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강신주 때리기가 유행이었고, 나도 심정적으로는 동의했다. 처음 몇 번 접할 때는 신선한데, 갈수록 강연할 때의 태도가, 뭐랄까 그렇지... 약장수 같은...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몰아붙이는... 김용옥, 진중권, 김정운 같은 양반들도 내가 보기엔 모두 약장수 류인데... 조금 더 고급한 쪽으로 유홍준, 이어령도 끼워 줄 수 있겠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은 없는데, 약장수 같다는 느낌은 안드는데... 강신주에 대해서는 왜 그럴까? 나이 탓일까? 방금 언급한 사람들보다는 한참 어리니까.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지 않으니까... 딱히 지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일까? 책을 서른 권 가까이 냈다는데? 철학사에 대해서는 꿰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얘기하고, 실제로 귀에 쏙쏙들어오게 잘 요약하는데도? 너무 쉽게 설명해서 그럴까? 알맹이는 별로 없고, 결론이 뻔해서? 어쩌면 그런 것 같다. 너무 친절하다는 것. 내가 생각할 여지를 안주고 잘 소화해서 먹여주려는 그런 태도. 더 어린 학생들은 혹 할 수도 있겠다. 전형적인 멘토 스똬일.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는 그가 그렇게 강조하듯이 주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데 별 도움이 못 줄 수도 있겠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주체로 서라고 하면서, 스스로 설 자리를 찾을 여지를 안주는 것 같아. 몰아붙여서... 그런데... 몰아붙이기로는 김용옥 선생도 못잖은가? 왜 김용옥에 대해선 거부감이 덜하지? 흠... 아무래도 나이 탓인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방끈 길이가 나를 압도하지 못한 탓인지...
여하튼 적어도 이런 얘기들은 경청할만하다.
“강연을 하면 항상 물어본다.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나?’ 못 산다고 얘기한다. 매번 ‘버려야 하는데 쓰고 있네’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못 살면, 내가 말하는 게 그른 게 되느냐는 것이다. 옳은 건 옳은 거다. 철학자의 역할은 옳은 것들, 반성해 봐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나를 욕해도 된다. 그러나 내가 떠들었던 이야기들이 옳다는 걸 부정하진 말아 달라.’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묻는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안 하면 안 할 건가. 철학자가 사랑에 대해 말한다고 사랑이 완벽해지는가. 인문학자나 철학자는 옳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할 뿐이다. 그것은 강신주가 그렇게 살든 못 살든 옳은 것이다. 그 정도 안목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담론을 버릴 때 이렇게 버린다. ‘옳지만 실천하기 힘들다, 실천하기 힘드니까 이상적인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옳은 것은 그른 것이다'"
ps1) 비슷한 논지의 얘기를 김규항 선생도 했네. 페북에서 가져옴.
대안 없는 비판
‘대안 없는 비판’처럼 말이 안 되는 말도 없다. 대안은 만들어가야 할 것이며 당연히 ‘현재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 대한 비판이 저절로 대안을 만들어내진 않는다. 대안을 말하는 사람들이 현재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s2) 이 글 댓글로 Adorno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가져온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의 책무는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책무는 인간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이 세계의 발전방향에 대해 '형식'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Adorno)
ps3) 페친 김형민 님의 생각도 옮겨 놓는다.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나 내 눈에 들보 있을까 두려워 형제의 티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밝히 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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