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지멜? 짐멜?

여전히(!)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반가운 마음에 얼른 훓어보았다. "사회이론의 역사" (캘리니코스 저, 박형신 외 역, 한울 2010). 2007년에 나온 2판을 번역했다 (1판 번역서는 일신사에서 출간됨 2007?). 목차를 보니 제목 그대로 '사회이론의 역사'다. 글쎄 교과서로 쓰기에 좋을 지 모르겠지만 - 번역, 출판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 - 이런 접근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냥 덮으려는 찰나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멜. 하, scohn wieder.... 초기 독일 사회학자 Simmel을 그렇게 옮겨 놓으셨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Simmel은 '짐멜'로 부르는게 온당하다 (한국어로 된 다른 '사회학' 문헌에서 Simmel을 지멜로 표기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Simmel 지멜'로 검색하니까 상당히 많은 결과물이 뜨긴 하지만.. 쩝...). 독일사람이고 독일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미국식으로 읽으면 지멜인가? 글쎄...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부르는 것 같지 않지만 Max Weber의 경우 한동안 '베버'가 아닌 '웨버'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런 유형의 오독일까? Marx의 경우 여전히 대부분 '마르크스'라고 쓰지만 '맑스'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한 것 같다. Durkheim의 경우 뒤르껭,뒤르카임 등도 쓰였는데 최근에는 '뒤르켐'으로 정착되는 것 같고. 남의 나라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책도 아니고 '사회이론의 역사'를 다룬, 그것도 '짐멜'의 '돈의 철학'을 낸 '한울'에서 나온 책에서 Simmel을 '지멜'로 옮기는 건 좀 실망이다. [음. '돈의 철학'은 한길사에서 나왔다. 착각^^ 그걸 지적한 댓글을 누가 달았던 것 같은데 사라졌음. 여하튼 감사...]

ps1) 헌데 상표 이름 'Tommy Hilfiger'를 '타미 힐피거'로 표기하는 걸 보고선 좀 당황했다. '타미'라... 미국상표고 미국에서 그렇게 부르니까? 흠. 쉽지 않다.

ps2) 아마 고유명사 표기 원칙은 "고유명사의 출신국가에서 발음되는대로 가깝게...".. 대략 그렇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Ronaldo도가 호나우도가 되었고... 어쩌면 난 그게 불편한 모양이다. 독일어, 영어를 떠나서 가능하면 a -> ㅏ, o -> ㅗ 등으로 일관되게 표기하는 게 옳은 것 같다. 독일어 발음은 우연히 그런 표기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고.(...) 아니, 그것도 쉽지 않은게 영어권 이름 Jane을 '자네'라고 표기할 순 없는 것 아닌가?

ps3) '원칙적'으로 고유명사는 말 그대로 고유한 것, 유일한 것이니 발음과 표기도 '가능한' 그 고유성을 최대한 지켜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각 언어권에서는 그 나름대로 - 고유하게 - 외래 명사를 읽는 방식을 정할 수 있고 또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두 원칙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 예컨대 미국에선 그네들이 읽는 방식을 좇아 Max Weber를 [막스 웨버]로 부를 수도 있고, 우리가 W -> [ㅇ]으로 표기하기로 했다면 '웨버'로 적을 수 있는 문제다. 내 경우 Kwang-Jin이 독일에서 '크방인'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 그렇게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몇몇 한국인은 이런 내 '행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Kwang-Jin은 이미 '광진'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담... Simmel을 '지멜'로 표기할 수도 있단 말인가? 아니! 이 경우엔 'm'이 두 개니까 '짐멜'로 쓰는 게 한국식 라틴알파벳 읽는 습관에 비추어 볼 때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결론: 혹 미국에서 Simmel을 [지멜]로 부를 수는 있겠지만, 한국어로는 어찌되었건 '짐멜'이어야 한다.

ps4) 잠실 루터회관에 루터 상이 있는데 한글로 '말틴 루터'라고 써 놓은 걸 확인했다. Marx를 맑스로, Martin을 말틴으로 쓰는 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맑스'만큼 자부 보지 않아서인지 어색하다. 왜 이 경우엔 '마르틴' 혹은 '마틴'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지? 도대체 내 원칙은 뭔가? 내게 익숙한 것? -_- '
그러다 맑스'란 표기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발견했다.

대단히 비정상적인 표기입니다. 우리말에서 ㄺ 받침이 있을 때 뒤에 모음이 오면 (예를 들어 '맑은'에서 처럼) ㄹ과 ㄱ 발음이 다 나지만 뒤에 자음이 오면 ('맑다') ㄹ을 발음하지 않습니다. Marx는 발음이 [marks]인데 자음이 세 개가 연이어 있지요. 우리 말에서는 그런 경우는 없기때문에 중간에 ㅡ(으) 모음을 넣지요. 따라서 말크스나 마릌스, 마르크스는 가능해도 맑스는 불가능한 표기법입니다. 그런데 말크스는 r 발음이 나지 않고 l 발음이 나기때문에 원음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쓰이지 않지요. 마릌스 역시 '릌'자가 생소하기 때문에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표기는 당연히 마르크스여야 겠지요. Marx를 영어식으로 발음할 때는 물론 r 발음이 혀를 마는 정도로만 발음이 되지만 그렇다고 맑스라고 쓸 수 없는 것은 우리말에는 그런 발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의 ㄹ은 r 또는 l 의 음가를 갖지만 ㄺ에서의 ㄹ은 소리날 때 항상 l 의 음가만을 갖습니다. 비슷한 예로 독일 화폐 단위는 Mark인데 이것을 '맑'이라고 쓰는 경우는 없지요. 흠... 어렵다. 국립국어원은 '맑스'가 아닌 '마르크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실제 원어 발음은 '칼 막스'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가 맞다. x를 '크스'라고 쓰기 때문이다."

ps5) 'enjoy'를 '엔조이'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실수도 아니고 원어민 발음을 몰랐기 때문도 아니라 스스로세운 표기 원칙에 따른 것 같은데... (김용옥). (왜 '즐기다' 등으로 표현하지 않고 굳이 '엔조이'라는 표현을 가져다 쓰는 지는 논외). 어떤 원칙일까? 그가 일본어, 중국어에 관해선 아내와 함께 CK-표기법을 만든 건 알고 있는데, 그 밖 외국어를 표기하는 것에 대해선 어떤지... CK표기법의 원칙을 '원음주의'라고 하던데 "enjoy"를 "엔조이"로 쓰는 건 그 원칙을 따르는 게 아니잖은가?

ps6) 이참에 '공식' 외래어 표기법을 찾아 보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 동안 고민한 사람들이 분명한 원칙을 마련해 둔 걸 확인했고 앞으로 그 원칙을 존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표기의 기본 원칙"으로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항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제3항에 따르면 '맑스'로는 쓸 수가 없다.
또, 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언어별로 다르게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인 Luther, Martin는 "루터, 마르틴"이지만 미국인 "King, Martin Luther Jr."는 "킹, 마틴 루서"다.

ps7) 조관희 교수의 글 중에서...[중국어 한글표기법 논의를 바라보는 한 시각]. "필자가 중국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면 누구나 필자를 “조관희”가 아니라 “자오콴시(趙寬熙)”라 부른다. 하지만 고유명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둘이 아닌 오직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에 붙이는 이름일진대, ‘조관희’는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조관희’일 따름일 뿐, 그 어떤 별도의 독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중국인들만이 나의 이름을 ‘자오콴시’라 부 르고 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더 이상 ‘서울’이 ‘한청(漢城)’이 아닌 ‘서우얼(首爾)’이듯, 나의 이름도 ‘자오콴시’가 아닌 ‘조관희’일 따름이다.” 흠...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독일인들이 내 이름을 "크방인"이라고 부를 때 가능한 그들 발음을 교정했어야 했나? 흠... 다음 말도 일리가 있다. "결국 이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찾을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한 변화의 한 사례로 우리는 모택동에서 등소평 또는 덩샤오핑을 거쳐 쟝쩌민과 후진타오에 이르는 하나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毛澤東’은 ‘마오쩌둥’이라는 명칭보다는 ‘모택동’ 쪽이 더 친숙한데 반해, ‘鄧小平’의 경우는 ‘등소평’이나 ‘덩샤오핑’ 모두 익숙하다. ‘江澤民’의 경우도 ‘鄧小平’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胡錦濤’에 이르면 상황은 그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이미 ‘胡錦濤’는 ‘후진타오’가 익숙하지 ‘호금도’라는 ‘소리’는 아주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음주의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현실은 이미 원음 그대로 읽는 것이 하나의 대세로 굳어가도 있다는 것이다."

ps8) 이 글에 ps를 계속 달면서 정리하고 있는 중인데, 물론 전문가들이 애써서 만들어 놓은 '외래어표기법'을 존중하는 게 옳을 것이다. 쓸만하기만 하다면... 기본적으로 '원음주의'를 원칙으로 삼으면서 각 언어권에 따라 표기하는 방법을 구분해서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은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헛점 투성이다. Luther를 독일어권 이름인 경우 '루터', 영어권 이름은 '루서'로 하도록 한 모양인데, 왜 그런 이해할만한 규정이 'mm' 같은 복자음엔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Simmel이나 Zimmermann을 '지멜'이나 '치머만'으로 쓰게 되어 있는 건 무슨 속인지 원... (글자 중간에 있는 복자음은 하나만 인정한다! 뭐 그런 원칙인가? 헐... ) 재미있는 건 Zimmermann의 'Zi-'를 '치'로 쓰는 것. 왜? 차라리 '지머만'이라고 하지? Weber도 '웨버'라고 하고! 맑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함부억' '함부릌' '함부륵'이 아니라 '함부르크'로 쓰게 하는 건 이해할만한데 왜 '지멜', '치머만'?

ps9) Simmel을 '지멜'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동지'를 만났다 (여기). 최근에 출간된 '화폐 인문학'을 소개하면서 이 블로그 주인은 이렇게 써 놓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 역자가 짐멜 Simmel을 지멜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짧은 언급에 달린 댓글이 또 재미있다.

동수 2010-12-29 11:48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지멜(O), 짐멜(X)" 입니다. http://www.korean.go.kr/09_new/dic/rule/rule_foreign.jsp

faai 2011-01-04 09:36
'에 따르면'은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영어 'according to'를 일본어로 번역한 후, 이를 우리말로 직역한 표현이라 합니다. 한문 투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 speller.cs.pusan.ac.kr


ps9) 아마 마지막 부기가 될 듯. 내 나름 결론을 내렸으니. 독일어에서 자음이 중복되는 경우라고 항상 발음되는 것은 아니다. 나름 헤아려 보니 'mm' 과 'nn'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걸 인정하지 않으니 Simmel은 지멜, Immanuel Kant는 이마누엘 칸트, Anna는 아나, Emma는 에나, Zimmerman은 침머만이 되어야 옳은 것이다. 참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 그죠? 외래어 표기법을 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 "같은 자음이 겹쳤을 때에는 겹치지 않은 경우와 같이 적는다. 다만, -mm-, -nn-의 경우는 ‘ㅁㅁ’, ‘ㄴㄴ’으로 적는다." 캬. 그럼 게임 끝인가? 모두 이 구절을 몰랐단 말인가? No! 왜냐하면 위 내용은 이태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이어 표기법에서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스웨덴어 이름 'Bromma'는 '브롬마'라고 예까지 들어 주고 있다. 왜 이런 내용이 독일어 발음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참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상한 규정때문에 칸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무슨 호부호형 못하던 홍길동도 아니고, 참...

ps10) 약간의 충격..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지금까지 독일어 발음을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음이 중복될 때는 단자음과 음가가 같지만 앞의 모음이 짧은음이 됩니다.
ⓐ ff [f] : hoffen [h f n] (= to hope)
ⓑ ll [l] : Brille [bril ] (= glasses)
ⓒ mm [m] : kommen [k m n] (= to come)
ⓓ nn [n] : nennen [nέn n] (= to call) (...)
"

"Double consonants (FF, LL, MM, NN, PP, RR, TT, rarely BB, DD, GG, KK, WW, ZZ) are always pronounced as one. They indicate that the preceding vowel is short. The only exception to this rule is SS."

독일어 발음이 병기되어 있는 사전을 찾아 보니 역시 같은 내용이다. 정말 그런가? 믿기 힘들다... 칸트의 이름은 이마누엘이고, 고전 사회학자는 지멜이었나? 잘못된 언어 습관, 선입견이 그동안 엉뚱하게 듣게 한 걸까? 흠...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영성=사랑=관심

영성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은 관심이다. 영성=사랑=관심. 욕망, 습관, 자동화 기제의 틀을 깨는 게 영성, 즉 사랑의 관계에 이르는 훈련의 출발점이라면, 그건 곧 무관심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습관화된 무관심! 그런 틀을 깨고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의 일상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 투성이다. 지나치게 많이 주어지는 정보들 - 현대인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감수성을 자극하고 찔러대는 저 광고들을 보라 - 생존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관심사들, 처리해야 할 일들만으로 우리 정보처리 능력은 이미 포화상태인 것이다. 그 때문에 긴요하지 않다고 이해되는 일들로 관심을 돌리기가 어렵다. 혹 여력이 있더라도 우리 관심은 대개 우리 자신에게 쏠려있다. 자기애... 넓어져 봐야 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식구들 정도? 가족애... ('피붙이'라 하더라도 가정의 울타리만 넘어서도 관심의 강도와 영역은 급속히 줄어든다.)
어짜피 가용 에너지와 처리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니 "영성=사랑=관심"의 일에 투자하려면 다른 쪽에 쏠리는 에너지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단순하고도 느리게 살 필요가 있는 것. 우리 관심을 끌어 당기는 정보를 제한하고 -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 -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어떤 일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지, 왜 무관심한지... 습과화된 관심, 자기애, 가족애를 비우고 습관, 자기, 가족의 경계 바깥에 있는 타자 - 사람, 자연, 사물, 등등 -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습관을 거스르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할 범인들은 아마 평생을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안절부절하며 보낼 것이다. 그런 일로 안절부절 할 수 있기만 해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다.
사회체계는 이중 우연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die Unwahrscheinlichkeit der Kommunikation) 자기준거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체계는 때때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심리체계와 심리체계가 직접 부딪히는 '상호작용'의 경우에 당혹감을 주고 받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오고 가는 정보가 이해되는 가능성의 경우 수를 줄여주는 매체가 - e.g. '신뢰' '프레임' '스크립트' 등 - 공유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당혹감은 상호작용 참여자가 상호작용의 독특한 코드를 찾거나 좇는 대신 심리체계의 코드에 충실하는 경우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이 끊기며 분위기가 갑자기 차가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당혹감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선 자신이 준거로 삼는 의미틀로 당혹스러운 상황을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 처리하려는 유형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지배적 커뮤니케이터'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권위적인 '어른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당혹스럽게 느껴질만한 상황의 발생 빈도를 원천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심리체계가 준거로 삼는 의미의 공간을 '평소에' 넓혀두어여 한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 그저 흘러 보내지 않고 - 심리체계의 준거로 삼을 수 있어야 비로소 그런 넓은 영토을 확보할 수 있다 (상호작용 참여자에 대한 이해, 혹은 다양한 심리체계에 대한 이해... ). 그런 경우를 두고 '세련된' 혹은 '능숙한' 커뮤니케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사

꼬박 사흘 더하기 1/3일 동안 이사에 매달렸다.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사라서 그런지 이사 전후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집을 나서면서도... 내겐 귀국 이후 지속되던 '일상'이지만 그게 다른 '공간' 속에선 달리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으니... '공간'의 의미, 무게...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서예

이번 주엔 '서예전시회'다. 한국화 혹은 동양화와는 다르게 서예는 꽤 볼만하다. 흰색, 검정색 뿐이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더 깊이가 느껴진다. 특히 흘려쓰는 필법은 - '초서'가 그 중 하나지 아마? - 정말 예술적이다. 기회되면 서예를 한 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지만... 서예는 역시 한자를 써야 제 맛이 난다. 획과 모양이 한글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기 때문이고, 중요한 다른 이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해가 되지 않아야 글씨가 아니라 그림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지나치거나 또는 모자라거나

식당이야기 (2)

오늘 점심은 '통영굴밥'집. 이 식당은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편이다. 들어설 때는 서너번에 한 번쯤, 나설 땐 거의 듣지 못한다. 오늘은 계산하고 나설 때까지 음성을 이용한 의사소통이 전혀 없었다. 다들 묵언수행이라도 하시는지, 집단적으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영적 훈련이라고 하는지 인사를 너무 아낀다. 손님과 직원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너무 한다싶어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내 의사를 표시하려고 한다.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사실은 더 심한 집도 겪어봤다. 근처 분식집. 주인이거나 혹은 주인의 딸처럼 보이는 젊은 아가씨는 김밥을 썰다가 들어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바로 시선 외면... 예상했던 대로 그 집을 나설 때 어떤 인사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 뒤로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음식의 질, 맛, 청결 이런 걸 떠나서 손님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에 무지한 식당은 그렇게라도 '응징'해야 한다.
한국생활이 '재미'있는 건 그 반대 경우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우리은행의 경비 겸 안내 담당인듯한 젊은 청년.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손님이 '입장'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문제는 조용한 은행 안이 그 때마다 쩌렁쩌렁 울린다는 것. 또 대형마트에 들어설 때마다 깊숙하게 숙여서 건네는 인사를 받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들어서는 손님 대부분은 무슨 인사기계나 투명인간을 보는 듯 무시한다. 그렇게 인사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처사다. 그런 대형마트는 어떻게 '응징'하지?

인사커뮤니케이션의 이런 모자람과 과도함의 공존엔 우연이나 개인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언제가 전화 통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어 커뮤니케이션에 인사 문화 혹은 인사 코드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이 아닐런지. 특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에 대해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공공영역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조정 메카니즘이 부실해 보이는 것이다. 예절, 문화, 코드... 뭐라고 이름 붙이든. 식당이나 지하철서 같은 데서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를 나무랐다간 그 부모로부터 이런 얘긴 듣기 십상이다. "당신이 뭔데, 남의 애한데..."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또 재미있는 현상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의사소통 코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친족이나 직장, 학교 등 조직에 속한 사람들기리 언어 예절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위계적이고 사람들은 세밀한 표현 차이를 기가막힐 정도로 잘 포착해 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직계 가족간의 관계에선 갈수록 자유분방해져서 반말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참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ps)아래 영성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자꾸 목덜미를 끌어당긴다. 특히 '응징' 운운하는 태도가 과연 '영성'과 어울리는 지에 대해서... 영성의 본질을 '사랑의 각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님에 대한 인사에 인색한 식당을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거나 나올 때면 "덕분에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인사를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랑의 마음을 담아 건넨다던지... 상상만해도 닭살 돋는 '시츄에이션'이지만 과연 그게 대안일까?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영성을 돌 볼 시간 아니 마음이 없는 현대인. 종교성은?

잠자고 있는 영성을 일깨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 훈련에선 대개 침묵, 고요함을 전제로 삼는 것 같다 (아는 게 많이 없어서 표현이 조심스러움 ㅋ). 현대인들의 영성이 무딜대로 무딘 이유는 바로 이 고요한 시간을 찾기 어렵기 때문 아닐까. 아니,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서 워낙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또 그 생업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또 시간을 내야 하니 도대체 고요한 시간 가질 새가 없다. 그게 익숙해져서 이젠 고요한 걸 견디기 힘들어 한다 (조용한 식당을 못 견뎌서 기어이 들고 다니는 텔레비전 소리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길거리, 지하철 등에서 귀에 뭔가를 꽂고서 뭔가를 듣는 행위는 실제로는 무차별적으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스스로 선택한 소음으로 바꿔보려는 몸부림이다.
'우리' 부지런한 '얼리 버드'들은 - 대표적으로 2mb ㅋ - 고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긴 하다. 새벽... 특히, 한국 신자들의 경우에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되기까지 하다 (불교 새벽예불의 영향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새벽기도 시간에도 - 어디 새벽에만 그럴까마는... - 시끄러운 기도소리로 가득하다. '신'이 들어 주셔야 할 일들을 열거해야 하는데 그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니까.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하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결국에 가서는 기도가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Christian Discourses" 중에서)
A man prayed, and at first he thought that prayer was talking. But he bacame more and more quiet until in the end he realized that prayer was listening.

어디 기도시간 뿐인가 이런 저런 예배, 프로그램, 활동, 교제로 가득 찬 교회생활에서 고요함을 찾기란 힘들다.

내 경우에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쨉싸게 그 시간을 대체할 일들을 찾는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면 일순위는 불문가지. 그렇지 않은 경우 이런 저런 긴요하지 않은 책이나 컴퓨터 폴더 속을 뒤적인다. 집에서라면 텔레비전을 켜 둘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현대인... 생각을 깊게 해야 할 경우에도 그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자꾸 다른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 그래서 요즘엔 컴퓨터를 아애 켜지 않으려 애쓸 때도 있다. 뭔가를 쓰라고 깜박거리른 '커서'의 재촉을 받지 않고서 백지 위에 손글씨로 생각을 정리하는 재미를 맛보기도 하면서... 또 늦은 밤에 고요한 시간을 가져 보려고도 한다. 그러면서 관찰한다. 흘러 다니는 생각을.... 도대체 그 뿌리에 무엇이 있나... 그러다 "점점 그윽한 경지에 이르면" 정말 뭔가를 듣게 될까?

영성과 종교성을 구분해 보면 좀 다른 방향으로 얘길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은 있는데 그게 '영성'과 '종교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 서구 계몽주의 시대, 근대의 개화기 동안에는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 종교 같은 구시대 유물은 사라질 거라고 과감하게 주장하던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생시몽, 콩트가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 콩트가 말년에 인류교라는 합리성의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도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얘기하는 특정 신이 죽었다는 얘기 아니었던가. 영성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종교성만큼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 (= 호모 렐리기오수수)가 존재하는한 어떤 식으로든 추구될 것이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신을 섬기는 있지 않은가?
우선 심취해서 이성적 심리 상태를 뛰어 넘는 무엇인가가 표출되는 상황은 대개 종교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음악이나 춤에 열광하는 상태, 만취 상태, 각종 '약물'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겉으론 매우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에 기인하는 것 같지만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섬기는 상황. 그것도 넓게 보아 종교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고요할 시간이 없는 바쁜 현대인들. 그들은 어쩌면 그 '바쁨'을 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일중독'은 그냥 비유적 표현이 아닌 종교성의 영역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상태다. 자식에 '올인'하는 부모들은 자식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고, 사랑의 짜릿한 감각을 찾아서 헤매다니는 사람들은 사랑 혹은 사랑의 감각을 섬기고 있는 것고... 각종 제도 종교들을 믿는 신자들 중엔 - 본인은 의식하지 못할 지라도 - 그저 인간 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종교성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그 종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영성과 종교성을 정확하게 구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영성을 추구하는 종교'와 '종교성을 만족시키는 종교'라는 구분 역시 하나의 생각 실험일 뿐 그런 구분을 과도하게 밀고가는 게 큰 유익을 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 어느 시기 못지않게 아니 혹은 그 이상 종교성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21세기에 -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 그 활약상을 보라 (절에 가서 '땅밟기' 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 ), 그리고 술, 섹스, 음악, 애정, 인정, 기도응답에 대한 탐닉을.... - 그런 종교성을 좀 '다른' 아니 좀 '더 나은'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영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내 속을 들여다 보며, 그 '어떤' 음성 듣기를 구하며...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잠 못 드는 밤

쉽게 잠들 수가 없다. 일요일이라 좀 늦게 일어난 탓인지, 아니면 연말이 다가올수록 더 많아지는 생각 탓인지... 취침용 독서도 별로 효과가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어떤 기운이 그냥 누워있을 수 없게 만든다. 해서 인터넷을 통해 여기 저기 산책해 보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심리 작동 상태인듯.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밀어내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그 뿌리까기 파헤쳐 볼 생각이다. ...observation of the observation of the observation....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하바드대 출신, 파란 눈의 스님 얘기 들어 본 것도 같다. 현각 스님. 그 양반 지나치게 많은 이름을 얻는 통에 한국을 떠나서 지금은 뮌헨에 정착해 있나 보다. 최근 인터뷰 기사에서 알게 된 내용 (여기).
그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독일이 심심하진 않나.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에서 살다 가셨으니.

"거제도에서 기암절벽을 구경하는데 배 안에 '뽕짝'이 쿵작쿵작 울려 퍼지더라. 선장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 부탁했더니 뽕짝을 안 틀면 승객들이 심심해한다고 했다. 한국이 내게 준 가르침 중 하나가 센세이션과 자극이다.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요와 평화, 여백을 즐길 줄 모른다. 카페에 가보라. 연인이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열심히 문질러대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108배를 하는데 주머니에선 휴대폰이 쩌렁쩌렁 울려댄다. 걱정스럽다."

이 얘기가 오늘 낮 식당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나게 했다. 한국 어지간한 식당에선 그 시간이면 대개 텔레비전을 켜 둔다. 보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하지만 오늘 처음 간 그 식당은 그렇지 않은 드문 경우였다. 들고 간 책을 보면서 밥을 먹고 있는데 옆 자리에 두 남성 손님 착석. 얘기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곧 침묵 모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식당은 그 손님 중 한 사람의 '휴대용 텔레비전' - 정확한 명칭이 있을 텐데 잘 모르므로 통과... - 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로 가득찼다. 당연히 클 수 없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거의 '발악' 혹은 '통곡'에 가깝게 들렸다. 그 발악을 들으며 마주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식당 안 다른 사람들은 병풍 정도로 여기는 듯한 그 심리체계의 작동방식 또한 참으로 저질이다. 생각할수록...

왜 편한 사이엔 좀 듣기 싫어할 것 같은 소리도 하게 되지 않은가. 애정과 관심의 표현 방식이기도 하고. 이 나라,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물론 많이 좋아졌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의심하지 않지만, 천박한 행태들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너무 많이 보고 또 듣게 되는 탓이다. 어쩌면 아직도 이방인의 시선을 거두지 못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생활인'으로 그 속에 들어가게 되면 좀 달라질까?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자이언트' 종영

허다한 드라마들 중에서 유일하게 챙겨 보던 드라마였다. 그 '자이언트'가 어제 끝났다. '자이언트'는 결코 수준 높은 드라마였다고 얘기할 수 없다. '홍길동전' 이후 이어내려오던 고전소설의 핵심 특징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21세기 그대로 재현한 드라마였다. 영우, 우연성, 권선징악... 주인공 '이강모'는 쫙 붙는 타이즈를 입거나 날지 않을 뿐 그 능력으로 따지자면 거의 슈퍼맨급이었다. 그리고 주요 장면에선 기가 막힌 시점에 필요한 인물들이 저만치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고... 대부분 차 속에서. 물론 그들이 들키는 법은 없다. 강모와 성모, 이 둘이 형제라는 사실은 '적들'에겐 끝무렵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렇게 대놓고 만나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 드라마의 주제를 한 마다디로 요약하자면? 자, 밑줄 그을 준비하시고... 권선징악! 악역을 잘 소화했다고 자자한 칭찬을 받는 정보석이 연기한 '조필연'. 시종일관 악인의 본분에서 벗어나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반대에 있는 이강모 역시 건설업에 종사하면서도 준법정신 투철하고 의리로 똘똘뭉친 매력남이다. 마지막 회에서 착한 쪽에 속하는 '성모'가 죽긴하지만 그런 것 마저 없었더라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뻔했다. 이런 불평 거리가 적지 않음에도 괜찮은 면도 찾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차마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적지 않은 드라마들과 구별된다.

우선, 역사적 사실을 개인사와 잘 엮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강남개발과 5공, 6공이 주 배경인데 그 시절 현대사를 잘 모를 이들에게는 꽤 의미있는 간접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극의 경우엔 차라리 '권선징악'의 구도가 더 시원한 경우가 있다. 드라마에서 드라난 작가 혹은 피디가 그 시기를 보는 관점은 어쩌면 상식에 가까운 것이지만 쥐정부 시절이고 더구나 SBS 아닌가? 게다가 SBS 창사 20년 특집극이라니... 혹시 SBS '수뇌부'들이나, '방송통신위원회', 문화부에 계시는 김회장네 둘째 아들, 푸른 지붕 아래에서 사시는 분들 모두 공사가 다망하셔서 이 드라마를 챙겨보지 못하신 탓이 아닌가 싶다. 어찌 2010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드라마가 공공연한게 방영되며 그것도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단 말인가. 수시로 가스통 들고 세종로, 종로로 진출하시던 우리 구국의 용사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조용하셨던지... 모두 현대사 지식이 박약한 관계로 조필연의 멸망에 박수를 보내는 '우'를 범하신 것은 아닌지...

드라마가 무척 구식이긴 했지만 워낙 시절이 거꾸로 가는 터라 그 우직한 권선징악의 정신마저 그지 없이 반가웠던 것 같다. 이강모 같은 사나이가 정말 그리워지는 때 아닌가. 이제 승부가 끝나고 경찰에게 잡혀가면서 조필연이 이강모에게 얘기한다. "이제, 네 놈이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에 대한 우리의 이강모 형님의 멘트 "난 한 번도 널 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난 너 같은 사람이 큰 소리치는 이 세상과 싸워보고 싶었던 거야..."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 캬- 이 얘기 듣고 난 완전히 '감동' 먹었다.

자고로 이런 게 대중문화의 미덕이다. 인간, 역사에 대해서 깊게 파고드는 고급예술은 이렇게 쉽게 싸지르기가 힘들다. 대중문화는 그냥 대중의 힘을 믿고서 뭔가 부조리하고, 고여있고, 썩은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어야 한다. 속이 뻥 뚤리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 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난 그 누구보다 피디와 작가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짝짝!!


이번 정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참 '착한' 정부다. 반면교사라고 하지... 특히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학, 역사관, 가치관, 세계관을 분명히 세우는 일이 사람에게나 정부에게나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다. 단지 이 정부 고위직에 계신 '높으신' 분들 중에서 병역의무를 다한 사람이 희귀하다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다. 군복무, 군필이 중요하다면 군대에 수십년 복무했거나 복무하고 있는 저 '별'들의 한심한 언행, 대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최고봉은 아마 평시전작권 가져오기를 두려워하는 저들에 대해서 노무현 전통의 일갈에 대한 그 별들이 보여준 행태일 것이다. 그때 이미 본색이 천하에 드러나 버려서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속편 정도로 느껴진다).

'쥐'정부(G 20의 그 'G', 혹은 '어륀쥐'[orange]의 그 '쥐'^^)는 국방, 외교에 관해선 철저하게 미국 형님 보호를 받고, 경기부양은 4대강 삽질을 통해서 그리고 세계 시장에서 어찌 어찌 떡고물 떨어지기를 기대하겠다는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은 다름 아닌 기득권을 잃어버렸던 10년이었음을 알려주듯 5년 동안 챙겨갈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겨가려는 그런 국정철학도 가지고 있다. 그 언저리에서 충성한 똘마니들 밥그릇 챙겨주고, 대기업들 숙원사업도 해결해주고... 뭐, 그것도 철학이라면 철학이겠다.

특정 철학, 가치관, 세계관을 신봉하다시피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저런 실용주의도 아닌 빌붙어 생존하고 제 잇속을 채우려는 '가치관'을 가진 이들도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문제이고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불행한 사건이다. 현 시점에서 더 슬픈 건 2년 후에 정권을 넘겨 받을 세력들이 누가 되는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예감 때문이다. 내 '슬픈 예감'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틀린 적이 없다.

ps) '다행히' 예보와 다르게 눈도 내리지 않는 날에 신문 기사 몇 개 챙겨보다가,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수시로 떠 오르는 그런 기사들 때문에 괜히 욱해서 그만...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슬픈 눈

내일 적지 않은 눈이 온다고 하는군.
'한 개'도 반갑지 않다.
눈 '따위'에 설렐 나이도 아니지만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더더욱 없기에...



(사진은 여기에서 훔쳐왔다)
뭔가를 좀 제대로 설명해보려면 말이 더 많아진다.
그럴수록 의미가 풍부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쪼그라든다.
정말 소중한 것은 입 밖으로 내기 힘든 것.
그런 면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주저리 주저리 지껄여야 하는 학문은 기껏해야 차선일 뿐이다.
제도화된 종교도 마찬가지고. 설교는 왜 그리 길까...
타자와 구별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세우는 순간 의미의 풍성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는다.
현대 사회의 체계들, 의미의 풍성함이 탈각되고 뼈대만 남은 그 체계들의 작동에 몸을 맡겨서 사는 현대인들.
사회학은 기껏 그 정도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생각, 표상, 개념은 단지 기호와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자신을 우리 나람의 자기 개념에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자아상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확고한 이미지에 너무 집착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예배하게 된다. (...)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이란 돕는 행위와 애틋한 감정, 헌신된 관계 그리고 낭만의 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사랑의 일면이지만, 그것은 마치 날씨를 비에, 바다를 파도에 비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형태에 따라 사랑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심리적, 영적 신경증을 겪게 된다. 심리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랑의 거룩한 신비를 놓치게 된다"

Gerald G. May 2006, 사랑의 각성. IVP, p.42 [org. Awakened Heart (1991)]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현대 한국어에서 전화를 이용해서 대화를 할 경우 그 시작을 알리는 표현은 있어도 - 여보세요! - 끝내겠음을 분명하게 알리는 표현은 없다. 오죽하면 노홍철은 '뿅'이란 의성어를 가져다가 쓸까. 별도로 정해 놓은 표현은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을 길게 늘이는 것으로 전화통화를 끝내겠다는 신호를 준다. 여하튼 나는 아직도 그렇게 신호보내는게 영 어색해서 - 예전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만 - 가끔 불쑥 전화를 끊는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반대의 경우여서 연결이 끊어진 줄도 모르고 전화기를 한동안 들고 있었다. 음... 뭔가 국가적 대책이 필요한 듯.
이번 주에 '다시' '한국화' 전시회다. 음. 역시 깊이가 느껴지질 않는다. 강렬한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턱없이 옅고 더 없이 가볍다. 현대인들의 심성을 담는 '용기'가 아닌 것이다 [형태 -> 내용]. 물론 거기에 깊이를 담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깊이를 알아채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그나마 검정 먹물의 농도로만 표현한 그림이 색을 더한 그림보다 더 깊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예의 경우 그림보다 더 깊은 것 같고...
좀 더 '쿨'해질 필요가 있다. 긴장의 끈을 잠시 놓쳐도 'uncool'한 것들이 사정없이 비집고 나온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화가 날 때, 논쟁을 할 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칠 새라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uncool한가! Wie uncool!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아마 '영성'에 대한 관심을 실행으로 옮겨보는 게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주 틈틈이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독일 체류 말기에 가졌던 묵상, 영성에 대해 생각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그 언저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탓일까?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마침내 12월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_- 그나마 막혀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 하나가 풀려서 '작은' 위로가 되지만... (물론 분명히 다른 문제가 곧 튀어 나올 것이다. 그래왔다. 지난 수 년동안...). 그러면서 '여유 없음'과 '유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표현이 거칠어지고 직선적이게 된다. 지성의 정수가 '유머'라면 감성 혹은 삶의 태도의 경우에서도 켜켜이 쌓인 내공은 유머, 해학으로 피어 날 것이다. 어르신네들이 가끔씩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는 그래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오고 가는 표현들이 거칠고 직선적이라면 그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눈에 게으르게 비쳐졌던 우리 조상들은 분명 달랐을 터. 우린 좀 더 잘 살게 되었고 대신 웃음을 잃었다. 독일 사람들도 유머와 거리가 먼 편인데 이는 아마 날씨 탓일 것이다. 남부유럽인들과 비교해 보면.. 아니, 영국 날씨도 나쁘기로 유명한데 왜 브리티시 유머는 유명한 걸... 세계제국을 경영해 본 이들, 가져 본 자들의 여유인가?

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過恭非禮 혹은 過猶不及



윗 그림에서처럼 '4천원이십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참 많다. 가게 주인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건지... 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역겹다'. 은행이나 마트에서 '어서 오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직원들이나 지하철 역사에서 발견한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문구를 볼 때 그런 것처럼...

ps) 음. 최근 쓴 글 내용이 좀 어둡다. 심리상태, 무의식 탓일까? 2010년 12월이 코 앞에 와 있어서 그럴까? "좋은 지성은 유머여야만 한다"라는 소리가 저 밑에서 들리는 듯...

ps 2) 널리 잘못 쓰이고 있는 표현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다르다/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 경우 (대부분 '다르다'를 써야 할 자리에서'틀리다'를 씀). 이 '문제'는 꽤 널리 알려져 있고 적어도 방송작가들이나 피디들은 대부분 인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출연자가 '틀리다'라고 잘못 얘기하는 경우에도 자막엔 '다르다'라고 고쳐서 나오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니까. 또 다른 흔한 경우로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말. 좋은 하루를 보내실 수는 있어도 좋은 하루가 되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선생님 = 좋은 하루??? 이걸 지적하는 얘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한국사람들의 한국어 말하기, 글쓰기 실력이 대체로 좋지 않다는데 있다. 오랜 만에 '모국어'만 쓰는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그런 경우가 무척 자주 눈에 띈다. 그런 사례들을 모아서 책을 내고 싶을 정도로... 언어는 그저 한갓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매체와 표현방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the medium is the message!"). 그런 저런 이유로 난 이 나라를 '영어 공화국'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는 '관계자'들을 매우 '싫어한다' (더 센 표현을 쓰려다 참았음 =_ =;;) 반대로 쉽고 정확한 한국어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은 다시 보게 되고... (학술 논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귀국 후 자주 언급하거나 생각하게 된 단어로 꼽을 수 있는 것들에.... '기본', '상식', '예의', '허접', '천박' 등이있다. 다시 한 번 이런 단어들을 상기해야 할 일이 생겼다.

재벌가 2세, 50대 남 야구방망이 폭행 논란
MBC 2580 “최철원 M&M 전 대표, 때리고 2천만원 매값 줘”

한화 그룹 김승연 회장이 아들과 싸운 이를 청계산으로 끌고 가서 폭행했던 사건이 겹쳐 떠오른다. 가죽장갑을 끼고서... 가죽장갑, 야구방망이... 잘 어울린다. 생각할수록 열이 화악 올라오는걸... 심한 말을 해 주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걔네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일반인'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에이,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그들이 자주 쓸 것 같은 표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한다: 에라 이 천(박)한 것들. 못 배운 애들은 꼭 티를 내요 티를 ...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think, thank

목사님, 설교 중에 think와 thank 어원이 같음을 언급. 결론은 생각해보면 감사할 수 있다는...
영어 어원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think: Akin to OE thenc(e)an, to think, is thancian, whence ‘to thank’

고마운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아닌게 아니라 때론 좀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자주 보지 못하는 경우...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우리 전통 회화에 강렬한 명암대비와 이에 기초한 실존적 불안의 이미지를 보기 어렵다는 점은 그만큼 우리에게 근대가 늦게 다가왔음을 시사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 , 79쪽)

출근하는 도서관 일층에 전시 공간이 있는데 거의 매주 새로운 전시회가 열린다. 다양한 장르의... 물론 대개 '동호회' 수준이지만 그 덕에 그 동안 못보던 '한국화'도 실컷 볼 수 있었다. 오랜 만에 본 탓인지 처음엔 신선했는데 몇 번 거급 보다보니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갈무리해두었던 윗 글 내용이 생각났다. '강렬한 명암대비'가 없기 때문에 담백한 맛은 있으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수채화'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강렬한 명암대비' '실존적 불안의 이미지'는 대개 '유화'에서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색도 그렇지만 덕지 덕지 붙어 있는 물감, 게다가 몇 번 겹쳐 바르기까지 한 그 물감은 그 자체로 '깊이'에 대한 느낌을 전달해 준다. 하지만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유화를 '깔아 놓으면' 그런 특징이 잘 살지 않는다. 평면에는 오히려 평면적인 한국화, 수채화가 더 어울리는 듯. 게다가 '여백미'까지 갖추고 있으면 금상첨화. 비워 놓은 그 공간이 단순함, 소박함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장치인듯. (한국화의 경우 '글씨'가 덧붙여지면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수도...)
많지 않은 방문객의 발길마저 끊어질 수 있겠다는 '절박함'(^^)에서 모처럼 - 훨씬 쉬운 종류이긴 하지만 - '창작의 고통'(!)을 한 번 감내해 보려 한다.

우선 오늘 아침 캄캄한 서울 하늘을 뚫고 비와 '눈' 비슷한 것이 섞여서 내리고 있다. 이제 확인해 보니 내리는 그것의 정체는 '비'에 가까운 것 같다. 첫 눈이 이미 왔었다는 '설'도 있고 혹자는 오늘도 눈이 내렸다고 '주장'하겠지만 난 이 정도로는 눈이 왔다고 '인정'해 줄 수 없다. 아직 심리적 월동 준비가 덜 된 탓에 괜히 우기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직 빨간 단풍잎도 많이 달려있고 겨울 특유의 그 스산하고 메마른 냄새도 아직 나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 정도 농도면 멘자 커피에 뒤지지 않을 듯. 사실 한국에서 어떤 커피를 마시게 될 지 긴장했었다. 뭐 변덕스런 입맛이 환경 변화에 적응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만족스럽다. 한국 커피 문화 수준이 꽤 올라온 듯. 한국 '전통 커피'는 주로 식당에서 공짜로 제공되는 것을 마시게 되는데 가끔씩이라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때론 그 믹스 커피 냄새가 역겨울 때도 있는데 값싼 인공의 냄새 ... 그러고 보면 한국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꼽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은 서로 연결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단 것 좋아하기, 원색 좋아하기, 직선적이기....).

연평도 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물론 이런 판단은 대중매체를 근거로 해서 내린 것. 한국 대중문화, 연예산업이 꽤 '짤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고 전반적으로 질도 좋아진 건 이번에 직접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런 싸구려 대중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기는 한 마디로 천박하고도 천박하다. 연평도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정말 천박한 수준이다 (신문, TV...). mb 정부가 천박하다는 건 이미 온천하에 들통난 '팩트'지만 그것을 왈가왈부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인 언론의 수준 역시 거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북녘에 있는 '동포'라는 이들, 아니 그들의 수뇌부들의 수준 역시 천박하긴 마찬가지고. 어쨌든 가장 심한 욕은 mb 정권에게 향해야 한다. 실용주의 어쩌고 할 때 이미 알아봤지만 뚜렷한 지향점이나 세계관 없이 시류에 몸을 내맡기겠다는 그런 부류 인간들에게 가장 힘든 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즉 아직 시류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단 내리기다. 그런 면에서 좌파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우파에 가까운 이전 두 정부와 이런 면에선 비교된다. 그런 도발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여러 수단을 통해서 '억제'하지만 감히 그런 도발을 하면 다시는 감히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주는 것. 흐리멍텅... 실질적 타격은 입히지 못하면서 관계만 악화시켜 놓았다가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확전'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전전긍긍. 지도자는 '잔머리'가 아닌 '세계관'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아, 그 양반과 그 무리가 푸른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게 슬프고 2년 후면 그 집 주인이 바뀔텐데 데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새주인 역시 별로 나을 것 같지 않아서 더 슬프다.

앗, 수신자의 처리 용량(2mb)을 훌쩍 뛰어넘는 많은 정보를 전달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은근히 '열'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 아닌가. 자제해야지... 스트레스 받으면 나만 손해... Themawechsel!... 하려고 했는데 작가 사정상 오늘은 여기에서...

ps) 한 가지 얘기만 덧붙이련다. 꿈 얘길 가끔씩 했던 것 같은데 경험적으로 보아서 무의식 세계가 중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서야 어떻게든 이런 저런 생각, 마음을 조정하면서 가면을 쓴 채 연기할 수 있지만 그런 제어장치가 풀린 상태에서 비로소 내 심리상태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억하고 있는 어제 꿈 내용도 아주 끔찍했다. 아주... 내면세계를 더 투명하고 맑게 가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유머는 진부함을 거부하는 태도다.
좋은 유머는 지성의 결정체다. 반대로 좋은 지성은 유머여야만 한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미움, 사랑

'Nicht der Haß, wie die Weisen sagen, sondern die Liebe trennt die Wesen und bildet die Welt (...)" (F. Schlegel)

Schlegel, F. (1980) [1799] Lucinde. Werke in zwei Banden, Vol. 2. Berlin, Aufbau Verlag (p. 74)

"미움이 아닌 사랑이 존재/인간을 나눈다"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이별노래 (정호승 시, 이동원 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ps)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는 날... 이별하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개인주의 없는 개인화"

Chang, Kyung-Sup/ Song, Min-Young (2010), The stranded individualizer under compressed modernity: South Korean women in individualization without individualism, in: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61 (3): 539 – 564

 매우 흥미롭게 읽은 주장이다. 무엇보다 "individualization without individualism"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이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근대의 구조와 의미론(문화)을 구분하는 루만 도식을 따르자면 구조적 근대화가 문화적 근대화에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윗 논문의 저자는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여성의 개인화'를 설명하지만, 난 오히려윗 논문의 테제를 매우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가져오는 게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2010년 11월 1일 월요일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양준혁은 후배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야구는 단점과의 싸움이다. 상대의 단점을 파악해 공격하고, 내 단점을 찾아내 방어해야 이길 수 있다. 대타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장점은 신이 내리지만, 단점은 신이 도와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다. 단점을 간과한 이상, 성공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
다." (박동희 칼럼 중)

p.s.) 독일에서 한동안 Sueddeutsche Zeitung 을 구독한 적이 있었는데 스포츠면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다. 대개 경기 내용이나 결과만 전해주는 짧은 기사들이자만 그 속에서 인문학적 교양과 스포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어우러진 맛깔스러운 기사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급한 편이지만 특히 스포츠 저널리즘은 그 중에서도 밑바닥을 깔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천박함이 대세인 그 쪽 업계에서 가끔씩 튀는 기자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야구 전문인 박동희 기자. 심지어 그의 블로그에도 정기적으로 들르곤 한다 (여기).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990)



최근 "1박2일"에 소개되어서 큰 방향을 일으키고 있는 옛노래. 박주연 작사, 조용필 작곡. 1990년에 발매된 12집에 실렸단다. 용필 형님 노래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작곡 실력도 상당하심. 여러 버전이 이미 유툽에 올라와 있으나 윗 라이브 영상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심 누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적 영상일까...

다중 근대성, 중층 근대성 논의의 한계

多重 근대성, 重層 근대성 (역사적..) 논의가 갖는 장점이자 약점은 비교문명사적,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이라는 점. 역사적으로 충실한 접근일 수 있겠으나 근대성/근대화가 가지고 있는 국제성, 세계성, 세계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근대성 기원에 "집착"하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가 아닌가 싶다. 근대성이 서구에서 기원했다는 서구중심주의자들, 유럽중심주의자들, 베버의 후예들에게 어떻게든 보기좋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문명, 종교, 국가 등 지역을 그 비교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 서구만이 근대성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깨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구/비서구라는 도식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후기 혹은 2차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러도 좋을 당대를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라면 그런 접근이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다. 물론 '비서구인'으로 자긍심은 일부 회복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근대성의 기원에 대한 비교역사적 접근은 그 나름대로 큰 가치를 지닌 분야이나, 당대와 앞으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런 기원에 대한 집착은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적 결정론, 경로의존적 사고 말이다. 근대화의 특징은 바로 세계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던 것이고 그런 변화는 과거와 질적으로 단절되는 혁명적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가 근대성의 틀로서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었고, 그 이전 역사는 그 구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English/ modernity/ globalization

Egnlish/ Englishes 그리고 modernity/ modernities (multiple modernity[modernities] 혹은 varieties of modernity) 논의 구도와 또 비슷한 건 globalization과 world society 논의.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세계화'는 대개 일방향적, 서구화, 미국화 등으로 이해되고, 국가의 역할 축소 등등, 세계사회는 세계적 수렴과 분산 혹은 다양성의 혼재로 정의된다. 세계적 거버넌스가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국가 역할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주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등등. 세계화를 근대화론과 비교한다면 세계사회 논의는 신근대화론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있지만, 다양성, 혼재라는 양상에 대한 기술만 놓고 보면 신근대화론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의 거리를 그리 멀지 않다. 그 중에서도 죤 마이어는 좀 보수적인 것 같고, 루만은 그보다는 좀 더 래디컬한 것 같고, 몇몇 체계이론가들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간 것 같고... (슈텔리를 그 대표주자로 본다). (...)

내용이나 표현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런 얘기들을 그냥 쏟아내는 일은 좀 무책임한 짓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중에라도 고쳐 볼 마음으로 당장 떠 오르는 생각을 쏟아놓는 것이다. 뭐, '인적드문' '블로그'가 갖는 장점이라고 보면 마음 편하겠다.

"아시안 잉글리시" (리처드 파월, 푸른숲, 2010)

"원어민 영어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서평이 실렸다 (여기). 내 평소 지론이기도 해서 반갑게 읽었다. 길지 않으니 원문을 그냥 옮겨 놓는다.

"지은이는 영국 출신의 법학자 겸 언어학자다. <아시안 잉글리시>는 25년째 아시아에 살면서 이 지역을 구석구석 다닌 그의 눈에 비친 ‘영어 풍경’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은(아시아인들)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지요?”라고 묻는 한 서양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영어는 싱글리시, 타이글리시, 콩글리시 같은 현지 영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영어는 문법과 어순이 어긋나고, 근거 없는 단어의 조합도 많지만 현지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한 대출회사는 ‘貸(대) me more’란 이상한 광고를 냈는데, 데미 무어를 연상한 중국인들에겐 그만한 광고가 없다. 자동차 핸들(handle)이란 표현을 영어권(steering wheel)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선 일상용어다. ‘Let’to go for steamboat’(증기선 타러 가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선스튜 먹으러 가자는 표현이다. 그 나라 문화를 수혈받아 적응하고 변형된 ‘다른 영어’를 ‘틀린 영어’로 부를 수 없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한국에서 핸들이란 단어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원어민’의 문제이지, 한국 사람들 탓은 아니다. 영어권에선 거꾸로 아시아와 소통하기 위해 아시아 영어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러니 근거도 없는 원어민 영어나 표준 영어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한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에 있지,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익숙한 명제와 함께
."

p.s. 1) 당연히 번역서일 거라는 생각에 원전을 찾으려 '구글'해보았더니 왠걸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저작 소개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 "2009 (forthcoming): English in Asia, Asia in English. Seoul: Prounsoop" 물론 번역을 하긴 했겠지만 '푸른숲'이 기획해서 한글로 처음 출간된 책인 듯하다. 한국 출판계가 이런 '짓'도 하다니. 사실이라면 참 기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옆에 있다면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 ㅎㅎ

p.s. 2) 오래 전 IHT 기사에서 이젠 "English"가 아니라 "Englishes"라고 불러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재미있게도 English를 modernity로 바꾸면 기가막히게 비슷한 논의를 펼칠 수 있다. "modernity"와 "modernities" 사이의 논쟁 말이다. 흠. 이 얘긴 길어질 테니까 새로운 글에서...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운동의 2원칙: 힘 빼기, 핵심 동작 발견하기

귀국 후 주중엔 거의 매일 수영을 하고 있다. '출근'하는 공공도서관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수영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는데...

수영을 처음 배울 땐 물과 싸우려 든다. 빠져 죽지 않으려고... 물은 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움의 대상이다. 겨우 뜨는 법을 배운 이후에도 물은 내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겨내야 하는 대상이다. '선배들'이 몸에 힘을 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머리로만 이해할 뿐 체현해 내긴 쉽지 않다. 물이 극복하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되지 않아야 비로소 몸에서 힘을 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긴 시간 수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지상에서 이런 저런 무게에 짓눌린 내 몸이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물 속에서의 그 상황이 무척이나 반갑다.

물 속에서 속도를 내어 실제로 수영 실력을 쌓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인간의 몸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해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태가 최적일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의 중심축을 몸의 진행방향에 맞추는 일이고 그 축이 좌우나 상하로 움직이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이 내 몸을 타고서 흐를 때 편안하도록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머리다. 크롤영법('자유형')의 경우 고개를 최대한 안쪽으로 당겨서 시선이 바닥 정면이나 다리 쪽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머리와 고개를 잇는 축이 직선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선 몸을 최대한 수면 가까이 그리고 수평으로 유지하는 게 낫다..

요약하자면 (1) 힘빼기 (2) 물 속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원칙을 발견할 것!

이런 기본적인 원리(?)는 다른 운동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힘 빼기! 투수들의 경우에도 몸상태가 '약간' 좋지 않을 때 오히려 투구내용이 오히려 더 좋다고 자주 얘기한다. 몸 상태가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씀!

어쩌면 이런 원리(라면 원리)는 운동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도 기본적으로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디 학문이라고 다르겠는가. 평생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숙하게 대해서는 재미도 없고 또 잘 부러진다.

global (universal)/ local (specific)

근대 이후 역사에선 보편성을 지향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문명/ 야만 도식을 넘어서, 온인류, 인간에게 적용되는... (cf. '자연법' 논의). 보편성에 대한 각양각종 담론은 비록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최근 버전 중 하나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개인주의'는 근대 담론의 精髓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인주의에 대척하는 표현은 '집단주의'인가? collectivism? 낯설다). 개인주의는 대항해야 했던 집단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족, 가문, 신분...), 그 관철 과정에서 개인주의는 또 다른 집단주의를 만들어 낸다. 대표적으로 내셔널리즘 (nationalism, 국가주의 혹 민족주의)! 국가의 이해과 글러벌 문화 관계에서 보면, 국가이익을 지향하는 담론이 글로벌 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아니, 그런 과정에서 글로벌 문화는 비로소 형성되고)...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와 (새로운) 집단주의는 함께 성장한다. 그러 과정에서 개인주의, 집단주의 모두 진화한다. 2010년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그 민족주의와 같을 수 없는 것.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관계는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것인데, 그 양상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1960, 70년대에 한국 정부가 '발주'했던 출산조절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단지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인구증가 억제라는 정부 홍보가 먹혀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당시 출산을 계획했던 개인들의 이해관계, 판단, 결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엔 오히려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데, 아직 그 '성과'가 신통찮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공존하면서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명공학정책의 형성과정을 보면 그런 갈등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to be continued...

권력과 지식

„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Leviathan, ch. 26)
홉스 형님께서 남긴 말씀이란다. 번역하자면... Autorität, nicht Wahrheit schafft das Recht 혹은 Authority, not truth, makes the law. 매우 현실적인 관찰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푸코 형님을 만난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도식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지식을 통해서, 지식은 권력을 통해서.... 규율하는 힘은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루만, 체계간의 관계, 개입...

루만은 한 체계가 다른 체계의 작동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런 개입으로 인한 변화 가능성을 별로 높게 보지 않고, 또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체계외부의 영향이란 환경에서 찔러 보는 정도일 뿐이고 (irritieren), 체계의 경계를 유지시키는 작동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명쾌하다. 과학의 경우 정치, 경제 등 외부 체계들이 각종 정책이나 자금지원 등을 통해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주제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은 결국 과학 내적 코드, 즉 진술의 참/거짓이란 코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를 Willke 같은 학자는 정치체계의 다른 체계에 대한 (대표적으로 경제) 조정과 개입 가능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컨텍스트조정' (Kontextsteuerung)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루만도 옳고, 빌케도 옳고, 케인즈주의자들도 옳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이들의 유사과학적 진술을 배제하고, 실제 정치와 다른 체계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대개 개입의 현실을 인정한다. 몇 년 전부터 배회하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가 여러 학자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제2의 Black Friday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건 각국 정부들이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개입이냐 방임이냐"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일 것이다. 그런 결정은 대개 정치, 행정에서 내려지고 학자들은 그 결정 전후에서 이러쿵 저러쿵할 뿐이다.
경제 못지 않게 체계의 자율성과 개입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과학이다. 과학의 자율성, 연구와 학문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이 가져 오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물론 이 같은 과학의 힘 증대는 과학 스스로 해낸 게 아니다. 국가, 자본이 없었다면?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젠 과학을 좀 그냥 내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도 있다 (U. Beck). 그런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 영역에 대한 사회적 (과학의 사회적 환경의) 개입은 불가피한 것 같다. 역시 문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이 같은 근대화의 상태는 근대성에 대한 이상적, 규범적 담론이 설 자리를 크게 좁혔고, 마찬가지로 '다양한 근대성들' 같은 낭만적 주장 역시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세계사회의 내적 수렴이 대세인 것 같고, 국가간 지역간 차이는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 정도로 이해되는 게 옳을 것 같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내 놓을 대안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우리 시대는 복잡하고, 다양하고.. .등을 얘기하는 사회이론은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현실인데도...
사회이론, 거시 사회이론의 분화가 사회학의 대세인 것처럼 얘기하나, 내가 보기엔 '큰' 사회이론들은 대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현상은 세계사회, 세계화라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민망함도 힘이 되나?

슬픔이 힘이 되고 분도도 힘이 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민망함, 자괴감도 혹 힘이 될까? 답은 "어느 정도..."에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딛고 올라 설 수 있으니, 어설픈 민망한, 자괴감은 물론 어설픈 슬픔, 분노로는 힘을 낼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아직 멀었다.

다시, 디지털도서관

앉아서 뚫어져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 흠. 무얼 그리도 열심히들 보시는지.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 기도' 혹은 '어깨'들을 연상시키는 - '양복'입은 남성직원들. 공공기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하나 너무 노골적이라 보는 내가 당황스럽다.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Across The Universe (Rufus Wainwright)



오늘 '무한도전'을 재미있게 봤다. 녹화분량 걱정 탓인지 '오버'하는 모습이 가끔씩 걸리긴 했지만, 역시 '무도' '김태호'라는 얘길 할 수 있을... 'across universe'가 배경음악 중 하나로 들렸는데 낯선 목소리였다. 인터넷의 힘은 대단해서 마우스 몇 번 누르지 않고서 찾아낼 수 있었다. 원곡의 분위기를 모던한 방식으로 잘 살렸다 (2010년에 듣기에 원곡은 사실 좀 촌스럽거든). 가수는 낯설지만 이 영상은 이 음악이 OST였던 영화 'I am Sam'(2001)이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게 봤었는데 이런 음악이 깔렸던가, 새삼스럽다. Dakota Fanning의 야무진 모습도 기억에 남지만 Sean Penn의 연기력에 한 번 더 놀란 영화... ('Forrest Gump'[1994]의 더스틴 호프만 연기와 비교할 만한...).

ps) '텔레파시' 2편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속편 재미있기 어렵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음. 함께 보던 이들에게 '무도'를 과도하게 '찬양'한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2010년 10월 15일 금요일

본격문학/ 대중문학

충남대 오길영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 중 일부를 옮겨 놓는다. 내가 생각하던 바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출처)

"(...)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

2010년 10월 7일 목요일

호감, 친구, 소셜 네트워트...

"깊이 있는 사적인 교류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많은 만남이 인터넷이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글로 쓰면 인간성을 위장하기 쉽다. (…) 호감의 신호가 전해지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개인적인 만남이 드물수록 우리의 자존심도 확신을 얻기 어렵다. (…) … 에서 벌인 설문조사를 보면, 95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율은 88퍼센트이다. 친구가 가족을 앞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친구들은 서로 확실하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프랑크 나우만, 호감의 법칙. (그책, 2009) [원제, Frank Naumann, Die Kunst der Sympathie, 2007]


소셜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히 오프라인의 경우에 비해서 친절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편이다. 친절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선 뭔가 모를 조급증, 불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친절함을 통해서 주고 받으려는 호감, 그리고 보장받으려는 자존감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거다. 나우만씨 '말씀'처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호감의 '질'이 드러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난 트위터, 페이스북 따위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철학사는 철학자의 역사가 아니라 철학적 질문의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학사도 그렇고.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말씀'. 조선 성리학의 대가 김굉필의 삶을 소개하면서.... (출처)

색깔 (최성원, 1988)

초록 색깔이 나는 좋아 파란 색깔 있기에
주홍 색깔이 나는 좋아 빨간 색깔 있기에

이 세상 모든 색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파랑 빨강 모두 다 필요 없잖아 오 그럴 수는 없잖아
슬픔이 여기 있었기에 기쁨 또한 여기에
이별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

그 색깔로만 칠하자고 자꾸 너는 우기고
이 색깔만이 좋다고 자꾸 나도 우기네

도화지 모두가 한 색깔이면 오 그건 너무 너무해
그러면 도화질 찢어야겠네 오 그럴 수는 없잖아

미움이 여기 있었기에 사랑 또한 여기에
웃음이 여기 있었기에 만남 또한 여기에

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빨주노초파남보 우린 모두 무지개



'들국화' 하면 전인권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들국화 멤버들은 모두 뛰어난 뮤진션들이었다. '비틀즈'처럼... 가슴을 뻥 뚫어주는 폭발적 가창력의 전인권과 빼어난 감성의 소유자 최성원... 이 곡은 1988년에 낸 최성원 독집에 실렸다. 가사는 매우 단순하다. '동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유주의 선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율도, 그리고 노래도 빼어난 편은 아니지만, 가사 때문에 기록해 둔다.

2010년 대한민국의 초상: 디지털 도서관

'애용'하는 도서관 중 하나가 신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본관에 연결되어 있는 디지털도서관. 2009년 5월 개관한 탓에 두 말할 필요 없이 깨끗하고, 건물, 설비에 돈을 아끼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유리벽에다 천정도 매우 높아 어디에서 보든 눈이 시원한 건물이다. 출입구엔 자동문이 달려 있고 윗층으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까지 있으니... 컴퓨터, 모니터 등 모두 반짝반짝 빛난다. 허나 막상 내가 주로 찾게 되는 노트북 전용석의 책상이나 의자는 무척 후지다. 아마 과도한 설비투자에 대한 비판을 염려해 조금이라도 싼 구석을 만들어 만들어 보려는 윗선의 전략적 개입 탓인 아니었을까 나름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하지만 이 공간엔 더 웃기는 일들이 널려 있다. 예를 들어...
이 곳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자동문과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유를 친절하게 붙여 노셨다. '에너지 절약'이란다. 정부시책, 어쩌구 저쩌구... 과도하게 럭셔리하게 만들어 놓고선 막상 전기요금이 무서워서 아낀단다. 멍청한... 더 재미있는 건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 안내석 두 곳엔 각 세사람씩, 도합 육인이 - 대부분의 시간 - 앉아 있다. 오고 가며 그들이 앉아서 쳐다 보고 있는 모니터를 훔쳐 보는데 대개 내게도 익숙한 화면들이 떠 있다. 네이버, 다음, 싸이, 페이스 북 등등. 뭐 가끔씩 업무 관련 화면도 뜨겠지만 내 눈을 피해서 업무를 보는지 아직 목격하진 못했다 (아, 아래 층 삼인의 경우 방문객과 마주 보고 있어서 그들이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를 확인할 수 없긴 하다).
우습지 않은가. 전기요금은 아끼면서 그런 잉여 인력을 고용하는 건 무슨 심보인가? 에너지 절약과 실업자 구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기가막힌 묘수인가? 한심한... 화려하다 못해 의리의리한 건물, 애써 만들어 놓고 세워두는 에스컬레이터 (그러다 썩겠다. 가끔씩 기름칠은 해 두시길...), 하루 종일 멍청하게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젊은이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고 꽤 잘 어울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아...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인생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요. 처음에는 늦게 없어지다가, 나중에서 빨리 없어지죠."
- ㅈ 목사 twitter 에서 -

흠. 적절한 비유다. 가슴에 콱콱 꽂히는... .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

- 어니스트 러더포드 Ernest Rutherford


ps) 비슷한 얘길 아인슈타인 버전으로도 들은 것 같은데...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일 듯. 여하튼 정확한 인용이라면 기억해 둘만한다. 참고로 러더포드란 양반은... Ernest Rutherford (1871– 1937) was a British-New Zealand chemist and physicist who became known as the father of nuclear physics.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정보 사회학 주제

한겨례의 최근 기사다: "아저씨, 트위터 바다에 빠지다"

재미있는 내용이라 좀 많이 잘라 온다.

"'아저씨’ 열풍이 분다.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트위터 붐의 한 축에는 중장년 트위터리언(트위터 사용자)들이 버티고 있다. 지금껏 젊은층들의 전유물로만 받아들여졌던 온라인 무대에 한손에는 노트북, 한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아저씨 아줌마들이 상륙하기 시작한 것. 지난해 ‘코리언클릭 데이터’에서 한달 동안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트위터 사용자들 중 35살 이상 중장년층들의 비율이 24.3%로, 이는 인터넷을 왕성하게 활용하는 19살에서 34살 청년층들의 비율인 25.8%와 맞먹는 수치다. 올해 트위터 이용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중년층의 이용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시사주간지 〈시사IN〉의 기자이자, 유명 트위터리언인 고재열(@dogsul)씨는 중년들이 마침내 자신들에게 맞는 온라인 서비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싸이월드나 블로그, 미투데이 등 지금까지 한국의 개인 미디어 서비스들은 10대, 20대들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중장년층들에게 그런 서비스들이 자신들은 입장할 수 없는 클럽처럼 받아들여졌다면, 30대 사용자들이 터를 닦은 트위터 서비스는 소주방처럼 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라는 것이 고씨의 견해다.

트위터가 소통에 목마름을 느끼는 한국의 중장년층을 위한 새로운 대안매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언론학자인 이창현 교수(국민대·@wedia82)는 중년층의 트위터 이용 증가에 대해 “중년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긴밀한 소통의 욕구가 해소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안매체로서 트위터를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49살의 연구소 직원 박사종(@parksajong)씨는 트위터에 빠져드는 이유를 외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바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제 서로 공유하는 게 없어 얘기할 게 없고, 그래서 자기 푸념 겸해서 빠지는 게 아닐까요.”

기업인 전하진(52·@hajinJ·전 한글과컴퓨터 대표)씨에게 트위터는 소통의 도구이다. “젊은 기업인들의 권유로 트위터를 하게 됐는데 마치 넓은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는 점이 좋은 점이죠.” 회사원 이영섭(40·@sanddara)씨도 “일보다는 보다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는 게 트위트하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은 트위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세대들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고재열씨는 “트위터 사용자들은 이전에 사용해본 적이 있는 인터넷 서비스의 사용 패턴을 트위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10~20대들은 트위터를 마치 메신저처럼 사용한다. 반면 사이버 공간에 제2의 자아를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은 인터넷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라고 말한다 (..
.)".

이런 기사도 있다: "SNS 선호도, 20대 싸이월드 · 30대 트위터 · 40대 블로그 선호한다"

"디지털 미디어 컨버전스 기업 DMC미디어(대표: 이준희)는 19일 전국 1천 3백 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SNS 사용자 의식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20대는 총 44.6%가 싸이월드를 가장 선호한다고 응답한 반면, 타 연령대에 비해 블로그 및 카페 선호율이 낮게 나타났다.
트위터를 가장 많이 선호하는 연령대는 30대로 총 24.9%가 트위터를 선호한다고 응답해 싸이월드를 선호하는 26.7%와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반면, 40대는 블로그 사용률 38.3%, 카페 선호율 20%로 타 연령대에 비해 높았다.
또한 트위터 선호율이 21.7%를 기록, 20대보다 트위터에 대한 높은 선호율을 나타내 트위터를 사용하는 연령대는 30대~40대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그렇다. 아래에서 facebook 담론이 관습화된 진보인 것 같다는 얘길 했지만, 사실 그런 양태는 특정 연령층에 한정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 표현으로 '486세대' 혹은 '7080'세대라고 지칭할 수 있을... 내가 오래 전부터 주장하는 - 매우 상식적인 - 테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진화다. 정보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왠일인지 별로 들리지 않는다. 가끔씩 만나는 논문들은 너무 딱딱하고... 이런 건 통계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참여관찰, ethnography 같은 게 좋을텐데... 과연 이런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볼 수 있을런지...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한국에서 진보적이기...

진보,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지만 그냥 넘어가자. 한국에서 어떤 발언이 '진보적'으로 해석되기, 다시 말해'진보적'으로 해석되는 발언을 하기란 참 쉬운 것 같다. Facebook '친구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올리는 단문들을 보면 한국 사회 여기 저기에 있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한 비판적 - 그래서 진보적? - 성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 건전하고도 합리적 상식을 기초로 삼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 시절이 얼마나 한심하면 '상식'을 얘기하는 게 '진보적'으로 들린단 말인가. 한국 우파들의 저렴함, 천박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장면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런 상식적 발언들을 적지 않은 에너지를 써가며 해야 하는 그런 몰상식적 상황에 대한 분노나 안타까움... 하지만... 그런 분노, 안타까움의 표출이 반복되면 그것 역시 지루한 일이 되어 버린다. 진보의 색깔은 원래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발, 전복... 뭐 그런 쪽이어야 할 것이다. '상식'을 강조하고, '원칙'을 지키자, '교양'을 키워 나가며... 이건 원래 전형적인 '보수' 영역인데, '진보'가 그런 영역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럴까... [요샌 좀 다른 것 같지만, 한국에서 rock은 오랫동안 고급, 엘리트 문화였다. 뭐, 이런 현상과 연결되지 않을까?]
다시 말 해 한국에서 진보적이긴 어렵지 않지만, 아니 진보적으로 해석되는 발언을 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그게 어떤 진보인가, 과연 진보인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 몰상식에 대한 관습화된 비판은 착한 시민과 착한 사회, 그리고 적절한 여유와 문화를 즐기는 교양있는 중산층 문화의 확대... facebook의 담론은 대부분 그런 수준에서 재생산되는 것 같다. [아, 물론 내가 딱히 진보적이란 건 아니다. 나야 말로 방금 기술한 그런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아닌가.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요지는... 성찰을 요구하는 그런 담론을 한 번 까칠한 시선으로 딴지걸어보자는 것].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갈팡질팡 정체성 혼란에 빠졌던 '민주화' 세대. 민주화 같은 뚜렷한 공동 목적을 잃고, 진보적 담론의 일부를 '정권'이 가져간 상황에서 - 예를 들어, 참여라는 가치. 이름부터 떡하니 참여정부로 짓지 않았던가? - 선명한 대립 전선을 만들어 내기 힘들었던 그런 세력/담론에 멩박씨는 참 구원자였다. 내가 자주 강조하지만 멩박 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한국 우파들의 수준(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낸 데 있지만, 현재적 시각으로 보면 '민주' 정권을 지지하기도 비난만하기에도 어정쩡해 하던 이들을 다시 반정부 전선으로 결집시켜 준 데서 찾을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천박하고도 몰상식한 무리들이 득세한 결과로... thanks to 2mb... 한국에서 진보적이기, 권력에 비판적이기... 참 쉽다.

2010년 9월 11일 토요일

하고 싶은 얘기, 다루고 싶은 주제는 많고, 공식적으로 그런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면허증을 아직 손에 쥐고 있지 못하고, 그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 '해치워야' 하는 일은 더디게 진행되고...

"연예 사회학"의 한 주제...: 인터넷, 네티즌 수사대, 집단지성(?) 그리고 투명성

최근 연예계 뉴스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은 인터넷 매체의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거리를 안겨준다. (1) 태진아 부자와 작사가 사이의... (2) 신정환 필리핀 도박... (3) 엠씨 몽.. 병역 기피 (4) 타블로 학력. 요샌 어떤 사건이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받으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동시에 움직인다. 공진화하는 것. 특히 인터넷 매체, 흔히 얘기하는 '네티즌 수사대' 의 '활약상'은 큰 관심을 끈다. 이루 부자 사건의 경우 수십년 전 신문기사까지 등장했다 (네이버가 옛신문 검색 서비스 덕인 듯). 종이신문과 다르게 인터넷에선 과거 발언, 단서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몇몇 기자들의 두뇌 활동 능력은 인터넷 네티즌들의 집단 지성의 활동을 좇아가기에 바쁜 상황이다. 황우석 사태, 디 워 논쟁, 광우병사태(?), 천안함 사태 등에서 확인했지만 네티즌, 집단 지성은 어디로 튈 지 예측하기 어렵다. 어떨 땐 매우 좌파적이고 진본적인 지향을 보이다가, 비이성적 담론이 쉽게 형성되기도 하고....
하지만 워낙 근대적 합리성, 체계 합리성이 아직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토양이라 - 이 말은 곧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서 결정되는 상황이 많다는 말씀 - , 우후죽순 흘러 넘치는 정보, 담론의 덩어리들, 그것들을 들춰내서 유통시키는 활동이 이 반가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눈감아주고, 감춰주던 그들의 네트워크의 작동 메카니즘에 상당한 손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비이성적, 유사파시즘적 대중, 우중이 될 위험성도 있고, 그 네트워크에 의해서 '대중주의'적으로 악용될 수도 있고..
결론 내리는 일은 좀 미뤄두기로 하자. 가능성을 보자면 어느 쪽으로건 열려있고, 현재 상황을 진단하려면 경험연구의 시선으로 더 추적해 보아야 할 것 같으니까.
난 twitter, facebook, google, Apple 따위의 새로운 미디어나 그 언저리에서 잘 나가는 행위자들이 세상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처럼 떠벌리는 그런 담론에 아주 진저리를 치는 편이다. 기술 결정론... 생명과학, 생명공학의 영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이오텍 센츄리"(biotech century), biological 혹은 genetic citizenship/ bionationalism 등을 얘기하고...
어제 참석했던 학술모임에서는 '지리 결정론' '공간 결정론'적 진술을 지겹도록 들었다. spatial turn.. 운운하는...
무슨 'turn'이 그렇게 많은지.
한 두 가지 개념, 주제로 세상을 다시 재단하고 재편하려는 시도가 다양하다는 것, 그런 다양성이 바로 현대성의 징후다.

2010년 9월 8일 수요일

壓力 혹은 누르는 힘

四方, 八方, 十六方, 아니 全方位에서....

2010년 9월 4일 토요일

9월, 아직 여름...

요샌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게 된다. 뉴스 사이트를 새로 확인해 보는 마음과 같겠지. 워낙 일상이 무미건조(x 1000...)하다보니 그런 싸이버 공간의 변화를 통해서라도 세상이 바삐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마음일까? 아니면... 어떤 갈급함 때문일까? 사람 냄새? 세상에 대한 성찰? 자극? 도전? 일상에서 쉽게 얻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얻어 보려고? 역시 '오프라인'은 '온라인'의 대체제인가? 물론, 둘 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보완하는 역할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태풍이 지난 자리를 '급' 차지할 줄 알았던 가을 바람이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다. 다행이다... 아직 새 계절을 맞을 준비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거겠지. 달력을 보거나 날짜 확인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심지어 머지 않아 추석이다. 딱 1년이다. 추석 때 들어왔으니...
내 상태와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명절은 꼬박 꼬박 돌아오고...
암, 그래야지. 그래야 자연이고 역사고....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괴로울 땐...

음... 자는 게 약인데 그 길마저 봉쇄되었음. 그래서 더 괴로움 ㅠ ㅠ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facebook 관람기

facebook에 어떤 흔적을 남기려면 자기 검열을 여러 번 거쳐야 한다. "불특정 다수"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로 퍼져 나가는 건 분명하고, 다른 한편 인터넷 항해 중에 여기 저기 남기는 댓글과는 다르게 내 발언의 출처를 쉽게 추적당할 수 있기 때문에... 內密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다. 제 삼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포장지를 여러 번 씌운 이야기나 '지당하신 말씀'을 할 수 밖에... 물론 자신의 관심사, 지식, 기호 등을 '불특정 소수'에게 드러내는 일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사람들을 맺어주려는 노력이 지나치는 것 같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쏟아 내라고 재촉하는 그런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정보를 신속하게 나누는 일엔 장점이 있겠지만, 그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쉽게 비만에 이르게 한다. 영양가를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막 쏟아 부으니까... twitter도 그렇지만, facebook도 networking이 긴요한 이들, 이른 바 명사들이나 인맥관리가 절실한 이들에게 유익하겠지만, 뭐 딱 그 정도인듯..
아직 만나거나 연락을 취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사진이 뜨면서 "한 번 연락을 취해보실라우?"라고 채근댈 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당황스러움이란 느낌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략]

그러나 다른 한 편... 인간에겐 관계를 넓히고 싶은 욕망, 제 삼자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다 - 무엇을? - 남 얘기를 훔쳐서라도 듣고 싶은 욕망도 있으니까...

소셜 미디어는 그런 오래 묵은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펼칠 수 있게 해주고 있는 지도...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한국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언젠가 한국 정치에서 이념 - 서양적 의미로... - 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은 2mb로 봐야 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우파,부르조아지, 혹은 강남족들...? 등등), 최근 들어 '친서민' 행보를 강화하고 심지어 '전경련'과도 갈등을 보이면서 적잖은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다. 물론 그들의 그런 발언이나 행태가 선명한 '우파 정부' 정체성을 희석시키려는 안타까운 '몸짓'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이들이 '서민' 운운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한국 정치문화에서 '이념성'을 유지하기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좌/우나 진보/보수,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념 구분이 아니라면 도대체 한국 정치문화를 어떻 구도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 실마리가 최근 치뤄진 두 번의 선거. 지방선거와 보궐 선거.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이겼던 민주당이 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를 두고 2mb씨께서 균형과 견제를 요구하는 민심에 놀랐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신 바 있는데... 실제로 한국 정치문화는 딱 그 정도 아닌가 싶다. 균형과 견제... 시종일관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좇지 않고... 그 때 그 때 형성되는 '판'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실용주의라고 해도 좋고... 물론 지역, 영토를 떠나서 인간의 상호작용은 본질적으로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게임의 규칙'은 그 때 그 때 만들어진다고 봐야겠지만, 내 말은 그 정도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
한국 정치문화의 전개는 주류 정치 문화나 정치 담론과 그에 대한 저항 담론, 대안적 담론 간의 '변증법'적 관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주류 쪽 담론의 내용은 대개 발전, 경제 성장, 선진국, 선진화 등으로 지속성이 있다면, 저항 담론의 내용은 좀 더 극적으로 바뀌는 편이다. 민주화, 통일, 민족주의, 참여민주주의, 경제민주화, 인권, 환경담론, 여성권리 등등.
이 관계를 변증법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주류 담론이 저항 담론의 내용을 일부 수용해 왔고, 저항 담론은 그 상태에 따라 새로운 이슈, 주제를 제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용'은 매우 선별적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는 저항 담론의 내용을 수용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담론적 상황, 구조적 상황이 그 선택적 수용의 시기, 범위 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 혁명 같은 저항담론이 사그라들고,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참여민주주의, '시민사회', '시민운동', '경제민주화', 생태주의, 여성주의 같은 담론이 선택되었고... ]
한국 근대화 속에서 정치,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 본 한국 정치의 전개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사회구조적 측면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ps 1) 내 얘긴 한국 정치에 보수주의, 권위주의, 발전주의, 국가주의 등이 지배적이었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심지어 민주화 이전에도 저항 담론은 꾸준히 지배담론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는 것. 예를 들어 "한국근대화는 오직 발전이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근대화는 실패"(김대환?) 라는 평가는 너무 일면적이라는 것. 87년, 그 찬란한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심지어 87년 이전과 이후의 정치 문화 차이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촛불시위' 등장에 놀라는 것 아닌가... 라는...

ps 2) 또한 정치 갈등의 내용을 좌/우나 진보/보수 혹은 정치 이념들로 채우기 힘들다는 것. 이 과정에서 여러 정치 이념들 (보수주의‧자유주의‧민족주의‧급진주의 등등) 간 투쟁이 있었지만 [cf. 강정인 외 2009, 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 한국 정치의 여러 특성은 그런 방식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당정치가 '여전히' 약하고, 대규모 촛불시위가 뜬금없이 등장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정세에 큰 변화가 없는데 1달 만에 선거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고... 등등.)

ps 3) 이런 문화, 문화 간 갈등은 심지어 한국 근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편, 근대 초기 사회진화론에서 시작되어 발전, 경제성장, 선진국, 선진화로 이어지는 '근대화' '발전' 담론/문화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에 대한 비판/대안/저항 담론이 있고... 근대화 담론은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일본에 맞서기 위한 사회진화론 담론 이후 친일 담론에서도 발견되고... 일제 시대 때 발전, 진화는 독립 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예를 들어, 과학조선 운동] (일종의 비판 담론?)... 근대화, 발전, 부국강병 담론이 항상 주류이지 않았다는 말씀. 여하튼 사회구조적 관계 변화와 문화 간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이라 단정적으로 묘사하기 힘들 것 같긴하다.

피상적 예절 교육, 피상적 교양, 피상적 읽기...

'로쟈'가 지젝에 대해서 한 얘기를 일부를 옮겨 놓는다. 느낀 바가 있어서... (심지어 오른쪽 마우스 금지 장벽까지 뚫고서 불펌했는데 양해를... 강조는 내가...).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동행하게 될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깊이 읽기’가 아니라 ‘피상적인 읽기’다. 더 깊이 읽는 건 각자의 몫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거는 ‘마술’은 피상적인 읽기와 조우를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을까. 당신도 궁금해하면 좋겠다. 이제 다음 회부터는 걸음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옮겨놓도록 하겠다.



피상적 읽기/ 깊이 읽기를 구분했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용' 아니겠는가? 무엇을 깊이 읽을 것인가? 무엇을 피상적으로라도 읽을/ 읽힐 것인가? 로쟈는 지젝의 글이 널리라도 읽히길 기대하는 모양인데 꼴통 오른 쪽 날개 할아버지들도 젊은 세대들에게 충심으로 읽히고 싶은 책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상식이고, 누구의 예절이고 교양이냐다.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우리가 기댈 곳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본성' '이성' '성찰' '상식'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걸 상정할 수 밖에 없을까?

2010년 8월 7일 토요일

obstacle épistémologique?

Thinking in terms of dichotomies
and obsessed by a sense of victimization.
Enjoying a mood of tragedy
Drawn somehow to conspiracy theories.
Distrusting local discussions
and believing that macro-theories will explain all.
These are the obstacles
that the intellectuals of this land have to overcome.

- 조한혜정 -

ps) 영어로 번역된 논문 앞 쪽에 실려서 무슨 詩인가 했더니... 공감한다. more than before...

2010년 8월 5일 목요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박새별)




대단한 날씨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란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뜨거운 김이 나는 찜통 속에 들어 있는 그런 기분..
지하철에서 내려 걷는다. 땀이 좀 흘러 내려도 그냥 놔둔다. 쿨하게... 조금만 참으면, 저 건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금새 식힐 수 있을 테니...
시원한 건 건물 속 공기만은 아닌지 이런 청승맞은 노래가 '땡긴다'. 박새별이라... 누군가 했더니, 유희열이 발굴했다는 그...
노래를 맛깔나게 잘 부른다. 광석이 형 색깔이 강한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기 노래로 만들었음. 특히 고음 부분이 듣기 좋다. 연주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좋고.

p.s.) 나만 좋게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 노래에 대한 일종의 '뒷담화'를 발견해서 덧붙여 놓는다.

"작년 이맘때쯤 시대의 가객 김광석 다시부르기 특집에서 싱어송라이터 박새별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이다. 공연 당시 모든 관객들은 숨을 죽였고 한켠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박새별의 이 노래는 가슴에 남아 눈가를 축축하게 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박새별이 난장MC의 적임자라는 판단으로 그녀를 마냥 꼬드겼고...".

2010년 8월 2일 월요일

2010년 7월 31일 토요일

학습효과? 설마...

프레시안 기사를 본 후 모처럼 정치 얘기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내 첫 반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 내 말이... "

일부만 옮겨 놓으면

" ... 이 대통령이 매년 며칠 간의 휴가를 떠나긴 했지만 청와대는 항상 "휴가지에서도 일을 챙길 것이다", "이러이러한 지시사항을 내려놓고 갔다"고 부연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단서도 없을 뿐더러 이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들이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하라"고 수차례 강조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이 대통령은 또 "선진일류국가는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문화, 인격, 윤리와 같은 가치가 동반돼야 한다. 공직자는 공직자 윤리를, 기업인은 기업인 윤리를 지켜야 선진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취임초부터 '국격' '선진화' 운운하던 양반이라 큰 감동을 주진 못한다. 과연 그 스스로 '문화, 인격, 윤리 같은 가치'에 큰 무게를 두고 살아 왔는지, 그런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 긍정적 대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early bird 증후군"이었나... 그런 말이 생기고, 제발 좀 쉬어야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고 나왔던 터라, 1주일이라도 휴가를 떠나'신'다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임기를 절반 정도 보내면서 깨우치'신' 바가 있는 것인지... 최근 '전경련'과 약간의 '갈등'도 그렇고... 기대치를 저 밑바닥으로 내려 놓은 탓인지 이런 사사로운 얘끼에도 반가운 마음이 '급' 드는 것이다.

죽은 적이 없는 4대강을 살리겠다는 이 해괴망칙하고 천박한 -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후진국적인 혹은 '선진일류국가'가 되는데 역행하는 - 발상에 여전히 역겨움을 금치 못하고 있지만,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고 한 두가지 만이라도 배워 나가면 그게 어딘가 싶은 것.

최근 발간된 자서전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2MB에 대해서 혹평을 했다고 하던데, 그런 평가가 기록으로 길이 길이 남는 것,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남은 기간 다른 것 보다 역사 공부에 매진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다. 그래서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진 역사적 평가를 조금이라도 만회하시길...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얘기지만 더 큰 문제는 '차기'다. 진정한 학습효과는 유권자, 시민, 국민 - who are these people? - 들이 얻어야 한다. 그리고 '차기 대권주자들' '정치인들'이 그래야 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건 역사의 큰 물결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을테고, 정치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매우 '후진국'적인 현상인 것도 분명 맞는 얘기지만, 조금이라도 덜 챙피하면서, 더 세련된 선진국형 대통령을 갖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급만 되도 좋으련만...

근대성, 주변부의 경우

사회학에서 핵심 개념 하나만을 얘기하라면 난 주저하지 않고 '근대성'('모더니티', modernity,
Modernität)을 꼽겠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근대성은 - 동어반복인가? 근대 이후로 확산되는 근대성? 근대 이전에도 근대성이 발견되는가? 물론 이 모든 건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그렇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유럽에서 시작되어 유럽 밖으로 확산되었고 이제 지구 전체를 지배하다시피하고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미국얘들이 좀 서운할 수도 있겠다. 뭐, 베네틱트 앤더슨이 얘기하는 'imagined community'로서 근대국가는 결국 미국의 전형적인 모델이니 어쩌니 하는 논의도 있는 것 같은데... 좋다. 어쨌든 근대성의 뿌리는 유럽이지만 미국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유럽의 근대성이란 것도 비유럽의 존재와 비유럽과의 교류를 빼고선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고려한다면, 유럽이 근대성의 연원인 것 분명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창작품이 아니란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비서양에이 경우 이 근대성은 참 다루기 힘든 물건이다. 수입, 확산되었다고 얘기하려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래서 뭔가 전통에서 근대성의 특징을 찾아내 보려고 애를 쓰기고 하고, '아시아적 가치'처럼 때론 아애 다른 근대적 모델을 주장하기도 한다. 난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반세계화'운동이 현실이된 '세계화'를 보여주는 모습의 하나에 불과하듯, 아시아 근대성, 한국 근대성을 찾는 노력이 성립한다는 사태 그 자체가 이미 근대성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래서 유럽산 '단일한 근대성'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지역적 차이는 이 이 단일한 근대성의 변이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varieties of modernity (O), multiple modernities (x)].
그렇다면 비서양에서 근대 이전, 보통 '전통'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근대성의 유럽, 혹은 북미까지 포함시켜서 서양 출신으로 이해할 경우, 어쩔 수 없이 그 '나머지'(the rest)는 서양에 대한 '타자'로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Weste/ the Rest; Western/ Easter or non-Western, 혹은 중심부/주변부 center/periphery). 뭐,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까짓건 일단 쿨하게 인정해 버리도록 하자]. 우선 유럽산 근대성의 여러 특성의 - 제도, 문화 등 - '수용'에 영향을 미친다. 유럽산 근대성이 비유럽/비서양에 단순히 '이식'되지 않는다는 것. 전통사회는 이미 그 내부적으로 충분히 복잡하고 다양한 제도,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 친화성을 보이는 방향으로 수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제도,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이른 바 글로컬라이제이션 (glocalization).
그리고 이제 세계화, 근대화, 근대성의 확산도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는데, 유럽에 그 뿌리를 둔 근대성이지만 이제 근대성의 진화 과정에서 그저 수용자/소비자 역할을 하기만 했던 주변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주변부/중심부의 구분을 서양/비서양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이젠 '근대성'을 얘기하면서 괜히 주눅들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계사회의 문화(=근대문화) 생산/유통/소비에 있어서 중심부/주변부 경계를 긋기 애매해지고 있다 [아, 그전에 근대성을 사회구조와 문화, 두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음을 언급했어야 했는데... 어쨌든 사회구조는 유럽산 그 틀이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 그것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얘기해야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 - 문화는 원래 유연한 차원이니까...].
...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어린아이 나무라지 마라. 네가 걸어왔던 길이다. 노인 너무 무시하지 마라. 네가 갈 길이다"

- 배우 박중훈씨 어머니 -
"성공은 내가 놀고 있는 건지 일하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때 찾아온다"
- 워렌 비티 -

"거룩하고 신성한 일
심각한 일
중요한 일도
장난삼아 하는 게 좋아 "
- 김창렬 -

ps) 워렌 비티. 유명한 영화배우라는데 잘 모르기에 패스. 어쨌거나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 받으니까, 저런 얘기가 돌겠지.. 그런데 '성공'은 어떤 '성공' 의미로 하신 말씀?
'노래하는 창렬이'... 가 아니라면 김창렬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라 나중에 덧붙임.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분노유발자

인간, 타인에 대한 예의를 상실했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족속들. 후진국에서 더 자주 발견됨. 아니, 그런 족속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를 후진국이라고 일컬음.

-정광진 -

정신병자

제 정신만으로 살아가는 인격자

-이외수 -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2010년 장마, 잠실에서

"장마"...
참 오랜만에 듣고 또 써 보는 단어다.
주말부터 장마라더니 서울은 아직 영향권이 아닌지 조용하다. 오히려 밤엔 더 선선하기까지...

이맘 때 떠올리게 되는 노래가 있으니 바로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난 정태춘 초기 작 중에서는 '북한강에서'를 최고로 치고, 노래 방향을 바꾼 이후로 부른 노래 중에선 이 노래를 최고로 꼽는다. 예를 들어 1990년에 낸 '아, 대한민국'에 실린 몇몇 노래들은 가사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부담스러운데다가 음악적으로도 시원찮다. 너무 단순하다.
3 년 뒤에 낸 - 그 기간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큰데...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 이 음반은 음악적 성취도가 훨씬 높다. 그 음반의 여러 노래 중에서도 가사나 작곡 면에서 가장 세련된 곡이 바로 이 노래...

youtube에 올라 와 있지 않은 탓에 가사와 앨범 표지 사진으로 대신한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를 2010년에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
아마 지난 두 정권에선 뭔가 어색했을 노랫말들이 요즘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
자칫 흘러간 노래로 기억될만한 이 노래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된 건 모두가 위대하신 '가카'의 탁월한 영도력 덕분이다.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캄사, 캄사...
아닌 게 아니라 2009년 노무현 추모공연에서 배우 권해효가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은 생각, 기대보다 한참 더 더디게 바뀐다.
지금은 반동 혹은 퇴행기임엔 분명해서 우울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럴 필요 없다. 역사를 어디 그리 쉽게 되돌릴 수 있던가.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 1993)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 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에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 가는구나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훠이훠얼
빨간 신호등에 멈쳐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길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훠이훠얼

p.s.) 2010년 장마를 난 잠실에서 보내고 있다. 종로엔 아직 가 볼 일도 없었고, '물대포'에 쓰러질 일은 더더욱 없고... 하지만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2010년에도 공감하며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그 까닭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지는 않으련다. 설명이 길어지면 변명이 되고 사람마저 구질구질해진다.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sleepless in Seoul

끈적끈적한 여름 저녁
쉽게 잠들 수 없어서 책상 앞에 다시 앉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Cucurrucucú Paloma ([1965] 2002) Caetano Veloso

6월초지만 날씬 이미 한여름이다. 며칠 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었다.
그렇지. 아직 더운 열기가 남아 있는 한여름 저녁에 어울릴만한 그런 노래... (이미 올린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듯...).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Hable con ella, 2002)의 한 장면.
교외 '별장 feel' 을 풍기는 저택에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감상을 하고 있다. 가수라기 보단 노래 잘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이의 노래를... 이 장면은 영화 중에서 남자가 코마상태에 빠진 여친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사실 이 노래에 feel이 꽂힌 감독이 애써 삽입한 거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무척 평범해 보이는 남자 배우의 눈물 흘리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영화엔 그 밖에 '무용' '그림' '무성영화' 등등 '먹물' 냄새를 풍기려고 작정한 듯한 여러 에피소드를 끼워 넣었는데, 그래도 솜씨가 좋아서 과하다 싶진 않았다.
'투우' 얘기도 나오니 스페인의 '임권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본 영환 대개 '향토색'이 짙었다. 이런 명화를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는 날이 곧 '다시' 오겠지 ㅠ ㅠ 아니, 올까?



ps) 원래 1965년에 동명 영화 주제가로 발표된 노래인데, 그 원곡을 유투브 검색하다 우연히 듣게 되었다. 꽤나 밝은 톤으로 너무도 가벼웠다. 리메이크의 힘!

2010년 6월 4일 금요일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민주당, 한명숙...

생각할수록 서울시장 놓친 게 아쉽다. 오늘 내가 아래 글에서 한 얘기, 또 하고 싶었던 얘기를 200% 글로 표현해 준 한겨레 정남기 논설위원의 칼럼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출처는 여기).


[아침햇발] 김상곤과 한명숙 / 정남기

민심은 역시 무서웠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야권조차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덕분에 민주당은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진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 규모 선거에서 완승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 선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관전 포인트도 여러가지다. 사상 최대 규모라는 것에서부터 북풍과 노풍의 정면대결, 전국적인 교육감 선거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예전보다 훨씬 높아진 투표율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대상은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과 한명숙 전 총리 두 사람이다. 한 전 총리는 정권심판론의 대표 주자, 김 교육감은 최대 이슈인 무상급식의 아이콘으로서 사실상 범야권의 간판스타였다.

김 교육감의 압승은 여론조사 결과 일찌감치 예상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가 주도한 전면 무상급식 정책이 범야권의 최대 공약으로 선거 국면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등 진보적인 교육감을 대거 당선시킨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 교육감의 교육개혁 방식은 남다른 점이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중적인 견제와 이념공세를 받았지만 불필요한 충돌이나 논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가 ‘천안함’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대신 그는 교육개혁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판교 보평초등학교, 고양 덕양중학교 등 혁신학교들이 그것이다. 그가 취임 한해 만에 학부모들의 호응과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무상급식 정책은 야권을 넘어 여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작은 개혁이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는 그 반대다. 애초 예상보다 선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서울시장 자리를 놓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또 25개 구 가운데 21곳을 휩쓴 민주당이 정작 서울시장을 내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잘했다는 아전인수식 평가나 패배의 원인을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군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후보 개인의 경쟁력이 약했다. 그는 선거기간 내내 ‘정권심판’과 ‘무상급식’만 앵무새처럼 외쳤을 뿐 자기가 왜 서울시장이 돼야 하는지, 시장으로서 비전과 목표는 무엇인지,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했다. 시정 업무에 대해서도 알맹이 없는 부실한 발언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문화방송> 주최 토론회에서는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 두 사람이 토론을 주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 한 후보는 정권심판론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선거전략의 정점에 있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 저절로 바람이 일어 정권심판론으로 이어지리라는 안이한 선거전략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때문에 공천 개혁도 없었고, 제대로 경선도 치르지 않았다. 또 텔레비전 토론은 회피 전략으로 일관했다. 애초 선거 전략과 구도가 잘못 짜인 탓이다.

이번 선거를 민주당이나 야권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이 꺼려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권자가 오만과 독주로 치달을 때 이를 스스로 견제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자동제어장치라고나 할까? 민주당이 민심을 움직인 게 아니라 민심이 먼저 움직여 민주당을 다시 정치무대의 전면에 올려세운 것이다.

수능재주(水能載舟), 역능복주(亦能覆舟)라는 말이 있다. 권력은 배, 민심은 물과 같으며, 물살을 거스르면 배가 뒤집어진다는 얘기다.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선거에서 진 여당만의 몫은 아니다. 야당 역시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찾아 새겨야 한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아깝다. 한명숙...

어제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 정치사의 기억으로도... 어쩌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 당선에 버금가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이긴 사건이었고, 개인적으론 한국 국민(대중, 민중, 시민? egal was... )의 정치적 감각, 판단력에 대한 신뢰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멩박씨가 당선되었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봤다. 10년간 기회를 줬으니 한 번쯤 바꿔볼 때가 된 것이다. 노무현을 이어갈 인물이나 발굴해낼 시대정신도 없었기에, 대단한 기대 없이, 엣다, 한 번 해 봐라, 하며 기회를 준 것. 그런데 국민을 섬기겠다던 이가 시대착오적, 80년대식으로 나오자, 이미 지난 10년을 지내면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눈에 고깝게 보일리가 없는 것이다. 멩박씨와 그 언저리에서 노는 사람들은 한국 보수세력과 그들을 추종하는 '보수적' 국민들의 천민성, 천박성, 역사의식 부재만 만천하게 드러내고서 이번 선거에서 처절하게 박살난 것이다. 멩박씨 일당에 의해서 죽음으로 내 몰린 노무현의 적자들이 도지사로 선출된 사건. 안희정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한대로 시도지사들이 청와대에서 모여서 회의하는 그 자리, 희정, 광재, 두관이 멩박씨와 자리를 함께 하는 그 장면, 보기만 해도 통쾌하다.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서울시장을 찾아오지 못한 것.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이기는 것으로 나왔는데, 아침에 보니 역전되었다. 유시민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지는 것으로 예측되었다면 차라리 실망이 적었읉텐데.... 한명숙의 추격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그래서 아쉬움도 더 크게 남는다. 유시민의 경우 할 수 있는 것, 보여줄 수 있는 걸 다 보여준 후 얻은 결과로 볼 수 있는데, 한명숙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너무 준비 안 된 모습에 실망해서 첼로켜는 후보를 찍을 생각까지 했으니까... 결국 mb비판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 시장에 도전할 계기도 자신이 터무니 없는 일로 기소당하고 나서... 무죄판결이 난 이후 시장선거에 뛰어들었고... 서울에 대한 담론이라고 '사람특별시'를 만들어 냈는데, 모호하기 그지 없다. mb비판은 선거의 출발점은 될 지언정, 그것만으로 찍어주길 기대했다면 큰 오판이었다. 지금 정권교체 한 번 시켜달라는 대통령 선거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노쇠한 이미지가 큰 약점인데, 그런 걸 보완할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선거를 지휘한 사람이 이회찬이고... 오세훈이 유세물에 써 넣은 문구가 "일잘하는 젊은 시장"이었다. 물리적 나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한명숙은 서울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친황경무상급식이라... 안습ㅠ ㅠ 주위에 똑똑한 사람들, 선거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투성일텐데 왜 그렇게 부실하게 선거를 치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서울 구청장 대부분 민주당이 차지한 결과에 비추어 보면 무척 아쉬움이 남고... 거기에 비해 유시민은 아주 야무지게, 똑소리나게 선거를 치뤘다. 그 동안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 거부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고, 특히 경기 북부 주민들이 유시민을 찍기엔 못내 부담스러웠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라리 유시민이 서울에서 출마했다면 오히려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한명숙과 그 언저리에 있던 이들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려 보내다니... 희희낙낙하는 민주당 지도부들 모습도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 얼핏 정세균, 한광옥 이런 인사들 웃는 모습이 보이던데... 참 그쪽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아마 한국 정치사의 다음 장 주인공은 노무현의 아이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의 그 늙다리들과 함께 할 것이고, 어쩌면 국민참여당과 합당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노무현의 아이들과 진보신당 세력이 합치는 그런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투표를 해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감기 기운이 엄습해 와 쓰러지다시피 잠들기도 했고... 아, 한국 여름....

2010년 5월 28일 금요일

날씨: 맑음

어제보단 못했지만 더 없이 상쾌한 날씨.

어제 20대4로 진 팀에게 오늘은 15대 4로 이겼다. 기아... 득점 장면을 챙겨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결기가 느껴진다. 어제 그 팀 맞나 싶을 정도로..
야구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하고, 민감한 스포츠인지 새삼 느낀다. 공 하나, 아웃 카운트 하나 하나 변할 때 마다 작전이 달라지고, 수비 위치가 바뀌고.. 어떤 공, 어떤 작전을 할 것인지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할 것을 또 예측하고... 상대가 있는 스포츠라면 어떤 종목이라도 기싸움, 심리전이 중요하겠지만, 흔히 접하는 종목 중에선 야구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지 않나 싶다.
오늘 경기의 경우, 반드시 이기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나온 팀과 이미 2승을 했으니 한 경기 정도는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나온 팀이 맞붙었다. 어쩌면 승부는 경기 시작 전에 이미 결정되었을지도...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데 모든 경기에 그런 결기, 집중력을 가지고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근성이 과도하면 야구도 너무 팍팍해진다 (SK!). 승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긴 하지만 사실 프로답지 않게 근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모습은 더 꼴불견이다. 큰 점수 차이로 지고 있거나 혹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렇지만 어느 정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 아, 야구하는 걸 참 즐기는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선수, 팀... 이렇게 쓰고 보니 수 개월 전 '무릎팍 도사'에 출현했던 이만수 코치가 생각난다. 그러나 어디 야구 뿐이겠는가. 사람 사는 모습,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근성을 가지고 악착같이 하되, 여유를 잃지 않고 즐기기... 문제라면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ㅠ ㅠ

어제부터 막혀있던 부분이 좀 해결되어서 마음이 훨씬 가볍다. 200쪽 분량을 목표로 쓰는 얘기를 단 몇 마디로도 요약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방향감을 상실하며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험...

근성, 집중력... 여유, 즐기기.... 흠. 그 사이에서 균형잡기? 아니면 한 쪽으로 기울기?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일기...

비 온 후라 그런지 날이 참 맑다 싶어서 모처럼 점심 후 산책까지 했는데, 뉴스를 들으니 오늘 13년 만에 가장 먼 가시거리를 기록했다고 한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 상쾌한 공기... 이런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싶지만 막상 늘 그렇다면 이런 특별한 느낌도 없을 것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런 식이지 않은가. 상대적인... 구분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의미'...

천암함발 북풍이 선거판세를 '딴나라' 쪽에 유리하게 가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그런 해명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조사 결과, 뻔한 '북풍'이 먹히는 이 상황, 참으로 불가시이하다. 국제여론이란 것도... 그게 가능하다는 것... 맞아. 국제정치가 그런 것이었지.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황우석 사태와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

짜증나는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 서울시장 후보들 토론을 잠깐 봤었는데 한명숙씨는 너무 준비를 안하셨더만... 참여정부 총리 마인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젊은 세대를 잡아야 하는데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차라리 강금실 경우가 더 나았다 싶을 정도니... 민주당의 안일함, 무능엔 참... 전라도와 서울 호남향우회 지지로 기본은 할 수 있다는 그런...

기아는 오늘 기록적인 점수로 졌다. 20대 4. 다른 팀을 유심히 좇지 않은 아주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관찰에서 내린 결론이지만, 최근 기아팀이 보여주는 경기운영, 그리고 분위기는 좋지 않은 팀이 갖출 수 있는 것들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요새 보니 야구만큼 심리적 요인이 중요한 스포츠도 드문 것 같은데... 투수력으로 버티다가 약한 타력이 투수력, 수비에 영향을 주면서 전방위로 무너지고 있는 모습. 타선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점수를 적게 주려고 하다보니 소심하게 투구할 수 밖에 없고... 위축될수록 수비 실수도 잦고... 악순환이다. 팀분위기가 좋을 수 없는 상황인데, 바로 그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게 '리더쉽'아니던가. 감독의... 혹은 선배의...

청명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함이다.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숙제...

그 동안 좀 격조(隔阻)했다. facebook에 잠시 눈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비는 시간에도 뭔가를 집중해서 쓸 마음을 먹기가 힘든 탓이다. 아마 한 매듭 지을 때까지 그렇지 않을까... 페이스북은 기술적으로 진보된 매체임을 확인할 수는 있었는데 뭐랄까... 서로를 연결시켜주려는 친절함이 과한 듯해서 부담스럽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 지식이 nicht-wissen-wollen 욕구를 자극한다면, 페이스북의 경우는 nicht-vernetzt-sein-wollen이라고 할 수 있을지... 요즘 자주 얘기하는 페이스북이나 twitter등 이른 바 social networking service(SNS)이 만들고 있는 '혁명적 변화'를 얘기하는 책을 잠깐 훓어 본 적도 있는데 - ">송인혁, 이유진 외 (2010),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social이 바꾸는 멋진 세상 - 글쎄... 과연 그럴까? 몇 가지 떠 오른 생각들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정리해 볼 예정. 어쨌든 이 자체가 재미있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앞으로 연구 주제로 삼음직한...

봄이 없어지고 있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는데 올 해는 뭐 우습지도 않다. 벌써 여기 저기서 냉방기기를 돌리고 있으니... 에어컨 바람을 참 싫어하는데... 올 여름, 기대된다 ㅠ ㅠ

한국에 온 이후 프로야구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대단한 인기라고 한다. 어릴 적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했던 탓에, 자연스럽게 '기아 타이거즈'에 관심을 주고 있는데, 요새 기아 경기는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타격은 매우 허접한데, 그렇다고 완전 막장 야구는 아닌게, 투수들이 좋고, 또 수비는 잘 하는 편이라 지더라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데... 우승했던 지난 해에도 비슷한 분위기였나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 팀 분위기, 경기모습이 너무 싱겁다는 것. 어찌 어찌 4위는 하니까, 완전 못한다고 하기도 그런... 감독 스타일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선수단에 긴장감을 불어 넣지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믿어주는 것 같지고 않고... 너무 생각이 많은 유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프로 스포츠는 정말이지 "Ende gut, alles gut" 아니던가? 결과만 좋다면 '지략가'로 칭송받을 것이고... 하지만 스포츠는 보는 것보다는 직접해야 맛이다.

2010년 5월 6일 목요일

신뢰, 프레임, 상식...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주제에 대해서 서로 충돌하는 견해, 의견, 해석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럴 때 어떤 주장을 더 그럴듯 한 것으로 여기게 될까? 여러 요인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읽은 몇몇 연구에 따르면 발언자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광우병 처리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읽은 영국 대중들이 이후 유전자조작식품문제에 대해서 갖게 된 불신이 대표적 사례다. 프레임 이론을 언급할 수도 있겠다. 발언자를 판단하던 틀 - frame - 이 있다면, 그가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대개 그 틀을 가지고 해석하게 된다. 현정부의 경우 너무 잦은 거짓말로 내가 조금가지고 있던 미련까지 깨끗하게 정리해준 경우고, '조중동' 프레임은 뭐 말 할 필요도 없는 경우고...
"천암한 사태"는 이미 사실에 대한 전문가적 판단이 논의를 비켜간 지 오래다. 발 바꾸던 행태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이미 결론을 내려 놓고서 그 쪽으로 몰고가는 전형적 행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천안함 사태에서는 황우석 사건도 겹쳐 보이는데, 바로 '기본'이나 '상식'의 저항이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DNA검사만 하면 드러날텐데 굳이 '재현'해 보이겠다거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변하던 그 행태나, 사고장면에 대한 TOD 영상이나 통신 내용을 - 발췌해서라도 - 공개하지 않는 행태는 같은 논리 속에서 이해된다. 국제조사단을 만들어서 알루미늄 파편을 찾아 냈다고 한들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믿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정부, '조중동', KBS etc는 정말이지 너무도 유치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도대체 상상력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그렇지만 그런 얘기가 21세기 한반도에서 통한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고... 그건 '국민''대중'이 무지해서 저들에게 휘둘린 탓만이 아니라, 적어도 북한에 관해서라면 기꺼이 유치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임을 확인해서 안타깝기도 하고...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전쟁에 굶주린 개들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최근 한국의 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높인 데는 한반도에 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응이 지나치게 미온적이면 훨씬 큰 안보비용을 치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응 능력이 세계의 주시 속에 시험대에 올랐다."

오늘자 동아일보 "실효성 있는 ‘단호한 대응’이어야 한다"라는 제목의 사설 중 일부다. 달리 '조중동'이겠는가마는 요즘 동네 방네 짖어대는 이 개들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뭐 방송도 다를 바 없고. 그런데 요새 그 개 무리의 '어르신들'이 왜 안 보이는지 궁금하다. 무슨 전우회, 반공연합, 어버이연합 등등... 저런 노골적인 발언은 원래 그 분들 몫이고 그래야 언론이라는 조중동은 좀 화장을 하고 나섰던 것 같은데... 그 분들이 나서지 않으니 오늘의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가카'께서 - '가카'는 '각하'를 잘못 쓴 단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다. 지네들끼린 vip라고도 하던데... 어찌그리 '시종일관' 촌스러운지... 또, 국민을 섬긴대매..말이나 못하면.... - 옥좌에 오르신 이후에야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얼마나 배부른 고민을 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10년 동안 꼬리를 내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개들이 - 그 때도 말 못한 건 아니지만 - 마침내 몸을 일으켜 이젠 백주대낮에 두 눈 뻔히 떠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전쟁을 선동한다. 아...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ps) 모처럼 글을 올리게 됐다. 모두 '동견'(東犬, 똥견/개?) 덕분이다. 내용은 좀 그렇지만,... ^^
다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한 사람들일텐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고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드시겠지... 개밥...

2010년 4월 9일 금요일

"하드코어 인생아" (옥상달빛, 2010)



좀 청승맞지만 중독성 있어서 자꾸 듣게 되는 노래. 방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여기에 소개해 둘 마음을 먹게 되어서 찾아보았더니, 역시...
요새 여기 저기에서 듣고 보게 되는 그놈의 '아이돌'들 때문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라 얼마전 이 여성 듀오의 노래와 얘기를 라디오에서 듣고선 마음을 얼른 내 줘 버렸다. 아, 아쿠스틱의 위대함이여... 물론 이런 류의 노래를 두고 두고 듣긴 힘들다 (예를 들어 한 때 열심히 들었던 영화 'once'의 노래들을 앞으로 찾아서 듣게될 지 의심스러우니까...).
고만고만한 걸그룹, 그 girl들의 화학조미료 맛 나는 노래와 스타일이 역겨워지는 터라 오늘 이 영상에서 처음 본 저들의 모습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다만 '싸게' 만든 영상이라 노래 '품질'이 좀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음, 그리고 가사가 시종일관 '착하지' 않은 것도 '무척' 마음에 든다. Weiter so...!!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잠못드는 밤

졸린 눈으로 침대에 들어가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 저녁도 지금까지 애써 '그 분'을 청했으나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컴 앞에 앉았다. 흠. 요즘 내 심리체계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내게서 잠의 즐거움을 빼앗아 갔는가. 여하튼 이 틈을 이용해서 뭔가 끄적거려보기로 한다.
... 여러 번 시도했는데 신통찮은 문장이 나오질 않는다. 메모를 해 둔 생각거리들도 적지 않은데... 왜? 흐름, 리듬이 끊겼나?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땐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전국민의 가족화", 혹은 "가족 호칭의 일반화" 현상

도서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 상황이다. 아마 취업을 위한 스터디모임에 한 남자가 새로 참여하게 되었나 보다. 3인(남 1, 2와 여)의 대화는 대략 이렇게 진행되었다.

: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1: 스물 아홉이요.

: , 좋아라.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2: 저와는 동갑이시네요

1: (여자에게) 몇 살이세요?

: 스물 여덟이에요.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귀국 후 낯선 상황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게 바로 이런 "나이 따지는 청년 문화"다. 아주 엽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대화가 진행되는 건 사실 오래된 "한국 문화"이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10대, 20대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다니...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선 30만 넘겨도 아주 '왕' 늙은이 취급을 받고, 어린 '아이돌' 좋아하는 소위 '로리타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10대 '아이돌'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이 따지고... 그런 맥락에서 또 눈에 띄는 현상은 가족을 지칭하던 호칭의 보편화다. 아저씨, 아줌마가 그 원조격이었고, 젊은 여인을 '언니' 라고 부르는 것 까진 경험했었는데, 이젠 어지간하면 형, 누나, 오빠, 아버지, 어머니 관계를 맺는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겐 아버지, 어머니. 연예이들끼리도... 2시의 데이트 박명수에게 전화를 거는 젊은 남자들은 대뜸 '명수 형님'이다. 만약 이런 호칭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의 경우 '(elder) brother'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hyung"인 거지. ['화이팅'이 'fighting'이 아니라 'whaiting/ hwaiting' 인 것처럼...]어찌보면 "근대화=개인화"라는 사회이론이 공유하는 전제를 깨부수는 (듯한) 이런 "전국민의 가족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실제 가족들을 가리키기 위한 새로운 호칭이 필요할 것도 같다.

호칭 의미론의 변화를 추척해서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내가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이건 '기생적 현상' 혹은 '반작용'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이 서열이 불분명한 상태, 평등한 관계에선 어떻게 행동해할 줄 모르는 위기 상황? 합리적, 평등한, 혹은 추상화된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

어찌되었건 10대, 20대 청년들이 '쫀쫀하게' 한 두 살 나이 따지는 모습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타인의 기대 (Die Erwartung der Anderen, Fremderwartung)

이러 저러하게 살고 싶다! 이런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그런 기대를 갖고 살지 않겠는가? 중고등학교 시절 인생상담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던 '자아실현'이 문구는 대개 두 눈 부릅뜨고 애를 쓰면 대개 삶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그건 네 탓이다! 이런 인상을 적어도 내겐 낢겼다. 열심히 자아를 '계발啓發'(not 개발開發^^) 하면 - 그게 어떤 것이건... - 뭔가가 이루일 것 같은 희망 혹은 환상을 품고 사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 같은 '전근대인'의 눈엔 '완전' 환상적인 시츄에이션 아닌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삶이라!
허나 '자아실현' 같은 담론은, 좀 낡은 언어로 표현하자면 근대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에게 책임묻기! ('개인'個人이란 번역어는 물론이고 individuum 이란 단어도 중세에야 등장했고, 근대적 주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남탓을 하면 'loser' 취급을 받는... 그래서 남탓하기는 '빨갱이'나 '노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거나, 혹은 '술자리'에서나 허용된 주제가 되어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다 (왜 있잖은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든 게 xx 탓!").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남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주거나,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상황이 많고, 아니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사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대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알게 되니까 "자아의 기대" 같은 건 허구에 가까운 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에서 형성되었건 '자아의 기대'에서 출발을 하자면,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은 게 인지상적인데, 그 과정에서 타인의 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복잡해지고, 내가 그 참여자들과 맺는 관계가 친밀할수록 그런 충돌이 가져오는 '데미지'는 클 수밖에 없다. 그 '데미지'를 줄이려면? 자아의 기대와 타인의 기대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자아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고, 타인의 기대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런 기대 조정법 익히는 과정을 '어른화'라고 불러도 좋겠다. 어른isierung]. 혹은 그냥 그대로 살기, 익숙해지길 기대하면서... 혹은 그런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팔자려니' 생각하며 그런 상황과 더불어 그럭저럭 살아가기 (독일어로 '둘러가기'... umgehen).
루만은 심지어 얼굴을 맞대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상황에서도 개별 인간, 즉 심리체계는 환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심리체계를 사회에서 쫓아냈다기 보다는, 그를 통해서만 그 독자성, 개별성이 보호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을지... (negative anthropology). 정말 심리체계를 보호하려면, 그건 영원히 사회의 '환경'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 번씩 '사회' 속으로 '출장' 나올 때마다 기대를 조정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소우주라고도 얘기하는 그 심리체계들, 복잡한 기대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 심리체계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참 신기한 일이다 [이중 우연성 double contingency]. [부록: '일본인'들은 - 그런 대상이 있다치고 - 본론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면서도 의사소통을 한다는데, 그런 쪽에선 아마 압도적인 차이로 Weltmeister일 것 ].

쉬운 얘길 참 열심히 돌려서 하셨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게으름을 찬양하기 어려운 세상...

버트런드 러셀 (1872~1970)이 쓴 에세이 중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있다 (그것과 다른 에세이를 모아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다.) 그 에세이를 읽진 않았지만 출판사 서평 중 일부만 봐도 대략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러셀의 저작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 책에서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역설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정신없이 지나치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철학자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린다. 러셀은 현대의 기술 문명이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도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대인은 ‘과잉’노동과 ‘과잉’생산을 하고 있고, 과로와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과거에 소수 특권층에게만 부여되었던 ‘게으름의 기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고 개인들이 ‘근로의 미덕이 최고’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누구나 자유롭게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김연아의 연기와 금메달 소식, 그리고 이어진 '연아 찬양 퍼레이드'를 보면서 난 러셀의 이 에세이를 기억해 냈다 (작가들이 '제목'을 다는 일에 공을 충분히 들일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 아닌가^^ 그 밖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제목으로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가'를 꼽을 수 있다).
스케이팅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몸, 동작, 얼음, 감정, 음악 등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그에게 감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만으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허나... 그 이후 이어지는 일방적인 찬사가 귀에 거슬리는 것. (어쩌면 세상 일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7살에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올인하다시피해서 결국 세계 정상에 섰으니 성공한 인생인가?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그 과정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더군다나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같은 성공신화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수 년 전에, 아마 캐나다로 훈련지를 옮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터뷰에서 스케이트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다고 그가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본 티비 대담에서도 어린 시절 늘 엄마가 함께 해서 스케이트 타는 또래들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조차 없어서 안타까웠다는 얘길 '스치듯' 했다.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 그런 얘긴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모녀의 '석세스 스토리'에선 말이다.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개 '독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아니, '스토리'는 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황우석 형님이 "월화수목금금금"이란 복음을 설파하셨을 때 그 말씀은 온 중생에게 큰 감동이지 않았던가... 시간, 장소, 대상, 맥락만 다를 뿐, 사실 '황우석'과 '김연아'는 그 "내러티브"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 권하는 사회... 놀고, 쉬는 걸 무척 불안해하는 시대. "노는만큼 성공한다"(김정운) 같은 책이 많이 팔리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여전히 불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에 불온한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놀자주의' 아닐까. "노는만큼 성공한다"는 얘기나 "게으름 찬양"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데는 남북이나 자본주의/공산주의 진영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우리 윗동네 사람들의 새벽별 보기 운동이나, 생산력 높이기에 재미를 붙였던 소비에트 등등.
여전히 휴가일수를 줄이거나, 아침 회의 시간을 당기는 부지런한 지도자들,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도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찬양하는 한... 일중독 만큼은 관대하게 보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에게서 빌려온 자본주의 정신을 지구 그 어디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해내는 한민족!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 혹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눈에 그토록 게을러 보였다는 우리 조상님들. 그 게으름 탓에 외세의 손에 놀아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는 처절한 인식 때문인지, 아직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더 놀자거나 게으르자, 혹은 느리게 살자 같은 얘기가 큰 공감을 얻기란 아직 힘든 것 같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숙제2

새것을 격하게 아끼는 한국 문화 (아래 '파란 스펀지' 사진 참조) 나름 계보가 있을 터인데, 언어 표현에서 추적해 보면...
- 서양...를 줄여서 '양'이라고 하던 전통: 양이(洋夷) 같은 부정적 표현도 있지만 양복, 양식 등 대개 긍정적 표현.
- '신'.. 혹은 '신식'...: 신여성, 신식 군대...
- 모던...: 모던 걸 --> 근대...: 근대화 --> 선진...: 선진화, 선진국
- 현대...:
- 최신...

가족의 기능 변화.
다른 사회체계에 기능을 넘긴 이후 - 대표적으로, 경제, 교육 - '가족'의 의미는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능은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친밀함, 정서적 공감을 나누는 기능. '2세'는 기능성 추구하는 세상에서 '인간미'를 드러내는 매체이기도... ex. 헐리웃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얘를 가지려는 현상...

'나이 따지기'의 기능
방송매체를 통해서 '아이돌'들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나누는 얘길 듣거나 볼 기회가 가끔씩 있는데 유난히 나이 따지기려 든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몇 개월까지 따져서 형/동생 관계를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그네들보다 나이들 더 먹은 사람 시각엔선 그 상황 자체가 우습지만 - 어린 것들이 ...^^ - 사회학도의 시각에선 그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아이돌들'은 워낙 조직속에서 키워진, 제작된 산물이기 때문에 그런 조직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위계질서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리더'가 있고...). [그 아이돌은 지독히도 소비용이다. 수명도 그리 길지 않은... 새로운, 당연히 더 젊은 아이돌로 쉽게 '대체'된다. 불쌍한... 광대짓... 지들이 광대인줄도 모르는... 아니, 소비되는 것 자체를 즐기는... ]
선배에게 깍뜩한 아이돌을 대견해 하는 선배 연예인들의 모습, 노골적으로 아이돌을 소비하는 모습... 욕망을 좀 더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좀 진보한 면인 것 같으나, 하나 그렇게 드러나는 욕망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것을 보면 그건 '남이 만들어준 욕망'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런 기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돌의 문화가 오히려 더 고리타분한 건 참 씁쓸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허나 가만히 보면 아이돌 뿐 아니라 보아하니 10대 후반, 20대 초반 한국 젊은이들은 대개 나이를 즐겨 따지는 것 같다. 어리다는 것만 빼면 요즘 젊은 세대 문화가 지독히도, 어쩌면 더 보수적이라는 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The Blower's Daughter (Damien Rice, 2003)



이 노래를 부른 데미안 라이스는 1973년 아일랜드생. 이 노래는 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Closer' (2005)에서 사용되어서 유명해졌다. 나도 영화에서 인상깊게 들었다가 나중에 누가 부른 노래인지를 찾게 된 경우. 내가 이런 풍을 좋아하나보다. Jeff Buckley나 요즘엔 Jason Mraz 같은...
사랑에 대한 노래인 건 알겠는데,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이번 기회에' 찾아보았다. 이 양반이 클라리넷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선생, 그러니까 클라리넷주자 (the blower)의 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그 선생은 반대를 했고 - 가사 중에 the pupil in denial이란 구절... - 이 노래를 불러주며 그 딸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관계가 거기에서 끝났다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는지 너무도 애절하게 부른다. 어쨌든 음악과 영화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영화는 남녀 관계를 매우 '쿨'하게 다루어서, 라이스의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크게' 비교된다.
이 음악에 대한 영상으로는 흐린 해변에서 분위기 잡고 있는 Damien과 영화 장면이 교차되는 비디오가 유명하나,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이 버전을 골라봤다.

침묵

침묵도 해석되어야 한다. 당연히...
나중에 이 블로그의 빈 시간 그리고 빈 공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까?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숙제

좀 더 여유가 있었더려면 글로 만들었을 이야기거리를 짧게라도 기록해 두려 한다. 숙제하는 마음으로..

- 오늘 미장원 다녀왔는데 결과가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알아서 해 주도록 맡겨둔 탓이다. 그러고 보니 머리형에 대한 내 취향은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다른 분야 취향에 비교할 때...). 그 동안 헤스타일의 선택을 주로 남에게 미루는 편이었다. 귀국한 이후에 '타의'로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그 동안 해 보지 않았던 실험을 해 보았는데, 오늘 경험한 바까지 고려하니 이제 - 적어도 당분간 - 추구해야 할 '스타일'이 마침내 그려진다. 기대하시라...

- '세종시' 문제가 요즘 가장 시끄러운 주제인데, 사실 핵심은 행정수도 이전을 통한 수도권 집중 해소아니었던가. 결국 행정중심도시가 되었다가, 이제 그마저 지지부진해질 것 같지만... 이런 구체적인 정책이슈를 체계이론으로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공간'(Raum, space)문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체계이론에서 공간의 2차적 중요성을 갖을 뿐이고, 체계이론의 핵심 테제인 기능적 분화, 그 기능체계들은 철저히 '시간화'(Verzeitlichung) 속에서 이해된다. 공간은 그러니까 기능적 분화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2차적 구분이라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서 공간의 중요성은 가면 갈수록 줄어든다고 다들 강조한다 (특히, 세계화 논의에서). 공간의 중요성은 기능체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수도권 문제" "행정도시 건설" "국토균형" 같은 주제는 는기능체계에 따라 달리 이해될 것이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유비쿼터스" 운운하면서 탈공간화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물리적 '공간'이 그토록 중요한 것처럼 커뮤니케이션 되기도 하고... 기능적 분화된 사회, 공간이 2차적인 의미를 갖는 현대사회, 그 중에서 한국이라는 지역적 경계 속에서 이루오지는 커뮤니케이션에서 '공간'이 공공의제로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짬짬이 체계이론을 파고 있는데, 여러 가지로 놀란다. 특히 최근에 루만의 GdG 중 Selbstbeschreibungen 부분을 감탄하면서 읽었다. 루만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발전시킬 방향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회를 커뮤니케이션으로만 보는 한계. 라투어 등을 원용해서 커뮤니케이션 이전에 collective 를 상정하자는 주장. 루만과 탈구조주의자들과의 관계, 차이. Gesellschaft를 커뮤니케이션 합이 아니라, 커뮤이케이션의 구조 중 하나로 보자는.. .그러면 Weltgesellschaft도 새롭게 정의해야하고, Welt와 Gesellschaft의 동어반복이라는 비판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체계이론은 루만에 의해서 완성된 게 아니라 여전히 진화 중이다.

- 영작에 대한 책을 최근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영어 문장은 참 깔끔하고 세련되게 쓰기 쉽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독일어 문장을 읽으면서 갖지 못했던...

- 변산에 내려가서 공동체를 일구고 있는 윤구병 선생 이야기를 읽었다. 어릴 때 놀던 때를 제외하고 가장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도시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 (나도 거기에 일조했지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주려 아직 어린아이들을 다그치는 어머니들... 그 흐름을 거스르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3권을 속독했다. 많이 놀랐다. 특히 2권 이야기는 매우 '체계이론적'이어서... 반갑기도 했고. 물론 루만은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에셔, 마그리트 등 현대미술은 물론 정보이론, 싸이버네틱스, 언어철학등등.. 어쩌면 그런 언급 속에서 루만을 떠올린 건 바로 그게 시대정신이어서 그럴 수도... 여하튼 다시 한 번더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은 매우 애매하다. 에세이라고 보는 게 나을 듯. 출발점으로 삼아야하지만, 인용할만한 그런 책이 아니라는 말씀. 뭐, 대중들엔 그런 책이 '어필'하겠지만. 김용옥의 책처럼...

- 그 동안 루만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러 학자들, 특히 사회학 외부에서 루만이 취했던 학문 흐름을 적극적으로 좇아가지 않았었는데, 진중권 책에서 '영감'을 받아서 좀 찾아보았다. 본격적으로 루만, 체계이론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면 '미학 오디세이'의 세계와도 만나게 될 것이고... 내가 꿈에 그리던 그런 작업 아닌가.

- 결국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세 축은 체계이론, 세계화/세계사회, bio로 압축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인 분야 아니던가. 돌고 돌아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 '아바타'를 봤다. 3D가 아닌 큼지막한 티비로... 줄거리는 너무도 뻔하고 익숙한 것들의 짜집기였다. 오히려 유치할 정도로... 그나마 CG, 테크닉이 볼만한데... 전세계적으로 수조원을 벌어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흥행몰이를 하는 이유는? 누구나 봐야 할 영화로 프레이밍해내는 마케팅 기술의 승리?

- 이번에 눈에 띈 풍경 하나. 파란 스펀지를 달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 새차 출고시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붙여 놓은 거라고 하는데, 색깔도 촌스러워서 당연 떼야 할텐데, 그걸 그냥 붙이고 달리는 차들이 의외로 많은 것. 심지어 그걸 별도로 팔기까지... 엽기적이다. 새차임을 티내고 싶어하는 심리라고 해석할 수 있을텐데, 그런 욕망이 상식적인 미적 감각까지 마비시키나 보다.
그 밖에 새 것을 '격하게' 존중하는 문화의 사례는 많다. 주로 가전 제품이나 컴퓨터를 출고하기 전 보호하거나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진 각종 스티터가 오랫 동안 붙어있는 경우.

- 시내 풍경을 촌스럽게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들은 뭐니 뭐니 해도 간판들이다. 글씨가 크지만, 따로 만들어서 다는 간판 자체가 너무 크기도 하고, 무엇보다 색깔이 너무 화려한다. 원색에 가까워서 너무 자극적이다. 한국미를 '여백의 미'라고 하는 얘긴 교과서에서 배우는 얘기고, 도대체 채우고, 드러내지 못해서 야단들이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광화문 광장이라는데도 참 가관인 모양이다. 시내 자체가 현란해서 눈이 어지러운데 광장이라고 만들어 채우더니, 그것도 모자라 각종 이벤트를 여는 모양이다. 시장의 수준이라기 보다는 평균 시민의 수준이 그 정도라고 믿고 싶다. 여백 없는 삶, 도시... 불안해서 못 노는... 일상화된 위기, 쫓김... 모두 연결되어 있다.

-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다들 '비판'에 너무 민감하다. 정치권은 불문가지고, 인터넷 댓글 커뮤니케이션도 그렇고... 문제는 좀 배운 이들도 그렇다는 것. 초딩적 댓글은 차라리 문제가 되지 않으나, 민족주의 등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는 기사 아래를 보면 먹물깨나 잡순 티가 나는 댓글들에도 가시들이 들어있다 (최근 동계올림픽 싹쓸이 못한 쇼트렉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프레시안에 동아대 정? 교수가 쓴 글, 개콘 '남보원'에 대한 김종엽 교수의 까칠한 칼럼 in 한겨레 등등). 매사를 비판적으로만 봐서도 곤란하겠지만 - 너무 까칠하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 일리있는 문제제기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드문드문 들르는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 오늘 읽은 정병선의 칼럼 내용 일부를 가져왔다.

가수 조영남씨가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큰 꿈을 가지라’고 외치는 시대에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는 말은 시대의 맹점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을 깊이 통찰한데서 나오는 삶의 진실이 배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을 펼쳐가기보다는 인생을 삼켜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의 다양한 멋과 깊은 맛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너무 큰 꿈은 꿈의 성취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인생길을 여행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축복들을 놓치게 합니다.

세상 일엔 대개 다중적 의미가 있는데 꿈, 비전, 성공 등도 역시 그럴 것이다. 사실 우리 윗 세대들이 가졌던 생존 그리고 발전에 대한 지향, 집착, 강박이 낳은 열매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집착을 경계하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도 지적해야 할 것이고... "노는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이 시의적절하게 나왔다고 느껴질 정도로, 운전으로 치면 "전방주시형" 초보운전자가 지배적인 사회 아닌가. 이제 좀 옆, 뒤를 보면서 운전을 즐길 법도 한데, 여전히 '놀지' 못하고, '위기다' '힘들다' '죽겠다' 를 입에 달고 있는...

ps) 앞만 바라보고 어디로 달려 가고 있는 중인가? 발전, 선진국, 성장... 한 마디로 '돈'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얘기하는 성공, 꿈, 비전... 역시 다르지 않다. 권력, 사회적 지위, 명예... 그것을 얻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 역시 '돈'이다. 경제활동에 오직 소비자로 참여할 뿐인 1인으로서는 참 민망한 상황인 것이다. 루만의 표현처럼 한 체계에서 배제되면 다른 체계에서도 쉽게 배제된다. Exklusion의 상승효과라고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