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어제 저녁 창조성을 다룬 티비 프로그램에서 재즈 연주 이야기가 나왔다.  즉흥 재즈 연주를 하는 사람들의 뇌의 변화를 관찰했더니...

" 전두엽피질에서 변화가 관찰되었다. 이 영역은 의식적인 자기검열과 관련된 부분이다. 즉,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를 관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재즈 뮤지션의 전두엽피질은 그 기능을 멈추기 시작했다. 뭔가 실수할까봐 집중하는 것과 반대로,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자기검열 기능을 끄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를 자주 접하진 못했고 재즈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을 느끼는 편이었는데... 매력을 갖게 하는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다. 반면에 내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도 일부 설명할 수 있게 된...

재즈는 정형화되지 않고 자유롭고, 열린 음악이다. 무형식은 아니고... (음악이 되려면 그럴 수는 없지)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상당한 훈련을 거쳐서 내공을 쌓지 않으면 그 자유를 누리면서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음악의 틀이 단단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시 요약하자면 최소한의 틀, 그 틀 속에서 자유로움, 그 자유로움을 누리고 또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실력과 내공... 이런 것들을 갖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재즈가 가장 자유로운 쪽이라면, 클래식 라이브 공연도 상당히 그런 편이다. 아니 일다는 음반보다는 라이브 공연이 더 그렇다. 가요나 팝 쪽에서도 애드립 구사능력이 필요한 알앤비 쪽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발라드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가수들이 있다. 성시경의 어떤 노래들은 상당히 좋다.

음악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학문이건 일상적 대화건... 재즈같은 학문, 재즈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재즈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뭐. 좋아하면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재즈를 좀 더 찾아 듣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서양인의 관점에서 규범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니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한국 규제 정책이 불안정한가? 불확실한가? 확실한 것 아닌가? 예측가능한 것 아닌가? 정책과 실행 간에 간극이 있다는 것. 익히 알려져 있는 것 아닌가? 예측가능한 것 아닌가? 일탈도 반복되며는 일상인 것 아닌가? 예외도 자꾸 반복되면 그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서양사람들은 일치하고 일관성있는 것에 익숙해서 한국의 정책/실행 분리를 보면 병리적, 예외적인 현상으로 판단하겠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점들을 그네들은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발전국가 --> 규제국가"라는 도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양의 경우 개입주의국가 혹은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적 규제국가로 전환을 이야기하지만, 발전국가 시절에도 규제가 적지 않았거든. 시장에 맡기고 질서유지를 유지하는 서구적 규제국가와 달리, 기업을 관리하기 위한 발전국가적 목적으로 규제를 양산.

“한국에서 정치는 경제의 담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 같은 개발주의국가는 스스로 대기업과 영구적인 결속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업이 정치 ·경제적으로 점점 강해짐에 따라, 정부는 규제수단을 통해 기업을 길들이려 했고, 그 결과 임의적인 규정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이 규정틀은 변덕스렵고 비합리적이고 비지속적이며, 그래서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그 목적을 성취해내지 못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이러한 규정들로 인해, 한국에서 ‘게임의 법칙’은 얼마든지 교섭을 통해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났을 뿐이다."
"정부가 재벌을 통제하기 위해 시장수단을 선택하지 않고, 규제들만을 비대하게 양산할 뿐인 관료적 수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연고주의라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규율중심적이라기보다는 결과중심적인 후발 경제개발의 습성과 연관된다. 한국은 지난 40년간 매우 빠르게 성장했을지 모르나, 진정한 경쟁과 자유시쟁l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심지어 현재의 민주적인 개혁가들도 정부에 의한 임의적 조치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기의 시기에 도처에 존재하는 정부구조를 이용해서 산업구조조정을 강행하고 싶은 유혹은 점점 더 강해진다." (우정은 1999,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기업부문개혁”, in: 창비 1999, 가을호: 308쪽 이하.)


"1980년대 경제자유화 및 안정화 정책을 실행한 이후 한국의 국가는 서서히 발전국가에서 규제국가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등장하고 있는 규제국가는 미주 및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퇴조하면서 등장한 규제국가와는 속성상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규제국가는 발전국가적 속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연호 외 2002, 한국에서 규제국가의 등장과 정부-기업관계, 요약 중)
"새누리 '통일대박론에 이어 경제대박 청사진 제시'"

대통령이란 작자 입에서 '통일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표현이 등장하더니, 이젠 '경제대박'이란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욱'했다. 너희들 때문에 내 수명이 또 단축된 것이야. 천박한 것들 같으니라구.

그런데 취임 1주년을 맞는 박씨 국정 지지율이 62퍼센트란다. 믿고 싶진 않지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중권 형님 표현대로 주름 없이 매끈한 뇌를 장착하신 분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페친 박동서 님의 글.

그렇지 남한 거주민들의 행태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건 단견이다. 합리적인, 너무도 합리적인...

"‘유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나온다‘ 라고 말한 것은 마르크스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요괴가 여기 저기 출몰하고 있다. 이 요괴는 서양에서 태어났음에도 이미 한국인의 신체에 육화(肉化)되어 있다. 그 이름은 ’합리성‘.
이 요괴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목적합리성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걸 하는 건 무엇 때문에?” 즉 목적이 확실하게 될 때 까지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면.
또 하나는 경제합리성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것을 하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있는 거야?” 즉 노력(勞力)에 상응하는 대가가 현금자동인출기의 현금처럼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면.
정치철학자인 테일러(C. Taylor)에 의하면 이러한 합리성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도구적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소여의 목적에 대한 가장 경제효율이 높은 수단이 무엇인가 그 적용을 계산할 때 이용하는 유형의 합리성을 가리킨다. 그 경우 성공의 잣대는 최대효율 즉 비용 대 효과의 최적비율에 다르지 않다.
‘최대효율’과 ‘비용 대 효과의 최적비율’이라는 것은 노동이든 화폐든 투자한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최대로 한 비율이다. 내 주위에도 그 예는 넘쳐난다. ‘상담교사 자격을 따면 취직에 유리하다’라고 믿고 있는 학생들. ‘교사가 되면 이상적인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
즉 도구적 이성이라는 것은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수단을 사용해서 목적을 가능한 한 빨리 달성하는 효율주의에 묶여 버리는 사고의 전형적인 예이다."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UCLA 한국학 교수 Duncan의 글로 유교근대성에 대한 고민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It seems to me that the best way to establish the possibility of some sort of Korean equivalent to “civil society” or the “public sphere” is to demonstrate that there was in the Chosŏn some process of social differentiation analogous to that which took place with the rise of the market economy in Western Europe, a process that both leveled status differences and provided individuals with independent livelihoods that were not dependent on political power and patronage. The arguments advanced by South Korean internal development theorists regarding the “dissolution of the feudal system” and the “sprouts of capitalism”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notwithstanding, I am not sure that any such process began in Korea until after the opening of the country to the outside world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o the contrary, as James Palais has argued, the Chosŏn appears to have been a state and society dominated by an aristocratic landlord class, the central yangban or pŏryŏl, until after Korea was forced open in 1876."

"Finally, let me note that one of the underlying issues that has motivated my argumentation throughout this chapter is a concern with the use of historically specific and highly idealized Western models to interpret Korea’s past. It is not that I consider the Western experience to be somehow inherently superior to the East Asian or Korean experience, or that Western models represent an advanced level of social and political development to which non-Western societies simply cannot aspire. To the contrary, it is because I feel that the unconditioned, nonreflexive use of Western models privileges the modern Western experience and relegates countries like Korea to a kind of enduring subalternation, not only for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when Western powers dominated the world, but also (as applied to earlier centuries) retrospectively for an historical era when countries like Korea and China were arguably more “advanced” in many ways than countries of the West"

출처: Duncan Duncan, John (2002), The problematic modernity of Confucianism: the question of “civil society” in Chosŏn dynasty Korea, in: Armstrong, Charles K. (ed.) (2002, 2nd ed.), Korean Society. Civil society, democracy and the state. London et al.: Routledge, 48쪽 이하.
미야지마, 김상준... 등등. 유교근대(성) 접근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고대-중세-근대"의 서양사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세계사를 재단하려는 서양중심주의의 편협함과 오만함을 통쾌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짜릿할 정도로 반갑다. 하지만 지구근대성과의 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자칫 "정신승리"로 끝나버리기 쉽다. 필요한 접근은...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이 서양에서 시작된 지구근대성의 수용과 적응을 용이하게 했다거나, 반대로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때문에 지구근대성의 어떤 측면은 여전히 수용하기 어렵다.... 같은 식의...구체적 사안으로 들어가서 유교근대성과 서양근대성의 상호관계를 분석해보는 연구는 아주 흥미롭겠다. 미야지마 교수 연구에 그런 점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일제시대때 토지조사사업?), 그리고 Woodside (2006)의 Lost Modernities - China, Vietnam, Korea, and the Hazards of World History 같은 국가, 관료제 연구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유교근대성의 어떤 점들은 근대 과학과 기술 문명의 어떤 점들은 쉽게 수용하게 했고, 어떤 점들은 과학과 기술 문명의 어떤 점들은 여전히 수용하기 어렵게 하고 있고... 같은 식으로... "어떤"을 밝혀내기가 쉽진 않겠지만.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 

- 이원석,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258쪽

참 쉬운데. 이게 정답인데. 그런데... 그게 또... 어렵네. 참...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1)는 한국사회학 역사에서 보기 드문 참신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있을 뿐이지만, 특히 결론 부분이나 이 시대에 대한 함의에 대해서 동의하기 힘들다. "한국사회학"에 실린 "중층 근대성"논문 역시 그런 것 같다. 한국 현실을 설명하는 좋은 틀인데, '그래서 어쨌다고?'를 질문에 답하려면 힘이 뚝 떨어지는...  대부분의 서평이 찬사 일색인데 비해서 창비에 실린 백민정의 서평은 그런 점들을 똑부러지게 잘 지적하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옮겨 놓는다.

"하지만 서구가부흥하면 유학을 맹공하고 서구가 몰락하면 유학을 부흥시키려는 이같은 지적 관행은 더이상 되풀이되어 선 안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는 서구학술사에 대한 어떤 열등감도 없이 , 그간의 지적 풍토와 경향, 무의식적 욕망을 비판적 으로 반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강대국의 사상에 부응하여 또 다른 지적 패권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기보다 오래된 관 행에서 거리둘수 있는희소한기회가찾아온것이 아닐까?"
요즘 내가 챙겨보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 K팝스타3. "짜리몽땅" 노래를 유투브에서 찾아 듣다. "Stand up for love"는 들을수록 좋다. "Loving you" "날 떠나지마" "Man in the mirror" 역시 다시 들어도 좋고. 오디션 프로그램은 진행될수록, 특히 생방송에 들어갈수록 재미가 뚝 떨어지는 경햐을 보인다.  신선한 얼굴들의 신선한 역량, 재능을 확인하는 재미인데 수 개월 동안 방송이 진행되면서 신선함의 정도는 약해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보여주었고, 게다가 생방송의 부담감 때문에 그 재능마저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K팝스타3'도 그런 경로를 밟게 될 지, 짜리몽땅도 예외는 아닐지 궁금하도 또 불안하기도 한 것이다.
"Sociology can only describe society in society … It is a science of the social system and a social system of science.To make matters even more complex, as a science and, as a social system, sociology is also an internal observer of whatever system it participates in." (Luhmann quoted in Lee 1997: 15).

2014년 2월 25일 화요일

신우회에서 "장애신학"을 읽고있다. 장애인 관련 기관에 근무하는 기독교인들이지만 '장애'에 대한 견해가 너무도 편협해서 놀랐다. 책 자체도 불만족스러운 내용이긴 하다. 장애에 특별한 신학적, 신앙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하다. "장애=고통"이라는 시각을 전제로 삼고 있다. 신우회원들 역시 "장애=고통", "장애앤=배려의 대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어쩌면 장애인 당사자도... 교회 내에서도 출세, 성공 등에 대해서 세속적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장애'에 대해서도 세속적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서일까? 오늘 내가 한 얘기의 요지는 장애신학 혹은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는 장애/비장애의 구분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특징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사야서가 그리는 그런 이상향. 심지어 인간 뿐 아니라 "사자들과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글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쓰는 사람이 재미를 느끼며 써야 하고, 적어도 그 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겐 재미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읽히고 싶은 글, 읽고 싶은 글이어야 한다. 논문이라는 장르도 다르지 않다.

재미있으려면...

일단 분명해야  한다. 무슨 얘길 하는지, 이 얘기를 도대체 왜 하는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은 최악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이슈가 되는 주제를 다루면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다. 맥락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철이 지난 주제나 역사적인 진술, 혹은 매우 추상적인 이야기, 혹은 다른 지역에 대한 진술일지라도 어떻게든 현재성/ 현실성을 부여해야 한다. 독자가 지금 처해 있는 시간적 공간적 지적 상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명하게 전달해 줘야 한다. (contextualization!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하다고해서 논지가 너무 단순하거나 뻔해서도 안된다.

논지가 분명하지만 가르치려들거나 선동하려는 목적이 지나치게 드러나는글도 사양.

흠. 이런 표현들 좋다.

"네그리와 하트가 시장이 사적인 것을, 국가가 공적인 것을 독점한다고 말하는 시대"
요즘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마자 조회수 1~3이 기록된다 ('물론' 그 이후로 크게 늘진 않는다. 10을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고 ㅋ). 누구든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둔 상태이긴하나 뭔가 불안하다^^ 감시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ㅎ
블로그 조회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검색 결과로 등장하기만해도 조회수로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비행기를 조종하다 불시착하는... 조사받기...다른 비행기의 동료들...구출작전...핸드폰...식당... 이런 장면들이 기억난다.

2014년 2월 24일 월요일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미야지마 히로시 (1999), 동아시아 小農社會의 형성 중.

"소농사회의 성립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사회 구조상의 여러 특징이 기본적으로는 근대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함과 더불어 형성된 사회 구조상의 여러 특징은 종래 [전통]이라는 말로 일괄적으로 통칭해 왔다. 그리하여 [전통]과 [근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좀더 높은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구별은 있더라도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일본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전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전통]이란 것은 본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본다면 지극히 새로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결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14∼17세기에 걸쳐서 일제히 형성된 것이며.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번째로, [전통]은 [큰대]에 의해 해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는 오히려 거꾸로 이며, [전통]이란 것의 대부분은 [근대] 속에 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때로는 강화되기도 하였다. 도대체 [전통]이란 것이 의식되는 것은, 그것이 소멸해 버렸기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기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 변동을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최대의 분수령은 전근대와 근대의 사이가 아닌 소농사회 성립의 전후에, 바꾸어 말하면 [전통]의 형성 이전과 이후 사이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엽이라는 오늘의 시점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농사회의 성립기에 필적하는 제 2의 대전환기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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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 2003, 근대를 다시본다 -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나는 동아시아에서 16∼18세기는 단지 경제적인 대변동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큰 변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과거제도와 주자학의 결합이 중국·한국에서 14∼15세기에 정착하며,일본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종래보다 훨씬 집권적인 성격을 띠는 정치체제가 전국시대의 동란이 종말을 고하면서 확립되기에 이르렸다. 또한 사회적인 면에서는 가족· 친족제도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문에서 큰 변화가 보이는 것도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였다. 즉, 중국에서는 종족의 결합이 이 시기에 본격화하고, 한국· 일본에서는 쌍계적인 혈연관념에서 부계적 혈연관념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역 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보면, 주지하듯이 중국·한국에서는 주자학이 국가교학
의 위치를 차지하고 예교(禮敎)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에서도 주자학은 국가교학의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으나 주자학적 통치이념의 침투가 적극적으로 도모되었다. 이상과 같은 대변화는 결코 우연히 같은 시기에 생긴 것이라 이해해서는 안되며, 경제적인 변화와 깊이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바 있다. 내가 주장하는 소농사회란, 단지 농업경영 담당자로서 소농이 일반적으로 형 성되었다는 한정적인 의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전체제적인
구조전환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이다.
16∼18세기의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시장의 중심이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경제력을 가능하게 한 정치 사회체제까지도 포함해 동아시아가 유럽보다 우수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기초에 주자학 이념을 기반으로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에 의해 성립된 집권적 통치체제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최대의 요인이었다. 렁이 지적하듯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유럽에서는 근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주민 파악과 그에 기초한 높은 징세능력을 이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체제 때문에 가능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18세기까지의 국가체제 문제를 시야에 넣어야만 19세기의 동아시아에서 고유하게 발생한 곤란을 파악할 었다. 즉, 높은 인구 압박과 환경적 제약 아래서 새로운 국제적 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 19세기에 들어, 지금까지의 국가체제·사회체제가 심각한 질곡의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드라마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유럽적 근대의 갈등· 대립 · 융합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전통’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던 것이 아니라 스기하라가 주장하듯이 ‘전통’에 강하게 각인되면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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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배의 사적 분할”을 본질로 하는 유럽 봉건사회의 정치사상과는 달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인 지배체제”를 대전제로 하는 주자학 사상체계의 영향이라고 본다. 주자학은 사실상 당대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근대적인 사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엄격한 신분제이지만 주자학은 출생을 바탕으로 하는 폐쇄적인 신분체계를 지양했다. 유교 경전을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과거제로 관료를 뽑았고 지배계층은 수시로 바뀌었다. 조선사회의 경우 양반이 과거시험을 거의 독점하긴 했지만, 특정 집안이 통치를 독점적으로 담당하지는 못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16세기 이후의 동아시아를 근대로 봐야 한다”는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에까지 도달한다.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 이토록 어려웠던 것은 결코 중국이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는 이미 별도의 근대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슬람적 근대, 인도적 근대 등 다른 근대개념도 성립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발전 체계를 동아시아에서 적용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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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C         19C       20C      21C        
   동아시아 전통
 (유교적 근대)  ------------------------>
                        서양의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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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건 정말이지 혁신적인 견해인걸.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 이토록 어려웠던 것은 결코 중국이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는 이미 별도의 근대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 multiple modernities이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하지만 "유교적 근대"의 어떤 요소가 지금까지 남아있을지 경험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얼핏 사회구조와 문화로 구분을 해서 "유교적 근대"의 사회구조적 측면은 사라지고 문화만 남아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유교적 근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여전히 제도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예외적이라고 쳐도... 물론 사회구조를 "기능적 분화" 같은 그야말로 초거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눈에 잘 띄지 않을지 몰라도, 관료 충원을 고시제도에 의존한다던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해 등등. 어떤 서양식 근대 제도는 잘 수용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사회구조적 조건일 수도...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페친 강창래 님의 고전에 대한 견해.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고전을 역사적인 텍스트로 보는 접근은 환영한다. 얼마든지...


오늘의 독서 : 여전히 고전은 오랫동안 비판을 견뎌온 작품들이다?

글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로렌스 레빈Lawrence Levine(1933~2006 사진)에 따르면 그 고전 목록은 1차대전 이후 등장했다가 2차대전 이후에 사라진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잠시 위대했던 책들이었을 뿐’이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의 고전목록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로드컬처가 시작되고, 흑인들의 저작물들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레 소잉카의 소설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유럽에서는 1955년 레비 스트로스의 저작물들이 서양 중심의 가치체계를 부정하기 시작했고, 1950년대말에는 프랑스의 아날학파가, 영국에서는 '문화연구'가 지배층의 문화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삶을 역사학과 문화의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를 흔들어 버린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대략 19세기말에 미국에서 '고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고전들에 대해 마크 트웨인은 "다들 좋다고 하면서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했다. 다시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만일 입학시험이 없다면 일반인들이 읽을 책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지 않을까.

그러나 고전이 고급문화의 핵심이라는 생각 자체는 면면히 이어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1986년에 앨런 블룸이 다시 고전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미국 정신의 종언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을 써냈다. 이 책에 대해 많은 언론이 호의적인 기사를 썼고,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저자를 사회적인 유명인사(그리고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이런 블룸의 주장은 엄청난 풍파를 일으켰다. 1988년에 열린 인문교육의 미래에 대한 채플힐 학술대화에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블룸의 주장에 대해 ‘인문학과 문화 자체에 대한 편협하고 낡은 해석’일 뿐 아니라 ‘오래 전에 무덤에 들어간 유럽 백인 남성들이 쓴 작품들만을 강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현대사회는 너무 달라져 있기 때문에 블룸의 생각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참 아이러니하다. 원래 고전 목록은 대학의 고등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블룸의 편에 선 학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대학 안에서 나왔다는 것은 두 가지를 반증한다.

하나는 이제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을 대놓고 부정하는 인문학자들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듀크대학의 영문과 스탠리 피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주장은 문화나 생활양식 또는 관습에 대한 다양한 미국민들의 종족적인 관점과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유럽의 엘리트 문화를 최고의 가치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일 뿐이다.
개인주의적 지향, 위계적 질서... 이 둘은 상극인 것 같다. 개인주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보는 것은 맞지만, 자신의 한계를 잘 설정하기도 한다. 개인으로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만 올인해야 하기도 한다. 남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원칙적인 평등, 원칙적인 기회의 균등이지만, 개인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함께 살 수 있다 (유기적 연대). 전문가의 권위,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권위를 선선히 인정한다. 신뢰를 준다. (제도적 신뢰, 체계신뢰)

하지만 자기중심적 개인주의도 있다. 다름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되려고 한다. 모든 분야에서. 평등지향적이다. 남을 잘 믿지 않으면서 남을 엄청나게 의식한다 (기계적 연대).

한국엔 서양식 개인주의는 문화로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걸 가져야 할까? 사회구조는 분명히 그것을 요구하는데....


"한국적 개인주의"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결과로 나온다.

"서양인의 개인주의가 독립된 자아를 바탕으로 하여 타자와의 동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하면, 한국인들은 여전히 경계가 불분명한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많은 관계에 종속되어 있고, 그 관계를 통해 나를 확인하려고 하게 된다."

"한국에서 꽤 오래 살았던 어느 서양인의 한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은 개인주의가 발현한 미국인들보다도 더 개인적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개인주의는 한국적 개인주의다. 미국인들의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경계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지만, 한국인의 한국적 개인주의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는단다."


"평등에 대한 생각은 서구인과 한국인이 다르다. 구미사회에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개성이나 능력, 노력이나 소질 같은 비기회성의 모든 것까지를 포함하여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평등의식이 지배적이다.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소속된 집단에 의해 조정되고 조화를 이루는 서구식 개인주의와는 달리, 농경사회의 집단적 무책임 성향은 버리지 않은 채 개인의 이익이나 주장만 내세우는 것이 아직껏 숙성 되지 못한 한국적 개인주의다."


이건 좀 더 재미있는 대화다. (출처)

"하: 그러고보니 허교수님 말씀대로 '왜'라는 질문이 없으니까 사회 내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도 없는 것 같다. 왜 필요한지를 알아야 그것에 투자를 할 때 가치를 느끼기 마련일테니까

성: 사람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없으면 돈으로 그런 것을 얻으려고 하게 된다. 물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겠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모두들 소비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하: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서를 써보라고 하면 기가 막힌다. 학교 이름만 바꿔쓰면 내용이 똑같다. '자기다움'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아버지는 누구, 집은 어디 같은 겉으로 드러난 것밖에 없다. 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함: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는 오히려 '과잉애착'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엄마가 아들을 절대로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정서적으로 성숙하기 어려운 구조고 여자들은 과잉성숙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요즘 한국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개인주의의 특징은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현상이다.

아까 하교수님께서 '한국인에게 가치가 없다'고 하셨는데 미국에는 개인의 존엄성, 자율과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옛날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는 상황이다. 대신 예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반항, 저항의 움직임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나친 완벽주의도 한 요인

하: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집단으로 하면 대충대충이다. 그런데 개인별로 보면 모두 완벽주의에 걸려있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모두 다 강박증이다. 이해가 안 가는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완벽증이라는 게 두 가지를 나타낸다. 하나는 항상 완벽하려고 하니까 항상 자기자신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번도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고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상대적 빈곤감이 생겨난다.완벽주의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현상은 all or nothing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이렇게밖에 못살아'라는 생각이 들면 죽어버리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자살 현상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함:
 외국인들이 이 부분에 관해 재미있는 설명을 했는데, 한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부끄러워한다(shameful)고 하더라. 그런데 사회적 수준에서 누구와 비교하면 엄청난 쇼비니스트(chauvinist: 배타적 애국주의자)란다. 'shame and chauvinism'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읽었던 페친 황두진 님 이야기. 지금 미국 여행 중인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이 이야기가 며칠 동안 머리 한 켠에 있었는데, 다른 맥락에서 떠오르면서... 뭔가... 한국 사회의 특징 이해, 그리고 한국(혹은 동아시아)과 서양(그러니까 서구와 북미)의 차이에 대한 사회구조적 설명에도 획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내 접근과 아이디어어 한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아. 이 아이디어를 여기에 발설해야 하나? 그렇다면 천기누설 같을 것이다. 지금 심정으론... 일단은 보류. 두고두고 내 연구에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길 강력하게 희망한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직접 고객을 대하는 사람들의 업무능력이 우리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슈퍼마켓이 대표적이고 공항 같은 곳도 예외가 아니다. 무슨 일을 저렇게 답답하게 하나 싶은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종종 짜증도 나고 심지어 "이 나라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리고 이전의 경험으로 보면, 그건 미국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우리와 좀 달라서 그런 것 같다. 미국은 능력있는 사람을 나이 등과 무관하게 책임있는 자리로 빨리 승진시키는 사회다. 그래서 위로 올라 갈수록 사람들의 자질이 좋다. 여행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일을 잘 하고 있고 그래서 전체적인 생산성이 우리보다 높다. 그리고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간다.
언젠가 중간관리자 레벨까지는 한국이 세계최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가면, 즉 높은 자리로 가면 갈수록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경험적으로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닌듯 하다. 무능한 윗사람들이 사고치고(?) 결국 보통 사람들이 죽어라 고생해서 겨우 돌아가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인데, 받아들이기 싫지만 아마 인정하고 심각하게 개선해야 할 것이다. 


기아 타이거즈를 포함한 한국 야구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원인이 뭘까.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 같은 각종 전망들에 몇 번 속아봐서? 기대치가 낮아서?
예를 들어 ...  오늘 기사 "달라진 SUN, KIA를 춤추게 할 것인가". 코웃음부터 나온다.  기사 수준이 턱없이 떨어지는 것이다. 한 두 팩트를 가지고 소설을 써내는 것이다. 블로그 정도에 쓰면 좋을 '감상문' 수준인 것이다. 야구라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풀어가는 방식이 턱없이 후진 것이다. 내가 갖는 한국 스포츠 언론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독일 시절로 거슬러 가서 찾을 수 있다. 수 년간 구독했던 Süddeutsche Zeitung 스포츠 기사 면을 읽던 재미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 언론 뿐일까. 한국 언론과 방송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몹시 떨어진다. 아니 어디 대중매체, 언론의 수준만 그럴까. 여하튼...

기아 뿐 아니라 한국 야구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 뭐랄까. 별로 뛰어나지 않은 고만고만한 학생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모습같달까. 게다가 기아의 경우는 이용규, 윤석민도 없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럴 때 답답하다.

딱 이 얘긴 아니었는데...

경주 리조트 부산외대 학생들 사고 당시 입구에 추차해 놓은 언론사 차량 탓에 구조차량이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대단한 사명감을 지닌 언론인들 나셨다 그죠?


며칠 전... 김무성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도 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오늘(20일) 대한변협 초청 강연에서 정치권의 복지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을 뿐이라며 '복지공약 파기 비판'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을 옹호했습니다.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인데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습니다. '내가 당선되면 어르신 여러분 한달에 20만원씩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노인들 표가 많이 나왔죠. 그러니까 이제 거짓말 안 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 20만원씩 드리라'(고 했는데) 돈이 있어야 주죠. 돈이 없는데 어떻게 줍니까." 

이어 김 의원은 국민들이 공약에 속아서 표를 찍어주고 있다고 지적한 뒤, 당선이 우선인 정치인들에게 국가재정건전성을 감안해 공약하라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선이 우선인 정치인들에게 국가재정건정성을 감안해 공약하라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흠. 당선에 올인하는 대단한 정치인 나셨다 그죠?

천하기로는 멩박이를 따라올 자 드물고, 무식하고 생각이 짧기로는 그네를 따라잡기 힘들다. 천한 언론인들... 천한 정치인들... 에라 이 천한 것들 같으니라구.

한국에서는 정치체계의 코드, 언론체계의 코드에 충실한 정치인, 언론인을 보긴 쉬운 일인 것 같다. 기능적 분화가 아주 천박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한국에선 근대성의 원형, 초기 근대성, 그러니까 세련되기 전의 원초적 근대성을 서구보다 더 적나라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언론, 정치 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경제.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 Pariakapitalismus)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종교 또한 자율성 주장이 매우 강력하다. 역시 '천박'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모든 체계가 그런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과학체계. 과학에 있어서는 근대적 과학이 전혀 자리잡지 못했다. 에 근대 적응까지 아직 멀다. 예술 또한 그런 편. 의료체계는 강한 편인듯. 오히려 병을 만들어서 - 과잉 진단, 예방 검진 -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편.

서양에서도 체계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이 재미있을 것 같다. 체계들이 모두 비슷한 메커니즘을 보이고 있고, 모두 비슷한 정도의 자율성을 누린다고 상정하는 것보다. 체계 간의 불균형, 위계적 관계 - 질서, 불평등. 그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가 아무래도 위계의 위쪽에 자리잡았을까? 그러다가 경제가 부상? 한국에서는?

과학체계는 그 자율성을 한 번 이라도 제대로 누려본 적이 있을까?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서도?

체계의 자율성이란 일종의 환상, 이데올로기, 속이 빈 기표 같은 것 아닐까? 개인주의가 얘기하는 평등, 인권 같은 개념처럼?

루만 이론은 그런 환상의 유포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굉장히 규범적인 이론이 아닌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데 막상 그런 연구는 - 없진 않지만 - 별로 많지 않은...

체계의 자율성, 자기생산성을 강조하는데 루만의 강점이 있다면, 체계 간 관계의 문제에 대해선 루만 이론이 누더기가 되는 것 같다.

2014년 2월 23일 일요일

대학 시절, 그러니까 한국 대학 시절엔 에리히 프롬은 거들떠 볼 생가도 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맑스의 사랑론을 읽던 무렵이니까 프롬은 너무 소프트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페친 홍익희 님이 프롬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은 글을 옮겨 놓는다.

유대인을 연구한 유대인, 에릭 프롬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하나가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건 행운이다. 하지만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을 사랑하려는 의지는 위대한 것이라 했다.”

유대인에게 학문이란 스승의 이론을 뛰어넘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흡수하는 것으로는 학문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에릭 프롬도 이를 위해 유대인 선배들의 이론을 뛰어넘기 위해 그들을 집중 탐구하였다.

에릭 프롬은 오랫동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을 연구했다.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초기와 후기가 서로 모순됨을 발견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로이트는 ‘인간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프로이트는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보편적인 삶과 죽음(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본능 가운데서 몸부림친다’고 했다. 프롬은 이 같은 프로이트의 두 이론 사이의 모순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며 비판했다.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분법적 사고 역시 비판했다. 프롬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양 극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의식에 대한 설명은 제한적이라고 한다. 또한 프로이트를 여성혐오자라면서 비난했다. 그러나 프롬은 이런 오류들에도 프로이트의 성취에 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프롬 사상의 특징은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 이론을 사회 전반에 적용한 것이다. 1941년 에릭 프롬은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정치심리학의 선구적인 저서로 파시즘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혀, 민주주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성장이나 자아실현이 방해될 때 일종의 위기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이러한 위기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나 성적인 사디즘, 마조히즘으로 나타나며 나아가 권위에 대한 복종 곧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권위주의에 빠지게 된다. 프롬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를 실현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프롬이 두번째로 주목한 유대인은 스피노자였다. 그는 스피노자처럼 「행복은 덕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곧 생산적인 생활과 인간의 행복이나 성장을 바라는 인도주의적 윤리를 신봉할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롬은 신경증이나 권위주의, 사디즘, 마조히즘은 인간성이 개화되지 않을 때 일어나고 이를 인간적인 파탄이라고 했다.

프롬은 또 마르크스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대자들과 지지자들의 잘못된 지식들을 바로잡기 위해 《에릭 프롬,마르크스를 말하다》를 저술하기도 했다. 프롬은 유대인 전문 연구가였다.

프롬은 1947년 윤리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인 《인간 상실과 인간 회복》, 1956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 1976년에는 《소유냐 존재냐》를 저술하였다.

프롬은 이러한 저술과 분석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소외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틀임을 밝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할 때 인간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구조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출처 위키백과 등)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페북에서 업어 온 이야기.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마라. 너만의 독특함을 가져라. 최고는 항상 남을 이기고 앞질러야만 얻을 수 있는 비정한 전리품이지만, 독특함은 무리에 함께 섞여 온유함을 나누면서도 언제라도 너를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힘이다.

- 임태주님의 '아들에게 주는 충고' 중에서
발전주의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탈발전주의"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 같다. 구조적으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방향성의 연장 아닌가? 심지어 "방향성을 설정하지 않음"을 얘기한다면, 그 자체가 지향해야 할 바가 되면, 또 다른 방향 아닌가? 도대체 근대 이후 발전주의, 진화론에서 벗어나는 가능한가? 시간화? Temporalisierung? 근대의 "시간" 개념은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흐르는 강물 같은... 근대인은 '발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맑스는 물론이고, 생태주의자 역시... 다만 발전의 내용을 무엇을 채울 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 경제 성장, 자율성의 확대, 다양성 인정, 연대, 평등 등등. 어떤 가치가 중시되는 상태로의 발전을 꾀하느냐가 다를 뿐이지 근대인은 누구나 '발전' 시각에서 세상을 본다.

"기능적 분화"가 근대사회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인가? 서구중심주의인가? 아시아에서는 나름의 기능적 분화로의 길이 있었나? 아니면 철저하게 외삽된 것인가? "기능" 자체가 없진 않았겠지. 경제, 문화, 학문 등등. 그런 기능 중심으로 사회 재생산이 추동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여하튼... 아시아에도 나름의 기능적 분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뭐 정신승리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발전주의적 접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multiple modernities도 결국 너희들이 자랑하는 modernity 우리에게도 있어서. 뭐. 그런 얘기 아닌가? 그냥 기능적 분화든 자본주의든 근대성은 서양 역사의 독특한 산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고 더 나을 것 같다. 근대 이전의 상황은 지역 차이가 워낙 크지 않았나? 물론 그 전에도 세계적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의 세계화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 않았나? 여하튼 근대 이전에는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포스트모던이 의미가 있는 것은, 모던에 대한 낙관론을 깨 부셨다는 점. 어쨌든 근대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에 최대한 적응하고, 고쳐 쓰면서, 극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조건...

서양은 조금 더 적응한 것일 뿐이다. 그 차이를 무시못하지만... 여하튼... 한국은 조금 더 살기 좋은 나라, 스트레스 적은 나라가 되려면, 경제성장 지향적 발전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 조금 더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하면 경제성장 지향적 발전 모델을 포기해야 경제성장이 지속 가능하다.

생명윤리와 관련해서... 경제적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생명과학연구를 보면 윤리가 최소화될수록 좋다. 오히려 서구와의 윤리 격차 차이를 이용해서 기회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나쁜가?
이런 얘기를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어준 얘기라야 먹힌다. 왜? 그 양반은 나름대로 성공했거든.

사람들은 계획들을 참 많이 해요. 계획만큼 웃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될 리가 없어요.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전 무신론자지만, 가장 사람에 대해서 비웃을 게 그 부분입니다. ‘계획을 세웠어 이것들이.’ 그렇게 될 리가 없죠. 행복한대로, 닥치는 대로 사세요. 욕망의 주인이 되십시오. 어쨌든 행복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세요.
페친 김준우님 담벼락에서

"저자(야고보의 경외서 - 옮긴이)는 실제로 인간 예수를 직접 본 사람들이 더 유리할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진리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부활한 예수]는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아무도 내 명령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자신이 충만함으로 들어간다’”(2:28-33).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 너희 자신을 성령의 아들처럼 만들어라!”(6:19-20). “가능하다면, 나보다도 더 먼저 도착하여라”(7:14). 

 - 월터 윙크

흠흠. "도마복음"이나 이 "야고보의 경외서". 참 "신선한" 주장을 담고 있다. 신선한... 하지만 신선하다는건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진부하게 들리리라.
한국은 아직 후지다. 발전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이다.그래 그런 점에서 distinctive한거야!

사회구조는 변하고 있는데, 문화적으로는 발전주의가 아직 지배적이다. 그것이 이 사회의 비정상적 모습을 만들어내는 근본적 원인이다. 국가 뿐 아니라 시민사회/대중 역시. 민주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생명윤리 규제는 구조적 변화에 따라 필요성이 커졌는데, 발전주의적 문화 때문에 그 필요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탈발전국가 시대에는 불확실성이 커진다. 훨씬 더 복잡한 거버너스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체계들의 자율성이 증가한다. 발전주의 담론, 그리고 그것을 주적으로 삼는 탈발전주의 담론 간의 갈등은 다양한 담론,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흡수해 버린다.

구조적 분화에 걸맞는 문화를 갖지 않으면 성장도 못한다.

물론 이 과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구조적 분화는 끊임없이 전체를 포함하는 문화를 요구하기도 하니까. 성장 지상주의, 발전주의, 민족주의 등을 선호하기도 하니까. 그런 역동성 속에서 안정성, 확실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으냐가 중요하다.

ps) "발전주의"라고 한국의 특징을 표현하기는 좀 뭣하다. 발전주의는 사실 한국 뿐 아니라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 제일주의"가 사실은 한국 문화의 특징적인 점으로 들 수 있는 표현이다. 아니면 "발전주의"를 "발전국가의 문화" 정도로 좁게 이해하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Wong 선생이 "규제 불확실성"을 이야기하는 통에 어제 "규제"에 대한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봤다. 주로 행정학자들이 쓴... 솔직히... 토 나올 뻔 했다. 아. 내가 저런 - 내 관점에서 볼 때 - 쓰레기 같은 논의에 끼여들어야 한단 말이야? 노우! 네버! 이야기를 그 쪽으로 풀어가면 안되겠다. 물론 교과서에 가까운 책들이라서 그럴 수 있다. 생동감, 현실감이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그냥 공무원 시험용 교재 같은... 그런 책을 가지고 그런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이란 것도 참 문제는 문제겠다. 그나마 다시 읽은 홍성수 "규제학"논문은 흥미로웠다. 현상황과 이론적 논의의 교직을 매우 설득력있게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론이나 어떤 연구 분야에 대한 소개 논문을 쓰더라도 그런 식으로 쓸 필요가 있다. 내가 또 역겨워하는 식의 논문은... 최근에 읽은 루만에 대한 어떤 글. 세상에. 그게 루만인가? 뭐. 루만의 어떤 한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루만이랴면 난 접촉조차 하기 싫다. nichts zu tun. 그런 식으로 루만을 풀어내다니 기괴하다. 기괴해.

재미있게 좀 풀어내자. 생각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도대체 네 생각이 뭐냐.
창비 팟캐스트에서 시인 신경림 선생 인터뷰를 들었다. 여든이시라고. 그리고 11번째 시집을 내셨다고. 흥미로운 대목은... 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든데... 시가 변혁운동에 복무해야 했던때라고. 그러면서 시는 가르치거나 계몽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고...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시인으로 권혁웅을 들었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같은 시집... 모처럼 시집을 한 권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사회학도 좀 가르치려는 강박에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를 생각했다. 사실 인문학은 그런 것인데. 사회이론은 그런 것인데.

우연히 서양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하는 모임 이야기를 페북에서 접했다. 어제는 정용섭 목사님의 책 '신학공부'를 신청하기도 했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뛴다. 사실 루만도 지적인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에 보는 것인데, 적용, 응용 쪽을 생각하다보니 재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생명윤리 이야기도... 재미있는 주제인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다보면 재미가 없어지는...

아침에 딸이 책장에서 꺼낸 책이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 강의"였다. 세계체계론으로 자본주의 역사를 쉽게 풀어내는... 그런 공부를 하고 싶고, 그런 책을 쓰고 싶다.

박사학위 받은 자랑질을 조금 전 페북에 보고야 말았다. 뭐. 잠시 자괴감에 사로잡힐 테지만, 오래지 않아 평온함을 찾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고민하리라.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 앞에 놓인 저 끔찍한 뭣도 아닌 텍스트와 주제들 사이에서...

한국에 문제가 너무 많다고 난리다. 예를 들어 페북에서 하루에도 엄청난게 많고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거론된다.

예컨대

"이곳은 서울 마포대교입니다. 투신자살을 막기 위해 2012년 9월부터 생명의 다리로 꾸몄는데요. 하지만 투신자 수는 오히려 크게 늘었습니다.2012년 15명에 불과했던 마포대교 투신자 수가 지난해엔 6배인 93명으로 급증한겁니다.생명의 다리란 유명세가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은 이제 그동안 성취한 것을 좀 누리라고 책망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지?

분명한 것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든 것. 유홍춘 선생... 꾸준히 한국미술,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소개하는... 7,80년대부터... 자살하려는 사람, 간첩사건 조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그런 이웃들에게 당장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신경림 시인은...평생 시를 좋아하는... 꼰대질을 싫어하고 시 자체를 좋아하는... 누가 뭐라든... 결국은 "자기"를 찾아야 한다. 남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가르침, 계몽의 강박에 대해서... 그런 것이 없어야 정말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을텐데... 어쩌랴. 지켜본 바로는 내겐 그런 강박이 있다. 꼰대기질... 원칙주의자... 원칙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에서 출발하지 않고, 추상적 원칙이나 거시이론적으로 사고해서 결론을 내길 좋아하는... 사회비판적이고 계몽적이다. 내가 제일 신나는 경우 중 하나는 '지적질'할 때다. 특히, 한국사회의 이러저러한 문제를 지적할 때... 반면에 독일사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나질 않는다. 왜? 한국에 애정이 더 있어서?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독일은 벌써 선진국이자 한국의 미래로 상정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발전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 자체는 발전주의 이후로의 "발전" (예를 들어 더 생태지향적인 상태로의 발전이나 복지를 갖춘 등등) 을 전제로 하는 또 다른 발전주의적인 접근이다. 비판과 진화, 진보의 사고방식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게 딱 내가 관심있는 부분이다. 대단한 박애주의자, 세계주의자, 사해동포주의자도 아니고. 그냥 나와 내 조상이 살아온 이 땅 위의 사람들이 좀 더 잘 살길 바라는 것이다. 조금 더 나누면서 조금 더 즐기면서 조금 더 재미있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홍성수 2009, 규제학 - 개념, 역사, 전망"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보다 더 효율적이기 힘들 정도로 길지 않은 글에 꼭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 읽고 나는 떠오른 다른 홍씨. 홍성욱. 이 양반 글을 읽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다. 내가 외국어로 읽어서 어렴풋하게 흐릿하게 아는 이야기들을 깔끔하게, 이보다 더 깔끔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야무지게 요약해내는 능력. 그건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두루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루만에 대해서는 장춘익, 정성훈 선생의 설명이 그런 것 같다. 그런 사람들, 그런 방식의 작업을 좋아하니 나도 조금을 닮겠지. 그러길 희망한다. 그저 희망한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에서 올림픽 2연패를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소식을 확인하고선 무척 실망했다. 기사를 찾아 읽어보고 경기 영상도 일부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쇼트프로그램의 경우 러시아 선수 - 이름이 뭐더라? - 경기가 인상적이지 않았고 과대평가되었다고 느꼈다. 프리프로그램은... 우선 시도한 기술이 달랐다고 한다. 러시아 선수 프로그램이 난이도가 높아서 모든 기술을 보여주었을 때 약 4점 정도 높다고. 김연아는 어쩌면 안전한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긴 했지만 4년 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속도는 느린 듯해서 전체적으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에 러시아 선수는 매우 역동적이었고. 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쇼맨십도 가진 것 같고. 홈 텃세 탓에 심판들이 점수를 공정하게 주지 않았다는 점은 백번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김연아는 그냥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데 목적을 둔 것 같다. 심지어 이번엔 목표의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수용할 수도 없는 일이고... 여하튼 안타깝게도 이런 얘기를 다른 한국 사람과 나누기는 힘들다. 모두들 흥분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NYT 기사가 상황을 잘 정리하고 있다 ("Stained Gold Can Help Clean Up System"). 그렇게 판정할 수도 있었던 정황을 상세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자국 선수의 문제도 아닌데 이 정도로 심도깊은 기사를 낼 수 있다는 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NYT의 저력이고 미국의 저력이다. 당사자격인 한국 언론도 나름 애를 쓰고 있는 것 같긴 하나 많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 신문들 보면 참 안타깝다. 텔레비전방송도 그렇고. 뭐. 한국에 부족한게 어디 그것 뿐인가. 경제, 정치, 학계 등등. 똑똑한 사람들은 많은데... 아직 먼 것 같다.

ps 1) 한국 보도 언론의 현실을 잘 짚어주는 글을 만났다. 그 수준이 무려 이 정도다.

"불행히도 한국의 보도 기사로 실리는 글들은 그 대부분이 저널리즘의 모범글로서 가치가 없다.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는 사례로서는 훌륭하다. 그럼에도 기자 지망생이나 초년 기자들은 이렇게 잘못된 문장을 보고 흉내내며, 그런 표현을 더 자주 쓰는 것이 직업적 숙련의 증표인 양 착각한다. 그 결과, 당장 고쳐야 할 오류들을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답습하고 계승한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외신이 더 정확하게 쓴다. 우리가 언론인을 가르치지 않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 언론이 가진 많은 문제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ps 2) 취재은 안하고 외신만 열심히 번역해서 기사로 만드나 했더니, 그 외신마저 잘못 번역했거나 그것도 검토하지 않고 그냥 옮겨 나른 경우가 허다한 모양이다. 욕나온다.

<소치올림픽> "피겨 심판 양심선언" 기사는 오역
고위관계자 '러시아에 유리한 심판배정' 발언피겨 심판 "러시아에 점수 퍼줬다" 고백으로 바뀌어외신기사·외국선수 발언 '의역' 자제해야

ps 3) 뉴욕타임즈 일부 기사의 문제점,  판정도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다는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ㅍㅍㅅㅅ의 기사. 흠. 참 판단내리기 어렵구만.

2014년 2월 20일 목요일

뭐. 대략 맞는 듯...


60 Signs You Studied Sociology In College

요즘 페친 글을 자주 인용하거나 옮겨 놓는데, 공식적으로는 페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번엔 페친 염신현 님의 글..
 

간결한 글이 좋다. 긴 글은 본질만 이야기하다 본질을 놓친다. 풀어져 버린다. 

언젠가 읽은 내용. 황폐함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을 말하기 위해 작가 김훈은 딱 두 가지만 골랐다. 말라버린 마을의 우물과 방 바닥에 버려진 소년의 노트. 두 가지면 충분하다 했다. 사실 묘사된 마을은 실제의 마을보다 더 마을 같았을 것이다. 

빈 하늘에 작은 구름 하나가 하늘을 가득 채운다. 하얀 눈밭 위로 내민 마른 갈대 하나가 눈을 완성한다. 작은 숨소리 하나가 침묵의 한가운데에 꽂힌다. 손을 털고 손등의 금반지를 보는 시선과 새끼손가락이 든 채 맥주잔을 드는 손과 꼭 허공에 한 번 뻗었다 내리는 하얀 양복 소매에 금시계...는 양아치보다 더 양아치같은 양아치를 만들어낸다. 언제나 중요한 건 사소한 하나다. 

한 사람의 지배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가장 작은 단 하나는 무엇일까? 거북이에게 등껍질의 이끼 같은. 만두아저씨에게 앞치마에 묻은 하얀 밀가루 같은. 끊임없이 머리카락을 마는 검지 손가락과 무료한 여고생의 오후 5시의 시선같은. 중요한 건 하나여야한다.

그 하나를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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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넌 뭘 보았니? 딱 하나만 말해봐. 그 사람의 젤 중요한 거 하나만.> 

간결한 글은 나도 좋아한다. 사실 누가 그렇지 않으랴. 하지만 간결하게만 쓸 수 없는 사태와 상황이 있지 않은가. 뭐. 이것 또한 누군들 모르랴. 이 '간결한' 글에서 더 흥미로운 부분은 '언제나 중요한 건 사소한 하나'라는 얘기다. 그것도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과연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사소한 하나'만 가지고서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황폐함으로 가득한 농촌"에 대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사소해 보이는 "마을의 우물" "방바닥에 버려진 소년의 노트"만 가지고도 메시지가 전달이 되는 것이다. 오해하면 안된다. 간결함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지루하고도 괴로운 선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페친 이진경 선생의 글을 옮겨 놓는다.

꼬꾸댁 사마의 장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전에 일본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게 다시 떠올랐어요. 

작년 메이데이 때, 집회에 갔었죠.3일간 집회였는데, 5월 2일에는 노숙자나 빈민의 주거문제 등에 대한 심포가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소개 등이 있었어요. 

그날 오신 분들 가운데에는 '이상하게도'^^; 장애자가 많았어요. 일어나서 소개하고 발언하는 가운데서도 장애자가 "폐를 끼치는 자"로서 비난받고 설움 받는 애기를 많이들 하셨지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어요. 세상에 대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누가 있을까? 나는 그날 전철을 타고 갔으니 전철의 기관사나 차장들에게 페를 끼쳤고 그날 점심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었으니, 그걸 만들고 날라다 주신 분들께 폐를 끼쳤고... 

어디 이게 저 뿐이겠어요?*^^* 이 글을 보는 분들도, 완전히 지 혼자 산다고 생각하는 부잣집 도련님덜도, 항상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존재자에게 페를 끼치며 살고 있지요.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자를 장애인이라고 한다면 저도, 그들도 모두가 다 장애인이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무엇엔가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으니 "모든 존재자는 장애자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단언컨대 진지한^^; 존재론적 명제입니다. 그럼에도 왜 특정인들은 자신이 장애인임을, 폐를 끼치는 자임을 잊고 있을까? 언제 우리는 장애임임을 잊게 되는가? 

그건 자신이 폐를 끼칠 때, 그 대신 돈을 내는 순간일 겁니다. 돈을 냈으니 폐를 끼친 게 아니라 대가를 지불했다고, 교환을 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반면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항상 폐를 끼치는 자임을 확인하게 되지요. 그러나 돈이 많은 장애인이 장애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돈을 내는 사람들이 폐를 끼치지 않고 산다고 말할 순 없겠지요. 반대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실제 모습, 존재론적 실상을 보지 못하는 거지요. 돈은 실상을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는 도구인 게지요.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가린 돈을 툭 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란 사실 모든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기대어 살고 있다는 존재론적 공동성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장애자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은 그 존재론적 공동성을 알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다른 장애자들과 함께, 그들이 폐를 끼칠 수 있도록 떠받쳐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존재론적 공동성에 기꺼워지는 것, 그게 공동체나 코뮨의 실천이라면 코뮨주의는 존재론적 장애학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실학파가 당대의 유교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지만 결국 스스로 유학의 영역 안에서 사고한다고 생각했던 사상가들이었다는 논지를 새삼 확인하면서 - 베르너 사세, 민낯이 예쁜 코리아 - 불현듯 초기 기독교 생각이 났다. 초기 기독교 내부에는 유대파 기독교와 헬라파 기독교가 있는데, 이 중 유대파 기독교는 스스로를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가르침, 종교에 속했다는 인식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예수도 철저히 유대인으로 사고하고 가르쳤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처음엔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는.. 등등.
"The strong sustainability paradigm, thus allows for nonutilitarian values but remain anthropocentric. The 'fairness' in question is fairness between people; and the bioethics (very strong sustainability) paradigm, which seeks, in one version, to support a steadystate (minimum resource take) economy, as well as to encompass non-instrumental values in nature and consequently notions of rights and In practice there is a spectrum of perspectives which overlap each other interests for non-human components of the biosphere (Naess, 1973)." (in: Sustainable economic development: economic and ethical principles by R.K. Turner and D.W. Pearce)
생명윤리와 경제성장/ 발전과의 관계는?

한편으로 생명과학은 경제성장의 도구로 이해된다. 사실 어느 정도 노골적으로 드러내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국가가 그런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지식기반산업... 한국에서는 신성장동력이란 표현을 썼지. 여기에 반대가 없을 수 없다. 반성장, 탈성장을 주장하는 입장,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입장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특정 생명과학 연구에 대한 거부감. 왜? 단지 경제적인 관점, 그러니까 성장의 도구로서 생명과학에 대한 입장차이만 고려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다시 풀면... 사실 성장에 대한 신화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그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그렇게 지배적인가?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여하튼 그런 입장을 고려하면서 성장을 지속하려는 것이 서양 선진국들의 입장이다. 나름대로 규범적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갈등이야 늘 있지만... ]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어떤 상황인가? 일단 서양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이긴하다. 연구 능력, 기술력 등에 있어서는 서양 선진국 못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윤리적인 문제까지 크게 없어서 서양에서는 허가되지 않는 연구들도 한다고 보니까.

하지만 실제로 아시아의 상황은 어떤가?

일단 연구 능력 면에서 일본이 좀 앞서나갈 뿐, 다른 국가의 경우는 그다지...

윤리 거버넌스 면에선? 그냥 무조건 밀어주건, 가능하게 하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서양 관찰자들이 과장해서 해석한 면이 있다. 왜? 세계사회라는 점. 과학 연구에 참여해야 하니까 국제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음. 국내에서도 일방적으로 밀어주는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님. 물론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생명과학을 보고, 윤리규제를 최소화하려는 문화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규범적 혼란을 겪고 있긴 하다. 법률적, 윤리적 공적 질서는 서양과 비슷하지만, 그 질서는 아시아 국가들의 지배적 문화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decoupling이 일상화되는 것. 발전지향적이이라서 문제고, 탈발전문화가 그나마 있어서 안심인 게 아니라, 발전을 중심으로 논의가 집중되고, 공적 질서가 이런 갈등 내용과 합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생명윤리"는 발전주의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강했다. [윤리적 입장 그 자체 보다...] 이게 제도화되면서 그런 동력을 잃게 된다. 물론 생명윤리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진보적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결론은...(1) 아시아가 그렇게 wild한 곳이 아니다. (2) 그렇다고 서양식 윤리가 지배적이길 기대할 수도 없다 (3) 기능적 분화라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반영해서 보면, 갈등이 지속되기 쉽다.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과제"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성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접근은 "근대 극복"에 대한 것이다. 생태주의가 탈근대 담론이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근대 극복을 성장 중심으로, 특히 경제 성장 중심으로만 볼 때 그런 것인데... 근대 극복은 여러 방식으로 이미 시작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대적 질서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사실은 근대 극복의 일환 아닌가? 복지국가가 그 대표적인 것이고. "근대 극복"은 더 근본적이고, 극단적인 변혁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애 자본주의 질서를 벗어나는 것? 사회주의 혁명? 새로운 소통매체 등의 출현으로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네트워크 혁명? 인간, 비인간 구분마저 무너지는 라투어 식의 전복? 루만 식으로 표현하면 탈분화, 분화된 기능체계들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재설정되는 정도, 혹은 완전히 다른 분화 원칙이 우세하게 되는 것 정도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 근대 극복이 가능한가? 아니면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조금씩 바꾸는... 고쳐서 쓸 것인가.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근본적, 전본적인 - 현실가능한 - 대안은 글쎄 거의 보이질 않는다. 공동체,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글쎄 어떤 대안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그런 방식이 전세계에 적용되려면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리 급진적이지 않은 대안은 그저 지금 모델을 고쳐서 쓰는 정도데 머문다.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최근 타계한 Dahl의 민주주의 애찬을 전해 듣고서 생각난 이야기들...

한 동안 - 어쩌면 여전히? -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절대선인 것처럼 여겨졌다. 독재나 권위주의적 지배체제가 강고한 곳에서 민주주의의 다양한 버전과 해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엔 반민주적 질서와 구분되는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집중한다 (민주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으로서의 '민주화'라는 분명한 목표가 없으니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다. 문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제도가 중요하지만 이후엔 문화가 중요하다. 물론 제도 자체가 전제로 하는 문화가 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권력, 권위, 국가구조, 공적인 책임, 대표성, 책임 주체 등 무수한 주제에 대한 특정 해석, 특정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운용하기 나름인데, 그것을 잘 운용하려면 소프트웨어를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소프트웨어가 곧 문화다. 정치문화...  제도 도입 자체가 특정한 문화를 강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낙관적으로 보면... 실제로 그런 효과가 없진 않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그렇지 않다.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지 않았던가? 이명박, 박근혜도. 이들은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과는 달리 더 떳떳하게 뻔뻔하게 나라를 말아먹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제도가 중요하지만, 그 이후엔 문화가 중요하다. 제도도입으로 문화가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을 조응시키려면 무수한 갈등과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한국은 지금 그런 단계다. 내가 보기엔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이론이 필요치 않다.
이석기와 그 무리들은... 그 과대망상에 판단착오에... 비록 분노를 유발하기는 하고, 옆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남한의 사회 질서에 실체적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조직인 것 같지는 않다. 내란음모라... 외교 문서까지 조작해서 간첩으로 몰아가는 짓을 하는 집단인데 이석기 같은 또라이들은 '땡큐'였겠지. 에휴. 나라 꼴이 참 볼만하다. 한국을 설명하는데 무슨 대단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액체 근대성? 풉. 그냥 근대 적응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근대적 제도는 갖추고 있으나 그 제도 운용에 요청되는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못한. 뭐. 공공기관이나 권력자들, 지도층(?)만 적응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많은 국민들은 그런 자리에 못 가서 안달을 부릴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비슷한 짓을 '소규모'로 할 뿐이다.
정직은 항상 미덕인가?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노우! 네버!
때로 정직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정직한 사람, 내 느낌과 판단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막을 치고서 자신은 그 속에 숨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고려 혹은 배려가 배제된 일방적 정직은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정직" "솔직"이라는 미명 아래 독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친 정직의 해악을 얘기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일상화된 거짓, 거짓말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입에 발린 거짓말은 더 참기 힘드니까.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발전주의/개발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이고 이데올로기다. 최근의 발전주의는 신발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처럼 무지막지하게 때려부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멩박이의 청계천이 대표적 사례 되겠다. 멩박이의 4대강은 "신"을 붙여줄 수도 없는 아주 거지같고 천박한 발전주의다. 여하튼 이 발전주의가 사람 잡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원흉이다. 이 시점에서 서양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거기에도 기본적으로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다. 다만 좀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덜 무지막지하다고나 할까.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 등 후발국의 발전주의가 GNP등 경제 성장에 집중되어 있다면, 경제적으로 좀 더 부유하고 근대화 역사가 상대적으로 긴 서양의 국가들 사이에선 발전주의가 좀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긴 한다. 복지, 환경문제, 인권 같은 부분도 발전의 요소로 상당히 진지하게 고려하니까. 여하튼 한국의 여전히 강고한 발전주의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 정치개혁? 환경문제? 인권운동? 생명윤리? 과연 가능할까? 서양의 68운동과 그 무렵부터 발생한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각종 위험, 생태문제의 도전이 그런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봤다. 서양에서도 그랬으니까. 실제로 환경운동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초기의 자극은 사라지고 이젠 무덤덤해진다. 물론 그런 변화가 만들어낸 제도적, 문화적 변화는 무시할 수는 없긴 하지만.. 지금 일본의 핵발전 문제를 보고서도 꿈쩍않는다. 말도안되는 4대강 (파괴)사업을 강행하는 형편이니. 그런 도전이 되는 일들은 그밖에 각종 위험, 인권문제 등을 들 수 있다. 다 어느 정도 파괴력을 보였지만 딱 그 정도... 생명윤리도 그런 것 같다. 구조적 변화는 의미론적 변화를 수반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의미론적 변화가 너무 느리다.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발전주의에 대한 도전은 있지만... 아직 일상화된 발전주의는 너무도 강고하다. 국가의 성장시장주의와 개인의 성공지상주의는 매우 친화력이 있다. 젊음 부모들도 성공지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대가 바뀐다고 자연스럽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 신발전주의는 오히려 분화된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발전주의는 국가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부여된 문화라면, 신발전주의는 분화된 체계 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문화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변화된 구조에 따라... 다양한 외피를 쓰는 것이다.
(1) 홍성태 선생은 근본적 변화가 없다고 보는 것 같고... 발전국가/신자유주의국가, 발전주의/신발전주의...
(2) 다른 견해도 가능하다. 구조적 변화가 분명히 있고, 문화적 변화가 따라올것이라는. 지금 국가가 발전주의를 저렇게 강조하는 것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국가주의는 곧 개인주의, 자유주의, 기능체계의 성찰이론 등에 자리를 내 줄 것이라는.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3) 흠.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발전된 구조는 새로운 발전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발전주의는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고, 또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쉬운 문화다. 새로운 구조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발전주의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공존할 것이다.
왜? 근대적 구조와 문화는 서양의 역사를 통해서 발전된 것이라 조응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아니 조응해오면서 발전해 왔으니까. 그게 역사적으로 최적화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아시아의 경우는 당연히 다르다. 다른 전통이 있는 구조는 서양에서 발전된 그것으로 포맷해 놓았고, 소프트웨어까지 그대로 깔려고 한다. 저항이 없을 수 없다.
구조적 변화에 기대를 해 볼 것인가? 과연 그걸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구조, 새로운 문화가 가능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런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대 극복)
근대 적응을 해야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 적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도 적응 못하고 극복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여하튼 현재 스코어는? 근대 적응을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발전주의의... 이것이 반드시 사회구조적 조건 탓은 아니다.  사회구조는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복지국가에 대해서... 말은 발전국가, 신자유주의국가 운운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제도화되어있음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이 이뤄낸 것들.... 생명과학, 생명윤리 분야에서는 어떤가? 개인주의와 발전주의는 사실 잘 어울리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추상적, 보편적 개인의 권리를 얘기하는 그런 게 아니라서 그렇지. 인권, 보편적 권리, 상호적 존중, 상식, 원칙, 공적 질서...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다 이렇게 시작해서 발전하는 것 아닌가? 지금처럼 인권, 복지, 윤리 얘기 많이 들은 적 없지 않나? 이것 자체가 긍정적 변화, 발전 아닌가? 이전에 비해서... 부정적인 측면, 적응되지 않은 부분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매스미디어나 학문의 생리 아닌가? 규범적 판단을 서둘러 내리는 것. 정답을 맞추고서 내리는 것. 학문에 있어서도 발전주의의 강고함, 그로 인한 발전주의 비판 이라는 정답을 내려놓고서 주장을 하는 주장질의 학문이 강한 것 아닌가?
우리에 필요한 것은 윤리적 원칙에 대한 토론인지도 모른다. 강고한 발전주의의 폐해는 발전주의/반발전주의로 구도가 만들어져서 중간적인, 혹은 추상적인 논의의 여지가 매우 좁아진다는데 있다. 지나친 도덕화,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는... 정답을 내려 놓고 하는 논의. 입장을 강요받는... 친북/친북아님. 까/빠. 윤리적 원칙에 대한 논의는 사실 좀 더 추상적인 논의다. 물론 서양에서는 다른 식의 지배적 프레이밍이 있긴하다. 그 프레이밍이 논의를 지배한다. 정답없는... 그것은 윤리적 원칙에 대한 갈등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pro-life, pro-choice... 그렇다면 서양과 한국이 다른 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발전주의 중심 framing이라는 점? 논의의 내용과 형식,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은 있다. 윤리적 논쟁을 할 여지를 앗아간다는 점. 서양은 어찌되었던 논쟁의 결과가 법에 반영되고 합의의 형태로 일관성있게 관철되는 편이다. 우리나라는 decoupling의 일상화.
페친 진경환 선생(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글. 고대, 중세, 근대로 흔히 역사를 구분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대한 성찰이다.

고대 - 자기중심주의
중세 - 보편주의
근대 - 개별주의

대략 이러렇게 구분된다는 얘기인가? 중세를 "보편주의가 정착된 시기"(조동일)라고 이해하는 것이 재미있다. axial civilizaitons지축 문명... 같은 표현이 생각나네. multiple modernities에서도 이야기하는... 그걸 비서구 근대성의 특징으로 보는 것 같던데... 근대성이 아니라 중세성인가?


"지표(指標)에 대하여"

강의실에서 늘 “지표”라는 용어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중세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라고 물으면 “언제”, 라고 분명히 답하지만, “왜 하필 그때부터 중세인가?”, “무엇이 그때부터를 중세라고 부르게 했는가?”라고 물으면 자신들이 없다. “중세를 고대나 근대와 가르는 주요 지표들은 무엇인가?”, 하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의 병폐다.

중세의 지표가 세계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바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다만 그 주요 지표들 몇몇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가 자기전개하면서 어느 지표들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중세라고 하는가?

우리 학계에서는 조동일이 저 방대한 <한국문학통사 1~5>에서 정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중세는, 공동문어(共同文語)와 공동종교를 중심으로 한 보편주의가 정착된 시기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이라는 공동의 문자와 불교를 중심 종교로 인정함을, 유럽의 경우, 라틴어와 카톨릭을 공유하는 시기를 말한다.( ‘이원적 세계관’의 공유 같은 것이 더 있지만, 그것은 생략하도록 한다. )

뜬금없이 이런 말을 왜 하냐하면, 중세를 다루면서 “사대주의”니 “표절”이니 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 같아서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중세는 보편주의와 공유(共有)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자기중심주의와 크게 다른 양상이다. 보편주의란 개별적 구체성을 인정치 않고, 모든 개별적 사물의 밑바탕에 보편적인 일반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중세를 살아가면서 “우리만의 것”을 강조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중세를 뛰어넘어 근대를 선취(先取)한 사람일지 모른다. 중세적 보편주의가 깨어지고 개별주의가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근대가 시작된다.
K팝스타3.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움이 덜하다.  어제는 샘김과 한희준이 그나마 듣는 즐거움을 전해 줬다. 특히. 한희준의 '지나간다'. 이 노래가 박진영 작사, 작곡이었구나. 그 양반 달리 보이네.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내 노래네. 내노래야.


지나간다

감기가 언젠간 낫듯이
열이나면 언젠간 식듯이
감기처럼 춥고 열이나는 내가 
언젠간 날거라 믿는다

추운겨울이 지나가듯
장맛비도 항상 끝이 있듯
내 가슴에 부는 추운 비바람도 
언젠간 끝날 걸 믿는다

얼마나 아프고 아파야 끝이 날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울어야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이렇게 갑자기 끝났듯이
영원할 것 같은 이 짙은 어둠도 
언젠간 그렇게 끝난다

얼마나 아프고 아파야 끝이 날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울어야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그 믿음이 없인 버틸 수 없어
그 희망이 없었으면 난 벌써
쓰러졌을 거야 무너졌을꺼야
그 희망 하나로 난 버틴거야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이 이별의 끝을
식구들 간에 이런 저런 갈등이 있다. 중간에 껴서... 쉽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자기 관점을 에서 본 해석, 상황인식을 포기하지 않는지... 어디 가족 간 관계에서 뿐이라, 인간관계의 갈등, 심지어 공적인 질서 속의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이런 통약불가능한 해석 차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 식구들의 문제에 대해선...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더 답답하다. 또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내게 있으니 참담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음 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어제 모처럼 마라톤대회에 참석했는데 완주하면서 느낀 바들이 적지 않았는데, 심지어 대회에 같이 참여했던 이들과의 뒷풀이 시간에도 그 소감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내 얘기를 기꺼이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으면 침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긴 했는데, 요즘엔 그런 경향이 강화된 것 같다. 좋은 신호는 아닌데...

여하튼 오늘 확인해 보니 마라톤 하프코스 10번째 참가였던 모양이다. 지난 가을 9번째 참가한 대회에서 가장 좋은 기록을 냈고, 쉬거나 걷지 않고 완주하는 등 체력 면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그 이후로 확실히 달리기 체력이 한 단계 향상되었다는 느낌을 갖긴 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겨우 1주일 준비를 해서 사실 걱정이 더 앞섰다. 대회 당일 컨디션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고. 아닌게 아니라 출발 이후로 이내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러다 가벼워지는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 어제는 뛰면 뛸수록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무거운, 아니 계속 무거워지는 다리를 가지고 더 좋은 기록을 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오히려 후반부에 시간을 더 단축했으니까. 물 한 두 모금 마신 것을 제외하면 쉬지도 않고서... 전반적으로 21km가 그렇게 길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한 주일 정도만 더 준비를 했더라면 기록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 큰 진전이다. 이렇게 체력은 투자한 만큼 산출하는구나. 어쩌면 딱 투자한 그만큼만... 인생의 다른 부분도 그렇겠지? 거주 주어지는건 거의 없겠지?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투자한 만큼 돌아오겠지? 공부도, 논문도? 사랑도?

다음 대회가 기대된다. 더 오래 준비할 수는 없고... 이번엔 최소한 한 달 전엔 준비를 시작하리라. 과연 어떤 결과가 산출될지 지켜보자고.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내게 좀 우유부단한 면이 있음을 또 한 번 확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 깊에 고민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그런 경향이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박유하 선생의 견해가 '신선'해서 솔깃했는데, 권명아 선생의 비판적 견해를 접하니 그 얘기도 맞는 것 같다. 옮겨 둔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극우파적, 국가주의적 논리가 학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른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이 기획되는 어름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 등장은 자학사관을 비판한다는 자료중심주의였다. 이를 '자료사관'이라 해야하나? 그즈음에도 나는 여러 경로로 이 집단적 흐름에 대해 분명한 비판의 태도를 취해왔고, 실제적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자료사관'에 대해서 내가 나서서 비판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비판의 논점은 사실 <역사적 파시즘>에 충분히 밝혀놓았다. 

내가 이러한 국가주의적 <자료사관>을 비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의 논의를 보다보면, 과연 국가 폭력의 책임에 대해서, 한 줌의 자료로 모든 게 증명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사유'나 '사관'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인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기존의 사관이나 국가 폭력과 그 책임에 대한 문제를 그간의 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고 싶다면, 근대 이래 축적되어온 무수한 사상적, 철학적 사유의 궤적들을 대상으로 자기 주장의 새로움을 증명하는 방식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한줌의 자료를 손에 들고, 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극단적 좌파"와 "순진한 민족주의자"를 적으로 삼아, 국가 폭력에 관한 책임의 문제를 '국가'(일본이든 어디든)에 되물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유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그건 단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다. 
박유하 선생님이 페북에 올린 글에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도 많은데, 왜 거부하는 위안부의 입장만 갖고 주장하느냐라던가, 위안부 동원을 국가가 직접 한 증거가 없다라던가, 그래서 일본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을 보고 아연실색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비유해서 이야기해보자. 밀양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입장은 철저하게 국가의 입장에서 나오는 국가주의적 발화이다. 그리고 밀양 주민 중에 보상금을 수령한 사람들에 대한 증거 자료도 많다. 또 국가가 아니라 한전이 집행한 일이고, 현장에서의 폭력도 군인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이 '극단적 좌파'의 유아적 주장이라는 뜻인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주의적 입장의 논자들이 말이다. 

국가주의적 폭력을 그저 '서류 작업'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인가는 이미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사유의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평범한 악의 실행자였던 아이히만은 '서류작업'을 통해서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보다는 어쩌면 더 순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4년 2월 14일 금요일

멀쩡한 어른들이 앉아서 소시적 이야기 나누는 것 싫어한다. 한심해 보인다. 자주 보는 사이라면 그 레파토리마저 뻔해 몇 번 듣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야기라는 것, 대부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중심적으로  색된 것들이 분명해서 걸러들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과거를 마음껏 회상하려면 그것과 구분되는 분명한 현재가 있어야 한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확연히 벗어나지 못한 처지엔 추억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 모습이 화가 나서 분노의 수영을 하고 왔다. 아무리 힘껏 물을 움켜쥐고 첨벙대 봐도 공허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집중력을 살아나질 않아서 여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딴 짓을 하고 있다. 한심이다. 참으로...
한동안 강신주 때리기가 유행이었고, 나도 심정적으로는 동의했다. 처음 몇 번 접할 때는 신선한데, 갈수록 강연할 때의 태도가, 뭐랄까 그렇지... 약장수 같은...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몰아붙이는... 김용옥, 진중권, 김정운 같은 양반들도 내가 보기엔 모두 약장수 류인데... 조금 더 고급한 쪽으로 유홍준, 이어령도 끼워 줄 수 있겠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은 없는데, 약장수 같다는 느낌은 안드는데... 강신주에 대해서는 왜 그럴까? 나이 탓일까? 방금 언급한 사람들보다는 한참 어리니까.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지 않으니까... 딱히 지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일까? 책을 서른 권 가까이 냈다는데? 철학사에 대해서는 꿰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얘기하고, 실제로 귀에 쏙쏙들어오게 잘 요약하는데도? 너무 쉽게 설명해서 그럴까? 알맹이는 별로 없고, 결론이 뻔해서? 어쩌면 그런 것 같다. 너무 친절하다는 것. 내가 생각할 여지를 안주고 잘 소화해서 먹여주려는 그런 태도. 더 어린 학생들은 혹 할 수도 있겠다. 전형적인 멘토 스똬일.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는 그가 그렇게 강조하듯이 주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데 별 도움이 못 줄 수도 있겠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주체로 서라고 하면서, 스스로 설 자리를 찾을 여지를 안주는 것 같아. 몰아붙여서... 그런데... 몰아붙이기로는 김용옥 선생도 못잖은가? 왜 김용옥에 대해선 거부감이 덜하지? 흠... 아무래도 나이 탓인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방끈 길이가 나를 압도하지 못한 탓인지...

여하튼 적어도 이런 얘기들은 경청할만하다.


강연을 하면 항상 물어본다.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나?’ 못 산다고 얘기한다. 매번 ‘버려야 하는데 쓰고 있네’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못 살면, 내가 말하는 게 그른 게 되느냐는 것이다. 옳은 건 옳은 거다. 철학자의 역할은 옳은 것들, 반성해 봐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나를 욕해도 된다. 그러나 내가 떠들었던 이야기들이 옳다는 걸 부정하진 말아 달라.’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묻는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안 하면 안 할 건가. 철학자가 사랑에 대해 말한다고 사랑이 완벽해지는가. 인문학자나 철학자는 옳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할 뿐이다. 그것은 강신주가 그렇게 살든 못 살든 옳은 것이다. 그 정도 안목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담론을 버릴 때 이렇게 버린다. ‘옳지만 실천하기 힘들다, 실천하기 힘드니까 이상적인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옳은 것은 그른 것이다'"


ps1) 비슷한 논지의 얘기를 김규항 선생도 했네. 페북에서 가져옴.

대안 없는 비판

‘대안 없는 비판’처럼 말이 안 되는 말도 없다. 대안은 만들어가야 할 것이며 당연히 ‘현재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 대한 비판이 저절로 대안을 만들어내진 않는다. 대안을 말하는 사람들이 현재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s2) 이 글 댓글로 Adorno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가져온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의 책무는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책무는 인간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이 세계의 발전방향에 대해 '형식'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Adorno)

ps3) 페친 김형민 님의 생각도 옮겨 놓는다.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나 내 눈에 들보 있을까 두려워 형제의 티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밝히 보지 못할 것이다.
경쟁이나 게임에 참여하면 사람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나도 모르던 나를 포함해서...
페북에서 들은 이야기. 근대의 발명으로서 연애라는 이야기는 프롬도 했구나.

에리히 프롬은 연애의 발생원인을 공동체의 해체와 그로인한 근대적 개인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봉건적 공동체는 산업혁명과 함께 해체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개인은 전례없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독감' 세상에 나만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근원적 슬픔, 뭐 대충 그런 것. 그 고독감을 누가 채워줄 것인가. 연애는 억지로 발명되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와 함께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이다. 억지스럽게 생긴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나 개인주의 쪽.
윤석민이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에 입단하나보다. 애증이라고 하지. 그런 선수다. 류현진이 전형적인 성격까지 좋은 '쭉' 최상위 우등생이라면, 윤석민은 우등이긴하지만 최상위를 계속 유지하지는 못하는... 기복이 심하다. 성격/멘탈도 약한 편이고,  별명이 "석민 어린이"인데 실제로도 어린이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류현진보다는 욕도 더 많이 듣는 편이고.

여하튼 윤석민 경기는 챙길 것 같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않기 위해서,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기 위해서라도 하기 싫은 일을 열정적으로 아니 억지로라도 해야 할 모양이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답게 하기 위해서...떳떳하게 하기 위해서...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 (도면회)

아주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일반화 수준이 너무 높으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 이덕일의 연구가 이런 비판을 받는다. 이론(혹은 결론?)을 내려놓고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 기사 내용에 근거해서 보면 적당한 수준에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이런 연구를 좀 해 보고 싶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페친 Ung-Jin Kim 님의 글.

2년 전쯤 자살 문제로 발표할 일이 있었는데, 이어서 짧은 논문까지 쓰겠다고 열심히 '죽음'에 대해서 공부했었다. 결국 논문을 쓰지 못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아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한다. 종교에 대한 "과민반응"만 빼면... 그래서 옮겨놓을 테지만...


죽음은 일생동안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삶 속에 만성질환과 같은 괴로운 동반자, 무의식 속의 형체없는 그림자 처럼 늘 따라다닌다. 많은 인간들은 삶을 사는 많은 시간동안 죽음을 살게된다. 회한과 공포, 허무와 좌절은 죽음의식의 파생물이다.

죽음은 생명현상의 필연적 결과이다.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집요한 의식이 문제이다.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은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얻어질 수 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할 수 있을 때, 죽음은 친숙한 것이 된다.

죽음에 수반되는 (육체적, 정신적)고통은 사회적 고정관념과 함께 죽음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에 큰 장애요인이 된다. 죽음의 금기화는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시킬 뿐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상적인 죽음은 고통이나 근심이 없이 평온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삶의 종식이다. 대부분의 죽음이 수반하는 많은 고통을 현대의 의학기술은 거의 완벽하게 면제해줄 수 있다. 고통없는 죽음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일 뿐이다.

소생술에 의지해 가며 마지막 순간 까지 고통 당하다가 죽는 것은, 아무리 삶에 환장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A 라고 하는 사람이 삶으로 부터 퇴장하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그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한다. 삶을 지속하건 종식하건 그것은 철두철미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간섭하거나 지시를 해서는 안된다.

그는 전문의료인들과 상담을 하고, 두번, 세번의 확인과정을 거쳐 죽을 의사를 확정한다. 전문인 증인들과의 서면확인절차를 마치고, 몇가지 옵션 중 본인이 원하는 방법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사례비를 지불한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인도적 차원에서 무료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분위기 속에서 마취되어 전문인의 시술에 의하여 생명을 종료한다. 그가 고통을 당했는지의 여부는 GSR (galvanic skin reaction) 과 뇌파검사의 결과에 남겨지고, 이 데이타는 public 데이타베이스에 기록되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점검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통없는 시술의 감시체계로 보존된다. 사체는 화장되고 소멸되거나 원하는 형태의 기념물로 남겨진다.

죽음의 부담이 제거되고 나면, 오히려 삶이 가벼워질 것이다.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보게 되니 삶도 담담하고 평온해질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 알 수 없는 회한이나 허무나 분노 속에서 괴로와 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더욱 진지하고 깊이있게 성찰하며, 많은 사람들이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가치와 기쁨은 증대될 것이다. 마약중독이나 부질없는 방황, 삶의 허비가 줄어들 것이며, 범죄와 탐욕도 감소될 것이다. 불안감을 물질로 대체해 보려는 물신주의와 과소비적 행태도 감소되고, 사회는 합리적이 되고 삶은 질서를 찾을 것이다. 비이성적 종교미신의 광기는 수그러들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이루어지고, 이론물리학자들이나 생각하던 시공간의 모습, 특히 시간의 모델들이 삶 속에 투영되고 적용될 것이다. "Time is an illusion," 이라던가 자의식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말들이 더욱 깊이와 실감을 더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제로 자살시도를 하거나, 삶으로 부터 퇴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
이 아침. 한 대 맞은 느낌. 페친 김진형님의 얘기.

"김혜리 기자가 이동진 평론가에 대해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하지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지도 못하는... 인생 뭐 있냐뭐 대충 사는... 최악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모두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열정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아실현 같은 표현들.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열정적으로... 캬. 근대적, 너무도 근대적이다.

뭔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안한... 그렇다. 열정과 불안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대의 사랑을 잃을까 불안한 마음에 열정을 바친다. 아니면 사랑에라도 열정을 바쳐야, 몰입해야 다른 불안을 잊을 수 있으니까...

생존의 불안을 크게 느끼지 않는한 적당한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삶. 왜 그런 삶은 환영받지 못하지? 왜 좌파나 우파나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유럽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하나같이 열정적인 삶만이 인정받지? 심지어 이런 열정적인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마저 열정적으로 전해야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느린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 제목만 좋아하고 아직 읽지 않았던 러셀 형님의 책이 급 땡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조국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기본소득’이야기를 하나보다.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 이게 사회 임금? 러셀 개념인가?  "‘시장임금’외 ‘사회임금’ 지급하는 것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적응책” “무산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적합한 적응책”

흠. 이 정도면 러셀은 거의 맑스 수준의 - 독일 이데올로기 - 유토피아를 그려냄.

"탈성장"(degrowth, Postwachstum)의 대안으로도 손색없겠다.

그런데... 정말 대책없이 게으른 사람, 무능한 사람, 정말 진짜 '루저', 무기력한 사람, 열정 없는 사람 보며 짜증나고 답답하지 않은가? 솔직히? 새삼 게으름을 '찬양'씩이나 하는 건 우리가 과잉 열정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것 아닌가? 정말 모두가 게으르다면... 난 아마 '열정에 대한 찬양'을 찬양할 것 같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내 열정이라면 열정은 - 어쩌면 - 균형잡는데 있지 않는가... 하는...ausgleichen... 균형잡기, 중심잡기, 원칙세우기, 중용 등등. 이런 지향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율주의에 가장 가깝다.

너무 많은 국가, 제도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선명한 이념을 지향하는 것도 별로...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같은 지향을 갖는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내용을 지지하는게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 지향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내용이란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그 추상적 내용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용이라기 보다는 태도, 추상적 원칙의 문제다.

선진국에서는 대개 저런 원칙에 대한 합의가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그 상식 위에서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다투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겐 그런 것이 부족한 것이고.

추상적 내용만 가지고서 현실에서 뭔가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은 구체적 내용을 수시로 여기 저기에서 가져온다. 맑시즘, 사민주의, 생태운동 등등 다양한...

이것을 열정을 쏟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 수도...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상식, 원칙... 

2014년 2월 12일 수요일

"탈발전"이건 "탈성장"이건... 그 "탈" "이탈" "공백"을 무엇으로 메꿀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그렇다. 대안. 새로운 통합원칙.

약한 버전으로는... 성장하고, 발전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무엇을 위한 성장, 발전인지를 생각하자. 지속가능한 성장을 생각하자. 성장의 열매를 어떻게 나눌지를 고민하자. 등등. 기존 발전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대안적 발전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발전'이란 표현을 포기하지는 않겠지.

강한 버전으로는... 발전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하면서, 발전이 곧 선이라는 근대적인 생각, 발전의 열매를 누리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이미 이룬 것을 나누고, 발전을 위해서 감수해야 했던 분배 문제, 소외 문제, 생태 문제 등을 고민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루만은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사회의 기능적 분화"는 발전, 성장에 대해서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 탈발전에 대해서는?

포함/ 배제 등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