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9일 수요일

(1) 루만의 급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 유럽의 "철학"적 유산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벗어났다는 점이다.

(2) 탈인간중심주의는 생태주의에서도 발견된다. 생태주의는 다양한 지향점, 태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한편으로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순수성을 지키려는 태도가 있다(에코파시즘, 나치즘, 인종주의 전통). 다른 한편으로 "분류학적 범주들을 가로지르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사고하기도 한다 (이진경, '도래할 생태주의 그리고 공존', 사람과 책, 2013.06, 71쪽). "이런 공동체에서 인간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 어떤 중심이 아님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생태주의는 인간이 그토록 떠날 줄 모르던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박테리아 같은 수많은 이질저인 것이 뒤섞여 공존한다는 것, 어떤 생태계도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선 존속할 수 없다는 것, 정작 생태계의 생명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적인 것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능력이라는 것. 이것이 생태주의에 함축된 핵심적 발상이다. (...) 이런 점에서 생태주의의 발상은 모든 종류의 순수주의와 반대편에 있을 뿐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자연주의'와도 다른 방향에 있다. 생태주의는 공동체 안에서 기계나 인공물 같은 나쁜 것들을 쫓아내서 '좋은 것들만의 공동체', 결국 순순한 공동체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서 공생하며, 생명의 흐름이 하나의 순환계를 이루며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 생태주의다. (...) 순수한 것을 선별하여 보호하는 운동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섞이면서 서로 기대어 공존하며 그들 사이에서 생명의 흐름이 원활하게 흐르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운동, 동질적인 것의 공동체들로 세상을 절단하는 게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을 횡단하며 하나로 묶는 운동방식... 이것이 생태주의에 함축된 미래일 것이다"(72 - 73쪽)

(3) 탈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그리고 차이를 없애고 동질적인 것의 연합, 공동체를 지향하는 견해를 반대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4)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 
루만은 차이를 이야기하고, 중심의 부재, 중심으로부터의 조정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경계설정을 강조한다. 서로 구별되는 차이들은 내적으로는 동일성, 동질성을 가지면서 외부와 경계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외부와 구분된다는 점에서 순수성을 갖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순수성을 작은 단위 차원에서는 재생산한다는 점. 작은 단위들은 전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
생태주의는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생태주의는 민족주의를 해체시키며 더 멀리 밀고간다. (...) 전체 인종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발상으로. ... 그 안에 다시 이질적인 어떤 것들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72쪽). "생명의 흐름이 원활하게 흐르는 관계"(73)를 지향하는 매우 목적의식이 분명한 태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루만이 더 급진적인 것은... 의미를 두지 않는 '소박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매우 노자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 전체를 지향하지도 말고, 기능체계들의 자율성이 때로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걸 또 나름대로 조정하는 메커니즘들도 있고, 물론 그것이 또 다른 문제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고... 목적지향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힘을 뺐다는 점에서, "냉소적 이성"에 가까운 것 아닌가... 
물론 배제/ 포함을 얘기하면서 말년에 인본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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