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기자가 이동진 평론가에 대해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하지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지도 못하는... 인생 뭐 있냐뭐 대충 사는... 최악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모두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열정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아실현 같은 표현들.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열정적으로... 캬. 근대적, 너무도 근대적이다.
뭔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안한... 그렇다. 열정과 불안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대의 사랑을 잃을까 불안한 마음에 열정을 바친다. 아니면 사랑에라도 열정을 바쳐야, 몰입해야 다른 불안을 잊을 수 있으니까...
생존의 불안을 크게 느끼지 않는한 적당한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삶. 왜 그런 삶은 환영받지 못하지? 왜 좌파나 우파나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유럽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하나같이 열정적인 삶만이 인정받지? 심지어 이런 열정적인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마저 열정적으로 전해야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느린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 제목만 좋아하고 아직 읽지 않았던 러셀 형님의 책이 급 땡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조국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기본소득’이야기를 하나보다.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 이게 사회 임금? 러셀 개념인가? "‘시장임금’외 ‘사회임금’ 지급하는 것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적응책” “무산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적합한 적응책”
흠. 이 정도면 러셀은 거의 맑스 수준의 - 독일 이데올로기 - 유토피아를 그려냄.
"탈성장"(degrowth, Postwachstum)의 대안으로도 손색없겠다.
그런데... 정말 대책없이 게으른 사람, 무능한 사람, 정말 진짜 '루저', 무기력한 사람, 열정 없는 사람 보며 짜증나고 답답하지 않은가? 솔직히? 새삼 게으름을 '찬양'씩이나 하는 건 우리가 과잉 열정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것 아닌가? 정말 모두가 게으르다면... 난 아마 '열정에 대한 찬양'을 찬양할 것 같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내 열정이라면 열정은 - 어쩌면 - 균형잡는데 있지 않는가... 하는...ausgleichen... 균형잡기, 중심잡기, 원칙세우기, 중용 등등. 이런 지향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율주의에 가장 가깝다.
너무 많은 국가, 제도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선명한 이념을 지향하는 것도 별로...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같은 지향을 갖는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내용을 지지하는게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 지향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내용이란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그 추상적 내용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용이라기 보다는 태도, 추상적 원칙의 문제다.
선진국에서는 대개 저런 원칙에 대한 합의가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그 상식 위에서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다투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겐 그런 것이 부족한 것이고.
추상적 내용만 가지고서 현실에서 뭔가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은 구체적 내용을 수시로 여기 저기에서 가져온다. 맑시즘, 사민주의, 생태운동 등등 다양한...
이것을 열정을 쏟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 수도...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상식, 원칙...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모두가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열정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아실현 같은 표현들.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열정적으로... 캬. 근대적, 너무도 근대적이다.
뭔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안한... 그렇다. 열정과 불안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대의 사랑을 잃을까 불안한 마음에 열정을 바친다. 아니면 사랑에라도 열정을 바쳐야, 몰입해야 다른 불안을 잊을 수 있으니까...
생존의 불안을 크게 느끼지 않는한 적당한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삶. 왜 그런 삶은 환영받지 못하지? 왜 좌파나 우파나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유럽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하나같이 열정적인 삶만이 인정받지? 심지어 이런 열정적인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마저 열정적으로 전해야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느린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아. 제목만 좋아하고 아직 읽지 않았던 러셀 형님의 책이 급 땡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조국 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기본소득’이야기를 하나보다.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 이게 사회 임금? 러셀 개념인가? "‘시장임금’외 ‘사회임금’ 지급하는 것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적응책” “무산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적합한 적응책”
흠. 이 정도면 러셀은 거의 맑스 수준의 - 독일 이데올로기 - 유토피아를 그려냄.
"탈성장"(degrowth, Postwachstum)의 대안으로도 손색없겠다.
그런데... 정말 대책없이 게으른 사람, 무능한 사람, 정말 진짜 '루저', 무기력한 사람, 열정 없는 사람 보며 짜증나고 답답하지 않은가? 솔직히? 새삼 게으름을 '찬양'씩이나 하는 건 우리가 과잉 열정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것 아닌가? 정말 모두가 게으르다면... 난 아마 '열정에 대한 찬양'을 찬양할 것 같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내 열정이라면 열정은 - 어쩌면 - 균형잡는데 있지 않는가... 하는...ausgleichen... 균형잡기, 중심잡기, 원칙세우기, 중용 등등. 이런 지향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율주의에 가장 가깝다.
너무 많은 국가, 제도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선명한 이념을 지향하는 것도 별로...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같은 지향을 갖는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내용을 지지하는게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 지향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내용이란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그 추상적 내용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용이라기 보다는 태도, 추상적 원칙의 문제다.
선진국에서는 대개 저런 원칙에 대한 합의가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그 상식 위에서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다투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겐 그런 것이 부족한 것이고.
추상적 내용만 가지고서 현실에서 뭔가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은 구체적 내용을 수시로 여기 저기에서 가져온다. 맑시즘, 사민주의, 생태운동 등등 다양한...
이것을 열정을 쏟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다. 아니. 어쩌면 내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 수도... 자유주의, 자율주의, 개인주의, 상식,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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