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다고 한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도대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무런 소리도 구체적 메시지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모르는지 반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지금도 생생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려주고 있지 않는가. 사랑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안다. 사랑은 관심이다 ['사랑한다'의 가장 강력한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강신주)]. 안타까움이다. 공감이다. 그래서 표가 난다. 상대가 모를 수 없다.
사랑은 모던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 합리성에 가까울까 비합리성에 가까울까? 의문의 여지 없이 후자 쪽이다. 물론 사랑만으로 만사오케이가 될 수는 없다. 낭만적 열정은 합리적 제어를 필요로 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에는 합리적 측면, 비합리적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비합리적 측면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여하튼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위해선 이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하다. "사랑이 부족하다"라고 얘기하는 경우 대개 이 비합리적 측면의 부족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반면에 합리성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학문의 경우... 예컨대 물리학 연구에도 비합리적 측면이 들어있고 도 필요하기도 하다. 물리학 연구의 동기, 연구의 결과 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묻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합리성, 비합리성 이 두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를 뿐이다.
여하튼 학문에도,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관련된 모든 활동의 동기와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이어야 한다. 결국 사랑이다. 사랑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 그 구성원에 대한 애정,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 더 거창하겐 인류에 대한 사랑. 이론과 지식에 대한 사랑. 사회학에 대한 사랑. 식구들에 대한 사랑, 내가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등등.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 특히 사랑의 비합리적 측면... 애틋함, 관심, 때로는 맹목적인 열정 등등. 그것 없이 지금까지 꾸역꾸역왔다면, 어쩌면 이젠 그것 없이는 한발짝도 더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 아닐까?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막 막상 여인이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서 다시 오라고 요구하신다(요 4장). 네 가장 약한 부분, 그 부분을 감추고서 신앙의 열매, 축복만 받으려들지 마라는 메시지 아닐까. 감추고 싶은 네 약점을 인정하고, 바로 거기에서 시작하라는 메시지 아닐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 특히 사랑의 비합리적 측면... 애틋함, 관심, 때로는 맹목적인 열정 등등. 그것 없이 지금까지 꾸역꾸역왔다면, 어쩌면 이젠 그것 없이는 한발짝도 더 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 아닐까?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막 막상 여인이 그 물을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서 다시 오라고 요구하신다(요 4장). 네 가장 약한 부분, 그 부분을 감추고서 신앙의 열매, 축복만 받으려들지 마라는 메시지 아닐까. 감추고 싶은 네 약점을 인정하고, 바로 거기에서 시작하라는 메시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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