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미야지마 히로시 (1999), 동아시아 小農社會의 형성 중.
"소농사회의 성립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사회 구조상의 여러 특징이 기본적으로는 근대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함과 더불어 형성된 사회 구조상의 여러 특징은 종래 [전통]이라는 말로 일괄적으로 통칭해 왔다. 그리하여 [전통]과 [근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좀더 높은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구별은 있더라도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일본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전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전통]이란 것은 본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본다면 지극히 새로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결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14∼17세기에 걸쳐서 일제히 형성된 것이며.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로, [전통]은 [큰대]에 의해 해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는 오히려 거꾸로 이며, [전통]이란 것의 대부분은 [근대] 속에 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때로는 강화되기도 하였다. 도대체 [전통]이란 것이 의식되는 것은, 그것이 소멸해 버렸기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기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 변동을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최대의 분수령은 전근대와 근대의 사이가 아닌 소농사회 성립의 전후에, 바꾸어 말하면 [전통]의 형성 이전과 이후 사이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엽이라는 오늘의 시점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농사회의 성립기에 필적하는 제 2의 대전환기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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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 2003, 근대를 다시본다 -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나는 동아시아에서 16∼18세기는 단지 경제적인 대변동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큰 변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과거제도와 주자학의 결합이 중국·한국에서 14∼15세기에 정착하며,일본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종래보다 훨씬 집권적인 성격을 띠는 정치체제가 전국시대의 동란이 종말을 고하면서 확립되기에 이르렸다. 또한 사회적인 면에서는 가족· 친족제도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문에서 큰 변화가 보이는 것도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였다. 즉, 중국에서는 종족의 결합이 이 시기에 본격화하고, 한국· 일본에서는 쌍계적인 혈연관념에서 부계적 혈연관념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역 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보면, 주지하듯이 중국·한국에서는 주자학이 국가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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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건 정말이지 혁신적인 견해인걸.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 이토록 어려웠던 것은 결코 중국이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는 이미 별도의 근대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 multiple modernities이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하지만 "유교적 근대"의 어떤 요소가 지금까지 남아있을지 경험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얼핏 사회구조와 문화로 구분을 해서 "유교적 근대"의 사회구조적 측면은 사라지고 문화만 남아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유교적 근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여전히 제도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예외적이라고 쳐도... 물론 사회구조를 "기능적 분화" 같은 그야말로 초거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눈에 잘 띄지 않을지 몰라도, 관료 충원을 고시제도에 의존한다던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해 등등. 어떤 서양식 근대 제도는 잘 수용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사회구조적 조건일 수도...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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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 2003, 근대를 다시본다 -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나는 동아시아에서 16∼18세기는 단지 경제적인 대변동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큰 변동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과거제도와 주자학의 결합이 중국·한국에서 14∼15세기에 정착하며,일본에서는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종래보다 훨씬 집권적인 성격을 띠는 정치체제가 전국시대의 동란이 종말을 고하면서 확립되기에 이르렸다. 또한 사회적인 면에서는 가족· 친족제도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문에서 큰 변화가 보이는 것도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였다. 즉, 중국에서는 종족의 결합이 이 시기에 본격화하고, 한국· 일본에서는 쌍계적인 혈연관념에서 부계적 혈연관념으로 바뀌는 대변화가 역 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보면, 주지하듯이 중국·한국에서는 주자학이 국가교학
의 위치를 차지하고 예교(禮敎)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에서도 주자학은 국가교학의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으나 주자학적 통치이념의 침투가 적극적으로 도모되었다. 이상과 같은 대변화는 결코 우연히 같은 시기에 생긴 것이라 이해해서는 안되며, 경제적인 변화와 깊이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바 있다. 내가 주장하는 소농사회란, 단지 농업경영 담당자로서 소농이 일반적으로 형 성되었다는 한정적인 의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전체제적인
구조전환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이다.
16∼18세기의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시장의 중심이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경제력을 가능하게 한 정치 사회체제까지도 포함해 동아시아가 유럽보다 우수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기초에 주자학 이념을 기반으로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에 의해 성립된 집권적 통치체제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최대의 요인이었다. 빈 렁이 지적하듯이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유럽에서는 근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주민 파악과 그에 기초한 높은 징세능력을 이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체제 때문에 가능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18세기까지의 국가체제 문제를 시야에 넣어야만 19세기의 동아시아에서 고유하게 발생한 곤란을 파악할 수 었다. 즉, 높은 인구 압박과 환경적 제약 아래서 새로운 국제적 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 19세기에 들어, 지금까지의 국가체제·사회체제가 심각한 질곡의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드라마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유럽적 근대의 갈등· 대립 · 융합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전통’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던 것이 아니라 스기하라가 주장하듯이 ‘전통’에 강하게 각인되면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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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배의 사적 분할”을 본질로 하는 유럽 봉건사회의 정치사상과는 달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인 지배체제”를 대전제로 하는 주자학 사상체계의 영향이라고 본다. 주자학은 사실상 당대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근대적인 사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엄격한 신분제이지만 주자학은 출생을 바탕으로 하는 폐쇄적인 신분체계를 지양했다. 유교 경전을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과거제로 관료를 뽑았고 지배계층은 수시로 바뀌었다. 조선사회의 경우 양반이 과거시험을 거의 독점하긴 했지만, 특정 집안이 통치를 독점적으로 담당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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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C 19C 20C 21C
동아시아 전통
(유교적 근대) ------------------------>
서양의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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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배의 사적 분할”을 본질로 하는 유럽 봉건사회의 정치사상과는 달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인 지배체제”를 대전제로 하는 주자학 사상체계의 영향이라고 본다. 주자학은 사실상 당대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근대적인 사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엄격한 신분제이지만 주자학은 출생을 바탕으로 하는 폐쇄적인 신분체계를 지양했다. 유교 경전을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과거제로 관료를 뽑았고 지배계층은 수시로 바뀌었다. 조선사회의 경우 양반이 과거시험을 거의 독점하긴 했지만, 특정 집안이 통치를 독점적으로 담당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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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C 19C 20C 21C
동아시아 전통
(유교적 근대) ------------------------>
서양의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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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건 정말이지 혁신적인 견해인걸.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 이토록 어려웠던 것은 결코 중국이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는 이미 별도의 근대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 multiple modernities이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하지만 "유교적 근대"의 어떤 요소가 지금까지 남아있을지 경험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얼핏 사회구조와 문화로 구분을 해서 "유교적 근대"의 사회구조적 측면은 사라지고 문화만 남아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유교적 근대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여전히 제도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예외적이라고 쳐도... 물론 사회구조를 "기능적 분화" 같은 그야말로 초거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눈에 잘 띄지 않을지 몰라도, 관료 충원을 고시제도에 의존한다던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해 등등. 어떤 서양식 근대 제도는 잘 수용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사회구조적 조건일 수도...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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