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5일 토요일

탈근대를 이야기하자면 참으로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한 켠에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데 무슨 동물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구조, 사회질서를 개선(?)하는데 동물권 강조가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고... 그 쪽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동물이 행복한 사회는 인간도 행복할 수 있다...

이 경우 동물권 인정 혹은 보호를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과는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반려동물들을 사람키우는 키우고 그렇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근대적인, 매우 천박한 동물 이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동물을 집에서 키우더라도 동물답게 키우는 것이 동물의 품위, 동물의 권리를 지키는 것 아닐까?

도덕, 윤리로 근대적 질서를 강변하는 것은 근대적 질서를 고착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죽을 권리, 존엄사 같은 논의는 어떤가? 꼭 사형제도를 옹호하고, 사형수들 당장 죽이라고 핏대 올리는 인간들이 존엄사 같은 얘기엔 식겁을 한다. 생명의 불가침, 생명의 존엄성 운운하면서.

도덕, 윤리는 근대적 질서 비판에도 유용할 수 있지만, 그런 비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 이후엔 근대적 질서 유지, 즉 현상 유지에 기여할 뿐이다. 전본적 힘이 나올 수 없다.

근대적 질서를 전복시킬 힘에 대한 상상력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맑시즘, 생태주의 (소로우, 슈마허, 녹색평론), 여성주의, 신식민주의, 라투르, 무정부주의?? 아니면 종교? 기독교? 기독교에 그런 전복적인 힘이 있는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런 점에서 약하다. 요즘 공공신학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대부분 궁극적으로 근대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그런 신학일 뿐이다. 라브리, 쉐퍼는 전보적인 힘이 없다. 그냥 보수주의, 근본주의자, 도피주의자에 가깝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대안이 엘룰. 엘룰은 근대의 특징을 정확하게 꿰둟어 본 것 같기도 하다. 티비나 기술에 대한 관찰을 볼 때. 흠. 어쩌면 엘룰이 도움이 될지도. 엘룰을 좀 더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엘룰을 스승으로 모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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