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이석기의 '그 발언록'에 대한 페친의 페친의 견해다. 그 글에 따르면 그는 그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편인 것 같다.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만 난 단일한 현실이나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는 둥... 오지랖 넓은 거야 그 쪽 사정이고, 뭐 경우에 따라서 긍정적 평가를 내려줄 수도 있지만... 그에게 묻고 싶다. 가스통 들고 웃통 벗어제끼는 어버이연합, 해병대 전우회, 그리고 일베, 변씨 따위들이 상상하는 시대와 현실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이해"할 거냐고. 더 심한 말을 해주고 싶지만... 참는다.

"이석기 일당의 발언록을 읽어보았다. 유치하고 황당무계한 얘기라는 반응들이 많다. 적극 동감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도 많다.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단일한 '현실'이나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인은 만인에 대해 몽상가로 존재한다. 너무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조차, 인간이 그러한 현실성과 합리성을 견지할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한 인간을 기대하는 것이 '몽상'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꿈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꿈을 꾸는 나름의 이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오늘 커피는 실패다. 물이 뜨거운줄 알았는데 뜨뜻미진근했던 것. 할 수 없이 다 마셨다.

This moring I failed to make a good coffee. The water was not  hot enough. However, I only had to drink it up.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성은 자기 축소, 자기 무화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대됩니다.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 자기 무게 때문이에요. 자기가 가벼워지면 주변의 것이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417쪽)

"According to mysticists spirituality is self-reduction and self-extermination. On that spot God's kingdom is expanded. If someone empties his mind and becomes lighter, he dose not feel heavy not matter how the envrionmen is heavy."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31일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다.  8월에 훈련삼아 달린 기록을 정리해 봤다. 시험준비로 치면 벼락치기... 되겠다. 지난 일주일에 집중했으니까. 평균 속도 기록이 가장 좋았던 경우는 25일 20여km를 뛰고 난 이틀 후 27일 6km를 달린 기록이다. 이틀 휴식 후 다리 피로가 많이 풀렸나 보다. 바로 다음 날인 어제 28일 기록은 오히려 좋지 못하다. 훈련 후 잘 쉬어야 훈련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훈련의 피로가 쌓여 있다면 오히려 훈련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22일 11km 와 이틀 후 25일 20km를 비교해보면... 이틀 쉰 후인데도 기록이 좋지 못하다. 하지만 시간 당 기록을 살펴보면12km까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후 속도가 급 떨어져서 그렇지... 여하튼 이번엔 좀 지난 일주일에 집중되긴 했지만 준비는 많이 한 편이다. 목표는 2시간 이내.  그러기 위해선 평균 km당 5분 42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가능한 전략은 반환점 돌기 전에는 평균 속도 km 당 5분 30초를 유지하고, 절반 이후엔 5분 50초를 유지하는 것. 하지만... 짐금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한 기록. 지난 기록을 보니 작년 10월 경이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2시간은 다음 대회 정도에서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이번 대회 이후에도 훈련을 계속한다면... 10km 이상을 5분 30초 페이스로 꾸준하게 뛰는 훈련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6km를 네 번 정도 뛴다던지... 등등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분이니까 그분 앞에서 입 좀 다물라고 성서가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재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분이 말할 때 귀를 기울이라고 말이죠. 그걸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 하나님 인식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의 좁은 오솔길을 우리가 가고 있어요"(386)

- Bible urges us that to be quiet befor God, becaus God is beyond our knowledge. Do not try to measure and define God by your limited knowledge and just listen what HE says: Bible teaches so.  We call it revelation. [We can perceive him only when and as HE revelas himself to us] We walk through the narrow path between possibility and impssobility of cognizing God.

2013년 8월 28일 수요일

하하.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뽀대" "가오"를 중시하는... 뭐랄까... 전형적인 한국 중년 남성. 하지만 그에게는 평균적 중년 남성에 비해서 좀 더 귀여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아니 때로는 '오버'해서 보인다는.... 좀 어린이 같은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잘하는 것은 자랑해서 칭찬받고 싶고, 못하는 것도 결국 내보여서 위로를 얻고 싶어하는... 진짜 어른은 '약점'은 절대로 들키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전형적인 한국 중년 남성이라고 보긴 힘들겠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하나님도 사실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해명의 문제예요. 변증이 무의미하다는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가능한 대로 보편적인 근거에서 해명하고 변증하지만 어떤 단계에 이르면 선택의 문제가 돼요"(정용섭, 기독교가 뭐꼬?, 2013, 260쪽)

"기도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확인하고 설득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태도"(323)

"저는 죄의 경향성, 죄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떼어낼 수가 없다고 봐요. 도를 닦에서 되는 것도 아니고 교양 강좌를 많이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금욕이나 자학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상하게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게 자기의 의가 되어 버립니다. ... 성서가 말하는 죄는 자기에 대한 집중, 자기 의입니다. ...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래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열심히 뭔가 하기는 했는데 우리의 영성은 늘 제자리에요. ... 기도는 우리의 실존이 완전히 흙처럼 되어, 흙처럼 아주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게 해달라는 호소입니다. 어디에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만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떤 영적인 세계로 우리가 뛰어 들어가는거죠."(324)


- God is not an issue of verification but elucidation. It dose not mean that arguments/ demonstrations are useless. Instead it means that God cannot be verified. We can demonstrate/ argue to some extent based on general grounds, however at some point it becomes a matter of choice and making decision.

- Prayer can be seen as an attitude to ascertain the life on earth in God's manner and to encourage ourselves to live according to God's will.

- I think we cannot be free from sins anyhow. We can train ourselves, consult advisors, repress our sinful mind and tourture ourselves. That isn't helpful at all. Maybe through those activities we can lead a life in a nobel way. However, that can resulted in a self-rightousness. According to the Bible, sin  is nothing more thatn to concentrate on ourselves, self-righteousness in other words. Not only prayer. It can be applied to all aspects of our lives according to the faith.


어떤 지식

오늘 신우회 성경공부를 하면서 든 생각. 어떤 경우에 나는 내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 듣는 사람들이 어려워 한다. 그게 어떤 경우인가? 나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인 것 같다. 내가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 쉽게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경우 대개 삶에서, 경험에서 완벽하게 체화되어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책으로 어설프게 아는 지식으로는 그런 맛깔스러운 이야기를 전하기 힘들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건 나 스스로 무슨 얘길 하는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After bible study of today's work mission meeting, I felt that I am incapable of deliver my message clearly and listener would think that my message is diffcutl to get. When is it the case? Maybe it's because I don't digest my own message well enough. There are people who can talk very esaily. This could happen because they talk about what they've learned  in their own lives. Embodied knowledge! If you know indrectly via books and had no time to digest the message, you can never bring the message clearly to others.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이번 주 토요일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면서 어제 약 20km를 뛰었다. 기록은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뛴 장거리라 역시 몸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번에도 2시간 내로 들어오기는 힘들 것 같다. 좀 더 일찍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동안 날이 너무 더워서... 이번 주 토요일도 연습으로 생각하자. 다음 대회에선 반드시 2시간 내로 들어오기 위한...
주말에 잘 쉬었다.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도 좀 얻었는데, 과연 얼마나 진척시킬 수 있을런지... 일단 수요일까지 쓰기로 한 분량을 채울 수 있을지...

On this weekend I will take part in a marathon race. For the purpose of preparation, I went running and ran about 20km yesterday. The record was not that good, more than 2 hours. I haven't run that long distance since spring. My body appers to be not prepared for that distance and not strong or trained enough to record below 2 hours. I couldn't train properly because of the hot weather. Let's treat the coming race as a training. I will prticipate in several more races in fall.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영어로 무엇인가를 쓰려면 영어의 논리 속에 빠져 있어야 문장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당연하다. 진리다. 그런데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고 바로 영어로 만들어내는 문장에선 무엇보다 내용의 수준이 낮아지게 된다. 당연하다. 역시 진리다. 그것을 개선하는 방식이 우선 모국어로 문장을 쓰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영어로 바꾸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어로 글쓰는 리듬을 익히는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런 의도로 쓰고 있다.

To write something in English more fluently, an non-native speaker (writer in this case?) must be in the enviroment that help to think in English. That is a truth.  If an non-native writer begins to write in English without such help. Then the quality of the products might be often very poor.  How can such envrionment favorable for English writing can be created? On effective way might be that you first writen in your mother language, then translate it into English. This very text is being written because of that purpose.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워낙 주위에서 덥다고 투덜거려서 나라도 날씨에 대한 불평을 아끼려고 했다. 게다가 다가오는 가을이 썩 달갑지도 않고 해서... 며칠 전까지 그런 기조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새벽엔 한기까지 느껴진 날도 있었으니 덥다고 크게 불평하지 않고 넘어가나 했다. 어제 그게 깨졌고, 오늘까지 이어진다. 선풍기를 최대치로 올려도 별 무소용이다. 더운 바람이 나오니까. 어쩌면... 가을 기운을 느꼈고 그래서 서 긴장을 늦춘 사이에 더위가 다시 기승을 부려서 그런 모양이다. 여하튼... 오늘... 사무실... 참 덥다.

Everyone is complaining about dog days. I didnt want to add my complaint. Furthermore, I cannot welcome nearing fall. I could maintain my attitude relatively well. However, yestderday and also today. It's different. It's unbearbly hot in the office. Mabye it's because that few days ago I felt even cold in the early morning. The heat attcked me between the loose tension. 
모처럼 달리기를 했다. 약 11km 정도. 어제 밤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웠고, 오늘 아침 역시 더웠다. 일기예보는 맞지 않았다. 달리면서 땀을 엄청나게 많이 흘렸다. 예상했던 것 이상 힘들었다. 다음 주말에 하프 마라톤 뛰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래서 완주할 수 있을까. 다음 주까지 최대한 자주 뛸 생각이다. 주말에 최소한 14, 15km는 한 번 뛰어야 할 것 같고. 지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으니 시합 전 며칠 동안엔 가볍게 뛰어서 근육이 피로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여름은 아직 가지 않았고 가을은 아직 모퉁이를 돌지 안않았다.
어제 원장님을 만나서 논문 진행 계획을 상의했다. 계획을 주 단위로 세웠다. 거의 매주 한 장씩 쓰겠다는 계획인데 현실화될 수 있을까? 매우 비관적이다. 여하튼 계획이라도 그렇게 세워야... 계획을 그렇게 세우니 정말 딴 짓을 할 수가 없다. 두 주 단위로 계획을 세울 때와 사뭇 자세가 달라진다. 정말 '올인'해야 할 때다.

After a while I went jogging this morning. I ran about 11km in an hour. Last night it was hotter than I expected, so was in the morning. Weather forecasting was way far from being accutate. During running I sweated so much. It was harder thatn I expected. Next week on saturday  I'm going to run half marathon. Can I finish the race? Maybe on Sunday should run a bit longer, mayber 14 or 15km. Then during the next week only few kilometers.
Yestderday I met Dr. Kim, the ex-director and discussed my dissertation. According to my plan I should write a cahpter per week. This plan is a highly optimistic one. To be frankly, I don't think this will be realized according to my plan. You know what? Plan is plan, because it cannot be realized as it is written. Punkt! Good day! JK!

2013년 8월 18일 일요일

요한 1서 4장 (우리말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됩니다."(7 - 12)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9 - 21)


이 내용을 몇 가지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2.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3.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신 것으로 나타났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5.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한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 사랑... 앎.... 여전히 어렵다.
다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이웃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는 긴밀한 연결관계가 있을 수 있음은 느낀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부분은 여전히 와닿지 않는다. 다만 요한 일서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예수가 아닌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웃 사랑 - 하나님 사랑... 그런 관계라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며칠 전에 남한산성에 다녀온 후로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떠올렸다. 몇 번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몰입하기 쉽지 않아서 포기했는데 이번엔 끝까지 읽을 마음을 먹었다. "칼의 노래"를 "읽어 낸" 탓일 것이다. "칼의 노래" 역시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김현의 문체가 좀 그런 면이 있다. 짧은 문장이지만 꾸밈이 많은.... 낯선 단어들도 많이 쓰는 편이고.... 서서 중심적이 아니라 묘사 중심적이다. 대개 서사중심적인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가장 많이 읽었던 작가는 아무래도 이문열, 조정래가 아닌가 싶다. 대하소설을 많이 썼으니... 특히 대하소설은 서사중심적고, 몰입도가 높지 않으면 이끌어 갈 수가 없다. '토지' 읽기를 몇 번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바로 초기 몰입 비용이 내 기준으론 너무 높았다. 여하튼 김훈의 경우는 전형적으로 내가 읽기 힘든 쪽에 속한다. "칼의 노래"도 사실 겨우 읽어냈다. 읽으면서 김훈 문체의 매력을 좀 알 것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남한산성"에서도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다만 "칼의 노래"가 이순신 개인에 집중한다면, "남한산성"의 경우엔 "산성"이 중심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몰입도가 더 떨어진다.  칼의 노래에서 쉽게 이순신에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면, "남한산성"의 경우엔.... 그런 인물이 보이질 않는다. 인조? 김상헌? 글쎄.... 읽어봄직하지만... 글쎄...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시작저통제권의 이양이 계속 문제다. 넘겨 받을 시기를 우리 스스로 미루고 있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일갈은 여전히 유효하다.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외세를 빌어 나라를 지키거나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생각은 한민족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빌었던 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청병 등. 강한 외세 틈 속에서 살아남아서 그런지... 스스로 강력한 국가가 되어 본 기억은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 대세, 대국을 섬기다보니 그런 습성이 만들어진 것인지.... 오늘은 외세 의존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에피소드를 알게 되었다. 참. 부끄럽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9년 만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그 9년 동안 조정은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면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9년 동안에 조정에서는 어떤 대신의 제청으로 만약에 청나라가 다시 쳐들어온다면그때는 일본군의 힘을 빌려 청군을 물리치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그래서 이러한 교섭을 벌인 결과 인조7년에는 일본에서 현방(玄方)이라는 스님이 왔는데이때 그들이 보내온 것은 조총 3백 정과,칼3백 자루, 화약3백 근 뿐이었다. 일본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때문에 피를 흘리면서 싸우겠는가?"


물론 일종의 '외교'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화친, 전쟁, 청병 등의 역사가 있으니까...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될... 우리나라도 '섬기던' 중국 왕조가 위태로운 시기에 청병 원청을 받았고 실제로 지원하기도 했으니까...

천박한 역사인식 - 송파도서관의 인조-서흔남 동상



송파도서관 앞 쉼터에 이런 동상이 있다 (사진은 인터넷 검색 결과로 얻은...). 병자호란 무렵 인조와 서흔남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내용은 대강 이렇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할 때 얼마나 혼란이 심했던지 이런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인조는 불과 10여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송파나루에 이르러 사공도 없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날은 이미 어둑어둑했을 때였다. 날은 춥고 산길은 험한데 눈까지 내리니 신하들이 임금을 번갈아 업고 산을 올라가는데 모두가 지쳐 쓰러졌을 때,때마침 산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오던 한 나무꾼이 이 광경을 보고 자기가 임금을 업고 모시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바로 그 나무꾼이 서흔남이라는 사람이었다. 서흔남은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인조는 서흔남을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하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배운 것이 없는 서흔남은 임금이 입고 있던 곤룡포가 그렇게 좋아 보였던지 임금이 입고 있는 곤룡포를 달라고 했다. 대신들은 저렇게 무례한 놈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쳤지만 임금은 아무말 없이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 상으로 내 주었다. 그후 서흔남은 평생동안 임금의 곤룡포를 소중히 간직하다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해서 자손들이 그렇게 해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도서관 다니면서 별 생각없이 보다가 이런 배경을 알게 되고 사뭇 분개했다. 지금도 볼때마다 불편하고 짜증난다. 무능한 탓으로 나라와 백성을 크나큰 어려움에 처하게 왕 인조의 피난길에서 임금을 도와 준 일이 21세기에도 기념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동상을 세웠을까? 나랏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와야한다? 서흔남을 배우자? '군사부일체, 임금을 섬기는 것처럼 스승과 아버지를 섬겨라... 뭐 그런 왕조시대 이념을 전파하고 싶은 것일까? 이 지역에 내려 오는 이야기가 한둘이 아닐텐데, 고작 이런 이야기를 '미담'인양 동상까지 세워서 기념하는 그 배짱과 천박한 역사인식을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린다. 대한민국엔 인간관계를 상하로 구분하고 '상'(혹은 갑)에 대한 '하'(혹은 을)의 복종을 '찬양하는' 왕조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저 동상이 공공도서관 마당에 떡허니 자리잡고 있는 사태의 의미를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ps1) 인조, 서흔남 에피소드를 굳이 현대적 상황으로 끌어오자면...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이승만 대통령도 피난을 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이 탄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당황해 하고 있는 이승만에게 어떤 피난민이 자신의 차를 내어주고 정작 본인은 걸어서 피난을 갔다.  이런 일이 만약 일어났다면 우리는 이를 미담이라고 널리 알려야 할까?
자랑스럽게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고, 부끄러운 역사지만 교훈을 얻기 위해서 기억해야 둬야 할 일도 있다. 하지만 그러저러한 역사적 가치도 없고, 막상 알려지면 당사자에겐 창피한 일일 뿐인 사건을 굳이 널리 알릴 필요가 있을까?

ps2) 좀 더 찾아보니 서흔남은 그저 인조를 업었다는 것 이외에도 병자호란 관련 역사적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남한산성 밖으로 인조의 유서(諭書)를 전하는 등 여러 차례 성 밖을 왕래하며 명령을 전하고 적정을 탐지해서 전쟁 후 통정대부(정2품 당상관)의 품계를 줬다는 것이다(동상 설명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음). 남한산성역사관 옆에 묘비도 세워져 있다고...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서날쇠가 서흔남이었다니...  새삼스럽다. 그렇더라도 해도 무능한 임금을 피난 중 업었던 이야기를 굳이 동상으로까지 만들어서 기억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ps2)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일부 표현을 수정하고 덧붙였습니다.  표현이나 논지전개가 여전히 좀 거칩니다. 이해해주시길...
어제 남한산성 불당리 계곡에 다녀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계곡을 끼고 있는 식당을 다녀왔다. 물 위에 평상을 펴 놓고 장사하는... 얼마나 더운 날이었던지 그 계곡에서도 크게 시원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물에 발을 담글 때 뿐... 한편으로 다행이다. 아직 덥다는 건 위로가 된다. 하지만 땀을 흘리고 난 이후... 기분이 예전같지 않다. 습도가 낮은 것이다. 어젠 하늘 빛, 구름도 예전같지가 않다. 청명하고 구름도 높아 보이는 것. 전형적인 초가을 하늘이었다. 이런... 마음이 급해진다.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가을이 벌써 준비 중이구나... 오늘은 아침부터 많이 덥다. 해서 그런 마음을 좀 잊을 수 있을텐데... 여하튼 오늘은 월요일 같은 금요일이다. 월요일이라 생각하고 덤으로 주어진 오늘 그리고 주말 시간을 잘 활용하자고. 

Yesterday with my family I visited a brook at Namhansanseong. Buldangli, to be exact. Actually a restaurant near the brook. The tables were set just over the water. So it was the best place to idle time away in a hot and humind summer time. However, it must be so hot yesterday. Even at the brook I couldn't feel that cool. Only when I dipped my feet into the water then I felt cool little bit. It's a comfort, on the one hand. Because it means that we are still in Summer. However, the sky and clouds were somewhat different from the Summer. The color of the sky and the movement of the clouds were those that can be seen in early fall. Fall seems to be jsut around the corner. You should hurry up. Concentrate yourself!!

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어떤 인격적 대상을 좋아하려면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 할테고, 교감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애정이 생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등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하다. 페친의 표현대로 좋아하는 것만 공유하면 동호인, 싫어하는 것 공유하면 동지, 이 둘을 모두 공감할 수 있어야 친구다. 그런 공감대 없이... 친해질 수 있을까? 부모, 자식 관계는 어떨까? 남녀관계, 동성관계는 또 서로 다를까? 즉, 우정과 사랑 차이. 노우! 원칙적으로 모두 다 같을 것 같다. 즉, 부모 자식, 아내 남편 관계에도 '일반적' 친구관계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가? 기독교 신앙인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나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가? 무엇을? 어떻게? 교감이 있는가? 어떻게 확인? 서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근처에라고 가는가? 아니... 물론 완전히 비슷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때론 무서운 선생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러려면 선생님의 그 엄함 뒤에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감추어져 있음인 인지되어야 한다. 그런 것도 없이 엄하기만하고, 일방적으로 다그치기만 한 선생을 좋아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매조키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부모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나? 우리가 부모에게 애정, 친근함을 느낀다면 그건 부모님의 애정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부모님의 애정도 확인되지 않고, 꼰대스러움으로 충반한 부모님...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도 없고, 가치관도 완전히 다르고... 그런 부모님을 과연 부모님이라는 이유로 사랑할 수 있을까? 프로스포츠 선수와 감독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모든 관계는 결국 "우정/ 우정아님"의 코드로 선별되는 것 아닌가? 공감대가 없어서 대화가 늘 어긋나고,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퉁명스러운 말들만이 오고간다면... 그 관계가 부부관계든, 부모 자식 관계든.... 친밀한, 애정의 관계라고 말하기 힘들지 않은가? 하물며 하나님, 예수님, 주님과의 관계는?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I서 4:7-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0,11)

물론 잘 모르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잘 모르는 '민족'을 사랑하기도 하고, 소외된 -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 이웃을 사랑하기도 하고, 심지어 인류를, 생태계를, 동식물을 사랑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걸 일반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 하나님 사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누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테레사 수녀 급은 되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방금 "하나님을 사랑하는..."를 검색어로 넣어서 좀 찾아보았는데.... 많은 이야기들, 하지만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결과로 나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런데 동어반복적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 흠. 우리 죄 때문에... ??
페친 장춘익 선생님의 글이다. 공감하는 얘기고, 또 영작 연습용으로 좋아보여 져왔다.


"한 사람의 도덕성은 그가 무엇을 싫어하는 지에서, 그리고 창의성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에서 드러난다. 싫어함만 비슷하면 동지가, 좋아함만 비슷하면 동호인이 될 뿐이다. 싫어하고 좋아함이 비슷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깐 함께 분노하고, 그보단 길게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그후엔 제법 긴 침묵도 어색해 하지 않으면서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가 좋다."

One's morality can be measured from what s/he likes and creativity from what s/he dislikes. We we can share with someone what we like then we can be peson having same mind/will, and persons having same taste when we can share what we like. When we can share both what we like and dislikes, then we can be good friends. I'd like to have a friend with whom I can share my fury for a while and have enjoyable talk, and then have some drink sharing silence without feeling akward.
딸 '덕분에' 일찍 일어나게 되어서 모처럼 달렸다. 10km를 생각하고 뛰었는데 웬걸 몸이 너무 힘든 것이다. 결국 8km로 하향 조정. 최종적으로는 7.6km 정도를 달렸다. 한동안 아내와 함께 4,5km 정도 뛰었는데 몸이 벌써 거기에 맞춰진 모양이다. 달리기를 조금만 쉬어도 몸이 초기화되는 느낌이다. 몸 어디엔가 기억이 되어 있긴 하겠지만... 그 기억을 불러내는 메커니즘이 그다지 즉각적이지 않은 것이다.

'Thanks to' Roa I could get up early and went jogging. I had 10km in mind but ... my legs felt so heavy. I changed to 8km but at the end it was 7.6km. Recently I did some running with wife about 4 and 5 km. Maybe my body became tuned to that distance. After short break from running my body appears to be rest and I have to beging from the starting point again. Well... running skills must be strored somewhere in my body. It just takes much time than I hope.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모두 그리움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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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
어제 어떤 이에게 페북 친구 신청을 했다. 그 사람은 한글 단상(斷想)과 영어 번역문을 동시에 올리고 있었다. 영어 번역이 꽤 매끄러웠다. 직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영어 문장으로 재창작한 것 같았다. 영어권에서 살진 않았다고 하는데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모양이다. 좋은 시도라고 생각해서 나도 오늘부터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영어 실력 부족이 속도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 영어 실력이 뽀록나지만 뭐 내 '일기장'이니까 ㅎㅎ

Yesterday I asked someone to be my facebook friend. In her timeline she writes fragmentary thoughts both in Korean and English. The English translation was not literal but very smooth and stylish. She wrote that she has never lived in an English-speaking country. Obviously she appears to have a real talent for language. That method seems to be very useful. So I will imitate her from today on. In writing my disseration my Enligh skills are impeding the writing speed. The level of my English writing will be reveald. So what? It's my private diary at all.
사무실에서 밤을 새다시피 했다. 책상에 엎드려 두세 시간 잤을 뿐... 성과가 많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뭐랄까... 공부는 역시 쭉 이어서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그 동안 저녁에 집에 가느라 사실 리듬이 깨졌었다. 그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내게 논문쓸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제공해 준 선배가 묻는다. 잘 되가느냐고... 얘기 중에... '지금도 많이 늦었지만...' 그런 표현도 등장한다. 또 지도교수에게 이메일이 아닌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라고 조언한다.  원래 다그치는 성격이 아니고, 본인도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선배가 그렇게 표현했을 때는 본인도 느끼는 나에 대한 답답함을 전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나를 여기에 마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마 나름 고민이 될 것이다. 에고. 이래저래 압력은 쌓여가는데... 집중하기는 힘들고... 사면, 아니 육면, 팔면이 모두 초가일세....

행복한 고민

'연구 알바'(?)를 해서 푼돈이 좀 생겼다. 다시 선교지 인도로 돌아갈 친구 부부에게 선물할 책 두 권을 주문하면서 나를 위해서도 책을 선물하려고 한다. 한국에 온 이후로 책 구입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물론 한달에 두어권 정도는 구입하는 것 같지만... 여유돈이 있어서 급하지 않은 책을 살 고민은 참 오랜만에 하는 것 같다. 굳이 책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선물할 수도 있을 텐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무슨 책을 주문할까... 사실 책상 옆에 읽고싶지만 도서관에 없는 책들 목록을 적어 놓고 있긴 하다. 방금 훓어보았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책이 없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음. 그렇다면... 가방을 하나 살까? 봐둔 게 없는데... 에구. 일단 보류...
1.
월요일 아침. 딸이 적절한 시간에 일어나줬는데 좀 더 자 버렸다. 개운하게 일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잠을 더 자면 몸이 오히려 더 피곤해지는 현상. 비몽사몽 간에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에 나왔다.

2.
아내가 내게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이야기하는 편이다. 직원들에 대해서 그리고 시댁 식구들에 대해서... 직원들에 대한 얘기는... 리더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 시댁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들어 주고 있고... (결론은 남편은 외롭다...)

3.
충북 어디에 있는 선배 한옥집에서 고기 구워먹으며 여름밤을 보내고 있다고 지인이 페북에 소개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그 정도의 여유도 즐길 수 없는 내 상황을 인식하게 되어 급우울해졌다. 이건 사는게 사는게 아니여... 언제까지... 나 뿐 아니라, 특히 아내에게도 그런 고통을 지우다니... 참 못난...

4.
페친이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는 얘길 전한다. 뜨금한다. 안돼. 귀뚜라미가 벌써 울면 안돼. 날이 선선해지면 안돼... 전력난은 전략난이고.... 여름은 오래 가야 해... 하지만 밤이 찾아 오는 시간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5.
요즘 흰머리(새치?)가 갑자기 늘고 있다.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이렇게 늙어가는 것이다. 제대로 일도 못해보고 은퇴하게 생겼다. 큰 일이다...

6.
나름 페미니스트까진 아니더라도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를 보면서 내 한계를 자주 느낀다. 직업을 가진 여성에게도 전업주부에 '준'하는 역할을 알게 모르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런 기대를 드러내시는 부모님보다는 약하겠지만... 반면에 경제적 기여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가사 등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편이다. 물론 아내는 '간헐적으로' 불평하지만... 내가 크게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다.  남녀, 양성평등...은 한국에서, 아니 우리 가정에서도 여전히 먼 얘기인 것 같다.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인생에서 모든 걸 갖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그렇다. 설령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지지 못한 것, 혹은 놓친 것들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고,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갖지 못해서, 혹은 제한당해서 안타까워하는 것들.... 난 그만큼 많은 것을 누렸다. 지금 고생은 해도 싸다. 불평 금지.

2013년 8월 10일 토요일

치명적인 일본

일본 토건(土建)국가...Alex Kerr "치명적인 일본"(Dogs and Demons) - 개는 그리기 어렵고 귀시는 그리기 쉽다. 현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구하기 어렵지만, 고가의 진열품에 돈을 쏟아붇기는 쉽다"일종의 경로의존성 얘기인가? 

46f "일본인들이 자연재해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자연 그 자체에 대해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낙엽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낙엽은 지저분한 것일 뿐... 낙엽만 그런게 아니다. 나무와 동물뿐만 아니라 자연물 전체가 일본인들에겐 더럽고 지저분한게 여겨진다. ...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반짝거리고 매끄러운 표면과 일직선이 산과 강의 들쭉날쭉한 윤곽보다 더 좋다는 생각은, 자연이 더럽다는 생각과 더불어서 일본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현대에 와서 자리 잡은 이상한 태도 가운데 하나이다. ... 일본인들은 '기레이'(奇麗)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이것은 '아름답고, 깔끔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불도저로 확 밀어버린 산등성이나 콘크리트로 말쑥하게 포장한 강둑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 매끈하게 처리한 표면이 '기레이'하다는 관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이 개발도상국 시기, 대부분의 시골길이 아직 비포장 상태에서 막 개발된 직후 사람들을 사로잡은 생각... 모든 길은 반드시 포장을 해야 하고... 일본의 전통예술... 정원, 분재, 꽂꽂이...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 자연에 대한 자연방임주의와는 정반대... 이 예술은 여러 세기 동안 일본을 통치해 온 군사계급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나뭇가지 하나에도 완벽한 통제를 요구한다."
68 "관료주의와 대기업에 복종하도록 훈련된 국민이 일본 산업의 근원... 일본에 제동장치가 없다는 의미... 일단 정책이라는 엔진에 시동이 걸리면, 멈출 수 없는 탱크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일본은 여러 면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극단성은 일본 쪽이 좀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은 그나마 덜 집단적, 순종적인 것 같고. "자연이 더럽다는 생각" 혹은 "자연엔 어떻게든 손을 대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은 매우 비슷한 것 같다. '개발주의'라고 해도 좋고... '토건국가'라고 해도 좋을...

관찰되지 않는 것들, 무시되는 것들의 반격?

써 놓고 보니 생각이 뒤죽박죽. 나중에 다시 정리해야 할 듯.

대개 드러나는 것,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아주 틀린 얘긴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예로 들면.... 우리는 관찰, 접근가능한 의식의 세계가 지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감춰진 부분이 더 그 사람을 드러낸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의 나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의 내 모습이 내 본질에 더 가까울 것이다. 사람들 관계 속에서 억누른 부정적 감정들을 혼자 있을 때 발산하는 그런 모습... ??
하나님도? 어쩌면 하나님의 본질은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감추시는 하나님에서 찾아야 할런지도...

사회구조는 어떠한가? 다들 정치, 경제가 지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런가? 정치를 바꾸면 세상이 확 바뀌는가? 경제 질서가 바뀌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가? 루만은 경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취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역으로 사람에게 적용하면... 강한 사람은 약점을 감추려고 강한 척 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역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 세계의 관계에도 적용이 될까? 결국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 보이는 세계 중에서도 오히려 약해보이는 것들,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 전체를 움직인다?

DNA로 치면.... 특정 기능을 결정하는 결정적 유전자를 찾는 방식으로 연구가 대개 진행되었지만, 막상 특정 기능으로 대응하기 힘든 DNA들 그래서 쓰레기 DAN(jung DNA)라고 불리기까지 하던 그런 DNA들이 결정적일 수도 있는... 

강준만 교수가 '룸살롱 공화국'이란 책을 쓴 게 생각났다. 어쩌면 공적인 역사가 외면하는 '룸살롱' 같은 영역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오히려 더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미시... 일상... 그게 더 재미있는 작업 아닌가? 거시에서 노는 것보다.... 각종 공식 통계 가지고 작업하는 그런 접근은 참 식상하다. 내가 그래서 주류 경제학이나, 실증적 작업을 싫어하는 것 아닌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고... 하지만 큰 틀 없이 미시적이기만 한 것은 또 재미가 없어서 푸코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고. 엘리아스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어쩌면 좀 더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을 지도...   
어쩌면 난 루만을 그런 점에서 대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거시적이지만 미시도 시야에서 잃지 않는.... 관찰되지 않는 측면 까지를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구성하니....
관찰되지 않는 영역을 관찰하기? 혹은 놔 두기? 루만은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은 인정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작업은 거시를 설명하는데 집중했다. 기능적 분화. 기능체계들. 심지어 문화, 의미론 영역에 대해서도 대부분 기능적 분화와 관련된 '세련된 의미론'에 집중했으니까.  미시를 통한 거시 설명이라는 틀을 가져온다면... 덜 세련되고, 주목을 못받는, 관찰되지 않는 영역이 오히려 기능적 분화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통해서 보이는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다. 궁극적 관심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지 않은가. 무의식이 중요하다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무의식을 통해서 의식을 설명하는 게 궁극적 목적인 것처럼... 덜 중요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중요해 보이는 것을 설명하기... 

ps1) 지적 허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주류 해석을 뒤엎는 것은 언제나 통쾌한 일이다. 남들과 달리 세상을 보려는...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점을 강조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기존 해석을 뒤엎는 것. 그런 전복이 주는 쾌감. 나를 포함해서 독자들도 그런 주장에 솔깃해하는 것도 사실... 

도서관...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갖는다. 조용하고... 시원하고...

사무실은... 일단 너무 덥다. 에너지 사용량이 기관 평가에 반영한다는 이유로 올 여름엔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았다. (공공기관들은 경영 평가에 엄청나게 민감하다. Audit Society... 조직의 모든 활동이 평가와 연동된다고 봐도 될 정도로... 조직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평가에 잘만 반영할 수만 있다면야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평가, 특히 양적 평가 그렇게 쉬운 일인가.) 게다가 돈을 알바 과제가 하나 있어서 온 몸이 끈적끈적한 상태로 장시간 집중해야 했었다.
사무실을 피해 커피숍에서 한 두 시간 작업한 적이 있었다. 우선 너무 춥다. 여름 감기 들기 십상... 그리고... 너무 시끄럽다. 음악이야 참을만 하지만... 옆자리 나이 좀 있는 여인네들의 수다 소리.... 역겨울 정도...
집에선... 두말 할 것 없이... 식구들, 특히 딸 때문에... 어제 저녁엔 딸과 둘이 있었는데, 많이 우는 통에 '욱' 한 감정이 올라오기도... 어젠 특히 이런 저런 일로 좀 심난한 상태라서 더 그랬는지도...  새삼 마음,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스트레스, 짜증, 분노, 질투, 불만족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연약한 고리를 뚫고 터져나오는 것 같은... 예를 들어 혼자 거리를 걷거나 운전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보면 - 예를 들어 횡단보도를 침범하는 차들, 침을 뱉는 아저씨들, 담배 피우면서 걸어가는 이들  -  짜증, 욕설이 확 밀려온다. 딸과 둘이 있는 상황도 연약한 고리 중 하나인 것 같다. 눌러둔 짜증이 딸의 어떤 행동에 대한 타박을 빌미로 확 올라오는 것 같은...
어떤 대안이 있을까? (1) 부정적 감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봐도 이해해 버리기. 모든 사람, 모든 행동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기. 사랑하고 용서하기. --> 성인, 성자의 반열에 오르는 길이다. 노력은 하겠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2) 부정적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기. 약한 고리에서도... --> 참고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계속 억누르면 언젠간 폭발하기 마련... (3)부정적 감정을 최대한 작게 잘라서 그때 그때 발산시키기. 운동, 술자리 수다 등이 좋은데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4) 잘 나가기. 돈을 많이 벌고, 또 영향력 큰 자리에 올라서 남들에게 스트레스를 줄지언정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줄이기. 예를 들어 딸 키울 때도 사람을 잘 골라서 쓰면 나는 딸에 대해서 부정적 감정을 표출할 일도 없고, 딸을 키우러 오신 어머니, 아내 등의 관계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으니까. --> 뭐. 돈으로 또 내 사회적 지위로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다. 물질, 권력에 약하지 않은가? 타인의 반응 뿐 아니라... 나의 자존감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5) 이와 연관해서... 스스로 자존감, 긍정적 감정으로 충만한 사람은  부정적 감정을 느낄 계기가 줄어 들 것이다. 참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매우 긍정적 에너지로 충만하기... 그러려면... 제대로 된 직장을 갖고 돈도 제대로 벌고... 건강하고... 외모두 잘 가꾸고... 뭐 그래야 하는 건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 듯.... 하지만 세속적인... 영성과는 상관없는.... 아니... 정말 상관이 없을까?


2013년 8월 9일 금요일

1.
누군가를 정말 제대로 사랑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 이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이 맘에 들려고 애쓰고 그 이가 원하는대로 살게 되어있다. 혹 그 이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더라도, 그 이가 실망할 것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도 '재발방지'를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애를 쓰고 또 써도 그 이 뜻대로 살지 못하는 건, 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이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고, 그 이를 신뢰하거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별로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 - 그게 무엇이든 간에 -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서,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의 사랑을 잘 인식,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면 그 앎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알긴 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경우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질문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난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내 지식,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지식... 그 지식은 도대체 뭐냐? 그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그런 지식이냐? 아니면....
다른 한 편... 앎에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는 것도 좀 촌스럽다. 구식이다. 그래서 '세련된 근대'는 앎과 삶의 분리를 구조적으로 정당화시켰다. 그래서 그런 접근은 편한 구석이 있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 통합하려는 것은 인간의 욕망, 아닌 인간 삶의 필요충분조건에 가깝다. 분화되었지만 통합, 연합, 연대에 대한 지향은 켤코 사라질 수 없다. 루만은 그런 접근을 자꾸 경계하고, 분화를 유지시켜야 그나마 파국을 막을 수 있다... 뭐. 그 정도... 참 소박한 생각인 것 같다. '설국열차'에 비유하자면.... 기차를 궤도에 계속 달리게 해야 그나마 단백질덩어리를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느냐는...
너무 비관적, 소극적 해석인가? 루만은 얼마나 radical해질 수 있을까? 적어도... 사회변혁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기껏해야 법치국가, 복지국가 같은 소극적 대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나? 사회변혁을 위해서? 루만에게서 가능할까?


2.
제대로 알면 변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참 명쾌하고도 희망을 주는 말이긴 한데... 이 말을 믿고서 좋다. 한 번 제대로 알아보자... 하나님, 예수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또 다른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알려고 해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왜? 하나님은 감추시는 분이기도 하니까.... 감추시는 하나님, 침묵하는 하나님... 알려고 해도 얘기해주지 않는 하나님....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감추기도 한다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기도 하겠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예를 들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도 포함되니까...
앎은 결국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앎의 축적은... 무지의 축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쉽게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


3.
앎은또한 다양한 경로, 방식을 취한다. 책, 논문, 문자로 전해지는 앎은 매우 일부분일 뿐이다. 그런 알량한 지식에 너무 많은 것을 걸 필요는 없다. 세상에 대한 정보, 지식 중 문자, 책, 논문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삶을 변화시키는 앎이라고? 겨우 책 하나로? 지식 한 조각으로? 알면 알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은 실현불가능이라는 앎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결국은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 특히 지식으로 이성을 이용해서 이해되는 그런 방식으로 다 파악되는 하나님? 아마 그런 하나님은 인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난 그런 표현이 매우 불편하다. 도대체 하나님 무엇을 알고 사랑한다고 표현할까? 물론... 잘 알아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4.
결국 지식, 책, 이성적 진술은... 세상에 대한 정보 중 매우 작고 작은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 있고, 종교가 있을 것이다. 예배의 감성적 요소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 옥성호씨. 책 몇 권 읽었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옥 선생...
논문,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어쩌면 루만에게서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 지식은 무지를 낳는다. 매우 포스트모더니즘적.... 최소주의.... 노자적 무위... 무위의 위... 무지의 지...
논쟁적인 글들이 오가는 블로그, 페북 담벼락이 있다. 그 곳의 주제를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사실'과 '견해'. '견해'가 논쟁적이라는 것은 이해가 된다. 원래 다른 견해가 있어야 특정한 '견해'가 가능한 것 아닌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 간에 논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 견해가 분명할수록 더 그럴 것이다. 이런 논쟁에서는 논리적 정합성, 일관성이 중요하다.
사실을 둘러 싼 논쟁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이 논쟁에서는 진술, 주장의 근거가 중요하나. 얼마나 설득력있는 근거인가가 문제가 된다. 대개 자연과학적 지식, 이론, 주장이 동원된다. 하지만 데이타, 팩트에 대한 맹신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과학주의". 오늘 알게 된 어떤 이의 블로그에서도 데이타, 실험 등에 대한 맹신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래프 등등. 에구. 그런 것이라도 믿어야지. 역설적으로 그 이가 깨려는 주장은 바로 그런 과학주의, 실증주의 맹신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주의, 실증주의 맹신에 대한 비판을 더 정확한 데이타로 반박하려니 그게 싸움이 되나. 물론 그렇다고 다시 중세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내 얘긴... 데이타, 팩트에 대해서도 좀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나는 것. 겸손한 과학, 겸손한 기술... science and technologies of humility...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이번 시즌 기아 타이거즈는 6위 정도를 할 것 같다.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계기는 김상현, 진해수를 SK에 내주고 송은범, 신승현을 받아 온 트레이드였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때까지 기아는 1위였고,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외야수 자원이 넘쳐났고, 불펜진이 불안했다. 감독은 아마 팀이 잘 나갈 때 넘쳐나는 자원 중 하나를 내어주고 불펜 투수진을 보강하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뭐. 논리적으로야 완벽하다. 벗뜨... 야구는 물리적 법칙에 지배되는 스포츠가 아니잖은가? 다른 어떤 종목보다도 심리적 요인들, 팀구성원의 화학적 결합력이 중요한 스포츠 아닌가? 선 감독은 입이 가벼운 편이다. 팀이 왜 1등을 하고 있는 줄 모르겠다는게... 어디 감독이 할 소린가? 여하튼... 타선도 계속 바뀌었고 팬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계속 지적했다. 잘 나가는 팀은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는데... 타선 불안정 그리고 트레이트.... 그 이후 팀 '케미'가 깨졌고, 그 이후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팬들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한 편인 것 같다. 물론 결과론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때 감독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일 뿐 아니라, 기아의 경우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설명 방식이다. 배울 점.

(1) 잘 나가는 상태는 바꾸지 마라. 완벽을 기하려다 균형을 깨트린다.
(2) 잘 나가지 않을 때는 변화를 모색하라.
(3) 리더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특히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 리더가 구성원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말을 남발하고, 구성원과의 불화를 감추지 않는 집단의 결과는 뻔히 보인다.

... power is a factor that comes in many forms and is often strongest when concealed. The powerful do not need loud voices...


권력은 실제로 행사되지 않을 때, 감추어져 있을 때 오히려 가장 강하다. 강한 권력은 목소리를 크게 높일 필요가 없다.

침묵의 힘이라고나 할까... 박근혜 씨는 권력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윗 사람이 침묵할 때 아랫 사람들은 그 의중을 해석하느라 분주하고 더 조심하고 알아서 기고... 뭐 그런 것 아닌가? 정치의 최고단수는 아마도 "무위지치"(無爲之治)일 것이다.

좀 뜬금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 감추어진 하나님이 생각났다. 자신의 뜻, 의중이 이거라고 열심히 떠벌리는 (죄송^^) 하나님보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더 하나님의 모습에 어울리는 것 아닌가? 그러니 감추어진 하나님은 차라리 '요청'아닌가?
"설국열차"의 최종 갈등은 결국 기차 안에 머무를 것이냐, 즉 기존 질서를 달래가면서 최대한 유지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차 밖으로 나갈 것이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이냐...사이에 대한 것이다. 루만이 보수적이라는 것은 그는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의 근본적 변혁에 관심이 전혀 없다. 오히려 기능적 분화라는 구조가 무너지는 것은 파국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얘기한다. 어찌되었건 기차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나가서 얼어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은 가능한가?
공적 불신, 사적 신뢰
공적 냉소, 사적 정열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냉소주의"(20)
"반복경험에 의해 생겨난 무력감...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느낌... 먼저 나서면 먼저 당한다는 반복경험의 지혜..."(21f)
"마키아벨리는 위선의 미덕을 역설했다. 위선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해도 위선은 위선이 표방하는 가치들을 옹호해 주는 장점이 있다는 것..."(26)
"성찰성(省察性)이라는 말은 원래 인식론에서 사용되는 철학 용어로 내가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것이 내 주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33)
"문제는 '평등이라는 덫' 보다는 '불공정 게임이라는 덫'..."(62)
"한국인은 나와 내 가족의 문제를 사회와 제도가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경험적 확신을 갖고 있다."(65)
"한국의 평등주의는 왜곡된 평등주의다. 정작 집단적으로 힘을 합쳐 이뤄내야 할 평등주의는 외면하고 개인 차원에서 자식교육 잘 시켜 신분상승 꾀해보자는 식의 평등주의인 것이다. ... 평등주의 정서가 충만해 배가 아파지는 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옆집 사는 누구에게, 또는 먼 친척 중의 누구에게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뿐이다. ... 파편화된 평등주의... 한국인은 동질성과 밀집성으로 인해 강한 평등주의를 갖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건 개인 차원에서만 발휘될 뿐 사회정책 차원에서는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 "(66f)

(강준만, 한국인 코드. 2006)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말똥말똥... 억지로 잠을 청하기 싫어서 거실에 나왔다. 배는 고프고... 만만한 식빵을 뜯어먹고 있다.
논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작 실력도 문제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불확실성의 시대, 불안이 일반화된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대한민국만큼 불안정한 사회가 또 있을까? 도대체 그 이유는 뭘까? 경제 탓일까? 해외의존도가 70%라는? 한국인이 갖는 "경제적 보수성" 혹은 절박성, 생존의 문제...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민생' '민생'하는데... 근거가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상황에 민감하지 않는 지역, 국가가 없겠지만... 대한민국의 위기 의식 정도는 상당히 큰 것 같다. 게다가 사회복지 체계는 취약하기 그지 없잖은가.
"인간 본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사회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사회학적 탐구의 주제가 된다" (로버트 파크, 1921, 사회학과 사회과학)
"문화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훨씬 더 많으며, 더구나 묘한 것은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감춰진 바를 가장 모른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홀, 침묵의 언어, 한길사, 2000, 58쪽)

감춰진 것... 비밀....여백... 침묵...
한국에 대한 분석의 문제는 한국의 사회구조적 복잡성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기술하기 위한 어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국가와 시장", "국가-자본-시민사회" 그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사회를 실제로 분석할 때 '감정'이 가져오는 효과/영향을 고려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정치적 논쟁에 있어서... 현대 정치는 철저하게 이성적 논증, 논쟁의 결과로 이해된다. 적어도 분석 차원에서는 그런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해 간의 갈등, 가치 간의 갈등, 권력 관계 등등. 하지만 실제로 어디 그런가? 여론은 특히 감성적인 언어에 강하게 좌우된다. 현대사회는 '감성'을 무시, 배제하면서 그 틀이 형성되었다(근대화, 기능적 분화...). 합리적이라는 것은 곧 이성적, 이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감성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틀을 갖지 못해서 우리는 감성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체계이론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은 전커뮤니케이션 상태일까?
"인간 존재의 구조적 취약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바로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에서 종교의 유래와 기능을 찾는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존재와 의식의 분열을 재통합하려는 강한 욕구가 있다고 한다. 종교는 이렇게 자기 분열을 안고 사는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에게 '정향의 틀 frame of orientation', 즉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제공하고, 우리가 온 몸과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추구할 궁극적인 '헌신의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분열된 자아가 재통합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통찰은 특정 종교에 관계없이 종교 일반의 기능을 탁월하게 설명한 이론으로 여겨진다."

감추시는 하나님, 십자가 신학 - 루터...

"하나님은 고통과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루터 멋진 걸.... 감추시는 하나님, 십자가... 등으로 연결되는 루터의 신학...  음. 루터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급...


'숨어계신 하나님'과 '오직 믿음' 등과 함께 루터의 신학을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이 십자가의 신학은 이미 종교개혁 초기(1517-1519)에 형성되어 루터의 사상 전반을 지배한다.30) '십자가의 신학'이란 단어가 루터 신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518년 4월에 있었던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였다. 이 때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의 두 개념을 대비하면서 로마 천주교를 향해 자신의 신학을 변증한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광의 신학자는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보다는 업적을,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일반적으로 말해 악보다는 선을 더 좋아한다. 이들은 사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고 부른 사람들이다(빌3:16).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싫어하고 업적과 공적의 영광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부르고 행위의 악을 선이라 부른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고통과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지자들은 십자가는 선이고 업적은 악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업적이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특히 업적으로 훈도받는 옛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가치하며 그의 업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먼저 고통과 악에 의해 자만이 꺾여지고 파괴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선행에 의해 오만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31)  (지원용편,『루터사상의 진수』(서울: 컨콜디아사, 1992, 141쪽)

여기서 말하는 영광의 신학자는 바로 인간의 업적을 중시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나 도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성취, 인간의 제도, 그리고 인간의 신학을 선하다고 본다.32)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신에게 상승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양심은 이런 뜻에서 존중되어 진다. 한때 루터 자신도 영향을 받았던 '유명론'의 명제인 '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자연적 능력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인간 자신의 내부로부터 기인되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채울 수 있다는 상승 지향적 구원도식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러나 루터는 '십자가'를 가지고 이들의 구원도식을 전복시켜 버린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행위없이 그리스도를 많이 믿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감추시는 하나님... Deus Absconditus
그렇게 볼 때 오히려 기독교가 더 잘 보이는 것 아닌가...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오랫 동안, 자주 침묵하셨고, 예수님은 메시아임을 드러내시고 감추시기를 반복했다. 그런 탓에 예수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자주 오해했다. 도대체 바로 옆에 계시는 메시아를 못알아보다니... 라고 비난할 일은 아닌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좀 다른 것 같다. 초대 교회 성도들, 사도들은 그들이 경험한 부활한 그리스도와 성령 체험, 재림 기대 등으로 뜨거울대로 뜨거웠으니까. 바울의 가르침에서 '감추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나? 어쩌면 초대교회 이후는 다시 '감추시는 하나님'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침묵하시는...
조직신학에 비춰보지 않는 성경신학만으로는 기독교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얘기를 이런 주제에 적용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검색 중 발견한 내용...

"우리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요 '감추시는 분'입니다.성경 전반에서 이것을 증거합니다.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진리, 그 분의 영광과 모략과 전략은 감추어져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드러난 것, 보이는 것, 나타난 것에서 그것을 찾고 구하는 형편입니다.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도 영접하지도 못했습니다.제자들도 초기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기독교 윤리?

"기독교 윤리"라는 표현이 뭔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이 '껄적지근함'의 정체가 무엇일까 검색하면서 만난 페친이기도 한 전철 선생의 글. "종교와 윤리의 상호 관계에 대한 고찰". 종교와 윤리를 구분하고,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종교 우위 (2) 윤리 우위 (3) 종교 윤리 동등 (4) 종교 윤리 폐지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와 상대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 에서 형성된다. ... 윤리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영역이다. ... 종교는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서 열리는 영역이다. 반면 윤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서 열리는 영역이다. 그리고 종교가 지극히 실존의 영역에 그의 근거를 두고 있다면, 윤리는 지극히 사회적인 영역에 그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종교가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의 과정에서 전개되는 국면이면, 윤리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구체 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전개되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좀 불편하게 느꼈던 이유를 찾았다. 기독교와 윤리는 다른 차원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도 사회 속의 기독교인 이상 사회적 삶에 대한 규범적 지침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그런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는 윤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 중 하나일테고.
- 기독교 윤리는 세속적 윤리와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예. '여호와증인'의 수혈거부, 징집거부)
-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기독교 윤리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기독교 윤리의 다양성!
- 종교가 사회적 질서를 결정하는 곳이라면 종교 윤리와 세속적 윤리는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중세 유럽)
- 하지만 비록 세속화된 시대에서도 종교적 질서를 가장 높은 차원에 둔다면... 즉, 기독교를 사회의 다른 영역과 분리된 종교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본회퍼...

"본회퍼는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어떤 우열의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로 본다. 그리스도 의 지배 현실이 그저 신앙의 차원, 즉 종교적 영역에서만 의미하는 것이라면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갈 2:21)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본회퍼 또한 바울의 연장선에 서 있다. 본회퍼가 말하는 종교와 윤리의 관계는 윤리가 종교를 향함이 아니라 종교가 윤리의 세계를 향함에서 비로소 그 의미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가 화해하는 것을 발 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사건"과 그의 현실은 종교와 윤리간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윤리를 통합하려는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개별 기독교인의 윤리, 혹은 기독교의 내부 윤리로 제한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아니 종교와 세속 윤리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대개 근본주의로 나타나지 않는가.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기독교....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하나님의 끈질긴 편견‘...  하나님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는 다르다 정확한 균형이 아니라 약자에 좀 더 관심을 ..피해자 중심의 윤리..." (그사람의 그서재, 손봉호, p254)

그렇다. 세속적 윤리와 기독교의 윤리의 기준이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세속의 윤리는 규범적 다양성을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윤리는 그런 세속 윤리를 포함하는 더 통 큰 윤리여야 할 것이다. 세속 윤리도 지키지 못해서 쩔쩔매는 그런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고도 가련하다.

2013년 8월 4일 일요일

옛 친구가 식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찾아오다. 대화가 자주 끊겼다. 오랜만이라서? 식구들과 함께라서? 아니... 우린 원래 그랬다. 안 지 무척 오래되었고, 같이 보낸 시간이 참 많지만... 늘 좀 그랬다. 서로 잘 알지만, 딱 아는 만큼만, 알고 싶은 만큼만 아는 것 같고...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런 것 같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친구는 기회가 있으면 앞으로도 나를 찾을 것이고 나도 그럴 것이다. 일요일 저녁 도서관에 나왔다가 시급한 일에 대해선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 돌아간다. 내일도 또 집안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어영부영 시간 보낼 것 같다. 음. 이래서는 안되는데... 가을 기운이 돌기 전에 많이 해두어야 하는데...

2013년 8월 3일 토요일

<칼의 노래 2권> 명나라 군사가 풍전등화같은 조선을 구하러 짜잔 등장한다. 위급할 때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강대국의 힘을 빌던 나쁜 버릇은 사실 신라가 원조다. 당나라의 힘을 빌지 않은가. 한반도의 권력가들은 유전적으로다가 외세의존증이 있나 보다. 그렇게해서라도 가늘고 길게 살아보려는... 신라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고, 해방 이후에도 남한은 미국에 북학은 소련-러시아-중국에...
어쩌면 강화협상까지 명나라와 일본이 한다. 한국전쟁 후 북한과 유엔군(미군 주도?)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처럼. 에휴. 찌질...  누가 그 후손들 아니랄까봐 지금도 미군에게서 전시작전권을 넘겨받길 두려워하고 있다. 지켜달라고 구걸하는 꼴이라니... 노무현 대통령의 그 일갈 "부끄러운줄 알아야지"가 그래서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사실 지난 수요일에 뭐 대단한 정도로 써낸 것도 아니면서... 그걸 명분으로 삼아 그 후 오늘까지 줄곧 놀았다. 오늘은 거의 일년여만에 영화를 봤고 (설국열차), 심지어 수년만에 소설도 읽었다 (칼의 노래 1부). 설국열차는 나름 재미있었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한 번의 반전은 있어서 그나마 영화가 촌스러움을 면했는데 그 반전에 대한 확신 혹은 만족이 너무 커서인지, 그 메시지를 위해서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그 균형balance를 깨지 않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 같았다. 좀 무겁고, 어둡고, 딱딱하고, 주제의식이 너무 분명하고, 마무리가 급작스럽고... 아쉬움이 남는다. '칼의 노래'도 생각보다 별로였다. 김현의 다른 소설도 읽으려고 시도하다 결국 포기했는데. 이 책은 그것보단 나았다. 짧은 문장, 호흡... 이순신 장군의 상황에 어울리는 문체이긴하나...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소설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별로 제대로, 화끈하게 놀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느낌-감정(feeling) 범주: 外物에 대한 '마음'의 내향적/외향적 반응.
- 앎-지식(knowing) 범주 : 外物에 대한 '머리'의 정보 종합.
- 믿음-신앙(believing) 범주 : 머리와 마음의 종합에 의한 온몸의 의지적 반응.

사실 '감정'도 '지식'도 '신앙'으로 바뀔 수 있어, '감정적 신앙'과 '지식적 신앙'이 구분되며, '머리'와 '마음'의 종합에 의한 온몸의 의지적 반응인 '신앙'은 때로는 지식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화되기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지식'이나 '신앙'으로 체계화된 '학문'이 감정화하는 것은 '미신(迷信)'으로의 전락(轉落)이 될 것이다. 그

런데 신약 성경 로마서(10:9-10)에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마음'의 통로가 되는 '입'의 기능과 '믿음'의 내용 및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까지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 

즉,"네가 만일 네 입(헬, 스토마)으로 예수를 주(즉, 구세주)로 시인(是認, 헬, 호몰로게오)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헬, 카르디아)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 헬, 디카이오쉬네)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救援, 믿음의 결과, 헬, 소테리아)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성/지식(앎)과 감성/감정과의 관계. 감정에 휘둘려서 객관적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도, 이성에 기초한 지식만을 추구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진리는 앎, 느낌을 통해서 드러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감추시는 하나님... 아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하튼 현대사회는 지식만을 강조하는 편인데 (과학) 감성/감정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리프킨은 여러 면에서 선구적인 것 같다. '공감의 시대'
객관주의적 인식론 

계몽주의 이래 교육에서 강조된 인식의 방식 앎의 주체(아는 자)는 앎의 객체(알려지는 것)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가정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앎과 삶 사이에 이원론이 존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지식... 이게 요즘 내가 붙잡고 있는 문제인데... 다른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도대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기나 한 건가? 하나님을 안다는 생각은 자만아닌가? 예를 들어... 9개월된 내 탈이 나를 안다고 얘기할 수 있나? Unsinn... 만약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된, 분명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런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간접적으로만 알 뿐인 그런 지식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종교개혁자들이 보았던 하나님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감추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과 감추시는 하나님의 두 모습이 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은 성경이나 자연을 통해서 계시되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신 분, 감추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어둠과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식에서부터 겸손함이 나오고 열린 마음이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페북에 바쁜 삶을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먹물들... 이걸 싸야하고 저것 마가이 내일이고, 해서 오늘은 밤을 새야한다는둥... 내가 보기에 한 1% 푸념이고 99%는 자기자랑이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바쁜 사람 하나도 부럽지 않거든... 아니... 부러운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있긴하다 ㅠㅠ
1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예외다. 사무실은 거의 찜질방이라 탈출. 탈출수단인 버스, 지하철에서 빵빵하게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오늘은 더할나위 없이 반갑다. 

2
아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다가...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보다. 지상 아버지의 사랑도 막연한데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힌트는... 딸에 대한 사랑. 내리사랑은 좀 더 분명한가! 지상의 내리사랑에서 그리스도의 내리사랑을 유추해볼 수 있을까?
"나, 주님의 사랑에 안기다" (데이비드 베너 지음/ 유정희 옮김/ 생명의말씀사) 중에서...

... 자신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다.” (존 칼빈, 기독교의 원리, 서두)

“심오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보다 겸손히 자신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가는 더 확실한 방법이다.” (토머스 아 캠피스)

“주여, 제가 제 자신을 알아서 주님을 더 알 수 있게 해 주소서”(어거스틴)

기독교의 영성에는 하나님과 자신을 둘 다 깊이 알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자신의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 모두는 기독교 영성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이나 자신을 알아 가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으로 가득할 수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그러하듯 비본질적인 행위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신을 아는 것은 상호의존적이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 그 다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다시 우리자신을 바라봄으로써 - 하나님을 가장 잘 알게 된다.

패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에서 사람들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에 대한 지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갈수록 지식의 체계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고 말한다. “대상이 더 복잡할수록, 그것에 대한 지식도 한층 복잡해진다.” 곁에 있는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아는 것만도 매우 어렵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만일 우리보다 하나님이 이를 더욱 깊이 갈망하시지 않는 다면 정말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는 데에 있다. 때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좀 멀게 느껴질지라도, 성경의 증거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바랄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나, 패커는 “하나님을 조금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변화를 일으키는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아는 데서 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일4:7-8).
사회구조와 비교할 때 의미론은 연속성이 강하다. 의미론은 반드시 사회구조와 조응해야 하나? 어쩌면 의미론적 연속성은 그 나름대고 기능하는 바가 있을 수 있다. 근대 사회구조적 조건이 야기하는 정체서의 파편화, 통합하는 중심의 부재 같은 위기 상황에서 비록 사회구조적 조건의 지원을 못받을 지라도, 그러니까 허구적일지라도 뭔가 연속적이고, 통합적임을 상상하게 해주니까 말이다.
의미론의 기능은 어쩌면 인간사에 필요한 연속성과 모호함을 제공해주는 것 아닐런지...
근대사회에 필요한 복잡성을 강화시켜주는 역할...

„Die Codierung toleriert keine Ambiguitäten, so wenig wie die Autopoiesis des Systems halb stattfinden, halb nicht stattfinden kann. Alle Ambiguität muß daher in die Semantik verlagert werden ... Die Ambiguität entspricht der Stille, die nicht mitspricht wenn man spricht, oder auch der Weiße des Papiers, auf das man schreibt, und sie vertritt im System all das, was an Stelle dieser Leere eigentlich der Fall ist.“ (Luhmann 1990a: 214f.)

루만의 한계는 - 기능적 분화의 관련성 속에서만 논의되는 진지한 의미론에 집중, 대중적 의미론에 대한 관심 적음.

여하튼 사회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1) 사회구조와 의미론의 관계는? 선후관계? 상호적 관계의 구체적 방식 등등.
(2) 그 관계는 현대사회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나?

구체적으로
(1) 사회구조/의미론이 루만 사회이론 전체에서 갖는 의미, 의의. 현 연구 동향. 논점이 되는 부분들.
(2) 이 논문은 이를 소개하는 논문이다. 몇 가지 점을 기준으로
(3) 사회구조/ 의미론이란? 루만의 견해와 이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논점들... 
(4) 핵심 질문과 논점은 사회구조와 의미론의 시간적 선후관계. 
(5) 사회구조/의미론의 부조화의 기능
(6) 등등.

God is kind, but Not soft

메시지 성경, 로마서 2장 '제목'이다. 옥성호의 '갑각류 크리스천'을 읽고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을 한탄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가되는 자료는 성경이다. 성경, 그 중에서도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 중 핵심을 다루는 '로마서'에 떡하니 하나님은 '만만한 분'이 아니라고 나온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좋은 분이라는 말은, 우리 손을 꼭 붙잡고서 우리를 근본적인 삶의 변화 속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일은 다 무엇이든 불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 불이 마침내 뜨겁고 활활 타오를 날, 하나님의 의롭고 불같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길을 거부한다면 데일 수 밖에 없습니다"(9)
이 구절을 통해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었습니까? 이해되는 것과 그것이 내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무엇을 "제대로" 알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옥성호의 메시지였다. 로마서를 읽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가지게 될까? 아니 그 어떤 성경이라도?
내 통장에 10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사실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직접 비교하긴 어렵다. 사실적이지 않은, 손에 잡히지 않는, 오감을 통해서 경험하거나 확인하기 힘든 대상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사랑'같은 것도 그렇다. 예를 들어 "A가 B를 사랑한다"는 정보가 이 A와 B의 삶을 바꾸는 지식이 되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계기들이 필요하다. 감성적 이해라고 할까... 감정으로 이해한다. 표현이 좀 모순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저 성경에 쓰인 바, 신뢰할만한 신학자가 쓴 책의 구절, 논리적 정합성 (신 존재 증명 같은...) 그것으로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