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페북에서 발견한... 이에 따르면 "창조경제"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공허한 소리 되시겠다.

"진정한 창조성이란 그 무엇도 목적하지 않은 놀이일 때만 가능하다."
"한 개인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그의 전체인격을 사용할 수 있는 창조적 존재가 되는 순간이며, 이것은 그 무엇도 목적하지 않은 놀이일 때만 가능하다. 이와 대조되는 것은 순응을 통한 사회적 관계이다.
성공적인 예술가가 명성을 얻고, 최고의 기술력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그 자신, 내부의 결핍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이는 진정한 창조적 삶이라 할 수 없다... " - 위니캇. 놀이와 현실 -
모처럼 런닝머신에서 지난 번에 평균 시속 11.5km였고 오늘은 조금 더 올려서 12km로. 5km를 달렸는데 24분 48초. 이 속도를 10km내내 유지할 수만 있다면 49분대가 나오는 괜찮은 기록이다. 물론 현재로선 이 속도로 5km를 더 뛰긴 힘들지만... 여하튼 주중에 주로 속도를 높여서 달리고 주말에 긴 거리를 오래 달려보려고 한다. 목표는 4월 19일 대회에서 현재 하프 기록 "1시간 58분 05초" 갱신.
아래는 페친 차정식 님의 글. 루만 얘기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서 가져다 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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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운 중요한 진리
주일예배 설교차 부산 세계로병원에서 오신 이혁진 선교사님과 식탁교제 하다가 중요한 걸 알게 됐다.
세포마다 경계선인 막이 있는데 그 막이 없으면 세포는 살 수 없다. 또 그 막에는 세포 사이의 소통과 교류 채널로 미세한 반투과성 구멍(pore)이 들어서 있단다.
반투과성이라는 건 어떤 물질은 통과되지만 어떤 물질은 통과될 수 없는 semi-permeable한 형태라는 것.
이 세포의 구조는 은유적인 맥락에서 내가 아직 채우지 못한 공동체 책의 결론으로 끌어들이기에 안성맞춤의 맥점을 가지고 있다. 서구 2000년 기독공동체의 경험과 국내 200여 년 또는 100 수십여 년 기독교 공동체의 실험에서 드러난 성패의 핵심 관건은 첫째, 규모의 문제, 둘째, 개인의 고유한 자유와 공동체의 규율 사이의 탄력적인 조율의 문제였다.
이상적인 해법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며(생물학적으로 개체생명의 세포막를 중시하며) 동시에 공동체의 규범을 세워나가는 것인데(반투과성의 그 구멍으로 공동의 코드를 교신하며 공유하는 것), 그 실천적인 효용의 맥점이 모호하다.
공동체 개체 구성원들 사이의 그 구멍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목록을 짜는 것이 긴요한 후속 과제가 되겠다.
교리학자와 조직신학자는 그 정밀한 체계 너머를 상상하기 위해 생물학자를 친구 삼아 배워야 한다.
성서학자도 그 산만함을 정돈하기 위해 천체물리학자를 벗으로 영접하여 배워야 할 것이다.

"Religion is a solution for the endemic identity crises of the world's acting units - nation, nation-states, selves - crises induced by the world having become one place where comparisons cannot be avoided" (Robertson) (from: JH Simpson 2007: Religion as identity and contestation)

한국도 그렇게 될까? 덜 그럴 것 같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선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정치적) 정체성을 제공하는 상징으로 매우 강력하고도 효과적으로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조차도 종교적 가치/세계관을 국가주의적 가치 - 특히, 발전적 국가주의 - 다음에 두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ex. 황우석 사태). 이들 이중적 가치관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신분열증을 흔히 보이기도 한다. 이 경우는 가치체계를 선택적으로 좇을 때만 가능하다. 종교인들은 세계관의 특정한 부분만을 좇는다. 기복적 요소, 내세에 대한 보장 등등. 도덕적 삶, 타인에 대한 베품 등은 배제하기 일쑤다. 국가주의 역시 큰 무리없이 좇는다. 종교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은 이들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낙태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비기독교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가 중요해지고 있다? 이 질문은 물론 - 문화에 대한 논의가 항상 그렇듯이 - 무엇보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문화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점에는 대개 동의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문화를 사회구조와 구분되는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사회구조적 변화의 폭이 좁아졌고 그에 비례해서 문화적 중요성이 커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치만 하더라도 변혁, 심지어 혁명 운운하던 시기가 있었지 않은가. 그 시절엔 기존 자본주의적 질서를 상정하고 진행되는 국가론, 정치론은 모두 보수적으로 들렸다. 예컨데 다니엘 벨 류의. 하지만 지금 다니엘 벨을 읽으면 (그의 논지를 좇아가면) 더 이상 딱들어맞기가 힘들 정도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문화는... 상징, 표현의 차원으로 이해된다. 실체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의 차원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중요했졌다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정당 간의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거시적 구조 변화는 힘들어지고, '이제' 정치에서도 프레임전쟁 운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좀 찔리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나 자신에게 쪽팔리는 게 두려운 사람'이, '남 앞에서 쪽팔리는 일을 무서워하는 사람'에 비해 몇 배는 우월한 존재입니다.
모름지기 글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수단의 하나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내용과 상황에 따라 장르가 달라질 뿐이지 소설이건 만화건 일기건 논문이건 장르를 불문하고 글이 갖는 의미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중요한 건 메시지, 이야기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 네 속에 꾹꾹 눌러담아서 둔 이야기는 무엇인가? 묶인 고리만 풀면 터져나올 그런 이야기기 있기는 한가?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그 이야기가 충분히 숙성되었다면 그 메시지를 한마디로 줄여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에 대한 전문적 논의는 잘 모르지만 대략 고종석 선생 견해를 들으면 수긍하는 편이다. 표준어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라는... 언어는 언중이 결정한다는... 뭐 그 자체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언어에 대한 순결함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번역 활동과 그 산물이 더 많이 유통될수록 번역문의 그 독특한 문체가 번역이 아닌 상황에서 튀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주류 한국어 표현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번역체도 유형이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서양언어에 걸맞는 문장구조나 표현인데도 세련되게 들리는 경우가 있고 (김현) 어떤 경우는 읽으면서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보그병신체"류다. 오늘도 그런 문장을 만났다. 번역을 업으로 삼는 (것 같은) 사람이 번역 얘기를 하면서 덧붙인 마지막 문장이다. 이 양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문장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히지만 의식하지 못한채 이런 문장이 튀어나온다면... 정말이지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연구가 좀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요청한다."
이사를 간 집에서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이전에 살던 집과는 다르게 공짜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고 이번 달 핸드폰 데이터도 거의 다 썼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블로그 새글 창을 열어놓고서 글을 쓰는 것과 인터넷 연결 없이 글을 쓰는 것, 이 둘의 차이를 새삼 절감했다. 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새로운 인간 유형인가? homo neticus? 접속하는 인간?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타인과 접속되어 있어야 비로소 내면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이 뻗어나가는?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저 일상적인 활동만 영위하는? 물론 연결되어 있다고해서 항상 인터넷을 뒤적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접속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절제하는 것과 애초에 차단되어 있는 것은 천양지차인 것이다.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내일 이사다. 포장이사라서 할 일은 별로 없다. 더 크고 쾌적한 환경으로 이사가는 거지만 썩 달갑지 않다. 그렇게 쿨하거나 멋진 인생이 못된다. 이런 기분 또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니... 며칠 그냥 씁쓸해하면 되겠지.
1.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던 관계의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부디 앞으로도 더 지혜롭게 판단하길. 모든 사람이 내 기대에 맞춰 행동할 수 없으니 유지할 기대와 포기할 기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충족되기 힘든 기대는 미련없이 버리고, 충족될만한 기대라면 기대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2.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멋진 이야기를 하고, 주장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쓰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3. 오늘 밤엔 숙면을 취하도록 딸이 도와줄까? 그동안 밤중 수유를 끊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시도하는데 과연 어떨지...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국가의 영향력이 확 줄어들 일은 않겠지만, 그렇다고 많은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바우만의 얘기다. 변화의 가능성은 오히려 시 단위의 지방정부와 그 연합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어쩌면 사회학자들도 국가 단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알게모르게 방법론적 국가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심지어 세계사회를 얘기하는 루만도 은근히 국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 않는가...

"바우만 = 미국의 정치학자 벤저민 바버가 몇 달 전에 출간한 책이 있어요. <만약에 시장들이 세상을 통치한다면(If the mayors ruled the world)>입니다. 시장은 선거로 뽑혀 시를 통치하죠. 시보다 상급은 주정부, 연방정부, 국가이고 그 하부는 개별적 정치층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 등등이오. 도시는 이 둘 사이에 있고 상부와 하부 그룹 모두에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안 = 도시의 경우 국가보다 오히려 역사가 오래 됐네요. 한국에도 상당수가 왕조시대부터 도시기능을 활발히 해온 곳입니다. 나름의 정치와 권력이 결합된 진행방식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우만 = 그렇죠. 영토를 소유한 주권국가가 생긴 것은 베스트팔렌조약이 있던 1648년입니다.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해 유럽 대표들이 모여 영토 주권을 수용했죠. 벤저민 바버가 꽤 정확하게 말했는데요. 당시는 전쟁을 막기 위해 특정 지역 거주민의 국가 종속을 인정하는 영토주권 방식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세계화 때문에 상호 의존적인 상황이라 국가적인 접근은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날 글로벌 이슈로 벌어지는 상호의존적인 의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쟁보다 협력해야 되는데 국가는 협력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요. 자국의 영토를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수비하라고 생긴 거니까요. 그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위가 시 정부라는 겁니다. 이보다 낮은 단위들은 너무 약하고요. 서울, 런던, 뉴욕 같은 도시가 규모도 적당하고 인구밀도도 적당합니다. 지구상의 인구 절반이 도시에 살고 있어요. 개발도상국은 70%가 넘어요. 국가라는 단위는 복잡한 관료체계를 유지하면서 소통의 네트워크가 이웃 단위의 감성까지 끌어안을 수 없는 추상적인 체제인데 비해 도시는 지역공동체를 수용하는 소통을 하며 통합해 나가는 체제입니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안 = 시장들이 모이는 강력한 국제의회까지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1000여 지방정부가 모인 ‘지속가능성을 위한 세계지방정부’(ICLEI)의 경우는 이미 로스앤젤레스 대기오염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도 서울, 수원, 성남 등 많은 도시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단지 생물학적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연장자에게 권위가 주어지던 시절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나이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었다. 신분, 성별, 지역, 직업 등 다양한 기준을 기초로 권위를 더 혹은 덜 부여받았다. 여하튼 어떤 조직에서건 다른 기준보다 나이에 의한 구분이 중요한 경우가 많긴했다. 사실 그게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쉽고도 효율적인 방편이다. 나이는 누구나 먹게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질서가 유지된다면, 연장자를 공경하는 젊은이들도 나중에 자신도 공경받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느리게 변하는 사회, 지식 축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 연장자들이 축적해놓고 있는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한 지식은 공동체 유지에 긴요했을 것이다. 실질적인 지식 뿐 아니라 지혜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식=힘=권위 아니던가. 권위에 대한 인정 및 존중은 연장자 뿐 아니라 교사, 선생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서 지식은 금새 낡게되고,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양해졌다. 지식의 민주화? 그렇다고 연장자의 권위, 존중 문화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인간은 자신도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연장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지식을 가지고 연장자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드는 경우가 있다. 부지런히 최신 지식, 정보를 흡수하면서 업데이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업그레이드는 쉽지 않다. 사람의 사고구조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시대의 한계, 세대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몇몇 최신정보를 갖추고 있다고 한들, 사고구조의 업그레이드 없이는 변화된 세상에서 권위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권위는 차라리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설픈 최신 지식으로 권위를 유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혜에서... 지혜를 갖춘 사람들을 찾긴 쉽지 않다. 절대빈곤 등 즉각적으로 닥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세대에, 돌격적,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성장,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를 익혀왔던 세대들은 삶의 문제, 역사의 문제를 성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화된 사회, 복잡성이 극도로 증대된 사회에 대한 지혜를 듣기 힘든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생활, 사회가 갖는 본원적인 문제들은 비슷하기도 하다. 어떤 지혜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깊이 있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설익은 생각이다. 격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써내려간... 이해하시라.)
독일의 국가문화에 대한 논문을 보고 있는데 뭔가 답답하다. 그 논문에서도 등장하는 역사 제도주, 또 Jasanoff의 생명공학 정책 국가간 비교 연구도 그렇지만... 국가중심적 접근은 시야가 좁아서 그런지 현상을 잘 기술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뭔가 답답하다. 과거에서 원인을 찾아서 그런지... 변화를 설명하는데 취약한 것 같고. 사회현상은 훨씬 더 역동적인 과정아닌가?
정치인 안철수의 실체는 이제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동네 꼬마도 알 정도로 온천하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아울러 안철수와 안철수 지지자들에 대해서 가졌던 막연한 반감의 근거도...  요즘 자주 관찰되는 해설 중 하나(물뚝심송 블로그에서).

즉,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 지루한 협상 과정을 거쳐 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효율적일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바람직한 시스템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민주적 시민의식”이 아직 부족한 상태에서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지나치게 효율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상론과는 달리, 실제로 우리 사회의 유권자들은 정치권의 갑론을박을 매우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정치를 혐오하고 의회를 비난하기 마련이다. 이 혐오감은 심지어 의원 개개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의원 세비를 인상한다거나, 국회의원 연금을 인상한다거나 하는 결정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 연장선 상에 안철수의 “국회의원 정족수 감소” 주장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일사불란, 명령과 복종, 신속한 일처리, 효율성 강조는 군사문화인가? 전형적인 근대적인 모습 아닌가? 근대 조직의 특징? 군대는 가장 근대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조직으로 칭송받기도 하지 않았던가? 요즘 어감엔 매우 어색하게 들리지만 "엘리트군인"같은 표현도 있었지. 여하튼 한국의 어떤 문제들은 한국이 근대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근대적, 너무도 근대적이어서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유교 근대성과의 선택적 친화성 때문인가? 아니면 늦게 배운 도적질이 무섭기 때문?
페친 박치현님의 글인데 그냥 가져왔다.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가 될 것 같아서...

"'당연한' 이야기를 25년간 사회학자가 했는데, 
이것이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일까.

나는 조금 회의적인데, 
사회학자들이 너무 양적이든 질적이든 팩트에 기반해 말해야 한다는 압박에 끌려다닐 경우, 물론 치밀하기는 하고 시간의 무게가 있긴 하지만, 
훌륭한 기자와 사회학자 간의 구분점이 애매해지는 것이 아닐까.
요즘엔 너무나 좋은 PD들의 다큐가 있지 않은가.

어쩌면 문학가들은 직관으로 알고, 빈민들은 삶과 몸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학자들이 기자들보다도 느리게 당연한 현상을 마치 인류학자가 원주민을 '발견'하듯 발견한다.
이러한 시선이 난 불편하다.
대중저술가들의 직관과 사례의 조금은 비과학적인 종합이라고 할지라도(예를 들어 88만원 세대 같은 책들 말이다),
지나치게 게으른 올빼미가 아닌가.
팩트에 얽매이는 사회학은 철학의 올빼미보다도 더 늦게 도착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난 사회학의 본령은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학을 빙자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론"이 중요하다.
어쩌면 이론은 문학가의 직관을 과학적인양 포장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팩트/ 사실에 대한 지식, 진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자연과학을 전범으로 삼는 근대 학문의 강박을 사회(과)학도 경험한다. 인문학은 그런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 갖는 것 같지만... 사회과학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중간 쯤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사회과학 중에서도 심리학, 경제학 등은 사회학에 비해서 좀 더 자연과학 쪽에 가 있는 것 같고... 사회학 안에서도 양적 접근은 사회이론에 비해서 좀 더 자연과학 쪽에 가깝고...

물리학자들에게는 엄밀성에서 떨어져서 한 수 낮은 학문으로 취급받던 생물학자들의 그 기고만장함에 질렸는데 (진화론에 대한 신앙)... 사회학은 도대체 무엇하는 학문인가?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세계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 국가 경계는 이중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으로 국가는 사회 여러 분야의 세계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세계사회적 연결을 제한하기도 한다. 

국가주의, 국가문화는 영토 내의 사람들을 인종적 문화, 종교적 문화 등이 아닌 국가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의미한다. 근대성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세계사회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계차원의 작동을 제한하고 
Ende gut, alles gut이다. 이것은 진리다. 잔소리듣기 싫으면 Ende를 gut하게 만들면 된다.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원칙에 따라 (연역적!) 행동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론 결과를 놓고서 원인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놓고서 전체 그림을 그린다. 그런 방식이 훨씬 덜 복잡하고, 시간 노력 등을 아끼는 길이다. 그런 "사고(思考)의 경제성"을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가 "마태효과"라고도 불리는 후광효과다. 한 번 이름을 얻은 사람의 얘기는 더 쉽게 수용되는 현상. Ende를 gut하게 만들면 이래저래 유리한 것이다. 많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이해해주니까... 얼마나 편한가.

여기선 "gut"한 "Ende"란? 뭐. 뻔하다. 성공! 돈을 많이 벌었거나, 영향력 있는 높은 직위에 있거나, 명예라도 있거나...

결과 중심주의는 사고의 천박성을 드러낼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얘기를 영향력있게 하려면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인생 참 재미있지 않은가?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지를 판단하는 내 기준... 내 스스로는 일관성이 다고 생각하겠지만, 타인의 관점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그 기준이란게 사실 지독히 편의적이기도하고, 그 편의적 기준마저도 일관성 없이 임의적으로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기준을 고집할 근거가 약한 것이다. 반면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특정한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 관점에 따라 그런 태도는 답답해보인다.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국가 문화? (national culture), Nationalkultur, Kultur der Nation?)

그런 게 있나? 국가 문화들로 쓰면 좀 낫나? national cultures? Nationalkulturen? Kulturen der Nation? 복수로 쓰면 이미 명료함이 덜한데?
일요일이다. 주일이라고도 하는... 이런 저런 일들로 심사가 편치 못하다. 남 운전하는 것 때문에 '욱'할 일들이 여전히 생긴다. 나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탓이다. 거꾸로여야 하는데... 언제가 한 번 있으리라 예견했던 사소하지만 창피한 일도 있었고... 혼자있을 때나 타인과 함께 있을 때나 한결같아야 하는데...

몇 달 있으면 아버지 칠순이(란)다. 아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육순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고, 그 때 칠순을 기약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새 10년이 지난 것이다. 며칠 전 2014년을 2004로 잘못썼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연도가 지나치게 많아서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늘 갖고 있다. 심지어 2014라니... 그게 년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 199X이야 꽃다운 시절이었고, 200X만해도 그럭저럭 봐줄만했으나, 201X 이후로는 이제 쳐다보기도 싫은, 외면하고만 싶은 년도가 된 것이다.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global culture 가 강한가? national culture가 강한가? global culture/national culture는 어느 한 쪽이 강하면 다른 한 쪽이 약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동시에 강화될 수 있는 관계다.
루만토론방 가입신청이 끊이질 않는다. 오늘 178번째 회원인가? 모든 이론, 특히 추상성이 높은 이론이 그런 것같지만... 추상적인 이론은 매우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추상이 무엇인가, 현실에서 정수를 뽑아낸 것들 아닌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고, 잡티가 없는... 추상적인 세계의 극단을 보여주는 학문은 수학일 것이다. 사회이론에서는 루만. 추상세계의 완결성, 정교함, 순수함 등에 매료되기는 어렵지 않다.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는 그에 비해서 오물 투성이다. 잡티가 너무 많고, 그 복잡성을 복잡한 이론, 수식으로도 도무지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복잡하고 정교해보이는 이론도 당장 내 앞의 문제의 복잡성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그 간극을 메꾸는 작업이 중요한데... 쉽지 않다.
루만이 얘기하는 세계사회, 근대사회, 기능적 분화, 지능체계들의 자기생산성, 체계간의 구조적 연동, 인간의 포함, 배제...  그 자체로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는 이론이고 주장이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한국에 있었던 생명과학규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루만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루만이 그리는 추상적 세계 속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레고 블럭같은 개념들을 가지고 이론적 세계를 건설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 세계 밖에서 규격도 제각각이고 잘 연결되지도 않는 현실의 파편들로 뭔가를 세워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답답한 것이다.
높은 추상성을 보이는 '장르'로 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문학 바깥의 삶과 언어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학의 언어는 문학의 언어이고 문학이 그리는 삶은 문학의 삶일 뿐이다. 페북을 통해서 가끔 읽게되는 어떤 작가의 글은 처음에 읽을 땐 담백해서 좋았다. 반복해서 읽다보니 향수를 뿌리지 않아서 좋아던 그 글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도무지 사람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글을 잘 구사하는 몇몇 페친들의 글이 심지어 역겨울 때도 있다.
영화는 좀 다른 것 같다. 물론 소독약바른 것 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지만, 영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더 잘 묘사한다. 다만 영화의 메시지가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나 해골처럼 앙상한 경우들은 많지만...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어제 어떤 페친이 - 이놈의 페북 끊을 수가 없네 ㅠㅠ - 카우프만의 책 한 권을 소개했다. 댓글들에서 라이저링, 한국제자 등이 언급되었다. 학문과 연구의 주제, 그리고 그 학적 계보가 분명하게 논의되는 것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난 뭐지? 연구하는건가? 무슨 연구? 당혹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학문의 정체성과 주소를 고민했다. 그런게 없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표현하기가 좀 쉽지 않을 뿐이고... 전형적이지 않으니까... 추상적이지만 내 주제는 "한국 근대성"이다. Korean Modernity가 아니라 Modernity in Korea.  근대성 대신 근대화라고 해도 상관없다. 근대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화 변동에 관심이 있으니까. (물론 근대화는 어떤 지향점이 있고 (근대성? 서구 근대성?) 그것을 향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후발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근대(성)의 근대화(Die Modernisierung der Moderne, Beck)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니까... ). 한국 근대성/근대화가 연구주제라는 것은 사실 막연하다. 막스 베버나 (서양 자본주의 기원 탐구) 루만(사회이론)의 연구 기획을 연상시키잖은가. 여하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한국근대성/근대화 연구에 관해서 내가 잇고 있는 학문 흐름은 무엇인가? 일단 근대성, 세계근대성에 대한 이론은 루만이다. '한국'에 대한 이론은 지금까지 탐색한 결과 미야지마 교수가 가장 설득력있고 또 루만 등 서구이론과 친화성도 있다. 둘을 잘 결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처럼 연구분야, 내가 지지하는 입장, 이론, 학자 등이 분명하지 않긴 하지만... 지금까지 공부한 결론을 일단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긴하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은 사실 이 큰 기획에서 볼 때 지엽적인 너무도 지엽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긴하다. 그 의미, 의의가 아직,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2014년 3월 20일 목요일

서구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 그것을 그저"개인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는 집단지향적 사회고 서구는 개인지향적 사회인가? 글쎄. 이는 우선 개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다. 그에 대한 깊은 논의를 생략하면, 한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개인주의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원칙적으로 평등한 인간들간의 관계로 이해하는, 인간과 그 권리에 대한 보편적, 추상적 이해(인권)이고 원칙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개인들의 권리와 주장을 규율하는 공적 질서, 공공성에 대한 합의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사회에 결여된 것은 인권과 공공성. 서구에서 이는 시민계급의 등장과 시민의식, 부르주아 공론장 형성의 산물일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찾다보면 박노자 선생 글을 자주 만나게 된다.

"필자[박노자]에게 송두율 교수가 프라하의 한 학회에서 1995년에 이야기한 대로, 대한민국이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각종 유사 가족적 연고집단의 결합체입니다. 그 중에서는 제일 큰 것은 "단군의 후손들'이라는 "민족적 대가족"이지만, 또 그 안에서는 동문 집단마다, 지역마다, 하다 못해 대기업의 중년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마다 다 그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과 이해관계 의식이 형성돼 있지요. 그리고 그 연고적 소집단의 단결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시자면 "이명박 동문"을 찍어주는 "진보적" 고대 출신들의 행태 정도를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한국에 "시민사회"가 없다는 주장에 발끈하는 이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견해 차이 역시 무엇보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 차이에 있을 것이다. 좀 넓게 이해하면 있을 것이고 - 각종 시민단체, 시위, 인터넷 여론 등등 - 정치와 일상생활을 매개하는 좀 더 제도화된  영역으로 시민사회를 이해하면 그런 시민사회는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 전통 생명윤리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엄마 뱃 속에 있던 시기를 고려해서 출생한 아이를 1살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럴듯해보이지만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한국나이라고 부르는 그 나이는 한 해를 기준으로 그 해에 생일을 갖는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나이를 부여하는 것이다(설날 기준). 실제적인 나이(만나이)와의 간극이 생일에 따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뱃 속 기간을 존중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이러한 나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객관적 근거를 갖는 학문적 설명은 아니지만 나름 들을만한 이야기를 검새해서 찾았다.

"한국나이. 이미 동아시아에서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불합리한 관습"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낭만적 과학관을 가진 - '과학교' 신자들인 - 과학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사고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자그마한 사건이 페북에서 있었다. 정치인 견해를 기준으로 볼 때 좌와 우로 구분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막상 과학의 확실성에 대한 신앙만큼은 공유하기도 한다. 우파가 과학을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면서 과학지식의 확실성을 믿는다면, 좌파는 우파의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인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 과학의 합리성에 의존하는 것 같다. 우상이 숭배되는 시기에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인데, 이들은 과학에서 그 정수를 보는 것이다. 그런 진보주의자들은 이성, 합리성, 진실의 구현체로서 과학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그 권위를 도전하는 세력들을 우상 숭배자 보듯한다. 그런 도전 앞에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정치적 좌파들이 이른바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소칼이 그랬고 이 양반도... 정치적 좌파들이 과학교 전사들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과학에 대한 신앙 앞에서 여야도 없고 진보 보수의 구별도 큰 의미가 없다. 황우석 사태가 그런 점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민노당 정도가 달랐을 뿐... 여하튼 이 양반과 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소수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국정원 운운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정치적 우파들, 보수주의자들의 모습을 본다.
오늘 아침 또 이 과학근본주의자, 과학교 광신자의 글을 읽고야 말았다. 치유불가능한 중증이다. 물론 그 양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가 거듭 강조하는 과학적 합리성, 논리적 사고, 분명한 표현 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에 꼽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도 결연한 그의 태도다. 적의와 비장감, 좀 과장하자면 광신자의 그 광기가 느껴지는.... 나찌의 선동을 듣는 듯한... 나찌의 논리는 얼마나 명쾌하던가. 그 양반이 이정희를 명징한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꼽는데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물론 이정희가 훨씬 더 착한 쪽이지만...) 댓글에서는 - 물론 농담이겠지만 - 그가 '메시아'라느니, 그런 얘기하면 국정원에서 잡아간다든지 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진화론은 100% 확실하다"는 표현이 거슬려서 댓글로 시비를 걸어봤다. 그렇다. '시비'. 그걸 알아챘는지 그 댓글은 삭제당했다. 어쩐 일인지 다른 댓글은 남아있다. "고맙게도" 내 대신 다른 이가 시비 혹은 싸움을 계속 걸고 있다.

아마 내 댓글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 것 같은데... 그 주인장의 표현 "근거없는 시비,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내용" 다른 이의 표현 "사고력이 너무 떨어지는데 아는척하는건 어이없는거죠"

이런 싸움, 대접에 익숙하지 않아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싸움을 건 셈이니까 이 정도 대접은 받아들야하는데...
날짜를 쓸 일이 있을 때 2014란 숫자가 아직 어색하다. 오늘은 2004로 잘못 입력했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 10년은 어디로 어디로 간 걸까... 돌리도... ㅠㅠ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페이스북은 정말이지 재미있는 곳이다. 다만 듣기 싫은 소리는 대개 차단을 하기 마련이라 비슷한 의견이 공유되면서 강화되는 경향이 있긴하다. 나도 친구 관계를 잘 끊는편인데,  그래도 어떤 전형을 보여주면서 도움되는 정보도 제공해주는 페친을 몇 두고 있긴 한다. 이 양반은 기독교 등 종교와 그 종교의 맹신자들을 저주하는 과학자인데 그 양반은 자신의 입장을 맹신한다는 점에서 '과학종교' 신도라고 봐도 좋을 법하다. 과학교와 무신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점에서 리차드 도킨스'과'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양반의 발언에 흥미로운 정보들이 있어서 페친관계는 유지하고 있으나, 보면볼수록 그 맹신과 배제의 논리의 천박성이 분명하게 보여서 고민 중이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점에서 맹신의 논리는 비슷하다. 과학, 객관성에 대한 맹신의 정도가 사뭇 심각해서 치유불가능해보인다. 본인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정신병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자신의 정신병은 진단할 줄 모르는 것이다. 과학맹신주의자의 해독은 맹신적 종교인들의 해독에 못지 않은 것을... 어쩌면 더 무서울지도...
야구를 보면서 짜증날 때가 있는데, 그 '짜증'이 감정의 순간 방출로 그치면 - 시간이 좀 지난 뒤엔 - 멋쩍어서 (고양된 감정의 발산은 늘 그렇다), 짜증을 유발시킨 상황에 대한 판단을 야구가 아닌 다른 삶의 영역에도 적용해 볼 여지는 없는지 생각하게된다. 짜증 유발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경우가 (1)생각없는 태도. 특히 타석에서 생각없는 게 비전문가인 내 눈에도 보이고, 도무지 개선되지 않는 경우. 경기 상황을 도무지 읽지 못하는 타석, 수비, 주루플레이. (2) 새가슴. 이 경우는 투수에게 주로 해당되는데, 볼넷 남발, 도망가는 피칭. (3) 게으름. 근성 없음. (4)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평가하지 못하고 지나친 자신감을 보이는 태도. (5) 예의, 배려 없는 태도. 여유없는... 거침.
반면에 보기 좋은 경우는 (1) 스마트한 (똑똑한?) 경기 운영, 태도. (2) 과감함, 적극성, 근성. (3) 여유를 갖고 배려할 줄 아는 모습.

야구선수로 비유하자면... 나는 혹시 새가슴인가? 내 주장을 과감하게 펼치지 못하고 도망가는? 던질 줄 알면서도 도망가는 것인가, 아니면 어디로 던져야 할 줄 몰라서 헤매는 것인가? 내 생각엔 후자인데, 전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제대로 던질 줄도 모르면서 한가운데로 던지면, 새가슴 소린 듣지 않겠지만 그것 역시 칭찬받을 일은 못된다.

모든 야구선수가 류현진, 추신수가 될 수는 없는데... 굳이 짜증을 덜 내려면... 비난할 거리보다는 칭찬할 거리를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월요일 아침부터 내 공부로 진입하기 힘들어 빙빙돌고 있는 중이다. 그러지 말고 과감하게 가운데도 찔러 던져라. 정공법!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 계산을 너무 많이하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을 믿고 과감하게 도전하기!! 도전을 해야 실패든 성공이든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닌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 것!!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느낀 바 인상에 가깝다.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 프로야구 감독에 대해서 내가 무슨 특별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겠는가. 선동렬 감독. 그 양반이 삼성 감독으로 있으면서 우승을 여러 번 했는데 그때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않다. 다만 우승을 했으니 감독으로서 역량을  어느 정도는 갖추었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 기아 감독 부임 이후 보여준 모습을 놓고 보자면 삼성 시절 우승은 전적으로 선수 탓이었나 생각하게 만든다. 삼성시절의 선감독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적어도 투수키우는 것 만큼은 잘한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투수들을 잘 만났구나 생각하게 된다. 여하튼 기아 부임 이후 보여준 선 감독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른 바 팀 분위기를 제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인격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성,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스타 선수 출신이 좋은 감독되기 힘들다고 하던데... 딱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선수들 마음을 제대로 못 읽으니 선수 기용을 잘 할 수가 없다. 용인술의 약점. 예를 들어 선감독은 좀 잘한다 싶은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스타일이다. 하위 타선에서 잘하면 상위 타선에 배치한다던가, 포수인데 타격이 좀 괜찮으면 포수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지명타자로 기용한다던가... 감독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기대에 부응하는 선수들도 간혹있겠지만 대부분 부담감때문에 오히려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선수 용인술에 있어서 선감독이 배워야 할 모델은 염경엽 감독이다. 흔히 얘기하듯 스타출신 감독의 한계 탓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선수들이 빼어난 기량을 보이지 않는한 감독에 대해서는 올해도 기대를 접는 게 옳을 것 같다.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Einheitssemantik을 unifying semantics/ semantics of the unity로 번역한다. Einheit는 "통일(성)"이기도 하고 "단위"이기도 하고... unity는 단일성, 통일성, unify는 통일시키다, 통합하다. 사전 예문을 보니...  "unify the factions of a political party 정파를 통합하다 unify the people 국민을 통합하다." 국민통합은 integration/integrate보다 unify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이 경우 명사형은 unification인데... 그건 정말 '통일'아닌가. 명사 "unity"에 가까운 "unify"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unifying은 vereinheitlichen, Vereinheitlichung?

여하튼 unifying semantics는 J Halfmann이 매우 훌륭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Modern society is a society without a center, in an institutional and in an interpretative sense. It is a pervasive feature of modern society that the experience of differentiation and contingency has been dealt with by a variety of unifying interpretations of society, concepts, which try to make overarching sense of the confusing diversity of modern society. This is what will be called a unifying semantic..."

"미국에서 박사받고 한국에 와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양복입고 첫 출근했을 때다. 사회 밖에서 잉여로 있다가 사회 속에서 일체화되는 제복을 입고 어찌나 기뻤는지.." (페친 이근 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national/ global, East/ West, Korean/ foreign, underdeveloped/ developed...

이런 이분법은 참 식상하다. 재미없다. national culture (단수!)에만 치중하면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대중에게도 '어필'하기 좋지만 (왜? 상식에 부합하니까. 일본과 한국 문화? 당연히 다르다. 독일과 미국도 다르고. 등등), 정말 그런가, 이렇게 연결되고 동시에 관찰하는 사회에서... 뭔가 석연찮다. 또 정반대의 경햐, 문화의 수렴, 동질화 테제도 설득력이 있고 그 역시 상식에 부합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또 한가지 한국문화를 자꾸 예외적인 것으로 몰고 가고 (비정상), 발전된 서양의 문화가 지향해야 할 정상으로 보게 되면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일 뿐더러, 또 서양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않으니까 설득력도 떨어진다. 일부는 배우고 일부는 배척 혹은 심지어 가르쳐주기?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자기비하와 (한류에 대한 과잉의미부여처럼) 과대망상 사이를 오가기 쉽다. 아. 정신분열... 조울증...
근대사회는 이미 그 내부에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루만도 잘 지적했듯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전근대적 현상이 아니다. 정확하게 기능적 분화라는 사회구조적 변화와 같이 등장한 것이다. 집단에 대한 지향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문화다. 어디에서건... 유럽에서도. 반대로 아시아에서도 차이의 문화가 발견된다. 개인주의도 그렇고... 이 두 문화의 뿌리를 지역적으로 대비시키는 것도 우습다. 다만 지역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지역에 따라 그리고 또 시대에 따라 어떤 문화가 더 강하게 등장하는가, 바로 거기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적 조건이 있을 것이고.
"Semantik der Einheit"와 "Semantik der Differenz"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어떤 문화가 더 강한가, 약한가... 그것을 봐야. 예를 들어 생명과학의 윤리! 한국이라고 왜 없었을까? 그게 어느날 갑지가 국가가 결정해서 도입되었을까? 노우! 전통적인 윤리도 있었고, 의료윤리도 있었고, 80년대 되면 생명과학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인식도 이미 전파되었고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더 강력하게 확산되지 않았을 뿐이지... 생명윤리, 혹은 연구윤리 등이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되었던 원인을 국가의 강력한 개입으로만 돌리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전통적인 문화의 요소는 비록 형식과 내용은 다르지만 - 생명윤리 - 그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문화이고 세계사회의 지역으로서 한국, 세계화된 과학에 참여하면서 그 문화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차이의 문화를 더 이상 무시하거나 주변적 이슈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일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어제 오늘 탈핵문제, 대안 에너지 등에 대한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생태주의, 녹색운동 등 전형적인 신사회운동. 이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학자, 활동가, 지식인들 중 낯익은 이름들을 어제 오늘 발견했는데... 한 편 부러웠다. 나는 왜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서 연구하는 주제를 꼽기 어려운지. 생명과학, 생명윤리 문제를 오랫 동안 붙들고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내 관심사를 표현하기는 싫다. 그래서 사람들이 논문 주제가 뭐냐고 물을 때 선뜻, 기꺼이 대답하기 꺼려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루만이 전공이고 루만을 가지고 논문을 쓴다고 하면 훨씬 더 떳떳할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으니... 어정쩡하게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해온 내 이력의 취약점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국사회론"이다. 뭐. "한국 근대성"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Modernity in (South?) Korea, Korean Modernity. 사실 이건 너무 큰 주제라 내 관심을 설명하는 정보가치를 갖기 힘들 수도 있겠다. 루만이 자신의 30년 프로젝트를 Theorie der Gesellschaft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물론 루만은 그 이전에 보여준 게 있으니 그 표현의 의미가 전달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프로젝트를 수십년째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과정에서 보여주는 것 없이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비워내야 더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담을 수 있는데도... 그게 비교할 수 없이 효율적이고 또 정신건강에 좋은데도... 산출하는 것 없이 심각한 변비 상태인데도 그냥 매일같이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에휴... 이럴 시간에 배출하자 배출.
지난 화요일에 이어 어제 목요일에도 10km를 뛰었다. 처음 4km는 함께 매우 느리게 뛰었고 그 이후부터는 다른 회원과 함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속도를 냈다. 4 - 6km 사이 페이시는 약 5분. 그러다 파트너가 급 처지기 시작. 모처럼 속도를 내면서 훈련하려던 계획은 그것으로 깨짐. 6 - 9km 구간은 편하게 뛰다가 - 그래도 5분 45초 페이스 - 마지막 1km는 다시 속도를 내 보았다. 막판에 전력질주까지 해보았지만 구간 기록은 5분 10여초. 속도를 높여서 달리는 일이 생각보단 쉽지 않다. 다음 대회가 4월 중순 경에 있는데 이번엔 하프 55분 이내로 들어오는 것이 목표다. 수치상으론 1km당 평균 5분 28초를 유지하면 가능한데...전반은 5분 25초 후반은 5분 20초 정도를 유지하는 전략을 쓰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 1시간 53 - 54분도 가능하겠다. 여하튼 익숙해진 속도보다 빠르게 그리고 좀 길게 달리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내가 프레임, 프레이밍 개념과 관련 연구에 불편을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프레이밍은 좁은 개념이다. 자주 바뀌고...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을 수도 있고. 부화하고 내용분석하는... 대표적으로 언론 분석이 취하는 그런 접근은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나 이미 프레임을 구분하고 어떤 프레임에 속한 것으로 볼 것이냐... 그런 과정에서 해석의 여지가 너무 넓다. 너무 구체적이라서 해석의 여지를 좁힌다. 시간 차를 둔 같은 사안에 대해서 다른 프레임이 사용될 수 있고, 내용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같은 프레임을 사용할 수도 있고... 반면에 문화, 이데올로기 등은 좀 더 지속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추상성이 더 높은 표현이라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물론 그 이유로 갖는 한계도 있지만.

"문화는 사회나 집단의 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이해, 상징, 언어를 가리킨다. 이데올로기는 사회 세계를 정당화하고, 도전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신념의 세트을 가리킨다.  프레임은 사회적 상황을 평가하고 대안적 행위 유형을 제안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구체적인 비유, 상징적 재현들, 인식적 신호를 가리킨다"

"Culture, ideology, and framing are closely interconnected. They are conceptually related because they deal with the content and process by which meaning is attached to objects and actions. Culture refers to the shared beliefs and understandings, symbols, and language of a group or society. Ideology is a set of beliefs that is used to justify, challenge, and/or interpret the social world. Frames are the specific metaphors, symbolic representations, and cognitive cues used to assess a social condition and to suggest alternative modes of action." (Taylor, Dorceta E. (2000) The Rise of the Environmental Justice Paradigm. Injustice Framing and the Social Construction of Environmental Discourses, American Behavioral Scientist, Vol. 43, No. 4, 508-580)

"A frame in communication can be defined only in relation to a specific issue, event, or political actor. For example, the frames for social security reform differ from the frames for immigration reform. Even the same issue at different times may invoke alternative frames (e.g., the frames used for social security reform in 1997–2000 are not identical to those invoked in 2003–2005). (Chong, Dennis/ Druckman, James N. (2007) Framing Theory, in: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Vol. 10: 103-126)


핵심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내 논의의 틀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니 그렇게하기 싫어서 자료만 찾고 정리하고 출력하고 읽고 또 찾고... 그러고 있다. 생각을 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고통. 창작의 고통. 사실 '고통'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진 않다. "게으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Luhmann argues: because individuals are part of the einvironment of the societal system, they are conceded greater autonomy than concepts of social roles, norms, and 'internalization' would allow for" (Verschraegen 2011:187, in: Adressing modernity).

루만 진술의 출처를 명기하고 있진 않지만 내용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다.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요즘은 1주일에 한 번 꼴로 뛰는 것 같다. 오늘은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뛰는 날이라 모처럼 속도를 좀 내고 싶었는데... 빨리 달리지 못하는 회원이 있어서, 절반 5km는 에스코트해서 달렸고, 나머지 5km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다. 반환점을 돌때쯤 신발끈을 느슨하게 하려고 잠시 멈추었는데 그게 패착이었다. 나쁘지 않았던 페이스가 갑작스럽게 떨어진 것. 보통 달리면서 중간에 쉬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오늘 절감했다. 그동안 달리면서 내가 쉬는 경우는 대부분 다리가 무겁거나 기운이 없어서 한발짝도 더 내딛지 못할 때였다. 그런 경우엔 사실 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숨만 가뿐 상태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러고나니 페이스가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확실히 숨이 가뿔 때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프코스를 뛸 때 1km당 5분 40초 정도를 유지하면 2시간 이내로 들어오니까 대개 그것을 목표로 한다. 오늘은 후반 5km를 평균 5분 20초대로 뛰었다. 페이스가 무너져서 급피곤한 상태에서 억지로 뛴 것 치곤 나쁘진 않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다음엔 5분 10초로 10km 달리는 것을 목표로 삼을 생각이다.
과감하게 승부를 걸지 못하고 도망가는 투구를 보이는 투수를 보는 일은 답답하지만 그래도 이해해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본헤드(bonehead) 플레이나 센스없고 생각없는 야구를 보는 일은 더 답답하다. 새가슴은 노력하면 개선될 가능성이 좀 있는 것 같지만, 생각없는 야구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stupid play를 하는 당사자도 답답하겠지. 센스도 있으면서 과감하게 승부를 걸 줄 아는 선수가 최선이겠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센스있는 쪽이다. 그래서 윤석민이 눈에 들어오는지도...
"자신의 비열함을 인식하는 것이 문학의 진정한 길일 것이다." : 황현산 

 이는 물론 문학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발전국가, 복지국가, 신자유주의국가는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서양에서야 복지국가의 해체 경향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연결시키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해체시킬 복지국가가 있어야지. 복지국가도 강화, 신자유주의국가도 강화되는 것이다. 어디 국가만 강한가? 국가가 강하고 기업도 강하고 시민사회도 강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80년대 이후 한국의 변화를 신자유주의화라고 보는 것 같다. 경제로의 과잉통합 경향 때문이다. 국가는 축소되는게 아니라 경제로의 과잉통합을 국가가 나서서 주선하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국가도 강하고 경제도 강하고...

이건 어쩌면 기능적 분화와 잘 어울리는 경향 아닌가? 루만은 기능체계들이 자신을 사회기술의 준거로 삼는 경향을 얘기하니까. 경제 중심, 국가 중심, 과학 중심... 등등. 체계의 독립성이 강화된다. 그것과 강한 국가는 공존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자율성, 독립성, 역량이 다른 것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국가 형태 혹은 성격의 변화는 상황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지 내적 법칙 같은 게 있는 것 같진 않다.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큰 관심을 주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틈날 때 챙겨보지 않을 수 없다. k팝스타도 재미없어지는 시국에.... 야구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대목. 가장 짜증나는 투수는 계속 도망다니다가 결국 볼넷을 주는... 제구력이 나쁜 탓이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텐데, '새가슴'이라서 그렇다면... 정말 짜증 충만이다. 물론 그렇다고 위력적이지도 않은 공을 한가운데 곱게 바쳐서 던지는 족족 안타를 허용하는 투수가 더 이뻐보이진 않는다. 결론은... 잘 던져야 한다. 과감하게 승부할 줄 알되 제구력도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 류현진 급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기대치가 너무 높다고? 남일이라고 관찰하는 사람은 원래 그런 법이다. 어디 야구만 그럴까...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체계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책을 읽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기능적 분화적 제도화 형태를 갖지만, 비공식적인 계층네트워크, 상호적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위계적 분화, 네트워크 vs. 기능적 분화?)  아시아의 경우는? 아시아의 전통사회는 (유교 근대?)는 어쩌면 기능적 분화와 친화성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전통은 한편으로 기능적 분화의 어떤 측면의 수용을 쉽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적 분화의 어떤 측면의 수용은 여전히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계사회의 기능적 분화 경향에 편승, 거부(저항)... 그 사이의 갈등?
1. 역시나 이번에도 '내 슬픈 예감'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K팝스타는 이번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가 덜하다. 심지어 오늘 방송에서 참가자들이 부른 노래 중 다시 듣고 싶은 노래는 한 곡도, 단 한 곡도 없었다. 지난 주의 경우 권진아 노래가 유일.

2. KBS에서 합창대회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하모니 어쩌고 하는... 참가한 합창단들의 면면이 다채롭다. 그 중에 백화점 문화센터 합창반에서 만나서 합창단을 꾸린 팀도 있었다. 대형교회들도 일종의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반, 등산반 등등. 교회의 원래 목적과 상관없는 그야말로 친목단체다. 백화점과 대형교회의 이런 문화 활동 운영, 지원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면, 썼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중에라도 써 볼 수 있을까?

3. 어제 밤에 뜬금없이 몸살기가 왔다. 잘 쉬고, 저녁엔 딸 목욕도 시키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한기를 느껴서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이불을  더 덮고 감기약까지 찾아서 먹었다. 오늘까지 그 기운이 이어져서 결국 집안청소를 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잠시 삼십 분 정도 잠을 잤는데... 그 이후로 회복된 것을 느낀다. 몸살이 올 이유가 없는데... 사람 몸이란... 참...

4. 발전국가, 발전레짐, 발전주의... 그렇게 설명하기 싫어서... 역시 이론이 문제다. 결론은 나와있는데... 루만의 L도 없이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데...

2014년 3월 7일 금요일

흥미로운 이야기. "맹자로 인하여 인류에게 전쟁의 질서(패도覇道)를 종식시킬 수 있는 문화(王道: 도덕. 평화)의 선례를 선사"한 조선이라는 테제! 흠. 그렇게 보면 또 그렇지만... 과거를 현재로 과고하게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 "모든 역사는 현대사" - 지나치진 말아야. 더 근본적인 원칙은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남쪽은 미군에게 북쪽은 소련군에게 분할 점령되었어야 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일본의 북쪽 섬 일부를 소련에게 할양하는 것으로 일본의 천황체제를 살려주었다. 일본이 천제(天祭)를 지낼 수 있는 제정일치종교공동체 제국이라는 식민지합리화 천황제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먹고 미국은 필리핀을 먹는 것을 상호 조인한 가스라 태프트밀약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것이 근대화인가? 이것이 진보인가? 6.25와 베트남전쟁을 패권질서정당화 이원성(선과 악) 종교전쟁으로 보는 언어전쟁사관도 있다. 인류역사에서 선과 악이라는 신들의 종교전쟁은 승자들이 만든 합리화이다. 21세기 만연된 현재의 인류전쟁사는 종교봉건제에 종언을 고한 춘추전국시대의 르네상스만 못하다. 춘추전국시대는 백화노방(百花怒放:온갖 꽃들(사상)이 화난 듯이, <제멋대로, 유감없이>피울 수 있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수많은 사상을 다툴 수 있었다. <13>
서양의 역사는 신화전쟁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천제를 지내는 교황청이 여럿이 있었던 성지탈환 패권질서 정당화전쟁의 역사였다. 영원한 로마 교황청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지금까지도 한 할아버지 자손인3대 종파(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가 인류의 유일패권질서의 정당성을 위한 천제(天帝)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아비뇽교황청이 없어진다. 또 아타튀르크(Mustafa Kemel 케말 파샤)터키초대공화국대통령은 이스탄불(콘티탄티노플, 교황청)에서 천제를 지내는 종교전쟁에서 발을 뺀다. 바그다드도 교황청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황제제도도 알고 보면 프로테스탄트종교로의 교황청 즉 세계지배질서재편에 기초를 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 호주, 아프리카의 일부 나라의 국회에는 아직까지도 엘리자베스여왕의 대형사진이 걸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현재미국의 ‘월스트리트’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인류의 모든 질서와 전쟁을 관장하는 유대자본으로 변태된 교황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구(유럽+미국)는 천황제종교제정일치 공동체이다. 인도유럽피안언어인 신화만능주의는 서구의 사막문명종교라는 근동신화를 벗어나기 힘들다. 역사에서의 백성은 先軍에 의한 軍民이었으며 神軍에 의한 軍民이었다. 神政에 의한 神民이었다. 인류는 교언영색언어 지배이데올로기 제정일치(祭政一致)역사였다.

그나마도 인류 4대 문명권에서 한자문화권만이 신화종교공동체에서 벗어나 있다. 진나라의 상앙은 전쟁으로 전쟁이 없는 사회(以戰去戰, 以殺去殺)라는 법가(法家)를 중국에 2300년 동안 정당화시켰다. 조선만이 맹자를 정치에 접목하여왔다. 지배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사상이었으면 동시대에 일본의 기득권들은 맹자의 서책을 가지고 오는 배를 엎어버렸다. 중국은 맹자의 질서를 말하기가 거북스러울 정도다. 중국은 상앙의 진나라 천하통일법치우월주의를 이어온 정통성 패권 질서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패도가 아닌 왕도라는 도덕을 말한다. 인류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평화를 말한다. 목민심서처럼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의 도덕만 깨끗하면 모든 나라의 학자와 민중이 편을 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제정일치질서(信)의 신(神)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하였다. 제일 가벼운 것이 군주요, 제일 귀한 것이 백성( 하늘)이라고 하였다.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걸왕을 내쫒은 것이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지 않느냐 묻자 맹자는 걸왕을 죽인 것은 신하가 군주를 축출한 것이 아니라 인의를 해치는 무도한 사내를 죽인 것이라 했다.(맹자 양혜왕 제 8장)
조선은 맹자로 인하여 인류에게 전쟁의 질서(패도覇道)를 종식시킬 수 있는 문화(王道: 도덕. 평화)의 선례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200년 역사는 300번의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평균 1년에 한번이상 전쟁이 있었던 나라이다. 조선 500년은 인류역사상 외침을 하지 않은 역사였다. 인류의 평화란 전쟁이라는 패도보다 만 배 더한 도덕적이고 거시적인 문화적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종교전쟁이라는 인류패도(폭력전쟁)의 역사를 왕도(도덕)의 역사로 만들려는 것이 맹자사상이다. 조선의 세조찬탈은 나라의 군대를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왕의 친위대) 개념으로 전문 지휘관이 없어졌으며 정규군이 없어졌다. 국가체제가 망가진 틈에 임진왜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문무(文武)는 음(陰), 양(陽)의 거리의 조화이다.
요즘 "기본소득" 이야기를 자주 듣게된다. 아래는 이계삼의 한겨례 칼럼 중 일부. 흠. 나도 이렇게 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규 ㅠㅠ 더 거시적인 사회 변동 이야기가.. 그래도... 필요하겠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대안이 필요하겠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얼마간의 기본적 필요를 해결할 돈을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발상을 듣게 되면 맹랑한 소리라고 일소에 부쳐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윤영배씨의 거듭된 제안에 터져나왔다는 객석의 웃음에도 그런 의미가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명쯤 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중에 기본소득을 지지한 이가 1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느낌이 좀 달라질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이미 서구 진보진영에서 오랫동안 깊이 토론된 의제이고,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12만명이 서명한 ‘월 300만원 기본소득 보장’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부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모두의 것일진대, 그 끄트머리에서 자본을 댄 소수 주주와 경영자와 직원(그것도 정규직)들이 독점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것이다.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할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예수님이 원조이다. 일거리가 없어 놀다가 저물녘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먼저 와서 일한 자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포도원 주인 비유야말로 기본소득론의 핵심적인 논리를 꿰뚫고 있다. 누구나 삶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제공받을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재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과 대토지 소유자들이 부당하게 편취한 소득에 대해 서구 수준, 아니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과세하더라도, 그리고 국가와 지방정부가 은행에 기대어 발행하는 채권 대신 한국은행권과 태환되는 공공통화를 발행하더라도 너끈히 조달할 수 있다.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현금이라는 동아줄을 붙잡기 위해 너나없이 돌진해야 하는 이 노예적 삶의 성채에 쩍쩍 금이 갈라질 것이다. 세 모녀는 집세를 내고 어둑한 방에서나마 밥을 지어 먹으며 그들 나름의 다복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안이 없다고들 말하지 말라. 대안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세 모녀 사건을 이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을 때, 그리고 그 견해들이 모두 나름 일리가 있을 때, 어떤 견해가 옳은지, 혹은 조금 더 옳은지 판단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누구의 견해인가, 다시 말해 그 견해를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다(위험 인식 연구에서는 상식. 즉 위험 정도에 대한 지식 그 자체보다 그런 지식을 이야기하는 사람, 기관에 대한 신뢰의 정도가 위험 인식에 더 결정적이라는... ). 당사자의 태도를 보는 것도 필요하다. 저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를 가르겠다는 판결에 대한 태도 차이로 친엄마와 가짜엄마를 가려내듯이... (박찬욱 감독의 단편 영화 '심판'은 이 주제를 반복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 내용과 쟁점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해고자들이 보여 준 모습과 그들을 돕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쪽에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페친 김태호 님이 쌍용자동차 편을 들며 해고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칼럼을 써서 약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잠깐 읽어본 바로는 그 주장에도 나름의 설득력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선뜻 그 쪽으로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
비워야 또 채운다.

이것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기만해선 안되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 그래서 지식을 쌓고 고민하고 성찰하는데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깊지 않다. 밑천이 금방 드러난다. 큰 문제다. 빨리 개선해야 한다.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백년 전 한국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을 봤는데 무척 흥미로웠다(35 fascinating photos of Korea from 100 years ago (before K-dramas took over Asia). 100년전이라면 대략 일제감정기 초기에 해당하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는 얘기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추적했던 개념 "유교 근대성"이 떠올랐다. 사진 속의 사람들 혹은 이들의 조상들의 세계관에 '근대' '근대성'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까? 근대성은 그냥 철처하게 근대의 산물로 이해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서양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로 퍼져나간. 근대성의 어떤 요소들을 그 이전 서양, 혹은 다른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을 기축시대라고 부르던 문명이라고 부르던 결국 인간에 대한 것이고, 인간 종이 갖는 보편성이 있으니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근대적이지 않은 요소가 지금, 21세기에도 관찰되는 것 역시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삶이니까. '근대성'을 좁게 이해해야 인간사를 좀 더 유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명을 이룬 이후 인류 역사에서는 다양한 가치, 지향점이 공존했다. 중세시대라고, 조선시대라고 개인에 대한 생각이 왜 없었을까? 프랑스 혁명에서도 자유 뿐 아니라 평등 뿐 아니라 박애를 이야기 하지 않았나. 근대의 핵심적 특징을 개인과 주체의 발견, 개인주의의 전면적 등장으로 보는 건 맡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이 둘의 차이는 크다. 개인주의를 근대성의 (거의) 전부로 보면 공동체가 강조되는 현실을 탈근대성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전면적" 등장을 근대성으로 본다는 것은 공동체의식에도 중요한 자리를 내 주는 것이다. 정도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인간사, 인간생활에 어짜피 이러저러한 지향,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 어떤 가치가 더 전면에 드러나고, 더 중시되는지, 어떤 요인이 그러한 지향점의 변화와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는게 맞을 것이다.
“누구도 ‘인생’에 대해 가르쳐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인생론’을 전복하는 ‘반인생론’의 봉기이다. 남이 가르쳐주는 ‘인생’을 살지 말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론이라기보다 ‘새로운 생각’이다.” (이택광, 인생론)
페북 그룹 의료연구윤리회에 올려진 글이다. 좀 길지만 옮겨둔다. 윤리문제에 관한 규제정책을 세우고 시행할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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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진원장의 의료와 윤리 034>

034쥐어짠다고 윤리가 바로 서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고 윤리적인 의사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진료환경을 개선해 주어야 한다.>

낙태에 관하여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냐 임산모의 자기결정권이 우선이냐는 끝없는 논쟁이 있어왔다. 얼마 전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주최로 여성과 태아의 공생을 위한 간담회가 있었다. 의사들이, 그것도 낙태와 직접 관여되는 의사들이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건강증진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이 신선하다. 낙태(인공임신 중절 수술)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 방안에 대하여 사회 각 층의 의견을 수렴하자는 취지였다. 

그동안 낙태에 관하여 견지해온 참여자분들의 찬, 반 주장과 낙태 현실과 대안 등에 대해 많은 의견이 개진되었다. 사회 각 영역에서 낙태를 방지하고 여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함께 생각해보는 뜻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낙태를 줄여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낙태에 관하여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주문하는 요구가 너무나 과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낙태가 생명을 중단시키는 무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주장하는 그룹의 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 경제적 문제가 바로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윤리의식이 희석되어 버린다. 낙태허용을 주장하는 그룹이나 낙태를 시행하는 의사들이나 모두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윤리의식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출산이 급격히 줄어든 현 상황에서 정상적인 산부인과 진료만으로는 병의원을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없어서 분만을 위해 외국의사를 수입하거나 해외로 나가서 분만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분만상담료 항목 신설을 제안한다. 낙태를 줄이기 위해서 낙태를 위해 방문하는 임산모들에게 숙려기간을 주고 가능하면 상담을 통해 출산을 권유하도록 분만 상담료를 기본 진찰료와는 별도로 신설했으면 한다. 둘째, 산부인과 의사들이 경제적 이윤을 위해 낙태를 시행하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낙태 대신 분만을 장려하도록 경제적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고 싶다. 국민건강보험 재정과는 별도로 분만장려 바우쳐 기금을 마련하여 분만 한 건당 분만 수가와는 별도로 50만원 정도의 바우쳐를 지급했으면 한다. 낙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보상해줌으로써 낙태가 줄어드는 물꼬를 터줄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의료사고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가 바로 분만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의료분쟁조정법이 통과되면서 무과실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을 국가와 분만 실적이 있는 병의원이 반반 부담하도록 시행령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가뜩이나 위험한 영역에 속하는 분만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부추기는 잘못된 정책이다. 이런 잘못된 정책은 즉시 철회되어야한다. 낙태를 방지하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만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우고 고도의 윤리의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숨이 막히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들이 숨을 쉬고 생각하고 판단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경제적인 여건이 너무 열악해지면 윤리 수준이 저하되어 버린다. 지금 이런 현상이 낙태라는 문제를 통해 발생되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고 윤리적인 의사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진료환경을 개선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적 배려 없이 무한정의 윤리의식과 의료서비스를 요구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 같다. 쥐어짠다고 윤리가 바로 서지 않는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고 비윤리적 사회현상을 개선하려고 한다면 쥐어짜는 정책이 아니라 포지티브 인센티브정책으로 격려하며 잘못된 방향을 바꾸어 가야한다.

2014년 3월 6일 목요일

미야지마 교수의 소농사회론-유교 근대성은 그나마 역사적 접근이라 수용하기 쉬웠던 것 같다. 뚜웨이밍 교수의 유교 근대성 논의는 그에 비해서 덜 신선한 주장으로, 동아시아 전통을 존중하자는 어쩌면 매우 꼰대스러운 발상으로 생각했었다. 지난 몇 주간의 지적 혼란을 겪은 탓인지 뚜웨이밍 류의 주장이 새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서양 근대성과 유교 근대성의 내용을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재구성할 수는 있을텐데... 모든 문화는 비슷한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전형적인 서양 근대성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 아시아 유학, 유교 전통에도 개인주의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서양에도 집단주의, 가족주의 전통이 있고. 사회구조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더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 아닌가? 사회구조가 선호하거나 강조하는 혹은 감추는 그런 문화가 있는 것 아닌가? 특정 사회구조와 특정 문화의 친화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루만적 매우 루만적인 시각인데...  사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삶의 실제적 영위 과정에 대한 의미부여 아닌가? 그러나 삶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그것의 구조화된 형태(사회구조)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문화의 독립성을 인정한다고 쳐서, 무게중심은 구조에 둘 수밖에 없다.

물론 루만의 경우 사회구조가 매우 매우 거시적이다.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의 구분 같은.... 근대 사회 내의 구조적 다양성,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 예를 들어 지역과 국가를 경계로 하는... 그런 구분에 대해서 매우 취약하다. 세계사회를 전제로하기 때문에 워낙 추상적 수준에서 이론을 설계해서 그런 건데... 구체적 양상의 다양성은 루만의 개념으로 잘 표현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능체계 간의 관계가 그렇고, 또 다른 분화원칙과 기능적 분화 원칙 간의 차이도 그렇고. 분화를 세 개로만 구분한 것은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분절적 분화, 계층적 분화, 기능적 분화라니...

아시아 문화, 유교 문화 같은 게 있어서 면면히 유지되고 있다?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모든 전통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섞여 있다. 유전되기도 한다. 문화적 유전자(밈meme?)시대적 상황, 구조적 조건에 따라 강조되는 문화, 선호되는 문화가 있을 뿐. 그런 요소들을 묶어서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늘 구성되고 재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문화, 문명권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점들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가 바뀌지 않는 것은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은 탓이 크다. 사회구조가 바뀌는데도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고 보기 보단. 사회구조를 공식적 구조와 비공식적 구조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서양에서는 이 둘이 상대적으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비서구에서는 덜 그런 것 같고.

내 논문에서 늘 불만족스러웠던 부분이 결국 서구적 근대화, 서구적 근대에의 적응을 주장하는 것 같아서였는데... 그것을 "서구""서양"이라고 제한하지 말고 "사회구조"로 보면 어떨까? 서양 지역에서 내적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매우 인상 깊은 글. "Towards a Confucian Modernity"  (Tu Weiming 杜維明 뚜웨이밍). 물론 서양의 계몽 근대성과 아시아의 유학 근대성, 그리고 그것이 각각 대변하는 가치들이 두부자르듯 구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의문... 그렇게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지 않으려고 한대도 크게 붙잡을 수 없다는게 문제.
"The possibility of a radically different ethic or a new value system separate from and independent of the Enlightenment mentality is neither realistic nor even authentic. It may even appear to be either cynical or hypocritical. We need to explore the spiritual resources that may help us to broaden the scope of the enlightenment project, deepen its moral sensitivity, and, if necessary, creatively transform its genetic constraints or historical constraints in order to fully realize its potential as a world view for the human community as a whole. And, of course, the key to the success of this spiritual joint venture is to recognize the conspicuous absence of the idea of community, let alone the global community, in the Enlightenment project. Of course, the idea of fraternity, as many of you know, the fundamental equivalent of community in the three cardinal virtues of the French Revolution, has received scant attention in modern Western economic, political, and social thought. This is a major task for most of us.
"Underlying this re-examination is the intriguing issue of traditions in modernity. The dichotomist thinking of tradition and modernity as two incompatible forms of life will have to be replaced by a much more nuanced investigation of the continuous interplay between modernization as the perceived outcome of rationalization. This is Max Weber’s term, defined in Weberian terms—tradition as habits of the heart, as de Tocqueville understood it. In this particular interplay, a new form of cultural self-understanding will emerge. The traditions in modernity are not merely historical sedimentation, passively deposited in modern consciousness. Nor are they, in functional terms, simply inhibiting factors to be undermined by the unilineal trajectory of development. On the contrary, they are both constraining and enabling forces capable of shaping the particular contour of modernity in any given society. It is, therefore, conceptually naive and methodologically fallacious to relegate traditions to the residual category in our discussion of the modernizing process. Indeed, an investigation of traditions in modernity is essential for our appreciation of modernization as a highly differentiated cultural phenomenon rather than a kind of homogeneous integral process of Westernization or, more recently, modernization."
아마 비슷한 논지를 담고 있을 책으로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휴머니스트, 2006년) 

목차


1부 세계화 시대, 문명의 대화

01 대화, 타자의 독특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
1. 나는 왜 문명들과의 대화에 나섰는가
2. 대화에 임하는 나의 목적
3. 나는 문명들과 이렇게 대화하고자 한다

02 세계화 물결, 중국과 미국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1. 현대화에서 세계화로의 패러다임 변화
2. '서양과 나머지'가 아닌 '나머지 속의 서양'
3. 유교 문명과 미국
4. 다른 문명을 배워야 하는 미국

03 세계화 시대의 문명 대화, 윤리적 지혜와 문화적 지혜의 만남
1. 행동은 지역적으로, 사고는 세계적으로
2. '경여되는 세계화'
3. 이분법적 사고와의 결별

04 두 가지 화두, 세계화와 다양성의 이해
1.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벽들
2. 다양성과 공동체
3. 공동의 가치
4. 인성과 호혜성 그리고 신뢰
5. 세계화윤리를 향하여
6. 문학적 지혜와 윤리적 지혜

05 중국의 부활, 중국의 흥기가 세계에 전하는 메시지
1. 현대성을 구현하는 가치들
2. 중화민족이 겪어온 현대화의 대가
3. 중국의 부활에 담긴 문화정보

06 중화 문명과 세계 문명, 주변과 중심ㆍ전통과 현대ㆍ지방과 세계
1. '지방화'와 '세계화'
2. 러시아와 인도, 일본의 경우
3. '동아시아의 현대성'
4. '현대화','대화'그래고 '서양의 초월
5. 과학기술과 사회자본
6. 유학의 '인문주의' VS 서양의 '계몽주의'

2부 신유학의 새로운 사유

07 오래된 미래-유학
21세기! 과연 유교 문명을 논할 수 있는가
1. 유교 문명, 고대의 지혜와 21세기 사상들의 조화
2. 서구 계몽주의와 유교 인문주의
3. 지식사회에서의 유교의 의미

08 유학전통의 현대적 전환, 세계윤리의 기본원칙이 될 수 있는가?
1. 유학의 핵심가치, '인''의''예''지''신'
2. 유학전통의 이해, 시간ㆍ공간ㆍ계층
3.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유학전통의 해체 과정
4. 유학에 대한 두 가지 비판
5. 신유학! 그 가능성을 묻는다

09 유학의 창신, 유학 인문주의의 현대적 의미
1. 어머니의 신교, 문화가치의 전달매체
2. "조화를 이루되 동화되지 않는다"
3. 신유학의 문화적 의미
4. 유학의 독자성, 개인ㆍ사회ㆍ천도

10 동아시아의 흉기, 유교 문명의 현대적ㆍ문화적 의의
1. 현대성에 대하여
2. 동아시아 공통의 인식구조
3. 유학전통과 현대성
4. 현대적 변형
5. 새로운 시작

11 신유학의 인문주의, 유학 인문주의의 생태적 전환
1. ㅅㅇ태주의적 전환
2. 유학 인문주의
3. 유학 인문주의의 세속화
4. 생태적 전환이 가져온 비전
5. 현대주의 이념으로서의 유학 부활
6. 포괄적 감수성, 공감 및 교감으로서의 인성
7. 왕양명의 우주론적 유학 - 만물과의 합일
8. 인간ㆍ우주 동형동성론
9. 유교적 생태주의의 전환
10. 생태주의적 전환의 실현, 대중 지식인의 역할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의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 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한병철)

"거룩한 것은 그냥 쉬는 것이다. 쉬면, 쓸모없는 피로물질은 어느새 창조적 활력으로 거듭난다. 이게 창조의 신비다."
(한병철의 글을 소개하면서 텀블러친구 주원준)
"스테판 다나카에 따르면 '동양'개념 자체가 청말기 동아시아에서 '중(中)'국의 중심성을 부인하여 이를 China에서 음차된 '지나(支那)'로 상대화, 격하시키고 이 빈공간을 '동양'이라는 새롭게 '발견된' 범주로 채워나가는 메이지유신기 일본의 외교전략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일본동양사학이 '발명(invented)'한 바로 이 동양의 새로운 '중심'이자 리더는 전통과 서구의 진보적 문명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일본이었다. 중국이 지나로 명의변경된 것은 그 중심성에 대한 정신적 해체요구였다." (이해영)
"평화가 모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다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빌리 브란트)
„Der Frieden ist nicht alles, aber alles ist ohne den Frieden nichts.“

Willy Brandt in seiner Rede zum 100-jährigen Bestehen des Verlages J.H.W. Dietz Nachf., 3. November 1981
고종석 선생. 정말이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네. ㅎㅎ

"우리가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대체로 이해관계의 일치다."


[아놀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자들이 독일의 정치적 후진성에 따른 좌절감, 그리고 루소나 볼테르와 같은 당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누렸던 사회적 영향력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에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사변으로 빠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철학은 이미 칸트에서부터 당시의 교양 있는 일반대중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문외한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또 난해성이 곧 사고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생각하는 전문용어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인들은 서유럽에서 높이 평가받는 단순, 냉철하며 확실한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사변적 구성과 복합성에 대한 그들의 애호는 하나의 정열로까지 발전하였다.”]

흠.그런가? 어디 독일 철학만 그럴까. 프랑스 철학은 더 심하지 않은가?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오늘 우연히 이런 문장을 만났는데, 기분이 개운치않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그 글쓴이가 이 블로그를 볼 일이 없길 바라며...

"음, 그 문제는 이론적 텍스트 번역과 문학적 텍스트 번역의 차이 같습니다. OOO 샘의 번역은 묘사적으로 뛰어나지만, 한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양의 작가들이 소설에서조차도 지성적 부분과 감성적 부분을 구분할 줄 안다는 사실 말입니다. O 샘의 번역은 그 무결함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번역처럼 보입니다. 아시겠지만, 이건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요."

'보그병신체'라는 표현을 빌자면 이건 '번역병신체'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한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는 사실 말입니다" "무결함성에도 불구하고" "아시겠지만, 이건 참으로 어려운 문제지요".  번역을 많이 해서 저런 표현이 익숙한 모양이다, 그냥 생활인 모양이다, 병이다 병 그것도 중증, 아니 어쩌면 나도 저런 번역병신체를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등등 여러 생각이 든다.
“한국이 줄기세포 강국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2004년 황우석이 사이언스 논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언론은 ‘미국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식으로 부풀렸다. 올해 초 네이처는 한국이 줄기세포 분야에서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연구에 강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과학은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다르다.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언론이 키워온 거품이 대중의 상실감을 키운 것일 뿐이다.”

황우석 논문조작을 처음 제보했던 류영준 교수의 얘기다. 이 분야를 직접 연구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동안 듣고 접한 바에 따르면 정확한 평가다. 그런데 최근 등장하는 황우석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우리 '국민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civic epistemology...

2014년 3월 4일 화요일

페친 최낙언님의 . 좋은 내용이라 옮겨 둔다.


본질주의 : How pleasure works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쾌락을 얻는 이유가 맛과 향 때문이고, 음악이 좋은 이유는 소리 때문이며, 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만 맞는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쾌락을 얻는 대상의 참된 본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예술에서 얻는 쾌락의 대부분은 작품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역사를 감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진품이라고 믿었던 그림이 위작으로 밝혀지면 그 순간 그림에서 느꼈던 즐거움은 눈 녹듯 사라진다.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특히 중요한 인물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면 가치가 크게 상승한다. 케네디의 집안에 있던 줄자를 4만8875달러에 구입한 사람은 맨해튼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후안 몰리넥스였다. 그는 ‘줄자를 사고 맨 먼저 내가 제정신인지 재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다. 줄자의 내력 때문에 좋아한 사람보다 줄자의 실용성을 좋아한 사람이 현명하거나 이성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애매하다. 누군가 사용했던 물건을 비싸게 사는 이유는 물건이 특별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무언가 발생하였고, 그 물건을 접촉하면 그 사람의 본질이 흡수된다고 믿는다.” -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폴 블롬

광고에 비용이 비싼 유명한 탤런트가 등장하는 것은 그 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탤런트라 잘 생겨서? 잘생긴 사람은 정말 많다 하지만 잘생긴 것으로는 소용없다 유명하여야 한다. 이런 유명인에 대한 집착은 우리 에게만 해당한 것은 아니다. 영국인 36%가 병적일 정도로 유명인들에게 집착한다고 한다. ‘유명인 숭배증(Celebrity Worship Syndrome·CWS)’이란 병명이 공식적으로 생길 정도다.

왜? 그것은 유명하다는 것이 권력자란 뜻이고, 과거에는 권력자의 미세한 표정을 구별하고 기억하는 건 생존을 위한 최고 수단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의 손길이 스친 것은 그에게서 나온 뭔가가 스며든다고 믿는다. 모조품 보다 진품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동일한 그림도 유명한 사람이 직접 그린 그림에는 그 사람의 무언가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은 음악도 유명한 연주가의 것에는 뭔가가 스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지 클루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조지 클루니의 스웨터를 얼마에 사실 겁니까?" 답변은 괜찮은 가격 이었다. "당신은 스웨터를 되팔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면 가격은 더 올라간다. 그런데 ”당신에게 스웨터를 드리기 전에 그것은 완벽하게 세탁될 것입니다" 라고 하면 가치는 급락한다. 클루니를 완전히 씻어 버렸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힘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힘’ 하면 생기론이 유명하다. 고대의 과학자는 생명력이 우주에 퍼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세기말의 생물학자들도 생명체에는 쪼개면 없어지는 독특한 생기(vitality)가 있다고 믿었고, 이중에서 생기론자(vitalism)들은 생명체가 죽을 때 없어지고 마는 생기를 검출하려고 애를 썼기도 했다. 생기론의 다른 면이 자연 발생론일 것이다. 지저분한 음식 등에서 쥐와 같은 생명체가 저절로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스퇴르 멸균실험을 통해 폐기 되었다. 하지만 그 습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화식을 하면 생기가 없어지고 비타민 등 몸에 좋은 성분이 마구 파괴되어 몸에 나쁘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양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좋아진 점이 많다는 것이 최종적인 연구 결과의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맛도 들지 않는 닭으로 된 영계백숙을 찾고 아직 풋기가 사라지지 않는 새싹을 생기가 가득한 특별한 음식으로 여기면서 찾기도 한다.

동일한 스포츠 중계를 생방송이라고 하면 집중하고 즐겨도 녹화방송이라면 그 결과를 전혀 모른다고 하여도 열기가 확 떨어진다고 한다. 생방송은 자신의 응원이 TV를 통해 운동장에 뛰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지만, 녹화방송은 이미 끝난 게임이라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애니미즘 현대에는 이런 본질주의를 완전히 극복하기 힘들 것 같다.
"나는 기도가 하나님을 변화시킨다기보다는 나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보다는 나의 마음을 바꾸고 나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켜 그야말로 아무것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무욕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받아들이게 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기도는 이제 언어보다는 침묵의 행위이어야 한다. 아전인수 식 신앙관, 하나님을 편파적이고 무자비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기도, 아집과 편견을 조장하는 기도는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그런 편리하고 편협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면 들어주고 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어떤 이의 기도는 들어주고 어떤 이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들어줄 힘이 있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들어주지 않고 우리를 절망으로 모는 그런 하나님은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니다. 지진의 엄청난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않은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무신론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하고 인간다운 일일 것이다. 기도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 하는 하나님, 왜 안 들어 주시냐고 원망과 울부짖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이제 잊어버리자. 당분간 무척 불안하고 허전하겠지만 더 큰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의 영성가 엑카르트는 “나는 하나님을 떠
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고,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넘어서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하나님을 괴롭히지 말고 놓아주자." (길희성, '하나님을 놓아주자')
영화 '그래비티'가 아카데미상 7개 부분에서 수상했다고 한다. 안타깝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혼자라도 가려고 예매를 했으나 '내가 지금 영화 볼 땐가'라고 자책하며 취소했었다. 그때 갔었어야 했다 ㅠ ㅠ 그런데 혹시 아카데미상 수상 기념으로 극장에 다시 걸린다면... 갈 수 있을까? 글쎄. 아마 같은 이유로 못가지 않을까? 인생이 그렇다.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자. 도착지는 나와있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를 거쳐서 그 목적지에 이르렀는지....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치명적인 결함이다.

2014년 3월 2일 일요일

페친 김태용 님이 소개한 김성근 감독이 한 이야기

“재능이나 지식이 없어도 내가 가진 걸 잘 활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실패가 많을수록 강하다. 고민이 있을 때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다. 고민을 이겨내야 한다. 집념을 가지고 할 수 있다고 믿어라” - 김성근, 現 고양 원더스 독립 야구단 감독

어른들 세대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 전형적인 노력 이데올로기.

딴지일보에서 루저C 라는 이름의 필자는 "한국 사회의 노력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단 글에서 다른 견해를 전한다.


"오로지 개인의 경쟁과 노력, 열정의 광기가 사회 구성원들 삶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한국 사회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지독한 냄새가 밴 공간이라도 오랫동안 머무르면 후각이 무뎌지고 불쾌감을 못 느끼는 것처럼, 우리들은 이미 미쳐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 적응이 되어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미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 후세대에 못할 짓이다. 이 대목에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말한 명언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정상적인 것은 미친 것과 같다. 그리고 가장 미친 짓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만 보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는 보지는 않는 것이다' -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