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은 국가의 역할, 국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경찰국가, 법치국가, 복지국가, 안전(보장)국가, 예방국가, 규제국가, 조종국가... "안전"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중시된다. 하지만 위험도 위험나름이고 안전도 안전 나름이다.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안전, 위험은 정말이지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무슨 대단한 전문지식이나 이해가 필요하지 않는. 사회학자들이 위험사회 같은 개념으로 분석하기 좋아하는 그런 복잡하고, 좀 분석이 필요한 그런 위험이 아니라...
예를 들어 오늘자 기사를 보라.
"한국 산재 사망자 10만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
산재 발생률은 떨어지지만 사망자는 잘 안줄어여성 임금 남성의 60%…비정규직 비율도 절반
최근에 계속 보고 있는 웹툰 "송곳"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의 '위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재해도 그렇지만 각종 안전 사고들 대부분 "인재" 요소가 크다. 후진국형. 그러니 과학과 기술의 본질을 성찰하자는 논의 따위는 매우 사치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 무슨 참여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 같은 소리는 여전히 2014년에도 사치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기본적인 삼권분립, 법치주의, 정당정치에 대한 이해마저도 천박한 수준인데... 무슨...
이러니 서구 사회과학의 이론과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을 분석하려고 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식사회....는 개뿔...
물론 서구 "선진국"에도 인재, 안전사고는 있고, 부패도 있고, 인종차별, 테러 같은 단순한 사회문제도들도 있다. 그들이 선진국인 것은 그런 문제들이 예외적으로 처리되고 일상적으로는 상식, 원칙, 제도가 정한 바대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선진국이 못되는 것이고...
대단한 제도, 지식, 이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90년대 말 거대 사고들이 연달이 발생하면서 위험 논의가 활발했지만 여전히 "인재"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학, 기술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위험성, 불확실성,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 유지되는 현대 사회의 본원적 불안정성에 대한 성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급한 일들이 눈에 보이니까... 과학, 기술 위험의 대표적인 사례인 원자력 문제만 하더라도... "원자력 마피아" 같은 쪽으로 문제를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고. ...
물론 규제 지식, 정책 지식은 필요한, 복잡한 정책 분야들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상식, 원칙의 회복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얘기만 晝夜長天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이 중요하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컨대 법치주의, 법치국가, 공정국가가 기본 중 기본이지만, 당장 복지국가, 사회정책도 긴급하잖은가. 생명윤리 문제도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잖은가. 세월호 같은 사건이 터지면 첨단 이슈들을 다루는 연구와 접근이 사치스러워보이지만 그런 주제도 엄연히 한국의 현실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인재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핵심은 사실 정부, 그리고 민관커넥션("관피아")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규제당국의 무능력, 비리 등에 초점을 맞추면 그 대안은? 국가, 규제당국을 고쳐쓰기 보다는 민영화로 귀결되기 쉽다. 하지만 이번 구조 작업에서도 민영화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구조 계약을 맺은 "언딘"을 기다려야 했다는.... 미국은 전쟁도 민간에 위탁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위험, 안전에 대한 욕구의 증대, 국가와 당국의 무능력은 안전의 영리화, 민영화로 이어질 지도 모르겠다. 개별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규제 완화와 잘 어울린다. 당국의 무능 질타에 좃선 류 들도 앞장서는데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대개 국가는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편인데.... 관피아들도 규제를 양산했다가 퇴직하면 관련 규제기국에 취업하는 것 아닌가? 국가 기국의 확장? 혹은 규제 기구의 확장?
그런 접근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규제국가의 등장이 국가의 후퇴는 아니라는...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실제로 국가가 발을 빼는 경향이 관찰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일자리를 만들려는? 측근들 일자리 챙겨주기?
생명윤리, 생명과학 규제와 관련해선 어떨까? 국가가 발을 빼긴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국가의 규제력이 강하게 발휘될 것 같다.
여하튼 한국은 국가의 울타리만 벗어나면 공공성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더더욱 국가, 그리고 대통령에 목을 매다는 것 같다.
페친 선대인 님의 얘기:
"이명박정부 시절 선령 규제 완화 이후 15년 이상 노후 선박 비중이 두 배로 증가(29%--->63%). 그것이 이번 사고의 한 배경이 됐죠. 숭례문 경비 책임을 서울시에서 중구청으로 넘기고, 야간경비를 없앤 상태에서 이명박이 2006년 숭례문 개방한 것이 숭례문 화재를 부른 것처럼. 무분별한 규제 완화는 이처럼 매우 심각한 사고와 피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일률적인 규제 완화를 부르짖을 게 아니라 오히려 건강, 안전, 환경 등을 중심으로 필요한 규제를 강화하거나 오히려 재정비해야 합니다."
2014년 4월 30일 수요일
2014년 4월 29일 화요일
"사회학"의 효용성, 사회학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적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사회학 "연구"의 경우는 좀 구분해서 봐야 할 것 같다. 구체적 연구 대상에 대한 전문 지식이 갖는 효용성이 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난, 위험 등을 다루는 사회학 연구의 효용성은 결코 작지 않다. 세월호 사건 이후 이루어지는 담론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회의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인데, 그 중에서 사회학적 접근과 지식이 갖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시대진단, 사회변동 등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 역시 독특한 효용성이 있다. 포괄적, 거시적 접근이 갖는 장점.
과학사회학의 경우.... 예컨대 과학 정책, 과학 거버넌스에 대한 연구에 기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이론 사회학, 사회이론 혹은 사회진단과 연결되면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고...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시대를 진단한다? 지식사회?
한국의 현실은 지식사회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 세월호...
위험사회? 기능적 분화된 사회?
(정몽준 아들이 표현한대로) "미개"한 사회인데... 뭐 이렇게 고급스러운 개념이 필요할까 싶다.
아니면 "미개"한 상태가 왜 미개한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미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식적인 일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서양에서 "기능적 분화" 이후가 시대진단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면 - 탈분화, 재분화.... 과잉통합... 특히 최근에는 경제에 의한 과잉통합. 예컨대,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기술과학"technoscience같은 표현이 설득력있게 등장한다던지...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능적 분화라는 외양,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탈분화가 지배적이었다. 오랫동안... 정치에 의한 과잉통합. 최근에는 경제에 의한... 과학,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양에서 최근에 최신 경향으로 논의되는 technoscience, 경제에 의한 과잉통합 경향이 오랫 동안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분화, 혹은 기능 체계들간의 분화 경향도 관찰되는 것이다.
"생명윤리" "과학 거버넌스"각종 제도들은 사실 체계 간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체계통합의 메커니즘. 탈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이다. Weingart의 Die Stunde der Wahrheit 역시 그런 논지고. Boundary organization... boundary work... trading zone...
물론 그런 경향이 한국에도 있다. 하지만 원래 탈분화 경향이 강했던 터라 새삼스럽진 않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오히려 과학과 다른 체계들과의 분화 관계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 체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식적인 일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서양에서 "기능적 분화" 이후가 시대진단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면 - 탈분화, 재분화.... 과잉통합... 특히 최근에는 경제에 의한 과잉통합. 예컨대,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기술과학"technoscience같은 표현이 설득력있게 등장한다던지...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능적 분화라는 외양,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탈분화가 지배적이었다. 오랫동안... 정치에 의한 과잉통합. 최근에는 경제에 의한... 과학,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양에서 최근에 최신 경향으로 논의되는 technoscience, 경제에 의한 과잉통합 경향이 오랫 동안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분화, 혹은 기능 체계들간의 분화 경향도 관찰되는 것이다.
"생명윤리" "과학 거버넌스"각종 제도들은 사실 체계 간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체계통합의 메커니즘. 탈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이다. Weingart의 Die Stunde der Wahrheit 역시 그런 논지고. Boundary organization... boundary work... trading zone...
물론 그런 경향이 한국에도 있다. 하지만 원래 탈분화 경향이 강했던 터라 새삼스럽진 않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오히려 과학과 다른 체계들과의 분화 관계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 체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2014년 4월 28일 월요일
미야지마 교수의 책 "양반"의 논지를 페친 강창래 님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오늘 읽은 책은 미야자마 히로시의 <양반>입니다.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문서를 분석한 조선시대 양반의 삶이 보입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 전혀 낯설지 않다. 잘못된 입시제도를 함께 고칠 생각은 않고, 강남으로 자식을 밀어넣지 못해서 이사가지 못해서 안달이잖은가. 상향적 평등주의라고나 할까. 박권일 씨는 부자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평등주의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적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삼고,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삼는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필연적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들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오늘 읽은 책은 미야자마 히로시의 <양반>입니다.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문서를 분석한 조선시대 양반의 삶이 보입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겠군요.
조선이 처절하게 망한 것은 모두가 양반이 되려 했기 때문이다. 모순된 제도를 바꾸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모순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했던 결과로군요. 그 내용은 놀랍지만 결론은 그리 낯설지 않군요. 모순이 있다면 저항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는데, 모두가 다 함께 그 모순에 적응해버렸다니! 지금 우리 모습이 아닌가요?"
그렇다. 전혀 낯설지 않다. 잘못된 입시제도를 함께 고칠 생각은 않고, 강남으로 자식을 밀어넣지 못해서 이사가지 못해서 안달이잖은가. 상향적 평등주의라고나 할까. 박권일 씨는 부자들에게 위험하지 않은 평등주의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적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삼고,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삼는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필연적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들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처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답답했는데 그 원인을 시원하게 설명했다. 사회과학 전문가들이 이런 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법인데... 듣고 나면 뻔한 이야기인것 같지만 막상 처음엔 잘 생각나지 않는.... 상식에 도전하는 이런...
박상훈 선생님이 생각하는 국가가 뭔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목도하는 건 민간기업에 의존하지 않으면 해상구난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형해화된 국가라는 껍데기일 뿐이다. 이건 강한 국가가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한 국가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체제’와 ‘피해자’가 이토록 무매개적이고 원초적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국가와 피해자가 직접 마주 서야 하고 원망이든 기대든 분노든 모두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 ‘전도된 국가주의’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집단의 이름도 소속 조직도 내세울 수 없는 자원봉사자 개인 이외 누구도 허용되지 않는, 이 기묘한 비정치적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 국가와 개인만 있고 그 사이가 텅 빈 공간처럼 되어 있는 사회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에 취약하다. 다양한 자율적 결사체들이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중간집단 내지 매개집단의 역할을 얼마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느냐에 따라 현대 민주주의의 질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에서 시민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의 동의어는 듣기만 그럴싸한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개인화된 대중사회에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여론이 되는데,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결사체의 기반이 약할수록 맹목적 도덕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더 도덕적일 가능성은 줄어든다. 죄의식과 선의가 인간 공동체의 토대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내면적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원되고 강요될수록 선한 사회의 기반은 약해진다.
이택광 선생은 이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이런 논쟁 재미있네.
"개인과 국가가 직접 대면하는 상황을 좌파는 혁명적 상황이라고 부른다. 과연 지금이 그런 상황인가. 강한 국가가 있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강한 대통령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택광 선생은 이에 대해서 조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이런 논쟁 재미있네.
박상훈 선생님이 생각하는 국가가 뭔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목도하는 건 민간기업에 의존하지 않으면 해상구난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형해화된 국가라는 껍데기일 뿐이다. 이건 강한 국가가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한 국가이다."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학위를 끝냈거나 곧 끝낼 사람들과 연락을 했다.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요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뵙고 왔다. 아흔을 넘기셨고... 야위신... 여러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방학에 놀러가곤 했었는데... 대학 때 혼자 다녀왔던 생각도 났다. 2학년 때였나. 외로움을 찾아다녔던 그 무렵... 아. 갑자기 그 시절이 그립다...
기아는 오늘 졌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LG에게 위닝 시리즈를 선사했다. 기특하다. 다행하게도 경기를 보진 못했다. 8회초 1점을 내서 1 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8회말 두 점을 줬고, 9회 초 결정적인 득점 기회가 있었으나 놓쳤나보다. 전형적인 약팀의 모습이다. 일찍 경기가 끝난 덕에 야구를 기웃거리지 않아서 감사하다.
사회과학 연구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해석'이... 다양한 해석 가능성 중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의미가 수시로 바뀐다는데 있다.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가... 결론을 내려놓고 그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가는 것 같다. 참 더럽다. 짜증난다.
짜증난다. 이 상황이...
대한민국의 상황이 짜증난다. 그 천박함이... 고작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국가들을 부러워한다. 무슨 대단한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게 웃길 정도로... 천박함.... 세련되지 못함... 사실 큰 차이가 아닐 수 있는데, 결코 작지 않다. 결론, 의미, 해석의 방향... 너무 뻔하다. 뻔한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래. 한국은 천박하다.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만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할까? 고작 그 얘기를... 해야할까? 조금만 더 세련되자? 조금만 더 상식을 생각하고, 원칙을 지키고, 뭐 그런?
사회과학 연구가 재미있으려면... 상식이 된 주류적 접근에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상식이 상식이 아니라면... 그래서 상식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꼰대스러운 학문인가... 그건 무슨 대단한 분석이나 어려운 개념, 이론이 필요하지도 않는 그런 상황 아닌가?
하지만... 그 뻔함 속에서도... 신선한 접근은 가능한다. 예를 들어... 규제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뻔한 연구 분야같지만... 그 속에서도 흥미로운 접근이 있다. 예를 들어 지원 정책은 규제와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지원정책도 규제적 성격이 있다는... 그래서 규제개혁을 얘기할 때 지원정책도 고려해야 한다는.... 좀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신선한 접근이고, 또 실천적 함의도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로 한국 사회가 지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과연? 황우석 사건 때도 그런 얘기 들은 것 같은데? 한편으로 한국 사회는 이미 많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고... 다른 한 편 한국 사회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고, 바뀔 수도 없다. 모순 같지만 그게 현실이다. 아니 현실인 것 같다. 결론은 관점의 문제라는... 무엇을 강조하느냐... 관점... 관찰... 관찰자... 관찰자 시점에 따라서 완전히 달리 보이는... 앞이 뒤고 뒤가 앞이고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올라가고 있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은 돌아가고...
요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뵙고 왔다. 아흔을 넘기셨고... 야위신... 여러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방학에 놀러가곤 했었는데... 대학 때 혼자 다녀왔던 생각도 났다. 2학년 때였나. 외로움을 찾아다녔던 그 무렵... 아. 갑자기 그 시절이 그립다...
기아는 오늘 졌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LG에게 위닝 시리즈를 선사했다. 기특하다. 다행하게도 경기를 보진 못했다. 8회초 1점을 내서 1 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8회말 두 점을 줬고, 9회 초 결정적인 득점 기회가 있었으나 놓쳤나보다. 전형적인 약팀의 모습이다. 일찍 경기가 끝난 덕에 야구를 기웃거리지 않아서 감사하다.
사회과학 연구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해석'이... 다양한 해석 가능성 중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의미가 수시로 바뀐다는데 있다.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가... 결론을 내려놓고 그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가는 것 같다. 참 더럽다. 짜증난다.
짜증난다. 이 상황이...
대한민국의 상황이 짜증난다. 그 천박함이... 고작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국가들을 부러워한다. 무슨 대단한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게 웃길 정도로... 천박함.... 세련되지 못함... 사실 큰 차이가 아닐 수 있는데, 결코 작지 않다. 결론, 의미, 해석의 방향... 너무 뻔하다. 뻔한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래. 한국은 천박하다.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만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할까? 고작 그 얘기를... 해야할까? 조금만 더 세련되자? 조금만 더 상식을 생각하고, 원칙을 지키고, 뭐 그런?
사회과학 연구가 재미있으려면... 상식이 된 주류적 접근에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상식이 상식이 아니라면... 그래서 상식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꼰대스러운 학문인가... 그건 무슨 대단한 분석이나 어려운 개념, 이론이 필요하지도 않는 그런 상황 아닌가?
하지만... 그 뻔함 속에서도... 신선한 접근은 가능한다. 예를 들어... 규제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뻔한 연구 분야같지만... 그 속에서도 흥미로운 접근이 있다. 예를 들어 지원 정책은 규제와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지원정책도 규제적 성격이 있다는... 그래서 규제개혁을 얘기할 때 지원정책도 고려해야 한다는.... 좀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신선한 접근이고, 또 실천적 함의도 있다.
2014년 4월 25일 금요일
페친 김우재 님이 소개한 기사, 그리고 그의 짧은 논평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할렛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무엇을 한 사건의 원인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한 사건에 대해 수많은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때, 그 원인들 중 이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곧 “일반화 시킬 수 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자연과학이 사회과학과 갈리는 지점이다. 사회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데, 카의 이런 해결책은 그 한 사례다.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기사에 소개된 사례다.
"1937년 5월 6일, 뉴저지의 레이크허스트 해군기지에 계류 중이던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그는 36명의 사상자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의 가장 큰 원인은 비행선을 공중에 띄우기 위해 비행선 내부에 존재했던 수소 기체가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할렛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무엇을 한 사건의 원인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한 사건에 대해 수많은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때, 그 원인들 중 이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곧 “일반화 시킬 수 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자연과학이 사회과학과 갈리는 지점이다. 사회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데, 카의 이런 해결책은 그 한 사례다.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기사에 소개된 사례다.
"1937년 5월 6일, 뉴저지의 레이크허스트 해군기지에 계류 중이던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그는 36명의 사상자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의 가장 큰 원인은 비행선을 공중에 띄우기 위해 비행선 내부에 존재했던 수소 기체가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힌덴부르그 사건의 원인을 무엇으로 돌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힌덴부르그가 구름을 통과하면서 그 금속 표면에 전하가 축적되었고, 이 때문에 발생한 정전기의 불꽃이 수소기체를 발화시켜, 폭발이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곧, 이들은 힌덴부르그가 폭발한 원인으로 정전기에 의한 불꽃을 꼽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폭발을 막기 위해서는 불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우리가 이 사건에서 얻어야 할 바른 교훈이었을까요?
거대한 금속 장비가 구름을 통과할 경우 전하가 축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불꽃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금속 장비가 역시 금속으로 이루어진 정거장에 착륙할 때에도 마찰에 의해 불꽃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꽃이 일어난다고 해서 항상 폭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수소 기체는 폭발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수소 기체가 가득 차 있는 풍선은 항상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곧, 힌덴부르그 사건의 보다 일반적인 원인은 바로 비행선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소 기체인 것입니다. 수소로 가득 차 있는 비행선을 하늘에 날리는 한, 비록 매 번 다른 이유에 의해 그 비행선이 폭발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재난이 발생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불꽃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 아니라 수소기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좋은 글. 이런 글이 필요하다. 이런 시가 이런 분석이 필요하다. 무조건 비판만할 일이 아닌 것이다. 국가, 행정조직은 이렇게 돌아간다. 책임, 돈.... 명확하게 해 줘야하는데.... 민영화 주장은 한 마디로 자주 일어나지 않는 재난을 대비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장비를 다 갖추어야 하느냐. 공적 기구는 최소화하고 사고, 재난이 날때면 필요한 부분을 민간 업체에 전담시키면 된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막상 재난이 발생하면 이러저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때로는 불필요해보이는 비용까지도 감수하면서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 바로 선진국이다.
관료와 돈, 그리고 대통령의 책임
"관료는 마음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확실하게 권한이 주어져야 일을 하는 것이 관료다. 이 점은 비난해서는 안될 일이다. 공무원으로 복무하는 것도 힘든 지경인데,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자신의 권한을 넘어 자원과 돈을 동원하지는 못한다. 이럴 때 분명히 상급 결정권자, 최고 권력자가 명확한 지시를 해 줘야 한다. (...)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박근혜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지키기 힘든 애매한 약속만을 남발하고서는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모든 관료들이 옷 벗을 줄 알라고 협박을 한다. 이렇게 되면 돈 쓰지 말라는 얘기이다. 아무것도 규정에 의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게 된다.(...)
아직 우리 정부는 이런 사고가 터졌을 때 아무런 지시나 보장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장비와 자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 완벽한 시스템은 아직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터졌고 해결을 해야 한다면,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명확해진다. (...)
관료와 돈, 그리고 대통령의 책임
"관료는 마음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확실하게 권한이 주어져야 일을 하는 것이 관료다. 이 점은 비난해서는 안될 일이다. 공무원으로 복무하는 것도 힘든 지경인데,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자신의 권한을 넘어 자원과 돈을 동원하지는 못한다. 이럴 때 분명히 상급 결정권자, 최고 권력자가 명확한 지시를 해 줘야 한다. (...)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박근혜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지키기 힘든 애매한 약속만을 남발하고서는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모든 관료들이 옷 벗을 줄 알라고 협박을 한다. 이렇게 되면 돈 쓰지 말라는 얘기이다. 아무것도 규정에 의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게 된다.(...)
아직 우리 정부는 이런 사고가 터졌을 때 아무런 지시나 보장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장비와 자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 완벽한 시스템은 아직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터졌고 해결을 해야 한다면,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명확해진다. (...)
양쪽 모두 마찬가지다 .
우리는 참으로 나쁜 대통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014년 4월 24일 목요일
기록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놓쳤다. 세월호 관련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침에 라디오 듣다가 생각났을까? 라디오 방송에 나온 이가 이런 얘길했다. 정부 비난하는 게임을 그만둬야 한다고. 한국 사회의 문화가 문제라고. 안전불감증 같은.... 송영선 씨도 그런 논지의 얘길했다가 욕을 엄청나게 먹었는데... 정부 혹은 국가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동시에 여러 사회 문제를 공적 메커니즘이 아닌 개인, 가족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경향도 보이는 이중성은 참 독특하다. 여하튼... 이런 주장이 일리가 없진 않지만 이 시점 이 상황에서 강조하기엔 뭣한 이야기다.
아 생각났다. 어제 저녁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느즈막히 70을 넘긴듯한 남성 노인 둘이 들어섰다. 술을 마신듯... 나이 많은 쪽 노인네가 온 카페가 떠들썩할 성량으로 욕까지 섞어가면서 나이 적은 노인을 야단하는게 대화의 핵심이었다. 내가 원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연장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어제 같은 경우는 정말이지... (이하 심적 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생략)... 도무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저 무식함, 천박함, 미개함(그렇다. 정몽준 아들이 썼다는 그 표현. 미개함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표현이네요. 정몽준 회장님, 국회의원님 아드님! 아시겠어요?). 그러면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생각도 했다. 무슨 대단한 씨맨십, 직업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심만 갖췄어도 그렇게 혼자 살 마음을 먹지 않았을텐데... 그들은 대부분 '구원파' 신도라고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도 가지신 분들이 그렇게 살겠다고 서두르셨을까.... 원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이웃을 더 배려해야할텐데... 교회에서도 나의 구원을 제일 우선시하도록 배웠을 테니...
안전을 얘기하는데.... 발생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조심하라... 글쎄. 그게 될까? 위험연구에서 자주 쓰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How safe is safe enough? 너무 많은 조심은 새로운 위험을 부른다. 조심을 강조하는 이들은 언제나 옳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더 의기양양한다. 시민단체들. 거 봐.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않았냐고. 물론 지나친 낙관,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타인의 위험을 방치하는 행위는 용납하기 힘들다. 하지만 안전을 강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이가 하루 두 끼 먹더라도 안전한 사회에 살고 싶다는 얘길 해서 공감을 얻기도 했나 본데, 과연 그럴까?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안전에 속한다. 결국 어떤 안전을 더 중시하느냐의 문제다. 완전한 안전? 어짜피 불가능하다. 물론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안전을 더 강조하는 일이 필요하다. 백번....
여하튼... 규제 강화나 직업윤리 같은 복잡한 메커니즘이 아닌 그저 원칙, 상식에 충실하고 타인에 대한 상식적인 배려 정도만 갖추고 있었어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 것이다.
아 생각났다. 어제 저녁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느즈막히 70을 넘긴듯한 남성 노인 둘이 들어섰다. 술을 마신듯... 나이 많은 쪽 노인네가 온 카페가 떠들썩할 성량으로 욕까지 섞어가면서 나이 적은 노인을 야단하는게 대화의 핵심이었다. 내가 원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연장자들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어제 같은 경우는 정말이지... (이하 심적 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생략)... 도무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저 무식함, 천박함, 미개함(그렇다. 정몽준 아들이 썼다는 그 표현. 미개함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표현이네요. 정몽준 회장님, 국회의원님 아드님! 아시겠어요?). 그러면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생각도 했다. 무슨 대단한 씨맨십, 직업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심만 갖췄어도 그렇게 혼자 살 마음을 먹지 않았을텐데... 그들은 대부분 '구원파' 신도라고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도 가지신 분들이 그렇게 살겠다고 서두르셨을까.... 원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이웃을 더 배려해야할텐데... 교회에서도 나의 구원을 제일 우선시하도록 배웠을 테니...
안전을 얘기하는데.... 발생가능성이 있다면 일단 조심하라... 글쎄. 그게 될까? 위험연구에서 자주 쓰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How safe is safe enough? 너무 많은 조심은 새로운 위험을 부른다. 조심을 강조하는 이들은 언제나 옳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더 의기양양한다. 시민단체들. 거 봐.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않았냐고. 물론 지나친 낙관,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타인의 위험을 방치하는 행위는 용납하기 힘들다. 하지만 안전을 강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이가 하루 두 끼 먹더라도 안전한 사회에 살고 싶다는 얘길 해서 공감을 얻기도 했나 본데, 과연 그럴까?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안전에 속한다. 결국 어떤 안전을 더 중시하느냐의 문제다. 완전한 안전? 어짜피 불가능하다. 물론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안전을 더 강조하는 일이 필요하다. 백번....
여하튼... 규제 강화나 직업윤리 같은 복잡한 메커니즘이 아닌 그저 원칙, 상식에 충실하고 타인에 대한 상식적인 배려 정도만 갖추고 있었어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 것이다.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나도 동의한다. 페친 양희송 님의 글.
"나는 짐 월리스의 아래 주장에 동감한다. 대안은 좌우가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go deeper)"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세가지 분명한 사실에 관한 책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그저 영혼의 운명에 관한 문제만 아니라 그 이상을 다룬다. 회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관계있는 것이다.
둘째, 신앙은 정치를 초월하며,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에서 흔히 주장하는 바와 달리 기독교는 선거 때 우파에서 내세우는 이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좌파의 정치적 입장으로 재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적 우파에 맞서기 위한 종교적 좌파가 필요한 게 아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공적인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책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도덕적인 기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 더 깊이 파고 들어가라." 공동선은 당파적 정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다룬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 우리의 개인적 삶과 가정생활, 우리의 직업적 소명, 교회의 선교와 증언, 사회 운동의 도덕적 힘, 공적인 삶에서 예언자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독립적인 종교인들의 진실한 모습으로부터 공동선이 만들어진다.' (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IVP, 2014), 29-30.)"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해양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민·관 커넥션이 안전 불감증의 시발점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해양수산부 공무원들과 유관 단체장을 꿰찬 전직 관료들이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이익을 챙기고, 여기에 해운업계도 결탁해 공생 관계를 이루면서 선박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민·관에 걸쳐 있는 '해양 마피아'가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자기들만의 무대를 만들면서 해양 분야가 복마전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관에게 일감 몰아주기, 인사 잡음, 뒷돈 챙기기와 같은 고질병이 방치되는 사이 선박 안전 점검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황우석 사태 때도 과학기술동맹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치-과학-언론의 동맹같은... 비판과 견제가 필요한데... 역할 분담, 관계 조정, 메타거버넌스... 그런 점들이 필요한 것 같다. 문화? 문화는 그런 것들까지 포함하는 것인가? 이런 행위자 중심적 설명은 굉장히 선명하긴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관련 조직들을 장악해서 다 말아먹고 있는 것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황우석 사태 때도 과학기술동맹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치-과학-언론의 동맹같은... 비판과 견제가 필요한데... 역할 분담, 관계 조정, 메타거버넌스... 그런 점들이 필요한 것 같다. 문화? 문화는 그런 것들까지 포함하는 것인가? 이런 행위자 중심적 설명은 굉장히 선명하긴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관련 조직들을 장악해서 다 말아먹고 있는 것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황우석 사태 때도 나름 합리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이들도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해를 전파하는 것을 보고 '헐'했었는데....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을 본다. 평소엔 멀쩡하던 사람들이 마치 판단력을 잃은양... 아니 그러고보면 좌파들은 원래 '음모론'에 매우 강한 사람들 아닌가 싶다. 지배세력이 정보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독점하면서 자신들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통제한다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 물론 그런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지... 정도가 문제인데... 세월호 침몰에 대해서는 음모론이나 그런 취지의 주장들은 그 근거가 매우 약한 것 같다. 천안함 침몰의 경우나 얾마 전까지 논란이 되었는 '무인기'의 경우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한 쪽으로 쏠린 지식, 주장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쪽으로 치우치게되는 지식,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체가 나름 기능하는 바가 없진 않다. 여러 (합리적) 의문점들을 더 엄밀하게 검증하게 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그럴 때일수록 균형을 잡게 해주는 핵심적 역할은 균형잡힌 전문지식에서 찾아야 하는 것 같다. 한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인들도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음모론에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반면에 전문가적 식견으로 탁월한 분석과 비평을 하는 분들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주강현 샘의 페북 글 (침몰하는 대한민국호에서)'.
이런 문장이 있다. "바다의 품격이 없는 민족인데 무슨 바다안전의 품격을 원하는가. ... 본디부터 바다를 ‘갯것’이라 하대하다가 갑자가 타이타닉호 침몰과 선장의 위엄을 비교한다. 비정규직,비전문가로 가득한 낡은배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무슨 품격을 기대하겠는가. ... 한국에서 카훼리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지적한 논의가 없었다. 본디 화물과 승객을 같이 태우는 카훼리는 근본이 불안정한 배다. 그래서 IMO(국제해사기구)에서도 차츰 로로선(승객과 화물이 같이 실리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카훼리 자체가 불안정한 배라는 뜻이다. ... 바다를 잘 모르거나 알려고하지않는 민족, 해양문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약한 민족에게 하루아침에 모든 걸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SNS를 보면 애절한 비탄과 과도한 비난이 난무할 뿐이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재빨리 추스르지않으면 남은 과정이 더 힘들어지고 국격은 외신보도를 통하여 나날이 엉망이 될 것이다."
국격 운운하는 부분은 좀 거슬리지만... 여하튼 이 쪽에도 이렇게 할 일이 많았구나.... 그 많던 전문가들이 지적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던것. 해양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런 접근이 이래서 필요했구나 싶은 것이다.
반면에 전문가적 식견으로 탁월한 분석과 비평을 하는 분들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주강현 샘의 페북 글 (침몰하는 대한민국호에서)'.
이런 문장이 있다. "바다의 품격이 없는 민족인데 무슨 바다안전의 품격을 원하는가. ... 본디부터 바다를 ‘갯것’이라 하대하다가 갑자가 타이타닉호 침몰과 선장의 위엄을 비교한다. 비정규직,비전문가로 가득한 낡은배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무슨 품격을 기대하겠는가. ... 한국에서 카훼리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지적한 논의가 없었다. 본디 화물과 승객을 같이 태우는 카훼리는 근본이 불안정한 배다. 그래서 IMO(국제해사기구)에서도 차츰 로로선(승객과 화물이 같이 실리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카훼리 자체가 불안정한 배라는 뜻이다. ... 바다를 잘 모르거나 알려고하지않는 민족, 해양문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약한 민족에게 하루아침에 모든 걸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SNS를 보면 애절한 비탄과 과도한 비난이 난무할 뿐이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재빨리 추스르지않으면 남은 과정이 더 힘들어지고 국격은 외신보도를 통하여 나날이 엉망이 될 것이다."
국격 운운하는 부분은 좀 거슬리지만... 여하튼 이 쪽에도 이렇게 할 일이 많았구나.... 그 많던 전문가들이 지적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던것. 해양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런 접근이 이래서 필요했구나 싶은 것이다.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지난 십수년 동안 많은 공적 논쟁이 있었다. 정보들이 난무하는... 그 중 스스로 가장 자신있게 판단내릴 수 있었던 경우는 아무래도 '황우석 사태'. 천안함 침몰 논쟁은 덜 그랬고 - 하지만 그들의 처신이 너무 허접해서 결론을 상대적으로 쉽게 유추할 수는 있었다 - , 이번 세월호 침몰의 경우엔 더 모르겠다. 게다가 한국 재난 구조 체계 같은 얘기는 더더욱...
바로 이 이야기다. 합리적이라는 것. 주체, 자율성,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일차 과제다. 일차 과제를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건 겨우 출발일 따름이다. 많은 공공 주제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상충하는 주장에 대해서 어떤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을 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전문지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차과제.
즉 합리적 의심을 하지만 내가 판단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엔 합리적 의심을 거쳐서 전문가적 견해를 따른다. 그래서 페친 홍성수 샘은 이렇게 덧붙인다.
"비판적 시민과 위기상황에서 무조건 책임자의 지시에 따르는건 전혀 다른 문제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책임자의 지시를 신뢰할 수 없게 된게 이번 참사의 또다른 손실이 아닌가 하고요."
합리성, 개인주의, 자율성, 주체 지향의 한계를 인식하기!
아닌게 아니라 내가 본 독일인들은 대개 자신의 아는 분야, 판단할 수 있는 분야와 타인,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해야 할 경우를 매우 잘 그리고 정확하게 구분하는 편이었다.전문가적 권위는 대개 언론이나 전문기관, 전문가조직 등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그러니 대중 토론도 많은 편이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토론이 활발할 뿐.
우리는 둘 다 잘 안된다고 해야할까? 어쩌면 청개구리처럼... 어떨 때 너도나도 전문가 행세를 하고... 어떨 때 너무 순종적이고... 장은주 샘은 후자를 지적하는 것일테지. 홍 샘은 전자를...
한편으로... 누구나 전문가 행세를 한다. 전국민의 전문가화! 믿을 놈 없다. 신뢰 부족. 전문가 집단 정당성 상실. 그래서 내가 알아야겠다. 내가 아는 바를 나눠야겠다. 그러니 SNS가 초고도로 활성화. 어떻게 보면 민주화. 지식의 민주화. 참여 발달. 심지어 선도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것이다. 미개가 아니라 매우 비판적 시민의식의 만개, 만개...
다른 한편으로... 권위와 지시에 너무 순종적. 그네 지지도를 볼 것.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문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절감한다. SNS를 통해서 서로 부딪히는 정보들이 난무한다. 어떤 정보들은 합리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금새 그 허약함이 드러난다. 평소에 나름 합리적 판단을 하는 페친들도 별 근거 없어보이는 주장에 혹하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어떤 주장이 "합리적 의심"의 대상인지 가까운지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방식은 해당 분야를 잘아는, 신뢰할만한 사람의 진술을 좇아가는 것이다. 예컨대 KBS가 7시 경에 이미 속보를 냈다가 그것을 나중에 감췄다는 주장에 대해서 방송국 사정을 잘 아는 김형민 피디가 반박한 것들.
이런 논쟁을 결정짓는 것은 문화나 프레이밍 같은 유연한 개념이 아니라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다. 물론 전문지식이 충돌하는 경우들도 있다.
여하튼 한국에서 전국민의 주목을 끄는 일련의 사태들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가 유언비어 운운할 정도로 다양한 정보들이 난립하지만, 적어도 합리적 외형을 갖춘 전문지식을 갈급해하는 그런 상황은 만들어진 것 같다. 유언비어, 언론플레이, 정보통제 등으로 담론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지식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적 주제로 부상한다.멩박과 그네가 언론과 인터넷, 전문가 등의 발언 통제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것도 모두 이런 사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그네X 지지도가 이렇게 높은 이 비극적 사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하튼 전반적으로 "합리적 사회"로 방향이 잡혀있는 것 같긴 하다. 루만이 아닌 베버, 하버마스적 의미로...
문화, 프레이밍... 그런 접근의 설명력이 강해보이지 않는다. 문화와 프레임을 뚫고서, 다양한 정보, 지식들 사이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골라낼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전문지식의 정치"라고 표현해도 좋을... 한국에 필요한 것은 바로 합리적인 전문성이 아닐런지. 전문지식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문지식의 정치" 그 자체가 하나의 전문지식이다.
페친 장은주 샘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을 더 이상 착하지만은 않게, 좀 더 '삐딱하게' 키워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좋은 시민'은 당연히 잘 규율화된 시민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조건하고 규율을 어기는 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조건 삐딱함이라는 '미덕'은 갖추어야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권위를 의심하기, 편견과 선입견에서 해방되기, 주어진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이를 삐딱하게 키우기, 그것은 아이를 진짜 제 삶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게 진짜 교육이다."
바로 이 이야기다. 합리적이라는 것. 주체, 자율성,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일차 과제다. 일차 과제를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건 겨우 출발일 따름이다. 많은 공공 주제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상충하는 주장에 대해서 어떤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을 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전문지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차과제.
즉 합리적 의심을 하지만 내가 판단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엔 합리적 의심을 거쳐서 전문가적 견해를 따른다. 그래서 페친 홍성수 샘은 이렇게 덧붙인다.
"비판적 시민과 위기상황에서 무조건 책임자의 지시에 따르는건 전혀 다른 문제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책임자의 지시를 신뢰할 수 없게 된게 이번 참사의 또다른 손실이 아닌가 하고요."
합리성, 개인주의, 자율성, 주체 지향의 한계를 인식하기!
아닌게 아니라 내가 본 독일인들은 대개 자신의 아는 분야, 판단할 수 있는 분야와 타인,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해야 할 경우를 매우 잘 그리고 정확하게 구분하는 편이었다.전문가적 권위는 대개 언론이나 전문기관, 전문가조직 등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그러니 대중 토론도 많은 편이 아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토론이 활발할 뿐.
우리는 둘 다 잘 안된다고 해야할까? 어쩌면 청개구리처럼... 어떨 때 너도나도 전문가 행세를 하고... 어떨 때 너무 순종적이고... 장은주 샘은 후자를 지적하는 것일테지. 홍 샘은 전자를...
한편으로... 누구나 전문가 행세를 한다. 전국민의 전문가화! 믿을 놈 없다. 신뢰 부족. 전문가 집단 정당성 상실. 그래서 내가 알아야겠다. 내가 아는 바를 나눠야겠다. 그러니 SNS가 초고도로 활성화. 어떻게 보면 민주화. 지식의 민주화. 참여 발달. 심지어 선도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것이다. 미개가 아니라 매우 비판적 시민의식의 만개, 만개...
다른 한편으로... 권위와 지시에 너무 순종적. 그네 지지도를 볼 것.
ㅍㅍㅅㅅ 기사(?)다. "세월호의 교훈: 시장경제의 이름으로 기업의 도덕성을 희생하지 말라"
"비겁한 선장을 도덕적으로 규탄하고 정부 책임자들을 옷벗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정치가 정말 해야 할 일들은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은 반드시 시민의 안전과 양립해야만 한다. 안전 훈련을 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하면 운수업체는 영업을 멈춰야 하고, 인명사고라도 나면 폐업을 각오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영국조차 기업살인법을 두는 것처럼 산재 발생기업에게는 막대한 영업상의 손해를 줘야 한다. ‘그러면 시장경제의 활력이’ 어쩌고 하다보면, 이 아비규환은 계속될 것이다. 산업화 이후로 한번 항로 변경 없이 달려온 대한민국의 좌표를 바꾸지 않는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
다시 한 번 절감하지만 근대사회가 도덕적으로, 규범적으로 통합되진 않았더라도 도덕, 규범, 문화(?)는 여전히, 매우 매우 중요하다. 뒤르케임이 달리 '직업윤리'를 얘기했을까.
"비겁한 선장을 도덕적으로 규탄하고 정부 책임자들을 옷벗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정치가 정말 해야 할 일들은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은 반드시 시민의 안전과 양립해야만 한다. 안전 훈련을 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하면 운수업체는 영업을 멈춰야 하고, 인명사고라도 나면 폐업을 각오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영국조차 기업살인법을 두는 것처럼 산재 발생기업에게는 막대한 영업상의 손해를 줘야 한다. ‘그러면 시장경제의 활력이’ 어쩌고 하다보면, 이 아비규환은 계속될 것이다. 산업화 이후로 한번 항로 변경 없이 달려온 대한민국의 좌표를 바꾸지 않는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
다시 한 번 절감하지만 근대사회가 도덕적으로, 규범적으로 통합되진 않았더라도 도덕, 규범, 문화(?)는 여전히, 매우 매우 중요하다. 뒤르케임이 달리 '직업윤리'를 얘기했을까.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의 논지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공장이나 일에 관련된 위해와는 달리 새롭게 등장한 위험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위험은 국경을 넘어 생산 및 재생산 전체로 퍼져 나가는 전 지구적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위험은 초국가적이며 비계급적 특징을 지닌다."
옳은 지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렇게 민주적인 위험은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나 인도네시아 쓰나미 같은... 대부분의 위험은 계급적이다. 그것도 매우 계급적이다. 위험을 만들어 내는 맥락도 계급적이고 위험에 노출되는 경향도 계급적이다.
세월호의 경우에도 69세 선장 월급이 270만원, 그리고 계약직이라고 한다. 그 금액에 더 젊은 선장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힘들었을 것이라고... 물론 그런 상황이라고 누구나 그이처럼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더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을 조금 더 들였다면... 부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부자 고등학교라면 아마 이런 일을 결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를 운용하는 청해진해운의 회장(?)은 엄창난 부자라고 한다. 사진작가로도 유명한 이라고. 그의 부와 선장의 월급, 지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러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공장이나 일에 관련된 위해와는 달리 새롭게 등장한 위험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위험은 국경을 넘어 생산 및 재생산 전체로 퍼져 나가는 전 지구적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위험은 초국가적이며 비계급적 특징을 지닌다."
옳은 지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렇게 민주적인 위험은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나 인도네시아 쓰나미 같은... 대부분의 위험은 계급적이다. 그것도 매우 계급적이다. 위험을 만들어 내는 맥락도 계급적이고 위험에 노출되는 경향도 계급적이다.
세월호의 경우에도 69세 선장 월급이 270만원, 그리고 계약직이라고 한다. 그 금액에 더 젊은 선장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힘들었을 것이라고... 물론 그런 상황이라고 누구나 그이처럼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더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을 조금 더 들였다면... 부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부자 고등학교라면 아마 이런 일을 결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를 운용하는 청해진해운의 회장(?)은 엄창난 부자라고 한다. 사진작가로도 유명한 이라고. 그의 부와 선장의 월급, 지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러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014년 4월 21일 월요일
세월호 사태가 보여주는 한국의 문제점은?
그것을 나름 잘 지적하는 글이..."세월호 참사, 더 깊게 생각해볼 것들" (출처: ppss, 글쓴이 capcold)
황우석 사태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추상수준이 높은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그게 한국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1) 일단 문제를 지적하자면... (문화 I)
- 발전주의, 경제적 이윤, 효율성, 국익 최우선주의, 목적을 향해서 단합하길 좋아하는 권위주의...
- 반면에 그것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무시하는 경향, 편의주의적으로...
-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 개인의 권리, 인권...
- 원칙이나 제도를 무시하는 경향...
- 감추는 경향...
- 비정상의 정상화...
- 일탈에 대한 불이익 (disincentives)가 너무 약하다.
-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는 자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너무 약함.
- 공정하지 못함....
- 남의 눈치를 봄
- 권력의 집중 등등.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치들, 접근들, 지향들, 문화들...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지 않는한... 변화는 힘들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전문지식, 기술, 자원 따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후진국은 아니다. 그것을 운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력, 책임감 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후진성을 보인다.
(2) 사회구조적 변화가 이런 후진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오히려 근대적 사회구조의 체계합리성을 더 충실하게 따른다 (사회구조 I)
민주화, 사회체계들의 자율성 강화, SNS 발달 등으로 이전 같으면 듣기 힘들었던, 자발적으로 꼴동 보수가 되려는 인간들의 후진적인 천박한 입장들, 목소리, 담론들이 활발하게 유포될 수 있게 되었다. 구조적으로도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이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나름 진보적인 대통령,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멩박 그네 같은 정권 치하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그럼에도 한국이 후진국이고, 한국이 침몰한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사회구조 II)
황우석 사태 때도 이러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상당히 분화되었고, 안정성, 유연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반드시 긍정적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기능적 분화의 모순과 문제점을 다루는 메커니즘과 문화는 저발전 상태지만 여하튼 사회구조 자체는 매우 분화된 모습을 보인다. 소통 방식의 다양화.... 비록 전통적인 권위들은 도전을 받지만, 그것을 비판하고 대안적 전문지식과 권위있는 지식과 주장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정말이지 한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상상이상으로 큰 것 같다. 이 분노의 에너지, 관심을 풀어낼 대상이 있다는 점이 말이다. 전통적인 방식이 잘 작동했다면 사태는 자체는 잘 정리되었겠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에너지는 묻혀있었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그런 에너지가 대개 축제, 파티, 스포츠 경기, 취미생활 등을 통해서 발산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에너지가 특히 분노와 불신으로 쉽게 결집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국익' 같은 집단적 희망을 중심으로 뭉치기도 하지만... 그런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국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전통적 제도 중심의 소통의 허접함,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노가 인터넷을 통해서 표출되면서 그나마 상쇄되는 것 같다. 물론 인터넷 자체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이용된다. 황우석 사태의 경우 국익 담론의 결집으로...
여하튼 한국 사회의 사회구조적 복잡성, 분화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네 지지도가 여전히 높은, 이 불가사의한 현상.
유체이탈화법, 전지적 대통령 시점의 발언들을 쏟아내며, 도무지 사태파악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런 리더십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언론들이 그 X을 옹호하기 급급한, 관료들은 아부하기 급급한, 게다가 이같은 거대한 실정과 무응에도 지지도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각책임제 국가 같으면 내각 총사퇴해야 할 정도의 큰 사건인데도, 그렇게 많은 분노와 안타까움에도 어떻게 그 최종 책임자는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와중에 이 x을 지지하는 그 심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메르켈에 대한 평가 중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메르켈을 우습게 생각하는 순간, 벌써 진거라는... 어쩌면 그 X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서운 X이다.
그것을 나름 잘 지적하는 글이..."세월호 참사, 더 깊게 생각해볼 것들" (출처: ppss, 글쓴이 capcold)
황우석 사태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추상수준이 높은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그게 한국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1) 일단 문제를 지적하자면... (문화 I)
- 발전주의, 경제적 이윤, 효율성, 국익 최우선주의, 목적을 향해서 단합하길 좋아하는 권위주의...
- 반면에 그것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무시하는 경향, 편의주의적으로...
-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 개인의 권리, 인권...
- 원칙이나 제도를 무시하는 경향...
- 감추는 경향...
- 비정상의 정상화...
- 일탈에 대한 불이익 (disincentives)가 너무 약하다.
-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는 자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너무 약함.
- 공정하지 못함....
- 남의 눈치를 봄
- 권력의 집중 등등.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치들, 접근들, 지향들, 문화들...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지 않는한... 변화는 힘들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전문지식, 기술, 자원 따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후진국은 아니다. 그것을 운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력, 책임감 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후진성을 보인다.
(2) 사회구조적 변화가 이런 후진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오히려 근대적 사회구조의 체계합리성을 더 충실하게 따른다 (사회구조 I)
민주화, 사회체계들의 자율성 강화, SNS 발달 등으로 이전 같으면 듣기 힘들었던, 자발적으로 꼴동 보수가 되려는 인간들의 후진적인 천박한 입장들, 목소리, 담론들이 활발하게 유포될 수 있게 되었다. 구조적으로도 통제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이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나름 진보적인 대통령,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멩박 그네 같은 정권 치하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그럼에도 한국이 후진국이고, 한국이 침몰한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사회구조 II)
황우석 사태 때도 이러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이야기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상당히 분화되었고, 안정성, 유연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반드시 긍정적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기능적 분화의 모순과 문제점을 다루는 메커니즘과 문화는 저발전 상태지만 여하튼 사회구조 자체는 매우 분화된 모습을 보인다. 소통 방식의 다양화.... 비록 전통적인 권위들은 도전을 받지만, 그것을 비판하고 대안적 전문지식과 권위있는 지식과 주장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정말이지 한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상상이상으로 큰 것 같다. 이 분노의 에너지, 관심을 풀어낼 대상이 있다는 점이 말이다. 전통적인 방식이 잘 작동했다면 사태는 자체는 잘 정리되었겠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에너지는 묻혀있었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그런 에너지가 대개 축제, 파티, 스포츠 경기, 취미생활 등을 통해서 발산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에너지가 특히 분노와 불신으로 쉽게 결집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국익' 같은 집단적 희망을 중심으로 뭉치기도 하지만... 그런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국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전통적 제도 중심의 소통의 허접함,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노가 인터넷을 통해서 표출되면서 그나마 상쇄되는 것 같다. 물론 인터넷 자체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이용된다. 황우석 사태의 경우 국익 담론의 결집으로...
여하튼 한국 사회의 사회구조적 복잡성, 분화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네 지지도가 여전히 높은, 이 불가사의한 현상.
유체이탈화법, 전지적 대통령 시점의 발언들을 쏟아내며, 도무지 사태파악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런 리더십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언론들이 그 X을 옹호하기 급급한, 관료들은 아부하기 급급한, 게다가 이같은 거대한 실정과 무응에도 지지도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각책임제 국가 같으면 내각 총사퇴해야 할 정도의 큰 사건인데도, 그렇게 많은 분노와 안타까움에도 어떻게 그 최종 책임자는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와중에 이 x을 지지하는 그 심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메르켈에 대한 평가 중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메르켈을 우습게 생각하는 순간, 벌써 진거라는... 어쩌면 그 X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서운 X이다.
한국에 부족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후진국... 운운하기엔 뭔가 석연찮다. "부끄럽다"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글쎄... 사고 처리의 후진성도 후진성이지만, 남의 시선을 그토록 의식하는 것, 그것이 더 후진성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징표 아닐까? 사실 이 두 사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주도적으로, 주체적으로 사태를 이해하고 처리하려는 책임감 결여. 타자의 시선에 맞춰서 행동하면서 책임,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행태들... 관계적이라는 것이 장점도 있지만 한국은 이미 충분히 관계적이기 때문에, 아니 과잉 관계적이기 때문에 개인주의적 태도, 윤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언행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숙한 개인, 성인. 그들간의 관계를 사회 생활의 핵으로 보는 것 말이다. 성년/ 미성년의 구분을 주도 구분으로.... 정몽준 씨 아들이 헛소리를 해서 애비가 사과한 모양인데...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졸업했으면 (거의) 성인 아닌가? 성인이면 스스로 책임져야지 여기에서 아비가 왜 대신 사과를 하나? 물론 도의적 책임을 전혀 물을 수는 없겠지만, 도대체 아비는 언제까지 자식을 대변하고 책임을 져야 하지? 성인은 언제부터 성인인가? 한국에서 도대체 성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인들끼리는 원칙적으로 평등하다. 나이가 얼마나 더 많든, 무슨 사회적 지위, 직업을 가지고 있건 간에... 나이가 벼슬인가? 고위직이면 나이어린 기자들에게 '인마' '기자 새끼들' 같은 표현을 공적 상황에서 내뱉어도 되나? 성인들끼리는 동등한 성인들로 상대를 대우할 것.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나이가 몇 살 만다고 형, 형님하고 부르는 것. 아직도 어색하다. 물론 반대로 쉽게 반말하는 나이 든 사람들도... 그런 표현은 이미 위계관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존대말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한국어는 존대말의 존재 때문에 언어적 표현이 오히려 더 거칠어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존대말의 천박성, 반말의 고상함...
그리고... 성인/미성년 이외에 중요한 구분은 인간/비인간의 구도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권리, 인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법앞에서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 성년/미성년 구분을 제외하고 다른 구분은 모른다. 실용적 목적 때문에 주어지는 구분이 있긴 하지만... 다른 구분은 인권 혹은 성인들 간의 평등이라는 대전제 아래에 위치할 뿐인... 성인 혹은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여러 개념들... 장애인/비장애인, 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 지역에 따른 정체성 (전라도/ 경상도, 서울/지방)... 부차적이어야 할 정체성 표현이 인권, 성인 같은 근대적 개념을 압도하는 현상... 그런 것이 후진성의 징표다.
관계 중심적이라는 것... 그런 지향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들.
그리고... 성인/미성년 이외에 중요한 구분은 인간/비인간의 구도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권리, 인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법앞에서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 성년/미성년 구분을 제외하고 다른 구분은 모른다. 실용적 목적 때문에 주어지는 구분이 있긴 하지만... 다른 구분은 인권 혹은 성인들 간의 평등이라는 대전제 아래에 위치할 뿐인... 성인 혹은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여러 개념들... 장애인/비장애인, 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 지역에 따른 정체성 (전라도/ 경상도, 서울/지방)... 부차적이어야 할 정체성 표현이 인권, 성인 같은 근대적 개념을 압도하는 현상... 그런 것이 후진성의 징표다.
관계 중심적이라는 것... 그런 지향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들.
전국민 전문가되기
조선 후기에 대해서 "온나라 양반되기"란 표현이 있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은 <전국민 전문가되기>가 어울리는 것 같다. 황우석 사태가 나면 전국민이 줄기세포 전문가가되고, 세월호 사태에 우린 이제 해상 구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공식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정부 브리핑이나 언론보도가 알려주는 게 너무 허술해서 직접 인터넷을 헤집고 정보를 찾아 다녀야 한다. 그 많던 전문가는 항상 막상 필요할 때 찾아보기 힘들다.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계속 찾게 된다. 학문적으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창궐하는 음모론. 언제부터인가 큰 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의례 창궐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물론 선진국에도 없진 않겠지만, 특히 미국에서 그런 것 같다 (달 참륙, 케니디 암살, 9.11 테러 등에 대한 음모론이 유명). 독일 등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음모론이 덜 인기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음모론은 뭔가 감추는 것이 있을 때, 공식적인 발표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등장하는 것 같다. 정권과 행정부는 언제 진실을 감추는가? 위급상황에서다. 전쟁이나 냉전같은... 적을 이롭게 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 (국익?)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정당화하 되는... 혹은 권위주의 국가처럼, 지도자나 정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진실을 감춤으로서 비난을 받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혹은 언론의 경우는 음모론과 이를 통한 정부 비판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장사가 되니까. 어찌보면 매우 체계합리적인 행동들인 것이다.
황우석 사태 때는 나름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음모론이나 대중의 감정의 정치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씀. 천안함의 경우에도 워낙 공식 설명이 허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입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세월호 침몰 사태는 좀 다르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그런지...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겠다. 다만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긴하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지만... 이런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한국 사회가 무너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미 내적으로 분화 정도가 높은 상태라 그렇다. 각종 체계들은 너무도 체계합리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 현정권에 대한 아부와 재선이라는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정치권, 장사 효율성을 최대한 잘 충족시키고 있는 언론들 등등. 언론의 내적 분화 역시 - 이전과 같은 구분은 아니지만 - 이 사건이 사회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그정도로 허약하지 않은 지도... 언론을 보더라도 SNS나 인터넷 기반 언론들의 존재가 더 할 나위 없이 고맙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언론사로 몰려갔을지도... 80년 광주에서 상황을 왜곡보도하던 방송국이 군중들의 분노 대상이 되었듯이...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계속 찾게 된다. 학문적으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창궐하는 음모론. 언제부터인가 큰 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의례 창궐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물론 선진국에도 없진 않겠지만, 특히 미국에서 그런 것 같다 (달 참륙, 케니디 암살, 9.11 테러 등에 대한 음모론이 유명). 독일 등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음모론이 덜 인기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음모론은 뭔가 감추는 것이 있을 때, 공식적인 발표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등장하는 것 같다. 정권과 행정부는 언제 진실을 감추는가? 위급상황에서다. 전쟁이나 냉전같은... 적을 이롭게 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 (국익?)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정당화하 되는... 혹은 권위주의 국가처럼, 지도자나 정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진실을 감춤으로서 비난을 받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혹은 언론의 경우는 음모론과 이를 통한 정부 비판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장사가 되니까. 어찌보면 매우 체계합리적인 행동들인 것이다.
황우석 사태 때는 나름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음모론이나 대중의 감정의 정치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씀. 천안함의 경우에도 워낙 공식 설명이 허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입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세월호 침몰 사태는 좀 다르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그런지...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겠다. 다만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긴하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지만... 이런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한국 사회가 무너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미 내적으로 분화 정도가 높은 상태라 그렇다. 각종 체계들은 너무도 체계합리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 현정권에 대한 아부와 재선이라는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정치권, 장사 효율성을 최대한 잘 충족시키고 있는 언론들 등등. 언론의 내적 분화 역시 - 이전과 같은 구분은 아니지만 - 이 사건이 사회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그정도로 허약하지 않은 지도... 언론을 보더라도 SNS나 인터넷 기반 언론들의 존재가 더 할 나위 없이 고맙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언론사로 몰려갔을지도... 80년 광주에서 상황을 왜곡보도하던 방송국이 군중들의 분노 대상이 되었듯이...
독일 훔볼트대학 장애학 교수 Lisa Pfahl 이야기 (출처, Der Tagesspiegel)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 독일에서 장애가 신의 저주나 엄마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의제가 된 계기는 60년대 Contergan-Skandal.
-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장애인은 격리시키는 것이 오랫 동안, 그리고 여전히 대세.
- UN장애인권리협약은 독일에 외부 충격.
- 영미의 장애학 패러다임 도입 필요성 확대되는 듯. 하지만 여전히 미비. 독일 장애학 최초 교수는 Anne Waldschmidt (1999년).
- 영미 장애학은 여성학, 여성운동, 동성애학 등과 함께 발전. 베를린에서도 여성운동의 결과로 장애학 교수 채용됨.
- 특히 미국에서는 동성애학과 함께 연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둘 다 육체에 대한 기술, 권력, 차별 등을 다루다 둘 모두 사회운동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당사자들, 그 특징의 대표자들이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경향.
- 장애인에 대한 연구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의 필요는 장애인 스스로 가장 잘 안다. 하지만 특히 학습장애나 심리 장애의 경우는 학문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 독일에서 장애가 신의 저주나 엄마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의제가 된 계기는 60년대 Contergan-Skandal.
-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장애인은 격리시키는 것이 오랫 동안, 그리고 여전히 대세.
- UN장애인권리협약은 독일에 외부 충격.
- 영미의 장애학 패러다임 도입 필요성 확대되는 듯. 하지만 여전히 미비. 독일 장애학 최초 교수는 Anne Waldschmidt (1999년).
- 영미 장애학은 여성학, 여성운동, 동성애학 등과 함께 발전. 베를린에서도 여성운동의 결과로 장애학 교수 채용됨.
- 특히 미국에서는 동성애학과 함께 연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둘 다 육체에 대한 기술, 권력, 차별 등을 다루다 둘 모두 사회운동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당사자들, 그 특징의 대표자들이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경향.
- 장애인에 대한 연구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의 필요는 장애인 스스로 가장 잘 안다. 하지만 특히 학습장애나 심리 장애의 경우는 학문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분산이 필요하고, 그것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집중된 권력 또한 필수적이다. 정치나 경제에 과잉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과잉통합된 다른 체계들을 좀 놓아줄 필요도 있고, 자율성을 남용해서 다른 체계들을 과잉통합하는 체계를 효율적으로 조정, 관리할 수 있는 집중된 권력도 필요하다. 논지야 어떻든간에 H. Willke의 표현대로 smart한 governance가 필요한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역적 상황에 맞게 정립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물론 끊임없는 도전에 노출되어있고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립'이라는 표현이 딱 맞진 않지만...
- 지난 주말 처가 식구들이 다녀갔다. 딸은 의외로 빨리 적응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다. 많은 시간을 내서 준비할 수는 없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 한다고 했다. 기록경신을 기대할 정도로... 다만 목요일 수영을 과하게 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 같다. 금요일 2km도 어쩌면 뛰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금요일 저녁부터 몸살기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더 강한 피곤으로 몸살을 떨쳐버리려고 대회에 참석했다. 결과는 1시간 59분대. 마지막 4,5 km는 정말이지 억지로 뛰었다. 2시간 내로 들어오려고... 하프코스를 처음 뛰는 마라톤 동료가 후반부터 치고나가는 바람에... 그 양반과 너무 차이나지 않길 바라며... 덕분엔 토요일엔 하루 종일 고생했지만, 다음날부터 몸살기는 사라졌다.
-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다. 많은 시간을 내서 준비할 수는 없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 한다고 했다. 기록경신을 기대할 정도로... 다만 목요일 수영을 과하게 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 같다. 금요일 2km도 어쩌면 뛰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금요일 저녁부터 몸살기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더 강한 피곤으로 몸살을 떨쳐버리려고 대회에 참석했다. 결과는 1시간 59분대. 마지막 4,5 km는 정말이지 억지로 뛰었다. 2시간 내로 들어오려고... 하프코스를 처음 뛰는 마라톤 동료가 후반부터 치고나가는 바람에... 그 양반과 너무 차이나지 않길 바라며... 덕분엔 토요일엔 하루 종일 고생했지만, 다음날부터 몸살기는 사라졌다.
이택광 선생의 트윗이 생각할 거리를 남겨서 모아 둔다. 뭐. 트위터 글이라 오그라들게 만드는 구석도 있지만... 여하튼 한국 정치인들, 고위적 행정관료들 대중적 감성이 참 많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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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재미 봤던 이들이 외상값 갚아야할 때가 온 것. 연안여객선 침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나 이런 각성이 일고 있다고 봐야. 지금 수위로도 기존 권력 헤게모니에 균열을 낼 정도는 될 것 같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을 상대하니 국민도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고자하는 것. 당연한 거 아닌가. 이제 와서 막으면 사태는 더 커질 것.
후진적이라는 개탄도 있다만 나에게 한국은 오묘한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침몰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호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움. 대한민국이 특정 세력의 전유물도 아니고...
통치는 권위적으로 하면서 방식은 포퓰리즘을 채택하니 사달이 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만큼 서양인들은 군중에게 데여본 경험이 많다는 뜻이죠.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군중은 양반입니다.
유정복 전 장관의 발언을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는 것이 그만큼 이 정부의 체계가 상부에 대한 아첨의 코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냉정한 행정능력보다도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게 남는 장사라는 말.
이런 재난사고가 있을 때마다 유명 정치인들이 현장에 내려간다는 것에서 이미 정치인들 자신이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듯. 한국의 정치인은 시스템의 부실을 고치기보다 그것에 분노하는 대중의 감성에 편승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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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재미 봤던 이들이 외상값 갚아야할 때가 온 것. 연안여객선 침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나 이런 각성이 일고 있다고 봐야. 지금 수위로도 기존 권력 헤게모니에 균열을 낼 정도는 될 것 같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을 상대하니 국민도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고자하는 것. 당연한 거 아닌가. 이제 와서 막으면 사태는 더 커질 것.
후진적이라는 개탄도 있다만 나에게 한국은 오묘한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침몰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호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움. 대한민국이 특정 세력의 전유물도 아니고...
통치는 권위적으로 하면서 방식은 포퓰리즘을 채택하니 사달이 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만큼 서양인들은 군중에게 데여본 경험이 많다는 뜻이죠.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군중은 양반입니다.
유정복 전 장관의 발언을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는 것이 그만큼 이 정부의 체계가 상부에 대한 아첨의 코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냉정한 행정능력보다도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게 남는 장사라는 말.
이런 재난사고가 있을 때마다 유명 정치인들이 현장에 내려간다는 것에서 이미 정치인들 자신이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듯. 한국의 정치인은 시스템의 부실을 고치기보다 그것에 분노하는 대중의 감성에 편승하는 존재.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2014년 4월 17일 목요일
오마이뉴스 기사다. 맥락을 잘 짚고 있는 것 같다.
신뢰 부족... 책임지지 않는... 자존심도 없이 눈치만 보는 기관들... 알아서 기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자율성... 책임....
이와 유사한 여러 사건들을 보며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 차이는 바로 관계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였다. 스쿨버스 피해자들은 지금 미국 교통안전위원회라는 관련 기관의 조사 결과를 믿고 기다리고 있고 기관은 정확하게, 가능하면 신속하게 사고 결과를 조사해 발표하고 있다.
학교와 버스 기사와의 커넥션이나 대형 물류 업체 페덱스의 로비쯤은 무시해도 될, 거래와 음모보다 더 힘센 관련 기관의 능력을 믿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족을 잃어 황망한 유족들이 정부 기관을 찾아 다니고 농성하고 악을 쓰고 모멸 당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그리고 조직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하는 조사 결과는 국민의 기관에 대한 깊은 신뢰가 만들어 낸 합작품인 것이다."
안타깝다. 안타까워. 대한민국의 문제일까. 제도의 탓일까, 매뉴얼의 탓일까, 문화 탓일까, 선장의 문제일까. 복잡한 메커니즘을 관리할 능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위험에 대한 안일함...
우리는 이전보다, 예컨대 10년전 20년전보다 더 위험한 사회에 살고있나?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일까? 여전히 후진국일까?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그런 것 같진 않다. 이른 바 선진국들도 대개 이러저러한 사고를 겪으면서 대응 메커니즘, 관련 문화들이 발전해 왔지 않았나. 대한민국도 그런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사고, 대형사고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과학, 기술, 기술체계의 복잡성... 반면에 안전에 대한 욕구는 커지고...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예방 조치를 과도하게 하면... 그것 자체는 다른 측면에서의 위험을 야기한다.... 위험은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지만, 위험 회피와 예방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커지고... 딜레마다 딜레마. 이런 사고가 있을 때마다 "위험사회" "안전사회"를 얘기하던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더 많은 안전"을 얘기하는 사람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 시민운동....
우리는 이전보다, 예컨대 10년전 20년전보다 더 위험한 사회에 살고있나?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일까? 여전히 후진국일까?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그런 것 같진 않다. 이른 바 선진국들도 대개 이러저러한 사고를 겪으면서 대응 메커니즘, 관련 문화들이 발전해 왔지 않았나. 대한민국도 그런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사고, 대형사고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과학, 기술, 기술체계의 복잡성... 반면에 안전에 대한 욕구는 커지고...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예방 조치를 과도하게 하면... 그것 자체는 다른 측면에서의 위험을 야기한다.... 위험은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지만, 위험 회피와 예방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커지고... 딜레마다 딜레마. 이런 사고가 있을 때마다 "위험사회" "안전사회"를 얘기하던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더 많은 안전"을 얘기하는 사람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 시민운동....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서울신문 문소영 기자가 쓴 대중 역사서 "못난 조선"(2010) "조선의 못난 개항"(2013)을 훑어봤다. 내용은 뭐 책제목 그대로다. 사실 별로 새삼스러운 내용도 아닌데 최근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목소리들이 커져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신선하게 들린다. 아이러니...
시대를 잘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물론 지금은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 잘못된 진로를 택할 가능성은 낮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조선이 안고 있었던 문제와 겪어야했던 시행착오를 대한민국도 상당 부분 안고 또 겪고 있는 것 같다. 사람도 그렇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경로도 참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여하튼 저자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이렇게 많은 문제와 실패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이뤄낸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던 힘 역시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입장 중에서 미야지마 교수의 시각이 균형잡힌 편인 것 같다.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2%'.... 부족한 2%로 우선 '제국을 경영한 경험의 부재'를 손꼽고 싶다. ... '제국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는 제국을 거느리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인 중, 국제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각, 세계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국내에만 머물고 있고, 파장에 대해 다각도로 폭넓게 검토하고 고려하지 못한다. ... 큰 나라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거나 국내의 정권유지 차원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접근과 대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 강대국에 의지한다면 외교 군사적인 문제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국내 집권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이것은 대단히 경제적이다.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이 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국의 눈치만 보다 보면 격변기에는 대응의 속도가 늦어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못난조선: 396 - 397)
서양에서 근대의 등장, 근대화는 경로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혁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런 급격한 변화가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아니었나 싶다.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좀 더 자연스럽고. 한국의 경로는 포스트모던과 친화성을 보인다. 문제는 모던을 건너 뛴 채로 포스트모던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 모던의 성취를 잘 수용하고서 모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할텐데....
시대를 잘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물론 지금은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 잘못된 진로를 택할 가능성은 낮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조선이 안고 있었던 문제와 겪어야했던 시행착오를 대한민국도 상당 부분 안고 또 겪고 있는 것 같다. 사람도 그렇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경로도 참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여하튼 저자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이렇게 많은 문제와 실패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이뤄낸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던 힘 역시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입장 중에서 미야지마 교수의 시각이 균형잡힌 편인 것 같다.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2%'.... 부족한 2%로 우선 '제국을 경영한 경험의 부재'를 손꼽고 싶다. ... '제국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는 제국을 거느리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인 중, 국제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각, 세계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국내에만 머물고 있고, 파장에 대해 다각도로 폭넓게 검토하고 고려하지 못한다. ... 큰 나라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거나 국내의 정권유지 차원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접근과 대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 강대국에 의지한다면 외교 군사적인 문제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국내 집권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이것은 대단히 경제적이다.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이 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국의 눈치만 보다 보면 격변기에는 대응의 속도가 늦어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못난조선: 396 - 397)
서양에서 근대의 등장, 근대화는 경로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혁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런 급격한 변화가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아니었나 싶다.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좀 더 자연스럽고. 한국의 경로는 포스트모던과 친화성을 보인다. 문제는 모던을 건너 뛴 채로 포스트모던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 모던의 성취를 잘 수용하고서 모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할텐데....
페친 최낙언 님의 이야기.
맥도널드는 위생이라는 개념의 도입에 기여를 했고
코카콜라는 현지화라는 기여를 했지만
한식은 도대체 뭐를 기여한다는 것일까요
국산이 수출되면 외국에는 수입산 원재료일 뿐인데
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과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서, 원래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된 것이라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의 문화적 속성! 그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외부에 대한 대단한 기여는 커녕 수입이라도 제대로 해야하는것 아닌가? 물론 수입을 완벽하게 한 이후에라야 수출을 시작해야하는건 아니다. 역사를 보면 기존의 힘이 미치지 않는 변방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법이니까...
한류... 한류가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 역사적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반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선에의 강박, 발전에의 강박... 어쩌면 근대화라는 그 틀 속에서, 발전주의의 변형일 따름 아닐까? 계몽주의 등등. 좀 더 세련된...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는 없는... 사회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더 잘 살거나, 더 평등하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좀 다를 뿐이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자학하고 자책하고... 조상들도 불러내 야단치고 ("못난 조선")... 우파적 강박도 있지만 좌파적 강박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낭만주의가 답일까? 대책없는 낭만주의는 위험하기도 한데.... 개인주의... 자유주의...
계몽주의, 비관주의, 자기검열, 비판에 과도하게 사로잡히면 도무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면 이 모든 불가능한 목표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 자체가 매우 매우 근대적인 것 아닌지...
그런 상황을 드러내는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음. 그게 옳을 것 같다. 너무 꼰대적인 것...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없다...
맥도널드는 위생이라는 개념의 도입에 기여를 했고
코카콜라는 현지화라는 기여를 했지만
한식은 도대체 뭐를 기여한다는 것일까요
국산이 수출되면 외국에는 수입산 원재료일 뿐인데
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과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서, 원래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된 것이라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과학의 문화적 속성! 그것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외부에 대한 대단한 기여는 커녕 수입이라도 제대로 해야하는것 아닌가? 물론 수입을 완벽하게 한 이후에라야 수출을 시작해야하는건 아니다. 역사를 보면 기존의 힘이 미치지 않는 변방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법이니까...
한류... 한류가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 역사적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반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선에의 강박, 발전에의 강박... 어쩌면 근대화라는 그 틀 속에서, 발전주의의 변형일 따름 아닐까? 계몽주의 등등. 좀 더 세련된...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는 없는... 사회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더 잘 살거나, 더 평등하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좀 다를 뿐이지...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자학하고 자책하고... 조상들도 불러내 야단치고 ("못난 조선")... 우파적 강박도 있지만 좌파적 강박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낭만주의가 답일까? 대책없는 낭만주의는 위험하기도 한데.... 개인주의... 자유주의...
계몽주의, 비관주의, 자기검열, 비판에 과도하게 사로잡히면 도무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면 이 모든 불가능한 목표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 자체가 매우 매우 근대적인 것 아닌지...
그런 상황을 드러내는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음. 그게 옳을 것 같다. 너무 꼰대적인 것...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없다...
문화와 과학의 관계
I. 과학과 문화는 원래 다른 영역이다. 관계가 없다. 심지어 상반되는 것. 분리되는 것이 좋다. 섞여서는 안된다. (인문학 지식인들도 이런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대개 과학을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질낮은 지식으로 보면서...), 이들에게 굳이 과학문화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계몽'이 될 것이다. 과학 지식을 널리 알리는 것. 과학의 대중화.
과학은 사실에 대한 것. 전문적, 기계적, 수학적. 문화는 정신적인 것.
II. 과학의 문화적 측면"(c버tural aspects of science): 과학의 내용, 과학활동, 과학적 방법, 스타일, 사고방식, 과학자, 과학자사회, 과학의 산물, 과학의 이용 등의 문화적 측면 (과학에 대한 이해, 평가)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지적 진보)에 기여하기도 (Merton, 프로테스탄트) (합리성, 실증주의, 과학의 독립성, 자율성 인정 등등)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지적 진보)에 방해가 되기도 (형이상학적, 종교적 태도) (비합리적....)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을 일부 막기도 하지만 결국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기도 (예를 들어 도덕적 접근, 규범적 문화, 이에 기초한 규제)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을 특정한 시기에 견인하지만 곧 이어 질곡이 되기도 (한국의 발전주의 과학문화)
III. “문화의 과학적 측면"(scientific aspects of culture)": 현대 문화 속에서의 과학의 위치, 역할, 의의 등.
과학 자체가 사회 전체의 문화 양상에 영향을 주기도. 과학적 합리성이 사회 전체의 합리성에 영향을 주기도, 과학의 발전, 기술과의 결합 등이 미래에 대한 낙관론, 긍정론, 진화론적 사고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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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지식, 신뢰할만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그것은 심지어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 추구되기까지 했다. 물론 호기심을 가지고 그 자체를 추구하던 이들도 언제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근대과학의 독특한 점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기능적 분화라는 근대의 거시적 변화, 변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근대 과학의 제도적 분리, 자율성, 독특한 체계로서 자리잡는 과정.... 그 과정에서 근대 과학 문화도 형성되었고.
역사를 축적적, 지속적 발전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설명은 대개 결과를 놓고서 원인을 추론하는 식이라 설득력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좀 더 엄밀하게 따져보면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늘 우수했던 것도 아니고, 반대로 동양의 경우 늘 뒤쳐졌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여러 분야의 역량을 급속도록 끌어올릴 수 있었던 서양의 근대성! 그 특별함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조에서 과학과 기술을 쭉 강조했다면 - 예컨대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 우리는 지금 서양못지 않은 과학과 기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Unsinn! 지식의 발달은 늘 시대의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따져봐야지 현시점에서의 기준을 가지고 역사를 짜 맞추려고 하면 정말 재미없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고...
차라리 포스트모던 과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는 더 좋을 것이다.
다만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더라도 모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화를 피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의 근대화 기획은 여전히 미완성이긴 하지만... 한국 전통과 포스트모던과의 친화성을 강조하더라도...
여하튼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문화의 역할, 문화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I. 과학과 문화는 원래 다른 영역이다. 관계가 없다. 심지어 상반되는 것. 분리되는 것이 좋다. 섞여서는 안된다. (인문학 지식인들도 이런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대개 과학을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질낮은 지식으로 보면서...), 이들에게 굳이 과학문화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계몽'이 될 것이다. 과학 지식을 널리 알리는 것. 과학의 대중화.
과학은 사실에 대한 것. 전문적, 기계적, 수학적. 문화는 정신적인 것.
II. 과학의 문화적 측면"(c버tural aspects of science): 과학의 내용, 과학활동, 과학적 방법, 스타일, 사고방식, 과학자, 과학자사회, 과학의 산물, 과학의 이용 등의 문화적 측면 (과학에 대한 이해, 평가)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지적 진보)에 기여하기도 (Merton, 프로테스탄트) (합리성, 실증주의, 과학의 독립성, 자율성 인정 등등)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지적 진보)에 방해가 되기도 (형이상학적, 종교적 태도) (비합리적....)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을 일부 막기도 하지만 결국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기도 (예를 들어 도덕적 접근, 규범적 문화, 이에 기초한 규제)
어떤 문화는 과학의 발전을 특정한 시기에 견인하지만 곧 이어 질곡이 되기도 (한국의 발전주의 과학문화)
III. “문화의 과학적 측면"(scientific aspects of culture)": 현대 문화 속에서의 과학의 위치, 역할, 의의 등.
과학 자체가 사회 전체의 문화 양상에 영향을 주기도. 과학적 합리성이 사회 전체의 합리성에 영향을 주기도, 과학의 발전, 기술과의 결합 등이 미래에 대한 낙관론, 긍정론, 진화론적 사고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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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지식, 신뢰할만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그것은 심지어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 추구되기까지 했다. 물론 호기심을 가지고 그 자체를 추구하던 이들도 언제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근대과학의 독특한 점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기능적 분화라는 근대의 거시적 변화, 변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근대 과학의 제도적 분리, 자율성, 독특한 체계로서 자리잡는 과정.... 그 과정에서 근대 과학 문화도 형성되었고.
역사를 축적적, 지속적 발전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설명은 대개 결과를 놓고서 원인을 추론하는 식이라 설득력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좀 더 엄밀하게 따져보면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늘 우수했던 것도 아니고, 반대로 동양의 경우 늘 뒤쳐졌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여러 분야의 역량을 급속도록 끌어올릴 수 있었던 서양의 근대성! 그 특별함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조에서 과학과 기술을 쭉 강조했다면 - 예컨대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 우리는 지금 서양못지 않은 과학과 기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Unsinn! 지식의 발달은 늘 시대의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따져봐야지 현시점에서의 기준을 가지고 역사를 짜 맞추려고 하면 정말 재미없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고...
차라리 포스트모던 과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는 더 좋을 것이다.
다만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더라도 모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화를 피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의 근대화 기획은 여전히 미완성이긴 하지만... 한국 전통과 포스트모던과의 친화성을 강조하더라도...
여하튼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문화의 역할, 문화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2014년 4월 15일 화요일
2014년 4월 14일 월요일
페북에서 발굴한 Guardian기사(의 번역). 대체적으로 공감. 운전자의 심리엔 문화 차이도 없나봐?
Bad driving: what are we thinking? New laws to curb dangerous driving highlight the fascinating psychology of the road (http://www.theguardian.com/science/head-quarters/2013/aug/19/driving-road-neuroscience-psychology)
Bad driving: what are we thinking? New laws to curb dangerous driving highlight the fascinating psychology of the road (http://www.theguardian.com/science/head-quarters/2013/aug/19/driving-road-neuroscience-psychology)
왜 우리는 운전대만 잡으면 '별도의 인격'을 가진 것처럼 행동할까?
-인간의 본능적인 편향과 인지 능력의 한계로 인한 것-
-인간의 본능적인 편향과 인지 능력의 한계로 인한 것-
"교통심리학(Traffic psychology)은 인간의 본성과 환경이 운전습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분야의 수십년간의 연구결과는 부주의한 운전이 소수의 위험한 운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장 능숙한 운전자들에게도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편향과 인지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운전 중 겪게 되는 10가지 오류입니다.
1. 우리는 자신이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자각하지 못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앞 차를 바짝 쫓거나 다른 차의 길을 막는 것과 같은, 직접 얼굴을 보는 상태에서는 하지 못할 행동을 합니다.
2. 우리는 자신이 실제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 운전이 익숙해지고 경험이 쌓이면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며 이는 우리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3. 우리는 다른 운전자들 역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 우리는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히거나 마트에서 카트끼리 부딪혔을 때 쉽게 사과합니다. 그러나 한 연구는 운전 중에 우리가 마치 온라인에서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상대를 대상화 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4. 심지어 우리는 약자에게 더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 또 다른 한 연구는 크고 새로 뽑은 차를 모는 사람들이 작고 낡은 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비싼 차를 모는 사람들일수록 보행자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5. 우리는 주변상황을 모두 보고있다고 느낍니다 –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에 비해 우리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는 훨씬 적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실험은 실제 도로에서 우리가 많은 정보들을 놓치고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6.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운전자가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 이것은 노출된 장소에서 사람들이 코를 파거나 귓밥을 파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부주의한 행동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7. 우리는 잘못을 쉽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 “근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란 특정 상황의 원인을 상황의 탓이 아닌 상대방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로서, 이는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운전 중에도 상대방의 위험한 행동은 그 운전자의 탓으로 돌리는 반면, 자신의 8. 위험한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합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기 쉽습니다 – 약 80-90%의 운전자는 자신이 상위 절반의 운전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9. 우리는 혼자일때 더 위험하게 운전합니다 – 이러한 현상이 발견되었으나 아직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차이를 의식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핸즈프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에서 운전 중 통화는 불법이지만 핸즈프리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핸즈프리의 사용도 역시 같은 정도의 위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Guardian 기사-번역 뉴스 페퍼민트)
2. 우리는 자신이 실제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 운전이 익숙해지고 경험이 쌓이면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며 이는 우리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3. 우리는 다른 운전자들 역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기 쉽습니다 – 우리는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히거나 마트에서 카트끼리 부딪혔을 때 쉽게 사과합니다. 그러나 한 연구는 운전 중에 우리가 마치 온라인에서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상대를 대상화 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4. 심지어 우리는 약자에게 더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 또 다른 한 연구는 크고 새로 뽑은 차를 모는 사람들이 작고 낡은 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비싼 차를 모는 사람들일수록 보행자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5. 우리는 주변상황을 모두 보고있다고 느낍니다 –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에 비해 우리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는 훨씬 적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실험은 실제 도로에서 우리가 많은 정보들을 놓치고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6.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운전자가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 이것은 노출된 장소에서 사람들이 코를 파거나 귓밥을 파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부주의한 행동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7. 우리는 잘못을 쉽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 “근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란 특정 상황의 원인을 상황의 탓이 아닌 상대방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로서, 이는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운전 중에도 상대방의 위험한 행동은 그 운전자의 탓으로 돌리는 반면, 자신의 8. 위험한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합니다.
반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기 쉽습니다 – 약 80-90%의 운전자는 자신이 상위 절반의 운전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9. 우리는 혼자일때 더 위험하게 운전합니다 – 이러한 현상이 발견되었으나 아직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차이를 의식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핸즈프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에서 운전 중 통화는 불법이지만 핸즈프리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핸즈프리의 사용도 역시 같은 정도의 위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Guardian 기사-번역 뉴스 페퍼민트)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 중체서용(中體西用)그리고 한국문화, 동아시아문화
한국적인 것, 더 나아가 동아시아적인 것이 정신, 혼의 차원에 국한되는가? 서양적인 것은 기술과 물질의 차원에 제한되는가?
과학은 그 자체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늘 그렇드시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고, 그 평가 자체도 바뀔 수 있는...
한국에서 과학은 문화적 측면은 배제된 채 도구적 측면만 강조되어왔다. 그 자체로 완결된 지식인 것처럼... 활용하기 나름인 것처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한국인들에게 과학기술은 단순히 외래의 - 서양의 - 것일 뿐만 아니라 어쩐지 '문화적'이지 못하며 심지어는 '지성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비쳐진다." ('김영식 (1998),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성', 347)
이는 도구주의적, 실용주의적, 공리주의적 과학기술관(김영식)의 이면인 것 같다.
한편으로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을(도구성) 과대평가하고 (과학관, 과학잡지, 계몽주의적 과학 이해, 대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제한한다(도구성). 그저 도구일 따름이다. 다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결과는... "한국인들은 현대 서양 과학기술을 모방하고 이용하는 데 주력했을 뿐 그에 대한 창조적 기여는 없었다. 물론 지난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는 했지만,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한국의 기여는 매우 작았으며, 이는 다른 여러 영역들에서 한국의 성취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이 그 실용적, 도구적 '가치' 때문에 정부와 사회로부터 많은 지원과 보호를 받긴 했지만, 그같은 지원과 보호 - 때로는 과보호 - 가 과학기술을 한국의 문화적 토양 속에 독립된 요소로 뿌리내리게 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은 그같은 지원과 보호에 대한 의존성을 띠게 되었고, 그러한 지원과 보호가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단순히 도구로만 인식된 과학기술은 독자적인 문화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많은 경우 경제의 일부분으로 분류되었다." (348)
그렇다. 한국은 다른 분양에서 이룬 성취에 비교할 때 세계 과학 분야에 대한 기여는 크지 않은 편이다. 물론 기술에 대해서라면 좀 다를 수 있다. 특정 기술 분야에서의 기여는 결코 작지 않고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물론 '기여'나 '성취' 같은 표현이 매우 모호하긴 하다. 그런 기여도를 이런 저런 지표로 측정한다고 하더라도... GNP, 논문 발간수, 특허 등등 - 한국이 GNP 기준 세계 경제 10라면 과학 연구 생산력도 10위를 해야하는가? 물론 과학의 경제성장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한국에서 후진게 어디 과학 관련 문화 뿐인가? 경제, 정치, 종교 어디 한 군데서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힌 곳이 있던가. 뭐. 그 중에서 과학 문제를 특별히 연구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과학을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다.
한국적인 것, 더 나아가 동아시아적인 것이 정신, 혼의 차원에 국한되는가? 서양적인 것은 기술과 물질의 차원에 제한되는가?
과학은 그 자체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늘 그렇드시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고, 그 평가 자체도 바뀔 수 있는...
한국에서 과학은 문화적 측면은 배제된 채 도구적 측면만 강조되어왔다. 그 자체로 완결된 지식인 것처럼... 활용하기 나름인 것처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한국인들에게 과학기술은 단순히 외래의 - 서양의 - 것일 뿐만 아니라 어쩐지 '문화적'이지 못하며 심지어는 '지성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비쳐진다." ('김영식 (1998),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성', 347)
이는 도구주의적, 실용주의적, 공리주의적 과학기술관(김영식)의 이면인 것 같다.
한편으로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을(도구성) 과대평가하고 (과학관, 과학잡지, 계몽주의적 과학 이해, 대중화),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제한한다(도구성). 그저 도구일 따름이다. 다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결과는... "한국인들은 현대 서양 과학기술을 모방하고 이용하는 데 주력했을 뿐 그에 대한 창조적 기여는 없었다. 물론 지난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는 했지만,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한국의 기여는 매우 작았으며, 이는 다른 여러 영역들에서 한국의 성취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이 그 실용적, 도구적 '가치' 때문에 정부와 사회로부터 많은 지원과 보호를 받긴 했지만, 그같은 지원과 보호 - 때로는 과보호 - 가 과학기술을 한국의 문화적 토양 속에 독립된 요소로 뿌리내리게 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은 그같은 지원과 보호에 대한 의존성을 띠게 되었고, 그러한 지원과 보호가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단순히 도구로만 인식된 과학기술은 독자적인 문화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많은 경우 경제의 일부분으로 분류되었다." (348)
그렇다. 한국은 다른 분양에서 이룬 성취에 비교할 때 세계 과학 분야에 대한 기여는 크지 않은 편이다. 물론 기술에 대해서라면 좀 다를 수 있다. 특정 기술 분야에서의 기여는 결코 작지 않고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물론 '기여'나 '성취' 같은 표현이 매우 모호하긴 하다. 그런 기여도를 이런 저런 지표로 측정한다고 하더라도... GNP, 논문 발간수, 특허 등등 - 한국이 GNP 기준 세계 경제 10라면 과학 연구 생산력도 10위를 해야하는가? 물론 과학의 경제성장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한국에서 후진게 어디 과학 관련 문화 뿐인가? 경제, 정치, 종교 어디 한 군데서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힌 곳이 있던가. 뭐. 그 중에서 과학 문제를 특별히 연구할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과학을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다.
병원에서 딸 진찰받게 하고, 사무실 가는 길엔 미뤄뒀던 자동차 종합검사받고, 딸 용품 네 가지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단순한 일 몇 가지 처리했을 뿐인데... 세상에...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다. 성취감 느낄 일이 얼마나 없었으면...
아닌게 아니라 어젠 심지어 달리기에서도 실패했다. 오랜만에, 두 시간 정도 달릴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건 시작한 이후 금새 알아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달렸다. 하지만 1시간 30분쯤 되니까 다리가 돌덩이처럼 같아서 한발짝도 더 뛰기 힘들었다. 이후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 결국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예배시간의 압박도 있어서... 지난 목요일 10km 뛰고 이틀을 내리 쉬었는데, 그게 컨디션에 나쁜 영향을 미쳐던 것 같다. 10km 정도는 준비없이 언제라도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20km 정도 뛰려면 대회 참석 못지않은 준비가 필요함을 새삼 느꼈다.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는 것보다, 먼 거리를 평소 속도대로 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하프마라톤에 도전하는 동료는 요즘 기록이 잘나와서 기고만장해있다. 지금 상태라면 나보다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에 성취감은 그 양반 몫이고, 내 몫은 그 모습을 지켜봐주는 것? 안될말. 나도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해 봐야지.
어머니가 딸 육아때문에 애쓰시는 모습이... 안쓰럽다. 내가 주중에 집밖에서 보낼 수 있게 해주시는 건데... 어머니에게 큰 짐을 안겨드리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성취하려는 건지...
아닌게 아니라 어젠 심지어 달리기에서도 실패했다. 오랜만에, 두 시간 정도 달릴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건 시작한 이후 금새 알아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달렸다. 하지만 1시간 30분쯤 되니까 다리가 돌덩이처럼 같아서 한발짝도 더 뛰기 힘들었다. 이후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 결국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예배시간의 압박도 있어서... 지난 목요일 10km 뛰고 이틀을 내리 쉬었는데, 그게 컨디션에 나쁜 영향을 미쳐던 것 같다. 10km 정도는 준비없이 언제라도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20km 정도 뛰려면 대회 참석 못지않은 준비가 필요함을 새삼 느꼈다.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는 것보다, 먼 거리를 평소 속도대로 뛰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하프마라톤에 도전하는 동료는 요즘 기록이 잘나와서 기고만장해있다. 지금 상태라면 나보다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에 성취감은 그 양반 몫이고, 내 몫은 그 모습을 지켜봐주는 것? 안될말. 나도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해 봐야지.
어머니가 딸 육아때문에 애쓰시는 모습이... 안쓰럽다. 내가 주중에 집밖에서 보낼 수 있게 해주시는 건데... 어머니에게 큰 짐을 안겨드리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성취하려는 건지...
2014년 4월 11일 금요일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조화(균형), 모더니티와 포스트(안티)모더니티의 조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조화, 열정적 사랑과 이성의 조화, 물질과 정신의 조화... 이런 식으로 관련된 개념쌍을 한참 더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처방을 내릴 것인가? 이성적 측면이 강한 사람에겐 감성적 측면을 강화하도록 충고할 것이다.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에 대해서 집단주의(공동체주의)의 강화를, 반대로 집단주의가 강한 사회에 대해선 개인주의의 강화를 처방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게 합리적이다 (흠. 합리적! 역시 기본은 모더니티인가).
한국 사회의 현실은 감정의 과잉 이성의 결핍, 비합리성의 과잉 합리성의 결핍, 관계/집단(주의)의 과잉 개인(주의)의 결핍으로 진단할 수 있다. 이를 결론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내 학문의 결론으로.... 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위하여, 향하여...
흐름을 놓쳤다. 기대도 긴장도 되지않는 하루가 또 내게 주어졌다. 무겁다. 아니 언제 한 번 가벼운 적이 있었던가. 여유, 유머가 필요하다. 아니 더 근본적인 건 사랑이다 사랑.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다고 한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도대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무런 소리도 구체적 메시지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모르는지 반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지금도 생생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는가. 사랑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안다. 사랑은 관심이다 ['사랑한다'의 가장 강력한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강신주)]. 안타까움이다. 공감이다. 그래서 표가 난다. 상대가 모를 수 없다.
사랑은 모던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 합리성에 가까울까 비합리성에 가까울까? 의문의 여지 없이 후자 쪽이다. 물론 사랑만으로 만사오케이가 될 수는 없다. 낭만적 열정은 합리적 제어를 필요로 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에는 합리적 측면, 비합리적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비합리적 측면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여하튼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위해선 이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하다. "사랑이 부족하다"라고 얘기하는 경우 대개 이 비합리적 측면의 부족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반면에 합리성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학문의 경우... 예컨대 물리학 연구에도 비합리적 측면이 들어있고 도 필요하기도 하다. 물리학 연구의 동기, 연구의 결과 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묻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합리성, 비합리성 이 두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를 뿐이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다고 한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도대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무런 소리도 구체적 메시지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모르는지 반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지금도 생생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는가. 사랑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안다. 사랑은 관심이다 ['사랑한다'의 가장 강력한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강신주)]. 안타까움이다. 공감이다. 그래서 표가 난다. 상대가 모를 수 없다.
사랑은 모던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 합리성에 가까울까 비합리성에 가까울까? 의문의 여지 없이 후자 쪽이다. 물론 사랑만으로 만사오케이가 될 수는 없다. 낭만적 열정은 합리적 제어를 필요로 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에는 합리적 측면, 비합리적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비합리적 측면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여하튼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위해선 이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하다. "사랑이 부족하다"라고 얘기하는 경우 대개 이 비합리적 측면의 부족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반면에 합리성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학문의 경우... 예컨대 물리학 연구에도 비합리적 측면이 들어있고 도 필요하기도 하다. 물리학 연구의 동기, 연구의 결과 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묻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합리성, 비합리성 이 두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를 뿐이다.
여하튼 학문에도,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관련된 모든 활동의 동기와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이어야 한다. 결국 사랑이다. 사랑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 그 구성원에 대한 애정,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 더 거창하겐 인류에 대한 사랑. 이론과 지식에 대한 사랑. 사회학에 대한 사랑. 식구들에 대한 사랑, 내가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등등.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 특히 사랑의 비합리적 측면... 애틋함, 관심, 때로는 맹목적인 열정 등등. 그것 없이 지금까지 꾸역꾸역왔다면, 어쩌면 이젠 그것 없이는 한발짝도 더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 아닐까?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막 막상 여인이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서 다시 오라고 요구하신다(요 4장). 네 가장 약한 부분, 그 부분을 감추고서 신앙의 열매, 축복만 받으려들지 마라는 메시지 아닐까. 감추고 싶은 네 약점을 인정하고, 바로 거기에서 시작하라는 메시지 아닐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 특히 사랑의 비합리적 측면... 애틋함, 관심, 때로는 맹목적인 열정 등등. 그것 없이 지금까지 꾸역꾸역왔다면, 어쩌면 이젠 그것 없이는 한발짝도 더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 아닐까?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막 막상 여인이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서 다시 오라고 요구하신다(요 4장). 네 가장 약한 부분, 그 부분을 감추고서 신앙의 열매, 축복만 받으려들지 마라는 메시지 아닐까. 감추고 싶은 네 약점을 인정하고, 바로 거기에서 시작하라는 메시지 아닐까.
2014년 4월 10일 목요일
아 참으로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겪는다.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보면 삶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더 삶을 힘들게 하는 고독과 삶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서, 아니 이미 죽음보다 더한 상태에 처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다. 실제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망, 그것은 사랑이 없는 상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The way we know we've been transferred from death to life is that we love our brothers and sisters. Anyone who doesn't love is as good as dead. Anyone who hates a brother or sister is a murderer, and you know very well that eternal life and murder don't go together (The Message, 1 John 3:14 - 15)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겪는다.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보면 삶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더 삶을 힘들게 하는 고독과 삶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서, 아니 이미 죽음보다 더한 상태에 처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다. 실제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망, 그것은 사랑이 없는 상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The way we know we've been transferred from death to life is that we love our brothers and sisters. Anyone who doesn't love is as good as dead. Anyone who hates a brother or sister is a murderer, and you know very well that eternal life and murder don't go together (The Message, 1 John 3:14 - 15)
아무리 생각해도 '포스트모던'이 진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인류 역사에서 오히려 모던이 예외적이었던 것 아닌가? 서양식 모더니티의 성과가 너무 커서 잠시 착각했지만 결국 포스트모던(모더니티) (혹은 프리모던(모더니티))가 더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물론 모던을 경험한 이후에 모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포스트모던은 프리모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성과를 충분히 흡수한 상태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좀 진부하다. 모던은 그렇게 순수한 상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리모던, 포스트모던도 마찬가지. 우리가 전형적이라고 보는 특징들은 사실 언제나 공존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어떤 특징이 지배적이었을까를 따져보는 일이 의미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좀 진부하다. 모던은 그렇게 순수한 상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리모던, 포스트모던도 마찬가지. 우리가 전형적이라고 보는 특징들은 사실 언제나 공존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어떤 특징이 지배적이었을까를 따져보는 일이 의미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합리성, 비합리성의 구분을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이 둘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합리성, 비합리성 중 어떤 특징이 지배적인지에 달려 있다. 모던/모더니티의 경우 그 핵심적 특징을 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은 비합리성이고. (그밖에 연결되는 개념으로... ambivalence, ambiguity, relativism, pluralism, fragmentation, contingency, paradox...) 여하튼 합리성, 비합리성은 늘 공존했다 (모던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칸트, 짐멜, 베버, 니체만 언급해도 충분할 듯). 다만 모던에서는 합리성이 포스트모던에서는 비합리성이 더 주목받고 있을 뿐이다.
합리성의 이면인 비합리성에 주목하려는게 포스트모던이라면... 이미 충분히 포스트모적익인 한국에서는 합리성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일 아닐까?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점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리영희, 김우창 등등?
합리성의 이면인 비합리성에 주목하려는게 포스트모던이라면... 이미 충분히 포스트모적익인 한국에서는 합리성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일 아닐까?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점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리영희, 김우창 등등?
포스트모던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과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현상, 즉 사회적 가치를 더 많이 고려하는 현상 자체도 포스트모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과학은 늘 사회적 가치를 고려했다고 이야기한다. 즉. 모던적 과학, 자율적 과학,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게 역사적으로, 제도적으로는 예외적이었다는.... 반면에 포스트모던의 주장은 모더니티의 근본적 변화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모던 과학을 지속하기 위한 제스처일 뿐이라는...
과학 규제의 강조는 결국 과학과 정치 등 비과학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현상 아닌가? 포스트모던 과학? 한국의 경우는 오히려 과학, 정치의 경계가 분명한 적이 없지 않았나? 모던이 필요한 사회아닌가?
과학 규제의 강조는 결국 과학과 정치 등 비과학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현상 아닌가? 포스트모던 과학? 한국의 경우는 오히려 과학, 정치의 경계가 분명한 적이 없지 않았나? 모던이 필요한 사회아닌가?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이민규, 2014, 새물결플러스)는 결코 가볍지 않는 주제를 다루고 만만한 내용도 아니지만 잘 읽힌다. 대중적 글쓰기에 능한 전문가의 힘이 느껴진다.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느낌, 생각을 남겨두자면...
1.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차이를 언급한 부분. 저자는 성서신학자인데... 성서 자체에서 논리적으로 완결된 교리를 세우기 위해 씌여지지 않았다.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 논리적으로 빠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 조직신학은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 성서와 초대교회가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 이해일 수 있다.
2. 성서의 개념과 이야기는 지중해 문화, 유대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가 유럽 문화의 토양, 특히 근대 계몽주의 이후 유럽 문화 속에서 재정립되면서 그런 지중해 문화, 유대 문화적 해석이 오히려 주변화되기 시작했다. 현대 한국인이 이해하는 성경은 유럽화된 기독교다. 논리적인 정합성을 강조하는... 교리화된.... 예를 들어 믿음과 삶의 구분 같은... 유대문화에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야고보서?).
언어, 개념을 논리적으로 배열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근대주의"의 한계는 기독교 신앙이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탈근대적 세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해봐야겠다.
1.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차이를 언급한 부분. 저자는 성서신학자인데... 성서 자체에서 논리적으로 완결된 교리를 세우기 위해 씌여지지 않았다.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 논리적으로 빠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 조직신학은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 성서와 초대교회가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 이해일 수 있다.
2. 성서의 개념과 이야기는 지중해 문화, 유대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가 유럽 문화의 토양, 특히 근대 계몽주의 이후 유럽 문화 속에서 재정립되면서 그런 지중해 문화, 유대 문화적 해석이 오히려 주변화되기 시작했다. 현대 한국인이 이해하는 성경은 유럽화된 기독교다. 논리적인 정합성을 강조하는... 교리화된.... 예를 들어 믿음과 삶의 구분 같은... 유대문화에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야고보서?).
언어, 개념을 논리적으로 배열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근대주의"의 한계는 기독교 신앙이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탈근대적 세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고해봐야겠다.
1. 굳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원칙, 양심 운운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어떤 부도덕한 행위. 고민할 여지 없는 비판의 대상이다. 원칙을 중시하는 편이고, 지금까지 그런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할 일이 많지 않았다. 대개 남에게 적용할만한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삶이 복잡해지고 이해관계도 복잡해지면서 내 문제에 적용해야 할 경우들이 늘고 있다. 타협한 적도 있고, 타협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해관계란... 결국 욕망, 욕구, 필요의 문제다. 그것을 채우기 위한 방법의 문제다. 욕망이 작을수록 쉽게 비판할 수 있다. 욕망이 클수록, 타협해야 할 일은 많아지고, 유들유들해지는 것이다.
페친 박남일 님의 이야기가 공감된다.
2.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려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면 된다. 굳이 편법이나 꼼수를 쓰지 않고 원칙대로 정정당당하게 살려면 그만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면 된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더라도, 내가 살고싶은대로 살기 위해서 '성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혜리 기자가 이동진 평론가에 대해 했다는 얘기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
페친 박남일 님의 이야기가 공감된다.
글과 글 7
사는 게 편하면 글쓰기가 불편하고, 사는 게 불편하면 글쓰기는 편하다. 가진 게 부족하면 글이 풍족하고, 가진 게 풍족하면 글은 부족하다. 글을 써서 가난해지는 게 아니라, 가난하니까 글이 써지는 것이다.
2.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려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으면 된다. 굳이 편법이나 꼼수를 쓰지 않고 원칙대로 정정당당하게 살려면 그만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면 된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더라도, 내가 살고싶은대로 살기 위해서 '성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혜리 기자가 이동진 평론가에 대해 했다는 얘기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
2014년 4월 9일 수요일
2014년 4월 8일 화요일
현대사회의 문화적 다양성.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조차 하나의 문화.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삼는 발전주의 혹은 발전적 국가주의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중요한 문화다. ... kind of unifying semantics. 오랫 동안 한국 사회의 문화적 통합 뿐 아니라 사회구조적 역량의 증가에도 기여했던. 그 문화는 이제 그것의 기여로 가능했던 사회구조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남아서 시대착오적인 양태를 양산하는데 혁혁히 기여하고 있다. 변화된 사회구조가 발전주의를 필요로하는 면도 있다. 그것의 가치 저하를 막는, 가치를 유지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발전주의를 경제 성장 우선주의로 이해하건 아니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담는 것으로 이해하건 간에 발전주의라는 이념 자체는 한국이나, 시야를 좀 더 넓혀서 아시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unifying semantics라고 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시아에는 unifying semantics가 있고 발전된 서양에서는 semantics of differenz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문장이다.
"모던적 사고를 떠받치는 하나의 기둥은 합리주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 모던적 사고의 두번째 기둥은 주관적인 자유(비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과학이 적용되는 현상계phenomenal realm 이외의 또 하나의 영역, 즉 종교적 도덕적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 인간은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해서 이러한 영역에서 의미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개인주의에 대한 모던의 지나친 강조가 나온다. 낭만주의 운동 역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러한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낭만주의에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이성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며, 그것은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만든 자를 초월하여 인류를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모더니티의 변증법적 특징은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보통 칸트를 가리켜, 과학을 '살린' 동시에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자라고 평가한다. ... 변증법적 사고는 ... 문화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Woody Allen... 그의 필름에서는 ...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과 동시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자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공존한다... " (윌리엄 에드가 William Edgar,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내가 원칙에 대한 내 원칙을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공존하기 힘든 원칙, 경향을 통합해야하는 어려움. 원래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야ㅠㅠ 질서, 원칙도 지켜야 하겠고, 자율적 판단도 인정해야 하고... 독일에서는 '성인의 판단, 책임' 뭐 그런 걸 기준으로 삼는 모양이더만...
"모던적 사고를 떠받치는 하나의 기둥은 합리주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 모던적 사고의 두번째 기둥은 주관적인 자유(비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과학이 적용되는 현상계phenomenal realm 이외의 또 하나의 영역, 즉 종교적 도덕적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 인간은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해서 이러한 영역에서 의미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개인주의에 대한 모던의 지나친 강조가 나온다. 낭만주의 운동 역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러한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낭만주의에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이성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며, 그것은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만든 자를 초월하여 인류를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모더니티의 변증법적 특징은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보통 칸트를 가리켜, 과학을 '살린' 동시에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자라고 평가한다. ... 변증법적 사고는 ... 문화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Woody Allen... 그의 필름에서는 ...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과 동시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자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공존한다... " (윌리엄 에드가 William Edgar, '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내가 원칙에 대한 내 원칙을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공존하기 힘든 원칙, 경향을 통합해야하는 어려움. 원래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야ㅠㅠ 질서, 원칙도 지켜야 하겠고, 자율적 판단도 인정해야 하고... 독일에서는 '성인의 판단, 책임' 뭐 그런 걸 기준으로 삼는 모양이더만...
occidentalism. '서양'에 대해서 가지는 콤플렉스. 서양 근대성이 인간의 삶의 양태를 - 특히 제도적으로 - 포맷한 이후, 그래서 서양의 학자들이 주로 구성한 사회이론이 주류 이론으로 유통되면서 서양 (서유럽과 북미, 호주와 뉴질랜드 정도를 포함하는 지역)이 아닌 지역은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 그 정체성이 이해된다. 비서구, 비서양이 그 대표적인 표현이다. 여하튼 이 지역에서는 서양과의 관계를 어떻게 상정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열등감은 한편으로 서양이론을 배워야 할 대상으로 보는 태도와 반면에 서양이론을 배척하는 태도에서 모두 관찰된다. 추종과 배척 모두 적절한 태도는 아니다.
여하튼 서양, 서양이론을 서양인의 관점에서 수용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서양은 문제가 없나? 아무리 서양 출신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화 간 갈등은 언제 어디에서나 관찰된다. 서양에서도 문화간 갈등이 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짐멜은 주관문화와 객관문화의 갈등, 다니엘 벨은 현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등등.
unifying semantic은 Einheitssemantik에 대한 욕구는 상존! 그게 어떤 식이냐가 문제. 서양의 경우 개인주의, 자율성, 인권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려 함. 메타 문화처럼 기능! 최종 원칙 같은 기능... 그게 더 손쉬운 방식이기도... 동양의 경우 집단, 관계 지향적 문화가 발달. 집단 지향적 unifying semantics가 더 손쉬움. 그 속에서도 서양 사회구조와 문화는 나름 잘 정착되었음.
열등감은 한편으로 서양이론을 배워야 할 대상으로 보는 태도와 반면에 서양이론을 배척하는 태도에서 모두 관찰된다. 추종과 배척 모두 적절한 태도는 아니다.
여하튼 서양, 서양이론을 서양인의 관점에서 수용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서양은 문제가 없나? 아무리 서양 출신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화 간 갈등은 언제 어디에서나 관찰된다. 서양에서도 문화간 갈등이 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짐멜은 주관문화와 객관문화의 갈등, 다니엘 벨은 현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등등.
unifying semantic은 Einheitssemantik에 대한 욕구는 상존! 그게 어떤 식이냐가 문제. 서양의 경우 개인주의, 자율성, 인권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려 함. 메타 문화처럼 기능! 최종 원칙 같은 기능... 그게 더 손쉬운 방식이기도... 동양의 경우 집단, 관계 지향적 문화가 발달. 집단 지향적 unifying semantics가 더 손쉬움. 그 속에서도 서양 사회구조와 문화는 나름 잘 정착되었음.
포스트모던 사조를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원래 (포스트) 모던, 모더니티, 모더니즘 개념이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어서 이를 자세하게 따져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대략 포스트모던을 절대적인 것의 붕괴로 이해하자. 사실 포스트모던이 공격하는 절대는 종교적 절대성, 종교적 진리가 아니다. 그건 전근대에 속하는 것이다. 종교적 질서를 이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무너뜨린 것이 근대세계아닌던가. 종교의 위치에 합리적 사고를 세운 것 아니던가.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종교적 사고와 친화성을 갖는다. 근대적 질서 속에서 그 적자인 과학과 싸우면서 자신을 방어하던 종교는 이제 포스트모던 앞에서 과학과 연대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엔 과학교라도 또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도킨스나 페북의 과학전사 김박사. 이들은 절대적인 무엇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종교인들과 기막하게 잘 어울리는 것이다. 적의 적은 동지? 근본주의 종교인들은 과학을 맹신한다. 다만 그들이 맹신하는 과학은 그들의 신앙을 정당화시켜주는 과학이다. 창조과학! 근대적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인정을 하지 않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랴. 자신들의 절대적 신앙과 과학적 합리성이 어울릴 수 있다고 믿는데...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에겐, 이미 답을 내리고 있는 사람에겐 어떤 토론도 반론 반증도 의미가 없는 것을...
식구들, 친구들, 지인들에게 이런 저런 기사나 정보를 자주 소개하는 편이다. 물론 소개를 받는 경우도 많지만, 어제 경험은 좀 특별했다. 평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정보 등을 소개하던 대상이라... 일종의 지적 우위랄까... 그런 게 있었나보다. 아. 상대방도 이런 약간은 불쾌한 느낌을 가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사와 정보, 지식을 '소개'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전달하는 방식이기고 하니까... 어떤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는 경우 내가 주도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경우 그 정보, 지식은 간접적 억압이나 강제의 성격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어른 세대가 주로 갖는 신앙에 견해가 불편한 이유를 여럿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 대표적인 게 일종의 기복신앙이다. 방금 그 단어를 떠올렸는데 그 순간 또 '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성공, 출세, 축복 지향... "복을 구하는게 뭐 나쁘냐.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다 가난하고 권력도 없는 그런 낮은 자리에 만족해야 하는냐" 이런 반문을 '신앙 좋은' 어른들에게서 어렵게않게 들을 수 있는... 물론 그런 출세, 성공 지향적 신앙관에 대한 비판은 쉽게 들을 수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간절하게 기도를 많이 해도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이방인의 마술적인 신상과 달리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게 하는 방법이란 없다.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내겐 생소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국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대학 교수다.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면 출세하고 성공한 축에 속한다. 그의 부모가 자식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정도의... 정말 출세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잘 되지' 못한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귀를 기울일까. 나를 포함해서... 딜레마다 딜레마. 성공이 전부가 아니다,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는...
2014년 4월 4일 금요일
"수출입 의존도의 상승이 녹색 경제 관점에서 갖는 의미 = 자율성/공동체/생태성 약화"
장상환 교수의 논문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 대한 고찰과 비판"에 대해서 강수돌 교수가 언급한 내용의 일부다. 국내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은 조선시대 신분제에 대한 논의에서도 등장한다(중국과 비교되면서... 미야지마 교수의 경우...). 발전국가가 대외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취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 과정에서 분리가 일상화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국내시장, 국내수요 의존적 발전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까? 라틴아메리카처럼? 노우. 네버.
장상환 교수의 논문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 대한 고찰과 비판"에 대해서 강수돌 교수가 언급한 내용의 일부다. 국내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은 조선시대 신분제에 대한 논의에서도 등장한다(중국과 비교되면서... 미야지마 교수의 경우...). 발전국가가 대외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취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 과정에서 분리가 일상화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국내시장, 국내수요 의존적 발전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까? 라틴아메리카처럼? 노우. 네버.
2014년 4월 3일 목요일
내용엔 동의를 하지만 그것을 교육과 학습의 차이로 표현한 것은 좀 억지스럽게 들린다. 여하튼...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또 공감하는 이야기.
"교육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된다. 시키는 대로 수업에 들어가고,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하고, 시험을 풀고, 평가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학습은 자기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 궁금한지’, 그리고 그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시행착오를 통해 조정해가며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교육이 수동적이라면, 학습은 능동적이다.
(...)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나의 가장 좋은 취미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만일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듣고, ‘성적’이 내가 지식을 습득하는 목적의 전부였다면, 공부가 즐겁진 않았을 것이고, 고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경이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건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경이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김정운 선생이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은 감탄할 줄 알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야기...
"교육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된다. 시키는 대로 수업에 들어가고,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하고, 시험을 풀고, 평가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학습은 자기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 궁금한지’, 그리고 그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시행착오를 통해 조정해가며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교육이 수동적이라면, 학습은 능동적이다.
(...)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나의 가장 좋은 취미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만일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듣고, ‘성적’이 내가 지식을 습득하는 목적의 전부였다면, 공부가 즐겁진 않았을 것이고, 고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경이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건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경이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김정운 선생이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은 감탄할 줄 알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야기...
2014년 4월 2일 수요일
self-reference를 '자기지시'로 번역할 이유를 잘 설명한 글을 만났다. "괴델, 에셔, 바흐" 번역 문제를 다루는 글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박여성 번역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수학적/과학적/철학적 난해함에 압도당한 나머지 대부분의 용어들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생경한 한자말투로 옮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례로 “self-reference”를 “재귀 준거”라는 지극히 현학적이면서도 그 핵심을 빗나가는 번역어로 부적절하게 옮겼더군요. 그러나 『괴델, 에셔, 바흐』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조금 무리는 있지만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끔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이외의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번역어의 설정과 그 개념적 설명은 언제 한번 기회가 나면 상세하게 다뤄보고 싶군요.
"그러나 박여성 번역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수학적/과학적/철학적 난해함에 압도당한 나머지 대부분의 용어들을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생경한 한자말투로 옮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례로 “self-reference”를 “재귀 준거”라는 지극히 현학적이면서도 그 핵심을 빗나가는 번역어로 부적절하게 옮겼더군요. 그러나 『괴델, 에셔, 바흐』의 문맥에서 “self-reference”는 (조금 무리는 있지만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끔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이외의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에 관한 정확한 번역어의 설정과 그 개념적 설명은 언제 한번 기회가 나면 상세하게 다뤄보고 싶군요.
페북중독임에 분명하다. 상태가 심각해지지 않길 바랄 뿐... 하지만... 어제도 썼듯이... 페북에서 배우는 게 많다. 정말 많다. 고급 정보, 지적 자극, 성찰 등을 얻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니 중독되지 않기가 힘든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도 있다. 내 글을 공유함으로서... 심지어 그 성찰이 얼마나 타당한지 검증받을 수도 있다. 댓글을 통해서... 트위터의 경우엔 다른 장점이 있겠지만 내겐 페북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Long live facebook!
그건 그렇고... 오늘도 페북에서 선호하는 글에 대한 내 취향을 확인했다. 믿기힘들 정도의 박식함을 자랑하는 글은 별로다. 그 정보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문장까지 신뢰감을 줄지라도... 특정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식견을 듣는게 훨씬 더 유익한다. 때로는 그 정보 자체는 내게 불필요한 매우 특화된 전문지식일지라도 그 전문지식에서 일상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방식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담백한 글이 좋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고서... 그리고 여유가 있는 글이 좋다. 도저히 끼어들 틈을 보이지 않는 교조적인 글은 전하는 정보가 고급일지라도 쳐다보기도 싫다. (...)
그건 그렇고... 오늘도 페북에서 선호하는 글에 대한 내 취향을 확인했다. 믿기힘들 정도의 박식함을 자랑하는 글은 별로다. 그 정보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문장까지 신뢰감을 줄지라도... 특정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적인 식견을 듣는게 훨씬 더 유익한다. 때로는 그 정보 자체는 내게 불필요한 매우 특화된 전문지식일지라도 그 전문지식에서 일상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방식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담백한 글이 좋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고서... 그리고 여유가 있는 글이 좋다. 도저히 끼어들 틈을 보이지 않는 교조적인 글은 전하는 정보가 고급일지라도 쳐다보기도 싫다. (...)
Baecker의 논문 "Zur Kontingenzkultur der Weltgesellschaft"은 근대 세계사회는 다양성, 이해불가능성, 차이, 우연성 등을 전제로 삼으면서 발전했고, 그런 전제가 있어야 통합가능하다.... 뭐 그런 내용인 것 같은데... Kontingenz, Ungewissheit, Unverständlichkeit... 그건 근대사회의 한 면일 뿐이다. 그 반대의 성향인 확실성, 정확성 등에 대한 지향 역시 근대의 특징이니까 (합리화).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의 문제지. 베버는 드물게 양면을 정확하게 지적한 경우고... 니체는 전자를.... 최근에 알게된 과학교 광신자 페친은 후자에 해당하고. 배커가 이런 점을 모를리 없지만 이 논문에선 전자를 강조한 것 같다. 제대로 읽어볼 여유가 없어서 일단 오늘 느낀 소감만 적어둔다.
2014년 4월 1일 화요일
또 페북이 계기가 되어 찾아 본 남의 생각들. 이해와 오해에 대하여...
쿤데라를 언급하면서 페친 우희종 님이 남긴 이야기.
"조금 돌려 말한다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오늘 같이 따스한 양광이 비추는 아름다운 봄날, 충만한 순간에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자는 인생 헛사는 것이지. 세상을 넘 알려고 하기보다는 느끼면서 살 때, 삶은 생생하게 자신의 것이 된다. 우리는 이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폭력을 행사하는지... 행복은 오해에 있다."
아래는 쿤데라 이해 오해 등으로 검색해서 만난 어떤 블로그 이야기...
["배신당한 유언들"(밀란 쿤데라 전집 12)]. 이 책에서 쿤데라는 뇌가 아찔해질 정도로 다양한 이해와 오해, 믿음과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쿤데라의 이런 분석이 어쩌면 가장 큰 오해와 배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처음이 『농담』인 것 또한 농담 내지는 충고. 농담은 쿤데라의 세계에서 가장 키워드 중 하나일 뿐더러 작가가 이 책에서도 말했듯이 농담은 이해시키거나 학습할 순 없으니까. 쿤데라의 모든 말은 진지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장난기 어린 유머에 대해서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오해가 이해보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인가. 오해와 이해를 판별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에브리맨』이었던가. 여튼 필립 로스의 책 중 이런 글귀가 나오지. 분명한 것은 어쨌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 아는 게 삶이다.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 다시 생각하고는 또 잘못 안다.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다. 우리는 틀렸다. 우리는 틀렸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도 생각이 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해는 오해를 이해시키며 오해는 이해를 오해하고 믿음은 배신을 낳거나 배신은 믿음으로 탄생한다. 이상한 일이지.
쿤데라를 언급하면서 페친 우희종 님이 남긴 이야기.
"조금 돌려 말한다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오늘 같이 따스한 양광이 비추는 아름다운 봄날, 충만한 순간에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자는 인생 헛사는 것이지. 세상을 넘 알려고 하기보다는 느끼면서 살 때, 삶은 생생하게 자신의 것이 된다. 우리는 이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폭력을 행사하는지... 행복은 오해에 있다."
아래는 쿤데라 이해 오해 등으로 검색해서 만난 어떤 블로그 이야기...
["배신당한 유언들"(밀란 쿤데라 전집 12)]. 이 책에서 쿤데라는 뇌가 아찔해질 정도로 다양한 이해와 오해, 믿음과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쿤데라의 이런 분석이 어쩌면 가장 큰 오해와 배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처음이 『농담』인 것 또한 농담 내지는 충고. 농담은 쿤데라의 세계에서 가장 키워드 중 하나일 뿐더러 작가가 이 책에서도 말했듯이 농담은 이해시키거나 학습할 순 없으니까. 쿤데라의 모든 말은 진지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장난기 어린 유머에 대해서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오해가 이해보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인가. 오해와 이해를 판별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에브리맨』이었던가. 여튼 필립 로스의 책 중 이런 글귀가 나오지. 분명한 것은 어쨌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 아는 게 삶이다.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 다시 생각하고는 또 잘못 안다.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다. 우리는 틀렸다. 우리는 틀렸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도 생각이 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해는 오해를 이해시키며 오해는 이해를 오해하고 믿음은 배신을 낳거나 배신은 믿음으로 탄생한다. 이상한 일이지.
페친 중 신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은 그 양반들이 이야기들 중에 마음에 남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민규 님의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를 소용돌이 안에 집어넣으시는 분이시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정말 때론 "하나님이 바로 내 원수다"라고 고백할 만큼 하나님을 드라마틱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어 결국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게 하시고 그때서야 모든 일을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넘치게 이루어 주신다. 지나보면 안다. 이럴려고 그려셨구나! 모든 순간, 모든 일들이, 한점 오차없이 내 영혼의 성장통, 지금을 위한 복이었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막상 모든 것이 더 잘 이루어져 있기에 하나님만 온전히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댓글 중엔 이런 글도...
"당신이 광야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하나님께 그 경험을 통해 주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마음을 열라. 그리고 배울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은 당신을 망치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당신을 재정비하고 계신 것이다."
스티브 파라 /삶의 마지막까지 쓰임 받는 하나님 사람
이 글의 메시지가 전환점,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용돌이 안에 집어넣으시는 분이시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정말 때론 "하나님이 바로 내 원수다"라고 고백할 만큼 하나님을 드라마틱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어 결국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게 하시고 그때서야 모든 일을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넘치게 이루어 주신다. 지나보면 안다. 이럴려고 그려셨구나! 모든 순간, 모든 일들이, 한점 오차없이 내 영혼의 성장통, 지금을 위한 복이었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막상 모든 것이 더 잘 이루어져 있기에 하나님만 온전히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댓글 중엔 이런 글도...
"당신이 광야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하나님께 그 경험을 통해 주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마음을 열라. 그리고 배울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은 당신을 망치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당신을 재정비하고 계신 것이다."
스티브 파라 /삶의 마지막까지 쓰임 받는 하나님 사람
이 글의 메시지가 전환점,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작가인 강영호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글을 발견. "이미지 정치의 힘 (대통령 이명박, 오바마에 대한 이미지 비교 분석)". 한국 대통령 사진. 참으로 촌스럽고도 촌스럽다. 이런 건 참 뭐랄까 몸에 배인 습관 같은 거라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다. 언론 사진의 질... 한국 언론을 보면서 불만족스러웠던 점 중 하나다. 반대로 독일 언론을 보면서 찬탄을 했던, 그리고 지금도 뉴욕타임즈나 슈피겔 같은 매체의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부러운 점 중 하나다. 아. 명박씨 저 사진은... 박정희 사진보다 질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 모델이 시원찮다는 점이 결정적 문제이긴 하겠지만... 여하튼 우리나라...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