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0일 일요일

1.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십중팔구 이루어진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재미있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시민과학자로 살기"란 책 내용이라고 한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면... 진지한 마음을 가지면 최선을 다하겠지. 그렇다고 업적에 연연하면 안되겠다. 무엇인가를 이루겠다? 이름을 남기겠다? 인정받겠다? 그런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진지하게 열심히 살되 욕심을 내진 말 거. 이 무슨 성철 스님같은 이야기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2. 역시 내가 불안하게 느끼는 건 오래지속되지 못한다. 자꾸 흔들린다. 흔들려서 새로운 출발점을 택해 본다. 하지만 불안하다. 왜? 너무 낯선 것이다. 확신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한 번 더 고민한다. 우연히 다른 아이디어를 얻는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한 번쯤은 지나쳤던 것들이다. 익숙하다. 그리고 더 분명하다. 그래.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지만 좀 더 안심이 된다. 아이디어는 그렇게 돌고 또 돈다. 출발점을 바꾸고 또 바꾸고...

3. "기능적 분화의 우세"(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 Primacy of functional differentiation) 한국 사회의 현실은 기능적 분화의 관철로 볼 때 가장 잘 설명이 된다. 기능적 분화가 관철된다는 것은 체계 간 관계가 조화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이 생기고, 체계 간 갈등 조정 메커니즘이 저발전된 한국에서는 갈등 해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4. 우종학 선생 책("무크따")과 페북 글을 읽으면서 진화론에 대한 거부감이 더 줄어들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도 유영모, 함석헌 선생 등은 이미 오래 전에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선각자는 선각자였나보다.

5. 도서관에서 맑스엥겔스전집"MEGA"을 들춰봤는데 맑스가 당시 자연과학 내용을 발췌해서 정리한 기록을 봤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맑스이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실제 어느 정도였을까? "과학적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데 이같은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영향을 줬을까? 엥겔스는 자연변증법 등등 얘기하지 않았던가? 자연과학에 대한 찬탄이 - 맑스는 다윈의 진화론에도 열광했다고 하지? - 사회에 대한 과학, 사회에 대한 일종의 법칙, 원리를 찾아내려는 시도의 기초였을까? 맑스 뿐 아니라 콩트, 스펜스, 뒤르케임도 그렇지 않았나? 베버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를 강조하는 편이었고...

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1. 자기 정체성을 인간관계, 업적을 통해서 확인하다보면 그 인간관계, 업적과의 연계가 끊어지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인간관계, 업적과 자기를 분리하는 훈련을 하라. 그것이 자기부인이다...

흠. 아무 것도 하지 말까? 정체성도 하잘 것 없게 여기고, 업적도 쌓지 않거나 쌓은 것도 우습게 여길까? 숨만 쉬면서 살아 있을까? 먹을 것은 기가막히게 챙겨먹고... 또 나름 이런저런 소소한 재미도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활동에 기생하면서?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되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겠지. 열심하는 그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열심히 사는 것, 제 앞가림 하고, 주위 사람들 챙기면서...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자기가 이룬 것, 자기가 맺은 관계...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럴만한 업적도 쌓지 않은 사람이 이거 고민이 너무 앞선 것 같구만.

2. 그래 무슨 일이건 열심히 하면 된다. 일에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면 안된다.  제 앞가림 하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조금만 가질 수 있으면 충분하다.

3. 논문도 그렇다. "전무후무한" 대단한 작품을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건 알겠지만 그래도 고집부릴 일 아니다. 그냥...
1. 내가 가끔씩 들른 대구성서아카데미(DABIA.net)에서 정용섭 목사님이 쓴 죽음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 중에서...





어제 오랫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독일 영감님을 찾아갔다. 독일 도착 다음날 찾아가서 문패에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벨을 누를 땐 반응이 없더니 어젠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방문이 열렸다. 문 뒤에 그 분이 있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그런데... 건강하게 보이는 그 분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뭔가 이야기는 하시지만 두서가 없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슬펐다. 아. 그 꼬장꼬장하시던 분이... 나를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주제들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시던 그 분이... 식사를 하러 나가자고해도 내 말과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제까지의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무엇하러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것인가. 무엇 때문에 노년에도 학문적 작업을 하고, 그리 열심히 사셨던가? 그 당시에야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나고 보면 도대체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오랜 만에 다시 만난 사람들. 그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했던가? 내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또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2. 후배와 논문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내 생각의 근거가 부실한 것이다. 내가 도달할 목적지는 수 년동안 변하지 않고 있는데 그 출발점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도착점을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까? 글쎄....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1. 이번에 독일에 와서 놀란 점 중 하나. 커피 맛이 별로라는 점. 진하지도 뜨겁지도 않은데 맛까지 별로... 커피에 대한 내 감각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발전했기 때문인가? 그 이유가 궁금하다.

2. 숙소에서 학교까지 오는 최단 코스를 발굴하다. 40 - 45분이면 된다. 이 정도면 뭐 다닐만하지. 귀가는 더 걸릴 생각을 해야 할 듯. 버스가 끊긴 이후로 버스 노선을 다니는 정액제 택시가 있는데 어젠 비도 오고 해서 이용해 봤다. 숙소가 학교에서 멀어서 불편하긴 하지만 워낙 싸게 얻었으니 이런 택시를 가끔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

3.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또 혼란을 겪고 있다. 논문에 대해서는 갈대같은 내 마음이라니... 초심으로 돌아가야지. 

4. 어제 저녁엔 지인과 함께 성탄절시장에서 글뤼바인을 한 잔 마셨다. 독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 모습이 낯설었다.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독일은 내게 여전히 낯설다. 아마 앞으로 그 기간을 더 산다고해도 그럴듯.  

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멘자 식사 후 후배와 한참 동안 논문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부족한 부분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일은 다른 후배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최대한 보충해야지. 환경은 좋다. 더할나위 없이...

2014년 11월 26일 수요일

1. 학교에 왔다. 학생증 새로 발급받는 등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오전 시간을 거의 보냈고 이제 겨우 새건물로 이사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무선인터넷 속도가 빠르다. 주로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숙소가 멀어서 좀 불편할 것 같다.

2. 글쎄... 호의에 대한 고마움, 그 정도인 것 같다.

3. 학교 서점에서 만난 직원. 예전부터 있던 사람인데 손님을 대하는 싸가지가 제로다. 오늘 만난 이런저런 독일인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고맙게도...

4.  새로 지은 건물에선 이전 건물과의 연계성을 갖게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도 공간적인 분리는 단점을 더 많이 주는 것 같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1. 신학교 연구실을 쓰게 됐다. 무선인터넷이 되긴 하는데. 느리다. 아주. 그래도 이게 어딘가. 오히려 빵빵 터지는 것보다 더 나을 지도.

2. 기숙사, 연구실 모두 "도"를 닦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다. 아 좀 더 오래 머물러야 할까?
1. 구조... 많은 가능성 중에서 현실화 될 수 있는 것들은 제한되어 있다. 특정한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커뮤니케이션에 더 잘 연결될 수 있도록... 기대 구조... 기대구조는 어떻게 짜여져야 하는가? 변이, 갈등이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 인지적 기대구조와 규범적 기대 구조 사이에서... 갈등이 어떻게 짜여져야 하는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관계를 조정하는게 필요하다.
기능적 분화를 인정하기. 위로부터의 통합적, 포위적,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대표적으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 관계를 기능적 분화로 잘 설명할 수 있다. 학문 내에서 자연과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도 그렇게 볼 수 있다. 

2. 특히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은 인지적 기대구조에 의존하는 체계들이다. 그 체계들의 개방성...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체계들이 필요하다. 사실 어느 체계가 더 중요하다거나 더 결정적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모든 체계가 다 나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하튼 공존, 조정이 중요하다.

3. 기능적 분화된 근대사회를 위기로 진단하는 경우는... 체계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세계사회. 지역적 차원의 법들은 세계적 차원의 과학 발달을 제대로 기대구조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포함/ 배제 역시.
이건 서구 선진국에서 특히 그렇다. 한국은 근대적 법 자체도 제대로 못 갖추고 있고, 그 꼴을 갖출 필요성이 크다.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말았ㅇ면... 

4. 여하튼 한국에서도 "법"에 대한 기대는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고 또 실제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법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문제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법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법 자체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한 합의가 있는 것. 기능적 분화는 되고 있다고 봐야. 법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다. 그것은 법의 성취, 성과Leistung에 대한 의존일까? 기능Funktion이 아니라?
1.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해도 실수를 하게 된다. 특히 낯선 곳으로 오랫 동안 떠나는 여행에서... 챙길 것이 많다보니... 전적인 내 실수도 있고, 다른 사람 실수도 있다. 남을 원망할 수 있는 경우도 결국 최종 책임은 내게 있다. 뭐.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2. 공항역에서 뜬금없이 검색을 당했다. 세관 직원들에게. 내가 뭐 값나가는 물건이나 거액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짐이 좀 커서? 탈탈 털어봐야 뭐 뻔한 살림.

3. 최적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짠다. 시간과 돈을 가장 적게 쓰도록... 잘 풀려서 예상대로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을 때 만족도 급상승. 그렇지 않을 때 짜증 지수 급상승. 최적의 기준을 좀 낮출 필요가 있다. 시간과 돈에 대해서 좀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단 말이다.


4. ICE 안이다. 인터넷이 되는군. 신기... 같은 네트워크인데 핸드폰은 안된다. 무슨 조화 속인지...

5. Lufthansa 기내에서 보게 된 독일인 승무원들, 독일어... 아. 낯설었고 또 낯설었다. 내릴 때쯤 되니까 적응됨.

6. 옆 자리 앉은 취업에 성공한 대학 예비 졸업생. 혼자서 하나투어 여행으로 10일간의 유럽 여행 가는 길. 여행 그룹은 대부분 부모님 또래. 얘기를 나눠보니 - 여행 스타일도 그렇지만 - 뭔가 가늠하기 어려운 타입.

7. 독일 날씨는 한국 중부지방 날씨와 비슷하다. 공기는 건조하고 적당히 차다. 그리 춥지 않단 얘기다.

8. 내일은 적응하는 날로 삼아야 할듯. 면도기 등 필요한 것들 좀 사고, 학교에 가서 멘자, 도서관 사용 가능하게 하고... 저녁엔 초대에 응하고... 모레부턴 강한 공부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 선생님 만나기 전에 준비해야하니.

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결혼식.  금속을 가장한 플라스틱 장식대 위에 놓인 가짜 장미. 가상 현실.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갈등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회피하거나 중재해서 갈등을 없애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갈등은 있어도 되고 없으면 좋은 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니. 갈등이 없다는게 오히려 바람지 하지 않은 것이다.


2014년 11월 18일 화요일

기분이 묘하다. 독일 행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 독일시간 어제 아침 무렵 이메일을 보낸 지도교수에게선 하루 종일 답이 없다. 대개 이런 짧은 메일엔 바로 반응하는 편인데... 방을 구하는 일도 진전이 없다. 가서 구해야 하나 생각하면 좀 답답하다. 원룸이지만 함께 지내자고 기꺼이 제안한 후배가 있긴 하지만...  논문도 이제 속도가 좀 붙는 것 같은데 마음만 초조해지고... 어짜피 완성에 가까운 상태도 아니긴 하지만... 식구들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찜찜하고... 그나마 아내가 이전보더 더 든든하게 자기 자리를  잡아가서 그 부분은 마음이 편하다. 곧 멘토 2호를 만나러 가야 한다. 오늘은 뭘 보여줘야 할까.

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통풍 부위가 심상치 않아 이럴 경우 먹으라고 처방해준 약을 며칠 먹었다. 큰 차도가 없어서 오늘 병원에 다녀왔다. 지난 번 발작 이후 약을 꾸준히 먹으라고 했는데 부작용도 있는 것 같고 또 워낙에 약에 의존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그냥 먹지 않았다. 그 이후론 이상도 없고 해서 괜찮으려니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재발한 것이다. 찾아보니 대개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두번째 발작이 있고, 그 이후론 발작 기간이 짧아지다가 만성화가 된다고 한다. 내 경우 정확히 6개월 걸렸다. 지난 번 꽤 많은 요산결정이 쌓여있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빨리 다시 쌓인 모양이다. 오늘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어쩜 석회화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며 약으로 증상이 완화되지 않으면 주사로 치료해야 한다고... 흠. 곧 독일에 가야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아니.. 독일에서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지난 번처럼 생활을 못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니지만 신경쓰이는건 사실.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한국에서 사회 갈등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런 것이다. (물론 원론적으로 따지면 갈등 자체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바뀔 뿐이다. 갈등 전이. 전환. 다만 그 전환을 어떻게 하느냐가 갈등 관리에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갈등은 사라진다. 언젠가는.... 여하튼... 일시적일 지라도... )

페북에서 이런 표현을 봤다. 요약하자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의 딸이다" 이 말은 내 생각엔 틀린 표현이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로서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 대통령이다. 비록 하지가 많지만..." 뭐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본원적인 결격 사유가 있긴 하다. 각종 권력기관들의 불법 선거운동...  엄격하게 그런 점을 고려해서 단서로 달아주면 된다. 문제 많은 대통령, 정당성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 곧 짤릴 지도 모르는 대통령...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꾸 정치를 도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판도 많이 받는 사람이고 어떤 비판엔 나도 동의하지만 난 강준만 교수에 대해서 동질감, 심지어 동료의식을 느낄 때도 있다. 오늘 읽은 한겨레 칼럼의 논지에도 백 번 동의한다. 장하성 교수의 신간 "한국자
본주의"를 읽어야 할까 보다. 전문을 옮겨 둔다.


한국 '자본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다. 종교뿐만이 아니다. 그는 “어떤 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고 했다. 역사의 추억으로 돌려도 좋을 옛날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사상과 이론의 ‘정통’과 ‘원조’를 사랑하는 우리의 오랜 습속은 지금도 건재하다.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늘 밖만 쳐다본다. 웬 모델은 그리도 많이 수입하는지 어지러울 정도다. 이미 국내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도 ‘서양 석학’이 한마디 하면 처음 들어본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열광한다.
이를 두고 ‘지식 사대주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자면 한국 특유의 개방성과 진취성의 증거일 수도 있다. 늘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면서 그곳에서 생산된 사상과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향학열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후진국 시절 한국이 그런 불타는 향학열의 수혜를 적잖이 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후진국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다. 민주주의가 사실상 없던 시절엔 서양 민주주의를 종교로 삼아도 좋을 일이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선 우리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교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경제도 다를 게 없다.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식의 전투적 구호 하나로 경제 문제들을 풀긴 어렵게 됐다. 따라서 수입 지식의 현실 적합성을 따지는 지식 사회학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세상이 되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한국 자본주의>는 내겐 경제 관련 책이라기보다는 그런 지식 사회학을 다룬 책으로 다가왔다. 경제 관련 책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놀라움을 만끽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에 대해 분노하는 장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를 말하는 경제 전문가들에게 ‘한국 자본주의’를 말하자고 역설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 우파는 물론 진보 좌파도 문제다. 총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진보 좌파는 자본주의 각론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주의 총론 비판을 서양에서 직수입해 활용하면서 자본주의 각론의 주도권을 보수 우파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다.
서양에서 생산된 자본주의 총론 비판엔 문제가 없을까? 장 교수는 진보 좌파에게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신화들을 열거하면서 그 허구성을 폭로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신화, 주주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저임금과 비정규직 양산에 책임이 있다는 신화, 삼성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부풀리고 외국 자본을 악마화하는 애국주의적 포퓰리즘 신화, 소득 1차 분배도 안 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벌이는 ‘자산 불평등 논쟁’ 신화 등 수많은 신화들이 실증적으로 격파된다. 이 정도면 논쟁이 크게 벌어질 법도 한데 별 논쟁이 없다. 자본주의를 추상의 영역으로만 다뤄온 논객들에겐 반론을 할 실증적 자료가 없기 때문일까?
장 교수는 좌우 양쪽에서 비판받는다. 그는 ‘자본주의 고쳐 쓰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보수 우파는 그의 ‘고쳐 쓰기’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론 안 된다는 진보 좌파는 그의 자본주의 재활용을 비판한다. 이 후자의 비판자들이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정치적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리겠지만, 이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추상의 세계에서만 사회주의를 지향함으로써 현실 세계에서의 검증을 피해 나간다. 그래서 경제는 보수 우파가 장악하고 진보 좌파는 선지자 역할에만 머무른다. 이런 진단이 성급한 것임을 밝혀주는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화에 등장하는 소재. 다원주의, 동성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기독교 신앙이 고작 동성애 정죄하고, 나만 옳다고 뻔뻔하고도 당당하게 주장하는 그런 것인가? 물론 신앙 고백으로 생명을 내 걸어야 하거나 그와 유사한 절제절명, 극단적 상황에서는 단호한 태도가 요청될 수도 있겠다. 순교자들... 그런 태도를 21세기에도 유지해나 하나? 시대착오적 아닌가?
"If I Stay"(2014 감독 R.J. Cutler)란 영화를 서둘러 봤다. 앞부분은 이야기도 신선하고, 배경도 예뻐서 몰입할 수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상하게 흘러갔다. 스킵 스킵하다가 결국... 겨울 분위기가 특히 좋았다. 겨울을 좋아하는데... 눈 쌓인 숲 속으로 난 한적한 도로... 그 장면은 아름다웠다. 시리도록... 그런 장면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언제가 그런 곳에서 꼭 살아보리라. 적어도 여행가리라. 이 영화에서 건진 건 그것 하나. 찾아보니 밴쿠버와 그 근처인 모양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북미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본 곳.
영화는 금새 청소년 영화 본색을 드러냈다. 선남선녀 두 청소년이 시종일관 "예쁘게"만 사랑해서 질리는... 
그래도 영화 속 겨울 풍경은 캡쳐해 봐야겠다.



꽤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는 지인이자 페인인 목사님의 글. 무단으로 옮겨둔다.


신앙의 수준

오래전,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크리스천 잡지에서 읽었던 유머가 있었다. 배경은 미국의 야구 경기.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홈플레이트를 툭툭 친 후 그 위에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던 포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내며 그 성호를 발로 지운 후 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자네와 내가 동시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드시겠나? 하나님은 그냥 게임이나 즐기시게 놔두지?”

수능의 폭풍이 또 다시 나라를 뒤덮었다. 모든 종교단체들은 이 특별한 계기를 맞아 정성어린 기도를 모은다. 수험생을 위한 ‘특별’ 기도들이 교회와 사찰에 넘쳐난다. 아니, 어디 종교인들뿐이랴. 서울대에서 만들었다는 일명 ‘서울대 초콜릿’은 이미 부적의 지위에 올랐다. 수험생을 자녀로 둔 모든 부모의 염원이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다. 그런데 문득 이 스펙터클한 기도의 대향연에서 저 유머에 등장한 투수와 포수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렇게들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누구를 떨어뜨리고 누구를 붙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의 제목들은 정확하게 나의 신앙 수준이 어디쯤인지를 알려주는 바로메타가 된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제목에서 나와 가족을 위한 기도제목을 모두 제하고 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기적인 기도제목을 버리고 남는 것, 순수하게 이타적인 간절한 기도의 마음, 바로 그것이 내 신앙의 수준이다. 과연 얼마나 남을까? 아니, 남기는 남을까?

신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될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는 지옥에 보내셔도 좋으니 대신 하나님을 모르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주십시오.” 이것은 구원론에 관련된 조직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타적이어야 하지 않은가에 관한 물음이다. 바울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한이 없겠다고 말했을 때(롬 9:3),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탄원하며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으실 바에는 차라리 주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간청했을 때(출 32:32),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신앙의 수준이란 이런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나님께 칭얼대는 모습을 장려하다니, 속된 말로 쪽팔리는 일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신앙의 자존심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크신 은혜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고작 램프의 요정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내가 믿는 진리를 이렇게 수준 낮은 것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언제까지 징징대며 젖먹이 아이처럼 하나님께 칭얼거릴 참인가? 언제까지 나만 천국 가면 그만일 텐가? 주님께서 친히 기도의 문구까지 일러주신 기도는 이런 식의 기도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어른으로 자라야 하고, 이제 나의 신앙은 나야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저들을 살펴주시라는 호기로움이 필요하다. 그때에야 세상은 교회를, 교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마 6:31-32)
"대법원이 발간한 2012년 사법연감에 의하면 1년 동안 전국 법원에 접수된 소송 건수가 약 629만 건이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국민 8명 가운데 1명이 송사에 관여하 는 셈이다. 소송공화국, 고소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을 만하다. 모든 갈등과 분쟁을 사법기관에 들고 가서 해결하겠다는 ‘소송사회화’의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과 비슷한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본보다 인구 단위당 고소 건수가 무려 60배가 넘는다. 물론 고소 비율이 낮은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이 과잉 억제된(억압된) 갈등사회라고 한다면, 한국은 과잉 분출된 갈등사회라 할 수 있다.
갈등이나 분쟁이 발생하면 법대로 하자고 외치며 소송과 법정으로 달려가는 고소, 고발 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일상의 사법화 현상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가 법에 대해 얼마나 어느 정도 당당한 사회인가를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쟁점을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로 들고 가는 것을 법치주의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이 들 정도이다. 아무리 법치주의를 강조하더라도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이며 적절치 않다. 작은 소송의 건이라고 하더라도 접수해서 최 종 판결이 나는데 까지 최소 15명의 손을 거친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박길성)

규범적 기대에 대한 안정성 제공은 "법"에 달려 있다. 어쩌면 한국은 이런 법의 기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체계의 자율성이 문제가 아니라... 물론 법체계의 자율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한국의 법체계는 아주 성공적으로 그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1. 나도 누군가가 배신감을 느끼게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생각나는 경우만 따져도 몇 번 있다.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도 애를 쓰는 편이라고 얘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배신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그런 심리 상태를 느낄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아픈 걸 알면서도 또 아프게할 일이 있을 것이다 분명. 사람살이가 그런 법이니까. 내게 배신감을 안겨 준 사람들도 그러저러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일들을 피하려고 상대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는 편이다.

2. 보고서 최종 판을 내일까지 써주기로 했다. 쭉 작업했던 것은 아니고 만 하루를 투자하는 것도 아니지만 신경쓰이긴 한다. 여하튼... 이제 시작... 더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1.  어느 젊은 아빠가 태어난지 4일된 아들에게 Blackbird를 불러주는 영상을 봤다(여기). 안타까운 일은 신생아가 다음날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더 안타깝게도 아내는 이미 출산 후 자던 중 갑자기 숨을 거뒀다고... 마음이 아프다.

2. 죽음... 죽음 앞에서 사람은 겸손해진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 같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루 하루 살기 급급해진다. 수십년, 남보다 더는 못 살아도 최소한 평균수명만큼은 살 것처럼 생각하며...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게 반드시 좋을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전전긍긍하며?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아니 결국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그것을 삶을 대하는 태도의 기초로 삼으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 기초를 통해서 끊임없이 점검받으라는 것이다.

3. 학문의 의미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일이고 직업이다. 물론 보람도 있고 인정, 존경받으면 더 좋겠지. 일이고 직업이고 뭔가를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큰 일이다. 농민? 청소부? 초파리 연구하는 생물학자? 혜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 연구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사는 것, 열심히, 좋은 마음 가지고, 감사하면서, 남도 배려하면서...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요 며칠 통풍 증상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첫 발작 이후 약을 꾸준히 먹지 않았다.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서... 별 증상도 없고. 그러더니... 그 때 받아둔 약을 보니 지난 5월 이었다. 딱 6개월 지난 것. 오늘 찾아보니 이런 설명이 있다.

"간헐기 통풍은 통풍발작 사이의 증상이 없는 기간을 말한다. 일부 환자들에서는 발작이 다시 나타나지 않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두 번째 발작을 경험하게 된다. 통풍발작의 빈도는 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의 경우 시간이 갈수록 증가한다. 나중에는 발작이 급성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서서히 나타나게 되고, 여러 관절을 침범하며, 더 심하고 오래 지속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것이다. 6개월...  이를 어쩌나. 지금 치료 받을 여유가 없는데. 근본적인 치료법을 찾아봐야 할듯...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다. 그 죽음관은 프루스트가 정석화했고, 바르트가 그의 사진론에서 다시 환기시킨 죽음관인데, 그것을 그르니에의 에세를 읽다가 다시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을 왜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까? 깊이도 고통도 없는 글들을." (김현, 행복한 책읽기)

아래 글은 저 첫 문장에다 자신의 문장을 덧붙인 페친의 페친의 글이다.

"김현이 그랬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로, 한 번은 기억으로.
더는 망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때, 무서워라, 망자는 완전히 죽음의 세계로, 완전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가 사라진다.
 그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아이를 낳고, 제사를 지내며 망자를 기억한다."

구본준 기자를 기리며 쓴...
1. 배가 갑작스레 고프다. 하루 종일 평소보다 먹은 게 적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1시간 전쯤엔 과자 약간에 두유까지 마셨는데... 그래도 배가 부른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기분이다.

2. "갈등"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큰 주제다. "공동가치"라... 그것만 해도 그렇고.

3. 도덕에서 법으로. 도덕이 규범이 될 수 있나?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지역에서 예외적으로?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겠다. 그런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현대사회서는 법이 규범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나는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별로 반갑지 않은데 고전을 무슨 종교 경전 보듯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심지어 종교 경전마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체해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판에... 그래서 강준만 교수가 소개한 토플러 이야기가 반갑다.([출처] 왜 날이 갈수록 '~처럼'이라고 말하는 게 위험해지나? : 유추의 오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선 “인간 자체에 관한  지식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바, 토플러가 과거 지식의 무용성을 과장하고 있다”는 반박이 가능하겠지만, 굳이 그런 반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토플러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토플러의 과장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아이디어도 후세대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역으로 현재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유추의 오류’는 ‘유추의 축복’이 되는 역설도 가능할 수 있겠다.

16.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하이디 토플러(Heidi Toffler), 김중웅 옮김, 『부의 미래』(청림출판, 2006), 169~172쪽"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조금 전 페북에서 한겨레신문 구본준 기자이 죽음을 전해 들었다. 이태리 여행 중 심장마비였다고... 내게도 꽤 충격적인 소식이다. 그 분 글이 유익하고 재미도 있어서 기사는 물론 블로그 글도 찾아보곤 했기 때문이다. 페북에서도 소식을 종종 접했고. 나보다 겨우 몇 살 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안타깝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내겐 신해철의 죽음보다 이이의 죽음의 무게가 더 크다. 동질감을 더 느꼈던 모양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던 모습을 간접적이지만 지켜봐서... 문든 내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그이처럼 갑자기 죽는다면... 삼십분 뒤에... ... ... 사람들은 나와 내 삶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할까? 어떻게... ... ... 대개 갑자기 죽지 않고, 최소한 평균 수명 정도는 살 것이라 예상하고 인생 계획을 세우는데... 죽음이 더 잦았던 이전 시대 사람들과 인생을 달리 바라보는 것일 텐데... 그래서 젋은 사람의 죽음이 더 충격적입 법인데... 위험... 예측 불가능성... 불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소설 제목으로 알고 있는데 (2010), 그 이전에 동명의 영화가 있었나 보고 (2005, 감독 전수일), 프랑스에서 작가 프랑스와즈 사강이 1995년 코카인 복용 혐의로 유죄판결 받은 후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한다(고종석 문장 II 93쪽). 어쩜 그 이전에 있었을 수도...

‘무상복지’가 아니라 ‘보편복지’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속시원하게 대신 해줘서 전문을 옮겨 놓는다. 한겨레 글이다(조혜정 기자)

“지금은 대한민국의 무상복지 정책 전반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국고가 거덜나고 있는데 ‘무상 파티’만 하고 있을 것이냐.”

홍준표 경남지사가 지난 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 예산 편성을 둘러싼 논란 가운데 새누리당이 제기한 ‘무상복지’라는 용어는 정부·여당과 보수세력이 복지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쓰는 ‘무상복지’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헌법 제34조 1항)를 보장할 ‘국가의 의무’보다, 국민들이 ‘돈 안 내고 공짜로 혜택만 챙기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더 싣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 정치권에서 ‘무상’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쓴 원조는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때부터 무상교육과 무상급식, 무상의료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복지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희박했던 그 무렵 ‘무상○○’은 복지 제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이름이었다. 10년 뒤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무상급식’을 내세워 이겼고, 제1야당은 보편적 복지를 강령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무상○○’은 복지 확대가 보편적인 상식이 된 그 무렵 그쳤어야 했다. 하지만 무상급식으로 선거에서 ‘재미’를 본 야당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3무1반’(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반값등록금)으로 또 한번 ‘무상’을 꺼내들었다. 지난 지방선거 땐 ‘무상버스’ 공약까지 나왔다. 여당과 보수세력은 ‘무상복지 포퓰리즘’이란 자극적인 딱지를 붙여 마치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처럼 선거에 이기려고 복지를 공짜로 제공하는 것인 양 공격했다. ‘무상’의 어감은 점차 ‘복지=공짜’라는 식으로 변질됐고,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무상복지’가 성립 가능한 단어인가? 복지의 재원은 세금이다. 민주노동당도 ‘무상○○’을 주장할 때 부유세 도입이라는 그 나름의 재정 대책을 같이 제시했다.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부담해 다 같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10여년 전 우리 사회에 ‘복지’의 개념을 가장 쉽게 전달했던 ‘무상’이란 단어가 오히려 복지를 공격하는 소재가 된 것 자체는 씁쓸한 일이지만,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무상복지’를 입에 올리는 야당의 모습은 답답하다. 수명이 다한 ‘무상’이라는 표현은 접고, 이제 복지의 다른 이름을 찾을 때가 됐다. 보편복지, 협동복지, 의무급식, 연대보육…. 복지의 가치와 철학을 담은 새 이름 찾기가 복지논쟁의 또다른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페친이 소개한...

"Nur wer sich ändert, bleibt sich treu" (Wolf Biermann)
- "Only who is able to change, remains true to oneself."
꼴보기 싫은 삼성이 이렇게 또 우승하나보다. 분수령은 어제 경기였다. 오늘 넥센 선수들이 기운을 다 빼아긴 것 같았다. 시작하기 전 경기는 벌써 끝났다. 강팀과 그렇지 못한 팀의 차이. 상대의 헛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느냐, 자멸하느냐...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은 야구에도 통한다. 실력 이전에 강한 정신력. 아니. 정신력이 실력이다. 그러니 넥센 선수들을 나무랄 자격이 내겐 없다. 족구 경기에 한 번 참여한 적이 있는데.... 공식적인... 내겐 낯선... 막상 경기장에 들어서니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게 이런 거구나... 제대로 느꼈으니까. 정신줄을 한 번 놓으면 - "멘탈"이 붕괴되면 - 쉽게 회복하기 힘들다. 트라우마로 남기도 하고... 꼴보기 싫은 삼성. 참 대단하다. 역시 큰 경기 경험이 무서운 걸까?
내가 내리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왔다갔다 한다. 줏대없이... 상대에 따라...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좌파적?) 견해를 만나면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고, 긍정적인 견해를 강조하는 (우파적?) 견해를 주장하고 싶고. 뭐. 나만 그런 건 아닐테지. 균형잡고 싶어하는건 인지상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균형잡으려드는 사람을 만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고 싶다. 아. 이 치유불가능한 청개구리 신드롬.
화이팅! 이제부터 두 시간 동안 집중!
1. "힐링캠프"에 윤상이 나왔다. 나보다 몇 살 위지만 같은 시대를 보낸... 아니 윤상의  20대를 나도 동년배로 함께 겪은... 그 양반 최근 음악 작업은 상관이 없지만... 여하튼 윤상은 내게 음악인이 아니라 옛친구 같은 존재다. 그 양반 때문에 유희열, 이적과 함께 떠난 페루여행 "꽃보다 청춘"을 내가 열심히 찾아 봤을 것이다. 이적도 내가 한국에서 20대 때 경험했다. 달팽이... 유희열은 그 땐 몰랐으니까.
페루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윤상은 좀 독특한 구석이 있다. 오늘 보니 그 독특함은 부모님 이혼 때문인 것 같다.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서 거리를 두는... 그에에 그것은 "우울힘"으로 표현되었나 보다. 윤상...

2. "고추참치" 안주로 제격이다. 아니 자작하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안주다. 심지어 칼로리도 낮다. 컵라면의 절반! 이것도 자꾸 먹다보면 질릴까? 질리겠지? 여하튼... 지금 이 순간... 비교불가!

3. 넥센이 졌다. 넥센을 응원했다. 당연힌. 삼성은... 재벌, 부자집 아닌가. 물론 야구에서 재벌의 의미는 좀 다르다. 스포츠에 내포된 의외성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거든. 돈으로 쳐바른다고 우승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심지어 넥센이 삼성과 맞붙지. 어디 경제계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여하튼.. 경제계에서의 삼성과 야구계에서의 삼성은 그 위상이 사뭇 다르다. 지금 새구장을 짓고 있긴 하지만, 대구 구장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잖은가. 프로구단이 사용하는 야구장 중 거의 꼴찌. 실제로 야구에선 투입 비용과 결과의 상관관계가 약한 편이다. 어쩌면 바로 그 이유때문에 스포츠에 열광하는지도. 경제에서도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많지만 스포츠와 비교하긴 힘들다. 예를 들어 광고에 투자하는 비용을 늘리면 매출도 늘 것이라고 예측하는게 매우 합리적 판단이다. 경제에선. 스포츠는 그렇지 않지만... 여하튼 넥센보다 삼성이 한 수 위인 건 분명하다. 넥센 선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4. 아주 사소한 주제를 깊이 천착해서 큰 이야기까지 연결시키기.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런 주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에 살면서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이야기들.

- 엘리이터 안에 각종 고지서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아니 한국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 신호등 지키거나 안지키는 상황.
- "갈등" 상황. 갈등 회피 전략. 한국적 특성. 일상적으로는 위계질서가 매우 효과적인듯. 실제로... 매우 기능적....
- 노래방 문화 같은...
- 편의점 같은...
- 기타 등등.

2014년 11월 10일 월요일

노홍철 씨가 음주운전 혐의로 무한도전 등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중단한 모양이다. 단속을 보고 골목으로 도망갔다도 하고 아니라고도 하고... 설령 그가 도망갔다고 해도 난 그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주단속은 아니었지만 당황해서 책임을 회피한 적들이 있으니까. 그이도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했을까. 그가 쌓아왔고 또 계획했던 일들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인데 순순히 경찰 앞으로 갈 수 있었을까? 후속 행동을 결정하는 그 순간적인 판단... 그 판단을 잘 하도록 평소에 많은 연습을 해두어야 한다. 그 차이가 크지 않다. 49%냐 51%의 싸움이다. 선택 순간엔 그 차이가 정말 작아보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ps) 도망가지 않았고 무도 방송을 고려해서 채혈을 '정중하게' 요구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랬다면 노홍철씨는 정말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인 셈이다.

ps2) 서울대 수학과 교수가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누구도 그럴 수 있다. 언제라도... 49%와 51%. 경계에서 조금 어긋났을 뿐이지만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진다. 늘 경계 위에 서있다고 생각하고 떨어질 그 순간이 닥치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늘 마음을 다잡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직하지 않은 선택을 하기 쉽다.

ps3) 좋지 않은 결과를 선택하는 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씩 등장하는 자신을 희생한 의인들. 그들 역시 짧은 순간에 판단을 그 쪽으로 했을 것인데, 그런 결정을 하도록 알게모르게 자신을 다잡고 있었을 것이다.

2014년 11월 8일 토요일

서울대(?) 이광근 교수의 시원한 주장. 공감 200 아니 1000%!! 전문을 옮겨둔다.

"영어강의, 성균관, 패러데이 

영어강의는 당연한 미래일까? 필요하지만 그것이 서울대의 국제화 포석의 핵심은 될 수 없다고 본다. 나는 들었다. 우리 학술계의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 우리는 축적되지 않은 역사, 단절의 역사라고 한다. 중국은 천년이상 축적된 책들을 지금도 읽고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고 일본은 서구와 동아시아의 학술성과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삼백년을 넘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르다. 나는 우리 조상의 기라성같은 저서들을 읽을 수가 없다. 외국어(중국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기우일까? 모든 학문이 오리지날을 능가하는 것은 항상 어머니의 혀(모국어)로 달성된다고 한다. 영국 과학 기술은 라틴어나 불어로 꽃피지 않았다. 중국 불교는 산스크리트어로 인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성리학과 불교는 중국어로만 머물렀고 중국의 것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드물고 아스라할 뿐이다. 지금은 영어로 같은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단절될 것이고, 오리지널을 넘기 벅찰 거라고 본다.

모국어로 공부하기란 어떤 걸까? 예를 들어 만유인력, universal gravity라는 용어를 보자. 아마도 대다수는 ‘만유’를 소리로만 건성으로 지나칠 것이다. 영어(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느낌을 살려 ‘universal gravity’(‘완요우인리’)를 우리식으로 읽으면 ‘만유인력’이 아니라 ‘어디나 있는 끄는 힘’일 것이다. 쉬운 모국어가 아니라면 소리로만 이해 없이 주입되는 전문용어일 뿐이다.

이렇게 외국어로 겉도는 이해를 쌓아가게 되면 그 결과는 아마도 깊은 공부에 필요한 뒷심 부족으로 나타날 것이고 깊은 공부를 달성하는 인구는 그만큼 쪼그라들 것이다. 카오스 이론을 빌려 말한다면, 결과의 엄청난 차이는 초기조건의 미세한 차이에서 온다고 한다. 영어강의는 잘못된 초기조건이라고 본다. 서울대생이라면 영어소통에 능해야 하는 것은 기본. 우리는 그 너머를 지향해야한다. 

‘Rede Lecture Series’라는 것이 있다. 캠브릿지 대학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 여는 강연으로 현종 때(1668년) 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강의하고 저술하지 않았다. 학문의 저변을 넓히고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모국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모국어로 캠브릿지가 생산하는 지식을 대중들에게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어로 소수끼리만 소통하며 서서히 망해갔던 조선과 너무 대조되는 점이다.

우리와 비슷한 인구의 영국이 모국어로 힘차게 축적한 지식은 패러데이(Faraday) 같은 인물을 놓치지 않고 키워냈던 것이다. 영국 국민이 그 어느 누구보다 사랑했다던 과학자. 지금의 전자기 문명의 아버지인 패러데이는 책제본 공장의 불우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가 제본하는 과학서적들이 모국어였던 덕택에 그는 제본소로 들어오는 모든 책들을 읽으며 당시의 과학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모국어 토양 덕택에 학문이 고사되지 않고 소중히 자랐던 것이다. 일본이 모국어로 꾸준히 축적한 성과들. 덕택에 지금 일본은 다나카같은 중소기업 직원이 노벨상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서울대에서 시작됐으면 한다. 쉽고 수려한 모국어 전공서적 집필 사업. 따사로운 모국어로 권위있는 전문서적들이 축적되지 않으면 우리의 실력은 깊은 숲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국제화가 필요할수록 울타리 없이 경쟁할 힘찬 실력을 키우는 두터운 토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의 물결이 영어강의로 찰랑이는 캠퍼스의 표면 아래를 도도히 흘렀으면 한다. 이렇게 초기조건을 제대로 잡아가면서 먼 훗날 큰 차이의 과실을 나누며 존경받는 서울대. 이게 아니라면 서울대는 조선의 성균관처럼 박제로만 남을 역사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코리안시리즈를 드문 드문 보게 된다. 어제는 넥센 투수 한현희가 8회 홈런을 맞았는게 그게 결승점이 됐다. 오늘도 한현희가 등판했다. 넥센 염감독은 - 어쩜 그밖에 많은 감독들이 - 어떤 경기에서 실점을 많이 하는 등 잘 던지지 못한 투수를, 점수 차이가 많이 난 부담없는 상황에 등판시켜 자신감을 다시 찾게 한다고 한다. 오늘 한현희가 그런 상황에서 등판했다. 그런데 왠지 오늘도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 시즌 때 곱상한 외모와 어린 나이에도 과감하게 공을 뿌리던 그 한현희가 아니었다. 그러면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면서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이구. 어제 하루 못던졌다고 그렇게 기가 죽었나. 쯪쯧". 그런데... 어제와 오늘 내 상태가 바로 그렇다. 멘토 1호에게서 지적을 받고, 그 지적이 너나 정확하게 내 약점에 대한 것이라...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심한 녀석. 남 얘기하긴 쉽다. 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할까? 정리를 좀 할까?
1. 요즘엔 듣고 싶은 노래가 별로 없다. 어지간한 노래들은 다 시덥잖게 느껴진다. 내 고민, 갈등, 외로움, 괴로움을 이해하고 만져 줄만한 노래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클래식의 그 정연함도 싫고, 가사 있는 음악들도 싫다. 아 그 너저분하고 촌스러운 가사들...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동시대인들의 연주 음악 정도가 들어줄만하다. 유니스 황, Max Richter 같은... 특히 Max Richter의 기괴한 음악들... 술에 취해서 어질어질할 때의 그 묘한 느낌을 연상시키는... 아. 지금 들리는  저 음악. 바로 그런... "The Road is A Grey Tape"

2. 멘토 1호를 만났다. 나처럼 한심한 인간을 야단치면서도 끝까지 격려한다. 내가 기분 상해서 의욕을 꺽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키면서... 아 고마운 분이고 또 존경스러운 분이다.

3. turn에 turn을 거듭하다보니...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돌고 도니... 또 돌고 도니... 논문 한, 책 한 구절 읽을 때마다 돌고 또 도니... 그래. 그게 사실 정답에 가깝다. 확실한 것은 없고, 다 연결되어 있고, 모두 그 나름대로 일리를 갖고 있고, 이 사람 말도 맞고, 저 사람 말도 맞고... 그래서는 논문이 되질 않는다. 논문은 내 주장이 옳음을 근거를 갖고서 강변하는 것이거든. 나는 내 주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논문 쓰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4. 신청한 여권을 찾았다. 그새 만료되었던 것이다. 새 여권을 받아들고, 항공권 예매도 끝났고... 여전히 나는 복잡한 심사에 사로잡혀 있다.

5. 자.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과학을 둘러 싼 한국의 갈등" 그것이 연구 대상이다. 그래서 네 결론은?

6. 우주 크기를 알려주는 짧은  영상을 봤다.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힘이 쭉 빠진다. 이 좁은 세상에서 아웅바둥... 아웅바둥... 비슷한 경험을 오래 전 역사 관련해서 하게 된다. 인류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보게 되면 또 생각이 거기에 미친다. 아웅바둥... 아둥바둥... 이렇게 아둥바붕 살아서 뭐하나... 기운이 빠진다. 도사가 된다. 신선이 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네... 허나 그런 태도는 논문엔 좋지 않다. 왜? 자기 주장이 없으면, 강변하지 않으면 논문이 아니니까. 나도 모든 게 좋다고 얘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호불호가 분명한 편 아닌던가? 그 호/불호에 대한 단호함이 논문으로 이어지지 않는다즌 점이 문제, 그리고 함정.

7. 삶은 별 것 아니다. 그냥 소박하게 하루하루 재미있고, 즐겁고, 보람있게 사는 게 장땡이다. 그냥 풀처럼 새처럼... 아둥바둥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이미 나올대로 나온 상위 계층의 배를 좀 더 부르게 해주겠고? 그건 죄악이다. 그런 행태에 분노한다.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들. 먹고사니즘에 충실한 인간들. 차이를 인정할줄 모르고 자기 중심으로 통합시키려는 인간들. 내 분노 치수를 높이는 인간들이다.

8. 삼성이 한국시리즈 3차전을 이겼다. 넥센은 수비 실수와 한현희의 대담한 부족으로 졌다. 삼성이 또 우승하려나. 싫은데... 참 싫은데...

2014년 11월 6일 목요일

한국은 전반적으로 사회 갈등이 더 심하다. 선진국에 비해서.
1. 요즘 롯데가 여기저기사 말썽을 빚고 있다. 석촌호수 옆 롯데 타워가 그렇고 롯데 자이언츠가 그렇다. 롯데 사태에 대해서 김시진 전 감독은 이런 얘길 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성적을 내지 못한 책임"이라고 말했다. (...)  "만약 내가 잘 해서 성적이 잘 나왔다면 이번 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걸 또 변명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다. 아니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기도 하다. 워낙 썩은 곳, 더러운 일들 투성이라 그런 것들을 대개 덮어두고 간다. 그러다 어떤 더 큰 일이 터지면 그제서야 다들 쉬쉬하며 덮어두었던 치부들이 드러난다. 그 치부를 들춰내고서 책임을 물리고 상황 종료. 결과만 좋거나 크게 문제삼을 일이 없으면 그 치부들은 그냥 안고 가는 것이다. 바뀌지 않은 채...

2. 얼마전에 그x을 지지하는 나름 합리적인 선배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역지사지하고 공감대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지의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1억원어치 헬스기구 구입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식인데... 상대에겐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자기 지지 세력에겐 망원경으로 보려는 그런 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신앙은 같지만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 정의롭지 않은 권력, 정의에는 코웃음을 치는 권력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지? 그의 신앙이 의심스러운 일이라는게 내 새로운 결론이다.

2014년 11월 5일 수요일

Boyhood(2014)

이동진씨가 "보이후드"를 극찬한 것을 보고 구해서 봤다. 사전정보 거의 없이 봤는데 의외로 상영 시간이 길고 딱히 극적인 이야기가 없어서 후반부는 뛰어넘으면서...감독 Richard Linklater 이름이 낯설어서 찾아보니 Before sunrise, Before sunset의 그 감독이아. 조금 연결이 된다. 이던 호크Ethan Hawke도 그렇고, 대사 많고, 일상적이고, 다큐 분위기도 조금 나는... 엄마 역 퍼트리샤 아켓(Patricia Arquette)은 누굴 닮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케이트 윈스릿 Kate Winslet이다. 어른들은 표가 덜 나지만 아이들이 실제로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가졌는데... 12년 동안 매 년 1주일 찍어서 완성한 영화라고... 그냥 아이들의 성장기다. 특히 Boy의... 덤으로 미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냥 극적인 사건도 없이 그냥 쭉 흘러가는 영화다. 그게 우리 삶이 아니냐고... 뭐 대단한 극적인 걸 기대하고 내 영화를 보느냐고 얘기하는 듯한...
페친 김요한 목사님의 "성령충만론". 그렇다. 나는 아직 먼 것이다.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성경을 더 사랑할 뿐더러... 자신의 전공분야에 탁월해지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의지가 강해지며... " ㅠ


"나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성령충만의 개념을 바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성령충만해지면 성경을 더 사랑할 뿐더러 더 올바로 깊이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탁월해지며, 바른 역사의식을 갖추며, 사회 현상에 대해서 피상적이지 않고 분석적으로 접근하게 되며,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의지가 강해지며, 삶을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설계하게 되며, 잘못된 습관과 중독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는 등등,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삶의 자원과 은사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쓰는 것, 그것이 성령충만한 모습이고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4일 화요일

사회갈등을 기독교,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기독교는 사회 속에 있다. 물론 사회 내로 한정될 수는 없지만. 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어쨌건 사회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고, 사회 변화와 직결되는 사회 갈등의 양상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회 갈등"은 잘 짜여진 "사회 질서"와 대척점에 있다.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갈등을 통해서 질서를 바꾸는 것... 둘 다 의미있다. 낡은 질서, 정의롭지 못한 질서가 지배적이라면 갈등을 일으켜서 그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 신앙의 관점에서 필요하다. 불필요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애쓰는 것, 그것 역시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부정의한 사회 구조로 불이익과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을 사회 문제, 사회 갈등으로 만들어 낼 여력과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 그래서 사회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신앙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다.

"정의로운 복지국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내가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과 일치한다. 그것에만 매몰되어 "하나님 없는 지상천국"만 지향하는 일은 경계해야겠지만...

루만이 주장하는 "기능적 분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국가"에 상당히 근접한다고 본다. 물론 복지 보다는 정의, 공의, 절차적 합리성, 개인주의, 자율성 이런 쪽에 가깝다. 복지, 국가의 역할, 개입... 이런 방향에 대해서는 좀 덜 친화적이다. 물론 말년에는 이런 부분을 강조하긴 했지만 이론의 전체 디자인을 보면 더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었을 것 같진 않다.

"'야신' 김성근 감독, 7일 청와대서 리더십 특강"

이 기사 제목만 읽고서도 짜증이 확 밀려왔다. 평소에 내가 김 감독에 갖던 의구심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사는 대개 양면, 아니 다면적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면만 듣고 보고 즐기기 힘들다. 내가 싫어하는 면이 있다면 감수하거나, 싫은 면이 너무 커지면 좋아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대개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겠지. 김 감독은 프런트와 갈등도 불사하고 자기 야구를 한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는다. 정면돌파형. 노통도 이런 과에 속했지. 조직, 선수들을 확실하게 장악한다는 점에서 어리버리한 감독들과 다르고, 그 화끈함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성정지상주의자다. 승리를 위해서 일사분란하게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누가 연상되는가? 박통이다 박통. 총화단결.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온국민이 총화단결하도록 밀어부치는... 오로지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업을 물려받은 그X이 아버지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김성근을 초청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럽다. 우연찮게 김감독 박통 모두 일본 쪽이네. 김성근은 그래도 야구단 하나만 저렇게 만드니까 다행스럽다. 모든 야구단이 김성근식 야구를 하고, 김성근 강연을 들은 대한민국 조직들이 다 김성근식으로 바뀌고, 아니 온나라가 김성근식으로 사고하고 움직인다면... 그건 파시스트 국가다. 김감독은 사람들이 띄워주니까 지금 그 어느때보다 기고만장해있을 것이다.  비정상까진 아니지만...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자율적이지 못한 인간들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능력도 자신도 없는 인간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대망하는 것처럼...

아래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기사다.


 [배우근의 야구블랙박스]감독은 선수의 스승인가?


"... 그런데 프로의 세계에서 감독이 선수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감독과 선수는 각자 구단과 1대 1로 계약하는 관계고, 또한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다. 감독은 구단에서 뽑아준 선수들을 잘 운영하는 것이고, 선수는 몸값에 맞게 활약하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한 배를 탄 동업자지만, 들여다 보면 철저히 개인사업자들의 집합체다.

...김응룡 전 감독은 “여기(프로)는 학교가 아니라 직장이다”라고 말하며 “기자들은 스승의 날이 되면 신문사 내 상급자에게 선물을 하나?”라고 되물었다. 감독은 상급자일 뿐, 프로선수는 말 그대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인품을 가진 ‘야구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근 김독이 선수를 머리를 짧게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놓고서 미국 뉴욕 양키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규칙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구단의 전통과 감독의 지시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다. 수십년, 심지어 수백 년 이상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구단의 전통과 언제 바뀔 줄도 모르는 감독이 와서 선수들에게 찌질한 요구를 하는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감독 스타일일 뿐이다. 내가 보기엔 아주 짜증나는 스타일.

ps) ㅋㅋ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 있단 말이지.

페북에서...

"김성근의 야구는 통합형과 독재형의 경계에서 독재형에 치우쳐져 있다.....야구인들은 김성근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바뀌어야 한다는데 동의 했다...언제까지 쥐어짜는 야구만을 할 수는 없다..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요즘 선수들에게 먹히지 않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청와대가 그의 리더십을 배우겠다고 강사로 초대한 이유가 뭘까??

언급된 기사는 중앙선데이의 "효율 극대화 vs 개발 독재형 … ‘金의 방식’에 엇갈린 시선"

허구연 씨는 이런 얘기도 한 몽양.

" 그렇게 힘들고 혹독하게 훈련시키는데 왜 선수들이 따라오느냐.. 전 소통이 되는 감독이라고 봐요.. 무작정 힘들게만 시켰으면 엉망진창 되었을거에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러니 더 한국식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얼마나 정감있었나? 논두렁에서 농민들과 막걸리 먹으면서 국민들 계몽시키지 않았는가. 잘 살아보자고. 김성근은 "우리도 한 번 이겨보자. 우승해보자"고 하는 것이고...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사회갈등과 기독교 신앙.

(1) 한국 개신교는 사회갈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만 그 방식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말기...
"유교사회의 갈등구조가 교회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혁파되었고, 이 종교공동체는 양반이나 상민이
나 또는 천민을 초월의 하나님 아래 동등한 형제자매로 묶음으로 유교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풀어나갔던 것이다." (숭실대 박정신 교수)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문제 삼기도 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궁극적으로 갈등이 심화되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갈등이 아주 천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기여하기도 한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면서... 각종 도덕적 이슈를 들고 나와서 논쟁을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한다. 정치적 주제를 놓고서 갈등, 분쟁을 일으키거나 심화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원칙없이 기득권 집단 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은 보기 흉하다.

(2) 사회갈등 중재자이기도 하다. 드물게...

(3) 갈등이 없는 것이 최선도 아니다. 때로는 없던 갈등도 만들 줄 알아야. "내가 화평이 아니라 싸움을 주러 왔다" "거룩한 분노" 싸움, 갈등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신해철은 난 사람이었던듯...


[어제 공개된 생전 마지막 방송 녹화에서 신해철은 이렇게 말했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보험사에서 최소한 주유소까지 향하는 기름을 넣어주는, 최악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이다."]
사회 갈등을 잘 풀지 못하는 나라 순위를 매긴다면 한국은 분명히 상위권에 자리잡을 것이다. 사회 갈등이 다양하면서도 잘 못 푸는 나라로 제한한다면 선두에 설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이고. 사회 갈등이 다양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어있고, 시민들의 이해관심이 다양해질 정도로 여유있고 안정되어있음을 전제로 해야 상상할 수 있다. 여하튼... 왜 그럴까? 왜 한국의 사회 갈등의 영역은 다양해졌을까? 사회 갈등 해결 능력은 왜 이렇게 떨어지는 것일까?

(1) 무엇보다 정치체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의 기능 원래 갈등을 흡수해서 국가 영토내에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체계다. 특히, 정치체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국가, 의회 등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당성 있는 결정을 내리고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참여적 절차에 관대하기도 하다. 여론조사로 선거 후보를 뽑는 나라니. 민주주의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그 형식성만 지킬 뿐 내용은 천박하기 그지 없다.

"사회합리화 과정을 거쳐 힘의 논리가 합의적 지배논리로 교체될 때 사회갈등의 완화를 기대할 수 있는데, 권력 추구적 세태가 갈등 해소의 실질적 기반인 대화와 설득의 공간을 응축시킴으로써 사회갈등의 과격화․파국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점이 한국사회 특유의 맹점이라고 여겨진다." (김문조, 김종길 2007: 55f)

(2) 지식, 견해, 의견 등이 유통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졌고 그 속도가 빠르다는 점 또한 갈등이 크기 위한 중요한 토양이다. 정보통신, SNS 쪽으로 발달해있다는 조건, 갈등과 싸움을 부추기는 보도를 선호하는 언론, 갈등이 자라기 위한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3) 갈등을 중재, 조정, 결정 내릴 수 있는 신뢰 받는 권위자, 권위있는 집단, 전문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넷티즌 수사대"니 "BRIC" 같은 집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언론도 "인터넷언론" 등등.

(4) 갈등 조정에 필요한 공유 문화의 저발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서로 다른 입장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메타문화, 메타가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그런 공유 지점이 매우 좁거나 부재하다. 합리성, 상식, 공정성, 원칙, 게임의 법칙, 법치국가 등등.
- 정의로운 복지국가, 급진적 개인주의... 자유, 평등... 원칙...절차적 정당성.. 차이의 인정...

- 우리는 집단적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피난민 정서... 이 정서의 재생산...


- "가치갈등"이 극한적 대립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선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의, 복지, 개인주의, 사회적 합의일 것이다.

북유럽 급진적 개인주의

"급진적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박이은실 한겨레 칼럼) 중

"북유럽식 개인주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안에 있는 개인들이 저마다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인 편에 서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다는 것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생각한다. 모든 개인은 자율성을 보장받고 가족을 통하지 않고 국가와 직접 관계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민 개인을 모든 형태의 종속과 의존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의무를 갖는다. 빈민을 자선단체로부터, 노동자를 고용주로부터, 아내를 남편으로부터, 어린이를 부모로부터, 노인을 자식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의무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유럽식 개인주의’이고 이는 ‘철저한 개인주의’ 혹은 ‘급진적 개인주의’라 불린다. 급진적 개인주의란 다름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개인이고 개개인이 안녕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사회도 안녕할 수 있다고 본다. 가족이 아니라 개개인의 복지에 초점을 두는 가치관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세제와 가족법 개정을 통해 개인이 가족에 가장 덜 의존하는 사회, 즉 가장 개인화된 사회를 만들어왔다. 북유럽 사람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존하지 않는 관계, 서로 평등한 권력관계에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상적인 가족도 누가 누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 일하고 각자 경제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1. 하나님의 뜻, 마음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쉽다면 또 쉬운 일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을 뿐인가? 나무 뿌리가 뽑힐 정도로 눈물 철철 흘리면서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겨우 알 수 있던가? 하나님은 이성도 주셨으니, 동서고금 각양각종 학문적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성경을 분해, 분석, 해석해 내면 알 수 있을까?

2. 일반은총이라고 하던가? 세속적 질서도 하나님 소관이다. 선과 악이 모두. 선에 대해서는... 인류가 그동안 이룬 긍정적 성취들, 그것들은 명시적으로 하나님과 관련 짓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것인가? 신에 대한 믿음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근대적 질서, 특히 선진국. 그 "근대인들"은 비록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덕에 그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악, 불행은 어떤가?  악, 불행, 사고도 하나님 소관 아니던가? 그러니 하나님이지. 불행에도 뜻이 있다? 악이니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다만 하나님은 악을 만들지는 않으시지만 허용은 하신다?

3. 인본주의에 기초한 근대적 질서는 장점도 많이 있고 한계도 분명하다. 장점은 하나님 뜻의 실현이고, 단점과 한계는 하나님을 떠난 죄값인가?

4. 장점에 초점을 맞추면... 인류는 정말 많은 것을 이뤘다. 하나님의 뜻이 잘 실현되고 있는가?

5. 단점에 초점을 맞추면... 인류는 더 불행하고, 더 많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 무리들이 많다. 타락이 정점을 이루면 새하늘 새땅이 이루어 질 것이다.

6. 후발국의 관점에서 보면... (1) 하나님을 잘 믿어서 축복받은 선진국 모델을 따라 가자. 세속적 질서도 배울 점들이 많고, 그들 모델, 체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자. (2) 선진국은 동시에 더 타락한 모습도 보인다. 하나님 믿음을 포기하는 인본주의가 지배적이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등등. 그러니 차라리 세속적 질서의 긍정적인 점을 포기하고 신정으로 가겠다. "신정" 좋아하는 사람들은 IS를 보면된다. 이슬람 국가들...

7.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문제는 "근대성"이다. "근대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좋은 열매만을 따 먹을 것인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만? 인권, 부유함 등등? 서구 복지국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잘 실현된 복지국가에서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종교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세속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잖은가? 그렇다. 세속화. 한국의 경우는... 세속화된 서양 사회가 만들어 낸 긍정적 성취들, 그것을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이유가 충분하잖은가?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고민을 하겠지. 서양 선진국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들. 그런 점들을 경고할 필요도 물론 있을 것이다. 서양 선진국, 근대성에 대한 평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서양이 겪은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하튼 특히 서양은 20세기에도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낳은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르고, 그 전후로 이념 갈등 등을 겪으면서 그들 사회의 체제를 정비했다. 그 방향이 곧 정의로운 복지국가 아니던가. 복지만 이야기 할 게 아니다. 사실은 "정의" "공정"이 먼저다. 지킬만한 "게임의 룰"을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지키게 하는 것. 그렇다. 체계통합 등 논의에서 내가 하는 얘기도 곧 "정의"다. "공정"이라는 가치. 공정, 정의에 대한 신뢰. 개인주의 따위가 아닌 것이다. 아니 서양의 개인주의의는 정의, 복지를 모두 전제로 삼고 있는 개념이다.  
오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면서 느낀 바.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논문을 써야겠다는... 물론 이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막힌 길을 돌아도 또 막히고, 그렇게 막힌 길을 돌아나와 다른 길로 접어들어도 또 막히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이제 내게 남은 출구는 오직 하나라는 고백을 최근에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오늘 깨달음은 그랬다. 하나님의 마음이라...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또 따지고 보면 얼마나 쉬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게 하는 것 아닌가? 내려놓고, 포기만 하면... 그렇다. 내려 놓을 수 있고, 포기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쉽고 편한 방법은 또 없으리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새삼스럽게 확인하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하나님의 뜻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2014년 11월 2일 일요일

"1950년대의 개인주의"


"전쟁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한국인들은 국가나 정부, 그리고 사회 역시 개인의 생활을 안전하게 보장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나 집단의 이익보다는 개인에게 중요한 의의를 두는 개인주의 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 인주의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에서 더 강화되 었으나 그 뿌리는 전후의 개 인주의에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개인주의는 일종의 무규범 상태에서의 방어 기제와 같은 성격의 것이 다. 즉 법과 규범 및 인간 관계에 대한 불신과 불안정 속에서 자기와 자기 이익을 지키고 추구하려는 이기적 성격의 개인주의가 광범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개인주의의 역사" 중에서)
페친 장대익 선생 이야기. 서울대 이태수 교수 인터뷰 발언에 대한 소감.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의 정체성에 관한 이태수선생님의 탁월한 인터뷰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성찰이 느껴지고 많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뒷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세련된 언어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결국 과학을 팩트의 세계에 가두고 있네요. 이런 분리론으로는 '사상으로서의 과학', '가치로서의 과학'의 모습을 포착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과학은 인문학과 함께 가치, 실존,의미의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생가합니다."

인터뷰 중 이런 구절을 염두에 둔 것 같다.(인터뷰 링크)

"인문학은 사실 인식을 목표로 해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사실 인식은 과학의 고유한 임무다. 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은 인식된 사실의 의미 연관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인식된 내용을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거기에 부여된 기왕의 의미를 캐내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좋음, 나쁨, 옳음, 그름의 가치평가가 이루는 격자망 안에 엮어 넣는 것이 인문학이 하는 일이다."

"과학은 사실 인식을 넘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 뒤 인간이 삶의 스토리를 어떻게 꾸며야겠는가 하는 질문까지 맡아서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이 한때 교황청이 했던 것처럼 연구에 개입해서 천체 운동에 대한 사실 인식을 왜곡시키려 들 권한은 없다. 인문학은 과학의 사실 인식 성과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면 인문학은 비이성적인 푸닥거리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임무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 개량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정말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 할 일이다. 인문학은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인지 미리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용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좋은 것, 우리가 실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일이다. 그것은 뇌과학이나 유전공학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분야의 지식을 기술로 연결시키고 기술을 활용할 방향을 결정하려면 인문학적 성찰을 건너 뛸 수 없다. 인문학적 성찰 없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장님에게 좋은 지팡이를 장만해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혼란스럽다. 인문학과 과학을 구별하는 방식이.. 사실과 가치의 차이. 과학의 Funktion과 Leistung 구분이 매우 유용하리라. 인문학 하는 양반들은 죄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고대철학자들을 21세기에 구현하려나보다. 과학, 학문의 자기지시적 성격, Funktion은 자연과학에나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고....
한국에서 학자들이 "학술지"를 "잡지"라고 부르는 경우들 흔치 않게 보게 된다. 아무리 "학술지"알기를 우습게 알아도 그렇지 "잡지"라니. "잡지"라는 표현이 주는 "잡스러움"이 별로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1. 박학다식하고 매사에 합리적인데다 유머도 많은 선배가 그네씨의 천박한 행태를 옹호하는 입장임을 페북에서 확인했다. 지난 번 대선 때도 그녀를 지지하긴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적극적인 지지자인 모양이다. 실망했다기 보다는 어리둥절하다. 연결시키기가 힘들다. 사람이 달리 보인다. 어떻게 그럴수가...

2. 아. 물론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그 선배 정도면 서로 다른 입장을 놓고서 충분히 유익한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유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있을 테니까...

3. 따지고 보면 그 선배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대개 자기 편에겐 관대하고 상대방에게 엄격하기 쉬운데... 그게 인지상정인데...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 선배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 싸움을 하지 않으려면 자신과 자기 편에게 조금 더 엄격해야하고, 상대방에겐 조금 더 관대해야 한다.
내게 신해철은 무한궤도, 솔로 가수 신해철, 초기 넥스트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 그가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고서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기엔 한국에 없었으니... 귀국 후엔... 그에 대한 소식을 가끔씩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솔로가수 시절 발표했던 발라드풍 노래들을 좋아했지만 그 노래들은 지금 듣기엔 너무 낡았다. 신해철은 내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신해철이 사람살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입장은 - 아래 소개할 글의 해석이 맞다면 - 나와 아주 비슷하다.    이 글을 소개한 페친의 입장은 더 비슷하다. 어쩜 그리 놀랍지 않을 일일지도...

문유석 판사가 머니투데이 실은 칼럼 중...

"그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한 말은 의외로 소박한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 사실 그의 청춘기에 ‘개인’은 희귀했다. ‘국민’, ‘민족’, ‘민중’은 넘쳐났지만 말이다. 그가 말하는 개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도, 역사의 필연인 혁명을 이뤄낼 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나지도, 신의 뜻을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창조되지도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개인은 ‘근대적 인간’이다. 그의 말을 빌면 ‘유전자 전달이라는 목적은 태어남 자체로 이루었으니 인생은 보너스 게임, 산책하러 나온 거다’. 이런 개인주의는 누군가에게는 ‘종북, 좌빨’보다 더 불온한 것일 게다.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그 무엇보다 집단주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청년기, 독재에 대항한다는 학생운동의 주류 역시 ‘의장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자’는 수준의 또 다른 전체주의였다. 그 투사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후배들에게 직장에의 헌신을 강요하는 꼰대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교, 직업, 외모, 사는 동네, 차종, 모든 것이 서열화되어 있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문화, 입신양명이 최고의 효도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가치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집단주의 문화로 인한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심리학계의 실증적 연구 결과 문화에 따른 국가별 행복도는 극심한 대조를 이룬다. 북유럽, 서유럽, 북미의 행복도가 높은 데 비하여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행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낮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을 개인주의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의 차이로 분석한다. 그는 공교롭게도 이 두 문화권을 비교하는 ‘비정상회담’에 출연하여 행복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게 그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만연한 개인주의로 인한 문제가 심각한데 무슨 헛소리냐고? 그건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겠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쉽게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 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 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서구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똘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동성동본 금혼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을 노래하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를 주장한 그의 행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최소한 유럽에서라면 하품이 나올 정도의 상식일 뿐이다. 그가 무슨 대단한 사상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가 뒤늦게 태동하던 민주화 이후 시대에 누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튈까봐 하지 않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거침 없이 내뱉는 솔직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술적으로는 IT 강국이고 정치제도적인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근대 자유주의조차 체화하지 못한 문화 지체의 시대에 그 같은 사람은 끊임 없이 시대와의 불화를 낳는다."

이 칼럼을 소개하며 페친은 이런 글을 남겼다.

"문유석 판사의 글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내가 매혹되었던 것은 '서구적 의미의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로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정치적 의식으로는 좌파였지만, 
내가 대학 시절에 운동권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은,
운동권 집단에 이질감을 느낀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한국적인 집단주의'때문이었다.
아직 우리는 서구적 근대, 근대국가, 근대인에 이르려면 긴 시간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후진 이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