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일 화요일

또 페북이 계기가 되어 찾아 본 남의 생각들. 이해와 오해에 대하여...


쿤데라를 언급하면서 페친 우희종 님이 남긴 이야기.

"조금 돌려 말한다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오늘 같이 따스한 양광이 비추는 아름다운 봄날, 충만한 순간에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자는 인생 헛사는 것이지. 세상을 넘 알려고 하기보다는 느끼면서 살 때, 삶은 생생하게 자신의 것이 된다. 우리는 이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폭력을 행사하는지... 행복은 오해에 있다."

아래는 쿤데라 이해 오해 등으로 검색해서 만난 어떤 블로그 이야기...

["배신당한 유언들"(밀란 쿤데라 전집 12)]. 이 책에서 쿤데라는 뇌가 아찔해질 정도로 다양한 이해와 오해, 믿음과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쿤데라의 이런 분석이 어쩌면 가장 큰 오해와 배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밀란 쿤데라 전집] 시리즈의 처음이 『농담』인 것 또한 농담 내지는 충고. 농담은 쿤데라의 세계에서 가장 키워드 중 하나일 뿐더러 작가가 이 책에서도 말했듯이 농담은 이해시키거나 학습할 순 없으니까. 쿤데라의 모든 말은 진지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장난기 어린 유머에 대해서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오해가 이해보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인가. 오해와 이해를 판별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에브리맨』이었던가. 여튼 필립 로스의 책 중 이런 글귀가 나오지. 분명한 것은 어쨌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 아는 게 삶이다.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 다시 생각하고는 또 잘못 안다.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다. 우리는 틀렸다. 우리는 틀렸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도 생각이 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해는 오해를 이해시키며 오해는 이해를 오해하고 믿음은 배신을 낳거나 배신은 믿음으로 탄생한다. 이상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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