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말하려는 바는 시장경제, 시장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란 애초에 현실에 이루어질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적인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홍기빈)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매우 루만적인 표현이다. 루만의 입장은 사실 자율성 강조와 통합/구조적 결합 사이에서 오간다. 루만은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을 여기 저기 마련해 놓았는지 모른다. 아니. 실제로 현실은 그런 것이니까... 다만 루만의 어떤 점을 강조하느냐... 그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다. 비록 루만 스스로도 강조하고 싶지 않았던 진술이 부각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루만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편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이해에 따라 루만을 비판하는 견해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어쩌면 달라질 수는 있는데... 구조적 결합이나 통합 쪽은 사실 거의 건설현장에 가깝다.
루만은 왜 다양한 얘기를 하면서 한 쪽을 강조했을까? 혹은 적어도 한 쪽이 강조되는 것처럼 이해되게 만들었을까? 추론해 볼 수 있는데...
(1) 루만은 이론 미학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사회의 환경에 배치한 것도, 기능적 분화와 자기생산적 기능체계들의 깔끔한 동학을 설명하면서...
(2) 루만은 비판의 대상, 특히 주적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타격을 주기 위해 특정 견해를 강조했다. 체계의 자율성과 구조의 결합이란 주제의 경우... 루만은 "개입주의자들"에 비판적이었던 것 같다. 특히, 복지국가의 팽창 경향에 대해서... 경제의 팽창, 개입 경향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똑같은 얘길 도덕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루만은 현대사회의 도덕에 대해서 탈도덕화와 재도덕화를 동시에 얘기했다. 루만의 강조점은 탈도덕화에 있고, 루만의 도덕론에 대한 이해도 탈도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루만의 윤리(학)의 한계 지적 때문에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루만의 재도덕화 주장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해서도 윤리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Krohn). 그런 이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진술들도 있고...
루만은 도덕주의자들, 도덕의 역할을 과신하고 요청하는 규범적 접근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탈도덕성을 강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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