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주의/개발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이고 이데올로기다. 최근의 발전주의는 신발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처럼 무지막지하게 때려부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멩박이의 청계천이 대표적 사례 되겠다. 멩박이의 4대강은 "신"을 붙여줄 수도 없는 아주 거지같고 천박한 발전주의다. 여하튼 이 발전주의가 사람 잡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원흉이다. 이 시점에서 서양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거기에도 기본적으로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다만 좀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덜 무지막지하다고나 할까.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 등 후발국의 발전주의가 GNP등 경제 성장에 집중되어 있다면, 경제적으로 좀 더 부유하고 근대화 역사가 상대적으로 긴 서양의 국가들 사이에선 발전주의가 좀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긴 한다. 복지, 환경문제, 인권 같은 부분도 발전의 요소로 상당히 진지하게 고려하니까. 여하튼 한국의 여전히 강고한 발전주의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 정치개혁? 환경문제? 인권운동? 생명윤리? 과연 가능할까? 서양의 68운동과 그 무렵부터 발생한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각종 위험, 생태문제의 도전이 그런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봤다. 서양에서도 그랬으니까. 실제로 환경운동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초기의 자극은 사라지고 이젠 무덤덤해진다. 물론 그런 변화가 만들어낸 제도적, 문화적 변화는 무시할 수는 없긴 하지만.. 지금 일본의 핵발전 문제를 보고서도 꿈쩍않는다. 말도안되는 4대강 (파괴)사업을 강행하는 형편이니. 그런 도전이 되는 일들은 그밖에 각종 위험, 인권문제 등을 들 수 있다. 다 어느 정도 파괴력을 보였지만 딱 그 정도... 생명윤리도 그런 것 같다. 구조적 변화는 의미론적 변화를 수반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의미론적 변화가 너무 느리다.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발전주의에 대한 도전은 있지만... 아직 일상화된 발전주의는 너무도 강고하다. 국가의 성장시장주의와 개인의 성공지상주의는 매우 친화력이 있다. 젊음 부모들도 성공지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대가 바뀐다고 자연스럽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 신발전주의는 오히려 분화된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발전주의는 국가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부여된 문화라면, 신발전주의는 분화된 체계 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문화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변화된 구조에 따라... 다양한 외피를 쓰는 것이다.
(1) 홍성태 선생은 근본적 변화가 없다고 보는 것 같고... 발전국가/신자유주의국가, 발전주의/신발전주의...
(2) 다른 견해도 가능하다. 구조적 변화가 분명히 있고, 문화적 변화가 따라올것이라는. 지금 국가가 발전주의를 저렇게 강조하는 것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국가주의는 곧 개인주의, 자유주의, 기능체계의 성찰이론 등에 자리를 내 줄 것이라는.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3) 흠.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발전된 구조는 새로운 발전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발전주의는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고, 또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쉬운 문화다. 새로운 구조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발전주의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공존할 것이다.
왜? 근대적 구조와 문화는 서양의 역사를 통해서 발전된 것이라 조응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아니 조응해오면서 발전해 왔으니까. 그게 역사적으로 최적화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아시아의 경우는 당연히 다르다. 다른 전통이 있는 구조는 서양에서 발전된 그것으로 포맷해 놓았고, 소프트웨어까지 그대로 깔려고 한다. 저항이 없을 수 없다.
구조적 변화에 기대를 해 볼 것인가? 과연 그걸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구조, 새로운 문화가 가능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런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대 극복)
근대 적응을 해야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 적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도 적응 못하고 극복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여하튼 현재 스코어는? 근대 적응을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발전주의의... 이것이 반드시 사회구조적 조건 탓은 아니다. 사회구조는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복지국가에 대해서... 말은 발전국가, 신자유주의국가 운운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제도화되어있음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이 이뤄낸 것들.... 생명과학, 생명윤리 분야에서는 어떤가? 개인주의와 발전주의는 사실 잘 어울리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추상적, 보편적 개인의 권리를 얘기하는 그런 게 아니라서 그렇지. 인권, 보편적 권리, 상호적 존중, 상식, 원칙, 공적 질서...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다 이렇게 시작해서 발전하는 것 아닌가? 지금처럼 인권, 복지, 윤리 얘기 많이 들은 적 없지 않나? 이것 자체가 긍정적 변화, 발전 아닌가? 이전에 비해서... 부정적인 측면, 적응되지 않은 부분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매스미디어나 학문의 생리 아닌가? 규범적 판단을 서둘러 내리는 것. 정답을 맞추고서 내리는 것. 학문에 있어서도 발전주의의 강고함, 그로 인한 발전주의 비판 이라는 정답을 내려놓고서 주장을 하는 주장질의 학문이 강한 것 아닌가?
우리에 필요한 것은 윤리적 원칙에 대한 토론인지도 모른다. 강고한 발전주의의 폐해는 발전주의/반발전주의로 구도가 만들어져서 중간적인, 혹은 추상적인 논의의 여지가 매우 좁아진다는데 있다. 지나친 도덕화,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는... 정답을 내려 놓고 하는 논의. 입장을 강요받는... 친북/친북아님. 까/빠. 윤리적 원칙에 대한 논의는 사실 좀 더 추상적인 논의다. 물론 서양에서는 다른 식의 지배적 프레이밍이 있긴하다. 그 프레이밍이 논의를 지배한다. 정답없는... 그것은 윤리적 원칙에 대한 갈등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pro-life, pro-choice... 그렇다면 서양과 한국이 다른 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발전주의 중심 framing이라는 점? 논의의 내용과 형식,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은 있다. 윤리적 논쟁을 할 여지를 앗아간다는 점. 서양은 어찌되었던 논쟁의 결과가 법에 반영되고 합의의 형태로 일관성있게 관철되는 편이다. 우리나라는 decoupling의 일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