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지멜? 짐멜?
ps1) 헌데 상표 이름 'Tommy Hilfiger'를 '타미 힐피거'로 표기하는 걸 보고선 좀 당황했다. '타미'라... 미국상표고 미국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흠. 쉽지 않다.
ps2) 아마 고유명사 표기 원칙은 "고유명사의 출신국가에서 발음되는대로 가깝게...".. 대략 그렇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Ronaldo도가 호나우도가 되었고... 어쩌면 난 그게 불편한 모양이다. 독일어, 영어를 떠나서 가능하면 a -> ㅏ, o -> ㅗ 등으로 일관되게 표기하는 게 옳은 것 같다. 독일어 발음은 우연히 그런 표기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고.(...) 아니, 그것도 쉽지 않은게 영어권 이름 Jane을 '자네'라고 표기할 순 없는 것 아닌가?
ps3) '원칙적'으로 고유명사는 말 그대로 고유한 것, 유일한 것이니 발음과 표기도 '가능한' 그 고유성을 최대한 지켜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각 언어권에서는 그 나름대로 - 고유하게 - 외래 명사를 읽는 방식을 정할 수 있고 또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두 원칙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 예컨대 미국에선 그네들이 읽는 방식을 좇아 Max Weber를 [막스 웨버]로 부를 수도 있고, 우리가 W -> [ㅇ]으로 표기하기로 했다면 '웨버'로 적을 수 있는 문제다. 내 경우 Kwang-Jin이 독일에서 '크방인'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 그렇게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몇몇 한국인은 이런 내 '행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Kwang-Jin은 이미 '광진'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담... Simmel을 '지멜'로 표기할 수도 있단 말인가? 아니! 이 경우엔 'm'이 두 개니까 '짐멜'로 쓰는 게 한국식 라틴알파벳 읽는 습관에 비추어 볼 때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결론: 혹 미국에서 Simmel을 [지멜]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한국어로는 어찌되었건 '짐멜'이어야 한다.
ps4) 잠실 루터회관에 루터 상이 있는데 한글로 '말틴 루터'라고 써 놓은 걸 확인했다. Marx를 맑스로, Martin을 말틴으로 쓰는 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맑스'만큼 자부 보지 않아서인지 어색하다. 왜 이 경우엔 '마르틴' 혹은 '마틴'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지? 도대체 내 원칙은 뭔가? 내게 익숙한 것? -_- '
그러다 맑스'란 표기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발견했다.
대단히 비정상적인 표기입니다. 우리말에서 ㄺ 받침이 있을 때 뒤에 모음이 오면 (예를 들어 '맑은'에서 처럼) ㄹ과 ㄱ 발음이 다 나지만 뒤에 자음이 오면 ('맑다') ㄹ을 발음하지 않습니다. Marx는 발음이 [marks]인데 자음이 세 개가 연이어 있지요. 우리 말에서는 그런 경우는 없기때문에 중간에 ㅡ(으) 모음을 넣지요. 따라서 말크스나 마릌스, 마르크스는 가능해도 맑스는 불가능한 표기법입니다. 그런데 말크스는 r 발음이 나지 않고 l 발음이 나기때문에 원음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쓰이지 않지요. 마릌스 역시 '릌'자가 생소하기 때문에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표기는 당연히 마르크스여야 겠지요. Marx를 영어식으로 발음할 때는 물론 r 발음이 혀를 마는 정도로만 발음이 되지만 그렇다고 맑스라고 쓸 수 없는 것은 우리말에는 그런 발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의 ㄹ은 r 또는 l 의 음가를 갖지만 ㄺ에서의 ㄹ은 소리날 때 항상 l 의 음가만을 갖습니다. 비슷한 예로 독일 화폐 단위는 Mark인데 이것을 '맑'이라고 쓰는 경우는 없지요. 흠... 어렵다. 국립국어원은 '맑스'가 아닌 '마르크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실제 원어 발음은 '칼 막스'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가 맞다. x를 '크스'라고 쓰기 때문이다."
ps5) 'enjoy'를 '엔조이'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실수도 아니고 원어민 발음을 몰랐기 때문도 아니라 스스로세운 표기 원칙에 따른 것 같은데... (김용옥). (왜 '즐기다' 등으로 표현하지 않고 굳이 '엔조이'라는 표현을 가져다 쓰는 지는 논외). 어떤 원칙일까? 그가 일본어, 중국어에 관해선 아내와 함께 CK-표기법을 만든 건 알고 있는데, 그 밖 외국어를 표기하는 것에 대해선 어떤지... CK표기법의 원칙을 '원음주의'라고 하던데 "enjoy"를 "엔조이"로 쓰는 건 그 원칙을 따르는 게 아니잖은가?
ps6) 이참에 '공식' 외래어 표기법을 찾아 보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 동안 고민한 사람들이 분명한 원칙을 마련해 둔 걸 확인했고 앞으로 그 원칙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표기의 기본 원칙"으로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항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제3항에 따르면 '맑스'로는 쓸 수가 없다.
또, 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언어별로 다르게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인 Luther, Martin는 "루터, 마르틴"이지만 미국인 "King, Martin Luther Jr."는 "킹, 마틴 루서"다.
ps7) 조관희 교수의 글 중에서...[중국어 한글표기법 논의를 바라보는 한 시각]. "필자가 중국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면 누구나 필자를 “조관희”가 아니라 “자오콴시(趙寬熙)”라 부른다. 하지만 고유명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둘이 아닌 오직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에 붙이는 이름일진대, ‘조관희’는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조관희’일 따름일 뿐, 그 어떤 별도의 독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중국인들만이 나의 이름을 ‘자오콴시’라 부 르고 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더 이상 ‘서울’이 ‘한청(漢城)’이 아닌 ‘서우얼(首爾)’이듯, 나의 이름도 ‘자오콴시’가 아닌 ‘조관희’일 따름이다.” 흠...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독일인들이 내 이름을 "크방인"이라고 부를 때 가능한 그들 발음을 교정했어야 했나? 흠... 다음 말도 일리가 있다. "결국 이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찾을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변화의 한 사례로 우리는 모택동에서 등소평 또는 덩샤오핑을 거쳐 쟝쩌민과 후진타오에 이르는 하나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毛澤東’은 ‘마오쩌둥’이라는 명칭보다는 ‘모택동’ 쪽이 더 친숙한데 반해, ‘鄧小平’의 경우는 ‘등소평’이나 ‘덩샤오핑’ 모두 익숙하다. ‘江澤民’의 경우도 ‘鄧小平’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胡錦濤’에 이르면 상황은 그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미 ‘胡錦濤’는 ‘후진타오’가 익숙하지 ‘호금도’라는 ‘소리’는 아주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음주의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현실은 이미 원음 그대로 읽는 것이 하나의 대세로 굳어가도 있다는 것이다."
ps8) 이 글에 ps를 계속 달면서 정리하고 있는 중인데, 물론 전문가들이 애써서 만들어 놓은 '외래어표기법'을 존중하는 게 옳을 것이다. 쓸만하기만 하다면... 기본적으로 '원음주의'를 원칙으로 삼으면서 각 언어권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을 구분해서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은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헛점 투성이다. Luther를 독일어권 이름인 경우 '루터', 영어권 이름은 '루서'로 하도록 한 모양인데, 왜 그런 이해할만한 규정이 'mm' 같은 복자음엔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Simmel이나 Zimmermann을 '지멜'이나 '치머만'으로 쓰게 되어 있는 건 무슨 속인지 원... (글자 중간에 있는 복자음은 하나만 인정한다! 뭐 그런 원칙인가? 헐... ) 재미있는 건 Zimmermann의 'Zi-'를 '치'로 쓰는 것. 왜? 차라리 '지머만'이라고 하지? Weber도 '웨버'라고 하고! 맑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함부억' '함부릌' '함부륵'이 아니라 '함부르크'로 쓰게 하는 건 이해할만한데 왜 '지멜', '치머만'?
ps9) Simmel을 '지멜'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동지'를 만났다 (여기). 최근에 출간된 '화폐 인문학'을 소개하면서 이 블로그 주인은 이렇게 써 놓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 역자가 짐멜 Simmel을 지멜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짧은 언급에 달린 댓글이 또 재미있다.
동수 2010-12-29 11:48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지멜(O), 짐멜(X)" 입니다. http://www.korean.go.kr/09_new/dic/rule/rule_foreign.jsp
faai 2011-01-04 09:36
'에 따르면'은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영어 'according to'를 일본어로 번역한 후, 이를 우리말로 직역한 표현이라 합니다. 한문 투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 speller.cs.pusan.ac.kr
ps9) 아마 마지막 부기가 될 듯. 내 나름 결론을 내렸으니. 독일어에서 자음이 중복되는 경우라고 항상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헤아려 보니 'mm' 과 'nn'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걸 인정하지 않으니 Simmel은 지멜, Immanuel Kant는 이마누엘 칸트, Anna는 아나, Emma는 에나, Zimmerman은 침머만이 되어야 옳은 것이다. 참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 그죠? 외래어 표기법을 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같은 자음이 겹쳤을 때에는 겹치지 않은 경우와 같이 적는다. 다만, -mm-, -nn-의 경우는 ‘ㅁㅁ’, ‘ㄴㄴ’으로 적는다." 캬. 그럼 게임 끝인가? 모두 이 구절을 몰랐단 말인가? No! 왜냐하면 위 내용은 이태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이어 표기법에서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스웨덴어 이름 'Bromma'는 '브롬마'라고 예까지 들어 주고 있다. 왜 이런 내용이 독일어 발음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참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상한 규정때문에 칸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무슨 호부호형 못하던 홍길동도 아니고, 참...
ps10) 약간의 충격..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지금까지 독일어 발음을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음이 중복될 때는 단자음과 음가가 같지만 앞의 모음이 짧은음이 됩니다.
ⓐ ff [f] : hoffen [h f n] (= to hope)
ⓑ ll [l] : Brille [bril ] (= glasses)
ⓒ mm [m] : kommen [k m n] (= to come)
ⓓ nn [n] : nennen [nέn n] (= to call) (...) "
"Double consonants (FF, LL, MM, NN, PP, RR, TT, rarely BB, DD, GG, KK, WW, ZZ) are always pronounced as one. They indicate that the preceding vowel is short. The only exception to this rule is SS."
독일어 발음이 병기되어 있는 사전을 찾아 보니 역시 같은 내용이다. 정말 그런가? 믿기 힘들다... 칸트의 이름은 이마누엘이고, 고전 사회학자는 지멜이었나? 잘못된 언어 습관, 선입견이 그동안 엉뚱하게 듣게 한 걸까? 흠...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영성=사랑=관심
어짜피 가용 에너지와 처리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니 "영성=사랑=관심"의 일에 투자하려면 다른 쪽에 쏠리는 에너지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단순하고도 느리게 살 필요가 있는 것. 우리 관심을 끌어 당기는 정보를 제한하고 -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 -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어떤 일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지, 왜 무관심한지... 습과화된 관심, 자기애, 가족애를 비우고 습관, 자기, 가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타자 - 사람, 자연, 사물, 등등 -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습관을 거스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할 범인들은 아마 평생을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안절부절하며 보낼 것이다. 그런 일로 안절부절 할 수 있기만 해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다.
이사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서예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지나치거나 또는 모자라거나
오늘 점심은 '통영굴밥'집. 이 식당은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편이다. 들어설 때는 서너번에 한 번쯤, 나설 땐 거의 듣지 못한다. 오늘은 계산하고 나설 때까지 음성을 이용한 의사소통이 전혀 없었다. 다들 묵언수행이라도 하시는지, 집단적으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영적 훈련이라고 하는지 인사를 너무 아낀다. 손님과 직원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너무 한다싶어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내 의사를 표시하려고 한다.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사실은 더 심한 집도 겪어봤다. 근처 분식집. 주인이거나 혹은 주인의 딸처럼 보이는 젊은 아가씨는 김밥을 썰다가 들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바로 시선 외면... 예상했던 대로 그 집을 나설 때 어떤 인사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뒤로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음식의 질, 맛, 청결 이런 걸 떠나서 손님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에 무지한 식당은 그렇게라도 '응징'해야 한다.
한국생활이 '재미'있는 건 그 반대 경우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우리은행의 경비 겸 안내 담당인듯한 젊은 청년.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손님이 '입장'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문제는 조용한 은행 안이 그 때마다 쩌렁쩌렁 울린다는 것. 또 대형마트에 들어설 때마다 깊숙하게 숙여서 건네는 인사를 받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들어서는 손님 대부분은 무슨 인사기계나 투명인간을 보는 듯 무시한다. 그렇게 인사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처사다. 그런 대형마트는 어떻게 '응징'하지?
인사커뮤니케이션의 이런 모자람과 과도함의 공존엔 우연이나 개인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언제가 전화 통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어 커뮤니케이션에 인사 문화 혹은 인사 코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이 아닐런지. 특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에 대해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공공영역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조정 메카니즘이 부실해 보이는 것이다. 예절, 문화, 코드... 뭐라고 이름 붙이든. 식당이나 지하철서 같은 데서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를 나무랐다간 그 부모로부터 이런 얘긴 듣기 십상이다. "당신이 뭔데, 남의 애한데..."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또 재미있는 현상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의사소통 코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친족이나 직장, 학교 등 조직에 속한 사람들기리 언어 예절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위계적이고 사람들은 세밀한 표현 차이를 기가막힐 정도로 잘 포착해 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직계 가족간의 관계에선 갈수록 자유분방해져서 반말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참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ps)아래 영성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자꾸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특히 '응징' 운운하는 태도가 과연 '영성'과 어울리는 지에 대해서... 영성의 본질을 '사랑의 각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식당을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거나 나올 때면 "덕분에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인사를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랑의 마음을 담아 건넨다던지... 상상만해도 닭살 돋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과연 그게 대안일까?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영성을 돌 볼 시간 아니 마음이 없는 현대인. 종교성은?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잠 못 드는 밤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자이언트' 종영

ps) '다행히' 예보와 다르게 눈도 내리지 않는 날에 신문 기사 몇 개 챙겨보다가,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시로 떠 오르는 그런 기사들 때문에 괜히 욱해서 그만...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표현이 거칠어지고 직선적이게 된다. 지성의 정수가 '유머'라면 감성 혹은 삶의 태도의 경우에서도 켜켜이 쌓인 내공은 유머, 해학으로 피어 날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는 그래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오고 가는 표현들이 거칠고 직선적이라면 그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 게으르게 비쳐졌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달랐을 터. 우린 좀 더 잘 살게 되었고 대신 웃음을 잃었다. 독일 사람들도 유머와 거리가 먼 편인데 이는 아마 날씨 탓일 것이다. 남부유럽인들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영국 날씨도 나쁘기로 유명한데 왜 브리티시 유머는 유명한 걸... 세계제국을 경영해 본 이들, 가져 본 자들의 여유인가?
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過恭非禮 혹은 過猶不及

ps) 음. 최근 쓴 글 내용이 좀 어둡다. 심리상태, 무의식 탓일까? 2010년 12월이 코 앞에 와 있어서 그럴까? "좋은 지성은 유머여야만 한다"라는 소리가 저 밑에서 들리는 듯...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재벌가 2세, 50대 남 야구방망이 폭행 논란
MBC 2580 “최철원 M&M 전 대표, 때리고 2천만원 매값 줘”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think, thank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미움, 사랑
Schlegel, F. (1980) [1799] Lucinde. Werke in zwei Banden, Vol. 2. Berlin, Aufbau Verlag (p. 74)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이별노래 (정호승 시, 이동원 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ps)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는 날... 이별하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
매우 흥미롭게 읽은 주장이다. 무엇보다 "individualization without individualism"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이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근대의 구조와 의미론(문화)을 구분하는 루만 도식을 따르자면 구조적 근대화가 문화적 근대화에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윗 논문의 저자는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여성의 개인화'를 설명하지만, 난 오히려윗 논문의 테제를 매우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가져오는 게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2010년 11월 1일 월요일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신이 도와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다. 단점을 간과한 이상, 성공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박동희 칼럼 중)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990)
최근 "1박2일"에 소개되어서 큰 방향을 일으키고 있는 옛노래. 박주연 작사, 조용필 작곡. 1990년에 발매된 12집에 실렸단다. 용필 형님 노래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작곡 실력도 상당하심. 여러 버전이 이미 유툽에 올라와 있으나 윗 라이브 영상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심 누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적 영상일까...
다중 근대성, 중층 근대성 논의의 한계
English/ modernity/ globalization
"아시안 잉글리시" (리처드 파월, 푸른숲, 2010)
"지은이는 영국 출신의 법학자 겸 언어학자다. <아시안 잉글리시>는 25년째 아시아에 살면서 이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그의 눈에 비친 ‘영어 풍경’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은(아시아인들)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지요?”라고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영어는 싱글리시, 타이글리시, 콩글리시 같은 현지 영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영어는 문법과 어순이 어긋나고, 근거 없는 단어의 조합도 많지만 현지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한 대출회사는 ‘貸(대) me more’란 이상한 광고를 냈는데, 데미 무어를 연상한 중국인들에겐 그만한 광고가 없다. 자동차 핸들(handle)이란 표현을 영어권(steering wheel)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선 일상용어다. ‘Let’to go for steamboat’(증기선 타러 가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선스튜 먹으러 가자는 표현이다. 그 나라 문화를 수혈받아 적응하고 변형된 ‘다른 영어’를 ‘틀린 영어’로 부를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한국에서 핸들이란 단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원어민’의 문제이지, 한국 사람들 탓은 아니다. 영어권에선 거꾸로 아시아와 소통하기 위해 아시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도 없는 원어민 영어나 표준 영어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에 있지,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익숙한 명제와 함께."
p.s. 1) 당연히 번역서일 거라는 생각에 원전을 찾으려 '구글'해보았더니 왠걸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저작 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 "2009 (forthcoming): English in Asia, Asia in English. Seoul: Prounsoop" 물론 번역을 하긴 했겠지만 '푸른숲'이 기획해서 한글로 처음 출간된 책인 듯하다. 한국 출판계가 이런 '짓'도 하다니. 사실이라면 참 기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옆에 있다면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 ㅎㅎ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운동의 2원칙: 힘 빼기, 핵심 동작 발견하기
물 속에서 속도를 내어 실제로 수영 실력을 쌓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태가 최적일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의 중심축을 몸의 진행방향에 맞추는 일이고 그 축이 좌우나 상하로 움직이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이 내 몸을 타고서 흐를 때 편안하도록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머리다. 크롤영법('자유형')의 경우 고개를 최대한 안쪽으로 당겨서 시선이 바닥 정면이나 다리 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머리와 고개를 잇는 축이 직선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선 몸을 최대한 수면 가까이 그리고 수평으로 유지하는 게 낫다..
요약하자면 (1) 힘빼기 (2) 물 속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원칙을 발견할 것!
이런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운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힘 빼기! 투수들의 경우에도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을 때 오히려 투구내용이 오히려 더 좋다고 자주 얘기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씀!
어쩌면 이런 원리(라면 원리)는 운동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적으로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학문이라고 다르겠는가. 평생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숙하게 대해서는 재미도 없고 또 잘 부러진다.
global (universal)/ local (specific)
어쨌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공존하면서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명공학정책의 형성과정을 보면 그런 갈등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to be continued...
권력과 지식
홉스 형님께서 남긴 말씀이란다. 번역하자면... Autorität, nicht Wahrheit schafft das Recht 혹은 Authority, not truth, makes the law. 매우 현실적인 관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푸코 형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지식을 통해서, 지식은 권력을 통해서.... 규율하는 힘은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루만, 체계간의 관계, 개입...
경제 못지 않게 체계의 자율성과 개입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과학이다. 과학의 자율성, 연구와 학문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이 가져 오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 같은 과학의 힘 증대는 과학 스스로 해낸 게 아니다. 국가, 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젠 과학을 좀 그냥 내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U. Beck). 그런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영역에 대한 사회적 (과학의 사회적 환경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 같다. 역시 문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이 같은 근대화의 상태는 근대성에 대한 이상적, 규범적 담론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혔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근대성들' 같은 낭만적 주장 역시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세계사회의 내적 수렴이 대세인 것 같고, 국가간 지역간 차이는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 정도로 이해되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내 놓을 대안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우리 시대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등을 얘기하는 사회이론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현실인데도...
사회이론, 거시 사회이론의 분화가 사회학의 대세인 것처럼 얘기하나, 내가 보기엔 '큰' 사회이론들은 대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현상은 세계사회, 세계화라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망함도 힘이 되나?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딛고 올라 설 수 있으니, 어설픈 민망한, 자괴감은 물론 어설픈 슬픔, 분노로는 힘을 낼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다시, 디지털도서관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Across The Universe (Rufus Wainwright)
오늘 '무한도전'을 재미있게 봤다. 녹화분량 걱정 탓인지 '오버'하는 모습이 가끔씩 걸리긴 했지만, 역시 '무도' '김태호'라는 얘길 할 수 있을... 'across universe'가 배경음악 중 하나로 들렸는데 낯선 목소리였다. 인터넷의 힘은 대단해서 마우스 몇 번 누르지 않고서 찾아낼 수 있었다. 원곡의 분위기를 모던한 방식으로 잘 살렸다 (2010년에 듣기에 원곡은 사실 좀 촌스럽거든). 가수는 낯설지만 이 영상은 이 음악이 OST였던 영화 'I am Sam'(2001)이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게 봤었는데 이런 음악이 깔렸던가, 새삼스럽다. Dakota Fanning의 야무진 모습도 기억에 남지만 Sean Penn의 연기력에 한 번 더 놀란 영화... ('Forrest Gump'[1994]의 더스틴 호프만 연기와 비교할 만한...).
ps) '텔레파시' 2편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속편 재미있기 어렵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음. 함께 보던 이들에게 '무도'를 과도하게 '찬양'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2010년 10월 15일 금요일
본격문학/ 대중문학
"(...)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
2010년 10월 7일 목요일
호감, 친구, 소셜 네트워트...
- 프랑크 나우만, 호감의 법칙. (그책, 2009) [원제, Frank Naumann, Die Kunst der Sympathie, 2007]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히 오프라인의 경우에 비해서 친절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편이다. 친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선 뭔가 모를 조급증, 불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친절함을 통해서 주고 받으려는 호감, 그리고 보장받으려는 자존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거다. 나우만씨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호감의 '질'이 드러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난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말씀'. 조선 성리학의 대가 김굉필의 삶을 소개하면서.... (출처)
색깔 (최성원, 1988)
주홍 색깔이 나는 좋아 빨간 색깔 있기에
이 세상 모든 색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파랑 빨강 모두 다 필요 없잖아 오 그럴 수는 없잖아
슬픔이 여기 있었기에 기쁨 또한 여기에
이별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
그 색깔로만 칠하자고 자꾸 너는 우기고
이 색깔만이 좋다고 자꾸 나도 우기네
도화지 모두가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그러면 도화질 찢어야겠네 오 그럴 수는 없잖아
미움이 여기 있었기에 사랑 또한 여기에
웃음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
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들국화' 하면 전인권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들국화 멤버들은 모두 뛰어난 뮤진션들이었다. '비틀즈'처럼... 가슴을 뻥 뚫어주는 폭발적 가창력의 전인권과 빼어난 감성의 소유자 최성원... 이 곡은 1988년에 낸 최성원 독집에 실렸다. 가사는 매우 단순하다. '동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유주의 선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율도, 그리고 노래도 빼어난 편은 아니지만, 가사 때문에 기록해 둔다.
2010년 대한민국의 초상: 디지털 도서관
이 곳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자동문과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유를 친절하게 붙여 노셨다. '에너지 절약'이란다. 정부시책, 어쩌구 저쩌구... 과도하게 럭셔리하게 만들어 놓고선 막상 전기요금이 무서워서 아낀단다. 멍청한... 더 재미있는 건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 안내석 두 곳엔 각 세사람씩, 도합 육인이 - 대부분의 시간 - 앉아 있다. 오고 가며 그들이 앉아서 쳐다 보고 있는 모니터를 훔쳐 보는데 대개 내게도 익숙한 화면들이 떠 있다. 네이버, 다음, 싸이, 페이스 북 등등. 뭐 가끔씩 업무 관련 화면도 뜨겠지만 내 눈을 피해서 업무를 보는지 아직 목격하진 못했다 (아, 아래 층 삼인의 경우 방문객과 마주 보고 있어서 그들이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를 확인할 수 없긴 하다).
우습지 않은가. 전기요금은 아끼면서 그런 잉여 인력을 고용하는 건 무슨 심보인가? 에너지 절약과 실업자 구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기가막힌 묘수인가? 한심한... 화려하다 못해 의리의리한 건물, 애써 만들어 놓고 세워두는 에스컬레이터 (그러다 썩겠다. 가끔씩 기름칠은 해 두시길...), 하루 종일 멍청하게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젊은이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고 꽤 잘 어울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아...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 어니스트 러더포드 Ernest Rutherford
ps) 비슷한 얘길 아인슈타인 버전으로도 들은 것 같은데...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일 듯. 여하튼 정확한 인용이라면 기억해 둘만한다. 참고로 러더포드란 양반은... Ernest Rutherford (1871– 1937) was a British-New Zealand chemist and physicist who became known as the father of nuclear physics.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정보 사회학 주제
재미있는 내용이라 좀 많이 잘라 온다.
"'아저씨’ 열풍이 분다.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트위터 붐의 한 축에는 중장년 트위터리언(트위터 사용자)들이 버티고 있다. 지금껏 젊은층들의 전유물로만 받아들여졌던 온라인 무대에 한손에는 노트북, 한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아저씨 아줌마들이 상륙하기 시작한 것. 지난해 ‘코리언클릭 데이터’에서 한달 동안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트위터 사용자들 중 35살 이상 중장년층들의 비율이 24.3%로, 이는 인터넷을 왕성하게 활용하는 19살에서 34살 청년층들의 비율인 25.8%와 맞먹는 수치다. 올해 트위터 이용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중년층의 이용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시사주간지 〈시사IN〉의 기자이자, 유명 트위터리언인 고재열(@dogsul)씨는 중년들이 마침내 자신들에게 맞는 온라인 서비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싸이월드나 블로그, 미투데이 등 지금까지 한국의 개인 미디어 서비스들은 10대, 20대들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중장년층들에게 그런 서비스들이 자신들은 입장할 수 없는 클럽처럼 받아들여졌다면, 30대 사용자들이 터를 닦은 트위터 서비스는 소주방처럼 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라는 것이 고씨의 견해다.
트위터가 소통에 목마름을 느끼는 한국의 중장년층을 위한 새로운 대안매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언론학자인 이창현 교수(국민대·@wedia82)는 중년층의 트위터 이용 증가에 대해 “중년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긴밀한 소통의 욕구가 해소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안매체로서 트위터를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49살의 연구소 직원 박사종(@parksajong)씨는 트위터에 빠져드는 이유를 외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바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제 서로 공유하는 게 없어 얘기할 게 없고, 그래서 자기 푸념 겸해서 빠지는 게 아닐까요.”
기업인 전하진(52·@hajinJ·전 한글과컴퓨터 대표)씨에게 트위터는 소통의 도구이다. “젊은 기업인들의 권유로 트위터를 하게 됐는데 마치 넓은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는 점이 좋은 점이죠.” 회사원 이영섭(40·@sanddara)씨도 “일보다는 보다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는 게 트위트하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은 트위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세대들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고재열씨는 “트위터 사용자들은 이전에 사용해본 적이 있는 인터넷 서비스의 사용 패턴을 트위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10~20대들은 트위터를 마치 메신저처럼 사용한다. 반면 사이버 공간에 제2의 자아를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은 인터넷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라고 말한다 (...)".
이런 기사도 있다: "SNS 선호도, 20대 싸이월드 · 30대 트위터 · 40대 블로그 선호한다"
"디지털 미디어 컨버전스 기업 DMC미디어(대표: 이준희)는 19일 전국 1천 3백 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SNS 사용자 의식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20대는 총 44.6%가 싸이월드를 가장 선호한다고 응답한 반면, 타 연령대에 비해 블로그 및 카페 선호율이 낮게 나타났다.
트위터를 가장 많이 선호하는 연령대는 30대로 총 24.9%가 트위터를 선호한다고 응답해 싸이월드를 선호하는 26.7%와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반면, 40대는 블로그 사용률 38.3%, 카페 선호율 20%로 타 연령대에 비해 높았다.
또한 트위터 선호율이 21.7%를 기록, 20대보다 트위터에 대한 높은 선호율을 나타내 트위터를 사용하는 연령대는 30대~40대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다. 아래에서 facebook 담론이 관습화된 진보인 것 같다는 얘길 했지만, 사실 그런 양태는 특정 연령층에 한정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 표현으로 '486세대' 혹은 '7080'세대라고 지칭할 수 있을... 내가 오래 전부터 주장하는 - 매우 상식적인 - 테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진화다. 정보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왠일인지 별로 들리지 않는다. 가끔씩 만나는 논문들은 너무 딱딱하고... 이런 건 통계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참여관찰, ethnography 같은 게 좋을텐데... 과연 이런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볼 수 있을런지...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한국에서 진보적이기...
다시 말 해 한국에서 진보적이긴 어렵지 않지만, 아니 진보적으로 해석되는 발언을 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그게 어떤 진보인가, 과연 진보인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 몰상식에 대한 관습화된 비판은 착한 시민과 착한 사회, 그리고 적절한 여유와 문화를 즐기는 교양있는 중산층 문화의 확대... facebook의 담론은 대부분 그런 수준에서 재생산되는 것 같다. [아, 물론 내가 딱히 진보적이란 건 아니다. 나야 말로 방금 기술한 그런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아닌가.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요지는... 성찰을 요구하는 그런 담론을 한 번 까칠한 시선으로 딴지걸어보자는 것].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갈팡질팡 정체성 혼란에 빠졌던 '민주화' 세대. 민주화 같은 뚜렷한 공동 목적을 잃고, 진보적 담론의 일부를 '정권'이 가져간 상황에서 - 예를 들어, 참여라는 가치. 이름부터 떡하니 참여정부로 짓지 않았던가? - 선명한 대립 전선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던 그런 세력/담론에 멩박씨는 참 구원자였다. 내가 자주 강조하지만 멩박 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한국 우파들의 수준(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낸 데 있지만, 현재적 시각으로 보면 '민주' 정권을 지지하기도 비난만하기에도 어정쩡해 하던 이들을 다시 반정부 전선으로 결집시켜 준 데서 찾을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천박하고도 몰상식한 무리들이 득세한 결과로... thanks to 2mb... 한국에서 진보적이기, 권력에 비판적이기... 참 쉽다.
2010년 9월 11일 토요일
"연예 사회학"의 한 주제...: 인터넷, 네티즌 수사대, 집단지성(?) 그리고 투명성
하지만 워낙 근대적 합리성, 체계 합리성이 아직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토양이라 - 이 말은 곧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서 결정되는 상황이 많다는 말씀 - , 우후죽순 흘러 넘치는 정보, 담론의 덩어리들, 그것들을 들춰내서 유통시키는 활동이 이 반가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눈감아주고, 감춰주던 그들의 네트워크의 작동 메카니즘에 상당한 손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비이성적, 유사파시즘적 대중, 우중이 될 위험성도 있고, 그 네트워크에 의해서 '대중주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고..
결론 내리는 일은 좀 미뤄두기로 하자. 가능성을 보자면 어느 쪽으로건 열려있고, 현재 상황을 진단하려면 경험연구의 시선으로 더 추적해 보아야 할 것 같으니까.
난 twitter, facebook, google, Apple 따위의 새로운 미디어나 그 언저리에서 잘 나가는 행위자들이 세상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처럼 떠벌리는 그런 담론에 아주 진저리를 치는 편이다. 기술 결정론... 생명과학, 생명공학의 영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이오텍 센츄리"(biotech century), biological 혹은 genetic citizenship/ bionationalism 등을 얘기하고...
어제 참석했던 학술모임에서는 '지리 결정론' '공간 결정론'적 진술을 지겹도록 들었다. spatial turn.. 운운하는...
무슨 'turn'이 그렇게 많은지.
한 두 가지 개념, 주제로 세상을 다시 재단하고 재편하려는 시도가 다양하다는 것, 그런 다양성이 바로 현대성의 징후다.
2010년 9월 8일 수요일
2010년 9월 4일 토요일
9월, 아직 여름...
태풍이 지난 자리를 '급' 차지할 줄 알았던 가을 바람이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다. 다행이다... 아직 새 계절을 맞을 준비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거겠지. 달력을 보거나 날짜 확인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심지어 머지 않아 추석이다. 딱 1년이다. 추석 때 들어왔으니...
내 상태와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명절은 꼬박 꼬박 돌아오고...
암, 그래야지. 그래야 자연이고 역사고....
2010년 8월 27일 금요일
선택... 재미...
- 김정운 -
ps)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래서 재미 좀 보고 있나, 그대?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facebook 관람기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한국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피상적 예절 교육, 피상적 교양, 피상적 읽기...
(...)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동행하게 될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깊이 읽기’가 아니라 ‘피상적인 읽기’다. 더 깊이 읽는 건 각자의 몫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거는 ‘마술’은 피상적인 읽기와 조우를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을까. 당신도 궁금해하면 좋겠다. 이제 다음 회부터는 걸음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옮겨놓도록 하겠다.
2010년 8월 7일 토요일
obstacle épistémologique?
and obsessed by a sense of victimization.
Enjoying a mood of tragedy
Drawn somehow to conspiracy theories.
Distrusting local discussions
and believing that macro-theories will explain all.
These are the obstacles
that the intellectuals of this land have to overcome.
- 조한혜정 -
ps) 영어로 번역된 논문 앞 쪽에 실려서 무슨 詩인가 했더니... 공감한다. more than before...
2010년 8월 5일 목요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박새별)
대단한 날씨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란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뜨거운 김이 나는 찜통 속에 들어 있는 그런 기분..
지하철에서 내려 걷는다. 땀이 좀 흘러 내려도 그냥 놔둔다. 쿨하게... 조금만 참으면, 저 건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금새 식힐 수 있을 테니...
시원한 건 건물 속 공기만은 아닌지 이런 청승맞은 노래가 '땡긴다'. 박새별이라... 누군가 했더니, 유희열이 발굴했다는 그...
노래를 맛깔나게 잘 부른다. 광석이 형 색깔이 강한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기 노래로 만들었음. 특히 고음 부분이 듣기 좋다. 연주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좋고.
p.s.) 나만 좋게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 노래에 대한 일종의 '뒷담화'를 발견해서 덧붙여 놓는다.
"작년 이맘때쯤 시대의 가객 김광석 다시부르기 특집에서 싱어송라이터 박새별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이다. 공연 당시 모든 관객들은 숨을 죽였고 한켠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박새별의 이 노래는 가슴에 남아 눈가를 축축하게 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박새별이 난장MC의 적임자라는 판단으로 그녀를 마냥 꼬드겼고...".
2010년 8월 2일 월요일
2010년 7월 31일 토요일
학습효과? 설마...
일부만 옮겨 놓으면
" ... 이 대통령이 매년 며칠 간의 휴가를 떠나긴 했지만 청와대는 항상 "휴가지에서도 일을 챙길 것이다", "이러이러한 지시사항을 내려놓고 갔다"고 부연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단서도 없을 뿐더러 이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들이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하라"고 수차례 강조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근대성, 주변부의 경우
Modernität)을 꼽겠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근대성은 - 동어반복인가? 근대 이후로 확산되는 근대성? 근대 이전에도 근대성이 발견되는가? 물론 이 모든 건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그렇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유럽에서 시작되어 유럽 밖으로 확산되었고 이제 지구 전체를 지배하다시피하고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미국얘들이 좀 서운할 수도 있겠다. 뭐, 베네틱트 앤더슨이 얘기하는 'imagined community'로서 근대국가는 결국 미국의 전형적인 모델이니 어쩌니 하는 논의도 있는 것 같은데... 좋다. 어쨌든 근대성의 뿌리는 유럽이지만 미국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유럽의 근대성이란 것도 비유럽의 존재와 비유럽과의 교류를 빼고선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고려한다면, 유럽이 근대성의 연원인 것 분명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창작품이 아니란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분노유발자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2010년 장마, 잠실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 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에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 가는구나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훠이훠얼
빨간 신호등에 멈쳐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길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훠이훠얼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2010년 6월 8일 화요일
Cucurrucucú Paloma ([1965] 2002) Caetano Veloso
그렇지. 아직 더운 열기가 남아 있는 한여름 저녁에 어울릴만한 그런 노래... (이미 올린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Hable con ella, 2002)의 한 장면.
교외 '별장 feel' 을 풍기는 저택에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감상을 하고 있다. 가수라기 보단 노래 잘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이의 노래를... 이 장면은 영화 중에서 남자가 코마상태에 빠진 여친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사실 이 노래에 feel이 꽂힌 감독이 애써 삽입한 거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무척 평범해 보이는 남자 배우의 눈물 흘리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영화엔 그 밖에 '무용' '그림' '무성영화' 등등 '먹물' 냄새를 풍기려고 작정한 듯한 여러 에피소드를 끼워 넣었는데, 그래도 솜씨가 좋아서 과하다 싶진 않았다.
'투우' 얘기도 나오니 스페인의 '임권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본 영환 대개 '향토색'이 짙었다. 이런 명화를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는 날이 곧 '다시' 오겠지 ㅠ ㅠ 아니, 올까?
ps) 원래 1965년에 동명 영화 주제가로 발표된 노래인데, 그 원곡을 유투브 검색하다 우연히 듣게 되었다. 꽤나 밝은 톤으로 너무도 가벼웠다. 리메이크의 힘!
2010년 6월 4일 금요일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민주당, 한명숙...
[아침햇발] 김상곤과 한명숙 / 정남기
민심은 역시 무서웠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야권조차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덕분에 민주당은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진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 규모 선거에서 완승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 선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관전 포인트도 여러가지다. 사상 최대 규모라는 것에서부터 북풍과 노풍의 정면대결, 전국적인 교육감 선거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예전보다 훨씬 높아진 투표율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대상은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한명숙 전 총리 두 사람이다. 한 전 총리는 정권심판론의 대표 주자, 김 교육감은 최대 이슈인 무상급식의 아이콘으로서 사실상 범야권의 간판스타였다.
김 교육감의 압승은 여론조사 결과 일찌감치 예상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가 주도한 전면 무상급식 정책이 범야권의 최대 공약으로 선거 국면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등 진보적인 교육감을 대거 당선시킨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 교육감의 교육개혁 방식은 남다른 점이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중적인 견제와 이념공세를 받았지만 불필요한 충돌이나 논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가 ‘천안함’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대신 그는 교육개혁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판교 보평초등학교, 고양 덕양중학교 등 혁신학교들이 그것이다. 그가 취임 한해 만에 학부모들의 호응과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무상급식 정책은 야권을 넘어 여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작은 개혁이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는 그 반대다. 애초 예상보다 선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서울시장 자리를 놓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또 25개 구 가운데 21곳을 휩쓴 민주당이 정작 서울시장을 내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잘했다는 아전인수식 평가나 패배의 원인을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군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후보 개인의 경쟁력이 약했다. 그는 선거기간 내내 ‘정권심판’과 ‘무상급식’만 앵무새처럼 외쳤을 뿐 자기가 왜 서울시장이 돼야 하는지, 시장으로서 비전과 목표는 무엇인지,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했다. 시정 업무에 대해서도 알맹이 없는 부실한 발언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문화방송> 주최 토론회에서는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 두 사람이 토론을 주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 한 후보는 정권심판론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선거전략의 정점에 있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저절로 바람이 일어 정권심판론으로 이어지리라는 안이한 선거전략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때문에 공천 개혁도 없었고, 제대로 경선도 치르지 않았다. 또 텔레비전 토론은 회피 전략으로 일관했다. 애초 선거 전략과 구도가 잘못 짜인 탓이다.
이번 선거를 민주당이나 야권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이 꺼려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권자가 오만과 독주로 치달을 때 이를 스스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자동제어장치라고나 할까? 민주당이 민심을 움직인 게 아니라 민심이 먼저 움직여 민주당을 다시 정치무대의 전면에 올려세운 것이다.
수능재주(水能載舟), 역능복주(亦能覆舟)라는 말이 있다. 권력은 배, 민심은 물과 같으며, 물살을 거스르면 배가 뒤집어진다는 얘기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선거에서 진 여당만의 몫은 아니다. 야당 역시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찾아 새겨야 한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아깝다. 한명숙...
2010년 5월 28일 금요일
날씨: 맑음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일기...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숙제...
2010년 5월 6일 목요일
신뢰, 프레임, 상식...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전쟁에 굶주린 개들
오늘자 동아일보 "실효성 있는 ‘단호한 대응’이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사설 중 일부다. 달리 '조중동'이겠는가마는 요즘 동네 방네 짖어대는 이 개들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뭐 방송도 다를 바 없고. 그런데 요새 그 개 무리의 '어르신들'이 왜 안 보이는지 궁금하다. 무슨 전우회, 반공연합, 어버이연합 등등... 저런 노골적인 발언은 원래 그 분들 몫이고 그래야 언론이라는 조중동은 좀 화장을 하고 나섰던 것 같은데... 그 분들이 나서지 않으니 오늘의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가카'께서 - '가카'는 '각하'를 잘못 쓴 단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다. 지네들끼린 vip라고도 하던데... 어찌그리 '시종일관' 촌스러운지... 또, 국민을 섬긴대매..말이나 못하면.... - 옥좌에 오르신 이후에야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얼마나 배부른 고민을 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10년 동안 꼬리를 내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개들이 - 그 때도 말 못한 건 아니지만 - 마침내 몸을 일으켜 이젠 백주대낮에 두 눈 뻔히 떠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전쟁을 선동한다. 아...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ps) 모처럼 글을 올리게 됐다. 모두 '동견'(東犬, 똥견/개?) 덕분이다. 내용은 좀 그렇지만,... ^^
다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한 사람들일텐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고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드시겠지... 개밥...
2010년 4월 9일 금요일
"하드코어 인생아" (옥상달빛, 2010)
좀 청승맞지만 중독성 있어서 자꾸 듣게 되는 노래. 방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여기에 소개해 둘 마음을 먹게 되어서 찾아보았더니, 역시...
요새 여기 저기에서 듣고 보게 되는 그놈의 '아이돌'들 때문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라 얼마전 이 여성 듀오의 노래와 얘기를 라디오에서 듣고선 마음을 얼른 내 줘 버렸다. 아, 아쿠스틱의 위대함이여... 물론 이런 류의 노래를 두고 두고 듣긴 힘들다 (예를 들어 한 때 열심히 들었던 영화 'once'의 노래들을 앞으로 찾아서 듣게될 지 의심스러우니까...).
고만고만한 걸그룹, 그 girl들의 화학조미료 맛 나는 노래와 스타일이 역겨워지는 터라 오늘 이 영상에서 처음 본 저들의 모습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다만 '싸게' 만든 영상이라 노래 '품질'이 좀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음, 그리고 가사가 시종일관 '착하지' 않은 것도 '무척' 마음에 든다. Weiter so...!!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잠못드는 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전국민의 가족화", 혹은 "가족 호칭의 일반화" 현상
도서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 상황이다. 아마 취업을 위한 ‘스터디’ 모임에 한 남자가 새로 참여하게 되었나 보다. 3인(남 1, 2와 여)의 대화는 대략 이렇게 진행되었다.
여: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남1: 스물 아홉이요.
여: 와, 좋아라.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남2: 저와는 동갑이시네요…
남1: (여자에게) 몇 살이세요?
여: 스물 여덟이에요.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귀국 후 낯선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게 바로 이런 "나이 따지는 청년 문화"다. 아주 엽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대화가 진행되는 건 사실 오래된 "한국 문화"이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10대, 20대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다니...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선 30만 넘겨도 아주 '왕' 늙은이 취급을 받고, 어린 '아이돌' 좋아하는 소위 '로리타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10대 '아이돌'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이 따지고... 그런 맥락에서 또 눈에 띄는 현상은 가족을 지칭하던 호칭의 보편화다. 아저씨, 아줌마가 그 원조격이었고, 젊은 여인을 '언니' 라고 부르는 것 까진 경험했었는데, 이젠 어지간하면 형, 누나, 오빠, 아버지, 어머니 관계를 맺는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겐 아버지, 어머니. 연예이들끼리도... 2시의 데이트 박명수에게 전화를 거는 젊은 남자들은 대뜸 '명수 형님'이다. 만약 이런 호칭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의 경우 '(elder) brother'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hyung"인 거지. ['화이팅'이 'fighting'이 아니라 'whaiting/ hwaiting' 인 것처럼...]어찌보면 "근대화=개인화"라는 사회이론이 공유하는 전제를 깨부수는 (듯한) 이런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실제 가족들을 가리키기 위한 새로운 호칭이 필요할 것도 같다.
호칭 의미론의 변화를 추척해서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내가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이건 '기생적 현상' 혹은 '반작용'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이 서열이 불분명한 상태, 평등한 관계에선 어떻게 행동해할 줄 모르는 위기 상황? 합리적, 평등한, 혹은 추상화된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
어찌되었건 10대, 20대 청년들이 '쫀쫀하게' 한 두 살 나이 따지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타인의 기대 (Die Erwartung der Anderen, Fremderwartung)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게으름을 찬양하기 어려운 세상...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 책에서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린다. 러셀은 현대의 기술 문명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도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대인은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을 하고 있고, 과로와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과거에 소수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었던 ‘게으름의 기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고 개인들이 ‘근로의 미덕이 최고’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누구나 자유롭게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김연아의 연기와 금메달 소식, 그리고 이어진 '연아 찬양 퍼레이드'를 보면서 난 러셀의 이 에세이를 기억해 냈다 (작가들이 '제목'을 다는 일에 공을 충분히 들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 아닌가^^ 그 밖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제목으로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를 꼽을 수 있다).
스케이팅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몸, 동작, 얼음, 감정, 음악 등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 이후 이어지는 일방적인 찬사가 귀에 거슬리는 것. (어쩌면 세상 일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7살에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올인하다시피해서 결국 세계 정상에 섰으니 성공한 인생인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그 과정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같은 성공신화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수 년 전에, 아마 캐나다로 훈련지를 옮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터뷰에서 스케이트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다고 그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 티비 대담에서도 어린 시절 늘 엄마가 함께 해서 스케이트 타는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서 안타까웠다는 얘길 '스치듯' 했다.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얘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모녀의 '석세스 스토리'에선 말이다.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개 '독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아니, '스토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황우석 형님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복음을 설파하셨을 때 그 말씀은 온 중생에게 큰 감동이지 않았던가... 시간, 장소, 대상, 맥락만 다를 뿐, 사실 '황우석'과 '김연아'는 그 "내러티브"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 권하는 사회... 놀고, 쉬는 걸 무척 불안해하는 시대. "노는만큼 성공한다"(김정운) 같은 책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에 불온한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놀자주의' 아닐까.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얘기나 "게으름 찬양"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데는 남북이나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나, 생산력 높이기에 재미를 붙였던 소비에트 등등.
여전히 휴가일수를 줄이거나, 아침 회의 시간을 당기는 부지런한 지도자들,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도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찬양하는 한... 일중독 만큼은 관대하게 보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에게서 빌려온 자본주의 정신을 지구 그 어디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해내는 한민족!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눈에 그토록 게을러 보였다는 우리 조상님들. 그 게으름 탓에 외세의 손에 놀아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는 처절한 인식 때문인지, 아직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더 놀자거나 게으르자, 혹은 느리게 살자 같은 얘기가 큰 공감을 얻기란 아직 힘든 것 같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숙제2
허나 가만히 보면 아이돌 뿐 아니라 보아하니 10대 후반, 20대 초반 한국 젊은이들은 대개 나이를 즐겨 따지는 것 같다. 어리다는 것만 빼면 요즘 젊은 세대 문화가 지독히도, 어쩌면 더 보수적이라는 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The Blower's Daughter (Damien Rice, 2003)
이 노래를 부른 데미안 라이스는 1973년 아일랜드생. 이 노래는 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Closer' (2005)에서 사용되어서 유명해졌다. 나도 영화에서 인상깊게 들었다가 나중에 누가 부른 노래인지를 찾게 된 경우. 내가 이런 풍을 좋아하나보다. Jeff Buckley나 요즘엔 Jason Mraz 같은...
사랑에 대한 노래인 건 알겠는데,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다. 이 양반이 클라리넷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 그러니까 클라리넷주자 (the blower)의 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선생은 반대를 했고 - 가사 중에 the pupil in denial이란 구절... - 이 노래를 불러주며 그 딸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관계가 거기에서 끝났다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지 너무도 애절하게 부른다. 어쨌든 음악과 영화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영화는 남녀 관계를 매우 '쿨'하게 다루어서, 라이스의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크게' 비교된다.
이 음악에 대한 영상으로는 흐린 해변에서 분위기 잡고 있는 Damien과 영화 장면이 교차되는 비디오가 유명하나,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이 버전을 골라봤다.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숙제

2010년 2월 5일 금요일
꿈
가수 조영남씨가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큰 꿈을 가지라’고 외치는 시대에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는 말은 시대의 맹점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을 깊이 통찰한데서 나오는 삶의 진실이 배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을 펼쳐가기보다는 인생을 삼켜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의 다양한 멋과 깊은 맛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너무 큰 꿈은 꿈의 성취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인생길을 여행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축복들을 놓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