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가로 등단하던 1996년에 계간지 《작가세계》여름호 특집 작가가 바로 조성기 선생이었다. 지금 그 잡지를 다시 꺼내 보니 선생의 사진이 낯설도록 젊게 느껴진다. 아마 10년 전의 내 사진을 보면 나 또한 그렇겠지. 그 당시 읽었던 선생의 문학적 연대기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건 다름 아니라 바로 아버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진짜 생년월일과 호적의 생년월일의 차이보다 그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술만 잡수시지 않으면 그렇게 선량할 수 없고 지성적일 수 없는 아버지가 술의 세력에 휘말리기만 하면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일관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넓게 말해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인간내면에 도사린 흉흉한 어둠과 이중성을 일찌감치 감지하게 된다.
"인간 내면에 도사린 흉흉한 어둠과 이중성..." 조성기의 아버지 뿐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은 곧잘 술의 힘을 빌어서 그 이중성의 어두운 쪽을 드러내곤 했다. 억압된 어두운 쪽은 그렇게 가끔씩 바깥 구경을 시켜줘야 또 한동안은 잠잠하게 있는 것이다. 술의 힘을 빌리는 의례마저 쉽게 가질 수 없는 '어머니들'은 대개 '수다'로 억눌린 것들을 풀어낸다. '수다'로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두움은 켜켜이 쌓여서 '화병'이 되었다. '이중성' 혹은 '억압'은 자연/본능과 구별되는 문명/문화를 만들면서 생존해 온 인간이라는 종에겐 생존전략, 종의 정체성과도 같은 것이어서 쉽사리 해소되기 힘들다. 이중성이라는 존재적 모순과 억압을 해소하려는 방편으로 문화, 문명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특히, 종교나 예술 등등. 이중성의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근대는... 전형적으로 어두운 면을 '억압'하면서 형성된 문명이다. 정상, 표준을 정의하고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상태를 비정상, 비표준으로 규정하면서 억압하였다. 어두운 인간성은 어떻게 표출되었을까? 정상, 비정상의 구분의 대상조차되지 않는 존재를 대상으로 표출되었다. '식민지', '원주민', '흑인', '노예'등은 폭력적인 인간성의 대상이 되었다. '귀족'에겐 '천민'이, '자본가'에겐 '노동자'가, '남성'에겐 '여성'이 되기도 하였고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 '어른'에게 '아동/미성년'이 되기도 하였다 (아동에 대한 폭력의 행사).
근대성의 세계적 확산은 공료롭게도 '인권'이라는 개념의 확대 적용을 가져왔다. 이전엔 같은 '인간'으로 다뤄지지 않던 존재들이 '감히' 인권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천민들, 노예들, 피식민지인, 원주민들, 여성들, 어린이들 등등. 인종개념, 민족개념의 확산은 이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제 인간을 다른 기준으로 구분한다. 우월한/열등한 인종/민족... (우생학). 혹은 그저 이런 저런 기준으로 차이를 짓고 타자를 규정해서 억압한다 (배타적, 정복적 민족주의 그리고 종교 근본주의 등 각종 근본주의)
인간의 폭력성은 완화된 형태로 도처에서 해소된다. 각종 스포츠, 게임, 영화 등이 그런 통로이기도 하다. 직접적 폭력행사가 억압되면서 그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다. 혹은 직접적으로 행사되기도 한다. 건전한 방식으로... 익스트림 스포츠나 마라톤 같은 자기학대적 스포츠의 확산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권장되지 않는 방식도 여전히 관찰된다. 각종 범죄, 그리고 자살...
그러니 근대는 인간의 문명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딜레마는 좀 더 그럴듯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을 뿐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고 있다. 전쟁 및 각종 '학살'은 그래서 덜근대적인 야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감추고 싶은 근대의 맨얼굴인 것이다.
과제라면... 어떻게든 그것을 인간,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것. 과도한 억압은 개인 건강 뿐 아니라 사회건강에도 좋지 않으므로...
이 맥락에 연결시킬 수 있는 그림. 고야의 "The Sleep of Reason" (혹은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ca 1797)
이 그림에 대해서 푸코가 언급한 적이 있다.
- 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p. 806.
이 그림에 대한 해설...
고야는 에스파냐의 화가로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뿌리박혀 있고 악마적 분위기에 쌓인 것처럽 보이며, 전환 동기는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입니다.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생긴다”은 ‘변덕’이라는 동판화집에 있는 작품입니다.. 자화상은 아니나 자신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고 탁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습니다. 뒤엔 고양이, 박쥐, 부엉이 밤생물이 등장하고 박쥐는 무지, 고양이는 탐욕, 부엉이는 어리석음을 상징하며 이것들은 악마로 투영됩니다. 시라소니가 탁자의 인물자세를 따라함으로써 동일시하고 있고요. 이성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는 않으나 점점 모호해지는 것을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는 고야의 비성에 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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