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9일 목요일

속시원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맛을 남기는 한겨레 칼럼이다 ("품격의 죽음" / 김동조)


"‘변호인’의 송강호가 내린 선택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눈뜨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한 그의 모습이 2주 동안 6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극장으로 달려간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욕망을 양심과 양립시킬 수 없던 시대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정부가 최소한의 ‘질’을 갖추지 못하면 시민은 작은 양심을 지키는데도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국가란 국민이다”란 당연한 말을 용기를 갖고 외쳐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품격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란 최소한의 품격이 지켜지는 사회다.
(...)  <엠비시>의 문제는 이념적 성향이 아니라 기자와 매체의 ‘질’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언론의 ‘질’은 곧 언론의 ‘품격’이다. 품격 없는 언론을 접하다 보니 내 품격도 함께 추락했다.
얼마 전 <경향신문>이 인용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이티비시>는 신뢰도 면에서 <엠비시>와 <에스비에스>를 앞질러 3개 지상파와 4개 종합편성 채널 중에서 2위를 차지했다. (...). 이러한 현상이 정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삼성 정도의 대기업은 뒤에 있어야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정치의 퇴행을 막고 있는 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언론이 아니라 차가운 자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념’ 대신 ‘품질’과 ‘품격’을 따진 결과다.
선거철이 되면 여당과 야당은 모두 중도로 수렴한다. 투표를 할 때쯤엔 두 당의 정책 차이는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언론은 모두 본색을 드러낸다. 정치와 언론의 ‘품질’은 떨어지고 ‘품격’은 사라진다. 사실은 사라지고 선동만 남는다. 우리는 북한 김정은의 눈썹이 왜 없어졌는지 논하는 공중파 뉴스를 봐야 한다. 관점 대신 입장이 논조를 정한다. ‘파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란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 신문을 가득 채운다. 결국 이념마저 사라지고 이익만 남는다. 본질이 사라진 빈자리를 마침내 자본이 비집고 들어온다. 공적 품격이 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증거다. 이렇게 공적인 품격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는 사적인 품격도 유지되기 어렵다. 그 사적 품격을 자본이 지킨다. 자본이 사회적 품격을 위한 최후의 희망이 된 사회, 참 비루하다.

김동조 선생은 블로그에 이 칼럼 후기 같은 글도 남겼다.

"'변호인'이 다룬 시기의 한국에는 품격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정치적 여유 뿐 아니라 경제적 여유도 없던 시기였다. 하지만 국민 소득 2만 3천 불의 시대에 그때를 돌아보는 느낌이 그 당시를 살은 이들과 같은 수는 없다. 지금은 이집트와 중국과 이란에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시대다.

품격의 마지막에는 사회적 위선이란 게 있다. 사회의 모든 공적 품위에는 위선적인 면이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차별이 남아있는데 차별적인 발언을 경계하는 건 위선적일 수 있지만 위선이 없으면 공적 품격도 무너진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서는 최소한의 공적인 품격이 너무 쉽게 무너진다.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건 물론이고 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위선조차 없는 자들 때문이다. 독재자에 대한 향수, 동성애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멸 같은 것들이 너무 쉽게 보인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자들에게 위선을 강제하는 교양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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