 풀어가는 지략의 대결을 관전하는 재미. 반면에... 때로는 생각없는 플레이를 봐야할 때 동반되는 안타까움, 짜증도 있다. 어휴... 공부 못해서 운동선수시키다보니, 운동선수되면 지적인 부분에 관한 투자를 중단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마트한 선수들을 언급해 두자면, 기아의 윤석민, 이용규, 김선빈, 안치홍 그리고 두산의 정수빈 정도.
그리고 좋아하는 유형의 선수는 대담한 선수. 실력이 없으면서 과감한 것도 그리 좋은 성향은 아니지만, 제일 하수는 실력은 있는데 담대한 부족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형. 특히 기아에는 '새가슴' 투수들이 많다. 선동열 감독도 늘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과감하게 던지면 실제 가진 실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담대함 부족은 스마트함 부족보다 개선하기가 더 쉬운 것 같다.
또 한 가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성향 혹은 태도는 진지함, 열정, 끈질김의 부족. 점수차이가 커서 어차피 질 경기라고 지레 푁하고 대충 대충하는 선수들, 그리고 감독들. 아니 아니 아니되오.
그러고보면 기아 타이거즈엔 아쉬운 부분이 참 많이 눈에 띈다. 물론 인내심을 가지고 좀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허나...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 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별로 없는데...

ps) 참 어쩔 수 없이 경기결과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최근 2연승을 하는 동안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슬픈 예감이 틀릴 수도 있겠다.
ps 2) 오늘 경기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두 번 '극적으로' 이겼으니 져도 되는 경기라... 아마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 결과에 따라 이 팀에 대한 평가가 계속 바뀔 것 같다. 시즌 끝날때까지... 경기 모습과 결과 이외의 정보로의 접근이 지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 웃고 울기를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한국 야구팬...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대리점 편의를 봐 준답시고 일을 좀 복잡하게 처리하였다 (꼼꼼한 독일식 일처리 기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런데 그 일이 말끔하게 처리되지 않고 있다. 어젠 직접 찾아가서 버럭 화를 냈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 본 기억이 언제였더라? 한 십년 전쯤 된 듯... 오늘도 전화 통화하면서 버럭... 정말이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싶다. 역설적인 사실은 설령 그 요구가 인정된다해도 배상은 결국 돈이라는 점. 참... 돈... 편리한 물건이다. 돈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누.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라는 얘길 자주 듣는다.
능력이 안되는데 그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
물론 능력이 되건 안되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설령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후회를 덜 하긴 할 것이다.
어짜피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투자를 한 셈이니..
하지만 세상 일에 공짜는 없어서 어떤 만족이라도 그 이면에는 반드시 고통, 눈물이 있는 법이다.
고통, 눈물 없이 만족의 열매만을 따 먹으려는 건 도둑놈 심보...

내가 관심을 갖는 주제, 기여하고 싶은 분야를 적으면서 든 생각이다.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잠 못드는 밤. 새벽 2시를 넘기다. 아마 내일이 임시공휴일이라는 '팩트'가 심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빗소리는 여전하고... 속은 허하고...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비가 온다. 내리는 비와 더불어 세상은 가라앉는다. 더 낮아진다.
모처럼 집에 일찍 와서 가라앉은 마음으로 낮아진 세상을 관찰하고 있다.
이런저런 일들로 복잡해진 심사가 비와 더불어 좀 가라앉더니 빈 공간이 생겼다.
그 빈 공간을 슬픔이 채운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다만... 더 슬퍼할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프로야구 단상

- 오늘도 기자들의 설레발은 놀랍다. 첫 두 경기 결과를 가지고 대단한 전망과 평가를 쏟아낸다. 흙으로 밥이라도 지을 기세다.
- 시즌 시작하자마자 부상을 입은 선수들이 있다. 팬들 입장에서는 참 답답한 일이다. 자기관리 부족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 일이다.  누구보다 가장 안타까워할 사람은 당사자고, 또 세상일이 관리한다고 다 관리되는 게 아닌 법이다. 당사자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서 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자는 그것을 가지고 또 평가하면 될 일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인도에서 보낸, 그리고 앞으로도 보낼 친구를 만나다. 그 친구가 들려주는 인도 사회 얘기는 참 낯설다.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그 제도의 유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상부구조라고. 즉, 카스트의 계층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는데, 현생에서 자신이 태어난 카스트 그리고 그 카스트에 속한 (배정된?) 직업에 충실해야 다음 생에서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21세기에도 그런 정당화 기제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현상은, 그저 단순한 종교와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사회의 작동이 신분구조와 직업구조의 긴밀한 결합 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에 그 결합구조를 깨는 순간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인도의 인구수와 경제규모 등을 생각할 때 인도의 혼란은 곧바로 세계의 혼란으로 이어질 것. 영국도 식민지 시절 손을 대지 못한 그런 전근대적 사회구조! 참으로 놀랍다. 정치체계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에 가까왔고, 캘커타 같은 곳은 오랫동안 사회주의당이 집권하고 있다는데, 그런 신분제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할지 놀랍다. 인도의 기독교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길어서 남부 인도에는 기원후 2,3세기부터 지금까지 도마기독교가 지속되고 있다는... 하지만 기독교는 하층민이 믿는 종교이고 여전히 그렇다는...
체계이론 식으로 표현하면 계층적(층화적) 분화 사회다. 하지만 그런 전통구조는 겉으로는 근대적 사회구조와 공존한다. 인도도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 아니던가? 자본주의 경제이기도 하고... Kausalitäte im Süden 의 사례로 볼 수 있을 듯.
한국의 경우 신분제 질서가 외재적 요인때문에 쉽게 해체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근대적 질서의 관철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심지어 우리보다 더 일찍 물고기에서 새가된 일본에 비교할 때도 더 급진적으로 해체되었으니... 물론 새로운 신분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도 하지만... 그것도 이전 신분제에 비교할 바는 아니니...
허동현, 박노자의 "우리 역사 최전선" 중, 의견이 갈리는 주제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조금' 다르다. 박노자는 '부국강병과 개발 지상주의 등의 자본주의적' '외재적 패러다임'으로 이식 이전 시기를 평가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고, 대신 '당시 민중의 욕망과 시대의 내재적 기준으로 대원군의 치적을 평가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백성들의 최대 소망은 '깨끗한 정부'이고 '부정부패' 근절인데, 대원군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 여하튼 전통시대의 인물에게 근대화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 왜 물고기에게 새가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없다는...
이에 반해 허동현은 근대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쪽이다. 새가 된 물고기가 있다는 것. 대표적으로, 일본. 서구 근대를 따르는 것 외에 대안은 없었다는 것. 하여 그는 대원군의 치적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당시 찾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모델을 도입하려 했느냐 아니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원군은 '새'가 되려고 했어야 한다는 것.
나는 허동현 쪽에 가깝다.

2012년 4월 9일 월요일

권혁범의 글 "근대와 탈근대 - 충돌과 접점"의 내용 중...

"... '개인 지향'의 정신이 반드시 근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실 개인의 해방은 인류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이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동양의 고대, 중세나 서양의 고대에 있어서도 개인을 중심에 놓고 사물과 세계를 보려는 사상은 있었다. 장자의 철학이나 서양의 스토아 학파에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다만 개인 중심적 사고가 그 시대의 주류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고대와 중세의 객관적 조건의 한계가 이념의 실현을 저지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보편적 욕구인 개인의 해방은 관념적인 이념의 영역에 있다가 근대의 물질적 조건 위에서 사회적 힘으로 전화했다. 특히 근대적 법과 민주주의 등의 제도적 조건의 완비에 따라 개인이 사회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 ... 서구의 근대는 과학과 산업화가 가져다준 물질적 기반 위에서 개인의 해방이라는 오래된 과제를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근대화(modernization)는 성공적으로 이룩했지만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개인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민족국가와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식민지경험 및 분단 등으로 인해 자유, 평등, 개인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가치가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술로서의 근대'와 '해방으로서의 근대' 간의 괴리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근대, 근대화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는 있는데 독자로서 혼동스럽다. 알 듯 말 듯... 개념 사용이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밑줄 친 구절 중 "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성공적으로 이룩했지만... " 도대체 '근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기술로서의 근대, 해방으로서의 근대를 모두 갖추는 것이 근대화인가? 그렇담 한국은 기술로서의 근대는 이루었고,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아직 못 이루었나? 그렇다면 근대화가 덜 된 것 아닌가? 
'개인 지향의 정신' '개인의 해방'의 정신이  물질적 기반 (물질적 근대?)위에서 실현된 것이 서양/서구의 근대화, 근대이고, 한국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개인 해방의 정신의 실현이라... 서양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 줘야 하나?
월요일 오전 시간, 이런 저런 정리하면서 보내고 있다. 점심먹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정리' 혹은 '배설'해 볼까 한다.

2012 프로야구 개막... 스토브 리그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참 많은 뉴스들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질을 높일 필요성이 높은 분야가 어디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특히 언론 (종이신문과 각종 인터넷 언론들)의 수준낮음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는 적이 많다. 스포츠언론의 수준도 마찬가지... 좀 과장하자면 그들은 취재를 선수들, 감독들 이야기를 받아 적고 전달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아. 물론 거기에 나람의 해석을 덧붙이긴 한다. 스포츠 신문 기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기대주, 유망주고 이번엔 독하게 마음을 먹었고, '포텐'을 폭발시킬 선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제 시즌이 시작되어서 기사같지 않은 기사를 채울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시즌 전 전망 따위를 기억할 독자도 없고, 아마 그런 기사를 쓴 기자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워낙 읽을 거리가 없다보니 그런 쓰레기 같은 기사들이라도 아쉬워서 찾아 읽게되는 상황이 참 심난하다. 한국 사회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향상되려면 가장 시급하게 손봐야 할 부분이 언론이다. 무엇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주제인지,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서 어떤 견해가 있는지 대개 언론을 통해서 선택되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스포츠 언론의 수준은 전체 언론의 수준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서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응원하는 팀, 기아 타이거즈! 뭐 대단한 열혈 팬은 아니지만, 그 팀이 이기면 기분 좋고 지면 짜증나고.. 뭐 그런 영향을 받긴 하니 응원하는 팬인 것 같긴 하다. 선동열 감독, 이순철 수석코치가 선임되었을 때 대부분의 팬들이 그런 것처럼 무척 반겼다. 기아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뚜껑을 열어보니... 이번 시즌에 대한 기대치 급하락... 물론 이제 두 경기를 했을 뿐이고, 앞으로 좋아질 거라는 점을 의심하진 않지만... 
역시 조직이든 사람이든 쉽게 바뀌지 않음을 새삼 확인했고, 야구는 감독이 하는 스포츠라기 보다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만수식 야구가 시대 흐름에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선동열을 과도기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듯. 예전보다는 덜 권위적이긴 한데 어쩔 수 없는 한계때문인지 기아의 소극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일신시키지 못하고 있다. 매끄럽지 않은 이종범 은퇴 과정, 최희섭을 아직도 1군으로 불러오지 않는 등 모두 선동열 리더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러다 성적이 좋아지면 선동열 찬가가 울려 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SK의 활기찬 모습이 부러울 따름.
허동현, 박노자의 '우리 역사 최전선'이란 책을 틈틈히 읽고 있다. 내가 일생의 주제로 삼고 있는 '근대성' '근대화'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책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편집자가 끼워 넣은 설명문이 곳곳에 있는 그 중 한 부분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에 오래 남는다. '근대화가 서구(양)화'라는 주장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으로 깨졌다는...
(1) '근대화=서양화/서구화'라는 주장은 '근대화론'(modernization theory)의 핵심 테제다. 요약하자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서양식 근대성, 근대화의 특성이 서로 긍정적으로 상승작용하면서 사회 발전을 가져온다는 그런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서양식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과 경제성장이 함께 간다는...
(2) 아시아 발전은 이런 근대화론에 도전이었다. 즉, 모든 부분에서 '서구'적 기준을 추종하지 않았음에도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는... '국가'의 주도적 역할에 주목해서, '발전국가'에 의한 경제적 성장, 발전의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했고... 그런 경험을 토대로 '아시아적 가치', '유교 자본주의' 같은 아시아적 특수한 근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견해는 '다수 근대성' (multiple modernities) 같은 주장으로 이론화되었다.
(3) 아시아 위기는 아시아적 혹은 비서양적 근대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하는 사건이었다. 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정의되면서... 아시아적 발전의 한계로 이해되었다. 결국 서양식 근대화 모델을 좇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4) 난 그 이후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아시아적 근대성의 가능성보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들로 이해한다. 근대성은 단일하지만 지역에 따른 다양한 변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니까 근대화=서양화/서구화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서양적 근대성이란 것에도 차이가 많이 있고 (예컨대, 유럽 내의 중심부, 주변부 구분), 서양적 근대성을 통틀어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타자, 그러니까 비서양과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서양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 아시아가 서양 어디 못지 않게  서양적이기도 하고... 고전적 근대화론이 서양의 내부를 단일하게, 공통된 것으로 취급하면서, 낙관론, 수렴론 등의 특징을 갖는다면, 새로운 단일 근대성 이론은 근대성의 출발점이 유럽의 근대 역사임을 인정하지만 근대성은 그 속성상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러니 수렴론 운운하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다양함이 현실이라는 점. 낙관론도 아니고...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점...
(5) 물론 깊게 파고들수록 논의 구도를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근대' '근대성'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특징을 좀 좁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고 마침 문밖에 타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출입 공간은 거의 예외없이 세 등분된다. 내리는 사람을 위한 가운데 공간과 타는 사람들을 위한 양쪽 공간으로... 귀국 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이 '지하철 출입공간 삼등분 현상'에 익숙해지질 않아서, 내가 내릴 때 양 옆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욱'한다. 마음 한 쪽에선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괜히 스트레스 받을 일 없지 않은가 등등. '한국化'가 더 진행되면 무덤덤할 수 있을까?

2012년 4월 6일 금요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 확실한 것은 늙는 것, 노화...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때를 놓쳤어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일들이 차츰차츰 멀어져간다. 이래서 평범한게 좋다고, 평범한게 진리라고 얘기하는 모양.

2012년 4월 5일 목요일

최근에 성경의 역사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모두 괜찮은 책이고 서로 보완적이라 구입해 둠직하다. 언젠가...

- "성경왜곡의 역사.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바트 어만 , 청림출판 (2006) (422p)
(원제: Misquoting Jesus: The Story Behind Who Changed the Bible and Wy. Bart D.Ehrman, HarperCollins. 2005)
- "당신이 성경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케네스 C.데이비스, 웅진지식하우스 (2011) (639p)
(원제: Don't Know Much about the Bible. Kenneth C. Davis. 1998)
- "성경의 탄생", 존드레인. 옥당 (2011) 455p
(원제: The World of the Bible, John Drane. 2009

주변부 근대성 (3)

그래. 세계화된 근대사회에서 (세계사회?) 관찰되는 모든 양태는 근대성의 이러 저러한 표현, 변이라고 보자. 특별히 잘 나고 못 난 것 없는... 중심도 주변부도 없는... 하지만... 그래도 근대성의 핵심, core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기준으로 다양한 양태를 이리 저리 구분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core에 가깝다거나 멀다거나... 그 정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마저 부인하게 되면... 특히 주변부로 인정되기 쉬운 쪽의 위로를 위해서 anything goes... 입장을 취하게되면 비록 심리적, 정서적으로 득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도무지 사건의 선후, 옳고 그름 판단, 대안 마련... 뭐 하나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근대성의 core를 인정하자!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자. core에 가깝다고 반드시 그게 질적으로 나은 상태는 아니라는... 예컨대, 나찌는  근대성의 core에 가까운 존재였다. 물론 core에서 멀다고해서 질적으로 나은 상태인 것도 아니다. 거기엔 그 나름대로 다른 문제들이 있으니까... 즉 근대성의 core에 가까운 중심부나 그렇지 않은 주변부나 각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 어디가 더 낫거나 부족하거나의 문제는 아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각자 처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근대의 주변부에선 근대성의 core를 더 적극적으로 내재화시키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길이 패러다이스로 인도하는 길인 것은 아니지만... 근대의 중심부에선 오히려 주변부의 core에서 먼 특징을 배울 필요도 있다.
소설가 조경란이 소설가 조성기에 대해서 쓴 글의 일부다.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던 1996년에 계간지 《작가세계》여름호 특집 작가가 바로 조성기 선생이었다. 지금 그 잡지를 다시 꺼내 보니 선생의 사진이 낯설도록 젊게 느껴진다. 아마 10년 전의 내 사진을 보면 나 또한 그렇겠지. 그 당시 읽었던 선생의 문학적 연대기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건 다름 아니라 바로 아버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진짜 생년월일과 호적의 생년월일의 차이보다 그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술만 잡수시지 않으면 그렇게 선량할 수 없고 지성적일 수 없는 아버지가 술의 세력에 휘말리기만 하면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일관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넓게 말해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인간내면에 도사린 흉흉한 어둠과 이중성을 일찌감치 감지하게 된다.

"인간 내면에 도사린 흉흉한 어둠과 이중성..." 조성기의 아버지 뿐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은 곧잘 술의 힘을 빌어서 그 이중성의 어두운 쪽을 드러내곤 했다. 억압된 어두운 쪽은 그렇게 가끔씩 바깥 구경을 시켜줘야 또 한동안은 잠잠하게 있는 것이다. 술의 힘을 빌리는 의례마저 쉽게 가질 수 없는 '어머니들'은 대개 '수다'로 억눌린 것들을 풀어낸다. '수다'로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두움은 켜켜이 쌓여서 '화병'이 되었다. '이중성' 혹은 '억압'은 자연/본능과 구별되는 문명/문화를 만들면서 생존해 온 인간이라는 종에겐 생존전략, 종의 정체성과도 같은 것이어서 쉽사리 해소되기 힘들다. 이중성이라는 존재적 모순과 억압을 해소하려는 방편으로 문화, 문명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특히, 종교나 예술 등등. 이중성의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근대는... 전형적으로 어두운 면을 '억압'하면서 형성된 문명이다. 정상, 표준을 정의하고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상태를 비정상, 비표준으로 규정하면서  억압하였다. 어두운 인간성은 어떻게 표출되었을까? 정상, 비정상의 구분의 대상조차되지 않는 존재를 대상으로 표출되었다. '식민지', '원주민', '흑인', '노예'등은 폭력적인 인간성의 대상이 되었다. '귀족'에겐 '천민'이, '자본가'에겐 '노동자'가, '남성'에겐  '여성'이 되기도 하였고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 '어른'에게 '아동/미성년'이 되기도 하였다 (아동에 대한 폭력의 행사).
근대성의 세계적 확산은 공료롭게도 '인권'이라는 개념의 확대 적용을 가져왔다. 이전엔 같은 '인간'으로 다뤄지지 않던 존재들이 '감히' 인권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천민들, 노예들, 피식민지인, 원주민들, 여성들, 어린이들 등등. 인종개념, 민족개념의 확산은 이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제 인간을 다른 기준으로 구분한다. 우월한/열등한 인종/민족... (우생학). 혹은 그저 이런 저런 기준으로 차이를 짓고 타자를 규정해서 억압한다 (배타적, 정복적 민족주의 그리고 종교 근본주의 등 각종 근본주의)
인간의 폭력성은 완화된 형태로 도처에서 해소된다. 각종 스포츠, 게임, 영화 등이 그런 통로이기도 하다. 직접적 폭력행사가 억압되면서 그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다. 혹은 직접적으로 행사되기도 한다. 건전한 방식으로... 익스트림 스포츠나 마라톤 같은 자기학대적 스포츠의 확산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권장되지 않는 방식도 여전히 관찰된다. 각종 범죄, 그리고 자살...
그러니 근대는 인간의 문명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딜레마는 좀 더 그럴듯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을 뿐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고 있다. 전쟁 및 각종 '학살'은 그래서 덜근대적인 야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감추고 싶은 근대의 맨얼굴인 것이다.
과제라면... 어떻게든 그것을 인간,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것. 과도한 억압은 개인 건강 뿐 아니라 사회건강에도 좋지 않으므로...

이 맥락에 연결시킬 수 있는 그림. 고야의 "The Sleep of Reason" (혹은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ca 1797)



이 그림에 대해서 푸코가 언급한 적이 있다.

"문제되는 것은 바로 1797년에 고야가 '보편적 관용어'의 첫 번째 형상으 로 그려낸 '이성의 잠'인데, 거기에서 주제는 아마 고전주의적 비이성을 둘러쌌을 어둠, 오레스트가 갇혀 있던 삼중의 어둠이다.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인간은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고 가장 고독한 것과 소통한다."
-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p. 806.

이 그림에 대한 해설...

고야는 에스파냐의 화가로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뿌리박혀 있고 악마적 분위기에 쌓인 것처럽 보이며, 전환 동기는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입니다.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생긴다”은 ‘변덕’이라는 동판화집에 있는 작품입니다.. 자화상은 아니나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고 탁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습니다. 뒤엔 고양이, 박쥐, 부엉이 밤생물이 등장하고 박쥐는 무지, 고양이는 탐욕, 부엉이는 어리석음을 상징하며 이것들은 악마로 투영됩니다. 시라소니가 탁자의 인물자세를 따라함으로써 동일시하고 있고요. 이성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는 않으나 점점 모호해지는 것을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는 고야의 비성에 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2012년 4월 4일 수요일

주변부 근대성 (2)

'주변부 근대'는 사실 당사자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다. '중심부 근대'를 '표준', '정상'으로 상정하는 서구중심주의를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존심 상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그리고 나서 근대의 문제를 극복하는 일에는 우리가 중심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마. 그 정도로 내 입장을 정리할 수 있겠다.
"우리 역사 최전선"이란 책은 두 역사학자 박노자, 허동현의 편지 모음이라는데 그들의 입장 중에서 나는 허동현 쪽에 가깝다고 보면 될 듯. 아래는 책 내용 요약을 어떤 블로그에서 긁어 온 것.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도 박노자 교수는 탈근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맡았다.박노자 교수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무리하게 적용하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부국강병이란 이름하에 무리하게 추진되는 일본따라가기식 근대화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진리에 처음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갑신정변이나 황서영의 백서 사건들을 인류의 보편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 예이다.반면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교수의 생각에 많이 동의하면서도 좀더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한다.역사라는 것이 개구리 뛰듯 점프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필요불가결하게 거쳐가는 과정으로 이를 설명한다.그러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적이 없음을 주장한다.하지만 두사람 다 우리의 근대화가 일본지향적이었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좀 '위로'가 되는 건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 지적이다. 중심부도 사실 근대의 결과,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 근대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탈근대로 간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그렇게 보면 2단계, 3단계, 즉 근대, 탈근대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근대" 자체는 매우 복잡한 측면들의 총합이고, 아직고 그 경계는 확정되지 않았고... 기능적 분화의 결과로 발생하는 문제로 발생하는 새로운 체계의 등장 같은 얘기는... 현재 근대가 18세기 19세기의 근대와 같지 않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즉, 근대는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이야기... 아시아적 근대는 근대의 한 양태이지 반드시 중심부 근대의 특정 양태를 catch-up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
사실 이런 접근이 더 현실적이긴 하다. 뭔가 단계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도식적이고, 사실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또한 이렇게 본다면 주변부 근대성으로서 자존심이 좀 덜 상할 수도 있고...
아시아적 근대성은 주변부... 라기 보다는 그냥 근대성의 다양한 존재 양태 중의 하나다. 그 아시아적 근대성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same but different...

주변부 근대성 (1)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을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역사 혹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위기와 안정'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진화론 용어로는 '변이, 선택, 안정'이 될 수도 있고). 그 과정은 반드시 단선적인 발전만은 아니다. 현재의 안정 상태가 역사적으로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
근대의 중심부는 위기와 안정을 반복하면서 근대적 특징을 구현해 왔다. 그것은 수백년 걸리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새로운 위기에 직명해있고,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고... 
근대의 주변부에서의 위기, 안정의 과정은 좀 다르다. 우선 중심부에서 수백년을 거치면서 형성된 나름 안정된 모델을 우선 수입해왔다. 그래서 위기의 성격을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세계적 근대성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 
근대의 주변부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지역은 아시아, 특히 유교권인 동아시아다. 위기에 처한 현대 문명의 대안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아시아 지식인들 중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동아시아 밖에서도 그런 기대의 시선을 아시아에 보내고 있기도 하다. 
물론 다른 극단도 있다. 아시아를 덜발전된 상태, 예외적인 상태로 보는 시선. 중심부 근대를 모방하거나 쫓아오고 있고 한동안 그럴 것이라고 보는 시선. '계몽의 대상'으로서 아시아!
굳이 둘 중에서 선택을 하자면 나는 두번째 쪽이다. 
중심부에서 열심히 치고 박으면서 만들어 낸 근대성은 세계사회의 기본 구조를 만드는 원칙이 되었다. 여기에서 외부는 없다! 이 근대성은 세계적이기 위해서 매우 추상적인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런 원칙들은 생각이상 유연하다. 근대의 '중심부人'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 근대성이 매우 추상적이라는 얘기는 결국 그것의 구체적 구현형태는 매우 다양하다는 얘기와 짝을 이룬다. 그러니 일부 서구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근대의 주변부는 그저 중심부를 좇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추상적인 근대성의 원칙을 수용하되 그것을 지역적 특성에 맞추어서 변형시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 그동안 근대의 중심부에서 '제공해준' 추상적 원칙을 제도적, 구조적인 차원에서 수입해왔다 (1단계). 지역적 상황에 맞는 근대성을 구현하려면 다음 두 단계가 더 필요하다. 수입해 온 근대성의 (추상적) 원칙을 일상적 영역에서도 적용되도록 폭넓은 합의, 상식을 정착시키는 단계 (2단계). 지금 '싸움'의 전선은 대개 이 단계에 대한 것이다. 즉,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 비상식의 대표주자들 멩박 무리들이고... 그들이 '시범케이스'로 욕을 먹지만, 사실 다른 정치 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고 - 그래서 안철수씨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상식'에 대한 갈급함 때문이다. 복지국가니, 공정사회니, 인권이니 모두 이 단계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주제들이다.
3단계는 근대의 문제, 위기 해결을 모색하는 단계.
근대의 중심부가 3단계를 다루고 있다면, 한국의 경우 안타깝게도 2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3단계의 문제도 동시에 다루고 있는 중이다. 2단계 문제 해결엔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니. 2단계의 완성이후에 3단계로 넘어가는 일은 전략적으로 그리 좋은 접근이 아니다. 2단계와 3단계를 동시에 다루되,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하다. (근대/탈근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2012년 4월 3일 화요일

이거슨.. 웬 뜬금없는 - 겨울냄새나는 - 봄...비...
목도리두르고 있는 페북 사진이 더워보여서 반팔 사진으로 바꾼 일을 쑥스럽게 만드는...

좀 늦었더니 벌써 10시. 1시간 반 정도만 있으면 점심. 이래서 오전 시간이 참 '거시기'하다니까.
더 일찍 나서려고 해도 잘 되질 않네. 쩝.

아무리 생각해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도 대안은 없다. 그냥... 밀고 나가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아먹고 하루 계획을 세운다.

2012년 4월 2일 월요일

페북에 올린 영화평에 썼던 문장인데 글을 고치면서 사라져야 할 운명이 되었다. 하여 여기에 옮겨 살려두려 한다.

너무 직설적이거나 전형적인 영화, 너무 얕아서 물은 찰랑찰랑거리고 바닥 모래가 뻔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영화를 싫어한다. 대신 풍자적인 영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 사건과 인간의 다면성을 드러내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쪽이 아니라면 시종일관 몰입할 수 있게 하거나 (좋은 스릴러, 액션), 놀라움, 기발함이 있는 영화거나... (좋은 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