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5일 화요일
단지 생물학적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연장자에게 권위가 주어지던 시절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나이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었다. 신분, 성별, 지역, 직업 등 다양한 기준을 기초로 권위를 더 혹은 덜 부여받았다. 여하튼 어떤 조직에서건 다른 기준보다 나이에 의한 구분이 중요한 경우가 많긴했다. 사실 그게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쉽고도 효율적인 방편이다. 나이는 누구나 먹게되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질서가 유지된다면, 연장자를 공경하는 젊은이들도 나중에 자신도 공경받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느리게 변하는 사회, 지식 축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 연장자들이 축적해놓고 있는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한 지식은 공동체 유지에 긴요했을 것이다. 실질적인 지식 뿐 아니라 지혜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식=힘=권위 아니던가. 권위에 대한 인정 및 존중은 연장자 뿐 아니라 교사, 선생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서 지식은 금새 낡게되고,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양해졌다. 지식의 민주화? 그렇다고 연장자의 권위, 존중 문화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인간은 자신도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연장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지식을 가지고 연장자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드는 경우가 있다. 부지런히 최신 지식, 정보를 흡수하면서 업데이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업그레이드는 쉽지 않다. 사람의 사고구조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시대의 한계, 세대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몇몇 최신정보를 갖추고 있다고 한들, 사고구조의 업그레이드 없이는 변화된 세상에서 권위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권위는 차라리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설픈 최신 지식으로 권위를 유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혜에서... 지혜를 갖춘 사람들을 찾긴 쉽지 않다. 절대빈곤 등 즉각적으로 닥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세대에, 돌격적,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성장,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를 익혀왔던 세대들은 삶의 문제, 역사의 문제를 성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화된 사회, 복잡성이 극도로 증대된 사회에 대한 지혜를 듣기 힘든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생활, 사회가 갖는 본원적인 문제들은 비슷하기도 하다. 어떤 지혜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깊이 있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설익은 생각이다. 격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써내려간... 이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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