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예수 믿되 예수살기 거부하는 병". 이 병엔 나도 걸린 것 같다. 한국 교회를 통틀어서 비판하기는 쉽다. 사실 나도 그 병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을. 물론 그런 병이 있음을 기회있을 때마다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해결에 나름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글쎄. 내 문제는 더 큰 것 같다. 왜? 예수살기를 하지도 않지만, 예수믿기에 대해서는 모자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건 뭔가? 아주 병 중에서도 중증이다. 그 무리 속에 몸은 포함되어 있지만 외부 비판자 같은 시선과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의 글 - "예수 믿기, 예수 살기 -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 은 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수를 잘 알고 혹은 믿고 나서 예수를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살지 못한다면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 살기’(실천)가 ‘예수 믿기’(믿음)의 인식론적 근거(epistemological basis)]. 그렇다. 나 또한 예수를 잘 알아야 예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알게 모르게... 순서를 바꿔보자. 먼저 예수를 살자. 내가 잘 알고 믿고 있는 예수를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알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다음은 장윤재 교수 글의 결론 부분이다.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의 글 - "예수 믿기, 예수 살기 -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 은 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수를 잘 알고 혹은 믿고 나서 예수를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살지 못한다면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 살기’(실천)가 ‘예수 믿기’(믿음)의 인식론적 근거(epistemological basis)]. 그렇다. 나 또한 예수를 잘 알아야 예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알게 모르게... 순서를 바꿔보자. 먼저 예수를 살자. 내가 잘 알고 믿고 있는 예수를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알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다음은 장윤재 교수 글의 결론 부분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 를 예배한다. 신학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운다. 이제 다시금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믿고 살았던 것을 믿을 때가 되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I hear and I forget; I see and I remember; I do and I understand" (나는 듣고 잊어버립니다. 보면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실천해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나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3:1)이라는, 신앙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말 속에는 여전히 믿음{ ‘예수 믿기’ )과 실천( ‘예수 살기’ )이 마치 각각의 것인 것처럼 전제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예수 살기’ (실천)가 ‘예수 믿기’ (믿음)의 인식론적 근거(epistemological basis)가 된다는 것을, 즉 ‘예수 살기’ 없이는 ‘예수 믿기’ 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예수처럼 살아야 예수를 알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싶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니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시는 것이라”(갈 2:20)고 했다. 영어성경(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을 보면 이 구절의 후반부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by faith of the Son of God) 사는 것이라 번역되어 있다. 한글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로, 즉 믿음의 패상’ 으로 나의 밖에 있다. 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나와 그리스도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면 ‘예수 믿기’ 와 ‘예수 살기’ 는 별개가 아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속사람이 이미 그리스도로 대체(replace)되었기에 이제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어 내가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가 가졌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어 내가 살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 (faith in Jesus)은 예수의 믿음’ (faith of Jesus)으로 이어지고 성숙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기’ 를 통해 ‘예수 잘기’ 로 나아갈 수도 있고, ‘예수 살기’ 를 통해 ‘예수 믿기’ 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수처럼 살지 못하면 예수는 이름뿐인 나의 주(Lord)이거나 자신의 이권을 합리화하는 제의적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를 나의 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devotion)이 나오지 못한다. ‘예수 믿기’ 와 ‘예수 살기,’ 그 둘은 원래 하나이며 변
증법적 관계 안에 있다. ‘신앙의 그리스도’ (예수 믿기)와 ‘역사의 예수’ (예수 살기)가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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