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1913∼65]


척 보니 화가의 자화상이다. 손에 들고 있는 도구들을 보라... 노골적이다. 그 화가는 그런데 인상이 참 강하다. 게다가 드러나 보이는 팔뚝도 굵다.
그런데 배경과 화가를 동시에 보면 왠지 어색하다.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 화가가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물화의 풍경치곤 매우 현란하다. 풍경화와 자화상이 합쳐진 듯하다. 구도를 보면 모나리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내용적으로...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부)조화가 보인다. 중절모와 팔레트가 '신식' 분위기라면 두루마기와 뒷배경은 전형적인 '구식'이다. 또 강한 남성미 풍기는 얼굴과 붓을 들고 있는 '시츄에이션'이 어울리지 않는다. 5일장에 나섰다 얼떨결에 화가용 소품을 들고 사진을 찍은 시골 청년 풍모 아닌가. 물론 주저함이라곤 모를 것 같은 듯한 단호한 표정이 그런 어색함을 덮어 주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인물의 선을 굵고 진하게 표현한 것은 '약간' 프라다 칼로의 어떤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리봐도 전체구도는 '모나리자'에서 빌려온 것 같다.



이름이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어울린다. 이쾌대. 호방하다. 이 그림은 1948, 1949 그 무렵에 그려졌다니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문물에 저항하려는 화가의 결기의 표현이리라. 좌파 미술인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당대 현실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한국전쟁후 월북했고,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소외되었다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고 한다. 남한에 남겨 둔 그의 아내가 그림을 보관하고 있어서 해금 후에 이런 그림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고... 언제 그렸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래 그림은 훨씬 더 '화가' 자화상 같다. 좀 더 우울해 보이고... '숱검댕이' 눈썹은 여전하지만... 옷도 역시 여전히 한복이네...

이 화가의 '존재'에 대해선... 덕수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근대를 묻다 -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를 알리는 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p.s.) 지난 10월 열린 '대구의 근대미술'전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실물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그림은 실물로 봐야 제 맛이다. 실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질량감, 터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볼 때 감흥이 다른 것처럼...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가깝고도 먼 나라'는 그 동안 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쓰였다. 허나 생각해보면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보다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 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먼 과거 속의 중국이 아닌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해 말이다. 싸이버 공간에서는 중국을 희화하하는 이른 바 '대륙'의 엽기적 사진 혹은 사건들이 주의를 끌 뿐이고, 제도권 언론에서도 실체나 그 심각성을 확인하기 힘든 중국의 혐한증을 크게 보도하는 등, 현대 중국에 대한 우리의 담론은 그 깊이가 너무 얕은 것은 아닌지... 경제는 자본주의,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 발전 속도가 빠르지만 여전히 우리 70년대 수준의 '후진국', 그 정도 아닌가? 반면, 다른 극단도 있다. 중국이 좇아오고 있고, 우리를 곧 추월할 것이라는... 위기 없이는 굶어 죽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노무현 정부 때 바로 '우리 턱 밑까지 쫓아 온 중국'이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이런 이중적인 시각은 중국에서 살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잠시 중국을 방문, '구경'하고 온 이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대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낯선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중국에 대한 국민적 프레이밍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왕후이(49) 중국 칭화대 교수(중문학)의 한겨례 인터뷰 내용을 일부 옮겨 둔다.

오늘날 중국 정부가 펼치는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사회주의가 국가·사회의 운영원리가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지적은 타당하지요.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오늘날의 중국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유산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에 작용하는 사회주의의 유산으로 △세계 경제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경제 시스템 △국제관계의 대외적 자주성 △제3세계와의 우호·선린 관계 △평등·자율성에 대한 인민의 강한 요구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인민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급격한 시장개혁을 통해 양산된 부패와 불평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왕 교수는 진단했다
."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불확실성의 확실성: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시대

두바이에 실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에 그랬지만 지난 수 년동안 언론들, 정치인들이 두바이 찬가를 얼마나 불러댔던가. 아무리 불확실성, 위험, 무지가 근대사회의 본원적 특징이라고 치더라도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서 도대체 전문가들이 내리는 어떤 진단, 전망도 믿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원유값이 급등했을때 CNN은 이 급등세가 조만간에 진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불과 수 주 후에 유가가 급락했던 것. 최근 온세계를 흔들고 있던 미국발 금융위기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미네르바'의 비관적 예언에 찬사를 보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외환 유동성 위기는 지나간 듯한 분위기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마샬 버만이 책 제목으로 써서 유명해진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우리말로 그 책 제목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굳어진 것은 모두 사라진다'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인데, 독일어 원문은 덜 재미있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Ständische und Stehende"를 동어반복처럼 이해했나 보다. 사실 ständisch 는 사전에 따르면 '신분제적'이란 뜻 밖에 없는데... 실제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독일어 원문에서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엔 대개 "모든 신분적인 것과 정지해 있는 것은 사라지고" "신분적인 요소와 정체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등으로, 영어에서 번역할 경우엔 "딱딱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정도로 옮기는 것 같다.

'공산당 선언' 해당 부분을 독문과 영문으로 옮겨 놓는다.

"Alles Ständische und Stehende verdampft, alles Heilige wird entweiht, und die Menschen sind endlich gezwungen, ihre Lebensstellung, ihre gegenseitigen Beziehungen mit nüchternen Augen anzusehe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反美食 同志

정윤수씨 블로그에 이어 내가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하는 블로그가 생겼는데 그 이름이 '로쟈의 저공비행'. 주인장은 러시아문학전공자인 듯하지만, 주로 한국에서 새로 출간되는 인문학, 문학 쪽 서적에 대한 정보와 소감을 열심히 올리고 있다. 물론 개인 블로그인만큼 그런 무거운 얘기만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올라온 글에서 주인장의 美食에 대한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내 얘기인듯한 구절을 발견하고선 반가운 마음에 일부 옮겨 놓는다.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말하기의 원칙: 私心없는 유연성

한자 言은 會意文字로 매울 신(辛)+입 구(口)의 조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말로(口) 신랄(辛)하게 따지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인 것. 말의 인간,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이 재생산되는 체계로 본 루만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겠는가. 물론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 한정한다. 갓난 얘기는 말을 익히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격언, 속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사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일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에도 여전히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자리잡고 있다. 말은 어떻게 하느냐,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팔할은 되지 않을까? (cf.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말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고, 너무 적어서도 안된다. 특히,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쏟아붇는 말의 폭포수, 오, the worst of the worst다. 過猶不及! 그 다음 순위는 말이 많긴 하지만 상대방, 분위기를 고려하는 경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문제는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 때문에 곧잘 '오버'하게 된다. 말이 너무 없어서 유사 '투명인간'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당연히 말이 많은 경우보다 말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은 급속히 줄어들겠지만, 수비만 잘 해선 잘해야 비기는 것 아닌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말 많음/적음이 아닐 것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가, 그게 요점이지 않겠는가? 말을 '잘하기' 위한 어떤 원칙이 있을까? 우선 私心을 버리고 의사소통에 임하는 것 아닐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허나, 사심없음이 또 하나의 강한 원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의 마음, 상황을 제대로 읽고, 그에 맞출줄 알아야 사심없음이 비로소 전정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심없는 유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문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는 서로 비슷한 모습, 겹치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런 교집합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인들 혹은 학문의 세계에 투신한 이들과의 대화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아 할까? 쌍방에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심 버리기, 속물근성 벗기, 내면의 본질을 좇기... 그런 태도로 임해야 그 대화는 좀 '고상한', 혹은 심지어 '영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심, 사익, 사견에 치우친 대화의 경우 그 뒷끝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사심, 사익, 사견의 경계는 정말 불분명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학술논문을 써보려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할 그런 개념이고 주장이다. 최근에 떠오른 생각을 남겨 놓으려고 급하게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고, 이 생각의 실마리를 좀 더 붙들고 있다보면 아마 더 그럴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중국, 한국

요즘 중국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중국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좀 넓어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진 매우 단편적인 지식 혹은 인상에 불과하겠지만, 누가 알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 볼 일이 생길 지... 생각나는 대로 그런 지식, 인상 모아 놓을 생각이다.
우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수십편의 한국 드라마를 섭렵한 Ting은 최진실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꼽았는데 자살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심지어 옷도 한국에 직접 주문해서 입는다고 하고, 옷을 주문하는 그 한국 사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울까 생각중이라고 할 정도... 남녀를 불문하고 '김치'를 상당히 좋아한다. 만들어 먹는다는 학생들도 있으니.. 참고로 이들 출신은 상하이, 텐진, 난징, 우한 등 다양한 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김치가 중국에 이 정도로 확산되었는지 참 신기한 따름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Xin이 전언에 따르면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불만족도는 대체로 높은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서구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또 꺼리는 편이다. 어떤 대안이 있을지, 적어도 그 친구는 많이 생각해 본 것 같진 않다. 공산당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투표가 아애 없는 것도 아니란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접선거로 뽑는 모양. 또, 1989년 6.4. 천안문사건 때 죽은 학생 수가 만명 가까이 된다는 얘기도 있는 모양이다. 영문, 한글 위키피디아를 보니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은 2,3백명에서 5천명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크다. 여하튼 대륙인들 스케일은 어디로보나 크다. 티벳사태 같은 등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독일 등 서구 언론들이 너무 편중된 시각으로 보도한다며 불만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그렇단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허나 중국에 '혐한'감정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한 친구는 중국에 민주주의는 시기 상조라고 대놓고 얘기한다. 인구 80%가 세상사에 무지한 농민이라는게 그 이유. 80년대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하고서도 일당지배체제를 유지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 물론 부패등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지만... 천안문사건이 처음에 부정, 부패에 대한 저항이어서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변질된 측면이 있다는 얘길를 들을 땐, 왠지 묘한 기분.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사건이 그 이후 사회를 더 움추르게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덧붙이는 걸 보면... 우리 독재시대와 다른 점은 어쩌면 젊은이들, 나름 지식인들이 반정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싶다.
남녀간 양성 평등은 훨씬 강력하게 자리잡힌 것 같다. 남편이 요리를 전담하다시피하는 경우가, 심지어 아버지 세대에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여학생들이 술은 거의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남녀평등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한국 여성들이 성차별받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야 대개 인정하지만, 많은 경우 지구 어느 곳에서보다 더 씩씩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cf. '엽기적인 그녀').
그 친구에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때리는 장면이 눈에 띄나보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 경찰서에서... 어디에서나 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비록 많은 경우 장난스러운 설정이지만... 흠. 가벼운 폭력은 용인하는 그런 사회인가? 폭력으로 치면 미국영화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영화에선 오히려 총질처럼 폭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cf. 'no country of old man'). 일상생활에 스며든 미시폭력,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사회엔 정말 있나?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Beck, Simmel 그리고 사회학의 경계

최근에 좀 다른 맥락에서 겪은 몇 가지 일을 종합하면 이런 내용이다: "사회학은 언제 사회학인가? 사회학/비사회학의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빌레펠트대 Japp교수가 Beck의 "Welt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신랄(辛辣)하게 깐 '서평'을 오늘 읽었다. 그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벡의 이 책은 참 서평쓰기 곤란한 책이다. 사회학 저널, 특히 서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널에 사회학자로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사회학 저서가 아니다. 이걸 사회학 신간 서평이라는 틀 안에서 쓰려고 하니 곤혹스럽다." 뭐, 대략 그런 내용... (벡의 일련의 작업이 과연 사회학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Bora 선생도 지나가면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Bielefelder들에게 사회학이란 과연...? Luhmann이 사회학인가? 라는 질문도 여기 저기서 하고 있을 것 아닌가... 도대체 사회학의 경계는 어디에?). 벡의 이 책은 박미애 박사의 번역으로 곧 한국판이 나올 모양인데, 우연히 본 소개 기사를 보니 찬사 일색이다. 그렇다. 그 정도만 해도 사회학으로선 충분한 것이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선...
좀 다른 맥락에서... 며칠 전에 만난 Simmel 전공 선배는 짐멜의 에세이식 글쓰기에 대해 찬사를 날린다. 사실 짐멜의 에세이를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사실 이러쿵 저러쿵 하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에세이란게 그냥 근거를 대기 힘드니 상상의 나래를 펴서 한 번 써보자꾸나, 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횔더린의 시를 극찬했다고 하던가... (잘 모르는 얘긴 꺼내면 안되는데, 그냥 내 블로그니까...) 때로는 학술적 언어의 세계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답답함이 문학의 세계, 혹은 종교적 세계로 인도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그러니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시의 세계, 혹은 탄식으로 터져 나오는 건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불충분한 지식, 정보에 근거한 개똥철학, 역사소설을 학술적 글쓰기랍시고 내세워서는 안되겠다. 반드시 벡, 짐멜이 그렇단 얘긴 아니고...

敎理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 지도다" (Alister E. McGrath, 옥스포드대 신학부 교수)

흠. 어디에서 어떤 맥락에서 나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푸코: 고고학자, 족보학자

"푸코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푸코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것은 현재, 즉 현재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였다.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라는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고학의 시기. 유럽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다. 서구만큼 이성이 지배적인 규준이 되는 사회는 없다. 푸코는 유럽의 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사유했다. 푸코가 보기에 이성은 정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것은 비이성이고 광기이다. 이성이 내부라면 비이성은 외부이다. 이성 외부에 있는 자들은 타자이고, 내부에 있는 자들은 동일자(同一者, the same)이다. 이런 식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유럽 자본주의는 이 경계선을 가지고 작동한다. 그런데 이 경계선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타당한 것인가? 푸코는 경계선을 허물려는 혹은 경계선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푸코의 작업을 왜 고고학이라 하는가? 경계선 밖에서 ‘침묵’을 강제 당해왔던, 역사 속에 매몰되어 있던 타자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려 했기 때문이다. (...) 고고학 작업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광기의 역사』...
계보학 시기의 대표적인 책이『감시와 처벌』... 계보학은 권력이 어떤 성격을 가지면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계보학이란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 형태를 분석하는 것, 혹은 그 권력 행사의 효과들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강의 내용을 정리한 내용인 것 같은데 그 이상 출처에 대한 정보는 없다. 푸코의 고고학적, 족보학적 (계보학적) 관심을 잘 요약해 놓은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놓는다.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슬픈 예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멋진 노랫말이다. 오석준과 함께 만들었던 '이오공감'이라는 앨범에서 이승환이 부른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라는 노래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입대하던 그 무렵에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난다. 듣기는 좋은데 따라부르기는 힘든 그런 노래였고. 이 노래야 이별에 대한 예감을 얘기하고 있지만, 틀린 적이 없는 슬프예감의 적용 범위는 매우 넓어서 보편적 진실, 쓰린 진실 (bittere Wahrheit)에 가깝다. 아무리 부인하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그 틈을 비집고 기어코 파고들고야마는 그 슬픈 예감이 있다면 대부분 그 예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최근에 경험한 슬픈 예감 중 하나는... 매우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피하려고 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정말 편치 않았고 심지어 그 여파로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왜 있잖은가,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하게 어떤 자리에선 불편한 그런... 다시 한 번 얻은 교훈: 슬픈 예감이 든다면 무릎쓰고, 마인드 콘트롤해서 긍정적으로 해보려고 애쓸 일이 아니다. 아애 처음부터 슬픈 예감이 들지 않도록 사전 작업을 잘해야 한다. 한 번 '슬픈 예감'이 찾아오면 극복하기 힘들다. 차라리 그런 자리는 처음부터 피할 일이다. '슬픈 예감'은 어떤 경우에도 반갑지 않다. 걔네들이 친한 척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킬 것. 아애 원천봉쇄할 것.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겨울 새벽





기숙사 창문 밖 풍경

훔쳐 본 사랑


며칠 전 학교에 디카를 들고 갔다가 '그림 좋은' 장면을 목격하고선 쨉싸게 찍었다. 다른 쪽 찍는 척하면서 몰래... 줌으로 '땡겨서'... 이쁜 것들. 요즘 싸이버공간에서 이런 말을 많이 쓰더구만, "부러우면 지는 거다"ㅎㅎ 이로써 내가 실정법 위반한 사례가 하나 더 늘었다. 이번 죄목은: '초상권 침해'. 얼굴은 거의 나오지 않으니 봐주지 않을까 ㅎㅎ

Luhmann als Medium


지금 학교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이다. 위는 사회학, 정치학 학생들이 여는 파티를 알리는 내용이고, 아래는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만과 예술'에 대한 전시회 안내다. 바햐흐로 우리 루만 선생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빌레펠트 대학에선]. 하나의 icon이 된 것. 체계이론 개념을 쓰자면 하나의 Medium이 된 것. 도대체 루만이 누구인지, 무슨 얘길 했는지 묻지 않고서도 '루만'이 의사소통을 연결하는, 혹은 가능케 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아래 사진은 또 어떤가... Soziologie Fanshop에서 파는 '루만티셔츠'다 (비싸다. 21유로, 18유로씩이나 한다).

시의적절한 낙서

학교 '모처'(^^)에 있는 낙서다. 흘려써서 여러 번 봐야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는데... 옮겨적으면 이렇다. "Gewinn wird privatisiert und Schulden vergesellschaftet. Die Krise ist der Normalfall." 캬! 두 문장으로 엄청나게 많은 메세지를 전달한다. "이익은 몇몇 개인이 챙겨가고, 손해가 생기면 사회가 나서서 메꿔준다. 위기는 이젠 일상적인 일이다". 사르코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위기의 책임은 잘 나갈때 그 이익을 챙겨가던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최근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 주요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투자금액을 올리고 경기부양 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최소개입주의를 신봉하고, 그 원칙을 세계에 전도하던 미국마저도. 국가중심적 발전의 모범적 사례인 한국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나, 지금 상황은 발전국가의 그런 모습과도 많이 다르다. 발전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모습이라면, 최근 모습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도록 방기하다 위기가 발생하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자해서 기업들의 살려주는 것 아닌가. 이러다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그 기업들을 혹독하게 다그쳐서 더 많이 받아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그건 복지국가 모델인데, 신자유주의 국가모델이 그리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 않다. 결과는 딱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경제를 잘 나갈 때는 규제를 풀고, 세금깍아주고 [똘아이 정권의 부유세 축소처럼], 이익을 큰손들이 나눠먹게 하다가, 어려워지면 세금으로 그들 빈주머니를 채워주는 것. 2mb 무리들은 그 교과서적인 인물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더 적은 규제가 아니라 더 많은, 아니 더 효과적인 규제다. 망나니처럼 혹은 깡패처럼 거칠 것 없이 세계를 흔드는 그런 자본의 흐름, 투기세력들을 최대한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를 치우고 거품을 과감히 걷어내야한다. 냉전이후 지금까지 약 30여년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과연 역사가 될 것인가...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자들, 그의 표현으로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입장변화가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케인즈주의로 돌아서는 것인지, 아니면 구제금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겉만 바꾼, 즉 위장한 '케인즈주의자' 들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어쨌든 더 지켜볼 일이다.

"현재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들이 됐다. 미국의 우익진영조차 대거 케인즈주의 진영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외면받은 케인즈주의를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이성과 증거의 승리가 도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규제받지 않는 시장은 자기교정 능력이 없으며,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경제이론은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금융시장 종사자들은 일종의 '시장 근본주의'를 밀어부쳤다. (...) 오늘날 특정 이익 세력를 위해 오용될 위험이 있는 것은 새로운 케인즈주의 노선이다. 지난 10년 동안 규제완화를 밀어부친 자들이 교훈을 얻었을까?아니면 그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겉만 바꾸는 개혁을 추진할 뿐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략의 변화만 있는 것인가?"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21세기에 믿는 기독교

내용은 다르겠지만 세계의 여러 종교는 세상사, 인생사를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지식틀이다. 오랫 동안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지식으로 그 위세를 떨치다가 소위 근대 이후 차츰 차츰 그 지위를 다른 지식체계에 내어 주고 있다. 과학이라는 지식 말이다. 기독교에 한정해 본다면 전지저능한 하나님 때문에 인간은 신의 뜻, 더 정확하게는 신의 뜻으로 표현되는 교회와 성직자의 해석을 좇아서 사는 수동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때문에 지구와 인간의 유일성 혹은 특별성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는 이런 지식틀에 근본적인 도전은 바로 근대과학인데, 대표적으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주장을 들 수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다윈 이후로 인간과 동물의 본질적 차이는 의심 받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인간 사고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했다면, 다윈은 시간적 영역을 확대했다. 중세 기독교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정도로... [신약성서가 씌여지던 시기로 돌아가면, 더 '안습'이다. 바울은 스페인을 땅끝으로 생각했었다니까.]

다음 사진은 탐사선 보이저 1호가 1990년 6월 명왕성 근처을 지나면서 찍은 지구의 모습이다. 사진의 별칭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이 사진에 영감을 받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이 시점에 보이저호는 지구로부터 거리는 40억 마일, 약 64억 km 에 있었다고 하는데, 무척 멀다는 느낌만 줄 뿐 실제 내 수리능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이런 내력을 알고서 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히 QT용이라고 할만한 그런 사진이다.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 1호는 9월 5일 지구를 떠나 무려 30년 동안 우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 중 우주 밖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태양으로부터 155억 km 거리를 날아간 것. 태양으로부터 약 125억 km 떨어진 지점에 보이저 2호가 있다." (2007년 8월 얘기인 것 같으니 지금은 훨씬 더 멀리 있겠다). 두 우주선은 하루에 160만 km를 이동한다고 하고, 지구로부터의 명령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지만, 보이저 1호에 도달하려면 14시간이 걸리고 보이저 2호의 경우 12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빠를까 싶긴 한대...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 혹은 각종 신이 구름 위 어드메나 바다 깊숙한 곳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나와바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뿐이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서 자란 우리들에겐 그리 큰 심리적 손상을 주지도 않는다. 리차드 도킨스처럼 과학으로 신앙을 미몽에서 깰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취침용으로 도킨스가 이야기를 이끄는 도큐를 '즐겨' 보고 있는데, 이 양반은 '과학교', 그 중에서도 '진화론교' 신자라 불러도 좋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서 종교적 주장을 강변하는 일부 '무식한' 창조론자들에 대해선 나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 특히 유신교의 유산과 의의를 그리 싸그리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인류가 사고하는한 21세기, 아니 그 어느 때에라도 종교, 유신교에 대한 수요는 있다는 것. 물론 계속 살아님을 종교는 매우 유연해야 한다. 새로 얻게 된 지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창조론자들, 창조과학자들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머지 않아 중세 기독교처럼 시대착오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저자의 죽음, 인간의 죽음

"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라르메가 언제적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트라면 프랑스 구조주의 언저리에서 늘 언급되는 사람아닌가. 이런 진술이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다. '저자의 죽음' 얘길 읽으며 난 역시 그 구조주의 영향에서 씌여졌던 푸코의 '말과 사물' (1966) 말미의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 주장을 떠올린다. "man is an invention of recent date. And one perhaps nearing its end. If..., then one can certainly wager that man would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p.422). 물론 바르트가 얘기한 '저자의 죽음'의 논지가 '인간의 죽음 (혹은 사라짐)'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총과 장미'의 '11월에 내리는 비'



.... Cause nothing lasts forever, and we both know hearts can change. And it's hard to hold a candle, in the cold November rain...

... So never mind the darkness. We still can find a way. Cause nothing lasts forever. Even cold November rain ...

Guns N' Roses - November Rain (1992)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한국 최초의 계급 정권: 2mb와 그 친구들

대학시절 맑시즘 정치이론의 핵심 테제인 계급투쟁, 노동자 계급 혁명을 얘기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얼마나 낯설어 보였는지... 그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 혁명 운운하는 소리는 후일담에서나 듣게 되었고, 그 많던 좌파들, 맑시스트들은 제도정치권으로, 시민운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허나 한국의 정당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건 누구나가 쉽게 지적하는 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하질 않나, 진정한 좌파정당이라고 자부하는 민노당에는 '민족해방'(NL) 세력의 입지가 더 커졌다. 도대체 한국에서 좌파/우파, 진보/보수가 제대로 나뉘어본 적이 없다. 보수정부라고 얘기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추, 김영삼 정권에서도 꽤 진보적이라고 할만한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된다. 의료보험도입, 과외금지, 고교평준화 같은 걸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보수/진보를 얘기하며 정체성이 불분명하다고 투덜거리게 된 건 사실 매우 행복한 고민이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독재/민주로 세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재정권과 보수정권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때로는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좀 더 평등지향적인 정책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신한국당 출신이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 상대적으로 진보적 인사들을 많이 기용했고, 스스로 매우 대중추수적 입장을 지녔다. 그렇게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선명한 보수정권, 계급 혹은 지지세력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정권은 2mb정권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독재정권' 혹은 '3당야합' 같은 핸디캡 없이 출발했다는 점은 이 정권이 노골적으로 수도권, 건설족, 강부자등으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지지핵심집단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참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인가.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가 종부세에 대해서 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일부 인용한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의 역사였다. (...)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수적 정부가 집권해 왔지만, 진보의 도도한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한 진보적 개혁이 거의 모두 보수적 정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제도 등의 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전두환 정부 때였으며, 토지공개념이란 급진적 성격의 개혁안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정부때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이라는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 이런 개혁안이 나왔다면 보수진영은 좌파의 책동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좌파정책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평준화교육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보수진영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평준화의 틀은 그 뒤를 이은 보수적 정부하에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정중 하나로 들먹여지는 대학입시 ‘삼불정책’의 기본골격도 실제로는 보수적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유럽의 자기성찰: Can Europe produce an Obama?

한국에서는 흔히 '서구'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그 당사자들은 한묶음으로 묶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서로를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 신대륙과 구대륙. 이 구분은 주로 '신대륙' 사람들이 즐겨 쓰는 것 같다. '구대륙'사람들은 다시 대륙과 앵글로색슨으로 나누어 부르는 경우가 잣은 것 같다. 허나 이는 다시 '구대륙' 안에서도 대륙 사람들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토와 '바닷것'들을 구분하고, 그리고 그 '바닷것'의 영향권 아래서 만들어진 '미국' 도 그 편으로 편입시키고. 독일인들 오랫동안 타자를 '서구' 혹은 '선진국' 으로 불렀다. 독일 왼쪽에 있는 개명한 선진국들을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또 그들의 물질문명, 실증주의적 경향을 경멸하며... 이런 자아/타자구분법을 연구해도 재미있겠다. '오리엔탈리즘'이 대표적인 연구일텐데, 그 후 관련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온 것 같지 않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어제 본 신문 기사 하나를 소개하려다 그렇게 되었다. IHT 첫면, 헤드라인뉴스로 박힌 제목: "Can Europe produce an Obama?" 유럽과 미국의 관계, 그 역사는 참 복잡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대 문명의 - 아름다운 그리고 추하기도한 - 꽃은 비록 유럽에서 싹트긴 했지만, 미국 땅에서 비로소 만개했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20세기 초반 유럽 지성인들 중 미국 정치제도를 부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토크빌, 맑스 베버가 대표적).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패권국가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국제 깡패짓을 많이 해서, 복지국가 체계를 정비해 가던 구대륙 사람들은 미국의 현실적 힘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박하게 날뛰는 미국 것들 은근히 무시하였다.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그 뿌리는 유럽에 있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그동안 미국의 인종주의, 흑백갈등을 언급하며 그 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며 자신들의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의 미국 무시는 이번 부시 정권 시기에 그 정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서유럽 국가들의 친미성향 정도를 조사해 본다면 상위권에서 내려 오지 않을 독일에서도 공공연하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정치인들이 많았으니까.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번 미대선에서 오바마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도, 그리고 오바마 당선을 내 일인양 기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터. 허나 공교롭게도 오바마가 당선되자 유럽인들은 자기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인을 미국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 미국사회. 누구도 이렇게 쉽게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IHT는 그런 '유럽'이 느끼는 당혹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회의 경우 본토 출신 의원 중 흑인은 한 명이 있을 뿐이고, 영국에서는 하원 646명중 15명이 비백인. 8천2백만명 인구의 3%에 달하는 2백9십만이 터키계인 (독일 시민권자는 8십만명) 독일에서는 연방의원 613명 중 5명이 터키계라고 한다. 언제쯤 프랑스나 영국에서 흑인 대통령 혹은 수상이, 그리고 독일 같으면 터어키계 출신 수상이 뽑힐 수 있을까?
사실 수치로 보면 미국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오바마는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고, 이번에 새로 구성된 하원의원 중 흑인은 39명으로 약 9퍼센트라고. 미국인구 중 흑인이 13퍼센트라고 하니까... 하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대통령으로 흑인을 선택함으로서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부시의 실정과 미국의 쇠락을 은근히 즐기던 이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였다. 지난 수년 동안 부시와 미국 때리기를 즐기던 유럽인들은 이제 당분간 역사 앞에서 또 한 번 선수를 치고 앞서가는 미국을 부러워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IHT 기사 중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영국같은 의회제 아래에선 의외의 인물이 수장으로 뽑힐 기회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 "영국에선 오바마처럼 뛰어나게 연설을 잘 한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는 힘듭니다. 의회에서 서열을 따라 커가야 하는 거지요" 영 노동부 장관의 말씀.]
이 시점에서 우리 '조국'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바마 당선 이후,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자와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 꼴"이라고 주장했다던 2MB와 청와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코미디와 비교를 불허하는 빼어난 수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코디미계, 개그계의 쾌거!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한국 코미디계는 앞으로 2MB가 접수한다.

ps) 지난 주말 독일 녹색당 전당대회에서 터키계 2세인 Cem Ozdemir가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1994년 터키계 최초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고, 2004년 대단치 않은 스캔들로 유럽의회로 물러났었는데 이번에 국내정치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 "흑인최초..."를 달고 다녔던 오바마가 미대통령이 되었으니, 어쩌면 오즈데미르도 독일 수상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42살이라니 아주 불가능해보이지도 않고. Wer weiss...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독립'의 의미론

'인문계' 쪽 출신들은 외우기에 능하는 전설 혹은 선입견이 전해져 온다. 하긴 인문계 시험에 외워서 치루는 과목의 비중이 높고, 인문계 출신들 성공의 지름길인 각종 '고시'의 당락도 대개 암기력에 좌우되는 것 같으니 아주 근거 희박한 주장도 아닐 터이다. 외우기를 잘 한다는 사태 그 자체는 판단중립의 영역일 것이나, 어디 그것을 판단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보자.
우선 한국 인문계열에서 요청되는 외우기 방식의 문제점은 그들이 외워야 하는 지식이 너무 편협하는 데에, 또 닥달 외운 지식이 더 종합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허나 정확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채 후자만을 강조하다 보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귀결되기 쉽다는 점도 잊지말하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의 엄밀성,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나 역사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부터 함량미달이다. 예를 들어 다음에 인용할 史實.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독립'이라고 다 같은 '독립'이 아니었던 것. '독립'의 의미론. 이 멋진 주제를 누가 연구했을까?

인식의 전환

" '한국은 3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어서 별로 뻗쳐나갈 데가 없는 데다, 석유 등 천연 자원도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이 살 길은 '인재', 즉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활용해 수출을 많이 하는 길밖에 없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1968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후 십여 년 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
삼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란 것도 어떻게 잘 보면 고유의 소중한 천연자원이다. 이미 윤구병 선생이 <조그마한 내 꿈 하나> 및 <잡초는 없다>에서 지적한 바 있듯, 동, 서, 남쪽 바다에 온갖 해산물을 기르고 오염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한다면 '무한히' 해산물을 건져 올릴 수 있다. 또 70%의 풍부한 산에 온갖 좋은 나무를 심고 약초와 나물, 꽃을 심거나 길러 조심조심 활용하기만 해도 '엄청난' 산림자원과 먹을거리가 나온다. 삼면의 바다와 70%를 단점으로만 보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장점으로 만들려는 컨셉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
자원이 많은 나라는 제국주의 침탈로 오히려 시달림을 받는다는 '자원의 역설'까지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늘 타자의 장점을 부러워할 줄만 알았지 우리의 장점을 들여다볼 줄 몰랐다."


강수돌 교수의 얘기다. 흠. 흥미로운 얘기인데 좀 '소화'를 시킨 다음에라야 뭐라도 논평을 할 수 있겠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잠시 그것을 옮기면 우선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3일을 굶으면 담장을 넘는' 그런 존재임을 설명했다. 물론 이 말 한마디 한 것은 아니고 물질 세계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풀이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덧붙인 것은, 그렇게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인간에게 누군가 밥을 주면서, 정성껏 차리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네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하여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내밀면 비록 사람이 3일을 굶었어도 '싫소, 나는 그거 먹지 않겠소' 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억압적 현실이 비참한 상황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진실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실천 의식이라는 설명이었다
."

내가 여러 번 인용한 정윤수 블로그에 오늘 올라 온 얘기 중 일부다.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질 (혹은 요즘식으론, 유전자) 환원론적 이해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근대과학, 즉 실험과학 혹은 엄밀과학의 방법론으로 인생사, 세상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인문학, 사회이론의 존재감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주어지는 것 아닌가? 자연과학 흉내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이제 그 자연과학마저도 변하지 않는가 (cf. '통섭'논쟁). 인문학, 사회이론은 세계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줘야할 시대적 사명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ps) 김교빈 교수가 호서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이 과의 이름이 '문화기획학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메디아닌가? 문화기획학교?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소개되던데... 소리도 요란한 그 '문화의 과잉'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회 '문화 빈곤'의 징표다. 2MB 일당이 각개 각층의 지원을 받아 활개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토양'말이다.

2008년 11월 12일 수요일

'더' 독해지기

기본적으로 여유있고 느슨하지만 나름 독하고 모진 면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뭐 그냥 저냥 만족한다. 내 얘기다. 허나 '자기만족'은 여러 면을 갖고 있다. 정신건강에 좋긴하지만, 동시에 현실안주, 현실정당화하기도 쉽다는 말씀. 그렇다고 내가 자기만족에만 도취되어서 사는 것만도 아니다. 며칠 전에 '악몽'에 대해서 쓰지 않았던가...
인생에서 '자기만족', '자존감'이 꼭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는 항상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선 곤란하고 스스로를 더 모질게 몰아붙여할 때도 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이른 바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로 그런 '때'가 쭈욱 이어진다는 데 있지만... 독일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당연히, 추월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늘 그런 사례를 또 경험했다. 음... 혹자는 지금도 충분히 모질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럴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은 더 모질고, 독해져야 할 때다. '독한 사람'! 항상 긍정적인 뜻을 전달하려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경우, 그 말은 순도 100% 칭찬이다.

ps) 초딩들 방학일기에나 어울릴 이런 '- 해야겠다'류 얘기를 - 몇 명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 남에게 읽으라고 내 놓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떡하니 올려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름 더 독해지기로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있지만 차마 그 내용까지 공개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그 방향은... 뭐겠는가, "논문에 집중하기"지. 특히 홀로 있는 시간에 논문 쓰는 일에 도움되지 않는 일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하기. 정신활동을 좀 단순하게 하고, 대신 운동 시간을 늘릴 것. 허나 블로그는 도움되는 정신활동으로 분류했으니 '염려'(?) 놓으시라. 무슨 근거로? 내 맘이지 ㅎㅎ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루만의 죽음 10주년

...article coming soon

바디 랭귀지

위대한 인류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 무엇일까? 언어사용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언어는 인간 최대의 발명품. 언어 없는 인간, 사회? 상상하기 힘들다.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학문적 해석이 있을 터이고, 동물도 '나름' 언어를 사용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지만,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해서 자연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처럼 인간의 언어사용능력에 대해서도 그러하리다. 성서의 경우 인간과 피조된 이후 바로 신과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언어가 다양한 언어로 나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시도를 응징의 결과로 이해되지만. 어쨌든... 인간의 언어의 능력은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의 근원 중 근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언어의 발명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이었고.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의사소통의 비언어적 수단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기능,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비언어적 요소라... 뭐가 있을까? 제스춰, 특히 손모양, 위치, 움직임 등 몸동작? 이런 것들은 음성언어의 보조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이 의사소통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예를 들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경우가 있다. 바디랭귀지를 쓸래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 음성언어의 한계를 이용해서 몸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춤은 어떤가? 이런 경우는 의사소통의 목적 장체가 다른 것 아닌가? 의사소통의 목적은 사실 이해아닌가? (오해도 이해다). 춤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특징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을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평론가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 혹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닌가? 우리 백남준 형님이 남기신 '예술은 사기다"라는 명언이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어가 왜 그리 호사스러운지 이해할만하다. 원래 이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 예술활동을 말로서 풀어내려니 무리가 따를 수 밖에.
현대문명이 오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의사소통에 기반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생의 많은 부분이 지니는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다. '지식'의 증가는 동시에 '비지식'의 증가를 가져온다. 도대체 뭘하는지 알기조차 힘든 현대예술이 '장사가 되고', 종교에 대한 열정이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현상은 어쩌면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이루어낸 현대 문명의 이면일지도 모르겠다.

만화 출처: 한겨레 비빔툰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地平融合

'지평융합'. 해석학의 용어 'Verschmelzung der Horizont'의 번역어인데 그 동네에서 어떤 뜻으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개념이 마음에 들어서 내방식으로 이해해서 쓰기로 한다. 그래도...급하게 검색해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텍스트를 대하기 전에 일종의 편견을 갖는다. 이 편견을 선이해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우리의 선이해가 만들어놓은 한계 - 지평 - 속에서 이루어진다. 각자의 선이해 와 모순되는 텍스트는 선이해 속 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이 때 각각의 선이해는 텍스트 속의 선이해와 융합하여 새로운 선이해로 변화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선이해가 만나 하나의 선이해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선이 해는 다시 다른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며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내가 '지평',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분명히 다르지만, 신경쓰지 않고 내 길을 가련다. 뭐, 글 개념들에 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지평은 다분히 공간적 개념이다. 유사표현으로 '경계'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평이란 개념으로 난 심리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싶으니 - 루만식으로 얘기하자면 - '심리체계의 경계' 정도로 정의해도 되겠다. '사회 세계'라 표현을 염두에 둔다면 '심리 세계'라고 해도 될것이고, 그 '심리세계'의 경계로 생각하면 되겠다 (Psychische Welt, cf. Soziale Welt). 그렇다고 가능한 모든 심리체계 작동이 가능한 범위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 심리 체계 혹은 심리체계로 제한한다. 사회체계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설정되는 것처럼 심리체계 역시 그러하다. 공간적으로 표현을 계속 사용하자면, 내 심리체계의 중심에는 분명히 내가 있다. 그 '나'를 중심으로 이제껏 내가 경험한 온갖 사람, 사물, 사건, 지식, 정보들이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가까이, 어떤 것들은 멀리, 또 어떤 것들은 감춰진 채로... 지평, 즉 경계가 있다는 건 그것을 기준으로 그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된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 지평과 경계에 대해서 조금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지평이 단선적이라면 경계는 원형적이란 느낌을 주는 것. 굳이 둘을 일치시키려한다면 '둥그런 지평'을 상상하면 될 듯. 어쨌든...). 모든 심리체계가 그런 지평/ 경계를 갖고 있다면, 다른 두 심리체계가 의미를 주고 받는 상황에선 어떤 방식으로는 그 두 지평이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을 지평융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체계이론 개념으로는 strukturelle Kopplung이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어제 태어난지 약 30시간 정도되는 '생명체' (표현이 좀 '거석'하지만...)를 만났다. 오랫동안 좁은 동네에서 큰 변화없이 살면서 내 지평이 굳어져서인지 처음에 이 새로운 생명체, 인간 존재를 심리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좀 난감했다. 사실 몇 달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구나 (다른 아이).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낯선 느낌... 낯선 성인을 만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인의 경우 상대도 분명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 지평과 내 지평의 Kopplung은 자석이 서로 달라붙듯 쉽게 되는 편이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상점에서 생전처음보는 판매원에게서 그리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지 않는가? 허나 이 아이의 경우는... 그 아이의 지평은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지평 안에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낯설게 느끼는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interaction 상황인 것. 갓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관찰해보면 대개 말을 알아듣는 큰 애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며 그런 상황을 처리한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는 손님들ㅇ를 배려해서라도 더 익숙한 상황의 하나로 치환하려는 노력아닐까?
그 일을 계기로 내 지평이 매우 굳어져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굳어진 지평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좀 변화를 주고 싶다면, 심리체계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좌표로 표현한다면 (0,0) 이거나 (0,0,0)이 될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떨까. 인식의 주체마저 내가 아닐 수는 없으니까, 일종의 심리 실험이 되겠지만. 즉, 타인(혹은 절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지평을 상상하고 그것을 내 지평으로 삼아보기.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惡夢

꿈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아직 그 기제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 프로이트 할아버지 적보다야 많이 알려졌겠지만 주로 수면 행태에 대한 연구인 것 같고 꿈의 발현, 해석에 대해서 획기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들은 바 없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영역이니 동서고금 꿈은 이용하고 가지고 장난치기 매우 좋은 소재였음에 분명하다. 특히, 일상적 경험에 의해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에 '꿈'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종 역사책, 경전에서 꿈은 단골 소재였다. 성서에서도 그 흔적을 여기 저기 찾아볼 수 있고. 많은 경우 굳이 '꿈'과 '현실'을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꿈'을 '현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러니까 순수한 '비현실' 세계의 영역으로 몰아내는 과정이 바로 근대화였다 [근대화에서 삶의 공간 밖으로 내쫓겨났던 것들, 혹은 합리적 '터치'를 거쳐야만 다시 유입될 수 있었던 사례들은 많이 있다. 푸코 형님 저작을 참고할 것. 미침(고광기), 몸, 건강, 태어남, 죽음, 감정 등등. biopolitics라고 부르던...]. 프로이트 할아버니가 꿈을 무의식 세계의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근대인'들이 펄쩍 뛰었던 일도 큰 무리는 아니다. '탈근대인'이 프로이트에 거부감이 없는 건 바로 그 '탈' 때문이고. 그래도 '꿈'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진 않다. 꿈이 없을수록 숙면을 취한다는 '건강상식' 정도.
꿈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고, 대개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해하는 것 같다. 요 며칠 惡夢을 꿔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에 보았다.
악몽이 뭘까? 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깼을 때 '휴,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싶으면 악몽을 꿨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출현했고, 영화 여러 편 찍었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웃기지도 않고 아픈 부분을 꼭꼭 찌르는...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계 혹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떤 것들이 꼭 드러난다. 요즘 많이 생각했던 주제나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좀 더 이해할만하지만, 어제처럼 요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그랬다고 믿고 있는 얘기가 뜬금없이 등장할 땐 좀 황당하다. 무의식... 아, 그 부분까지 비워야 하고, 맡겨야 하는 것일까? 기도 중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이런 표현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이지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게 해달라고 분명하게 요청해야 할 모양이다.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축제 (1996, 임권택)

난 임권택 감독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다. 왜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나 '물건'들은 값어치있게 여기지 않게되는 그런 심리 있잖은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 이유로 내게 괄시를 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흐도 그 중 한명이어서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고흐 그림 때문에 막상 화가에 대해서, 그 그림에 담겨있을 지도 모를 '깊은 뜻'에 대해서 더 알아볼 생각을 하질 않았었다. 그런 탓에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방문에선 살아 생전 그림 몇 점 팔아보지 못해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던 화가의 그림들이 그토록 '삐까뻔쩍'한 건물 속에 담겨져 있다는 어색함만 확인하고 왔고, 수 년 전 브레멘에서 열려서 성황을 이루었던 고흐 전시회에선 전독일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독일의 그 중산층, 고만고한해 보이는 문화병 환자들 구경한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다. 최근 읽은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책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989/2004)가 비로소 고호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비슷한 역할을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축제'가 했다. 꼽아보니 애써 찾아 보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이 양반 영화를 많이 본 편이다.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에 대해선 별 기억이 남아있지 않고, '장군의 아들'(1990)은 그저 그런, '태백산맥'(1994)은 내가 봤던 임권택 영화 중 최악 [10권짜리 대하소설을 2시간 남짓한 영화로 옮기면서 너무도 싱거운 얘기가 되어버렸다], '취화선'(2001)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외국 손님용' 혹은 '국제 영화제용'이란 인상을 너무 강하게 풍기는 게 거슬렸고, 역시 '서편제'(1996)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다행히도 '축제는 '서편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서편제'처럼 물흐르듯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윗길로 쳐줄 수는 없겠다.
재미있는 건 <서편제>와 <축제>가 모두 이청준 원작이라는 점. 한 때 이청준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있었던 터라 생각해 보면 까닭있는 '우연'일수도 [이청준 원작인 '밀양'도 재미있게 봤으니...]. 이청준 원작이라고 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서편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된 이후에 영화로 각색되어 나온 것이고, <축제>는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 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 것이라고 한니... 축제는 자전적 얘기라고 한다. 주인공은 소설가고, 배경도 남도 어디이고,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고작 소설가나 하고 있고, 군수가 대학 친구이고... 허나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전적 얘기임을, 안성기가 이청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사실 그리 극적인 이야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주인공 노모의 장례를 치루게 위해 모여든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갈등... 죽음이 산 사람들의 관계를 새로이 배열하는 그런... 한 가지, 이오덕 선생께서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축제>(祝祭)가 일본말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제목이 좀 찜찜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잘 어울림을 알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라. 상복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블랙코미디'풍이랄까...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제사 제(祭)자 앞에 축(祝)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치른다." 이오덕 지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우리 전통을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놓으려 애쓰는 티를 '너무' 내는 편인데...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기도 하고, 또 영화 곳곳에 해설용 자막을 집어 넣기도 한다.  '취화선'에서 그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서편제'에서도... '축제'는 그 사용이 가장 심한 편인 것 같다. 얼핏 다큐를 보는 것 같기도...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의 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길 위 군데 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다.
영화'축제'의 장점도 많이 있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자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 연기 또한 빼어나다. 허나 너무 빼어나서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얼핏 무대 위의 연기 같은 것 (연극배우 출신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데 백원 건다^^). 주연급도 다 괜찮은 편인데, 다만 갈등관계, 긴장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정해의 연기가 좀 거슬린다. 위악적인, 좀 까칠하고 튀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을 고려해도, 시종일관 크게 바뀌지 않는 오버성 평면적 연기로 일관하는 건 좀 그렇다. 임권택 감독이 특별히 사랑하는 배우인것 같은데, 더 클 수 있을지... 아니, 10년도 더 된 영화이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면 안성기 연기는 나무랄데 없다. 이토록 잘 맞는 '옷'을 입은 안성기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듯.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또 영화의 내러티브를 진행시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인물로 서울말 쓰는 기자를 설정해 놓은 점도 거슬린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 내 눈에 이런 점들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이고, 영화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화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强敵

"한밤의 한반도 사진입니다. 촛불같은 평양 빼고 새까만 북한 사진 때문에 유명해진 사진이지요. 그런데 남한의 수도권과 지방의 불빛을 보십시오. 수도권은 작열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데, 지방은 깜박깜박하지요? 과열 수도권과 침체 비수도권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인용한 글과 사진은 건축가 김진애씨 칼럼에서 가져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제봤던 조선일보 기사를 떠올렸다. 아, 그것도 칼럼이었던가? 발로 쓴 것 같은... 지방대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현상을 너무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지적해서 불쾌함을 안겨주기도한... 일부를 인용하면...

"
지방대학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약 200여개의 4년제 대학이 있다. 이 중 서울 소재대학은 45개교, 22.5%다. 나머지 77.5%인 155개교는 비서울 지역에 위치한다. 이들 대학들은 '인(in)서울' 대학과 '지방대학'으로 불린다. ...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방대를 수도권대학과 '지잡대(지방에 잡스러운 대학)'로 분류한다. 수도권대학은 거리에 따라 학교 서열이 달라진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접근성이 떨어질수록 학교평가가 절하된다. 지잡대는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존재감 없는 대학으로 인식된다. '지잡대'도 '지거국', '돋보잡대', '지잡의대' 등으로 구분된다. '지거국'은 지방의 거점 역할을 하는 국립대, '돋보잡대'는 약간 돋보이는 지방대학, '지잡의대'는 지방의 의대라는 뜻이다. "

'지잡대' 같은 혐오스런 표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구글해보니 꽤 많은 검색결과를 알려준다. 허나 아무리 저자거리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자칭 일등신문이 그런 것까지 친철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한병선이라는 교육평론가. 교육평론가는 또 뭔가?
참, 가지가지한다.

최근 미국에서 돈을 받기로...스와프, 스머프... 어쩌구 해서 한국 시장이 좀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유로가 1,500대까지 내려갔다고 하고 (오늘은 1,600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러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은 환율급등 못잖게 우울한 혹은 으스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진애 선생이 전하는 대로
"불황에 수도권에 더 투자하여 그 이익을 지방에 나눠주는게 낫다... 30일 국가경쟁력위원회(위원장:사공일)를 앞세워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수도권 투자활성화 대책’의 명제입니다".
그리고 오늘자 한겨레에 따르면... "
정부·여당이 국민적 역량 결집이 절실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법안과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초당적 협력과 사회 각 분야의 협력을 요구한 지 4일 만이다. ...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날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박희태 대표와 한승수 총리,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이 참석한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정기국회 법안처리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당정 수뇌부는 전날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확정한 불법시위 피해자 집단소송제 등 이른바 ‘떼법 방지 법안’, 금산분리 완화를 담은 은행법, 대기업의 방송진출을 허용한 방송법·신문법 등 131개 ‘이명박 중점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난 2MB와 그 일당을 보면서 조직을 망치는 리더 유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머리가 나쁘지만 부지런한 사람". 허나 그들이 망치는 건 그냥 단순한 한 조직이 아니지 않은가. 비극의 시작이다. 경제위기 때문에 그 동안 좀 조용했던 것 뿐이지... 이들은 부지런할 뿐 아니라 집념까지 강한 강적 중 강적이다. 누가알랴. 시절이 더 좋아지면, 운하파겠다고 다시 덤벼들지...

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2008년 10월 30일 목요일

마광수 교수 근황을 듣고...

오랜만에 마광수 교수 소식을 들었다 (한겨레 기사). 전과2범, 20세기 한국에 태어난 게 죄라면 죄인... 한국, 한국인의 장점이 많지만 그 장점의 원천을 이루는 정서는 가족주의나 동질감 아닐까? 물론 어디 한국에서 뿐이랴. 동서고금 그런 정서는 모습을 바꿔가며 갈등, 전쟁, 살육을 일으키지 않았나,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쩌면 한국들이 배타적인 정도는 '귀여운' 수준 아닌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주노동자들 같은 당사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얘기겠지만, 인류사에서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특히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이라는 현실과 그것을 이용해 먹으려 들었던 위정자들에게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없앨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 또 서기 2008년에 '간통죄'가 존재하고 여전히 폐지하지 못하는 현실은 썩 잘 어울리는 현상이다 ('간통죄'가 얼마는 웃기는 짜장, 짬뽕인지에 대해선 여길 참고). 성에 대한 독특한 취향을 글로 표현한 것을두고 현직 문학전공 교수를 구속했던 과단성과 작곡가 윤이상씨에게 생전에 다시 고향땅 밟을 기회를 끝내 주지 않은 그런 일관성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교수, 그래도 좀 더 꿋꿋하게 오래 사시길 기원한다.
인터뷰 중 반가운 구절을 발견했다. 얼마전 타계하신 작가 박경리와 '토지'에 대한...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토지'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생각 한 켠에 늘 자리잡고 있던 불편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ㅎㅎ 쌩유, 광마선생.

박경리씨는 살아있을 때부터 대가 취급을 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난 <토지>도 잘 썼다고 생각 안해. 문장도 100% 일어 문장이야. 세 권 읽다 말았어. 애들한테 물어봐도 20권 다 읽은 경우 못봤어. 눈치보기야. 독자들도 <토지> 안 읽어놓고, 왕따 당할까봐 그 말을 못해. 통탄할 일이지.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하는 거야."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다움

'답다'라는 우리말, 듣기에 좋다. 어른답다, 아이답다, 학생답다... 물론 '-답다'라는 표현은 위계질서상 위쪽에 있는 이들이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옳은 질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써먹는, im Grossen und Ganzen 여전히 효과적인 담론 자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그 문장에서 '학생답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바는, 뭐, 뻔하지 않은가. 바른생활... '내가 언젠가 조카들에게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내뱉었던 그런 표현... '엄마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런 권위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용례를 제외한다면, '- 답다'는 말은 좋은 의도를 전달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이 표현이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그럼 그렇지, 역시 너'다운' 짓이야. 어쨌거나... ).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상황, 상태가 있지 않은가? 너무 꾸미거나 세상이치에 밝으면 10대답지 못한 것 같고, 다시말 해 그리 좋아 보이지 않고... 20대 땐 패기를 갖고서 무모해 보이는 일에도 도전해 보는 모습이 보기 좋고... (아, 그런 모습, 정말 아름답다! 예를 들어, 자전거로 세계일주하는 청년들의 모습,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그들에게 무한한 찬사를...!!!). 30대 후반, 40대에 이르면 푸근하고, 넉넉해 보이며, 적어도 어느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이고, 또 살아온 길에 대해 자신감도 은근히 내비치는...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적으로 기여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리고 요구되기도 한 그런 모습이고 덕목이다. 고민, 갈등, 방황, 자신감 없음, 무기력 등은 - 물론, 속으로야 누군들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마는 적어도 겉으로는 - 이 또래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허나 여전히 생산하는 자의 입장에 서지 못한 채 40대를 바라보는 '늙은 학생'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젋게 살아서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먹어야 할 나이를 '못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젊게 산다는건 제 나이값 못하는 이들에 대한 립서비스이거나 자기위안은 아닌지... [물론 그 맘때 '일반인' (혹은, '정상인' ㅎㅎ) 또래들이 겪는 부정적인 증후군을 적게 겪는 것 같긴 하다. 그런 장점마저 없으면 얼마나 더 비참할꼬...] 어쩌랴... 스스로 선택한 길인걸. 허나 그래도 뭔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보자면... 어쩌면 '늙은 학생다운' 모습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리라.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내 나름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그것까지 공개하진 않으련다.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주말 단상

일요일 저녁, 어쩐 일인지 어탭터가 굉음을 내면서 전력을 계속 공급해준다. 오늘 오전, 컴이 한참 긴요한 시간에 충전해 가면서 썼다 켰다 반복하던 일을 생각하면, 이 굉음은 오히려 반가운 소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기로 잡게 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관계는 정말 복잡하고 미묘하다. 현대의 의사소통의 경우, 그 상황을 위해서 위계적으로, 신분제적으로, 혹은 여러 가지 규범으로 정해진 행동지침이 많지 않다보니 대화의 규칙을 만들어가고 상황을 해석하고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다음 대화 turn에서 확인해가고... 대단한 기술과 집중력,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것. 늘 코드를 맞춰나가야 한다. 그 과정은 맞춰지거나/맞춰지지 않거나, 이항코드로 선택될 수 있는게 아니라, 아나로그다. 0과 1 사이에 무수하게 많은 가능성이 있는 것. 그 관계가 아주 단순화되어 오해의 여지가 적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좀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단순한 경우는 표준화된 단순 노동을 하는 작업장 동료들 간의 관계. 부부나 '친한' 친구 같은 관계는 친밀도와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서 오히려 오해의 폭이 적은 경우. 가장 힘든 경우가 어정쩡하게 친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화상황에서 도대체 眞意가 무엇인지, 왜 무슨 의도로 이 얘기를 꺼내는지, 아니면 침묵하는지 순간 순간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언젠가 썼듯이 그 경우 그 찰나의 타이밍이 중요해서 그것을 놓치면 벌써 상황종료, 새로운 상황 시작...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산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러할까?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현대인들은, '정상적'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폭넓은 해석과 선택의 도전을 외면하며 살 수 없다. 인간관계를 잘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일까? 그 과정을 유연하게 잘 처리해서 이음새가 잘 눈에 뜨지 않는 경우. 모든 상황을 souveraen하게 통제해 나가는 경우 아닐까?
그건 그렇고... 나도 '문명병' 환자라면 환자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 애쓰는 편이지만... 단답형 지식은.... 그런 형태의 지식도 왜 쓸모가 없겠는가마는, 그게 필요한 시기나 분야는 매우 제한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목청높이어 답다는 기계 만드는 한국 교육의 퇴행성을 지적한지도 꽤 오래되었는지만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우연한 기회로 인터넷을 통해 초등 혹은 중고등 시험문제를 보면서, 참 아직도 저런 문제를 내고 그에 대한 정답을 요구하는구나, 안타까움을 넘어서 화가 날 때가 있다. 특히, 국어나 도덕, 윤리, 사회 그런 쪽 문제들... 쉽게 바뀌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객관식, 단답식 지식을 습득하는 게 현대 사회의 성공적인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인식이 꽤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어떤 장점이 있을까? 뭐니 뭐니 해도 평가의 계량화, 한마디로 순위매기는 데 그보다 더 손쉬운 방식은 없다. 객관식, 단답식, 경쟁, 줄세우기, 계량화된 성적, 그 서열에 앞자리에 서기, 성공, 출세, 모두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될 단어들이다. 심지어 겸손, 사랑, 섬김이 더 본질적이어야 할 교회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수용될 정도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열어주는 교회들, 남은 어떻게 되든 내 자식만큼은 평소 공부한 것 이상 좋은 점수 '따게' 해주고, 앞으로도 쭈욱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마인드'. 지난 수십년 간 한국은 물신주의 가치관, 성장, 성공에 대한 욕망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이 땅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산 기독교의 성공지향적 세계관, 가르침은 그런 사회적 기대와 기가 막힌 찰떡궁합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 결과 이젠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더라도 떨쳐버릴 수 없는 한국인 '심성'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는지... 경쟁을 만들어 내서 공부하기... 사람이 공부할 거리, 공부방식을 만들어내지만, 그런 방식이 또 사람과 사람들이 관계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다시 한 번 co-evolution). 인간(의 노동)이 자신이 만들어 낸 대상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 맑스 형님은 Entfremdung, 疏外라고 부르시지 않았던가. 참, 낯선 어쩌면 기괴하기까지 한 풍경이다. 교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자연스럽기도 한 그런... 나도 그 풍경의 일부였다.

[덧붙임: 우연히 오늘, 화요일자 '뉴스앤조이' 기사 중에서 다음 기사를 발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전북 이리노회 이리노회 주일학교 25주년을 맞아 '초등부 성경 골든벨' '성경 필사본 시화전' 개최한다." '성경골든벨'이라면 내게는 매우 친숙한 방식이다. 대단히 효과적이란 검증도 이미 끝났고. (ㅎㅎ) 하긴 고등부 시절 건축업을 하시던 부장 장로님께서 연말까지 성경일독하면 (내 기억이 맞다면) 만원씩 준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하셨는데, 그것보다야 훨씬 세련된 방식이다. 그 당시 상금이 집행되었던 건 분명한데 나도 그 '만원' 수령자였는지는 무슨 까닭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안' 혹은 '못'받았으니 기억을 '안' 혹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돈 욕심 때문에라도 성경 한 번 읽는 게 안 읽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총동원전도주일에 선물 받을 욕심으로 교회 문턱을 한 번 넘어서 보는 것도 비신자들에겐 복음을 들을 드문 기회일 수도 있다. 허나...모두... 좀 '거시기'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를 넘어설 수 있는 깊이를 갖춘 이들 아닌가? 영의 세계를 맛보았고, 진리를 과감하게 외칠 수 있는 이들 아닌가? ]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컴퓨터 혹은 인터넷 금단증

몇 주 전부터 골골하던 노트북 어탭터가 '드디어' 숨넘어가기 직전에 이르렀다. 켜지 않은 상태에서 배터리에 충전은 되나 컴퓨터에 전원을 넣는 순간 배터리로만 작동하는 것. 배터리만으로는 10분을 넘기기 힘드니 거의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당장 새어댑터 사려고 시내에 나섰으나, 왠걸,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다. 할 수 없이 ebay로 눈을 돌릴 수 밖에... 화요일 저녁에 비경매로 나온 매물을 구입해서 바로 입금했으나, ebay 물건구입에 대한 이전 경험이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토요일인 오늘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목요일에 보냈다는데... 덕분에 며칠 간 컴퓨터 없다시피한 집에 살고 있다. 급한 일은 학교 도서관에서 처리한다. 성능 좋은 컴퓨터들이 여기 저기 놓여있고, 지금처럼 한글 입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 사실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허나 어제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있다가 컴퓨터 없는 방에 들어서니 왜 그리 낯선지. 잠자기 전까지 인터넷 뒤적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해서, 도대체 이 밤에 뭘하지?,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 '설상가상' 텔레비전을 소유하지 않은지 벌써 오래 되었으니... 대체품도 마땅찮은 것. 결국 모처럼, 정말 모처럼 공부용이 아닌 교양용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과 컴퓨터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여가시간이라고 책을 읽어본 기억이 참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심지어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켜고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 확인하며 아침 먹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돈 들여서 받아보고 있는 종이신문을 읽을 시간은 더 줄어들게 되었고... 또 영어 도튜멘타리를 틀어 놓고서 잠드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 (최근엔 리차드 도킨스 출연 다큐를 주로...). 화면을 덮어 놓은 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려고 집중하다보면 '쉽게' 잠에 빠져들곤 했다 [확실히 이런 방식으로 난 재미를 보고 있다. 난 꼭 뭔가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는데 너무 잘 들리는 내용이나 혹은 아애 안 들리는 음악 같은 것보다 집중해야 들리는 그런 내용, 영어나 독일어로 누군가 고른 음색으로 얘기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때는 루만의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효과적이긴 했으나, 다시 듣고 싶진 않다 ㅎㅎ]. 활자, 책, 문법, 언어 등 문자문화가 직업에 해당하는 세계라 여가시간이 영상매체로 채워지는 게 자연스럽긴 하다. 그런 저런 핑계로 영화나 재미있는 도큐 같은 것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는데...
지난 주부터 점심 시간 일하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오전에는 인터넷을 보지 않고, 그래서 아침먹을 때도 신문을 읽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어댑터까지 고장나서 한편 자발적으로 다른 한편 울며겨자먹기로 컴퓨터 특히 인터넷 사용을 줄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시각적 정보가 주는 그 즐거움, 재미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모든 감각기관을 동시다발적으로 적절하게 자극해 주는 그런... 언제부터인가 심지어 음악도 '보게' 되지 않았는가. 난 담백한 걸 좋아해서 컴퓨터도 최대한 슬림하고 소박한 상태로 나름 '최적화'해 놓고 있는데도 [한 가지, 프로그램은 가능한 최신 버전을 써야 만족하는 편이다. 그렇게 보면 뼈속 깊이 아날로그형 인간은 아닌 지도... 이런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끄적거리... 아니 틱틱거리고 있는 것도 하나의 반증이되겠지만... ],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컴퓨터나 인터넷, 영상매체의 '유혹'에 그동안 너무 많은 자리를 내 주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반성하고 좀 더 문자적으로, 아날로그적으로, 그리고 흑백의 정신으로 살아볼 생각이다. 오전엔 인터넷없이, 자기 전 시간엔 아애 컴퓨터 없이 지내볼까 한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중독'의 특징은 당시에는 '중독'이라고 못 느낀다는 것, 또 알더라도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것.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무신론의 宗敎化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내년 1월부터 영국 런던의 버스에서 ‘무신론 광고’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종교계의 ‘불신지옥’(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이란 위협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맞불 광고’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신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세요”라는 버스 광고(사진)를 내기 위한 모금이 21일 시작돼, 하룻만에 4만7900파운드가 걷혔다고 22일 보도했다. 애초 목표인 5500파운드의 9배가 넘는 금액으로, 4주 동안 버스 30대에 광고하려던 계획 또한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코미디 작가 애리언 셰린은 “전국 규모로 확대할 수도 있고, 지하철 광고나 다른 문구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누구보다 리차드 도킨스가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기사 아래 쪽에 언급되어 있다.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의 저자로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도 “이런 광고를 실으면 사람들은 생각을 해보게 될 것이다. 종교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며, 추가로 5500파운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도킨스 교수는 종교계의 시내버스 광고에 빗대, “종교는 면세 혜택 등을 통해 ‘공짜 탑승’하는 데 익숙하다”며 “‘모욕’당해선 안 된다는 특권과 어린이들을 세뇌시킬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계를 비난했다."

이쯤되면 무신론'교'라고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으리라. 재미있는 현상이다. 무신론이야 인류역사에서 늘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요새 무신론은 또 하나의 종교가되는 것 같다. 종교의 해악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의 신앙이되는... 종교가 뭐 별건가. 천당/극락을 가르쳐야 종교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다른 場, 다른 의사소통 기술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모습은 왜 어느 하늘 아래에서나 다 비슷할꼬... 순한 사람, 강한 사람, 순한것 같은데 알고보면 만만하지 않은 사람, 센 척 하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사람, 항상 인상쓰고 다니는 사람,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사람, 왠지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 재미있는 건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내가 기여한 부분이 상당히 크다는 점. 나와 상대의 합작이다. 어쨌든... 아마 단순한 일로 얽힌 관계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개인적 경험에서 얻게된 판단력에 의존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누구나 경험상 사람을 구분하는 나름대로의 판단틀을 가지게 되고, 그런 판단기준은 살면서 검증받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예측가능성은 높아진다. (관상, 점쟁이들은 특히 그런 '감'에 의존한 사람판단에 숙련된 이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면 과학이다. 그것도 경험과학 ^^). 하지만 이같은 판단기준에 따른 사람평가의 성공률이 높은 삶의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우선, 처리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상황의 복잡성이 낮을수록 이런 '감'이 잘 통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는 작업장이나 혹은 스포츠 활동이 일어나는 운동장 같은 경우, 그 '場'을 지배하는 법칙이 매우 단순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놀거나 천천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더 일하거나 더 뛰어야 한다던지, 뭐 그런... 혹은 상대에 대해서 알고 싶은 혹은 알 필요가 있는 정보가 매우 단순하다거나.... 운동을 잘 한다/ 못한다, 나이, 독일체류기간, 결혼 여부 등, 고려할 것이 많은 의사소통 상황에서는 금기시되던 질문들이 여기 저기에서 날라든다.
일이 복잡해지거나, 의사소통의 내용이 복잡할수록, 제대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전제조건이 더 많아진다. 언어적, 비언어적 여러 수단을 통해야 하고, 한 번 꼬이면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언제가 썼듯이 이런 복잡한 의사소통의 場에서 인간관계를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언어능력과 대화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기술을 익히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외국인들, 혹은 외국어로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선 결정적인 경우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구두 의사소통과 비교할 때 문자 의사소통은 해석의 가능성을 급격하게 줄여준다. 그나마 고마운 일 아닌가?
진중권 교수는 구두문화와와 문자문화의 구분 도식을 가지고 한국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데,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냥 수긍하기엔 좀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참 설득력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합리화와 문자문화의 발달은 거의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 문자를 쓰던 역사는 수천년을 헤아리지만, 아쉽게도 문자로 의사소통을 자유자재로 하던 이들의 비율은 20세기 중반을 지날 때까지 매우 제한적이었다. 최최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자랑만할 일도 아니다. 그런 활자로 고작 수십부의 책을 찍었을 뿐이니. 문자적 합리성이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그놈의 인터넷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치게 중요한 역할을 넘겨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비록 문자를 매개로 하지만 그 행태는 전형적인 구두문화의 그것이다. 진중권씨가 그런 점을 반복해서 지적하는데 난 아직도 그 주장에 대해 어떤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우스개?

어느 대학생이 크게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들고 교수를 찾아갔다.
‘선생님, 이 소설 읽어 보셨어요?’
‘아니 왜?’
그러자 학생이 실망한 듯
‘아니, 교수님. 이 책 나온 지 두 달이 넘었어요. 빨리 읽어보세요.’
‘그래? 그럴까, 그런데 학생.......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읽어 봤나?’
‘아뇨, 왜요?’
‘야 이 놈의 자식아. 그 책 나온 지 2700년이 넘었다. 빨리 가서 밑줄 치고 외워!’

이윤기 선생이 들려 준 이야기임을 밝히며 정윤수 선생이 들려 준 이야기.

큰 주식시장, 작은 외환시장: 한국 금융시장의 이중적 구조

換亂 때문에 짐싸서 돌아간다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직 이웃 도시 얘기지만. 지금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현상이긴하지만 우리나라 처럼 환율이 큰폭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대외경제변화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유독 취약한 이유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현장'을 잘 아는 (것 같은) 전문가의 설명이 쉽고도 설득력 있어 옮겨 놓는다.

"배상근 : 우 리나라는 아주 개방화된 소규모 경제단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방도가 워낙 커서 외부의 조그만 충격도 직접적으로 우리 경제에 와닿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한 우리나라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의 특징이 있는데요. 주식시장의 경우는 신흥국가들 중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외국인의 지분비율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과거에는 한 40%까지 있다가 최근 들어 외국인들의 순매도가 굉장히 증가하면서 27%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는데요. 미국계 자본 같은 경우는 일단 내 코가 석자 아닙니까? 바로 우리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서 미국으로 지금 본국으로 송환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고요. 여타국의 자본 같은 경우도 돈을 빼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격이 떨어진 국가에서 수익률을 본달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식시장에서 대규모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돈이 어딜 거쳐야 되냐면 외환시장을 거쳐가야 되거든요. 달러를 바꿔야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외환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굉장히 작고, 외환시장이 작은 규모다 보니 큰 돈이 빠져서 작은 시장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외환시장이 크게 요동되고 있고요. 특히 우리 외환시장은 98%가량이 달러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근에 규칙통화로 돼 있는 달러의 불안전성이나 달러가뭄이 아주 심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보여지죠."

하지만 지금 위기가 한국 금융산업에 호기일 수도 있으며, 금융부문이 앞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중요한 산업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서 왠지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괴리가 클수록 위기의 확산속도나 파급효과가 큰 것 아닌가?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모델을 도입했다가 지금 IMF에게 손 벌리는 신세가 된 것 아닌가? 18년(1987~2006년) 동안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연준) ‘마에스트로’(거장), ‘경제계의 현자’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자유시장주의 전도사 앨런 그린스펀(82) 마저 "은행 등 금융기관이 주주와 자산을 보호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실수했다.(I made a mistake.)”라고 고백하는 판 아닌가 (관련기사). 도대체 한국이 금융산업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내 상상력으로는 그 모습을 그릴 수가 없다. 이 양반 혹시 신종 '신자유주의 전도사' 아닌가? [배상근 박사의 평소 주장을 알아볼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과도한 억측을 발설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울러 인터뷰라는 설정 탓에 발언이 짧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말고 이러한 금융위기를 우리의 기회로 전환시킬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제조업은 고용의 한계를 느끼고 있죠. 첨단산업 같은 경우는 고용숫자를 늘린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장비를 늘이고 사람을 줄이는 측면이 있고요. 제조업은 3D업종은 사람이 필요하지만 우리 청년층이 가려고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청년층의 눈높이에 걸맞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고요.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금융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융산업을 왜 주목할 필요가 있냐면, 지금 최근에 나온 IMF의 은행위기보고서가 있는데 지난 37년간 124개 은행위기를 살펴봤습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대개 위기가 끝나는데 53개월... 4,5년 정도 걸립니다. 대공황시기나 저축대부조합의 연쇄파산시기도 그렇지만 그 당시 시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규제가 강화되고 금융의 혁신이 없습니다. 금융의 신상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서 선진국 경제에 있는 금융기관들이 어떻게 보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탭니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하고 노력해간다면 지금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선진국 금융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향후 한 5년 정도 벌어놓은 상태거든요. 이 기회에 우리가 보다 노력해서 우리 금융산업을 발전시킨다면 수출로만 이끌어가던 우리 경제에서 우리 경제 안에 금융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약할 수 있고 이와 동시에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보다 좋은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는 의미에서 금융시장으로 주식시장, 외환시장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금융시장 거래의 핵심은 개인/기관 사이의 단기, 장기간 거래아닌가? 물론 그런 거래 역시 매일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며 거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국 금융기관들은 일본, 중국에 비해서 외국 금융기관과 거래 비중이 높다고 한다. 그게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가을 속으로








몇몇이서 가을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그 날 찍은 사진 몇 개를 소개한다. 위에서부터. (1): 출발지였던 Guetersloh의 숲. 보자마자 컴퓨터 배경화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완벽한 가을경치. 사진으로는 그 감흥의 1/10도 보여주기 힘든... (2), (3):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찍어보기도 했다. (2)는 흔들림 때문에 예술 사진이 되어 버린 경우. (4) 목적지였던 Warendorf 는 생각 이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시청은 13세기에 지어진 건물) 구시가지는 온통 돌밭이었다. 그 바닥을 찍은 것. (5) 조그한 시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 고딕식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 출입문 문양이다.

근대, 불확실성, 위험

'불확실성', '위험'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스트모던적 특징이 아니라 바로 근대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게 루만의 입장이다. 사회의 질서유지 혹은 통합이 더 이상 위로부터의 - 종교적 혹은 정치적 - 지배에 의해 가능하지 않게 되고, 수평적인 기능체계들로 분화가 일어나면서 위험은 점점 일상이 된다 [우리말 어감상 '위험'은 당연히 근대로 제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위험은 Risiko/risk의 번역어로 이해해야 한다]. 위험은 정상적인 활동의 부작용으로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되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것 자체가 다른 위험을 가져오는 순환구조가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혀있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 대표적 사례다. 금융시장에 항존하는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각종 금융파생상품들의 연결망이 가지고 있던 위험은 너무 복잡해서 산정불가능한 상태였고, 한쪽 고리에서 터진 문제가 이 정도로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우리의 구세주는 국가다. 각종 지원책 꾸러미를 만들어낸다. 허나 국가, 그리고 이들이 핵심적 행위자인 정치체계는 위험 혹은 위기를 먹고 사는 체계다. 없던 위기도 만들어내지 않는가. 이명박 정권은 집권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경제위기설을 퍼뜨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북괴'위 위협, 사회안정을 헤치는 '좌파세력' 같은 공세의 말발이 떨어진 시대에 '경제위기론'이 그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한 모양이다 (그 석두에서 나오는 발상이 그렇지 뭐. 아, 그리고 좌파 운운은 여전히 써먹고 있긴 하다. 스스로 그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다가 막상 위기가 닥치자 '한국 경제는 튼튼하다, 내가 언제 위기설 운운했느냐'며 발뺌하기 바쁘다. 아무리 정치가 없던 위기까지 만들어내며 목숨을 유지하는 체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도덕은 있어야 하지 않나. '책임'말이다. 이른 바 선진 민주주의라면 바로 그 '책임'을 지거나 지우는 메카니즘도 함께 발달된 상태를 일컫지 않을까. 미국이 아무리 꼴똥 깡패 국가이고 많은 구성원이 무식, 무지하더라도 내 기억엔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서 재출마한다거나 비리로 정치'판'을 떠났다, 잊혀질만하면 다시 슬거머니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는 보도에서 관찰될만한 고위급 정치인들의 경우). 독일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아무리 관리해봐야 위험은 피할 수 없고, 위험과 친해지는 게 오히려 덜 위험하게 사는 방식일지 모르겠지만, 위험, 위기의 시대에 '책임의 원칙'도 함께 발전해 줘야 한다.
얼마나 예측하기 힘든지 최근 유가, 환율의 상관관계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유가가 갑자기 떨어져서 또 나름의 위기를 두려워하는 산유국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푸틴 치하 십여년간 천연자원 가격 상승덕을 보며 잘 나가면서 기고만장하더니 어느새 좀 불쌍한 처치에 놓이게 되었다.
근대와 위험, 불확실성의 원래 친밀한 관계지만 요새 너무 친해져서 하루 하루 사정이 급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내실을 다지고,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환율, 주식 등 조그마한 단기 이익에 민감해서는 제명에 살긴 힘든 세상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 일이다.

共進化

共進化 (co-evolution)는 자연, 사회, 인문 등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어쩌면 가장 진화된 이론화 방식이 아닐런지. 비록 '공진화' 개념이 사용되진 않았더라도 비슷한 착상은 여기 저기서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축가 승효상과 언론인 박인규와의 대화에서....

"승효상 : 제가 믿는 바로는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믿고 있어요. 도시도 마찬가지,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도시가 다시 사회를 만듭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요즘 많은데 아마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잘못된 도시구조에 그 원인이 상당 부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삶, 좋은 공동체적 삶을 원한다면 우리 건축을 사고 파는 부동산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근본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문화의 대상으로 파악해야 우리 도시와 건축이 나아지고 결과적으로 선과 후의 공동체가 진보할 거라는 믿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박인규 :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그런 말은 들어봤지만 사람이 건축을 만들고 건축이 사람을 만든다. 인문적 건축이랄까요. 그런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좋은 글

"시끄럽고 분주한 복판으로 차분하게 지나면서
침묵 속에 있는 평안을 기억하여라.
할 수 있는 대로, 굴복하지는 말고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라.
조용하고 분명하게 너의 진실을 말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라. 비록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그들에게도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목소리 크고 다툼질 좋아하는 자들을 피하여라.
그들은 영(靈)에 성을 내는 자들이다.
네가 만일 너를 남들과 비교한다면
허탈감과 쓰라림을 맛보게 되리라.
너보다 잘났거나 못난 자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너의 계획과 함께 네가 이룬 것들을 즐겨라.
(........)
무미건조하고 매력 잃은 자들 앞에서
사랑은 풀잎처럼 싱싱한 것이다.
늙은이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너그러이 받아들여라.
갑작스런 불운이 닥쳤을 때
너를 지켜 줄 영(靈)의 방패에 기운을 넣어 주어라.
그러나 공연한 상상으로
근심을 사서 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많은 불안이 고단함과 외로움에서 온다.
몸에 좋은 수련을 쌓고
너 자신에게 다정하여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저 나무와 별들 못지않게
너 또한 여기 있을 자격이 있다.
너의 포부가 무엇이든 시끄러운 세파 속에서
영(靈)의 평안을 유지하여라.
온갖 부끄럽고 천박한 일이 일어나고
꿈들이 부서져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기운을 내어라.
행복하려고 애써라."

도종환 시인이 '참 좋은 글'이라며 소개했다. 글쓴이는 모른다며... 그렇다.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내되 굴복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을 즐기고, 내 자신에게 다정하며,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행복하려고 애쓸 일이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심리기제

도서관 연체료 대박을 맞았다. 일당을 조금 넘는 거액... 흑흑. 잠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지만 이내 '제정신'을 찾았다. 너무도 쉽게 이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내 심리체계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난 그런 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미련을 별로 두지 않고 쉽게 잘 잊는다. 흔히 하는 얘기로 '정신 건강에 아주 좋은' 태도임에 분명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태도는 권장된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속담 혹은 관용구가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독일어 표현에 "was passiert ist, ist passiert", 영어에선 "It's no good/use crying over spilt milk" ... 우리말에서는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원래 우리 속담일까?) 혹은 '모던'한 버전으로 "버스지나간 후 손들어 봐야 소용없다" 정도? 어쨌든 일종의 심리적 기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우리가 mechanism의 번역어로 자주 사용하는 '기제'(機制)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있지 않다. 옳은 표현이 아닌가? 어쨌거나 '기제'는 서로 다른 상황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행동 방식, 심리적 (해석) 유형을 일컫는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과는 다르게 사회학에는 사실 '기제' 혹은 'mechanism'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 같진 않다. 특별히 ethnomethodology 의 methodology를 그런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Oder irre ich mich an diesem Punkt?] 어느 정도 정형화된 심리기제라고 하면 심리학 비전문가로서 당장 '신포도 기제'나 엽기적 인질 사건 보도에 흔히 언급되던 '스톡홀름 증후군' 정도를 떠 올릴 수 있다. 우리 심리체계가 경험하는 건 많은 경우 기제라고까지 얘기하기 힘든 개인적 경향, 태도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연체료 대박' 처럼 가끔씩 겪는 사건, 사고는 쉽게 수용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사람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은 좀 오래 마음에 두는 편이다. 예를 들어 며칠 전 Steh-Cafe 에서 '아줌마'에게 어떤 말을 건냈는데 못 알아듣는 '사고'가 발생했다. 물론 세 번째 'turn'에서 [ㅎㅎ 어제 들은 걸 활용했다] 상황 정리가 끝났지만, 바로 옆에 서 있던 독일 녀석 둘이서 내 말을 자기들도 잘못 알아들었다면 지들끼리 얘기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어떤 말을 해 줘야 할 지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갔는데, 몇 걸음 떼지 않아서 그냥 넘어갈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해 줄 말이 생각나고... 하지만 그 몇 초의 시간이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 버려서 다시 돌아가서 걔들 나무라기가 참 어색하게 되어 버렸다 [의사소통에서 1초, 2초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는 시간이다. 그 순간은 분명한 메세지를 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특히, 싸울 때나 농담을 할 때. 순간, 타이밍을 놓치면 싸움도, 유머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으로서 외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들을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대개 공감할텐데... 수업에서 문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서 끼어들어 보려고 기회를 노린 적이 있는데 그 몇 초를 놓쳐서 결국 한 마디도 못하고 말았던 적....] 적어도 그날은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해 주었으면 좋았을 말들이 떠 오르는 것이다. 모국어가 아니라서 더 그렇기도 했겠지만 난 원래 말싸움 할 때도 가끔씩은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적절한 단어, 표현이 생각나서 뒤늦게 분해하는 편이다. 언제가도 썼듯이 관계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 답답함, 분함을 처리하는 심리적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드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분함이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경우에는 -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 독일 녀석들처럼 -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해결해 주도록 맡기는 수 밖에 없지만, 그 상대가 친밀한 사람일 경우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라도 내 생각, 심정을 털어놓는 편이다. 가까운 사람과 오해나 불만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선 도무지 관계지속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움직여가는 것을 관찰하면 난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났거나 되돌이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고, 개선이나 해소할 여지가 있는 사람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는 편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ps) 생생한 그 느낌을 그래로 남겨두고자 아침부터 컴앞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미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은 누굴 원망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 결정의 결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질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2008년 10월 9일 목요일

창의성

지난 8월 방영된 EBS 다큐 '창의성을 찾아서'를 일부 보았다. 최근 한국 방송사들이 만든 다큐멘타리를 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독일에서 arte, 3sat 같은 방송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쯤...'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이런 방송물만 보면 독일 부럽지 않다. 혹시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방송사들이 많이 생기고 관련 활동이 활발해진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건 아닌지... (물론 한 두 편 프로그램이 아닌 arte, 3sat 같은 채널 자체가 생기기까진 더 오래 걸리겠지만...).
방송 앞부분에 등장한 창의성 점검 문제 하나를 소개한다.

"성냥개비 4개가 있다. 이를 이용해서 밭 전(田)자를 만드시오."

창의성 점검 문제임을 명심하시라. 정답은 다음 호(?)에...

ps) 난 '물론'(!) 못 풀었다. 답을 알고 보니 예전에 한 번 들었던 기억이... 창의성은 커녕 기억력마저 신통찮은 것이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역설의 신앙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6). .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toward one another, because, "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Humble yourselves, therfore, under God's mighty hand, that he may lift you up in due time.

베드로전후서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와 더불어 공동서신 (The Catholic Epistles)혹은 일반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불린다. "공동서신이라는 표현은 여러 사람이 이 서신들을 함께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신이 모든 사람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서신은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말하자면 발신자의 공동성이 아니라 수신자의 공동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베드로전후서의 저자가 과연 편지 서두에 언급된대로 사도 베드로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윗 본문도 이런 당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활발하게 늘어나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말이다. 본문은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조건 혹은 결과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것이고... 이는 마리아의 노래(눅 1), 산상수훈에서 등 성서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역설적 가르침이다. 이런 "역설"은 사실 동서고금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온다는 "必死卽生 必生卽死", 혹은 한용운 선생의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僕從)을 좋아해요" 라는 시편... 이런 가르침은 수익창출 메카니즘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높아지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서라도 '낮아지고, 죽으려 들고, 복종하라'는 게 아니다. 기존 사고틀(framing) 안에서 이렇게 표현될 수 밖에 없지만, 사실은 이런 구분법 자체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했단 말이지. 내가 지금은 비록 이 모양이지만 열심히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 언제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 부를 누리게 될 거야"가 아닌 것이다. '낮음/높음'으로 구분하는 상식의 전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기독교의 가르침은 훨씬 더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듯하다.

2008년 10월 6일 월요일

이왕 사는 것 이 정도는 살아야...

남대. 영남대라면 대구로 이사가기전 2년여 남짓 경산에 살던 중학시절 자전거로 즐겨 찾던 드라이브 명소였고 대학시절 가끔씩 놀러갈 때마다 확 트힌 전경이 늘 눈에 시원하던 그 곳 아닌가. 그 곳은 염무웅 (문학평론가, 독문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영문과) 같은 전국구 지식인의 직장이기도 하다. 또 다른 누구보다 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노동법 전공 박홍규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워낙 튀는 책을 많이 써서 유명해졌지만 사는 방식도 기이하기 그지 없다 [범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양반이 펴냈다는 60여권의 책 중에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훗날 그가 쓴 어떤 책을 읽더라도 고개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오늘 우연히 경향신문에서 이 양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늘 갖게되는 생각이지만, 길지 않은 인생, 하고 싶은 대로 살 일이다.

"‘그’는 초등학생도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운전면허증도 승용차도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터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간다. 점심 도시락도 꼭 싸들고 다닌다. 머리는 다듬지 않아 항상 헝클어져 있고 수염도 텁수룩하다. 신용카드는 있지만 쓰지 않고 TV도 안보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는다. 각종 회식 자리에도 가지 않는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남북한 인구로 나눈 면적만큼만’ 땅을 사 자기 먹거리의 농사를 짓는다. (...) 해마다 3~4권씩,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펴냈다. 주말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음악 듣고 화랑도 찾는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등산도 한다. 이해·연줄에 얽히지 않은 친구나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 가마 솥에 장작불 피워 소머리 곰탕도 끓이고 술잔도 나눈다. 수십권의 책을 쏟아냈지만 전공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그 분야가 법·예술·사회·인물 등 다양하다. 이렇게 사는 사람, 영남대 박홍규 교수(56)다.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다. 지난 해 법학과에서 교양학부로 옮겼다.
(...).아침식사는 밭에서 난 채소에다 된장국을 넣고 비빈 비빔밥 한 그릇이 전부다. 다른 반찬 없이 먹고 남은 밥과 국으로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 학교까지 2~3㎞를 자전거 타고 다닌다. 빨리 달리지 않는다. 천천히 페달을 저으며 풀 냄새도 맡고 하늘도 보고 연꽃 밭도 구경하며 간다. (...) 도시락을 고집하는 건 ‘학생 때부터의 습관’이기도 하고 군대처럼 구내식당에서 밥 먹기 위해 식판 들고 줄서는 것도, 밥 한끼 먹기 위해 몇 십분씩 자동차 타고 나가는 세태가 싫어서다. 연구실 한쪽에 ‘학기중 회식 NO’란 문구가 적혀 있다. 대상이 동료 교수든 학생이든 학연·지연·혈연 등의 각종 연줄로 엮여 벌어지는 부조리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그는 60여권의 책을 썼고 수십권의 번역서를 냈다. 우리 사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책인데도 소개되지 않았다 싶으면 번역했고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책을 썼다. 그는 “100명 중 99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1명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지평도 넓어지고 차원도 한 단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책 쓰는 것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기에 ‘지적재산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씻지 않는다. 천성 탓인지도 모르지만 필요 이상으로 물을 낭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께름칙한 것도 이유다. 수염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가위로 자른다. 매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귀찮기도 하지만 ‘수염을 기르는 것 가지고도 시비를 거는’ 우리 사회의 획일성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다. 그는 물욕·돈·힘·공공성 붕괴·인조·획일을 대한민국의 ‘육적(六敵)’으로 지적했다. 돈과 힘 등으로 가치를 따지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고도 했다. “국가 권력이든 관습이든 그 무엇이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든 넘치도록 갖는 것도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죄악입니다. 욕망을 최소화하고 의식주까지 간소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악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

악플. 네이버 국어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악플 [←惡+reply] 신어
[명사]다른 사람이 올린 글에 대하여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을 담아서 올린 댓글."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오늘 아침 최진실씨 자살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이런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 둔감해진 탓인지 충격이 그리 크지 않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담담한 것. 쯧쯧...]. 자, 악플이 자살한 연예들을 죽였을까? 語不成說이다. 평소에 잔인한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청소년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컴퓨터게임에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 논리다. 선풍기 틀어 놓은 채 자다가 사망했을 때 선풍기는 단순히 그 옆에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선풍기, 컴퓨터게임, 악플 모두 특정 결과에 영향을 어느 정도는 미쳤을 것이다. 간혹 그것이 유일무이한 직접 원인일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다. 허나 어디 인간 심리체계가 그렇데 단순한 것이던가. Stimulus -> Reaction, 악플 -> 자살, 컴퓨터 게임 -> 살인? 인간 심리체계의 작동양태를 여전히 잘 모르는 인간들이 설명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만들어낸 논리다. 어딘간에 원인은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그런 저급한 논리를 재생산하며 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서 날뛰는, 결국 연예인을 두 번 죽이는 악플러보다 더 못한 찌라시 신문들 얘기는 접어둔다 (이에 대한 프레시안 기사 참조). 하지만 달리 뾰족한 설명을 대안으로 내놓지 못하는 이상 그런 식의 단순한 설명방식, 희생양 만들기 메카니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세상이 복잡해지고 인간의 지능이나 설명력 혹은 통제메카니즘이 그런 복잡성을 좇아가지 못할수록 유치한 설명방식(음모론 같은)이나 도덕화, 윤리화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자율, 자정능력 운운 등등). 사실 마땅한 대안도 없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가운에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네티즌'들이 힘을 살인에 동원한다는 아이디어가 인상 깊게 남아있는 영화가 있다: Untraceable (2008, 감독: Gregory Hoblit). 한국에서는 제목을 훨씬 더 자극적으로 걸었다. "kill with me" (영화 속에서 등장한 인터넷 살인 사이트 제목이다). 네티즌들의 접속 수에 따라 살인 속도가 빨라지는데도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 클릭질. 그 장면이 실시간 중계되고 '댓글'로 '감상'을 교환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어떤 blogger가 올린 글이 엽기적인데... "Where can I download this video..."
문자의 발명으로 커뮤니케이션은 시공간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시공간을 벗어난 커뮤니케션이 가져올 수 있는 극단적인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보는 체계이론가들은 의사소통매체, 기술의 발달에 주목한다. 지금까지는 문자의 발명, 활자, 인쇄술 등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인터넷 같은 신매체가 커뮤니케이션에 미치는 영향 같은 주제에 대해선 거의 손을 못대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루만의 착상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틀을 과감하게 연장시켜 볼 필요가 있다. 한국학자들이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2008년 10월 1일 수요일

그림 읽기 (2)

La Mort de Marat, Jacques Louis David (1793)

그림 읽기를 연재해볼까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그림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넘쳐나서 여기 저기서 빌려와 짜깁기 해 보았다. 일부 내용이 상충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 더 그럴듯한 설명을 취했다.

프랑스 혁명 후... 마라(Jean Paul Marat, 1743 ~ 1793)는 혁명세력 중 급진파당의 영수였고 인민정부의 독재를 주창하는 과격주의자였다. '온건파'로 알려진 지롱드당의 열혈 청년당원이었던 샬롯 코르데는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마라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그의 잔인함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짓 편지를 미끼로 접근, 목욕중인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마라는 악성 피부병 때문에 목욕하면서 집무했다고 한다. 1793년 7월 13일의 일이었고 그때 암살자 코르데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다. 마라가 죽은 후, 자코뱅파의 다른 거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마라의 혁명동지였던 다비드는 사건이 일어난 지 3일 후에 의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3개월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하였다.
욕실 안은 아무런 장식도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마라의 목 아랫부분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욕조에 고여있으며, 그의 오른손 옆을 보면 핏자국이 남은 그를 찌른 상아 손잡이가 달린 칼이 보인다. 잉크병이 놓인 낡은 나무상자에 '마라에게, 다비드가 바친다(A MARAT, DAVID)'는 글만이 외로운 비문처럼 적혀 있다. 그의 한 손에는 샬롯 코르데이가 건네준 청원서가 들려있다. 그녀는 마라가 서명하는 때를 노려, 재빨리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다 [오른쪽 그림 참조]. 내용 중 샬롯 코르데, 마라의 이름도 선명하게 보인다. (청원서 아래 쪽에 있는 작은 종이는 아마 처음 면담을 요청했던 그 메모 쪽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라는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펜과 잉크를 꽉 붙잡고 있다. 여기저기에 남은 핏자국이 이 끔찍한 죽음의 비통함을 더해준다. 욕조는 흰 천으로 덮여 있는데 마라의 혁명적 저술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흰 천과 죽음을 맞은 마라의 자세는 예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혁명세력은 전체 민중을 위해 교회의 소유물을 국유화했다. 이제 종교는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마라는 그 새로운 시대의 순교자였다. 다비드는 욕조 앞에 놓인 낡은 나무 탁자를 통해 마라의 검소함을 강조하면서, 이 탁자의 전면에 마치 묘비처럼 마라를 추모하는 사인을 그려 넣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적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오른쪽으로 점점 밝아져 가는 배경은 마치 하늘의 영광이 죽어가는 성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런 그리스도교적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아차릴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뛰어난 솜씨로 처리하였다 .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다비드 작품의 뛰어남이 확연히 드러난다. 1793년작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1907년에 그려진 뭉크 버전도 매우 신선하다. 의도적으로 사건의 역사성을 제거했다.

Charlotte Corday after the murder of Marat, Paul-Jacques-Aimé Baudry (1861)

The assassination of marat, Weerts Jean Joseph (1886)

Death of Marat I, Edvard Munch (1907)


Death of Marat II, Edvard Munch (1907)


source

ㅎㅎㅎ

ps) "<마라의 죽음>은 드로잉 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3점이 존재합니다. 비문처럼 새겨진 나무상자에 A Marat 라고 씌여진 작품은 잘 아시는 것처럼,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한점은 루브르 미술관에, 그리고 나머지 한 점은 랭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혁명기의 프랑스 정부는 한 점을 더 소유하길 원하였으며, 죽은 마라의 혁명동지이자, 절친한 지인이었던 화가 다비드 역시 한 점을 본인이 스스로 간직하길 원하였다고 합니다." 옆 그림이 프랑스 루브르 (혹은 랭스 미술관) 소장본이고 제목도 좀 달라서 <암살당한 마라> (Marat assassiné, 1793). 얼핏 꼭 같아 보이는 그림의 버전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마라의 시신 앞 쪽에 놓인 궤짝에 새겨진 글씨이다 (NAYNT PU ME CORROMPRE ILS MONT ASSASSINE 라고 씌여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그림 읽기 (1)

'그림을 읽는다'는 표현을 가끔씩 접한다. 그림은 보는 것 아닌가? 그림을 읽는다는 것 무슨 의미일까? 우선 좀 더 일반적으로 '보기'와 '읽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기, 읽기의 공통점은 의미있는 정보 (sinnhafte Informationen)가 전달되는 과정이라는 점. 그렇담 차이는? 우선... 그 의미있는 정보가 어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지, 바로 매체의 차이에서. '읽기'는 '문자언어'를 통해서, 보기는 '그림언어'를 통해서... 정보전달의 매체로 선택된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 문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그림 읽기'라는 표현은 바로 그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니, '문자 - 읽기', '그림 - 보기'라는 연결관계는 너무 단순함을 금새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보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논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인 것 같다. '읽기'는 정보의 일대일 전달이 가능하고, 발신자의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내용이 수신자에게 도달하기 쉽다는 것. 논리적 순서가 중요하다. 글 전체를 볼 수는 있었도, 동시에 읽을 수는 없다. 여러 정보를 구분해 가면서 '쭉' 읽어나갈 때 비로소 의미가 전달되는 것 (선형적, linear). [물론 해독능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언어, 코드, 상징에 대한 선지식 - 문법 등]. '보기'가 완전히 비논리적이라는 얘긴 아니나, '보기'의 경우 읽기에 비해 정보의 순서는 덜 중요하고, 정보 간의 조합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읽기에 비해 해석의 가능성이 훨씬 열려있다 (비선형적, nonlinear). (정보 간의 인관관계, 논리성이 명확하지 않다). 한꺼번에 여러 정보를 동시에 접하게 되는 것. 그러니 '인상'을 얘기하기 쉽다. 책 읽기를 예로 들면, 우린 우선 본다. "검은 것은 글자,흰 것은 여백". 글자간 간격 등등. 전체적인 인상 획득 단계가 지나면 개별 정보를 이해하고, 그 정보들 사이 연관관계를 알려고 든다. 다른 표현으로... '읽는다'.

'읽기', '보기'의 구분에 대한 학문 내 논의가 있겠지만 아는 바 없으므로 - '무식하면 용감하다' - 이런 내 나름 구분 방식을 전제로 '깔고' 그림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예술작품으로서 그림 앞에 서거나, 여러 인쇄매체를 통해 그림을 접하면 우리는 먼저 그림을 본다. 우선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서 '주관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림을 읽는다는 건 '주관적 인상'을 넘어서서, 화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정보 사이의 연관관계를 좇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 주위엔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림들이 많다. 이른 바 장식용으로 걸어두기 좋은 인상파 그림들이 대표적... [물론 마네를 비롯한 이른 바 인상파들이 당시 '보수적'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했던 역사를 모르는 바 아니나, 현재 사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화가 스스로 어떤 논리적 순서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지도 않은 경우. 그것도 읽을 수 있겠으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고, 해석의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것과 다르게 아애 처음부터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들이 있다. 사실 '그림은 보는 대상'이라는 그림 이해는 매우 근대적이다. 중세 종교화를 생각해보라. 종교화는 시각을 통한 미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중세 종교화는 전형적인 읽기위한, 아니 읽히기 위한 그림이다. 실제로 글을 모르는 교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 그림은 시각화된 텍스트일 뿐이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읽기의 대체매체였던 것이다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 삼강행실'도'를 제작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림만으로는 사회 유지를 위한 규범을 전달 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쉬운 매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글이다]. 활자 인쇄의 발전으로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그림에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라는 독특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도 읽기 좋은 그림들이 있다.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정보 사이의 논리가 분명하게 있어서 그것을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그러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문법을 알아야 하듯] 중세 종교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도 성경의 이야기는 물론 그림에 동원에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직업병' 탓인지 난 공부해야 즐길 수 있는 '읽어야 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자, 이제 그림 한 편 읽어보기로 하자. 이 그림도 그림인이상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누가봐도 잘 그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아주 깔끔한 유화이지 않은가? 큰 책, 그에 비해 많이 작은 책, 촛대가 책상 위에 안정된 구도로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진한 황색 톤을 써서 안정감, 일체감도 전달해 준다. 만약 제목,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주어진다면 좀 더 흥미로워진다. 이 그림은 고흐의 1885년작으로 제목은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있는 정물화". 아하. 큰 책은 성경책, 작은 책은 에밀 졸라의 소설 [찾아보니 보통 Still Life With (Open) Bi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흠. 고흐가 이런 그림도 그렸구나... 다른 정보 없이 전시장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개 그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한다. 전문서적, 미술사가들의 도움을 받자.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작가들은 누구나 원하는대로 해석하길 기대하며 창작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평론가들, 미술사가들의 그 휘황찬란한 언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지만, 이런 그림의 경우 사정이 많이 다르다. 화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서 소재를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조차 의심하는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겐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지만...].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하니까 수 년 전 들렀을 때 분명히 봤을 테지만 내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최근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2004) [원제: van Gogh and God : a creative spiritual quest, 1989]를 틈틈이 읽고 있는 중인데 그 책에서 이 그림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하였다. 에드워드가 이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해석을 전해 줘서 이 공간에 그림에 대한 흔적을 남겨놓을 마음을 먹게된 것이고... 이 그림은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가 1885년 3월 27일 세상을 떠난 후 8월경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자, 아버지의 죽음은 이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에드워드의 해설을 들어보자 [본문을 오려 붙였다].

"(...) 네덜란드 메멘토 모리파 회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이 꺼진 초는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삶은 영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촛대 옆에 있는 동으로 된 물건은 성경 표지에 달린 걸쇠 두 개다. 낡은 네덜란드어 성경의 각 페이지는 위쪽 절반은 성경 구절, 아래쪽 반은 성경 독서에 도움이 되는 주해로 구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른쪽 페이지 맨 위에 적힌 'ISAIE'라는 글자와 그 페이지 오른쪽 여백 근처에 적힌 로마 숫자 'LIII'이다. ... 이사야서 53장 '주님의 종의 노래;... 고흐는 자기가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성경구절, 곧 보리나주의 광부들 사이에서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고난의 종'의 사명에 관한 구절을 펼쳐놓았다. ... 성경 아래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노란색 종이책... 낡고 모서리가 접힌 책 표지에는 'Emile Zola'와 'La Joie de vivre'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표지 아래쪽에 'Paris'라고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아버지의 성경책 근처에, 바로 그해 (1885년) 출판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두었던 것이다. ... '삶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가는 한 중산층 가정을 그리고 있다. ... 성경책과 현대소설을 대조시킨 것은, 1883년 고흐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증언한다. (...)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과 소설 속의 폴린은 둘 다 극기와 희생과 사랑이 육화된 인물이다. ... 고흐는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펼쳐진 성경을 그렸다. 졸라의 소설을 선택한 것은 이 소설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현대식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고흐의 편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현대 미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성경의 '오래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힘과 아름다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해석이 그저 상상력의 소산이 아님을 에드워드는 고흐의 편지를 근거로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ps) '그림 읽기'는 '음악 보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한겨레 21기사 '걸그룹들의 진화하는 패션' 을 읽으면서 든 생각. '보는 음악'은 사실 가수들의 패션이나 스타일이 아닌 '뮤직비디오'나 'MTV'의 등장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MTV 설립은 1981년).

2008년 9월 30일 화요일

'친구' 의미론의 진화 혹은 우정의 불가능성

友情에 대해서는 동서고금 여러 사람들이 '논'하였다. 유명한 키케로의 우정론도 있고, 연암 박지원 선생도 우정에 대해 한 말씀 남기신 모양이다. "우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가끔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 작가가 있다고도 하고, 그 얘기를 자신의 우정론 앞머리에 꺼낸 김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내린다. 우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했던 시기는 분명히 친구 관계가 가져오는 영향이 컸고 관련된 문제도 많이 드러났던 시기였을거라고 추측해 본다 [기존 담론, 의미론 연구의 결과를 원용해 보자면 말이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親舊, 벗. 이런 단어들이 촌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친구, 우정이라는 의미론을 사용해서 기술하는가? 왜 친구 의미론은 달라지는가? 자, 우선 방법론에 대해 고찰을 해보자.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경우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탐구하고, 분석하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정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담론을 추적하고, 발굴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정의 의미론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한 번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독일인들에 비해서 대개 친구를 좀 더 폭 넓게 정의하는 것 같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훨씬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일대일 관계를 훨씬 더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 친구는 철저하게 사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exklusive Semantik der Frendschaft).한국 사람들은 그 보다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기가 쉽고, 사적관계가 공적관계로 쉽게 전환되는 편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연결망 속에서 알게 된 관계 - 일대일 관계가 매우 희박할지라도 - 도 친구관계로 묶어두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이다 (inklusive Semantik der Freundschaft). 이런 다른 의미론은 실제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Diskursive Praxis. 담론과 프락시스는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대개 한국사람이 그런 것처럼 친구관계를 넓게 정의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구분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진정한 친구, 참친구 등등 친구를 수식하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담 진정한 친구, 참친구가 구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은? 진정하지 않은 거짓 친구? 흠. 그건 좀 그렇고... 덜 진정한 친구 정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내 경우에는 서로 비밀을 나누거나 약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좀 '진한' 친구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성적으로 자기 얘기를 잘 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나중에 뒤통수 맞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이해될지 생각해봐야 하고, 나에 대해서 나중에 뭐라고 할 지 예지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친밀한 관계, 우정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 신뢰. 믿을만하다는 것, 그건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카니즘이다. 신뢰는 곧 예측가능성, 복잡성 감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뒤통수 맞는 일은 바로 이 신뢰가 깨지는 것. 내가 무심코 드러낸 약점이 어느 순간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일. 이중, 삼중, 사중... 우연성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너무 솔직해서는 곤란하다. 늘 여러 가면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심지어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가면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하고... 정도의 차이일 뿐,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맨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짐승이다. 여러 가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맨얼굴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가끔 맨얼굴 보였다가 그게 화근이 되는 경험이라도 몇 번하게 되면 이제 더 꼭꼭 숨긴다. 가면을 쓴 우리들에겐 가끔 '자유인'이라고 등장하는... 예를 들어 전인권 같은...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바로 이 가면을 벗지 못하는 한 우정은... 없다.

壁路, 월스트리트...

왜 미국이 요새 저토록 체면을 구기고 있나. 최종 책임은 금융자본에 물어야 하는 것 같다. 그 월가 사람들... [월가란 이름은 오래 전 뉴욕의 맨해턴 남부에 인디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쌓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맑스 형님 말씀처럼 자본주의의 진화의 종착지가 '금융자본주의'이고 경제공황은 불가피하다고 소비에트 경제학 원론에 나올 테제를 반복할 수 있겠으나, 너무 큰 얘기라 불만족스럽다. 미국 은행이나 금융시장 구조가 그렇게 부실했던가? 왜 이제서 이렇게 난리법석인가? 나름대로 한 경제학 하셨던 조순 형님이 한 말씀 거드셨다. 한겨레 신문을 통해...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월가의 이익이 되도록, 가급적 유동성을 많이 공급하여 자산시장을 부추겼다. 종래 경제정책의 중점이었던 산업구조, 국제수지, 사회보장, 서민생활 등은 사각지대로 물러났다.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로 1990년대 미국에는 장밋빛 도취감이 감돌았다. 이제, 전쟁과 혼란의 역사는 끝났다, 자유방임을 하면 다 잘 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경상수지 적자 따위는 문제 없다, 기업은 주가를 올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면 그만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남미, 아시아, 러시아 등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월가의 금융꾼들은 많은 이익을 챙겼다.

아! 그러나, 인간의 시야는 짧은데 비해 세상은 빨리 변한다. 환락이 지나치면, 비애가 온다. 미국경제가 부메랑 효과를 맞았다. 개도국이나 맞아야 할 ‘국제통화기금(IMF) 폭탄’을 미국이 맞은 셈이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 5대 투자은행이 거의 다 몰락했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에이아이지(AIG)가 ‘구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