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

흠. 무슨 일을 하든지... "특이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런 이들... 밥을 먹을 때도 주께 하듯 먹어 보라. ... 매번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도 '깨어서'(mindful)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손을 씻을 때에도 손 씻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면 흐르는 수돗물 소리도 시냇물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고... '생활 영성' ... 근데 어디선가 이런 반론이 들리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려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 하나둘씩 모노태스킹 영성을 연습해 나가면 이전 방식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운이 솟아나게 되고, 다시 그 힘을 길어 다른 일을 주께 히듯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예상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는 것은 할 일 많은 이 사회에서 능률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오늘날 양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목말라 하고 숫자가 부족해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니잖은가." (욕쟁이 예수, 박총, 77쪽 이하)

하다못해 인터넷을 통해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동시에 여러 사이트를 열어 놓는다. 인터넷브라우저에서 멀티탭 기능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얼마나 환호하면서 반겼던고. 맞다. 멀티태스킹은.... 영성도 영성이지만... 일 효율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때가 많다. 경험상... 분명히 그렇다.

2013년 6월 29일 토요일

"여성은 시를 지어서는 안된다. 시가 되려고 애써야 한다" (브(블?)루멘탈)
the pain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고통... 
아시아 지역에서 불확실성, 복잡성이 커졌다.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불확실성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체계 간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체계의 자율성이 커졌다는 점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불확실성과 복잡성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에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로 우리의 사고가 전환되어야 한다" (로빈 마이어, The Underground Church, 2012)
삶의 끝에 서면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너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남들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욕쟁이 예수 (박총, 2010, 살림)

"전적 타락은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 죄의 영향에 노출되지 않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는 뜻이다"(17쪽)

"분호하는 것은 함께 고통당한다는 뜻이다. ... 분노를 회피하고 자신의 영혼에만 살뜰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롬 8:17)를 거부하는 것이다" (19쪽)

"그놈의 은혜 때문에 모든 언행심사를 스테리오 타입에 끼워 맞추려 드는 이른바 '은혜 필터링'이 강하게 작용하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닌 폭력과 파시즘이 되고 민다. 사실 그동안 교회는 '있는 모습 그대로'보다 '되어야 하는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해방의 기제가 아닌 일종의 억압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은 우리가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32쪽)

"많은 사람들이 단순화의 폭력에 기대는 것은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 - 개혁주의 미학의 거봉 캘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의 책에서 언급된 - 을 없애 주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에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불확실성이란 놈은 우리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 매번 확신 속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심리적 안정감을 더 의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다... 신앙은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다. ...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고통 속에 길을 떠났다.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며 언제 하나님이 자신과 민족을 구원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고통 속에 살았다. 욥도 하나님이 왜 그런 엄청난 재앙을 내렸는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42 - 43쪽)

"필립 뉴엘(J. Philip Newell)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은 지역에 따라 지중해 영성, 켈틱 영성, 그리고 동방 교회의 영성으로 크게 나뉜다. ... 지중해 영성은 인가의 죄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그리스도의 가없는 속죄를 쉼 없이 고백한다. 지중해 영성에 의하면 죄악으로 버물려진 세상에서 낙을 구하기 보다는 영원한 곳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추구할 삶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죄악과 세상이 타락에 방점을 놓고 있는 지중해 영성이 영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 켈틱 영성은 창조의 선함에 방점을 찍는다. ... 죄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흐릿하게 하고 창조세계를 비릿하게 했지만 본래의 빗깔과 향기를 다 지우지는 못했다고 믿는다. ...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두 권의 책이 있다고 믿는다. 한 권은 성경, 즉 '말씀의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창조의 책'이다. ... 켈틱 영성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와 말씀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 식사기도... 우리가 영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릇된 위계질서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업도, 결혼도, 식사도, 교제도, 놀이도 영적인 것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가 되고 만다. 그 자체를 즐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가멸게 하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거룩한 일을 해야한다'는 이원론적 환원만이 남게 된다. ...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에 따른 속죄의 필요성만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왜 같은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과 창조세계의 선함을 강조하지 않는가? ... 구속신앙에만 치우친 우리들은 켈틱 영성을 통해 창조의 선함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정의로운 전쟁론(just war theory)'에만 익숙한 우리는 메노나잍트 전통을 통해 평화의 그리스도를 만난다. 복음의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잃은 우리는 해방신학을 통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삶을 배운다. 신비체험에 두려움이 있는 우리는 오순절 교회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법ㅇ르 배운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우리는 유럽의 사회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다른 사회정치적 관점도 성경적일 수 있음을 배운다. ... 각양 다른 은사를 받은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교회를 이롭게 한다는 말씀(고전 12장)은 개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전통과 특색을 지닌 전 세계 교회에, 나아가 우주적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켈틱 예수. 한국 교회와 켈틱 영성이 입 맞출 때까지 172 - 182쪽)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보다는 세상의 타락만을 기형적으로 강조해왔다. ... 복음주의 전통은 성자의 구속 영성에만 목을 매고 성부의 창조 영성을 등한시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구속의 은혜를 구하게는 되었지만 일상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창조의 은혜를 누리며 살지는 못하고 있다. ... 우리네 삶의 '죄악 됨'과 '덧없음'을 말하면서도 우리네 삶의 '축제 됨'과 '즐거움'을 말해야 하고, 복음주의 신앙의 강점인 구속 영성을 더 깊이 일구어 가면서도 하나님 지으신 일상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창조 영성에 눈을 떠야 하고, 우리의 '원죄'를 통감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원죄' 이전에 '원복'을 먼저 받은 복된 존재들임을 노래할 시간이 되었다." (191 - 192쪽)

"'복음'이 대체 무엇인가? ...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복된 소식...[??]  성경에서 답을...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 문맥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인 것 같은데 이게 왜 복음이 되는지 선뜻 알 길이 없다. ... 회개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실제로 그리스어로 '유앙겔리온(euaggelion)'이라 부르는 복음은.... 로마다 독접하다시피 즐겨 쓰던 어휘... '승리의 소식을 가져왔다!''... 당시 사람들이 '복음' 하면 떠올리던 것은 '로만의 승리'였다. ... 예수님은 로만의 통치와 번영을 뜻하던 단어 '복음'을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통치)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로 로마 제국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힘과 지위, 번영과 성공, 기득권과 안락한 생활을 위해 살아가는 '로마의 삶의 방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사랑과 공의와 평화와 나눔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 - 이는 산상보훈에서 선명하게 제시되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완벽하게 실현된다 -을 제시한 것이다. ... 예수님의 복음은 '반제국적 복음'이라고 한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ely)....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로마의 복음을 부러워하고 추구했던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성공과 일류대...를 더 의뢰했고, ... 제국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들은 보통 회개한다고 하면, 거짓말, 미움, 시기, 분노, 불성실, 음란함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회개한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삶의 방식의 회개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같은 윤리적 사안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갖고 뉘우친다. 제국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삷과 결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의 회개 없이, 세상 사람들 수준의 뉘우침만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은, 회사를 운영하고,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목회를 하더라도 세상의 방식, 로마의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194 - 199쪽)

"일반은총의 측면에서 보면 불교도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은 샤머니즘에 더 깊이 물들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샤머니즘엔 윤리라는 것은 없고(윤리란 관계에서 나오는 것인데 샤머니즘엔 신이나 영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욕망만 있고 인격적이거나 언약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윤리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자신과 제 피붙이들의 건강과 성공밖에는 없다(물론 불교도 샤머니즘화되어 이런 비판이 무색하긴 하지만 겨우 백 년 만에 같은 꼴을 보인 기독교도 할 말은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등종교로서 자비에 의거한 생명철학을 설파하고 높은 윤리 수준을 요구하나 불교가 우리 민족의 삶에 귀한 기여를 한 셈이다. ... 이만열 교수는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불교나 유교가 있어서 그나마 우리나라가 샤머지즘화한 사회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였고 그로 인해 불교를 주신 주님게 감사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223쪽)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발전'이란 개념부터가 미국이 유포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에 의하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마땅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자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서구식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국가를 저개발(underdevelopment)로 명명함으로써 열등감을 조작해 냈다. 이후 선진국(developed country),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후진국(underdeveloped country)이라는 범주는 나라와 민족의 우열ㅇ르 보여 주는 절대적 지표가 되었고 교회도 이를 충실히 받들어 왔다."(268 - 269쪽)

"가장 기술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일본... 일본에는 사무라이 막부 시대부터 칼 하나를 만들더라도 고도의 기술력이 축적될 수 있었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데다가 칼을 만든 대장장이가 자신의 결함에 대해 죽음(할복)을 책임지는 전통이 더해져서....
스위스... '시계'... 교회개혁자 칼뱅은 직접 제네바를 다스리게 되면서... 이 땅에서 받은 소명(직업)을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삶을 설파... 유럽의 다른 어떤 곳보다 시간을 아껴 쓰고자 하는 새로운 '시간관념'이 생겼고... 이에 대해 칼뱅이 여성의 귀금속 착용을 금지함에 따라 일거리를 잃은 보석세공사들이 시계제조공으로 전향...
오늘날 선진국인 유럽은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뒤지고 있었다. 그러던 유럽이 식민지 침탈과 산업혁명을 거쳐 물질적, 군사적으로 앞서 나가게 된 배경에는 서구인들의 고질적인 침략주의적 성향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있었다. '수량화 혁명'(The Measure of Reality)의 저자 앨프리드 크로스비(Alfred W. Crosby)는 실재라는 것을 수량화된 개념으로 정리하는 유러빈들이 사고방식이 19세기 유럽제국의 패권을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유럽인들은 지식을 개념화, 수량화, 통계화했고 이를 금속활자 인쇄술을 통해 대량 보급함으로써 지식의 축적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경우 지식이란 '스승과 제자' 간의 도제식 학습을 통하여만 저수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다가 물질을 정신보다 천시하는 전통과 맞물려서 서구의 산업혁명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없었다.
조선 기술.... 중국은 명나라 시절 정화의 원정대가 아프리까까지 진출한 적도 있었지만,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항싱 중앙집권이 주요관심사였다. 그러니 해외 진출을 도모함으로 발생하는 해상 거점은 중앙집권체제에 커다란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반면 유럽은 좁은 땅에서 경쟁이 심하다 보니 시야를 외부로 돌리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편서풍이 무사히 대서양을 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 공중도덕... 국민성이 ... 더 뛰어나서가 아니다. 일본은 전통적인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개인이 전체에 폐를 끼치면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고, 가정이든 회사든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해친 사람은 응분의 이지메를 당하기 때문에 남의 눈을 거스른 행동을 하기 어렵다(한국인의 뻔뻔함과 대척점에 있다. 물론 우리도 집단주의 지향이 강하지만...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jk) ... 일본... 은혜없는 사회... ""(269 - 271)

"서구에서 건너온 논문이라는 글쓰기가 지식을 담아내는 최상의 그릇인가 의문이다. 당장 동아시아권만 해도 경의經義, 서론書論, 문답問答, 도설圖說, 잡설雜說   등 다양다종한 글쓰기가 있고, 지금의 논문이란 것도 데카르트 이후의 학문관과 지식관에 부합하는 지식을 생성하기 위한 글쓰기 장치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지식의 정의부터 문제가 있다. 지식이란 것이 서구 학문에서 말하듯 반드시 오감에 의해 경험되고 또 논리적 분석과 논증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해도 그런 지식과는 거리가 멀잖은가."(276)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Do you want to be on good terms with the government? Be a responsible citizen and you'll get on just fine, the government working to your advantage. (...) God also has an interest in keeping order, and he uses them to do it. That's why you must live responsibly - not just to avoid punishment but also because it's the right way to live" (Romans 13: 3 -5).

"메시지"역이다. 우선 바울의 견해는 참 보수적으로 들린다.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그가 21세기 한국에 살았다면...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 국정원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라 얘기했을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이야기하는 대상은 정치인이나 책임을 지는 행정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있는 시민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단지 처벌을 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책임있게" 행동하라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저 입꾹다물고 정부가 하라는대로 하라? 과연 바울이 그것을 얘기하는 것일까? 바울이 얘기하는 "질서"는 도대체 무엇일까? "권위"에 순종하라? 무조건? 책임있는 시민들은 그러면 안된다. 왜? 그렇게 무조건 순종하면 "질서" 자체가 악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정당한" 비판은 필요하다. 정부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정당한 비판, 저항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 무조건 순종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다!" (김현, 행복한 책읽기)

어머니

최근에 페친이 된 [시인 박남철]의 시다. 그렇다. 이 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가족주의는 야만"인 것이다(이득재).


어머니

박남철

1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있었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선 가슴부터 철렁했다

재홍이는........거기 갔드나........

웬일이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응....내가 니인데 머 부탁할 일이 하나 있아가........
동생은 첫 휴가를 나왔었다 그가 귀대하는 날 아침
나는 3만원을 주자는 아내에게 단호히 2만원만 줘서 보내라 했다

아버지는 잘 계시고요? 응....인자 논에 나가셨다...
아버지는 대구 공사장에서 내려오신 거로 게군
우린 논을 다 팔았다 시골집은 저당 잡혀 있고

웬일이세요, 말씀해 보시라나까요, 통화료 올라가요....
아버님이 아무 일 없으시다면 우선 걱정은 어머닌데
이렇게 전화를 하시는 걸 보니 무슨 갑작스런 노릇은 아닌 듯하고

어머니와 나는 지지난 달에 똑같이 한양대 신경정신과엘 들렀다
나는 신경쇠약이고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심하시다
조금만 움직이셔도 픽 쓰러지시고 가슴은 마구 둥당거리신단다

야야....내가 이거 자식한테 처음 하는 말인데...

어머니는 순간 목이 콱 막혀 오셨다 돈이 얼마쯤 필요해가
나도 순간 목이 콱 막혀왔다 어 얼마나 필요하세요. 어무이...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 9마넌, 아니,아니, 딱 7마넌만 하모 되겠구나...

나는 더욱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가 마구 들려 오는 듯했다
예에, 그걸 뭐 그렇게 어렵게 얘기하세요 아무 걱정 마세요 어무이...

지난번 소아마비의 누이 동생이 결혼할 때도 나는 한푼의 부조도 못했었다
나는 그 누이를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미워하고 있었다

그 누이는 그날 그 점촌의 예식장에서 90만원의 현금과 라이카 카메라 한 대를 잃어먹었었지
자기가 나온 전문대대학의 교수님이 주례를 서실 동안 신부 대기실에서는 그 돈과 물건이 증발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외제 카메라는 남에게서 빌려 왔던 것

그런데 어디다 쓰실 건데요...어머니의 목소리는 좀 풀려왔다
응,야야, 모심기를 할라카이 당최 현금이 있어야제...
요새는 일손이 귀해가 논뚝에서 딱딱 돈 안 주모 일 안해준다...

그까짓 농사 지아가 뭐해요! 나는 아니ㅣ 그는 갑자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성대 정치과엘 다니다 군대간 - 그는 장학생이었다 - 동생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판 논의 소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가집 돈 240만 원과 또 무슨 돈 170만원 때문에 어머니는 거의 매일 울고 계셨고
야야...아무리 그래도 농사꾼이 농사짓다가 농사 안 지으모...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시 감기기 시작하셨다

나는 다시 눈시울이 뜨끔하여 예, 예, 알았어요, 알았어요,
오늘 당장 보내 드릴께요, 통화료 올라가이 빨리 끊으세요.
어무이 건강 조심하시소...

오야.....내 걱정은 마래이...
니 몸조심하고 어쩌고 하며 계속되는 걸 나는 수화기를 딸칵 놓아 버렸다
내 울화가 치미는 흐느껴지는 목소리를 어머니가 너무 오래 들으셔서는 안 되니까

어는 틈에 아내가 깨었던지 눈물이 흐르는 내 눈을 둥그렇게 쳐다보다가, 남산만한 배를 들먹거리며,
팔뚝을 마구 함부로 쳐들며 10만원 보내자, 10만 원,,하며....

2
지난번 선거에서 아버지는 민정당의 박x석씨를 어머니는
서x열씨를 그리고 동생들 셋은 모두 최x환씨를 ---최x환씨는 성대 출신이다 - 찍었다한다
그러면 이 잠실의 강동구에서 나와 나의 정부인 나의 아내는 그 누구를 찍었었던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죽어도 의회주의자니까-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근대 유럽의 중국문화 열풍" (주겸지 朱謙之, 청계, 2003)

원제는 "중국 사상이 서구 문화에 끼친 영향"으로 1940년 출간되었다고 한다. 중국 사상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부분도 있지만.... 흥미로운 정보와 참신한 생각을 많이 담고 있다.

이런 구절 정도는 읽어줄만한데...

"칸트에서부터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우는 '신'을 도덕적 존재(칸트)로 여기는 가 하면, 어떤 경우는 '신'을 보편적 자아(피히테)로 여겼으며, 또 어떤 경우는 신을 세계를 구성하는 통일적 절대관념(헤겔)으로 여겼다. 요컨대 '이성'을 '신'으로 삼는 이러한 경향이야말로 정통적 종교를 철학적 종교로 대체하는 것이니 모두 중국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78쪽)

이런 표현은 좀... 과대망상같다.

"중국 사상이 독일에 끼친 영향을 한편으로 관념론 철학의 정신 혁명을 일으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전제주의의 정치 개혁을 가져왔다."(379쪽)

주겸지는 "문화철학'이라는 책에서도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문화의 유형을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네 가지로 나눴는데, 예를 들어 인도 문화는 종교 문화, 중국 문화는 철학 문화, 서양 문화는 과학 문화로 보왔다.

"(1) 문화의 유형: 서양 문화는 과학 문화이며 중국 문화는 철학 문화이다. 문화사적 입장에서 볼 때 서양의 역사는 사실상 과학 문화의 발전사라 할 수 있고, 중국의 역사는 철학 문화의 발전사라 할 수 있다.
(2) 문화의 구조: 서양 문화 속에서도 역시 종교, 철학, 예술이 있다. 하지만 모두 과학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과학적 종교', '과학적 철학', '과학적 예술'을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중국 문화에도 종교, 과학, 예술이 있다. 그러나 모두 철학 문화가 중심이 되어 '철학적 종교', '철학적 과학', '철학적 예술'을 형성한다.
(3) 문화의 발전: 인류 문화사의 발전 단계는 크게 '종교 -> 철학 -> 과학 -> 예술'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서양 문화는 세 번째 시기인 '과학 시대'를 대표하며, 중국 문화는 두 번째 시기인 '철학 시대'를 대표한다.
(4) 문화의 접촉: 서양 문화사에 있어서 '철학 시대'는 실제로 중국 철학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문화사에 있어서의 '과학 시대'는 사실상 서양 과학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역자서문, 9-10쪽)


교회, 사제의 권위가 타락하지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일이 지나쳐서 일부 기독교는 성경 물신주의에 빠진 것 같다. 성경 형성, 전승, 번역 등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도 없이, 성경을 맹신, 맹종, 굴종하는 태도를 보면 심지어 분노가 치밀기도... 물론 신앙의 차원은 상식으로 모두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상식을 초월하는 것과 상식조자 무시하는 몰상식은 엄연히 구별될 수 있고 구별되어야 한다. 몰상식에 기초한 천박한 신앙행태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지금 이모양 이꼴 아니던가...

"아마 어떤 이들은 마틴 루터의 “솔라 피데”(오직 믿음)과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서)라는 문구를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솔라 피데”(오직 믿음)이라고 말한 것은 지성을 희생시킨 채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위보다 존재(믿음)가 앞선다는 뜻이었다. 기독교 안에서 믿음이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요소는 그 대상이 얼마나 믿을만한 내용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루터의 말은 성서의 서술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사실이거나 옳다는 게 아니라 신자들의 삶에 대한 지침으로서 교회보다 성서가 우월하다는 뜻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은 성서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성서를 문자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자칫 신앙은 광신, 미신, 맹신의 개연성이 있으며, 성서는 잘못 해석될 경우에 요설(妖舌)이 될 수도 있다." (정용섭)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조국은 남자의 발명품이다. ... 그것은 효도가 부모들의 발명품이고 우정이 약소자(弱少者)의 발명품이며 연애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김영민, 동무와 연인, 21쪽)
"동아시아에서는 지식을 인간의 도리와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지식추구의 목적이 그 활용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추구의 과정이 철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식의 검증절차를 소흘히 함으로써 서유럽과 같은 자연과학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중국 수학이 산술학과 대수학의 전통은 강해도 기하학적 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기하학적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양재승, 과학이 보인다. (2)동아시아의 과학)

주겸지의 표현을 빌면 철학 문화가 강한 동아시아에서 과학은 "철학적 과학"이었다.
거의 매일 커피를 내려서 마시는데 맛이 매번 다르다. 커피와 물의 양을 조절하면서 나름 최적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데,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은 커피에 비해서 물이 너무 많았다. 닝닝한... 대단한 커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구. ㅠㅠ 커피가 너무 빨리 닳는다고 볼멘소리하는 회계담당 직원을 생각하면 그냥 마셔야지 별 수 없다.

요 며칠 한국 날씨는 참 좋다.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편이고 - 심지어 이른 아침엔 쌀쌀하기까지... - 습도가 낮아서 낮에도 견딜만하다. 전형적인 유럽 여름 날씨와 비슷하다. 유럽 배낭여행하면서 처음 도착한 곳이 런던이었는데, 한여름 속 밤과 아침의 선선함에 놀란 적이 있다. 이런 날씨가 가능하구나... 신세계였는데... 요즘 날씨가 딱 그렇다.

바로크 음악을 조용하게 틀어놓고 있다. 두번째로 출근한 팀장님 책상은 한참 멀어서 이 정도는 틀어도 괜찮다.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겠지만.... 이 정도도 내게 호사다. 호사...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괜찮다. 사도행전을 읽고 있는데...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니... 한참을 인터넷 속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오늘치 묵상을 읽고 내 공부에 들어가야지...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신약" 영한대역본을 구입했다. 성경을 좀 더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읽기에 적합한 성경을 검색해보았다. 이미 많은 한국어 성경이 나와있고,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읽고싶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번역이 없었다. 개역판은 옛 표현이 많은데다 또 너무 익숙해서 의미를 새롭게 새기기 어렵고, 좀 더 입말에 가까운 표준새번역 같은 경우에도 번역투가 너무 강하고, 현대어성경 류가 그나마 나은데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고... 검색하다 보니 "메시지"성경이란게 있고, 신뢰할만한 분들이 앞다투어 추천한 것을 발견했다. 개인의 번역이라는 점이 단점이지만, 오히려 그때문에 기존의 번역에서 느끼던 답답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보니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성경이었다. 원래 성경은 종교 경전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씌인 글이라는 사실을 잘 반영한.... 경전이 아니라 읽기 위한 문서로서.... 영한대역이라 더 좋았고. 여하튼... 당분간 사도행전을 읽으려고 한다. 복음서의 내용은 너무 익숙해서 도무지 "신선하지"가 않아서...  오늘 읽은 구절 중에서 인상에 남는 부분들... 베드로의 설교인데...

2:38 "베드로가 말했다. '삶을 고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여러분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3:19 "이제 여러분의 행실을 고칠 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십시오. 그리하면 그분께서 여러분의 죄를 씻어 주시고, 축복의 소나기를 쏟아 부어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며,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메시아 예수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때마다 느끼지만... 히브리 성경(구약)이건 신약성경이건 간에 성경은 너무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그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너무 적나라하면 사실 허점도 많이 보일 수밖에 없다. 성경의 성립과 전승과정, 역사적 성경 분석, 내적 정합성 등을 조금만 살펴봐도 수없이 많은 허점들이 보인다. 이는 "불경" 같은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혹은 "도덕경"처럼 종교에 준하는 고전 사상서들과 비교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상적이고 애매한 표현, 그래서 오히려 해석의 여지가 많고, 필요한대로 가져다쓰기 좋은... 성경은 무조건 믿지 않고, 따지기 시작하면 쉽게 수용하기 힘들다. 물론 그 단계를 넘어서서 꿀처럼 단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도 있겠지만....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페북 토론방에 올리느니라 체계통합 논문을 스캔하면서 다시 읽어 보았다. 보고 또  봐도 "명문"이고 "명작"이다. ㅋㅋ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맘먹고 비판하자면 그럴 구석이 한 두 곳이 아니지만...  장점 또한 분명히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논지가 명쾌하다는 점. (1) 연구 대상을 분명히 했고, 또 그것이 충분한 중요성을 갖는 대상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2) 기존 연구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내 논문이 기여할 수 있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3) 루만의 이론을 응용해서 적용하는 시도를 했다.

지금 쓰고 있는 "훨씬 더 긴 논문"에서는 이런 장점이 드러나질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다. (1) 연구대상의 중요성도 덜 분명하고.... - "아시아 국가의 연구 윤리 정책/거버넌스"라니... 얼마나 재미없게 들리는가 ㅠㅠ (2) 기존 연구의 한계와 내 연구가 독창적으로 기여하는 부분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 기존 연구 구도가 너무 산만해서 큰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다. 그러니 빈 곳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아시아 국가의 연구 윤리 거버넌스에 대한 연구....는 뭐 그 수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개별국가들에 대한 연구에 집중해서 딱히 일반화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많지 않다. 물론 그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일반적인 결론을 끄집어 내야 하나? 그렇다면 여러 국가를 비교해야 할 텐데? 나 역시 한국이라는 한 나라 사례만을 다루면서 일반적 결론을 얘기한다는건 좀.... (3) 뭔가 전체 그림이 나와야 루만을 적용하는 것의 장점이나 루만의 응용가능성이 나올텐데... 앞에서 막히니...
1. 몇 주 전... 잠못드는 딸을 애기띠로 안고서 바람쐬러 나섰다. 가로등이 군데 군데 켜져 있는 어두컴컴한 바깥풍경이 무서웠을 법하다. 이런 저런 감정을 조금씩 느끼고,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울음으로 곧잘 표현하곤 했는데.... 그날은 무서워하면서도 울진 않았다. 풍경과 아빠 얼굴을 번갈아 볼 뿐... 아마 아빠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무서움, 낯섬을 견뎠는지도... 좀 익숙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서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비로소 잠이 들었다.

2. 저녁에 내가 문열고 집에 들어서는 소리를 듣고서 할머니와 우유를 먹던 딸이 갑자기 울면서 보챘다. 내가 안아주니 울음을 그치고 무척 좋아한다.  반가움의 표시라고 해석한다. 아마... 엄마, 아빠가 그리웠나 보다. 주말에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집중적으로 시간을 함께 보냈다가, 오늘은 종일 할머니하고만 있어서 그랬나보다.  딸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응을하고 교감하는 신호를 보내니 비로소 딸 키우는 재미를 느낀다. 딸이 보고싶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결국 인간관계에선 함께 보내 시간이, 공통의 기억, 그리고 교감이 중요한 것 같다.
자식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확실한 기준이 있다. 부모님이 그 자식이 하는 일을 타인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면 그 자식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뭐... 루저loser 인증이다.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일반적으로 서양 세계는 합리적 법치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외적 유죄여부를 판단하려는 ‘죄책감 혹은 죄의식’ 중심의 문화를 경험해왔고, 이와 대조적으로 동양과 아프리카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개개인의 행위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유죄성을 합리적으로 따지는 개인주의적 법제문화 보다는, 개인이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의 이익과 명예의 선상에서 ‘나’를 평가하는 체면과 명예의 문화,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민감한 ‘수치’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한다. Christopher Lasch, The Culture of Narcissism: American Life in an Age of Diminishing Expectations (New York: Warner Books, 1979); David Augusburger, Pastoral Counseling Across Cultures (Philadelphia: Westerminster, 1986) 참조." (황헌영 2003, 죄의식과 수치감: 자기사랑에 대한 재인식, 326쪽)

신앙의 단계들 (Stages of Faith, James W. Fowler )

 The Psychology of Human Development; the Quest for Meaning) -


1단계: 직관적-투사적 신앙 3살-7살 환상에 가득 차 있고 타인을 모방하는 단계

이 단계의 아동은 자기와 가장 깊은 관계성을 맺고 있는 어른들의 신앙의 본보기들, 분위기, 행동, 이야기들에 의해서 강력하고 영속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시기. 자기 인식이 일어나는 단계, 자기 중심적 태도.

2 단계: 신화적 – 문자적 신앙 국민학생(청년기나 성년기 사람들도 발견됨)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들과 신조들, 관례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기 시작하는 단계. 상징들은 일차원적이고 문자적 의미로서 이해된다. 상호간의 공평성과 권선징악과 같은 상호성에 근거한 배재적 정의를 토대로 세계를 구성한다. 신인동형론.

3단계: 비분석적 – 관습적 신앙 청소년기(성인들도 영원히)

세계 경험이 가족을 넘어 확장. 통일적 가치와 힘에 대한 이미지를 찾게 된다. 순응 단계.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들의 기대와 판단에 예민하게 좌우. 자기 주체성과 자율적 판단이 성숙되지 않았다. 가치와 신조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만 객관화 시켜서 검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지고 있다는 시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도 한다. 3단계에서 4단계로 가는 동기: 지금까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어온 권위들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나 충돌이 발견되었을 때, 신성하게 여겼던 관습이나 정책이 공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크게 변화 하였을때, 신조나 가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하게 되었을 때

 4단계:주체적 – 반성적 신앙

성년초기에 형성되는 것이 적합하나 많은 성인들이 이르지 못함 자기 주체성을 주장하게 된다. 상징들을 개념화된 의미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 비신화화의 단계. 자기의 견해를 타인의 것고 비교하게 되고, 자기의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능력이 나타남. 자신의 께어 있는 정신과 비판적 사고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될 위험도 있다. 4단계의 자아상과 자기의 입장에 대해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 사람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또다른 전이를 기다리게 된다.

5단계: 접속적 신앙

중년 이후 4단계의 이분법적 흑백 논리를 넘어선다. 어떤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는 것. 자신의 전통 혹은 다른 전통들의 상징, 이야기, 교리, 예전들은 부분적인 것이고, 특정한 사람들의 신에 대한 경험에 국한되고 있으므로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신화, 이미지, 편견 등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갖게 된다. 역설과 명백한 모순 가운데 있는 진리를 인식하게 됨. 다른 사람들의 주체성과 의미를 키우고 보존시키는 일에 여생을 바칠 각오가 생기게 된다. 자기 자신과 타인들의 상징, 신화, 제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 실재가 파악되기때문이다. 인간 가족이 하나의 포괄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의 명령과도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변혁되지 않은 세계와 변혁시키려는 꿈과 그 변혁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살고 행동하기 때문에 괴리된 상태로 지속된다.

6단계: 보편적 신앙 위협을 개의하지 않은 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를 행동을 통하여 구현시켜, 현실화시키는 단계.

현실을 변혁시키고, 초월적 현실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단계. 정상적 기준을 흔들어 놓는다.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초월적인 도덕성과 종교성을 구현하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행동과 언어는 비상하고 예측할 수 없다. 생존, 안녕, 존재 의미 등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공동체적 성격.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해 정의와 사랑과 사심 없는 열정에 철두철미하는 단계 간디, 마틴 루터 킹, 테레사 수녀, 본회퍼, 토마스 머튼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 시키기 위해 생애를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다고 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추상적, 교리적 죄인이라고 여기며 살았을 때에는 하나님도 내게 추상적, 교리적 하나님이였다. 그런에 내가 실제적 죄인임을 고백하자 하나님 역시 실제적으로 날마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려줏는 하나님, 느껴지는 하나님으로 다가왔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신비한 것, 더 고차원적인 것을 보여달라고 하기 전에, 나의 참된 모습을 보여달라고 구하길 원하신다." (다시듣기, 최영찬, 103쪽)

이 책의 내용은 딱 절반 정도 동의할 수 있겠다. 윗 구절에 대해서도...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1) 루만의 급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 유럽의 "철학"적 유산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벗어났다는 점이다.

(2) 탈인간중심주의는 생태주의에서도 발견된다. 생태주의는 다양한 지향점, 태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순수성을 지키려는 태도가 있다(에코파시즘, 나치즘, 인종주의 전통). 다른 한편으로 "분류학적 범주들을 가로지르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사고하기도 한다 (이진경, '도래할 생태주의 그리고 공존', 사람과 책, 2013.06, 71쪽). "이런 공동체에서 인간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 어떤 중심이 아님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생태주의는 인간이 그토록 떠날 줄 모르던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박테리아 같은 수많은 이질저인 것이 뒤섞여 공존한다는 것, 어떤 생태계도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선 존속할 수 없다는 것, 정작 생태계의 생명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적인 것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능력이라는 것. 이것이 생태주의에 함축된 핵심적 발상이다. (...) 이런 점에서 생태주의의 발상은 모든 종류의 순수주의와 반대편에 있을 뿐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자연주의'와도 다른 방향에 있다. 생태주의는 공동체 안에서 기계나 인공물 같은 나쁜 것들을 쫓아내서 '좋은 것들만의 공동체', 결국 순순한 공동체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서 공생하며, 생명의 흐름이 하나의 순환계를 이루며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 생태주의다. (...) 순수한 것을 선별하여 보호하는 운동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섞이면서 서로 기대어 공존하며 그들 사이에서 생명의 흐름이 원활하게 흐르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운동, 동질적인 것의 공동체들로 세상을 절단하는 게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을 횡단하며 하나로 묶는 운동방식... 이것이 생태주의에 함축된 미래일 것이다"(72 - 73쪽)

(3) 탈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그리고 차이를 없애고 동질적인 것의 연합, 공동체를 지향하는 견해를 반대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4)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 
루만은 차이를 이야기하고, 중심의 부재, 중심으로부터의 조정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경계설정을 강조한다. 서로 구별되는 차이들은 내적으로는 동일성, 동질성을 가지면서 외부와 경계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외부와 구분된다는 점에서 순수성을 갖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순수성을 작은 단위 차원에서는 재생산한다는 점. 작은 단위들은 전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
생태주의는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생태주의는 민족주의를 해체시키며 더 멀리 밀고간다. (...) 전체 인종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발상으로. ... 그 안에 다시 이질적인 어떤 것들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72쪽). "생명의 흐름이 원활하게 흐르는 관계"(73)를 지향하는 매우 목적의식이 분명한 태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루만이 더 급진적인 것은... 의미를 두지 않는 '소박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매우 노자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 전체를 지향하지도 말고, 기능체계들의 자율성이 때로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걸 또 나름대로 조정하는 메커니즘들도 있고, 물론 그것이 또 다른 문제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고... 목적지향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힘을 뺐다는 점에서, "냉소적 이성"에 가까운 것 아닌가... 
물론 배제/ 포함을 얘기하면서 말년에 인본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과 살 수 없다. 그러나 정말 다행인 것은 우리가 늘 진실만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마크 트웨인)

"살아가기 위해 거짓말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생의 잔인한 한 측면이다" (니체)
시간을 아껴쓰자고 해놓고서... 윤태호의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있다. ㅠㅠ "미생" 등 전작이 다 그렇지만 윤태호의 웹툰은 그저 시간때우기용 만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위로한다. ㅠㅠ

여하튼... 방금 본 부분 중에서..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만. 그러고보면 해방을 상상이나 해봤는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무와 바위가 마땅하듯 일본인의 존재도 마땅했다. 가지 말아야 할 곳과 살지 말아야 할 곳과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자연스레 체득됐다. 그것이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혼돈, 또는 광기, 또는 불확실성이다."

해방 이전의 식민지적 질서에서 질서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에 의한 질서였고, 각종 이념으로 대안을 모색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 지배자를 끌어내리는 것이 일차 목표였으니까. 해방 이후 지배 메커니즘의 공백은 신손하게 미군정과 친일파 등으로 메꿔진다. 질서는 그렇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정치적 혼동과 사회적 질서의 혼동이 등치되어서는 곤란하다. 일제가 틀지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는 그 이후에도 근본적 요동없이 지속되지 않았나? 물론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 등을 처분하는 문제 등이 있긴 했지만... 북한의 경우엔 경제적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농지개혁, 국유화 등으로.... 남한의 기능적 분화, 기능체계들은 일제시대 이후 나름 근대적 질서의 외형을 갖추고 지속되지 않았나? 그런 질서가 근대화를 가져왔다는게 아니라 그런 질서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식민지하에서 정치적 질서, 억압, 착취가 일상을 지배했고, 사회의 모든 질서 위에서 작동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일제감정기에 과학의 순수성, 자율성 등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니까.
1. 장마란다. 뭐. 이제 시작이라서 그런지 특별한 느낌은 없다. 좀 덜 더워서 고마울 뿐...

2. 신우회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장애'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 공부해 보자고 제안했고 검색한 후 교재까지 추천했다. 어제 첫 시간이었는데, 흥미루어웠다. 장애인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 기관 신우회에서 그동안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3. 시간을 아껴써야 한다. 하루는 너무도 쉽게 지나가버린다. 충실히 산 하루, 작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 그 하루 하루가 모여서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루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

4. 페친이 아침에 전하는 칼 세이건의 이야기...

"만약 네 이웃에 있는 한 인간 a human이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와 더불어 사세요. 그는 수백조개의 은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흠. 백번 천번 옳은 말씀. 사적인 부탁을 - 내 기준으로 볼 때 - 좀 쉽게 하는 직원이 있다. 부탁을 자주하는 건 아니고, 내가 기꺼이 해줄 수 있는 한계 이상을 제공해주지도 않지만...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는다. 게다가 그는 신우회원이기도 해서... 참 묘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세상엔 더한 사람들 천지다. 사실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 아닌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 이 필요할까?

5. 어머니가 애를 많이 쓰신다. 엄마 아빠가 나간 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일이... 활동적인 분이 집에만 계셔야 하고, 게다가 아버지와는 생이별 상태에...  그러니 더욱 시간을 아껴써야 한다. 오롯이 나만 위해 쓸 수 있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on knowledge (/science) and ethics

"The Radical Luhmann, Hans-Georg Moeller, 2012"

"Modesty
(...) In a functionally differentiated society, science cannot do what philosophy was one assumed to do, namely to initiated an encompassing process of Bildung in the sense outlined above.
The traditional philosophical approach toward the production of knowledge assumed that there was both a collective subject and an individual one to be improv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ory, no such subject exist. No one "has"  knowledge as an internal component of himself (or herself). Knowledge functions, like money and like power, as a generalized medium of communication And one "has" it in the ways one has other media (in systems-theoretical terms) that are attributed a certain value in a particular social context. Knowledge allows society to function, but dose not essentially improve an individual or a society as a who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ory, more knowledge dose not lead to more Bildung anymore than more money or more power does.
The inflation of knowledge seems an excellent example of this. No person - and no nation or country or social system - is able to coherently accumulate or store knowledge. ... If knowledge, is a medium,like money or power, then those who take part in its production have no reason to believe they are taking part in an ultimately self-improving endeavor. In other words, theorists have to be more modest than the philosophers of old"(108)

"Luhmann's redefinition of ethics is another example of his irony. He first defines morality as the communicative distinction between, and distribution of, esteem and disesteem. (...) An ironical ethics also self-critical. .. Philosophical ethics, attempts to identify the correct application or meaning of the moral distinction between good and bad, or, more precisely, between good and evil. Theoretical ethics, on the other hand, outlines how this very attempt is, .. beyond good and evil. Ethical philosophy cannot but assume that it is good and advocate the goodness it estabished. Ethical theory, on the other hand, looks at morality as one form of contigent sense construction. ... Ethical theory dose not and cannot tell society what is ultimately good or bad, only what sort of nonsense is implied in ethical sense-making. (...) perhaps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e shift from philosophical ethics to theoretical ethics lies in a shift from advocating a serious morality to an exercise in (self-)ironical reason. A major problem with traditional philosophical ethics is that it lacks the capacity to seriously consider its own nonsense. In this way, not only science, but also ethics, can now become, at least in theory, "gay" (in the Nietzschean sense of fröhlich)" (114 - 115)

지식이 대단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앎, 지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저 유통될 뿐이다. 때로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때로는 파괴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윤리 또한 마찬가지다. 도구적인 성격을 지닐 뿐이다.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근거로 삼을 필요는 없다.
지식, 윤리 등에 대한 이상주의적 접근 (철학적 접근)을 버리고 이론적 접근으로 전환해야...
(religion --> philosophy --> theory_
"다양성의 다양성"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다양성이라고 하면 다문화주의  등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의 다양성 등을 떠올리는데, 사실 그게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사회로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사회통합! 하지만 다른 다양성도 있다. 체계의 다양성. 다양한 체계들의 공존. 정치나 경제 등 강한 힘의 흡인력, 자장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독특함을 유지하는 것. 다양한 체계 합리성이 공존하게 하는 것. "체계의 다양성"에 대한 담론이 풍성해질 필요는 있다. 다만 그것이 자폐적 자율성이 아니라 열린 자율성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폐쇄와 개방을 조절하는 일에는 더 많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고...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최연혁, 2012, 샘앤파커스)
"넥스트 코리아. 우리들이 꿈꾸는 나라" (김택환, 2012, 메디치미디어)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스웨덴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나다". "넥스트 코리아. 우리들이 꿈꾸는 나라" 책소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국이 가야할 새로운 국가 모델, ‘독일’!"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의 한국 모델로 각가 스웨덴과 독일을 제시하는 것이다.

'스웨덴'과 '독일' 두 나라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책을 비교할 수는 있다. 한 마디로 "넥스트코리아"는 쓰레기에 가깝고,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는 그래도 읽을만하다.어쩌면 내가 스웨덴보다는 독일을 더 잘 알기 때문에 알게모르게 독일에 대해서 더 엄밀한 잣대를 들이댔을 수도 있겠으나...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문장과 내용의 질적 차이를 금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역량, 체류경험의 차이일 것이다.

스웨덴은...정말 이 정도일까. 지상낙원에 가장 가까운 나라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나라로 다가왔다.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사실 우리가 한국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한국말의 외투만을 빌린 서양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언어를 빌어 표현하고자 하는 명제 자체가 한국적인 명제가 아니라 서양적인 명제인 것이다. ...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21세기 한국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서양문화를 알아야 하고,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서양철학을 알아야 한다. ... 21세기의 '나'는 이미 한국인(Korean)이기 전에 세계인(cosmopolitian)인 것이다" (김용옥, 논술과 철학강의 1, 113쪽 이하)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가의 1" 중에서... (100 - 101쪽)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과연 논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폭력에는 오직 저항이 있을 뿐이며, 행동과 실천이 있을 뿐이다. ... 7,80년대...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길거리를 다녀보면 꼭 주먹다짐으로... 그런데 요즈음 길거리를 다녀보면 거의 그런 장면이 포착되질 않는다. .. 한국인의 기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먹을 날렸다가는 반드시 고소를 당하게 마련이고 법적으로 제재가 들어오고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초래되기 땜누이다. 이것은 곧 우리사회가 몇 년 사이로 근대적 형법, 민법질서가 정착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 과거 선거.. 금품을 향응... 지금은... 그만큼 선거가 재미가 없어졌지만 또 그만큼 '합리적 소통'의 가능성은 증대된다. .. 논술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이데올로기의 권위나 억업을 무화(無化)시키며, 폭력을 제거하며, 우리 사회의 합리적 소통을 증대시키기 위한 교육적 장치로서 고안된 것이다."


앞 팀 "박사" 한 분이 점심시간에 내 아픈 곳을 찌르셨다(그 팀 팀장도 한 번 그런 적이 있는데...  나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부위... 정말 걱정해서, 나를 생각해서 꺼내는 얘기 같진 않았다.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런 얘기를 아애 꺼내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부모님처럼 참고 참다가 한 번에 폭발한다. 어설픈 위로의 말, 책망의 말을 던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와 별 친분도 없는그런 이에게 그따위 소리를 들어야하는 상황 자체가 내게 큰 자극이다.런 자극을 주다니... 고마운 분이고 고마운 말씀이다. 하지만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어서... 급한대로 커피를 진하게 내렸다. 급한대로...

"정의나 의분으로 갑을관계를 접근하면 해결할 수 없다. 갑에게 정의나 도덕으로 '너 옳지 않아.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해봐라. 안 먹힌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끈질기고 강력한데. 이 사람들 정의나 도덕 호소한다고 달라지겠느냐. 출발은 정의와 의분에 근거하되, 혁신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한국 같이 갑을관계가 삶의 기본적인 문법으로까지 자리 잡은 풍토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갑을관계적 착취를 하지 않고 을을 대등한 파트너로 대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런데 맥도날드 사례를 보자. 보통 진보적 지식인들의 말처럼 맥도날드가 미제국주의 상징이고, 노조 인정 안하는 걸 비판하더라도, 맥도날드의 성공과 혁신이 갑인 본사가 아니라 을인 프랜차이지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한 데서 나온 것을 살펴봐야 한다. 언론이 갑을관계 보도할 때, 을의 창의성을 받아서 재미본 성공 사례를 이야기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이게 돈 벌이가 된다는 걸 알려줘야 이 사람들이 움직인다. 정의와 도덕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 자본논리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폭풍우 몰아칠 때 잠깐 피하자 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다."

오. 이거 적절한 지적이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갑을관계에 이렇게 적용하니 새로운 것이다. Hajer의 "생태적 근대화"가 이런 논지다. 생태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돈이 된다는 방식으로 환경 문제에 접근하려는 경향을 다룬...

이런 저런 규범적 문제에도 이런 논지가 적용될 수 있을까? 사실 인권, 권리, 존엄성... 이런 규범적 접근은 좀 진부하기도 하고, 또 반발을 쉽게 불러일으켜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마지못해 들어주는 시늉만하고 마는 경우도 많고... 변화를 가져오려면 규범적 접근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자들이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 혁신을 뽑아내는 방법으로서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논의해봐야 한다. 말로만 실리콘밸리 배우자고 할 게 아니다. 스마트폰도 안 쓰는 처지라 보상심리 차원에서 그쪽 책을 거의 다 사서 읽는데, 저작권 빼앗아먹고 한 이야기가 없다. 새로운 걸 내면 꼭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한국은 공모전으로 학생들 아이디어 뽑아먹고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 아니냐. 학생들끼리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공모전에 내지 말라고 할 정도다. 이러면 창조가 이뤄지겠나.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 이야기하는데, 창조는 밑에서, 현장에서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로부터의 창조를 뽑아 먹고 뜯어먹는 용도로서 탕진하는 게 현실 아니냐. 갑을관계 없애는 건, 우파의 담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성장만이 살길이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의 시스템으로 경쟁력 있겠느냐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의 동력으로 창의성을 이야기하고, 갑을관계의 일방적 착취의 해결이 을에게서 뽑아먹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보상하자는 식으로 귀결된다면... 당연히 이는 전형적이 우파논리고... "성과사회/ 피로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를 얘기하는 것이다. 갑을관계의 해결이라고 제시하는 대안들이 따지고보면 서구에서는 문제로 삼는 그런 성과사회/피로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참. 이게 역사의 장난인지...

과학윤리, 연구윤리에 대해서도... 그것은 결국 과학의 정상화, 안정화, 경제나 정치 입장에서는 안정적 착취를 위한 보장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우리에겐 진보인 것이다.

강준만의 논리를 좇으면 과학을 계속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윤리 거버넌스는 필요하다. 뭐. 그런 얘기가 되겠다.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동무론" 얘기하는 철학자 김영민 선생"도" 학문(?) 공동체를 운영(?)한다고 한다. 이진경 선생의 "수유너머"는 나라 밖까지 알려진 것 같고, 조한혜정 선생도 독서(?) 공동체 일원이라고 어딘가에서 읽은 것 같다. 급은 좀 다르지만^^ 정성훈 선생은 과천의 육아 공동체의 일원인 것 같다. 좀 부럽다. 그들의 사회적 명성, 신분, 학문적 성과도 부럽지만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이 더 부럽다. 내가 공동체를 만든다면 학문, 독서 공동체면 좋겠다. 생활공동체, 영성수련 공동체... 그런 부담스러운 것들 말고... 그렇다면 함께 하고픈 이들이 있다. 어떤 친구는 개성이 너무도 독특한 나머지 - 자유로운 영혼 - 다른 사람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엮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아니. 어쩌면 페이스북 같은 공간은 내가 바라는 그런 공동체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는지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Muedigkeitsgesellschaft)"를 읽다. 역설적으로 내게 "피로"를 가중시킨 책이었다. 일단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역자 김태환은 서울대 독문과 교수인 모양인데... 실망스러웠다. 아직 독일어 원문을 보지는 못했는데 번역문을 보니 대략 어떤 스타일일지 상상을 할 수는 있었다. 예전에 슬로터다이크 글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독일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문학적이면서 현학적인 에세이 스타일로 추측된다. 아마 번역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유형에 속할 것이다. 문학 텍스트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내용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논지가 분명한 편이긴 한데... 좀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들렸다. 몇몇 학자들이 "틀렸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근거도 충분히 서술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핵심테제인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피로사회로의 변모"가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복종적 주체 Gehorsam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 Leistungssubjekt' ..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나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주 사용되는 '통제사회 Kontrollgesellschaft'와 같은 개념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것이 못 된다. 그런 개념 속에는 지나치게 많은 부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23 - 25쪽)

일단 푸코의 규율사회는 복종적 주체 뿐 아니라 한병철 선생이 얘기하는 성과주체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해서 자발적으로 규율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눈에 드러나는 통제는 초기 근대의 현상이고, 신자유주의적 근대는 은밀하게 감시되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거 푸코가 다 한 얘기 아닌가? 내가 푸코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그의 결론이라면 결론은 이렇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 Zwischenzeit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 피로의 종교. ...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으미에서 피로한 자등릐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로사회 이후에 피로사회라는 얘기? 성과를 지향하기 때문 생기는 피로에서 무용의 피로로? 굳이 후자에 대해서도 '피로'라는 표현을 써야 하나?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얘기한다.

 "피로사회』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 없는 것의 쓸모)이에요. 장자 얘기 안하고 서양작가들 이야기 하면서 결국 장자의 ‘무위’(無爲·함이 없음)나 ‘무용지용’의 의미를 전달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이성적 사회가 아니라 피로를 생산하는 사회라는 게 제가 『피로사회』에서 하려는 말인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과사회’라고도 규정하는데, 성과사회는 삶을 좋게 가꿔나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 많이 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지요. 지난 세기 인간을 착취하는 힘은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지만, 현대사회는 자기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변했다고 봅니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입니다.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너무 나이브한 대안 아닌가?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이 극복될까?

다음은 신진욱 교수와 대담 중에서...


"한: 피로하다는 것은 갈등이 아니다. 피로에는 ‘나-피로’와 ‘우리-피로’가 있다고 본다. 나-피로는 모든 걸 나에게 끌어들이는 과잉된 자기무장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품고 있던 내면의 폭탄이 터진다. 이것이 바로 ‘소진’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자기무장을 철거하는 상태의 피로함이 있다. 자기를 철거하는 순간 타자와 다른 곳이 보인다. 이런 상태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피로사회'에서 나는 자기를 무장해제시키는 피로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존의 ‘규율사회’에서는 지배자가 “너는 해야만 돼”라며 피지배자를 착취함으로써 고통을 안겨줬다. 이에 대해 피지배자들은 연대를 통해 지배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이 지배한다. 이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없다. 이 때문에 시스템에 책임을 전가할 수가 없고, 내가 해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책임 전가를 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형성될 수가 없고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나 혁명이 불가능하다. 

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체제와 제도, 또 힘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과와 업적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말하자면 타인에 의한 고통, 특히 사람들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타인들에 의한 고통도 있지 않은가? ‘자기착취’로 보이는 현상이 실은 착취자와 착취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한 결과는 아닌가?

한: 소진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오히려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더 많다. 곧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의 결과다. 타인착취 시대의 착취자는 자기착취 시대의 착취자와 다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에는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자본가와 같은 타인착취자가 없다. 자본가 스스로 자기착취를 하기 때문이다. ‘착취자와 대다수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발상인데, 여기에서 벗어나야 피로사회의 새로운 현상과 문제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이 자기착취를 하는 것은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한: 나의 피로사회 담론은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다. 신 교수는 분배를 적게 받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지만, 나의 피로사회 담론에서는 분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착취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범주를 가지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힘들다."

흠. 이쯤되면 한병철 선생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해야할까. 그는 결국 "오히려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피로를 염려하고 덜어주려는 것 아닐까? 그들이 피로사회 테제를 지지하는 것이고? 무위의 피로? 이런 염려 자체를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 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물론 이런 구분 자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후훗. 많이 들어본 레토릭이다. 

이 대담에선 푸코 얘기도 나온다. 

"한: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아랍이나 남미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라고 본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서구 사회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주변부의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별다른 힘이 없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금융시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 곧 시스템 자체가 개인을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이미 ‘너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가 아니라 ‘너는 너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만들고, 이 시스템은 저항을 없애버린다. 시스템을 바라봐야 하는데, 각자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신: 한 교수는 푸코가 말했던 ‘훈육사회’는 과거 시대의 일이고, 오늘날 성과사회에서는 주체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한 교수가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푸코가 ‘자유 속의 지배’라고 불렀던 자기훈육이 아닌가? 푸코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처럼 자기훈육을 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권력기술과 장치들이었다. 성취와 성공, 능력 있는 인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담론들, 소수의 승자에게 거대한 보상을 내리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실패한’ 주체로 낙인찍은 선택과 배제의 제도들, 또 이런 제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 이런 사회적 차원들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착취의 주체’는 주체를 길들이는 ‘훈육사회’의 결과물이 아닌가? 

한: 자기훈육에서는 ‘너는 해야 돼’라는 정언이 통하지만, 피로사회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동기부여와 자기최적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처음엔 희열을 느끼지만 나중엔 폭력과 강요로 변하는 것이다. 푸코의 ‘자기훈육’ 사회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의 자기착취는 성형수술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더 많이 하다가 쓰러지고 만다. 성격이 다르다. 보상을 받는 승자 역시 결국엔 쓰러진다. 승자와 패자의 도그마적 도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결론: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테제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은 가장 발전한 서구사회의 수입 많은 매니저나 교수들이다. 결국 그들을 위로하고 싶은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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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피로사회'를 잘 요약한 글을 만났다.
























2013년 6월 11일 화요일

부모님은 식사기도를 참 길게 하시는 편이다. 거의 기도회 분위기... 주말에 막 일어나 식탁 앞에 앉았는데 예의 그 길게 이어지는 기도를 하신다. 막 일어난 후 마음이 어수선한 상태에 입력되는 정리된 기도의 느낌이 낯설다. 깊게 와닿질 않는 것... 신앙도 워밍업이 필요한 것인지....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강조하는 것인지... 긴장의 끈을 조금만 늦추어도 신앙의 상태는 뚝 떨어지는 것 같다.

잠자리에 들었다 부대껴서 다시 나왔다.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다... 아직 졸리지도 않은데 그냥 자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뭘 얼마나 할 진 모르겠지만... 

2013년 6월 10일 월요일

흔히 사랑은 그 관계의 성격에 따른 것으로의 묘사된다. 사랑을 구분하는 방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필로스, 에로스, 아가페의 구분일 것이다. 하나(느)님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아내에 대한 사랑은 그 대상의 차이 외에 사랑의 내용이나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성 메커니즘에도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정은 어떤가? 동성에 대한 감정과 이성에 대한 감정은 동성/이성이라는 구분 이외에 본질적으로 다른 감정일까? 우정과 사랑에 대해선 쉽게 에로틱한 감정의 유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좀 더 따지고 들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이성에 대한 관계에서도 에로틱한 감정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 설령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시간이 흘러서 그런 감정이 퇴색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래된 부부의 관계는 '우정'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우정과 사랑의 경계가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은 것 같고, 여러 유형의 사랑도 사실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메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상호작용의 결과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붇는다? 그건 특정 시점, 특정 시기에는 가능하나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혹은 상호작용이 제한적인 특수한 관계에서나 가능하다(예를 들어 유명 연예인과 열혈팬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나온 결과이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건 사랑이 가능하려면... 이해, 공감, 격력, 호감, 신뢰, 호혜성... 이런 것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 같다. 엄하기만 한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격려, 도움, 지지, 관심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담함으로 반응하는 아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뭐. 그런 경우가 아주 없는 것 같진 않지만.... 예외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어떠한가? 기독교의 배경이라고 봐야 할 구약의 경우... 철저히 계약, 약속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신과 계약하는 것이다. 나만 섬길래? 그러면 이러저러한 것을 보장한다는...  신약은 좀 다른 것 같긴하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건없는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되니까... 또 하나님은 세상을  - 조건없이? - 사랑해서 외아들을 보낸 것으로 이해되니까... 이 경우는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이 질문은 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난 "사랑"이라는 표현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사랑은 열정, 열광으로 이어지는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용되어서 내용이 비어버린 껍데기로만 존재하는 개념 같아서다. 우선 열정으로서 사랑은 쉽게 과잉으로 이어진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기대의 과잉으로 이어지고... 열정의 과잉은 억압, 불만족, 파탄으로 이어지기 쉽다.
반대로 남용되어서 의미가 죽어버리는 경우는...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표현... 그리고 오가는 길 초등학교에 붙어있는 표현 ".. 학생들은 친구들을 사랑합니다". 사실 "사랑" 의미론의 남용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말로는 흔히 "친애하는..."으로 번역되는... 예를 들어 "친애하는 하객 여러분" "Liebe Gäste!" 같은.... 식구들끼리의 인사말이 되어 버린... "I love you"
난 차라리 "사랑" 대신에 "우정"으로 모든 관계를 재편했으면 좋겠다. 우정은 기본적으로 억압적 관계가 들어설 수 없다. 우정은 친구들끼리의 관계다. 비슷한 "레벨"의... 부모와 자식간의 우정은 불가능한가? Why not? 부모가 자식의 개성, 인격을 인정하고, 억압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 니체가 이런 얘길 남겼다고 한다.

“It is not a lack of love, but a lack of friendship that makes unhappy marriages.”
"Nicht der Mangel an Liebe, sondern der Mangel an Freundschaft macht die unglücklichsten Ehen." - Friedrich Nietzsche, Nachlass

또 "니체에게는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누설자'이며, 벗은 또한 위버멘쉬를 낳는 최고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다.

여하튼...

나는 "도반(道伴)"이란 표현을 좋아하는데... 원래 불교 용어로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하는 벗"이란 뜻이나... 도(道)로서 사귄 동무, 혹은 함께 길을 가는 동무... 라는 일반화된 의미로도 이해된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되는 길동무들 아닌가? 부모자식 관계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예수와 나의 관계 역시...
점심 후 엎드려서 좀 자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보니 3시 45분이다. 내 심리 시계로는 13시 45분인데 ㅠㅠ
집 주위에 공원도 있고 길가에도 이런 저런 나무들이 많은 편인데 요즘 정말 무성해졌다. 은행나무, 감나무, 밤나무... 하지만 그 무성함에 놀라는 것도 잠시... 금새 우울해졌다. 무성한 풍경 속에서 가을을 봐버린 것이다. 불과 3,4개월 후면 맞닥뜨리게 될 풍경을...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 떠나라"고 했다. 열심히 일하고, 그만한 성과를 얻은 자들이라야 이 더위를 푸념하며 휴가지를 고를 권리가 있다. 이 무성함, 더위 속에서 이미 가을을 느끼는 자들은 더위에, 아직 더 더워질 여지가 있음에,  아직 하지를 지나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한다. 해가 짧아지는 순간, 선선한 기운이 다시 이 곳을 덮기 시작할 무렵을 반갑게 맞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루만과 빌케는 사회가 규범적 질서로 유지되는 것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둘은 모두 지식에 기초한 사회의 질서가 더 '바람직하고', 실제로도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전형적인 "근대주의"적 입장이다.
반면에 탈근대주의자들은 - 규범성과 관련해서 본다면 - 근대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윤리와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대개 도덕의 위로부터 주어진 것, 윤리는 개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거나 개척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도덕을 선호하는 것 같다). 공동체주의, 덕윤리 논의가 대표적인 것 같고... 그런 지향이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다. "근대주의"는 사실 너무 기계적이긴하니까. 공동체의 재발견, 따뜻한 자본주의 논의, 리프킨의 "공감" 등은 모두 이런 경향을 반영 혹은 선도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 주장은 대개 근대사회의 구조에 기생하는 이야기들이다. 근대사회의 구조의 핵심이 과연 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근대사회는 기본적으로 탈규범성까진 아니더라도 (탈규범성을 사실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 탈규범성 주장 자체가 규범적이라는 의미에서....) 은 아니더라도 규범최소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화된 규범은 결코 그 함의 자체가 최소는 아니다. 근대주의자들이 저렇게 떴떳하게 규범 최소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건거는 바로 그 최소화된 규범이 이런 저런 메커니즘을 통해서 보호되고, 구조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인권, 개인주의, 자유, 평등 등등). 규범적 혼란을 겪고 있는 후발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루만이나 빌케의 자못 시니컬한 주장에 편승하거나, 탈근대주의자들 주장에 동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근대적 최소주의 규범이라도 제대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북 친구들 중 엄살을 피우는 이들이 있다. 원고가 몰렸다는둥, 몇 시간 밖에 못잤다는 둥... 그런 엄살쟁이들의 특징... 결국 다 해낸다. 자신이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사실 내가 그런 경우...ㅠ ㅠ). 그러니 그들의 엄살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 위로한다.
아버지라는 역할을 갖게 된 아들이 그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 내 자식에 대한 태도와 그분들이 자식인 내가 부모님들에 대해서 갖는 태도가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 우리는 과연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랑은 정말 내리사랑으로 가능할 수밖에 없는가? 그 내리사랑도 유효기간이 있는 것인가? 허니문....이 지나도 좋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신선함? 새로운 모습?
아니... 도대체 우리는 꼭 사랑을 해야할까? 사랑은 도대체 뭘까? 사랑에 대한 강박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Zwang zur Liebe... 김용옥은 요즘 누구나 떠드는 '사랑'이란 의미태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2013년 6월 9일 일요일

Unwahrscheinlichkeit des Glaubens und der Kindesfrömmlichkeit (효도)

다석 유영모 선생은 하나님께 효도하자는 얘길 했다.


"유교가 부자유친을 가족 범위에 한정한 나머지 하느님에게 효도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선생은 단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한아님에 대한 효를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아버지를 하늘 같이 아는 것을 효라 한다. ... 부모보다 한아님 아버지(天父)가 먼저라야 한다. 천명(天命)에 매달린 유교가 망천(忘天)을 하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유교가 맥을 쓰지 못한다.' (『다석어록』, 홍익재, 1993, 227쪽)

언젠가 애제자 박영호가 홀로 선생을 찾아가 뵈었을 때, 유교, 불교는 하느님을 향한 부자유친 신심이 없기 때문에 미흡한 사상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가 제일 좋다. 부자유친(父子有親),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이 기독교다. 유교를 제치고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을 세웠다. 한아님 아버지께 유친하자 드리덤벼야 한다. 불서(佛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다.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은 신약전서에 나타나 있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 홍익재, 1985, 313쪽)'"

효도는 어렵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건 부모님이건 간에...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졸린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에 나와있다. 다행히... 에어컨이 작동 중이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지만 끈쩍끈적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휘둘리는 것보다는 낫다. 게다가 온도도 "착하다". 입구 쪽이라 드나드는 사람들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뭐. 어짜피 지금은 졸려서 뭔가를 집중해서 읽지도 쓰지도 못할 형편이다. 좀 비싼 점심을 먹었다. 8천원짜리 냉면... 값어치만 한다면야 기꺼이 더 비싼 값을 치루고서도 먹겠지만 이 집 냉면은 비싸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서비스도 그렇고... 시원한 맛으로 육수를 다 마셨더니 지금은 또 목이 마렵다. 이래저래 불쾌한 기분... 아 참. 그리고 어젠 기아가 또 시원하게 졌다. 경기 장면을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경기 시간엔 스코어를 쫓아가느라 나름 신경을 쓰게 된다. 아직 애정이 남아있다는 얘기겠지. 인간관계도 그렇지만 프로 스포츠 팀도 쓴소리, 욕을 얻어먹는게 무관심 보단 낫다. 팀에 대한 애증은... 곧 내 역사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그게 단절되면... 예를 들어 김응룡 감독 등 해태 출신들이 코칭스탭을 점령하다시피한 한화 이글스나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떠나고 외부인들이 감독 등으로 들어온 롯데 자이언츠 꼴이 되는 것이다. 성적도 좋지 않고, 그렇다고 그 팀의 정체성마저 흔들린다면... 그 때 바로 애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관심이 들어서는 것이다. 뭐랄까. 역사의 힘이랄까... 프로팀은 성적이 중요하고, 일등을 지향하지 않는 프로팀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얘길 쉽게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다. 프로팀의 최우선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응원하든 팬들에게 응원할 맛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어짜피 우승은 한 팀밖에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설프레 우승, 성적 지향하다가 이것 저것 다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성도들이 똑똑해질수록 목사가 설교하고 교회운영하기 어렵듯이, 감독이나 구단도 마찬가지. 우격다짐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이해되는 야구, 공감을 끌어내는 야구를 해야 한다.

여전히 졸린다. 어떻게 하나.... 찬물이라도 좀 마시고 와야 할 모양이다.

2013년 6월 7일 금요일

"가치관의 다원성은 성원들 간의 규범체계를 최소하 할 것을 요구했으며 사생활에 대한 익명성의 요구는 규범의 공지성과 더불어 사회 윤리적인 공적인 윤리레오 추동해갔다. (...) 근대 이후 익명적이고 다원적인 시민사회에 있어서는 도덕적 결정성이 더욱 중요한 사항으로 제기됨에 따라 최소화 전략에 의거, 최소윤리로서 의무의 윤리로 대체시키고 명시화 전ㄹ략에 의거 개별행위 중심적 윤리 내지 규칙중심적 윤리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황경식 2010, 덕 윤리의 현대적 의의, 11쪽 이하 )

"근세 이후 다원주의라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응책을 추구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가, 도덕적으로 의무윤리 등 최소주의적 전략이 제시되었다. 비록 다른 두가지 측면에서 제안된 것이긴 하나 이들은 모두 다원주의를 관리하기 위한 근대적 프로젝트(modern project)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16쪽)

황경식의 논문(2009, 2010)은 대단히 명쾌하다. 내가 생각하던 바를 시원하게 정리해준다.
대나무 잎은 하루밤 사이에 마르지 않았다. 한동안 커피 등을 만들고 남은 물을 매일 주다시피했는데 그 이후로 서서히 말라들어갔던 것이다. 잎이 하루아침에 말랐다면 물주기를 금새 그쳤겠지만... 서서히 말라들어가는 잎을 분별해낼 눈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변화는 대부분 그렇게 진행되는 것 같다.  과정 속에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상태가 현저하게 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놀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어느날 어떤 상대가 내게 갑자기 화를 낸다면... 그건 "갑자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저런 못마땅함, 불만족 등이 쌓이고 쌓여 있다가  비로소 발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세한 변화를 잘 감지하는 예민함이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에고. 결론은 다시...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적절한 균형... 이네. 어쩔 수 없는 먹물... 치유불가능에 가까운 먹물병...

2013년 6월 6일 목요일



사무실 대나무가 말라가고 있다. 잎 끝이 타들어가는게 아니라 저렇게 잎 전체가 노랗게 물들면서 마르는 것은 물을 너무 많이 준 탓이다. 기아 야구의 몰락과 사무실 대나무의 위기 사이의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은 오로지  나를 매개로 삼을 때 증명가능하다. 그렇다. 증명... 

2013년 6월 5일 수요일

1.
승용차를 "배달"하는 "임무"를 완수하고서 바로 퇴근했다. 집에 들어가서는 어짜피 책상 앞에 앉아있기 힘들어서 커피숍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 근처 카페 베네... 점심 후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마셨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맛있다. 진하다. 사실 팥빙수를 좋아하긴 하는데 9천원에 육박해서.... 다행히 터무니없이 춥진 않다. 고등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흥미롭게도 모두 여학생들. 심지어 시험문제 답을 맞춰본다. 이게 요즘 고등학생 문화일까?

2.
점심 식사후 한 시간 가량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가는 곳에 함께 있었다. 이야기를 거의 거들지 않고서 혹은 못하고서 적당한 미소도 잃지 않은 채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목소리 큰사람이 우기는 주장에 가까웠는데... 그 주장을 펴는 당사자는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상급자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성향을 성토하였다.

3.
너~무~ 깔끔을 떨면 그닥지 알흠다워 보이지 않는다. 깔끔도 적당히...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을 반드시 새길 것.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견해를 강변하는 선배 얘기에도 적당히 맞장구쳐줄 필요가 있다. 가장 싼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지 않아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 일이다.

2013년 6월 3일 월요일

생각나는대로 쓰는 게 아니라 써야만하는 무언가를 써내기 위해서 쓰는 일은 괴롭다. 그 괴로움을 대면하기 싫어서 몸과 마음은 항상 핑계거리를 찾는다. 출근 이후, 식사 이후 써내는 일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페이스북을 끊으면 뉴스를 찾고, 인터넷을 끊으면 핸드폰을 찾고, 그도 아니면 다운로드 폴더 속 파일을 열고 정리한다. 아주 나쁜 습관이다. 피하는 것. 미루는 것. 당장 인정받을 일과 사람을 찾고, 싫은 얘기 쓴 소리를 피한다. 역시 나쁜 습관이다. 이 곳에서 이런 식으로 자기검열, 자기비판하는 것 역시... 자기 성찰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결국 자기 위로일 따름이다.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송파도서관. 토요일이지만 오전에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열린 창을 통해서 바로 옆 "곰두리 체육관" - 아마도 - 에어로빅 강좌에서 틀어 놓은 철지난 음악소리가 들어온다. 롤리 폴리... 강사(?)의 추임새가 양념처럼 섞여서...

앞 쪽엔 대학생인듯한 커플이 한켠에 책을 쌓아두고서,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서 낀 채 열공 중이다. 남학생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아 놓고, 심지어 방석까지 깔아 놓은듯... 아... 도서관을 중심으로 놀던... 나의 알흠답던 이십대가 생각나누나...

또 이런 생각도...

대학에서 학구열에 불타는(듯한) 저런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만나게되면 도대체 무슨 얘길 해줄 수 있을까? 한 학기나 일 년 쏟아내고 나면 금새 바닥나지 않을까? 난 도대체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슨 공부를 한 거지? 공부의 내공은 투입, 산출이 상호작용하면서 쌓이는 법인데... 산출은 별로 없이 냅다 투입만 하니 소화능력은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고... 오래된 것들은 잊게 되는 것 같고...

에고. 이런 고민도 사치다.

어제 저녁엔 모처럼 방해없이 야구를 볼 수 있었다. 기아가 대패를 했다. 어제 같은 경기에 대해서 "스트레스 풀려고 야구를 보다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는 "감상평"을 자주 접한다. 그러게... 도대체 왜 야구를 보지? 재미있게 이겼을 때 얻을 수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기대하며?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비교해보면 남는 장사는 분명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야구에 대해 들이는 노력, 시간을 조절하려고 하는지도... 또 원래 어떤 일에 대해서건 올인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내 페이스북 사용에 대해서 일종의 감시하는 시선이 생겼다. 자업자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