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읽는다'는 표현을 가끔씩 접한다. 그림은 보는 것 아닌가? 그림을 읽는다는 것 무슨 의미일까? 우선 좀 더 일반적으로 '보기'와 '읽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기, 읽기의 공통점은 의미있는 정보 (sinnhafte Informationen)가 전달되는 과정이라는 점. 그렇담 차이는? 우선... 그 의미있는 정보가 어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지, 바로 매체의 차이에서. '읽기'는 '문자언어'를 통해서, 보기는 '그림언어'를 통해서... 정보전달의 매체로 선택된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 문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그림 읽기'라는 표현은 바로 그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니, '문자 - 읽기', '그림 - 보기'라는 연결관계는 너무 단순함을 금새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보기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논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인 것 같다. '읽기'는 정보의 일대일 전달이 가능하고, 발신자의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내용이 수신자에게 도달하기 쉽다는 것. 논리적 순서가 중요하다. 글 전체를 볼 수는 있었도, 동시에 읽을 수는 없다. 여러 정보를 구분해 가면서 '쭉' 읽어나갈 때 비로소 의미가 전달되는 것 (선형적, linear). [물론 해독능력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언어, 코드, 상징에 대한 선지식 - 문법 등]. '보기'가 완전히 비논리적이라는 얘긴 아니나, '보기'의 경우 읽기에 비해 정보의 순서는 덜 중요하고, 정보 간의 조합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읽기에 비해 해석의 가능성이 훨씬 열려있다 (비선형적, nonlinear). (정보 간의 인관관계, 논리성이 명확하지 않다). 한꺼번에 여러 정보를 동시에 접하게 되는 것. 그러니 '인상'을 얘기하기 쉽다. 책 읽기를 예로 들면, 우린 우선 본다. "검은 것은 글자,흰 것은 여백". 글자간 간격 등등. 전체적인 인상 획득 단계가 지나면 개별 정보를 이해하고, 그 정보들 사이 연관관계를 알려고 든다. 다른 표현으로... '읽는다'.
'읽기', '보기'의 구분에 대한 학문 내 논의가 있겠지만 아는 바 없으므로 - '무식하면 용감하다' - 이런 내 나름 구분 방식을 전제로 '깔고' 그림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예술작품으로서 그림 앞에 서거나, 여러 인쇄매체를 통해 그림을 접하면 우리는 먼저 그림을 본다. 우선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서 '주관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 그림을 읽는다는 건 '주관적 인상'을 넘어서서, 화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 정보 사이의 연관관계를 좇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 주위엔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림들이 많다. 이른 바 장식용으로 걸어두기 좋은 인상파 그림들이 대표적... [물론 마네를 비롯한 이른 바 인상파들이 당시 '보수적'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했던 역사를 모르는 바 아니나, 현재 사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화가 스스로 어떤 논리적 순서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지도 않은 경우. 그것도 읽을 수 있겠으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고, 해석의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것과 다르게 아애 처음부터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들이 있다. 사실 '그림은 보는 대상'이라는 그림 이해는 매우 근대적이다. 중세 종교화를 생각해보라. 종교화는 시각을 통한 미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중세 종교화는 전형적인 읽기위한, 아니 읽히기 위한 그림이다. 실제로 글을 모르는 교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 그림은 시각화된 텍스트일 뿐이다.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읽기의 대체매체였던 것이다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조선시대에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 삼강행실'도'를 제작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림만으로는 사회 유지를 위한 규범을 전달 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쉬운 매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한글이다]. 활자 인쇄의 발전으로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그림에 시각적 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라는 독특성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도 읽기 좋은 그림들이 있다.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 정보 사이의 논리가 분명하게 있어서 그것을 읽어내는 재미를 주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그러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문법을 알아야 하듯] 중세 종교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도 성경의 이야기는 물론 그림에 동원에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직업병' 탓인지 난 공부해야 즐길 수 있는 '읽어야 하는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자, 이제 그림 한 편 읽어보기로 하자. 이 그림도 그림인이상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누가봐도 잘 그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아주 깔끔한 유화이지 않은가? 큰 책, 그에 비해 많이 작은 책, 촛대가 책상 위에 안정된 구도로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진한 황색 톤을 써서 안정감, 일체감도 전달해 준다. 만약 제목,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주어진다면 좀 더 흥미로워진다. 이 그림은 고흐의 1885년작으로 제목은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있는 정물화". 아하. 큰 책은 성경책, 작은 책은 에밀 졸라의 소설 [찾아보니 보통 Still Life With (Open) Bi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흠. 고흐가 이런 그림도 그렸구나... 다른 정보 없이 전시장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개 그쯤에서 멈추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한다. 전문서적, 미술사가들의 도움을 받자.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어떤 작가들은 누구나 원하는대로 해석하길 기대하며 창작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평론가들, 미술사가들의 그 휘황찬란한 언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지만, 이런 그림의 경우 사정이 많이 다르다. 화가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서 소재를 선택했으니까 말이다 [그것조차 의심하는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겐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지만...].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하니까 수 년 전 들렀을 때 분명히 봤을 테지만 내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다. 최근 클리프 에드워드(Cliff Edwards)의 '하느님의 구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2004) [원제: van Gogh and God : a creative spiritual quest, 1989]를 틈틈이 읽고 있는 중인데 그 책에서 이 그림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하였다. 에드워드가 이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해석을 전해 줘서 이 공간에 그림에 대한 흔적을 남겨놓을 마음을 먹게된 것이고... 이 그림은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가 1885년 3월 27일 세상을 떠난 후 8월경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자, 아버지의 죽음은 이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에드워드의 해설을 들어보자 [본문을 오려 붙였다].
"(...) 네덜란드 메멘토 모리파 회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이 꺼진 초는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삶은 영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촛대 옆에 있는 동으로 된 물건은 성경 표지에 달린 걸쇠 두 개다. 낡은 네덜란드어 성경의 각 페이지는 위쪽 절반은 성경 구절, 아래쪽 반은 성경 독서에 도움이 되는 주해로 구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른쪽 페이지 맨 위에 적힌 'ISAIE'라는 글자와 그 페이지 오른쪽 여백 근처에 적힌 로마 숫자 'LIII'이다. ... 이사야서 53장 '주님의 종의 노래;... 고흐는 자기가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성경구절, 곧 보리나주의 광부들 사이에서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고난의 종'의 사명에 관한 구절을 펼쳐놓았다. ... 성경 아래쪽을 살짝 누르고 있는 노란색 종이책... 낡고 모서리가 접힌 책 표지에는 'Emile Zola'와 'La Joie de vivre'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표지 아래쪽에 'Paris'라고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아버지의 성경책 근처에, 바로 그해 (1885년) 출판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두었던 것이다. ... '삶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만이 가득한 채 살아가는 한 중산층 가정을 그리고 있다. ... 성경책과 현대소설을 대조시킨 것은, 1883년 고흐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증언한다. (...)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과 소설 속의 폴린은 둘 다 극기와 희생과 사랑이 육화된 인물이다. ... 고흐는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펼쳐진 성경을 그렸다. 졸라의 소설을 선택한 것은 이 소설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현대식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고흐의 편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현대 미술가로서 자신의 사명은 성경의 '오래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힘과 아름다움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해석이 그저 상상력의 소산이 아님을 에드워드는 고흐의 편지를 근거로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ps) '그림 읽기'는 '음악 보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한겨레 21기사 '걸그룹들의 진화하는 패션' 을 읽으면서 든 생각. '보는 음악'은 사실 가수들의 패션이나 스타일이 아닌 '뮤직비디오'나 'MTV'의 등장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MTV 설립은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