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Muedigkeitsgesellschaft)"를 읽다. 역설적으로 내게 "피로"를 가중시킨 책이었다. 일단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역자 김태환은 서울대 독문과 교수인 모양인데... 실망스러웠다. 아직 독일어 원문을 보지는 못했는데 번역문을 보니 대략 어떤 스타일일지 상상을 할 수는 있었다. 예전에 슬로터다이크 글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독일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문학적이면서 현학적인 에세이 스타일로 추측된다. 아마 번역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유형에 속할 것이다. 문학 텍스트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내용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논지가 분명한 편이긴 한데... 좀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들렸다. 몇몇 학자들이 "틀렸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근거도 충분히 서술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핵심테제인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피로사회로의 변모"가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Disziplinargesellschaft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복종적 주체 Gehorsam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 Leistungssubjekt' ..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나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주 사용되는 '통제사회 Kontrollgesellschaft'와 같은 개념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것이 못 된다. 그런 개념 속에는 지나치게 많은 부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23 - 25쪽)

일단 푸코의 규율사회는 복종적 주체 뿐 아니라 한병철 선생이 얘기하는 성과주체적 속성도 가지고 있다.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해서 자발적으로 규율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눈에 드러나는 통제는 초기 근대의 현상이고, 신자유주의적 근대는 은밀하게 감시되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거 푸코가 다 한 얘기 아닌가? 내가 푸코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그의 결론이라면 결론은 이렇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 Zwischenzeit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 피로의 종교. ...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으미에서 피로한 자등릐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로사회 이후에 피로사회라는 얘기? 성과를 지향하기 때문 생기는 피로에서 무용의 피로로? 굳이 후자에 대해서도 '피로'라는 표현을 써야 하나?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얘기한다.

 "피로사회』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 없는 것의 쓸모)이에요. 장자 얘기 안하고 서양작가들 이야기 하면서 결국 장자의 ‘무위’(無爲·함이 없음)나 ‘무용지용’의 의미를 전달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이성적 사회가 아니라 피로를 생산하는 사회라는 게 제가 『피로사회』에서 하려는 말인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과사회’라고도 규정하는데, 성과사회는 삶을 좋게 가꿔나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 많이 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지요. 지난 세기 인간을 착취하는 힘은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지만, 현대사회는 자기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변했다고 봅니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입니다.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너무 나이브한 대안 아닌가?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이 극복될까?

다음은 신진욱 교수와 대담 중에서...


"한: 피로하다는 것은 갈등이 아니다. 피로에는 ‘나-피로’와 ‘우리-피로’가 있다고 본다. 나-피로는 모든 걸 나에게 끌어들이는 과잉된 자기무장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품고 있던 내면의 폭탄이 터진다. 이것이 바로 ‘소진’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자기무장을 철거하는 상태의 피로함이 있다. 자기를 철거하는 순간 타자와 다른 곳이 보인다. 이런 상태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피로사회'에서 나는 자기를 무장해제시키는 피로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존의 ‘규율사회’에서는 지배자가 “너는 해야만 돼”라며 피지배자를 착취함으로써 고통을 안겨줬다. 이에 대해 피지배자들은 연대를 통해 지배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이 지배한다. 이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없다. 이 때문에 시스템에 책임을 전가할 수가 없고, 내가 해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책임 전가를 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형성될 수가 없고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나 혁명이 불가능하다. 

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체제와 제도, 또 힘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과와 업적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말하자면 타인에 의한 고통, 특히 사람들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타인들에 의한 고통도 있지 않은가? ‘자기착취’로 보이는 현상이 실은 착취자와 착취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한 결과는 아닌가?

한: 소진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오히려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더 많다. 곧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의 결과다. 타인착취 시대의 착취자는 자기착취 시대의 착취자와 다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에는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자본가와 같은 타인착취자가 없다. 자본가 스스로 자기착취를 하기 때문이다. ‘착취자와 대다수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발상인데, 여기에서 벗어나야 피로사회의 새로운 현상과 문제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이 자기착취를 하는 것은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한: 나의 피로사회 담론은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다. 신 교수는 분배를 적게 받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지만, 나의 피로사회 담론에서는 분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착취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범주를 가지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힘들다."

흠. 이쯤되면 한병철 선생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해야할까. 그는 결국 "오히려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피로를 염려하고 덜어주려는 것 아닐까? 그들이 피로사회 테제를 지지하는 것이고? 무위의 피로? 이런 염려 자체를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 대상이 아닌 모양이다. 물론 이런 구분 자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후훗. 많이 들어본 레토릭이다. 

이 대담에선 푸코 얘기도 나온다. 

"한: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아랍이나 남미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라고 본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서구 사회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주변부의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별다른 힘이 없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금융시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 곧 시스템 자체가 개인을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이미 ‘너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가 아니라 ‘너는 너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만들고, 이 시스템은 저항을 없애버린다. 시스템을 바라봐야 하는데, 각자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신: 한 교수는 푸코가 말했던 ‘훈육사회’는 과거 시대의 일이고, 오늘날 성과사회에서는 주체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한 교수가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푸코가 ‘자유 속의 지배’라고 불렀던 자기훈육이 아닌가? 푸코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처럼 자기훈육을 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권력기술과 장치들이었다. 성취와 성공, 능력 있는 인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담론들, 소수의 승자에게 거대한 보상을 내리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실패한’ 주체로 낙인찍은 선택과 배제의 제도들, 또 이런 제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 이런 사회적 차원들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착취의 주체’는 주체를 길들이는 ‘훈육사회’의 결과물이 아닌가? 

한: 자기훈육에서는 ‘너는 해야 돼’라는 정언이 통하지만, 피로사회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동기부여와 자기최적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처음엔 희열을 느끼지만 나중엔 폭력과 강요로 변하는 것이다. 푸코의 ‘자기훈육’ 사회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의 자기착취는 성형수술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더 많이 하다가 쓰러지고 만다. 성격이 다르다. 보상을 받는 승자 역시 결국엔 쓰러진다. 승자와 패자의 도그마적 도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결론: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테제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은 가장 발전한 서구사회의 수입 많은 매니저나 교수들이다. 결국 그들을 위로하고 싶은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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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피로사회'를 잘 요약한 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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