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아시아 생명윤리 거버넌스의 특징은 정책과 실행의 분리, 이로 인한 규범적 불안정성 등을 꼽는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행위자인 국가, 정부의 잘못으로 돌린다. 아시아 정부는 왜 일관성 없게 행동하는가?

분리는 다양한 기대, 서로 조화를 이루기 힘든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킬 때 취하는 행동.

생명윤리 거버넌스와 관련해서 아시아 정부가 충족시켜야 하는 서로 다른 기대는 무엇인가?

세계과학 문화에 적응할 것이 기대됨,  국내 정치 문화, 발전주의적 정치적 기대. 과학문화와 정치문화 간의 부조화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구조적 변화 때문이다. 발전국가 중심 사회구조에서 기능적 분화, 세계화의 진전으로 이해 문화의 다양성이 커진 것이다. 끝!! 그래 이거다! 매우 명쾌하고 분명하다.


생명윤리 거버넌스에는 규범적 확실성을 보장하고, 갈등을 흡수하는 역할을 기대한다. 아시아 생명윤리 거버넌스는 그런 측면에서 취약함을 보이고 있고, 때로는 실패하고 있다는 주장이 많다. 실제로 정책과 실행 간의 분리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관성 부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아직 도입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단지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진단하는 연구들이 많다.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논문은 이 논의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1) 왜 분리로 이어지는가? 조화를 이루기 힘든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할 때 생긴다. 문화 간 갈등의 내용이 서양과는 다를 것이다. 그 갈등은 무엇인가? 서양 문화와 아시아 문화 간의 갈등인가? 노우. 이 둘은 모두 내부 문화다.

[서양에서는 분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왜? 정책 속의 현실[문화, 정책내용]과 실제 현실이 상당히 밀접하기 때문에. 아시아는 그렇지 않다. 정책 속의 현실과 실제 현실 간극이 크기 때문에?]
N0! 둘 다 아시아의 문화다. 이 두 문화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이 바뀐 점이다. 과학의 현실과 정치의 현실 간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과학 지향과 정치 지향 둘 다 필요하게 되었다. 이 두 문화간 간극이 크다는 점이 문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치 갈등은 좌우 간의 갈등이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간의 갈등이라고 할 때 이 갈등을 보지 않고 좌우갈등으로 보고 해결하려고 정책을 만들면 그 정책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2) 왜 이 두 문화가 충돌하게 되었는가? 어떤 구조적 변화 때문에? 발전국가 중심에서 --> 기능적 분화. 체계 간의 분화는 아시아 내적으로 문화의 분화, 다양성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지배적인 정치 문화는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이 아니다. 과학의 독립분화가 될수록, 그 문화를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발전주의 지향이고, 다른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무리해서' 도입되는가?
윤리 거버넌스가 도입되는가? 어떤 필요 때문에? 어떤 기대때문에? 어떤 기능이 기대되는가? [국가가 전적으로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체계 관계의 필요성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서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양과 비슷하게 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국가 부분이 큰 것은 분명하다. 기존 접근을 보완한다.]


과학 지향 문화와 정치문화 간 갈등이 크다. [한국에서는] 어떤 구체적 윤리적 입장 간의 갈등이 아니다.


대부분 서양 윤리에 기초한 생명윤리 거버넌스를 아시아에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서양 문화의 갈등이다. 이 때 아시아 문화를 종교적 문화로 보기도 하고 발전주의로 보기도 한다. 여하튼 동서양 문화갈등이다.

(1) 생명윤리 거버넌스가 명시적으로 약속하는 것, 기대되는 것, 기대할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개인 보호!!!
(2) 명시적이진 않지만 기대되는 기능도 있다. 갈등을 해소한다던지, 체계의 갈등...  등등.
규범적 안정성!!!

그 기대 혹은 공적 약속에는 큰 차이가 없다. 실제로 그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기대되는 기능을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약속을 하는가? 어떤 내용을 담은 거버넌스가 만들어졌는가?

그 약속은 왜, 어떻게 깨지는가. 왜 지키려고 하지 않는가? 그게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 기능적인가? 도대체 기능적인지 아닌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정책/집행 간의 분리의 일상화를 취약함으로 봐야 할 것이고, 그 취약함이 표출되어 부정적 결과로 귀결되면 그것을 실패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충되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때, 기대를 조화시키기 힘들 때"

(1) 왜 상충되는 기대를 굳이 충족시켜야 하는가? 왜 윤리거버넌스가 도입되어야 하는가?
(2) 왜 그 기대는 조화를 이루기 힘든가?

Q (1): 국가과 지배 엘리트의 의지다.
Q (2): 서양 문화와 아시아 문화 갈등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체계이론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Q (1): 기능적 분화/ 국가의 역할 축소/ 국제적 압력/: 정치와 과학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다양한 주장들 간의 결합 (단지 국가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과학도 스스로 그럴 필요성이 있고, 정치 내적으로도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정치의 주변부)

Q (2): 정치 지향 문화와 과학 지향 문화가 조화를 이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학은 세계 문화를 지향하고, 그것은 대개 개인의 자율성, 과학의 독특한 활동을 보호하는 방향을 지향. 정치 문화는 발전주의를 지향.



이런 적이 언제였던가. 며칠째 초집중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저께였나. 집나간 집중력 때문에 애먹었던 게... 덕분에 진전도 조금 있다. 오늘은 어찌되었건 일단락지어야 한다. 식구들도 괴로워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내가 못견디겠다. 오늘 저녁엔 어떤 형태로든 보낸다. 그리고 내일 낮엔 찜질방 가고 저녁에 영화를 볼 것이다. 볼 영화도 생각해두었다. 이동진 형님이 극찬하고, 내가 워낙에 좋아하기도 하는 코언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 아내가 뮤지컬 '카르멘'을 일때문에 봐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걸로 대체될 수도... 여하튼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서 몇 시간 더 집중하자. 화이팅!!

다행히 스스로 만족스러운 길, 그래서 좀 안도감을 가질 수 있는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지난 며칠 동안  엉뚱한 곳에서 삽질을 해댄 꼴이 되었다. 심지어 밤까지 새면서... 에구. 고질병이다. 돌도 돌아 다시 그 자리로... 그 자리에서 또 뒤집어 엎는... 고질병, 아님 특기... 이제 제발 교수님도 보실거니까 더 이상 뒤엎지는 말자.
내가 가장 재미있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테제는 한국사회의 변화, 변동을 체계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
생명윤리 거버넌스의 등장과 실패는 바로 내 테제를 점검해볼 수 있는 사례다.

사회구조적 변동과 문화의 관계다.
사회구조적 변동의 방향은 기능적 분화다.


아시아 생명윤리 거버넌스에 대한 걱정이 많다.

윤리 거버넌스가 없다고 걱정하다가 이젠 제대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걱정.

정말 걱정할 정도 문제가 많은가? 실패인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1) 이 논문은 사회이론적으로 그 조건을 설명하고,
(2) 한국 사례를 대상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1. 아시아 생명윤리: 걱정거리? 문제? 실패?
- 왜?
- 정말 그런가? 실패?
-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
- 어떤 방식으로 생명윤리 거버넌스가 만들어졌는가?
- 체계이론적 설명 시도.


2. 생명윤리 거버넌스에 대한 체계이론적 설명
왜 생명윤리 거버넌스? 중심부를 중심으로 설명
- 구조적으로 기능적 분화, 조정 필요성 증가
- 문화: 조정 메커니즘으로서 윤리 필요.
- 그 원칙은 자율성, 개인주의, 피험자 보호 등 개인주의에 기초한 것.
지역적 차이: 아시아는?
 - 구조적 차이: 기능적 분화, 국가중심?
 - 문화적 차이: 발전주의 문화/ 생명윤리 필요 없음.
 - 최근 변화는: 탈바전국가로



2014년 1월 30일 목요일

저녁은 집에서 먹고 근처 카페에 나와있다. 계속 강행군이다. 낮에 끝내지 못해서 밤까지 이어진다. 몸은 극도로 피곤. 정신력으로 버텨야 할 듯. 앞부분,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부분만 수정해서 그냥 보낼까 보다. 그래. 그렇게 하자.
밤을 온전히 새지는 않았다. 한 세 시간 정도 뒤로 젖힌 의자에서 잤을까. 집 나간 집중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이젠 시간과의 싸움이다. 다른 글을 찾아가면서 조금씩 수정하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 귀가 계획을 아침에서 오후로 늦췄는데 이러다 저녁까지 가겠다. 식사를 주문하려는데 평소에 배달시키는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겨우 찾아낸 치킨집은 한 마리로 여기까지 올 수는 없다고... ㅠㅠ 결국 근처 대학병원에 가서 무려 삼계탕을 먹고 왔다. 뭐. 원기가 회복된 것 같진 않지만 여하튼 이제부터 진행상태에 따라 집에서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느냐가 결정된다. 집중력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다. 아.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야 할텐데. 큰 일이다.
설을 맞아 하나 둘씩 일찌감치 퇴근하고서 혼자 남아있다. 이 밤을 새면서 작업할 참이다. 내일까지 불명확한 논지를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교수님께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밤이 늦도록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는 것이다.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이건 배짱도 아니고 그냥 뇌의 태업이다. 집나간 집중력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온 건물에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서 엄습한 묘한 외로움과 맞물려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기숙사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하고 사무실로 불렀다. 최근 여친과 헤어진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상담도 하고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고 나니 비로소 집나간 집중력이 반쯤 돌아왔다. 다시 열공 모드로. 집중. 집중!!

2014년 1월 29일 수요일

"진정한 부자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게 적은 사람이다."

페친이 소개한 글...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19세기 전반만해도 중국 GNP가 서유럽과 북미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는 주장.
최근 중국 부상은 1840년 무렵 잃어던 그 지위를 다시 찾는 것이라는 주장.
중국의 부상이 근대성, 근대사회를 다시 정의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
다른 한 편 근대성은 서양에서 500년 이상 걸려서 정착된 것. (초기 근대 16세기,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자리를 잡은 것은 18세기 후반).
그렇게 서구에서 형성된 근대성이 제도적, 문화적으로 세계를 포맷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의 부상의 결과가 단지 1840으로 회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대성, 혹은 새로운 근대성, 탈근대성, 새로운 문화, 질서를 만들어 내지 않는한...
발설하지 않는게 좋았겠다는 마음 속 생각이 있다.

효율적, 경제적 대화를 위해서 내 생각이 한 두마디로 요약되는 순간 내 의도와 중첩된 생각의 결이 다 깍여나가고 그저 민둥한, 내게도 낯선 주장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말을 아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인데...

반면에 바로 그 한두마디가 핵심인 경우도 있다. 나는 그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다양한 생각으로 방패막이를 해 둔 셈인데, 바로 그것이 헤집고 정곡이 찔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뭇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하고 싶은대로 하고 후회없이 사는 삶? 내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나? 그걸 지향하지만 - 당연히 - 현실은 그것과는 멀다. 멀어도 한참 멀다. 무엇보다 물적 토대가 빈약하니까. 게대가 타인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지만 타인의 희생을 줄여주지 못하고, 더 적극적으로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기", "집단을 위해서 희생하는 개인"에 대한 공감도가 지극히 높다. 개인을 중심에 둔 접근은 호응을 받기 쉽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교인인 경우 개인중심적 사고에 더 반발할 수밖에...

흠. 이로서 나는 오늘 내가 느낀 불편함, 그리고 내게 쏟아지는 걱정 반 비난 반의 시선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한국사회의 문제로 치환하는데 - 일부 - 성공했다. 정신승리!!만은 아닐 것 같다는 확신 같지 않은 확신이...
미야지마 교수의 탁견, 혜안이다. 이 아이디어를 잘 살리면 근대성, 근대사회 이해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농사회는 과거제 확립과 이의 토대가 되는 인쇄술과 서적의 보급, 신분제 해체, 농업과 상공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상품·화폐 및 시장경제의 물적 토대였다. 송대 신유학을 집대성한 주자학은 과거제 채점기준이 되고 유럽·일본에는 없던 중앙집권적 관료사회의 지적·이념적 기반이 됐다. 과거 합격자의 신분이 세습되지 않는 유교모델 사회는 신분제 사회가 아니었다. 신분제는 사회적 분업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시장이 없을 때 지배층이 분업을 강제하기 위해 만든 장치라고 보는 미야지마 교수는 유럽과 에도시대 이전의 일본이 신분제 사회였던 것은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근대성, 근대사회, 그리고 유럽의 경험을 기초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많은 모델, 정책들이 우리에게 왜 어색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 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근대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주어지는 현실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맞지 않는 옷이라도 입다보면 거기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회학은 바로 그 과정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페친 장은주 선생님의 메모를 옮겨둔다. 복지국가 논쟁이 좀 공허하다고 느끼진 하지만 출구가 딱히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움을 느끼던 바라 반갑다. "소농사회"!

역시 현대 한국을 그리기 위해선 (1)세계사적 맥락 (2) 역사. 이 둘을 씨줄과 날줄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비상식적으로 비대한 자영업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서구 '선진국' 대비 매우 '기형적'으로 보이는 대기업 중심 자본주의 경제 체제나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미야자와 선생이 이야기하는 '소농 사회' 전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사실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우리가 복지 국가 건설 문제에 접근하는 데서도 조금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 우리와 같은 역사적, 문화적 전통의 배경 위에서라면 '기본 소득'보다는 '기본 자산(basic capital)'이 더 나은 출발점이 아닐까? 사실은 아마도 나로서는 결코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면서도 이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2014년 1월 27일 월요일

공공성 논의, 복지국가 논의가 공허한 이유.

공공성, 즉 "공적 질서" 이해의 출발은 공과 사의 구분이다. 아니. 어떤 방식으로 공과 사가 이해되느냐의 문제다. 조선시대라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없었을까. 오히려 더 분명했다. "공직" 개념이 대표적인데, 공적인 것은 대부분 국가, 나라의 활동, 그에 대한 참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아마 서양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에서 공과 사 구분의 획기적 전환은 시장경제의 등장, 소유권 확립이었다. "개인주의" 개인의 권리 보호 같은 이념을 근거로 공과 사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공과 사 이해는 개인주의에 근거를 삼고 있지 않다. 전통시대의 연장에 가깝다. 공공성에 대한 서양 이론은 그것이 하버마스든 루만이든 대개 개인의 권리,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고, 그런 공감대가 제도화된 사회에서의 공공성을 이야기한다. 그런 역사적 맥락, 논의 전제조건 자체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양이론에 기초해서 공공성을 갑론을박하니 논의가 겉도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변호인에서 고문 경찰은 자기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공적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공적 질서는 국가, 공동체니까. 개인의 권리 보호가 공적 기관의 기본 역할이라는 '근대적' 공공성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국에서는 공공성, 공적 영역, 공적 업무 등에 대한 이런 기초적 공감대마저 없는 형편이다.

논의의 공허함은 복지국가 성격 논쟁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사회권의 발달을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으로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는 개인의 권리 중심으로 국가 정책이 발전되고 집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개인들의 연대의 권리 주장에 대한 수용으로서 권리 인정, 복지 확대가 대부분 시혜적이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 Paternalism. 물론 한국 전통에서 위에대한 권위에 쉽게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저항, 투쟁, 반란의 역사도 만만찮다. 평등, 자유, 개인주의 같은 근대적 이념으로 연결도지 않았을 뿐. 서양,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는 신 앞에서 평등, 개별자로서 만나기... 등의 역사가 근대적 개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데... 글쎄... 여하튼 근대적 의미의 자유, 개인주의는 역시 프랑스 혁명 이후가 아니던가? 자본주의의 발달도 한 몫을 했고. 정치적 질서가 안정되었던 아시아에서는 그런 시도가 없어서 오히려 한 발 늦기도 했을테고.. 여하튼 한반도 맥락에서 투쟁, 저항은 개인의 권리, 개인주의 발달로 이어진 경험이 없다. 식민지 경험, 전쟁 경험, 분단도 그런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주된 흐름이나 저항의 흐름이나 공동체, 집단, 국가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1960년 4.19나 1987년 정도가 그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던 계기였을텐데... 민중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도 모두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삼았으니까. 개인주의 운동, 자유주의 운동... 그런 전통은 한국에서 전무하다시피. 겨우 전경련의 자유기업원, 공병호, 복거일 등이 생각 날 뿐이니까. 인권 운동이 그나마 주목할만하다. "인권"!!

개별자 존중, 개별자 간의 연대로부터의 개혁 요구. 그로 인한 사회 질서의 변화... 이런 경험의 역사가 거의 없다. 집단으로서의 힘에 대한 집단의 대응이 있었을 뿐.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모두 개인의 권리, 인권의 발달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인권 운동이 한국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 될수도. 좌파, 우파에게 모두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인권의 더 급진적 버전이 동물권, 동물권 운동은 더 급진적이 될수도... 혹은 무정부주의, 자유주의 등도.

여하튼 복지국가의 드러난 모습, 제도, 지표 (재정 지출, 헌법 조항, 정책 목표, 각종 복지제도 확대)만 가지고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면 좀 답답하다. 복지국가 논의를 왜곡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개인, 자율성, 개인주의에 대한 공감대 부족이다. 시혜적인 접근, 국가만 바라보는 접근으로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힘들다.


한국의 복지국가가 확대되고 있다는 주장은 대개 이런 저런 복지 제도들 (각종 사회보험), 연금, 국가의 정책 목표 설정에서 복지의 강조 등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발전국가와 복지국가를 구분하는 경향도 보인다. 발전국가 --> 복지국가.

좀 피상적인 접근인 것 같다.사회보험은 대개 고용을 전제로 하는데 한국은 자영업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라 보험 사각 지대에 놓인 국민들이 많다.  국민연금, 노인연금 같은 사회 부조적 성격의 복지제도는 미약. 고용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뀔 턱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얘기해서 서양에서는 복지가 국가-기업-노동의 계급투쟁 결과다. 노동의 위치가 지극히 취약한 한국에서는 복지는 시혜적이거나 일방적이기 쉽다. 복지 쟁취를 위한 연대 경험도 적고. 

한국이 노동운동이 강성이다?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노동운동이 강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단 자영업 비중이 너무 높고, 대기업 중심이고, 노조조직률도 낮고, 이념적으로도 노조에 대한 비우호적 시선이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자영업자 비중의 높다는 데서 찾기도 한다. 그들은 경기에 매우 매우 민감하니까. 안전장치도 부족하고. 

물론 노조가 강해도 문제다. 일부 노조만 강할때... 노동운동, 노조 세계에서의 빈익빈부익부...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것, 소수 대기업 편중... 이런 점들이 한국 사회의 보수적 성격을 강화시키고, 복지국가로의 전환의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 같다.

예산 증가, 제도 다양화, 정부 정책 기조만을 가지고 복지국가 운운하기엔 한국 사회의 복지에 비판적인 보수주의적 견해가 너무도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노동, 노동운동, 계급타협... 뭐. 이런 경험 없이도 복지국가 할 수 있다. 하지만...몇 배 더 힘들어 보인다.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탈근대를 이야기하자면 참으로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한 켠에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데 무슨 동물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구조, 사회질서를 개선(?)하는데 동물권 강조가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고... 그 쪽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동물이 행복한 사회는 인간도 행복할 수 있다...

이 경우 동물권 인정 혹은 보호를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과는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반려동물들을 사람키우는 키우고 그렇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근대적인, 매우 천박한 동물 이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동물을 집에서 키우더라도 동물답게 키우는 것이 동물의 품위, 동물의 권리를 지키는 것 아닐까?

도덕, 윤리로 근대적 질서를 강변하는 것은 근대적 질서를 고착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죽을 권리, 존엄사 같은 논의는 어떤가? 꼭 사형제도를 옹호하고, 사형수들 당장 죽이라고 핏대 올리는 인간들이 존엄사 같은 얘기엔 식겁을 한다. 생명의 불가침, 생명의 존엄성 운운하면서.

도덕, 윤리는 근대적 질서 비판에도 유용할 수 있지만, 그런 비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 이후엔 근대적 질서 유지, 즉 현상 유지에 기여할 뿐이다. 전본적 힘이 나올 수 없다.

근대적 질서를 전복시킬 힘에 대한 상상력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맑시즘, 생태주의 (소로우, 슈마허, 녹색평론), 여성주의, 신식민주의, 라투르, 무정부주의?? 아니면 종교? 기독교? 기독교에 그런 전복적인 힘이 있는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런 점에서 약하다. 요즘 공공신학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대부분 궁극적으로 근대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그런 신학일 뿐이다. 라브리, 쉐퍼는 전보적인 힘이 없다. 그냥 보수주의, 근본주의자, 도피주의자에 가깝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대안이 엘룰. 엘룰은 근대의 특징을 정확하게 꿰둟어 본 것 같기도 하다. 티비나 기술에 대한 관찰을 볼 때. 흠. 어쩌면 엘룰이 도움이 될지도. 엘룰을 좀 더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엘룰을 스승으로 모실까?
"근대"라는 시기 안에서도 그 사회구조는 - 당연하게 - 매우 다양하게 변했다. 대표적인 변화 경향은 세계화다. 기능적 분화. 기능체계들의 독립분화!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한 모델의 등장 및 확산. 그것이 바로 근대성!!! 전통과 근대(그리고 탈근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근대성.

국가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 이전 세계제국시대와는 다르다. 제국적 질서와 다른 새로운 정치 질서가 근대를 특징짓는다. 특히, 주권국가 개념, 역설적으로 이와 공존했던 제국주의. 전반적으로 '발전' '(물질적, 경제적) 성장' '확산'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대개 보호국가, 복지국가(사회국가), 규제국가, 이런 식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전반적인 기조는 물질적, 경제적 '발전'이었다. 물론 한 쪽에서 뺏어서 다른 쪽에서 더 많이 나누어가지는 식이었지만. 근대=낙관=성장..... 부작용을 최소화하려고 매우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복지국가도 거기에 해당하고. 여전히 발전과 성장을 지향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능체계들이 자율성은 경제적 성과와 직접 연관이 없더라도 일부 보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성장의 한계!를 70년대부터 이야기하는데... 아직도 성장의 신화에 기대서 유지되는 체제다.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아프리카 등등. 무엇보다 경제적 의미에서. 체계의 자율성은... 속 빈 강정 같은 것 아닐까 싶다. 아. 그 전엔 정치의 힘을 좀 더 과신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적 자율성의 확대로 봐도 될 것 같긴 하다. 여하튼...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결국 성장의 한 방편이다. 국가가 조용히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규제를 불편서 경제적, 물질적 성장을 만들어 내려는 방편인 것이다. 발전국가와는 다른 식이지만, 그 목표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론 기업과 국가의 관계가 바뀌긴 하지만...

세계화는 신자유주의화, 국가 역할의 축소, 세계적 규범, 시장성의 등장을 그 주된 성격으로 삼는다. 국가의 축소, 후퇴. 생명윤리의 등장 역시 그렇게 이해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들쭉날쭉하지만... 생각나는대로 기록해두면...

근대라는 틀 속에서 보면 지역간 차이가 뭐 그리 큰가 싶은 것이다. 발전주의 지향적 생명윤리 정책이나 미국, 독일의 생명윤리 정책이나. 결국은 뭐 다 비슷비슷한 - 물론 내용은 좀 다르지만 - 이해관계를 절충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 대강은 매우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첨단 과학, 생명과학을 이용해서 새로운 산업영역을 개척하긴해야하고, 그렇다고 함부로 했다간 오히려 부작용, 역작용이 있으니 적절하게 규제도 해야하고, 그런 이해관계는 과학자나 정치가 생명공학기업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선 지나치게 배아의 도덕적 위치에 '집착'하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는 발전을 위한 윤리라는 점을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역의 도덕적 가치를 정책에 반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근대적 질서를 해치지 않고, 열매를 계속해서 따먹으려는 일종의 합의에 의해서 생명윤리는 호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학은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애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진행되는 방향이 최선만은 아닌 것이다. 생명과학 비판으로서 생명윤리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면,  이젠 제도화된 생명윤리의 보수성에 대해서도 비판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녹색 역시 근대적 맥락으로 수용되어 버리기도 한다. 멩박이의 녹색 성장 - 녹색 라떼로 대변되는 - 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  녹색, 생태주의의 전보적 힘은 그렇게 약화되는 것이다. 복지국가도 마찬가지고... 근대적 질서, 근대 사회라는 기계는 참으로 무섭다.  비판을 수용하면서 더 정교하도도 세련되게 인본주의적, 인간중심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사회적(societal)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을 연료, 혹은 매트릭스로 삼아서...

그러니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매우 다른 것 같지만, 사실 발전, 성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고 다만 강조점이나 그 길에 이르는 방법을 달리 취할 뿐이다. 그걸 맑시스트는 통틀어서 자본주의국가라고 부르겠지.

폭력, 전쟁은 어떤가? 국지전, 테레 등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전근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을까? 폭력 정도를 비교하는 지표같은게 있을까?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을까?

근대를 극복하자는 얘기는 근대의 성취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한 후에 한계를 극복하자는 얘기다. 다시 폭력, 야만, 미몽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니까. 절대 빈곤, 굶주림, 전쟁, 폭력 등의 위협, 위험 등에서 자유로운 건 전제조건이다.

근대적 질서를 탈출하는 방법은? 발전, 성장 지상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맑스주의? 생태주의? 영성? 과연 대안일까?

어쩌면 동물권운동, 채식주의... 그런 접근이 더 근본적인 도전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근대적 질서 속에서 성장의 열매의 불균등한 분배, 취약한 인권 보장 등 여러 문제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니 그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근대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려는 시도가 그런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 질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 그런 접근은 가난한 사람들의 영양, 생활방식에 근본적 도전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복지, 재정적 지원을 주면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으로 인해 결국 돈버는 건 기업화된 병원, 복지체계, 그 자체일 테니까.
장애인 문제도 그런 면이 있다. 근대적 질서 속에서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주고, 재활을 하고... 그래봐야 결국 궁극적으로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설픈 상황이 반복될 뿐이니까. 근본적으로 '장애' 담론을 해체해야...

작은 것이 아름답다, 소로우, 녹색평론, 동물권, 대체의학... 뭐. 그런 접근이 그나마 유력한 것 아닌가?

녹색 상상령, 맑스주의적 상상력, 혹은 라투르 같은 상상력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근대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당연히 탈근대는 전근대로의 회귀가 아니다. 다시 만인의 만인의 투쟁, 야만, 생존의 위협을 느끼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닌다. 기초적 생존권 등 인권이 보장되지도 않는 그런 시기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겠지만...

그런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누구에게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루만은 전형적인 근대주의자다. 근대 이후에 대한 아이디어를... 글쎄 '관찰'을 강조한다... 뭐.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매우 래디컬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사회구조나 구체적인 비전에 대해서는 너무도 보수적이라. 흠.

"라투르"는 그런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상가라고 봐도 좋을 듯. 이 참에 좀 더 읽어 볼까?

농업, 농촌 문제에 천착하는 허 박사가 참 대견해 보이고, 최근에는 생활협동조합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하튼 "탈근대"를 고민해야 할 듯. 루만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틀에서 보자면 대부분 "근대", 아니 전형적인 "근대"를 논의하는 것이라 미래지향적인 냄새가 덜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도서관에서 집어 든 책이 "예수와 다윈의 동행"(신재식)이다. 시작 부분이 인상적이다. 밤하늘의 별이 주는 상상력이 종교적 감수성을 깨운다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가 물려받은 종교적 가르침 대부분은 이런 장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종교적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가 우리의 삶에서 일차 환경이 되면서, 자연의 경험은 관심의 뒤꼍으로 몰러났습니다. ... 자연이 아닌 문화가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었습니다. ... 우리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는 일차적인 환경도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문화입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종교적 신념이나 의례, 이 모든 것이 '문화화'되었습니다. 문화는 종교적 상상력을 박제화해 교리나 제의를 만들었습니다. 박제화된 교리나 제의는 자연에서 얻은 종교적 경험과 그 경험에서 나온 종교적 상상력을 퇴장시켰습니다. 잃어버린 종교적 상상력을, 자연의 상상력을, 별의 상상력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직접 자연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례를 떠납니다. 21세기 과학 문화 시대를 살아가지만, 최초의 근원적인 종교적 상상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8 - 9)

매우 인상적인 도입이다. 물론 책의 내용은 훨씬 더 난해하지만...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도입의 이 내용은 정확하게 "전통-근대-탈근대"의 역사 발전 도식을 반영하고 있다. 자연의 경험 (야만, 신화적, 미신, 가난, 신분제, 개인 억압, 생존의 문제) - 문화의 경험 (문명, 탈자연, 이성, 합리성, 탈주술화, 개인화, 생태계 파괴, 탈인간화, 노이로제, 나눔의 문제, 오래 살기) - 다시 자연으로... (초월, 영성, 자연, 녹색, 생태적, 공동체, 공감, 잘 살기... ).

루만을 좀 얘기하지만...

루만은 근대의 성취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근대 비판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년에 강조점이 후자로 이동했는지도... Inklusion에 대한 관심, 그리스 TV 인터뷰 등에서 확인되듯...

루만의 근대 비판은 어떤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는 근대를 결정짓는 현상들, 개인화, 기능적 분화 등은 매우 비개연적이라는 말을 했다. 이런 비개연적인 근대의 사회구조를 지탱가능하게 만들려니 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복잡한 규제, 통제 장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탈자연적인, 탈인간적인 사회-기계를 만들어내었다. 이 사회-기계은 매트릭스 같아서 인간은 그저 부속품처럼 이용될 뿐이다. 물론 사회 밖에서야 오히려 자율성을 갖게 되지만 사회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해서 살아가려면 부속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죽는다고 사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최적화된 사회는 그 효율성에서 떨어지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복지제도고 각종 사회보장, 사회사업이다. 인권=개인주의=개인의 권리=평등...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사회로부터의 분리, 배제의 평등이기도 하다.  물론 근대는 전근대의 여러 모순, 문제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다. 하지만 근대는 재봉건화, 파괴적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근대의 성취를 더 얻어내고, 정착시키는 것도 분명히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근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탈근대적 상상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주로 생태적 상상력으로 드러난다. 녹색!! 자연!! 자연에 대한 상상력, 종교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탈봉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 영성은 녹색 만큼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 힘들다. 왜? 영성 역시 녹색/자연적 상상력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 윤리는 어떤가? 도덕, 윤리는 기껏 기존 사회체계, 사회구조, 사회질서를 정당화할 뿐이다. 기능적으로다가... 윤리는 현대 도덕, 윤리가 기껏 그렇게밖에 되지 않음을 경고해야 한다. 이는 인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권 자체는 대단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여성? 여성주의? 흠. 그것 역시...

자연, 생태적 합리성, 생태적 지속가능성만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당장 근대적 질서가 무너지면 고통받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니면 녹색 상상력으로 근대적 질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여하튼 도덕, 윤리는 해답이 아니다.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다. 주변부 근대에서는 더더군다나...

한국 국가는 전형적인 발전 지향적 국가이고, 윤리는 거기에 종속될 뿐이니까. 그마저도 없을 때 보나는 나을까? 뭐. 그렇다고 볼 수는 있겠지. 윤리에 대한 경고!!가 결론인가? 국가의 한계? 국가중심적 윤리의 한계?
"삼성이 지난 15일 서류전형 부활과 총장추천제를 통해 5000명을 추천받겠다는 내용을 담은 인재 채용 개편안을 발표한 데 이어 23일 대학별 총장 추천 할당 인원을 통보하면서 대학 사회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24일 대학들은 사전 협의 없이 대학별 할당 인원을 이메일로 일방적으로 통보한 삼성의 태도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대학들은 삼성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수락 여부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나라꼴이 우습구나. 기업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대학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 기준으로 신입사원을 뽑을 수도 있고. 하지만 대학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저렇게 떳떳하게 공표하고, 줄을 세우는 행태는 가관이다. 천박하다. 졸부 근성... 삼성... 졸부의 힘 앞에서 대학들은 긴장하고, 속으로만 불평하고... 거기에 대해서 과감하게 'No'하는 그런 최소한의 자존심을 갖추고 있는 대학은 없나? 이게 대학의 기업화, 기업에 의한 식민지화가 아니면 무엇이랴.

theory, practice



특히, 앞 부분이 절절히 와 닿는다.

Theory is when you know everything but nothing works. ㅠ ㅠ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등을 보면 한국에 똑똑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또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반면에 정치, 행정, 언론, 학계에서 자리를 잡고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엔 정말 멍청하고 덜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도대체 그 많은 똑똑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저런 인간들이 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 원래 멍청한데 운이 좋아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 멍청하지 않은데 멍청한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 자리에 가면 누구라도 멍청해진다.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자신을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상식파라고 하던 철수씨의 '상식'이 얼마나 허술한지, 기계적인 양비론을 선호하는지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 대한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저 정도 인물에 기대를 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될 뻔했다니. 물론 박누님 보다 더 망치진 않았겠지만...

오마이 뉴스 기사가 안철수 씨의 발언과 그 발언에 대한 비판을 잘 소개하고 있다.

철수 형은 "지금 대한민국을 반으로 분열시키는 문제에 대해 양쪽 다 문제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을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틀렸다고 보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둘로 쪼개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저희들이 드린 말씀이 맘에 안 드실 순 있지만, 문제의식 자체가 서로 다른 생각이 다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말씀드린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문당한 것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적어도 민주주의 상식과 인권의 보편적 원칙이 제대로 선 상태에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상식과 인권의 보편 원칙을 깬 사람들, 또 그걸 깬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자체를 분열이라고 보면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한 교수는 "서로 다른 견해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역사학엔 기본이 있다"며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하면 안 되고 없었던 것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 된다,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하는 자들과 타협할 수 없고, 또 없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미화하는 자들과도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특히 한 교수는 "독재시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에 대한 팩트(사실)를 공유한 토대 위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는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지만 이번 교학사 교과서 문제는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한다거나 없었던 것을 있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실관계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면 종북이고 좌빨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그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점을 지적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역사학자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안 의원이 교과서 문제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이번 교학사 교과서 파문은 서로(진보와 보수) 의견이 달라서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명징하게 드러난 역사적 사실과 실체에 대해 기득권의 논리로 미화하려는 역사왜곡에 대한 문제제기였다"고 정리했습니다. 안 교수는 "이번 교학사 파문은 어떤 사건에 대한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며 "한국사에서 특권 기득권층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는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것은 과거 전제 군주가 가문의 신화적 치장을 통해 군림하려고 했던 전근대시대와 비슷한 일이며 그것을 현 집권세력인 박근혜정부가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앞장서서 교학사 교과서 파문을 갖고 좌익사관 우익사관 하면서 사관을 양분시키려 하는 것은 명백하게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특히 안 교수는 "초등학교 수준도 안 되는 교과서를 만들어서 미래세대를 교육하려는 어불성설의 폭거가 바로 교학사 교과서 파문"이라며 "이것을 보수언론이 좌익사관의 문제로 몰아가면서 이데올로기 문제로 매도하는 구도에 안철수 의원이 말려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무엇보다 안 교수는 "이번 교학사 교과서 파문은 역사해석에 관한 논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며 "이미 확립된 과거사실을 뒤집어 왜곡시키려고 하는 데 대한 문명사적 도전이며 상식 밖의 일에 대한 국민적 일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DO WHAT YOU LOVE.
LOVE WHAT YOU DO.
- 공식적 조직과 비공식 조직 간의 간극. 공식적 절차와 결과를 실제로 산출하는 절차의 분리.

- 발전국가의 변화? 생명윤리 정책을 가지고 발전국가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나?

- 생명공학정책 전부도 아니고... 생명윤리정책만을 가지고

- 발전국가의 연속성과 변화 같은 접근을 가지고서 한국 생명윤리 정책의 특징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명윤리 정책 형성을 가지고 한국 발전국가의  변화를 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다.
- 생명윤리 정책은 생명과학정책으로 따져도 매우 일부분이고, 과학 기술 전체로 따지면 더 작은 부분이고, 국가 전체의 변화를 언급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한국 정치에서 어떤 윤리 문제건 독립적 주제로서 정치적 힘을 갖기 힘들다. 과학, 기술도 그렇고. 사회정책, 복지정책 정도 되면 모를까. 과학기술 국가라는 표현도 좀 그렇다. 과연 그렇게 윤리 거버넌스? 도덕화, 윤리화? 그런 경향은 한국에서는 매우 minor하게 남을 것 같다.


- 발전국가, 혹은 국가 전체의 변화나 역할, 기능 등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면, 어떤 이론적, 사회학적 함의를 찾을 것인가?

- 정치문화의 중요성?

- 규범적 질서에 있어서 발전국가 지향성, 발전주의의 강고함!! [이것이 발전국가 전반적인 변화, 한계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

- 공존: 발전주의와 체계윤리의 공존, 길항. 발전주의는 다른 윤리적 논점을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 세계문화의 수렴이냐 분산이냐?

- 윤리화, 제도화된 윤리의 기능?

- 한국 규범적 불안정성의 현실?

- 한국 근대성? 주변부 근대성?

- 주변부의 기능적 분화의 현실?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유홍준 선생의 글쓰기 조언에는 새겨 들을 이야기가 많다.

그 중에서 당장 내가 적용해야 할 사항으론...

"1 주제를 장악하라. 제목만으로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때 좋은 글이 된다.
6 본격적인 글쓰기와 매수를 맞춰라. 미리 말로 리허설을 해 보고, 쓰기 시작하면 한 호흡으로 앉은 자리서 끝내라.
12
 완성된 원고는 독자 입장에서 읽으면서 윤문하라. 리듬을 타면서 마지막 손질을 한다."


특히 "쓰기 시작하면 한 호흡으로 앉은 자리에서 끝내라"!! 일단 끝까지 쓰고 나서 고쳐 쓸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마무리 할 때까지 자리에서 읽어나지 말 것!!! 다른 잡다한 일로 방해를 받거나 도피하지 말 것! 한 호흡!!! 이런 블로그짓도 호흡을 이어나갈 때는 끊을 것. 인터넷 끊기. 다운 받은 자료 정리 금지!! 주욱 쓸 것!! 끝까지!! 한 호흡으로!! 시~작~!!
아. 베버도 좀 제대로 공부했어야/해야 하는데... 쩝... 진태원 선생의 명쾌한 정리!

(p.s. 루만은 사회학 전통과의 단절을 애써 강조했고 실제로 글 속에서 고전사회학자들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들 정도지만 어쩔 수 없이 고전사회학의 성과 위에 자신의 이론 건물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베버, 뒤르케임 등의 영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버의 논점은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를 통해 근대인은 자기 삶과 세계에 대해 이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을 포함한 세계는 더는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더는 내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베버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찾는다. 생명의 유기적 순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전통 사회의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무한한 진보와 끊임없는 변화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근대의 인간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진보 자체가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삶이란 그 진보의 선상에 놓인 작은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버의 탈주술화 테제는 신은 죽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의 사회학적 변용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베버는 그렇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우리 시대의 운명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이제는 집단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과거에는 예언자의 성령 아래 대중의 격렬한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이제 그것은 광신적인 종파를 만들어낼 뿐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베버가 볼셰비키 혁명을 “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장식되고 있는 광란제”(‘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강연)라고 조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대인에게 남은 것은 각자가 자기 인생을 조종하는 정령(Daimon)을 찾아 그에게 복종하는 길이다."

2014년 1월 20일 월요일

"변호인" 보고 나서 끝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쓴 적이 있는데... 감독의 의도를 알고 나니 이해가 되긴 한다. 그래도 마음에 들진 않는다. 


요즘 기다렸다 챙겨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 'k팝스타 3'. 오늘 편은 사뭇 실망스러웠다. 역시 오디션 프로그램이 갖는 역설이다. 참가자들의 가능성, 미래 전망이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지면서 시청자들의 기대의 전망 역시 좁아지는... 심사위원들이 '회사'의 시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참가자들이 결국 할 수 있는 건 기획사 연습생, 혹은 빠른 데뷔... 잘해야 이하이, 박지민, 백아현... 가요계에서 그들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인지... 정말 실력있고 가능성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K팝 기획사 소속 가수가 그들이 꿀 수 있는 꿈의 최대치기 때문이다. 천재 소리를 듣는 학생이 기껏해야 삼성 신입사원이 될 뿐인 현실과 비교할 수 있을까? 기획사가 발탁하는 순서에 접어들면서 드러나는 결정적인 한계. 기획사 간의 불균형. 즉 심사위원들 간의 불균형. 유희열이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SM의 빈자리를 메꿀 수 없을 거라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JYP도 요즘은 하락세라 무게 중심이 YG로 쏠리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이다. SM이 없는 곳에서 YG는 삼성이다.

그냥 아마추어로 남는 이들이 생기면 좋겠다. 아니... 기획사에 발탁되어 가수로 데뷔하려는 욕심을 모두가 가지고 있진 않겠지. 안테나뮤직, 유희열도 어설프게 대행기획사 흉내 내지 않으면 좋겠다.

이에 이 프로그램도 놔 줄 때가 된 것 같군.
명쾌한 해석이다. 모름지기 글엔 이런 맛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물론 따지고 들자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주장의 근거가 부실하다. 방법론 좋아하는 실증주의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 얘기다. 사회(과)학, 특히 거시적 설명을 지향하는 사회이론이 그런 비판을 받는다. 대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놓고서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실을 그 그림에 끼워 맞춘다고... 역사학자 이덕일도 그런 접근을 취한다고 강단 역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아래 글에 대해서도 그런 혐의를 둘 수 있다.

일본은 활어회'보다는 선어회'를 먹는다. 회를 뜬 후 냉장 숙성'을 시켜야지 감칠 맛이 난다고 한다. 반면 한국인은 활어회'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것은 입맛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활어회와 선어회를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대부분 선어회'가 맛있다고 한다. 한국인이 입맛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활어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먹거리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다. 두 눈으로 보아야지만 안심이 되는 것이다. 수족관은 그러한 욕망을 채워준다. 믿을 놈은 오로지 내 가족뿐이고,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기독교 신학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자유로울 때 하느님에게 가장 깊이 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28)

'도덕주의'를 경계하자!

"'도덕주의'를 경계한다". 이 글을 전에 한 번 소개했던 것 같다. 도덕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우파에서 더 드높다. 원래 우파가 그렇긴 하지만... 한국의 우파는 지독한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고, 법치, 원칙을 강조하는데 그게 꼭 남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네 누님은 멩박씨와 그 무리들의 언어도단을 보왔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를 것임을 믿게해서 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나도 멩박씨보다는 나을 줄 알았다). 그런 믿음을 저버리고 누님마저 흑흑 ㅠ ㅠ 여하튼 도덕주의자들은 개인의 도덕, 특히 타인의 도덕에 관심이 많다. 전형적인 위선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위선은 별로 권장할 만한 게 못된다. 물론 위선은 우리를 정신분열증에 빠지기 않도록 도와주는 기특한 메커니즘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다. 한국은 특히 이 도덕주의적 경향이 심각하다. 도덕으로 논의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도대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도덕화 경향이 매우 심하고, 윤리화는 별로 관찰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위험 논쟁도 도덕화되어버리는 현상.








즐겨 듣는 팟캐스트 중 하나가 "창비 라디오 책다방"이다. 법학자 김두식 선생과 ... 음. 이름이 누구였더라?... 목소리가 좀 답답한 소설가라는 여성, 이 둘이서 글쓰는 사람을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누가 나오는지를 따져서 가려 듣는다. 최근에 들은 건 유홍준 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94년에 나왔단다. 그 때 그 책을 읽고서 내가 주동해서 졸업여행 코스를 해남, 강진 쪽으로 잡았다. 제주도로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는 후배들도 있었지. 여하튼 그 이후로 그 양반 답사기를 꾸준히 읽진 않았는데 지금까지 내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엔 일본 편을 냈고 앞으로도 최소 3 - 5 권은 더 내서 완결 짓고 싶단다. 사이사이 이런 저런 책들도 냈고. 대단한 열정이고 능력이다. 한국 미술사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지식인, 학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로 생각한다고.

저녁에 아주 슬픈 기사를 읽었다. 십대 여성이 모텔에서 아기를 혼자 낳고선 창밖으로 던져서 결국 죽게 했다는... 텔레비전에선 수십 년간 연구해서 말라리아 백신을 만들어 낸 프랑스 연구자 이야기를 들었다. 아프르키에서 말라리아는 여전히 큰 문제라고... 아프리카의 모습을 볼때마다 심난해진다.

이런 약간은 극단적인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내가 관심을 갖는 주제를 하려는 이야기들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너무 한가한 얘기는 아닌지,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아닌지, 윤리, 윤리화, 거버넌스, 체계, 체계통합, 기능적 분화, 근대성, 주변부 근대성, 공정, 정의, 원칙, 자유주의, 개인주의....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지... 싶은 것이다. 물론 연결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민을 더 해야 할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경향이 있다. 지적 게으름. 더 치열하고, 깊에 고민해야 한다.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 그게 싫어서 검색하고 새로운 논문, 글 받아 놓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는데 치중하고... 상황과 사실이 주는 도전에 내 관심사를 정면으로 충돌시켜서 내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유홍준 선생도 그런 고민이 왜 없었을까? 그 험악한 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살이도 한 양반이니 더 시급해 보이는 일들에 기여하지 못하는 형편에 대해 자괴감을 갖지 않았을까? 팔자 좋게 문화재나 답사 다닌다고 비판받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는 자신의 관심사를 끝까지 밀어 붙였다. 이름도 얻었고 그가 생각한대로 한국 사회에 대단히 긍정적 기여를 했다.

내 관심사를 둘러 싼 생각을 더 깊고,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매진하면 될 것이다. 정말 가슴이 뛰는 그런 일을...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남들 시선에 맞춰서 살면 그게 무슨 의미있는 인생이랴...

한편... 아버지, 어머니, 또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었던 만큼, 이젠 그분들이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내가 희생해야 할 차례인데 아직도 그러지 못해서...

유홍준 선생은 또 글을 여러 번 고친다고 한다. 쉽게 쓴 글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어렵게 썼지만 그런 표가 나지 않는 글이 좋은 글, 잘 쓴 글이라고. 자기가 읽어도 재미가 없는 글은 남이 읽어도 재미가 없다고.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매 챕터마다 다른 형식을 취하는 등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양. 독자를 분명하게 배려하고. 이야기꾼이다. 그의 글이 또 단단한 까닭은 대부분 답사에서 혹은 강연에서 구두로 전달하고 현장의 반응을 거치면서 검증되고 걸러진 이야기인 탓도 크다. 자기 글을 읽히면서 여러 번 고쳐야 좋은 글이 나오는 모양.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고종석의 '낭만미래'에 자유주의자로서 민족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가족 등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갖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실체도 불분명한 국가를 사랑하는 건 다른 문제다... 대략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 잘 알다시피 국가주의, 민족주의 nationalism은 철저하게 어쩌면 가장 대표적인 근대의 산물이다. 루만에 따르면 근대사회의 구조 자체는 민족/국가라는 단위가 아닌 세계사회를 중심에 놓고 이해해야하지만 적어도 정치체계에 관한한, 그리고 세계사회의 기능적 분화 문제를 실현하고 여러 문제를 구체적 맥락에 따라 다루기 위해서 국가라는 단위는 필수불가결한 메커니즘이었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가/민족 상실의 위기를 경험했고 그 위기를 넘긴 후에도 분단 상태가 지속되어서 정상적인 근대 민족국가를 아직 경험해보지도 못한 남한 상황에서 내셜너리즘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친일, 친미 소리 듣기 십상이다. 민족주의는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신성시되고 있다.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민족, 국가, 혹은 사회 같은 단위적 사고를 강조하는 것은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 병폐를 치유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 물론 국가주의와 예를 들어 가족이기주의는 매우 잘 공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럴수록, 아니 그렇게 때문에 인류에 대해서 보편적인 사고가 필요한 것 같다. 내 비록 심하게 한국, 특히 남한 사회에 대한 애정, 안타까움이 있지만, 동시에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고를 지향하기도 한다. 이 둘 역시 반드시 상호배타적인 건 아니니까. 여하튼.... 좀 더 인류, 지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엘룰의 표현은 참 적확하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 그런데 나는 어설프게 globally think하고 있고, local하게 act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못하고 있다. 어설픔. 뭔가 야무지게 하지 못하고... 논문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내 고질병...
'촌철살인(寸鐵殺人)'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표현인가 보다.

"대학은 간다고 얻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지 않으면 잃는 것이 너무 많은 곳" (엄기호)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클턴, 모멘토 2010)

세상에 맑스주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이런 책을 썼다니: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2010).

레디앙에 이 책의 내용을 잘 소개한 글이 실렸다(글쓴이: 남종석).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싶군.

"도킨즈가 [만들어진 신]에서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이라고 주장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많은 유물론자들이 도킨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신을 과학적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킨스는 허수아비를 두고 전투를 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정립된 신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의 제작자가 아니다.

신학자 맥케이브는 “창조주 하나님을 최고의 제작자, 우주의 최고 경영자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크고 막강한 피조물로 생각하는 견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아퀴나스의 주장대로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전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있어 “태양이 있으라 하니 태양이 있고, 달이 있으라 하니 달이 있다.”라고 해서 태양과 달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우주가 양자 진공 상태에서 대폭발을 하여 지금까지 팽창하고 있다는 ‘빅뱅론’과 경쟁하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기원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위대한 신학자 아퀴나스는 말했다. 스콜라 철학의 대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그러니 도킨스가 위에서 언급한 책들에서, 진화는 사실이고, 인간의 조상은 포유류의 조상과 동일하고, 그 조상을 끝까지 추적하면, 최초의 생명체는 박테리아이고, 더 올라가면 외계로부터 온 아미노산이라고 떠들어봐야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의 창조를 두고 진화론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와 모세 5경 [창세기-출애굽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다. 사실과 상상이 결합된 신화 말이다. 트로이가 진짜 있었지만 아킬리우스가 여신 아테네의 아들이이어서 그리스가 트로이를 물리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에서 변한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았다고 믿는 이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달과 태양을 만들고,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교조적인 근본주의 기독교도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는 세상의 아찔한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이다. 세상을 무에서 창조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외계로부터 날아온 아미노산이든, 아니면 질소가 반응해서 지구 내에서 생명이 생겨났든, 생명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매우 커다란 우연의 결과다. 빅뱅도 마찬가지다. 왜 최초에 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만들어지게 되었나? 말 그대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매우 우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진화론을 설명하는 모든 학자들이 다 이야기 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역사를 성찰하는 종’(인간이다!)이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은 너무나 우연한 변이의 결과일 뿐이라고. 진화의 나무를 역으로 거슬러서 최초의 포유류가 출현한 1억년 정도 회귀해 올라가서 다시 진화가 된다면, 인류라는 종이 출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인간 종은 매우 우연한 상태에서 출현했다. 그러니 “인간의 출현이 진화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떠드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최악의 오해이다. 

문제는 이런 우연 속에서도 우주는 만들어 졌고, 생명이 탄생 했으며, 인간 종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황홀한가? 굳이 없어도 될 것들이 그 수많은 우연적 상황 속에서 ‘지금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우연성을 설명하는 게 바로 ‘창조주 신의 존재’이다. 이런 우연적인 것이 마치 필연적이도록 만든 것은, 어떤 다른 초월적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이 요청된’ 것이다. 

과학은 결코 인간 출현의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은 당신이 왜 굳이 태어나야 했는가를 증명할 수 없다. 수 억 마리의 정자 중 난자와 우연히 성공적으로 결합한 결과가 ‘당신’이다. 과학은 그 결합의 과정과 세포분화를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왜 굳이 다른 정자가 아니라 ‘그’ 정자가 난자와 결합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고작 설명해봐야 통계적 확률인데, 그렇게 될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아버지가 결혼한 것도 통계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 당신은 그런 우연의 결과로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진화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 인간 종의 필연적 출현은 결코 논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이는 환경 작용에 의한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무로부터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전능하여 “무로부터 뚝딱 은하계”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더 나아가 신이, 지적 설계론에서 주장하듯이, 우주를 만들고 45억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변화해 오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세계의 “우연성을 설명하는 전제”이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야할 과학적 필연성은 거의 없다. 확률적으로 따져 봤을 때 거의 무에 가깝다. 그럼에도 당신은 존재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누구 때문이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게 신학이다. “신은 은총이다”라고 성경이 밝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계는 정말 우연들이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롭다. 아인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계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는데, 적어도 거시세계에서 이 우주는 정확하게 뉴튼의 역학법칙으로 설명가능하다. 우연찮게 만들어진 어떤 존재가 정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과학은 법칙을 규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 법칙이 만들어졌는가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신의 존재가 문제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니 과학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것은 헛고생이다."

2014년 1월 14일 화요일

고종석 "낭만미래" 중

"진보주의자들은 국회 바깥에 있고, 이념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양대 정당이 국회를 양분하고 있는데, 이 둘의 다툼은 왜 이리 시끄러울까요? 그것이 이 다툼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밥그릇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한국에서, 정치적 대립은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사적 이익의 대립인 겁니다. ... 커다란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이 갈라져 사납게 싸우는 것은 그 유권자들의 이념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 정파에 대한 자기 동일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은 아니더라도 심리적, 정서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 민주당 이념과 안철수 후보의 이념은 거의 겹쳤습니다. 그렇지만 단일화 과정에서 양쪽 지지자들은 심하게 대립했지요. 그러니까 지지자들은 민주당 이념이나 안철수 후보의 이념에 자신을 투사한 게 아니라, 문재인이라는 인격과 안철수라는 인격에 자신을 투사한 것입니다" (60 - 61)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족입니다. 유권자들이 이념에 따라 투표한다기보다 어떤 인격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투표한다는 거지요" (62)

흠. 뭐 나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념과 정치인(의 인격)은 원래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게 아니다. 이념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정치인 아닌가? 새로운 인물, 새로운 세력은 새로운 이념을 구현하도록 기대되는 것이다. 기존 정당들도 간판을 새로 달기도 하고, 신장개업도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이념은 상황, 시대에 따라 재해석, 재적용되면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또한 한나랑, 민주당, 안철수 세력 간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한나라당의 저 우경화, 제뱃속차리기, 뻔뻔함 정도는 놀라울 지경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의 차이는...오... 무지막지하게 크다.

다만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념의 과잉이라는 지적은 옳다. 특히 좌파 이념이 설 자리가 너무 좁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은 역시나 좌파 세력이 힘을 더 갖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세력 따위에 좌파니 종북이니 하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잖은가. 좌파가 최소한의 지분을 가지기 위한 전제 조건은 냉전 패러다임의 해소일텐데... 갈 길이 멀다.

여하튼... '낭만미래' 좋은 책이다. 토론 수업 할 때 읽히면 좋겠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논쟁이 양적으로 적진 않은데,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은 편이다. 지식인들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웅진문학임프란트의 이 기획은 그래서 시의적절한 것 같고 참 반갑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전형적인 근대의 위선이 자율성, 개인주의, 평등, 자유 같은 가치 아닌가 싶다.

주권국가 = 국가간의 평등
개인주의, 개인의 자율성, 차별 금지 = 개인 간의 평등
기능체계의 자율성 = 기능체계 간의 평등

사실 모두 일종의 허구 혹은 위선적인 상태 아닌가? 실제로 국가 간에, 개인 간에, 기능체계 간 관계가 평등할 수 없고, 그런 단위들이 각각 자율성을 누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한 상태, 바람직한 상태로 보면서 실제로 그런 것처럼 혹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행태들.

체계이론은 그런 면에서 위선적인가?

위선에는 예절, 매너도 포함되나? 하기 싫어도 하는 인사. 그건 위선인가 아니면 예절인가? 개인주의가 발달했다는, 혹은 개인주의가 인간 관계 혹은 교육의 기초라는 서양에서도 예절, 규범은 매우 발달한 편이다. 위선이라고 볼 요소가 많이 있다. 아시아는 더 위선적인가? 노우. 많은 경우 한국인들이 더 감정이 솔직하다. 어떤 서양인들은 한국 문화의 그런 점들에 매료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더 감정에 솔직하고, 덜 위선적이지만, 덜 문명적이다. 한국에는 위선의 과잉이 아니라 위선의 결핍이 문제인 것 같다.

위선의 문명화? 위선의 세련화? '세련됨'과 '덜세련됨'. 그 차이가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물론 더 급진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착한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래봐야 자본주의 아니냐고 타박할 테지만....  뭐. 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내 내면과 인격에 대해선 혁명적 변화를 지향하더라도, 사회에 대해선 좀 더 세련되고 인격적이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그런 질서를 지향할 뿐이다. 조금 더 세련되고 상식적인 사회, 지금 한국에선 그런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착한 자본주의, 좀 더 예측가능하고 신뢰할만한 정부, 뭐 그런 방향으로...


"The modern idea that treated each individual as a free centered subject with rational control over his or her destiny was extended to the nation-state level" (Grosfoguel 2000: 348) ('Developmentalism, Modernity and Dependency Theory in Latin America, in: Nepantia 1:2)
위선(僞善)/ hypocrisy 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 차원의 위선이었다. 다면성, 다중성을 가진 인간이 다면성을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는 이해을 얻기 어려울 것이고, 도덕적 비난도 받게 될 것이다. 심하면 정신분열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 특히 근대인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정말 그 진실은 얼마나 제한적의 의미의, 달리말해 위선적인 진실인가? 위선적인 진실. What a paradox! 우리 근대인은 다중적 인격을 가졌지만 잘 살아가고 있다. 바로 위선, 위선적 진실 덕분이다. 위선은 피할 수 없는 생존전략에 가깝다. 어쩌면 근대 이전에 위선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문제는 여전히 위선의 정도나 종류에 있을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것, 거짓말을 그 자체로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는 없을 테니까. 아니. 위선은 그 자체로 가벼운, 수용가능한 거짓말이나 사기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용가능하지만 속이 뻔이 들여다 보여서 가벼운 도덕적 제재가 가능한.... 그러고보니 '위선'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전근대 사회에서 예절, 규범 등은 예절의 외피와 속마음의 일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 사회가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였으니까. 개인의 발견 이후 속마음(양심)과 행동의 불일치는 개인에게 가책으로 다가온다. 성찰하는 개인이 등장하고 (데카르트 수상록, 일기쓰기, 글쓰기...) 개인은 일관성을 갖도록 기대된다. 위선은 도덕적으로 정죄되고, 일관성 지향, 정직 등이 미덕으로 칭송된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의 기능, 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포스트모던적일까? 위선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관찰되지만, 문제는 왜 어떤 위선이 특별히 더 불거지고 문제가 되는가다. 그게 연구가 기여하는 바여야 한다. 서양과 아시아를 비교하는 것은 유용하다. 서양은 어찌되었거 개인주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근대성을 근저에 가지고 있고, 위선은 아주 전략적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인종차별에 대한 서양인의 태도를 볼 것). 한국에서 많은 경우 위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적 가치관의 혼재,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혼재 때문일 것이다. 그 위에 위선까지 겹치니 규범적 질서는 더 혼란스럽게 구성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위선에 대한 관용도의 수위가 춤을 추고, 위선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방식도 매우 조야하다. 예측하기 힘들다. 요약하자면 서양인과 한국 등 아시아인의 위선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것보다, 정도의 차이로 봐야 하고, 그런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건을 따져보며 결국 '근대성'이 구성되는 방식 차이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루만이 Brunsson를 자주 인용하면서 위선의 긍정적, 불가피한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만은,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정직하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그 결과는 끔찔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에나 위선이 있고, 위선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위선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위선적 행태를 비판하기도 하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위선적으로 행동한다. 문제는 역시 '정도'인 것 같다. 위선의 정도. 개인에 대해서도 그렇고 조직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 정도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관용되던 위선이 다른 맥락에서는 치명적인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받는다. 위선에 대한 판단은 매우 결과론적이고 상황에 종속되어있다. 도덕적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 것.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생명윤리 정책 형성과 집행에 있어서 위선적 행태를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었으니까 위선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구조적으로 위선의 정도가 클 수 밖에 없다. 위선의 영향이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것을 피할 수 없다. 다시 정리하자면 어떤 지역의 '위선'이 크게 부각되고, 사회적 문제로 불거질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적 조건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만의 이론이 매우 유용하다. 기능체계 발전 정도, 구조적 연결의 지역차이가 있기 때문이다(Krasner처럼 기대의 구분, 세계적 기대와 지역적 기댈로 구분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방식일 수 있겠으나 그것은 하나의 예시일 뿐 일반화하기 힘들다). 브런슨과 루만을 결합하면 매우 유용한 설명틀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을 한다면, Brunsson의 Organization of hypocrisy 2002년 판을?
우연히 발견한 흥미로운 글.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에 대한...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봤는데, 그 뿐이었다.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우울에 대하여 : 카프카와 멜랑콜리아"

고종석의 "낭만미래"를 아주 흥미롭게 읽고있다. 그이가 꼽는 스승은 포퍼, 롤스, 오웰스 이 세 사람이다. 그의 태도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비판적 합리주의? 대표적으로 포퍼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고종석에게도 어울린다. 나도 슬쩍 그 줄에 뒤로 가서 서고 싶다.

통계, 수치, 최신 연구 결과를 과신, 맹신하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 매우 유치하고, '촌스러운' 사람들이다. 물론 '과신', '맹신'과 '합리적, 비판적 판단에 근건한 신뢰'를 명확히 구분하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일은 또 아주 불가능하지만도 않다. 반대로 자신의 신념, 지향에 맞는 지식만을 취사선택하거나 가공해서 내놓은 태도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느낀다. '전문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런 주장을 과격하게 끌고가면 도대체 논의 자체가 되질 않으니까. '도덕적 태도' 도덕 담론이 전근대 이후 워낙 강한 편이었지만, 우리는 를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상식, 거리를 두는 태도인 것 같다. 합리성, 성찰, 비판(Kritik), 거리두기, 객관화하기...
며칠 동안의 '재택근무'(?)후 다시 사무실에 나오다. 학위 논문 두 개를 받았다. 도시행정학 박사, 사회복지학 석사. 그분들에게 이번 해에 내 학위논문을 드릴 수 있으려나.

금요일 저녁부터 잘 쉬었다. 감기 기운도 있고 해서 그냥 마음놓고... 덕분에 다시 해 볼 기운을 얻었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속시원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맛을 남기는 한겨레 칼럼이다 ("품격의 죽음" / 김동조)


"‘변호인’의 송강호가 내린 선택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눈뜨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한 그의 모습이 2주 동안 6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극장으로 달려간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욕망을 양심과 양립시킬 수 없던 시대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정부가 최소한의 ‘질’을 갖추지 못하면 시민은 작은 양심을 지키는데도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국가란 국민이다”란 당연한 말을 용기를 갖고 외쳐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품격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란 최소한의 품격이 지켜지는 사회다.
(...)  <엠비시>의 문제는 이념적 성향이 아니라 기자와 매체의 ‘질’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언론의 ‘질’은 곧 언론의 ‘품격’이다. 품격 없는 언론을 접하다 보니 내 품격도 함께 추락했다.
얼마 전 <경향신문>이 인용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이티비시>는 신뢰도 면에서 <엠비시>와 <에스비에스>를 앞질러 3개 지상파와 4개 종합편성 채널 중에서 2위를 차지했다. (...). 이러한 현상이 정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삼성 정도의 대기업은 뒤에 있어야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정치의 퇴행을 막고 있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언론이 아니라 차가운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념’ 대신 ‘품질’과 ‘품격’을 따진 결과다.
선거철이 되면 여당과 야당은 모두 중도로 수렴한다. 투표를 할 때쯤엔 두 당의 정책 차이는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언론은 모두 본색을 드러낸다. 정치와 언론의 ‘품질’은 떨어지고 ‘품격’은 사라진다. 사실은 사라지고 선동만 남는다. 우리는 북한 김정은의 눈썹이 왜 없어졌는지 논하는 공중파 뉴스를 봐야 한다. 관점 대신 입장이 논조를 정한다. ‘파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란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 신문을 가득 채운다. 결국 이념마저 사라지고 이익만 남는다. 본질이 사라진 빈자리를 마침내 자본이 비집고 들어온다. 공적 품격이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증거다. 이렇게 공적인 품격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는 사적인 품격도 유지되기 어렵다. 그 사적 품격을 자본이 지킨다. 자본이 사회적 품격을 위한 최후의 희망이 된 사회, 참 비루하다.

김동조 선생은 블로그에 이 칼럼 후기 같은 글도 남겼다.

"'변호인'이 다룬 시기의 한국에는 품격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정치적 여유 뿐 아니라 경제적 여유도 없던 시기였다. 하지만 국민 소득 2만 3천 불의 시대에 그때를 돌아보는 느낌이 그 당시를 살은 이들과 같은 수는 없다. 지금은 이집트와 중국과 이란에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시대다.

품격의 마지막에는 사회적 위선이란 게 있다. 사회의 모든 공적 품위에는 위선적인 면이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차별이 남아있는데 차별적인 발언을 경계하는 건 위선적일 수 있지만 위선이 없으면 공적 품격도 무너진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서는 최소한의 공적인 품격이 너무 쉽게 무너진다.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건 물론이고 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위선조차 없는 자들 때문이다. 독재자에 대한 향수, 동성애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멸 같은 것들이 너무 쉽게 보인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자들에게 위선을 강제하는 교양이 결여되어 있다."
지금 한국의 갈등은 정상과 비정상, 혹은 공식적 비공식적 간의, 혹은 상식과 몰상식, 독재와 민주 간의 갈등이 아니다. 정당성을 갖지 못한 측과 정당성을 가진 측의 갈등이 아니다. 특히 민주화 이후집권하는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로는 정당성과 정당성 간의 갈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좌든 우든 시민사회라는 표현을 쓰고, NGO고, 애국애족이고... 한나라당도 복지, 민주화고... 정당 간에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상식과 몰상식으로 구도를 잡고, 몰상식, 비정상, 비공식적인 것들을 모두 악한 쪽으로 몰아놓고 나를 '상식' 쪽에 위치지우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런 구도가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분명한 원칙이 중요하다. 진영 논리가 아니라 원칙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공주님. '원칙' '원칙주의'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나는 강제하고, 남이 지키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원칙은 그 누구보다 내게 적용되어야지요. 적과 동지, 상식과 몰상식, 정당한 것과 정당하지 않은 것 사이를 구분하기 힘들수록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다. 고종석 선생은 트위터를 통해서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데, '낭만미래'를 읽으면서 더 좋아지고 있다. 아. '해피패밀리'는 좀 실망이었지만... 여하튼 고종석 선생을 원칙주의자라고 할만한다. 공주님은 좀 빠져주시고요.

2014년 1월 8일 수요일

자연과학과 비교할 때 사회과학 연구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개념 정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요 개념들은 대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culture/ Kultur 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150여 가지의 서로 다른 정의가 있다고 한다.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든 생각이다. 공적 규칙을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행태를 주로 가리키는 등 근대화에 늦게 참여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서양의 근대화의 특징 중 하나를 형식주의로 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형식적 합리성과 연관해서... '형식주의'는 우리가 배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강화될 필요도 있는 그런 것이다. '위선'도 마찬가지고. 사회과학은 대개 이런 식이었고, 이런 식으로도 나름 의미있는 결과를 냈다. 알아서들 골라 먹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두고 이게 무슨 과학이고 학문이냐고 열을 내는 인간들을 난 경멸한다. 지금 떠오르는 인간이 한 사람 있는데 유전학 전공자다. 유전학이라면 사정이 좀 나을지 모르겠지만... 유전학도 포함하는 생물학은 '일부' - 너처럼 '하드'한 것 좋아하는 - 물리학자들에게 개무시당하지 않는가? 그게 무슨 과학이냐고? 물리학에게 당한 수모를 만만한 사회과학을 상대로 푸는 건가? 어느 학문에서나 장단점이 있고, 양지 음지가 있지 않은가? 무슨 진리를 독점한양 날뛰는 모습을 보면 역겹다 역겨워. 공부를 '제대로' 하면 지식이 늘어날수록 외려 더 겸손해지는 법인데... 세상에 잘못 배운 헛똑똑이들이 너무 많아. 그 리스트에 김용옥, 강신주, 김정운도 포함시키고 싶다. 모두 한 때 호감을 가졌으나 보면 볼수록 매력이 떨어진다.

2014년 1월 7일 화요일

비록 대형 교회에 적을 두고 있고 심지어 올해엔 서리집사로 임명받기까지 했지만, 난 대형 교회에 대해서 우호적인 편이 아니다. 심지어 페친 황모님의 발언 "교회는 얼마나 크(작으)면 좋을까요? - 부교역자를 두기 직전 규모"에 심하게 동의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신우회원들과 점심식사하면서 작은교회(대화 중에선 '개척교회'로 표현됨) 다니는 게 쉽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면서 - 예를 들어 개인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려고 한다는 둥 - 딜레마에 빠짐. 작은교회에 출석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조용히 대형교회에 다니는 게 나을까. 말로는 대형교회 비판하면서 단 열매만 쏙 빼먹으려고 하는 건 더 나쁜 모습 아닐까?
이른바 한국 우파는 왜 일본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해석하려고 할까?
과거, 출세의 사다리: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 (한영우, 지식산업사, 2013)
1 : 태조~선조 대-과거,  2 : 광해군~영조 대, 3 : 정조~철종 대, 4: 고종


"저자는 이미 1970년대부터 조선시대 신분구조와 신분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양반의 특권과 세습성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과 토론하면서, 기존 학계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여 왔다. 조선 초기 15세기에는 양반, 중인, 평민이 확연히 대립된 신분구조가 아니라 양인과 노비가 양립되는 구조라는 것과, 16세기 후반 이후부터 서서히 벼슬아치 양반의 세습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이르러 양반, 중인, 평민의 계층구조가 성립되었으며, 18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신분상승운동이 활발하게 나타나면서 양반신분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기본논지였다.
조선이 건국된 태조 대부터 선조 대까지를 다룬 이 책은 전4권 가운데 제1권에 해당한다. 제2권은 광해군에서 영조 대까지, 제3권은 정조부터 철종 대까지, 제4권은 고종 대를 다루게 될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저자가 마무리한 이 작업은 이제까지 저자가 주장해 온 논지를 구체적인 통계적 수치를 가지고 뒷받침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분명한 가치를 갖는 연구다. 이런 연구를 해야 보람이 있을 텐데.

2014년 1월 6일 월요일

한겨레 서평,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김진석, 문학동네)

뒷 '소내'부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외'에 대한 설명은 루만의 Exklusion에 대한 설명을 연상시킨다.

"소외란 개념이 인간의 권리가 이전보다 줄어들거나 박탈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보편적인 권리’를 상정했던 근대 초기 자연권 사상 및 사회계약설의 출발과 더불어 생겨났다는 점을 짚는다"

루만에게서 근대 개인의 사회로의 통합은 포함이 아닌 배제로서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individuality by incluison에서 individuality by exclusion로). 왜? inclusion은 원천적으로 모두에게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변별력을 갖지 못한다. 어디에 포함되지 않는지, 즉 배제되는지 (소외되는지?)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서 인간의 인식 속에 당연하게 자리잡은 듯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폭력은 그 보편적 권리가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줬다.
(...) 이 책은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상정한 근대 초기에서부터 자유주의의 발전과 그 후기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주체가 마주해온 자유와 폭력의 모순을 ‘소외’라는 개념으로 모호하게 뭉뚱그려버린 지적 게으름에 대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먼저 지은이는 소외란 개념이 인간의 권리가 이전보다 줄어들거나 박탈되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보편적인 권리’를 상정했던 근대 초기 자연권 사상 및 사회계약설의 출발과 더불어 생겨났다는 점을 짚는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권리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현실적으로 담보해줄 수 있는 ‘사회적 몸’, 곧 주권을 지닌 정부를 함께 탄생시켰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는 이상 또는 가상의 수준으로 구축된 반면, 현실 속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권리를 중재할 ‘다수의 의지’에 강제로 예속될 수밖에 없는 모순이 벌어진 것이다. 지은이는 이 간극 속에서 실제로는 존재한 적도 없는 ‘소외’란 환상이 대두됐고, 모든 것을 소외 때문이라고 뭉뚱그리는 ‘극소외’ 현상이 벌어졌다고 짚는다.
자연권 사상 및 사회계약론의 출발이 ‘소외의 가설’을 불렀다면, 그 뒤에 이어진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의 전개는 ‘소내’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지은이는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권력관계와 관련한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자유주의는 합리성에 근거해 근대적 주체들을 통치하는 체제로 발전했는데, 이러한 자유주의적 통치 질서는 “위험과 동시에 안전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곧 내부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고 초월적인 외부로부터 위험이 찾아오던 과거와 달리, 자유주의적 통치질서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뭐든 진지하고 엄숙하면 다 가짜,라고 나는 믿는다."

페친인 유명 시인의 발언 중에서... 갈수록 나도 그렇다고 믿게된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언어와 현실의 불일치 현상의 증가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사회구조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언어 사용 행태만 탓하는 것은 문제의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한 분석이다.

아래는 소준섭 선생의 '정명론(正明論)'의 결론 부분이다. 개념의 잘못된 사용이 개념이 가리키는 내용에 대한 혼란, 잘못된 이해와 논쟁에 기여한다는 지적이야 정당하지만, 그런 점을 과도하게 확대해석하는 결론 부분은 논리의 비약이다.


"'개념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사고를 구체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표현 수단이다. 그것은 인간 생활 전반에 깊숙이 관련되면서 인간의 본질 및 인간생활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언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서 언어생활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서로 상이한 개념과 이미지가 그 용어라는 그릇에 담겨져 사용되고 그것은 확대 · 심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개념이란 특정 언어로 표현되어 특정한 내용을 내포하게 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공자 사상이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자가 '개념'을 완전히 배타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은 근대 이후 동아시아 한자문화
권에서 개념, 즉 언어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곧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이 만들어낸 개념에 의하여, 일본인들의 언어에 우리가 지배당하는 한 우리는 계속 일본의 총체적인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을 지배 --> 세상을 지배"? 사회구조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쓰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이 지배적일 수 있는 것이겠지. 

다만 사회구조적 변화와 개념의 관계, 혹은 사회구조적 지배와 개념의 지배 관계는 매우 복잡해서 단선적으로, 혹은 결정론적으로 이해할 일은 아니다.

여하튼... 한국의 경우 현재 관찰되는 "언어와 현실의 불일치 현상"은 어쩌면 구조적 개혁, 변혁, 변동 가능성은 떨어지는데 어떻게든 그 기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현실 때문인 것 같다. 한라라당이 복지, 경제민주화 같은 얘길 하는 것이다. 일베가 '민주화'를 비틀어서 쓴다던지... 이명박이 '공정사회'를 얘기하고 박근혜가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하는 개같은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지만, 이명박, 박근혜의 언어 사용 행태는 역겹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프로그램 "K팝스타". 오늘 역시 감동이었다. 여러 번 들은 노래들이 많이 있었다. 매력있는 참가자들이 많다. 심사평도 여러 번 듣게 된다. 참가자들의 음악 실력, 심사평도 출중하지만 편집 실력 역시 눈에 확 띌 정도로 좋다.  다음 주도 기대된다. 예고하는 장면을 보니 짜리몽땅과 피터 한의 무대를 두고 박진영이 "지난 삼 년 중 최고"였다고 평하는 것 같던데, 그 무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편하게, 떨지말고, 즐기면서 하라고 자주 조언한다. 사실 그건 좀 하나마나한 평이다. 왜? 결국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력과 상관 없이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서 즐길 수는 있다. 또 그게 먹힐 수도 있다. 한 두번쯤... 딱 그 정도다. 실력이 없으면 제대로 오랫 동안 즐길 수 없다. 내공과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혹시 K팝스타 같은 어떤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 나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과연 내가 개성있고, 매력있고, 실력도 갖춘 참가자로 평가받을까?

사실 학문의 세계에서도 K팝스타와 비슷한 메커니즘이 관찰된다. 대표적으로 학술대회 논문 발표. 선곡과 비슷한 게 연구 주제 선택,  자신있게 즐기면서 발표하기, 얘기하듯이 쉽게 부르기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표현 줄이고), 자신만의 개성을 가질 것, 매력 등등.

논문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길 희망했는데, 아직도 먼 것 같다. 계속 생각과 테제가 바뀌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리고 내 테제에 대한 자신감이 그다기 크지 않은 걸 봐서... 도대체 얼마나 더...

사회의 기업화

"평가"가 중요해지는 현상. 그것을 "기업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반 상품 (공산품?)에 대한 평가는 시장에서 내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면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고 그 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생산자는 매출 증대로 보상받는다. 일반 공산품 시장에서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 '평가'가, 상품과 시장의 성격이 달라지면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최근 철도 사업 민영화 얘기로 시끄럽지만, 상품이 공공재라면 벌써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공공기관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성격이 다른 기관들을 정부에서 평가해서 순위를 매긴다. 별 거기 같은 발상아닌지. 그런 짓을 돈써가면서 한다. 또 일반 시장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로 '인간'이 상품이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 대학이야기다. 대학은 생산자, 졸업생은 상품. 생산자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왜? 상품을 평가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이렇게 뭔가 상품, 시장에 비유할 수는 있지만 일반 시장과 다른 메커니짐의 작동하는 경우를 학자들은 '유사시장'이라고 부른다. 평가할 수 없는 것을 평가하려고 들고,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을 사회의 시장화 혹은 사회의 기업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월 5일 일요일

미국에서 사회학 공부하고 있는 페친 Chung모 군이 이런 글을 남겼다.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국의 내 지도교수님은 공부는 이기적인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양심을 갖고 주위를 돌아보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2014년 1월 4일 토요일


"지난 50년간 미국에서 출간된 책 75만권에 담긴 단어와 문구를 분석한 결과 미국인들의 개인주의 성향이 1960년대 말부터 점차 강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샌디에이고주립대 연구진이 구글 북스에서 '미국 문학'으로 분류된 1960~2008년 출간 도서 76만6천513권을 조사한 결과, 개인주의와 관련한 단어·문구의 사용이 1960년대 말부터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11일(현지시간)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가 전했다. 

연구를 이끈 진 트웬지 교수(심리학)는 "일부는 서구 문화에서 개인주의 성향이 지난 수백 년간 확산을 거듭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퍼진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세월이 불과 40년 남짓 이어졌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지만... 과연 그럴까?


원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Twenge JM, Campbell WK, Gentile B (2012) Increases in Individualistic Words and Phrases in American Books, 1960–2008. PLoS ONE 7(7): e40181. doi:10.1371/journal.pone.0040181
자유, 개인주의, "자유로운 개인", 자율성... 이런 얘기들을 더 자주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일보 칼럼 중에서...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면 나의 발전들이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사회와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고,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책임과 의무만 강조했을 뿐 아니라 권력(겉으로는 국가라는 포장으로)에 대한 '봉사'를 은연중 강요했다. 도대체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운 개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헌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의지도 없는 철면피한 헌장이다. 그걸 교육헌장이랍시고 지껄여댔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지금의 중장년층을 형성했다."
소설을 읽는 건 여전히 사치인데 토요일이란 핑계로 고종석의 '해피패밀리'(2013)를 골랐다. 고종석 산문은 좋아하지만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나름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했는데 한 장(章)을 겨우 읽고 포기하기로 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좋긴한대 뭐랄까 -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 배워서 쓴 소설같다. 술술 읽히지 않는다. 학자나 산문가 쪽에 가깝지 이야기꾼은 못되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읽은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은 많았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 혐호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12)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가족을 포함시킨다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 그러나 가족들 가운데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내 경우에 핏줄은 사랑의 통로가 아니다. 가족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럴진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을 리 없다. ... 나는 동창들과의 자리가 어색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내 눈엔 그들끼리도 달라 보이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흔쾌히 어울리고 친밀하게 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13)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친분과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14)

"왜 그렇게 사람이랑 글이랑 다른 경우가 많지?"
"호모사피엔스가 명민하기 때문이지. 그 말을 교활하다고 바꿔도 되려나? 암튼 치장하는 기술이 잔연계에서 가장 뛰어날걸. 사람들이 쓰는 글이란 건 화장품이나 향수, 팔찌나 목걸이 같은 거지"(27쪽) 
한겨레신문 정희진 칼럼 중 일부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한 가장 첨예한 쟁점은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해석에 있다. 프랑스어에서 시작된 용어가 영문학에서 주로 연구되었으니 그 차이에다 영어의 포스트의 의미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후(以後), 탈(脫), 반대, ~ 넘어서, ~ 뒤에…. 시간적 의미에서는 후에 오는 것 같지만, 공간적으로는 뒤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므로 이전(以前)을 뜻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한국의 현재는 미국의 80년대와 같다’는 사고가 그렇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착오, 시기상조” 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圓)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rapport sur le savoir/a report on knowledge)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리오타르의 주장은 서구가 독점했던 단일 주체의 단일 시간에 대한 성찰이다.

하지만 사실과 언어의 불일치는 본디 당연한 것이다. 이 혼란이 민주주의이고 탈식민주의다. 서구가 ‘지리상의 발견’을 했다면 우리는 발견된 ‘것들’인가? 근대의 주체가 개척하는 인간이라면, 개척당한 자연은 근대의 타자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모던의 기준이 백인 남성이라면, 흑인이나 여성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존재가 된다.

포스트는 실제 이후가 아니라 인식 이후를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기존 역사를 혼란시키기 위한 것으로 모던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개념을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성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근대의 끝이 아니라 새롭게 생성되는 근대이다.”(177쪽)

뭐. 대략 공감할 수는 있는데 따지고 들면 불만족스러운 점들이 눈에 띈다. 시간에 대한 직선적 사고는 대개 근대의 산물이라고 얘기 한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는 역사가 종말과 심판을 향해서 '진행'된다고 보는데 그것도 직선적 역사관 아닌가? 다시 말해 직선적 사고관 자체는 근대만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근대적 역사관의 핵심은 시간이 흘러 앞으로 간다는 개념 뿐 아니라 그 진행을 '발전'으로 보는 견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유대교, 기독교에서는 역사는 종말, 심판을 향해서 진행되는 어쩌면 부정의 변증법적 전개로 보니까. 사실 '발전'이라는 표현에는 직선적 진행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까, 발전적 역사관이라는 표현으로 근대의 역사관을 표현할 수 있겠다. 포스트 모던은 직선적 역사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발전이라고 보는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다. 역사를 발전으로 보는 것은 매우 근대적인, 서양중심적인 발상이니까.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역사의 지평이 완전히 달라졌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이전에는 다른 지평 속에서 다른 시간적 기준, 종말적 기준, 문화적 물질적 수준을 가지고 살았던 다양한 문명이 공존했다. 근대는 곧 세계사회다. 세계 시간, 역사적 시간 등이 지배하는 것이다. 지역적 독특함은 세계적 전망과 지평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근대의 무시무시함이다. 근대 이전의 다양한 경험, 전망, 기억을 무력화시킨다. 근대적 세계관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개념, 담론도 유통될 수 없다. 포스트모던?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근대의 힘을 '서구중심주의'라고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발전론적 역사관이다. 서양에서만 역사가 발전했고, 그래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그런 사회진화론적 발상이다. 하지만 근대의 힘은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과 동일시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강명관, 천년의 상상)" 경향신문 서평 중 일부다.

"조선의 출판문화는 틔우지 못한 꽃망울이다. 서점의 경우를 보자. 조선 조정은 서점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수차례 설치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서점은 설치되지 않았다. 서점이 생겨도 책이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책을 거래 가능한 물건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또 서점을 유지할 만큼 책의 양도 많지 않았다. 책쾌 같은 민간 차원의 서적 유통업이 존재하긴 했지만 영향은 미미했다. 저자는 국가독점체제가 출판문화의 숨통을 조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임진왜란이 겹치면서 출판문화가 붕괴됐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습득한 조선의 책과 활자를 바탕으로 출판문화를 꽃피웠다. 18세기 초 일본의 서점은 전국적으로 300곳이 넘었고, 청나라에서는 대규모 서점 상가 ‘유리창’이 번성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유독 조선만 서점이 없었다. 서점의 부재는 결국 지식 시장의 부재를 의미한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금속활자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무슨 소용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민간에 급속도로 확산됐는데 세계의 자랑 금속활자는 국가의 손아귀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저자가 보기에 개탄스러운 일이다.

세종 이후 한글로 쓰인 책은 한문의 번역물뿐이다. 천대받은 한글은 문자적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출판문화를 견인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한국어로 사유한 책을 찾아보기 힘든데 저자는 이것도 비극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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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을 소개한 페친 최낙언님의 一喝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자랑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에 건전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와 아무 차이없다. 세상을 바꿔야 제대로된 발명이다.

한겨레 기사가 더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인쇄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에서 활자의 제작, 인쇄와 출판, 유통은 ‘주자소’와 ‘교서관’ 같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독점했다. 즉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다.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 서적과 대중 윤리서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차별적 윤리의식”을 담은 <삼강행실도>는 아예 법률(<경국대전>)로 정해 보급에 주력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 체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그것이 서구처럼 근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며 “둘 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실제 조선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책과 지식이 지배체제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왜 국가 독점이 유지됐을까? 지은이는 몇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일단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다. 알파벳은 24자×α의 활자를 만들면 되지만, 한자는 4만여자×α의 활자를 만들어야 했다. 조선은 금속활자 제작 때 한 글꼴당 10만~30만개의 활자를 만들었다. 더구나 금속활자의 원료인 구리는 국내에서 거의 나지 않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이런 작업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국가밖에 없었다. 유럽과 달리 기계식 인쇄기가 발달하지 못해 여전히 장인들이 손작업으로 인쇄를 해야 했던 점,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가 부족하고 백성들의 공물로 충당돼 종이값이 비쌌던 점,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살 수 있는 수요층이 양반계층으로 아주 얇았던 점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책값은 아주 비쌌다. “유생 중에 비록 학문에 뜻이 있지만 서책이 없어 독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 3~4필(쌀 21~28말)은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중종실록>) 책은 관직을 가진 양반이나 지주계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금속활자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다른 인쇄방법들은 거의 소멸됐지만, 금속활자가 인쇄비용을 크게 낮추지 못한 조선에서는 목판본이 존속했다. 조선에서 금속활자는 ‘대량인쇄’가 아니라 국가가 필요한 책들을 빨리빨리 찍어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한번에 찍는 양은 일반적으로 수십부, 많아야 300부를 넘지 않았다. 목판인쇄는 목판을 한번 파놓으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많이 찍어야 하는 책에 이용됐다. 하지만 목판을 새기는 데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들었다.
서양의 금속활자는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에서 제작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제작됐다. 그 결과 서양은 지식독점을 해체해 그 지식 위에 서 있던 특권계급의 약화로 이어졌지만, 조선에서는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됐다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조선은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를 발전시켜 인쇄물 종수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중국을 제외하고 서적의 인쇄·출판·보급에 국가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인쇄기관과 인쇄술을 갖추었던 나라는 거의 없었다.” 단지, 조선시대 인쇄술은 “지식의 전면적 확산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족, 즉 양반 지배층을 위한 것에 그쳤을 뿐이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루만에 대한 이야기. 믿기 어려운...

Systemtheorie
"Besagter Jochen Hörisch schrieb mir auf Nachfrage, er habe im Anschluss einer von ihm moderierten Podiumsdiskussion … Luhmann "die blödeste aller denkbaren Fragen gestellt, warum er so kalt, funktionalistisch und sachlich denke und schriebe". - Darauf antwortete Luhmann, er sei zusammen mit einem befreundeten Klassenkameraden noch in den letzten Wochen des Zweiten Weltkriegs eingezogen und in sinnlose Kämpfe verwickelt worden - und auf einmal sei der enge Freund nicht mehr an seiner Seite gewesen, sondern in tausend Teile zersplittert. Und da habe er (Luhmann wechselte in einen halbironischen Ton) sich vor der Alternative gesehen, entweder verrückt zu werden oder so zu denken und zu leben, dass er es jederzeit für möglich halte, dass ein Mensch, ein Subjekt von jetzt auf gleich zersplittert werde. Er habe sich für das Zweite entschieden und sei Systemtheoretiker geworden"
Luhmann Lektüren, Vorwort des Herausgebers

나이들면 후회하는 37가지

1. 기회가 왔을 때 여행하지 않았던 것
당신이 나이들수록 여행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특히 가족이 있다면, 적어도 세 사람의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2.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던 것
고등학교에서 3년간 외국어를 배웠지만,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날 때 자책하게 된다.
3. 악연을 남겨두는 것
만일 당신이 악연을 그대로 두기로 선택했다면, 당신은 그 부분에 대해 불행하기를 선택한 것과 같다.
악연을 벗어버리길 원한다면, 더 미리 움직여라.
4.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던 것
주름, 주근깨, 피부암은 선크림을 바르는 것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5. 좋아하는 음악가를 만날 기회를 놓친 것
Nirvana가 다시 우리 도시에 온다면 꼭 만나도록 하자.
6. 어떤 일을 무서워 한 것
되돌아보면서 생각할 것이다. 내가 뭘 무서워 했지?
7.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십, 오십, 육십 세가 될 때마다 운동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8. 남성, 여성의 역할에 갇혀서 산 것
나이 든 사람이 ‘글쎄,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어.’ 라고 말하는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9. 끔찍하게 싫은 직업을 그만두지 않은 것.
물론 써야할 돈은 많다.
그러나, 상황을 개선할 계획이 없다면 매일같이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
10. 학교에서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물론, 학교 점수가 당신의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깔끔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11.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르는 것
우리가 보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젊음시절을 불행하게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이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이다.
12.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
나이가 들면, 사랑에 대한 대답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냥,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라.
13. 부모님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
어렸을 때는 그것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부모님이 인생에 관해 이야기한 대부분의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14. 젊은 시절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었던 것.
당신은 솔직히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15.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신경쓴 것.
당신이 지금 그렇게 신경쓰는 사람도 20년이 지나고 나면 하나도 신경쓰지 않게 될 것이다.
16.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꿈을 더 우선시 한 것.
다른 사람의 꿈을 지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 전혀 빛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
17. 더 많이 움직이지 못한 것
노인들은, 벌떡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보냈던 긴 시간들에 대해 후회한다.
18. 원한을 품고사는 것, 특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화를 반복해서 내는 삶의 포인트는 무엇인가?
원한을 품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의 머릿속에 영원히 살게 해주는 것이다.
19. 당신 자신을 옹호하지 않은 것.
노인들은 다른 사람의 욕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는다. 당신도 그럴 필요가 없다.
20. 충분히 봉사하지 않았던 것.
나이가 들면 세상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나서지 않았던 것을 슬퍼하게 된다.
21. 치아을 무시한 것.
칫솔질하고, 치실도 써라. 정기적으로 닦아라.
틀니를 하게 되면 그러지 않았던 것들이 몹시 후회된다.
22. 할머니,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
우리들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계신 것이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분들은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등 궁금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해준다.
단, 그들이 살아계실 때 질문을 해야 한다.
23. 너무 열심히 일한 것
아무도 죽음의 순간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취미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를 희망한다.
24. 멋진 요리 하나를 배우지 않은 것
군침을 흘릴 만한 음식을 알아두는 것은 저녁식사 파티나 기념식을 좀 더 멋지게 만들어준다.
25. 감사한 순간을 위해 잠깐 멈추지 않았던 것.
젊은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때때로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take it all 멈춰서는 건 좋은 것이다.
26. 시작한 것을 끝마치지 못한 것.
‘난 간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업에 참가했지만…’
27. 재밌는 파티 마술 하나를 익히지 못한 것
당신은 인생에서 수천 번은 아니지만, 수백 번의 파티를 가게 될 것이다.
하나쯤 익혀두는게 인생을 재밌게 하지 않을까?
28. 사회적 기대cultural expectations에 맞추어 당신을 가둔 것
사회적 기대들이 ‘우리는 그걸 하면 안돼.’라고 말하게 내버려 두지 마라.
29. 친구들이 자기 길을 가지 못하게 붙잡은 것
사람들은 헤어진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에 매달리는 건 불안과 슬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30. 아이들과 충분히 놀아주지 못한 것
나이가 들면, 당신 아이들이 놀아주기를 원하기보다 자기 방에서 나가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31. 한번도 큰 위험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특히 사랑에 있어서)
적어도 한 번 맹목적인 믿음에 빠졌다는 것은(비록 실패했더라도) 나이들었을 때 큰 위안이 된다.
32. 사람들을 만나거나 관계를 넓힐 시간을 갖지 않았던 것
사람을 사귀고 대인관계를 넓히라는 건 젊었을 때는 헛소리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이 직장을 구하는 좋은 방법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3. 너무 많은 걱정을 했던 것
Tom Petty 가 노래했다.
‘내가 걱정하는 대부분의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들이다.’
34. 쓸데없는 드라마에 빠져 있었던 것.
도대체 누가 그걸 필요로 하는가?
35.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 시간을 가치있게 사용하라.
36.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번도 공연해보지 못한 것
모든 사람들이 이런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노인들이 대중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한번 보여줄 수 있었다면 하고 생각한다.
37. 좀 더 빨리 감사해하지 않았던 것
처음부터 그러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구상의 모든 순간들이(일상에서부터 놀라운 일들까지)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매우 소중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페친 박모님 글 중에서...

 "복(福)이란 제사에 쓰는 고기와 술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제사가 끝난 후에 제사상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 한다."

'복지(福祉)가 시혜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복'자의 어원을 설명한다. 그런 접근은 일단 신뢰하기 힘든 게 '복지'는 한자어 문화권에서 발전된 개념이 아니라 'welfare' 'Wohlfahrt' 같은 서양어를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복'자의 어원이 저렇다니 재미있다.
며칠만에 사무실에 나왔다. 지난 30일 밤새미했던 흔적이 - 당연히 - 그대로 남아있다. 그 논문을 이제 다시 들춰서 봐야하는데 버겁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바짝해야 하는 모양이다.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모처럼 메시지 성경, 죤 스토트의 "나의 사랑하는 책,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을 잠깐 볼까한다.

2014년 1월 2일 목요일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새해를 맞기 전에 일단 한 번 모아서 보냈다는 이유로 정말 며칠 마음 편히 놀았다.
31일엔 모처럼 뮤지컬을 봤다. 김광석 노래로 만든 "디셈버". 듣던대로 많이 실망스러웠다. 장진 감독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됐나 싶다. 제일 큰 문제가 이야기다. 1부는 산만하다. 논문으로 치면 abstract를 쓰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 모아 놓은 것 같다. 뭐. 시작이니까 당시 상황을 보여주고 등장인물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전개될 이야기들이 연결될 거리들을 만드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다. 더 큰 문제는 2부. 2부에는 abstract가 너무 분명해서 문제다. 20년 전에 우연히 죽은 여친을 못잊는 찌질한 남자 이야기! 도대체 그 이야기를 하려고 50억을 들였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 논문도 그렇다. 한편으로 주장이 불분명해도 문제고, 너무 단순해도 문제다. 며칠 동안 abstract만 가지고 고민해 봐서 잘 안다.
1일엔 영화 '변호인'을 봤다. 그동안 영화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새삼스러운 감동은 없었다. 딱 예상한 만큼의 영화. 송강호 연기가 감정과잉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나 본데 난 그 연기는 시원해서 좋았다. 고문경찰 역의 곽도원은 이전에도 비슷한 악역을 많이 맡아서 그런지 오히려 감흥이 떨어졌다. 연기는 완벽했는데... 전반적으로 연기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었던 인물들이 있었다. 검사와 신문기자 친구가 대표적. 시대 상황을 지나치게 '휴머니즘'적으로 풀었다는 비판도 있던데 거긴엔 전적으로 공감한다. '실존주의'를 지향하고, '역사란 무엇인가' 정도를 읽던 학생들을 용공분자로 몰아가는 설정이 좀 아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중영화의 한계라고 생각하자. 내가 느끼는 아쉬움은 결말에 대한 것이다. 이상하게 그 부분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송강호가 이제 피의자 신분일 때 그를 변호하겠다고 나선 변호사들 이름을 호명하면서 끝나는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대가 바뀌기도 했지만 동료 변호사라는 특수한 관계도 있잖은가. 뜬금없었다.
오늘은 사실 다시 논문을 봐야하는데... 하루 더 놀기로 했다.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고작 19세, 20세 무렵 대학생들 이야기치곤 사건이 너무 복잡하고 무거웠지만... 그래도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내 대학시절 기억과 연결시키면서... 그 양반 최근작은 오히려 읽어내지 못했다. "1Q84"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 "상실의 시대"인지 "해변의 카푸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노르웨이의 숲.... 작품 속에도 나오지만 비틀즈의 노래 Norweigian Wood에서 가져온 것인데 사실은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가구'라는데  하루키가 잘못 이해한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숲으로 해석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는 모양. 어쨌거나 제목으로는 숲 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내일부터는 아마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듯. 긴장감을 다시 잡기가 쉽진 않겠지만...
도킨스 사용한 유명한 개념 밈(meme)이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그저 은유에 불과하다는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박사의 주장. 도킨스는 그밖에도'논문 한 편 쓴 적 없는 과학자"라는 지적도 받는 모양인데 - 에이. 아무렴 설마... 믿기 힘들다. 어쨌건.... -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까는 것을 주업무로 삼는 도킨스로서는 치명적인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밈은 다만 은유일 뿐이다, 김우재 
도킨스의 밈은 하나의 메타포로 기능할 뿐이다. 밈은 측정불가능하다. 밈에 대응하는 측정량은 없다. 측정량이 존재하지 않는 과학도 가능하다. 그러나 측정량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적 존재가 기능해야 한다. DNA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물질들을 대상으로 삼는 분자생물학은 물리학의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특별한 측정량 없이도 과학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해서 실체적 존재라는 말이 측정불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존재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측정가능하고 구별가능하다. 추상적 측정량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지만 구체적 방법론에서는 반드시 측정량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으로 심리학에 접근하는 심리학자들은 쉽게 '마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뇌'와 '인지기능'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경향이 스키너의 행동주의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게 되었지만, 탄탄한 물리적 기반 없는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현대과학은 세속화되었고, 세속화과정속에서 과학이 기능한다. 중세의 과학이 신을 상정한 연구였다 해도 그들의 방법론이 측정량과 측정의 방법론을 결여한 적은 없었다. 즉, 어떠한 '개념'이 과학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1. 측정량 2. 혹은 이에 상응하는 방법론 이 요청된다. 밈은 이 두가지를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 밈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거나, 밈으로만 설명가능한 현상이 있다면 밈은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막바로 밈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심리학과 인공지능, 사이버네틱스와 인지과학에서 도킨스의 Meme Theory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또한 밈이라는 개념이 출현한 이후 그러한 마음의 과학분야에 엄청난 진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밈이라는 개념을 사회현상이나 한 개인의 신념, 이념등으로 표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사회학 혹은 심리학의 언어로 환원되는 밈이라는 개념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 게다가 밈이라는 것은 존재론적 실체가 아닌 심리현상의 일종이다. 존재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밈을 실체로 사용하는 것은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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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를 2008년 시작한 후 꾸준히 뭔가를 쓰고 올렸다. 지난 해, 그렇다 "지난" 해 2013년엔 심지어 글 471개를 올렸고. 아마 가을쯤 페이스북 "절필"(^^)을 선언한 이후 하고 싶은 이야기, 기록해 두고 싶은 이야기를 이 블로그에 집중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한 탓이 큰 것 같다. 과연 올 해는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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