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나는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별로 반갑지 않은데 고전을 무슨 종교 경전 보듯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심지어 종교 경전마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체해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판에... 그래서 강준만 교수가 소개한 토플러 이야기가 반갑다.([출처] 왜 날이 갈수록 '~처럼'이라고 말하는 게 위험해지나? : 유추의 오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선 “인간 자체에 관한  지식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바, 토플러가 과거 지식의 무용성을 과장하고 있다”는 반박이 가능하겠지만, 굳이 그런 반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토플러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토플러의 과장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아이디어도 후세대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역으로 현재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유추의 오류’는 ‘유추의 축복’이 되는 역설도 가능할 수 있겠다.

16.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하이디 토플러(Heidi Toffler), 김중웅 옮김, 『부의 미래』(청림출판, 2006), 169~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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