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에 대한 NYT 기사가 회자된다. 정말이지 한국이 맨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확장된 가족, 거실. 기능적 탈분화가 일어나는 곳. 가정에서 관찰되는 여러 기능의 중첩이 상업적으로 가능한 곳. 한국 사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긴 한데.... 이 현상에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의미를 갖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까? 한국의 아파트 문화 역시 마찬가지. 박해천 씨 책이 흥미로운데 - 최근에는 '아파트 게임' - 한국 사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고 말 뿐이라면 좀 아쉽다. 이 둘을 연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 관심은 일반 사회이론을 이해하고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일이었다면 (결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내 논문은 '근대 적응'), 앞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현상을 일반 사회이론, 근대성에 대한 이론에 적용시키는 일일 수 있겠다.
아파트, 중산층에 대한 박해천의 지적. 캬. 명쾌하다.
"중산층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자녀의 사교육에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던 근간은 아파트를 통한 자산소득 증대였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욕망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만들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주거모델 확립의 역사에서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주거모델이나 생활양식을 모색한 경험이 없고 여기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새 대안을 강요하는 상황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새 모델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아파트는 문화적 "근대성"을 보여주는 한 전형이다. 서양에서는 탈근대성이 6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서양에서는 문화적으로는 이미 "탈근대성"이 지배적이다. 물론 사회구조적으로도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루만마저 탈근대성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루만은 문화적 탈근대성을 근대적 사회구조에 대한 의미론적 만회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의미론 차원에서 두 단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문화적 혹 의미론적 차원에서의 근대성/ 탈근대성이다. 일부 전형적인 문화적 근대성을 루만은 구유럽적 의미론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개인주의, 자율성 강조, 인권 같은 전형적인 문화적 근대성, 근대적 의미론을 루만이 부정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문화적 근대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혼재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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