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위선(僞善)/ hypocrisy 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 차원의 위선이었다. 다면성, 다중성을 가진 인간이 다면성을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는 이해을 얻기 어려울 것이고, 도덕적 비난도 받게 될 것이다. 심하면 정신분열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 특히 근대인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정말 그 진실은 얼마나 제한적의 의미의, 달리말해 위선적인 진실인가? 위선적인 진실. What a paradox! 우리 근대인은 다중적 인격을 가졌지만 잘 살아가고 있다. 바로 위선, 위선적 진실 덕분이다. 위선은 피할 수 없는 생존전략에 가깝다. 어쩌면 근대 이전에 위선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문제는 여전히 위선의 정도나 종류에 있을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것, 거짓말을 그 자체로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는 없을 테니까. 아니. 위선은 그 자체로 가벼운, 수용가능한 거짓말이나 사기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용가능하지만 속이 뻔이 들여다 보여서 가벼운 도덕적 제재가 가능한.... 그러고보니 '위선'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전근대 사회에서 예절, 규범 등은 예절의 외피와 속마음의 일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 사회가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였으니까. 개인의 발견 이후 속마음(양심)과 행동의 불일치는 개인에게 가책으로 다가온다. 성찰하는 개인이 등장하고 (데카르트 수상록, 일기쓰기, 글쓰기...) 개인은 일관성을 갖도록 기대된다. 위선은 도덕적으로 정죄되고, 일관성 지향, 정직 등이 미덕으로 칭송된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의 기능, 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포스트모던적일까? 위선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관찰되지만, 문제는 왜 어떤 위선이 특별히 더 불거지고 문제가 되는가다. 그게 연구가 기여하는 바여야 한다. 서양과 아시아를 비교하는 것은 유용하다. 서양은 어찌되었거 개인주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근대성을 근저에 가지고 있고, 위선은 아주 전략적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인종차별에 대한 서양인의 태도를 볼 것). 한국에서 많은 경우 위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적 가치관의 혼재,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혼재 때문일 것이다. 그 위에 위선까지 겹치니 규범적 질서는 더 혼란스럽게 구성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위선에 대한 관용도의 수위가 춤을 추고, 위선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방식도 매우 조야하다. 예측하기 힘들다. 요약하자면 서양인과 한국 등 아시아인의 위선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것보다, 정도의 차이로 봐야 하고, 그런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조건을 따져보며 결국 '근대성'이 구성되는 방식 차이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루만이 Brunsson를 자주 인용하면서 위선의 긍정적, 불가피한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만은,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정직하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그 결과는 끔찔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에나 위선이 있고, 위선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위선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위선적 행태를 비판하기도 하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위선적으로 행동한다. 문제는 역시 '정도'인 것 같다. 위선의 정도. 개인에 대해서도 그렇고 조직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 정도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관용되던 위선이 다른 맥락에서는 치명적인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받는다. 위선에 대한 판단은 매우 결과론적이고 상황에 종속되어있다. 도덕적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 것.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생명윤리 정책 형성과 집행에 있어서 위선적 행태를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었으니까 위선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구조적으로 위선의 정도가 클 수 밖에 없다. 위선의 영향이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것을 피할 수 없다. 다시 정리하자면 어떤 지역의 '위선'이 크게 부각되고, 사회적 문제로 불거질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적 조건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만의 이론이 매우 유용하다. 기능체계 발전 정도, 구조적 연결의 지역차이가 있기 때문이다(Krasner처럼 기대의 구분, 세계적 기대와 지역적 기댈로 구분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방식일 수 있겠으나 그것은 하나의 예시일 뿐 일반화하기 힘들다). 브런슨과 루만을 결합하면 매우 유용한 설명틀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을 한다면, Brunsson의 Organization of hypocrisy 2002년 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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