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2009...

긴박하게 돌아가는 '時局'이 내 '課外 활동'에 지장을 준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적어도 오늘 밤엔 시간을 좀 내 본다. 내일 자정무렵엔 집 근처 교회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원래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 그리고 명절 따위 챙기는 일을 즐겨하지 않는 편인데다 나이에 대한 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는 터라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바로 문 앞에 와 계시는 그대, 새해...
더군다나 뜬금없이 겨울 한가운데에서 헌해와 새해를 나누니 이건 생물학적 정서와도 들어맞지 않는다.

잠시... 이렇게 투덜거리게되는 내 불편한 心思의 원인을 생각해 본다...

'否定의 힘'이라고 언제가 쓴 적이 있는데, 아흔 아홉 가지 칭찬을 하고서 한 가지 충고를 덧붙일 뿐인데도 그 한 가지가 아흔 아홉 가지를 제치고서 강력하게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는 그런 얘기인데... 그런 이유로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적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내년 이맘 땐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심리상태를 갖게 될 것임을 약속해 두기로 하자.

어쨌든, 여하튼,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저모 애 많이 쓰쎴다. 그대... 내 2009...

2009년 12월 19일 토요일

거위의 꿈 (인순이, 2007)



한국에 와서 알게 된 노래. 이적 작사, 김동률 작곡으로 1997년에 발표된 곡인데 2007년 '인순이' 누님(^^)이 다시 부른 이후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같은 노래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른데, 그 대표적인 경우로 꼽을 수 있을 듯... 이런 '신파조' 노래는 나이를 좀 먹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말년에 부른 'My Way'나 나이 든 S&G가 부른 'Bridge over troubled water' 같은 노래는 그저 노래만은 아닌 것이다. 인순이 누님은 이미 그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한 길을 쭉 걸어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포스'를 가지고 있다. 장인같은... 그러면서 산전수전 겪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도 보이고. 그렇게 살 일이다. 너무 머리 굴리지 말고... 이 길이다 싶으면, 그냥 쭉 가는 거다. 한결같이... 문제라면...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

ps) 인순이 버전 뮤직비디오는 '저렴하게' 만든 티가 확 난다. 공익광고 모냥... 그래서 '발굴'한 게 윗 영상인데 2005년 5월 윤도현의 러브레터 장면이라고 한다. 카메라 움직임, 편집이 좋은 편이라 노래 감상에 도움을 준다. 특히, 가수 뒷편에서 무대 쪽을 잡은 장면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보기 좋다.

자동차와 인터넷: 익명성...

그럴듯한 설명이다. 자동차라는 공간의 익명성... 이렇게 해서라도 사적 공간을 확보하고 싶은 현대인...

... 과학 저널리스트 톰 밴더빌트의 저서 ‘트래픽’(김영사) ...

이 책에서 저자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해 파헤쳤다. 앞에서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복수감에 불타서 욕이 나오고, 길이 뻥 뚫려 있어도 근처에 사고현장이 있으면 길이 막히며, 정지신호에 서 있을 때 옆 차 운전자와 눈이 마주치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이유 등에 대해 무릎을 탁 칠 만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다.

밴더빌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동차 운전석에 앉는 순간 사람이 바뀐다. 똑같은 차량이라도 컨버터블 뚜껑을 열고 다니면 운전을 얌전하게 하고, 자동차 트렁크에 스티커를 붙이면 운전이 험해진다. 멀쩡히 밖에서 안이 다 보여도 코를 후비며, 옆 차 운전자에게 부담 없이 욕을 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방음 처리된 철판과 유리가 선사하는 안락함. 1990년대 미국 마케팅 전문가 페이스 팝콘이 예측한 소비 트렌드 중 ‘코쿠닝(cocooning)’개념에 딱 맞아 떨어지는 생활도구이면서 이면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코드도 숨어 있다.

외부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자동차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믿는 것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안전하고 안락한 공간은 ‘딱딱한 껍데기에 둘러싸여 나만의 공간을 즐기려는 소비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팝콘의 예언과도 일치한다. 밴더빌트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행위는 인터넷 익명 채팅룸에서 욕을 하고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자동차는 또 정서적으로 강하게 운전자와 연결된다. 마치 미니홈피를 만들면서 아바타를 꾸미고 대화명을 정하듯 자동차의 디자인과 모델명 크기를 단순히 비싸고 좋은 차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하나의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 하나의 나’에 지금 내 모습을 투영하지는 않는다. 바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징한다. 신뢰성 있는 연구결과가 없기 때문에 검증할 수 없지만 취재차 만난 한 남성의학자는 “성기능이 약한 남성일수록 큰 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동차와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 결국 자동차 유머는 또 하나의 사람 얘기이지만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 차를 통해 갖게 되는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람이 타인에 대해 갖는 심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그저 단순히 밀리지 않는 시간...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혹은 내리기 싫어서 미루는 경우가 있다. 그 상황에 대한 표현도 '심사숙고'(深思熟考)에서부터 '우유부단'(優柔不斷)까지 다양하다. 내 인생이 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 그 미룬 결정으로 인한 결과는 '내'가 감당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단지 미룬 그 시간만큼만 인생의 시간이 늦어질 뿐이라면 그 '데미지'는 더 토를 달 필요도 없는 순수한 결과다. 허나 타인과 복잡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다. 타인은 내가 미뤄둔 그 시간 동안 그대로 머물러있을 수가 없는 것. 그래서 미뤄둔 그 시간 때문에 갖게 되는 '데미지'를 예측하기란 생각 이상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삶의 속도가 빠른 시절엔 더더욱... 주체의 위치, 포지셔닝(positioning)... 그런 표현이 인생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는지...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거나, 'give & take' 같은 말은 정말이지 '법칙' 아니 '진리'다.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대중독재와 참여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인가

흔히 도덕적 판단, 그러니까 어떻게 옳고 그른지를 판단을 하기 때문에 사건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이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동원되는 현상에 대해서, 다른 가치 평가를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매우 많다. 내 경우 민주화운동, 촛볼시위, 촛불집회, 노무현 추모 움직임 같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황우석 사태, 디워 사태 등에서 보여준 대중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 대중이 그 대중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우리는 매번 놀란다. 어떻게 촛불시위가 그 정도 규모로 일어날 수 있을까? 황우석 사태는 왜? 그 본질에는 시민권, 인권, 시민사회 같은 이념이 약한 후발자본주의, 발전국가 전통에서 대중의 동원력이 결집되는 다양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글은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인데, 출처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임지현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동일성은 바로 후발 민족국가의 근대화 프로젝트 추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들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시민 사회에서 확고한 동의의 지반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지지에 기반한 독재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정치철학적 근거가 국민으로부터 모든 권력이 나온다는 근대적 국민주권개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참여민주주의적 기제의 이중적 측면을 보여준다. 후기발전국가의 맥락에서는 국가와 시장 양편에 포섭되어 있지만 정치지형에 따라 국가와 시장을 운영하는 엘리트와는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도 있는 대중의 정치적 역동성이 한편으로는 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참여적 민주주주의 추구와 결합해 폭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의 위험담론에 기반한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에 대한 맥락모형과 과학기술 민주화 기획의 만남이 그 나름의 시민 개념과 민주주의 전통 위에 기반해 있다면, 후기발전국가에서의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와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의 정치적 함의는 또한 그 맥락 하에서의 국민과 민주주의 전통에 따라 파악해야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그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ps) 이 시는 안치환의 노래로 먼저 알게 되었다 ( 안치환 9.5집, '정호승을 노래하다', 2008). 뭐랄까... 좀 촌스러운 느낌? '서울의 예수'의 정호승과 '소금인형'의 안치환의 노래는 좋으나 21세기에 들어선지도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아니, 예전보다 더 '통속적'이된 그 모습을 확인하는 일엔 반가움보단, 뭐랄까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런데 이 촌스럽고 통속적인 노래가 오늘따라 생각났다. 그래... 촌스러움에 힘이 있는 것 아니겠어? 우연에 우연으로 점철되어 줄거리만 듣고선 도무지 볼 것 같지 않지 않은 드라마가 '국민 드라마'가 되는데 이유가 있지 않겠어? 이러다 어느날 '뽕짝' 가사가 절절하게 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일이 생길지 누가 알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삶의 그늘','우울' 이런 걸 연상하게되는데 - 나도 그랬다 - 그게 아니라 햇볕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얘기다 (아, 이 무슨 '아낌없는 나무'같은 상상력이란 말인가...)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없다. 모든 속내를 다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모두 구라다. 아니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냥 들어만 주면 되는데... 그리고 표내지 않으면 되는데... 대개 그러질 못하니까 아애 말을 꺼내기 힘든 것 아닌가... (특히, '어른'들이 그냥 듣고만 있질 못한다. )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혼자 속으로 삭혀야할 일이 생겼는데, 그 상황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고, 그래서 멀쩡한 안치환, 정호승 제씨가 불려나와 싫은 소릴 듣고 계시는 중...ㅠ ㅠ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上京 후기

최근 上京한 이후, 내가 좋아해서 오랫동안 휴대용컴 배경화면으로 띄워놓기까지 했던 뉴욕 중심가 정도로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비교할' 정도는 되는 경치를 보여주는 잠실  오피스텔 15층에 살면서 새삼스럽게 발견한 점이지만 난 생각 이상 都會地 풍경 속에서 더 만족을 느끼는 족속의 일원이었다 (뉴욕 시간에 맞춰서 생활한다는 전설의 그 '된장남''된장녀'에 감히 비교할 바는 못되겠지만... ). 심지어 가끔씩 산책을 하는 집 앞 석촌호수와 그 주변 풍경의 '키치'성이 눈에 거슬려 정말이지 파리,  베를린, 뉴욕 정도엔 살아 '줘야' 만족할 것만 같은...
사실 내겐 좀 낯선 이런 생각을 하며 한 편으로는 짧지 않은 그 시간을 그 크지 않은 독일 도시에서 어떻게 '나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 편 어쩌면 내가 새삼스럽게 발견한 이  '도회지성'을 끼워준 게 바로 그곳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의 풍경과 비교해서 생각하자면 빌레펠트만 하더라도 그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미적인 감수성의 수준은 정말 높은 편이었으니까... 
아니, 이게 반드시 되회지/비도회지 문제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게... 난 농촌(다운) 풍경을 볼 때나 최근에 걸었던 팔공산 파계사 가는 그 길 위에서도 속에서도 큰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다. 허나 파계사의 경우 보기 좋은 길을 걸어서 올라 가 보니 도무지 어떤 틀에 넣어서 이해해야 할 지 모를 국적, 역사 불명의 기괴한 콘크리트 새건물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런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내 미적 감수성은 아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풍경 속에서나, 인간이 손이 닿았다면 자연의 시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서 익은 냄새를 풍기는 그런 환경 속에서 채워지는 모양이다.
나무 무늬를 가진 콘크리트 장식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된 인공 조명,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끊이질 않는 '분칠'한 것 같은 석촌호수보다, 시간의 길이와 무게가 느껴지는 도시 뒷골목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빌레펠트는 어쩌면 그만한 규모의 도시가 풍길 수 있는 절제되면서 조화로운 모습과 결코 짧지 않은 역사가 자연스럽게게 녹아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도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서울이나 그 밖의 한구 도시의 경우 나이살은 많이 잡솼으나 끊임없는 성형수술과 분장, 치장으로 도무지 원숙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 절정은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일 것이다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캬... 그 발상하며, 그 '안타까운' 미적 감수성이라니... 물론... 좋아지고는 있다.
그러면 나는? 세월에 맡겨두어 포기하던가, '눈'을 낮추던가, '다시' 이사를 가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불평하면서 그것도  재미로 삼던가... 생각해 보니 선택의 폭이 의외로 넓다.

답답함

흠... 기대치 않은 즐거운 소식을 듣고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동안 쓰고 싶었던 얘길 잊어버렸다. 답답하다...

認定

사람을 바꾸는 가장 센 힘은 '인정'(認定)이다. 어쩌면 '사랑', '우정'은 '인정'이 표현되는 여러 모습을 구분하기 위한 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조금 더 건조하게 - 다르게 표현해서... '씁쓸하게' 혹은 껍질을 걷어내고서 - 얘기하자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 人間 -, 그 사람들의 관계는 결국 '인정'을 얻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투쟁'일지도... Anerkennungskampf!

2009년 11월 15일 일요일

디어 클라우드


참 보기 좋은 풍경인데다
내가 좋아하는 디어 클라우드를 - 그렇다면 사진 속 여인은 보컬리스트 '나인'  - 
찍은 사진이래서
남의 '작품'을 그냥 가져왔다.
네이버 포토갤러리에 '별똥이'의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출처 여기).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하는 있는 모습인 모양.

(수 개월 후... : 여전히 좋아하는가? 글쎄... 역시, 취향은 변덕스러운 것... 매력을 유지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한국 생명윤리

일본 생명윤리학자의 발표문을 읽다가 다음 구절에 눈이 갔다. "The Bioethics Movement in Japan around the beginning of 1980s can be understood as a 'Liberation Movement' from the dominant and paternalistic power of medical and techno-scientific professionalism."
일본은 올 해에 '비로소' 전후 첫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민주주의 역동성으로 따지자면 대개 한국보다 여러 급수 아래라고 평가한다/ 된다. 분단, 혁명(?), 독재, 민주화운동, 민주화, 여야 정권교체, 전직대통령의 자살 등 정치 관련해서라면 한국만큼 극적인 사건을 많이 경험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를 국가별로 조사,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분명히 최상위권에 있으리라.
시민권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역사적으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바뀌고 재규정되는데,  '정치적 시민권'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에선 지나치게 '정치적' 시민권에 집중하거나 - 정권/국민의 관계에서 - 그마저도 선거권 정도로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막상 정당이나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씀. 한국 공중이 매우 정치적이란 얘기도 따져보면 사실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나마 덜 정치적인 쪽으로 가면 한국의 '시민권' 논의는 여전히 바닥이다. '생명윤리'의 경우 그 틀은 들어왔지만, 복제논쟁, 생명윤리법논쟁, 황우석논쟁에서 보여주듯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논쟁은 오히려 대개 너무도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 오히려 '의료적 시민권'이랄까, 그런 이해는 배제되었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도 그런 얘기 아닌가? '촛불시위'때 새로운가능성을 발견했건 처럼 호들갑을 떠들었고, 어떤 이는 마침내 '삶의 정치'(life politics)가 한국땅에 도래한양 감격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뭐가 남았는가? 한국인의 정치성 혹은 정치적 시민권에 대해서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인은 자주 놀라고, 이웃을 잘 놀래킨다. IMF사태 도래에 놀랐다가 수년만에 쨉사게 '탈출'해서 놀랐고, '촛불시위에' 놀랐다가 그런 역동성이 잠복기에 들어가 흔적을 찾기도 힘든 현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어쩌면 기존 정치이론, 민주주의이론, 시민권 논의, 사회이론 등을 모두 잊고서, 정말 '창의적인' 발상으로 한국을 뜯어볼 필요가 있을 지도...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라투르 책 번역 얘긴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었는데 마침내  첫 번역서가 나왔다. 국내에선 STS쪽에서만 알아주는 스타급 학자였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인지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STSer들 서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개를 연결시켜 놓는다: 김환석의 서평 (프레시안), 김종영의 서평 (교수신문). 아무래도 지면 제약이 없다시피한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에선 책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교수신문 서평은 그보다는 간략하지만 '촛불시위'에 대한 라투르적 해석가능성을 소개하는 등 책 바깥의 맥락까지 짚어주고 있다.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 든 생각이지만 라투르만큼 창의적인 사회이론가도 드물다.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김종영)

같은 서평을 또 일부 인용하자면...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책 독일어 번역서를 사 두고 일부 읽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뭘 읽은 거지 ... ).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루만은 부르디외와 데리다 중간 정도로 위치시킬 수 있겠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하지만 (데리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니까 (부르디외). 이 블로그 어디 쯤에 있을텐데, 루만과 라투르를 비교하는 논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있다. 라투르를 들어 루만을 치기는 쉬운 편이다. 루만을 전형적인 '사회학주의자'로 보면 되니까. 루만을 들어서 라투르를 칠 수 있을까?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라투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음. 이 부분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 듯. 한국 STS 맥락에서 루만을 소개하려면... 루만 이론의 출발은 Sinn인데 철저하게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비인간 행위자를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봉쇄되는 건데, 'Protosinn'이란 개념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좀 군색해 보이는 제안이다. 여하튼 라투르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루만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본격적으로 해 봐야 할 듯 싶다. 어짜피 사회이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상태에서 연대해야 필요성이 커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재배치'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 창작, 표절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이 논문은 가위와 풀로 만들어졌다'느니,  'scissors and paste', 'copy and paste'  같은 표현이 학위논문이나 책 서문에 곧잘 등장한다. 그리 '창의적'이지 않다는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 굳어진 표현인데, 어짜피 해아래 새 것이 없고, 창의성의 본질이  '창작'이 아니라 '재배치'에 있다면, '창착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Ctr+C & Ctr+F'다. 오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Ctr+C' 와 'Ctr+F'를 누르면서 든 생각. 남의 쓴 문장, 표현을 몇 단어 이상(?)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건 표절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막상 따져야 할 건 얼마나 '창의적으로' 표절했느냐 아닐까? 여기 저기 기운 자국 투성이인 내 논문을 이렇게라도 구원시켜주고 싶은 주인의 심정... ㅠ ㅠ

라디오스타, 김현식...

쓸까 말까 마음과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을 누군가 가지런히 정리해줬다. 품을 덜어 준 데에 대한 고마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지'가 있다는 반가움이 교차한다. '무릎팍도사'와 함께 '황금어장'이라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라디오스타' 얘기다. 사실 이 둘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무릎팍도사'는 한 마디로 웃기는 토크쇼인데, 가장 한국적인 토크쇼 컨셒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웃음, 인생, 솔직, 감동 등이 섞여 있는... 많은 예능프로그램들이 출연자, 아이템, 배경은 바뀌지만 대개 매번 분위기가 비슷하고, 대본을 좇아간다는 느낌을 주는데 반해, '무릎팍 도사'는 출연자에 따라 분위기가 확확 바뀌어서 'Interaktion' 상황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기도 하다. PD 입장에선 위험성이 높은 컨셒이고, 실제로 지루한 경우도 가끔씩 있지만, 이런 방송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디오스타'를 왜 좋아하는지는 오마이뉴스 기사로 대체한다: "라디오스타"가 고품격 음악방송인 이유. MBC 프로그램 '황금어장'의 '라디오스타' 감상기"

위 기사에도 언급되지만 어젠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이 출연해서 진행자 4인방과 함께 김현식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김현식을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사실 아주 꼼꼼하게 들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부른 노래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거나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사랑 내곁에...),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 더 좋은 노래들이거나, 아니면 나머진 그저 그렇다.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현식 곡은 - 다시 '검토'해봐도 - 하모니카 연주곡인 '한국사람'이다 (언젠가 이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는...여기). 어제 '라디오스타'에선 '인간' 김현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 일가를 이룬 이승철, 봄여름가을겨울에게서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선배 가수. 야, 그 사람이 저 정도였나, 싶은... 

올릴만한 곡을 찾던 중 그나마  낫다 싶은 노래가 '쓸쓸한 오후'. 지금처럼 비오는 늦가을 오후에 어울린다. 김종진의 첫 작품으로 김현식 3집 (1986) 10번 트랙으로 실렸는데, 그 배경에 대해선 어제 방송을 참조하시라. 1986년도에 저런 세련된, 혹은 앞선 음악을 쓸 수 있었던 김종진씨에게 박수를. 짝짝. 문제라면 그 이후에도 크게 진보된 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무식하니까 이런 용감한 발언을...^^). 그래도 이 노래는 '늘어지는' 김종진 목소리가 더 어울린다.

2009년 11월 11일 수요일

창의성 - 낯설게 하기

창의성의 핵심이 익숙한 것들의 재배치라면, 그건 곧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익숙한 것들을 다른 맥락에 집어 넣어서 낯설게 하기? 그러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케 하는 것!

낯설게 하기란 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 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 남의 지식을 짜집기 해보면 -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았단다.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는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고.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을 얘기했고...

여하튼 낯설게 하기의 핵심을 재배치로 이해하면 그걸 미학적, 인지적 차원이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까지 구현된 미술작품이 뒤샹의 '샘'. 욕실에 있는 완제품 변기를 전시장으로 재배치시키니까 작품니 된다. 캬, 기각 막히지 않는가. 어쩌면 가장 손쉽게 창의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금기를 깨는 것일 터이다. 벗뜨... not always... 금기를 깨는 것도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으니까. 또 다른 금기를 찾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엔 오히려 그게 지루하다. 돌고 돌아 모던, 중세로 돌아갈지 누가 알랴. 정말이지 역사는 어쩌면 돌고 도는 것일 수도...

재배치는 정말이지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루만을 한국에 소개할 때... 루만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에 대한 창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이란 공간 속 의미 연결망 속에 체계이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집어 넣어야 하니까 말이다. 가장 자주 시도되었던 방식이 하버마스와 비교였다. 다른 방식이 있을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후배와 나눈 대화 속에서 얻은 생각인데, 루만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재비판 하는 건 어떨까? 행위에 대한 분석이 없다던지, 대안이 없다던지, 몰역사적이라던지... 그런 비판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거나 오해라고 설득하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그런 점을 중심으로 루만 이론이 요소들을 재배치 하는 것.

창의성은 재배치를 통해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함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이지 여러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블로그의 레이블... 늘 불만이기도 했는데, 그 분류가 너무 식상하단 말이지. 언론, 역사, 영화, 문학... too 20세기적. 지식의 체계를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좀 창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지나친 창의성 발휘가 가져 올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장벽, 그것의 위험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학문 분류에 대해서도 그렇고. 한국에 통섭, 학제간 연구 등에 대한 담론이 무척 무성하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한국의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창의적이어야 한다, 뭔가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게 주류 - 적어도 학술 담론에서는 - 되고 있는 상황. 아니면 그런 강박에 시달리고(만) 있는...

발상의 전환 - 한국을 도시국가로?

직전에 소개한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창의성을 '독특하게' 정의한다. 대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창의성, 창의적 행위로 정의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세상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종류의 새로움은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것들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예전에 있던 것들이 다른 맥락에 놓이면 우리는 새롭게 느낀다". "정확히 말해 창의성이란 아주 익숙한 것을 다른 맥락에 놓아 새롭게 느끼게 하는 능력을 뜻한다." (82쪽).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 해석틀을 가져다 쓰는 건 전형적인 비창의적 혹은 반창의적 행위다. 한국에서 '근면''성실'이 아닌 '창의성'이 강조되는 건 한국 사회 인식의 틀 (인식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창의성은 다른 발로 발상의 전환이다. '발상의 전환'은 오히려 김정운 교수가 얘기하고자 하는 창의성의 내용을 더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런 창의성 혹은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들자' 이색주장. 한국만한 중(中) 충칭도 나라 아닌 도시" 무슨 웃기는 소리?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인용한다.

"중국의 충칭시는 면적 8만2300㎢에 인구 2800여만명이 하나의 도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한의 면적은 10만㎢, 인구는 4900만명이기 때문에 하나의 도시처럼 사는 게 가능합니다."
그는 "영국의 도시전문가인 피터 홀(Hall) 런던대 교수도 '한국은 결국 하나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송 교수는 "과거엔 홍콩·싱가포르 등 도시국가만이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했지만 각종 기술 발전으로 인해 미래엔 하나의 국가가 도시처럼 긴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예로 들었다. 휴대전화가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이 하나의 도시 안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을 하나의 도시로 만드는 물리적인 수단으로는 KTX 등 고속철도를 들었다. 송 교수는 "시속 400㎞의 고속철도를 이용해 서울~부산, 서울~목포를 1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선형도시'를 만들고 이를 다시 전국으로 확산시키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지난 6월 출간한 '세계경제전쟁, 한국인의 길을 찾아라'에 담았다. 또 이를 바탕으로 지난 7월 발족한 'KTX경제권 포럼'의 민간 공동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다.


최근 한국을 다녀보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한국 도시나 마을은 어디 가나 비슷비슷한 외형을 취하고 있다. 구석 구석 다니다 보면 차이들이 더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도로나 철도가 다니는 길 주변 풍경은 큰 차이가 없다. 국토가 좁다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사실 남한만 따지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철로 2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아닌게 아니라 좁다.
또 언젠가 지적했듯이 한국에선 공산국가의 '인민..' '공훈...' 마냥 '국민...'을 좋아한다. 국민배우, 국민여동생, 국민과학자, 국민가수, 국민영화, 국민드라마 등등. 4천만 인구에 천만이 보는 영화가 등장하고, 한국처럼 유행에 민감한 나라도 없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 시시때때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잘 뭉치는가.
이런 현상을 문제로 삼으면 대개 '지역다양성',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규범적으로 보아 설득력있고, 옳은 방향일 수는 있으나 사실 그리 창의적인 발상이 아니다. 도덕 선생님 발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참여정부의 국정 목표였던 '지방 분권화'에 대해서 과도한 수도권 집중이 가져오는 문제를 고려할 때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으나, 좀 참신한 발상이란 평가를 주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문제 혹은 단점, 약점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특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 그런 게 창의적 발상이지 않겠는가? '도시국가화' 주장은 국토가 넓지 않고, 문화적, 지역적 다양성이 부족한 것들을 역이용하는 발상이다.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은 짧은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창의성에 대한 접근은 학술적 담론에서도 적용될 것이다. 아니 적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학술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싸움의 장 아니던가. 그런 맥락에서 도덕선생님같은 하버마스보다 루만이 이론적으로는 더 급진적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고 루만얘기나 주장을 반복하는 것만큼 또 지루한 일은 없다. 후학들은 끊임없이 루만을 넘어서려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서 루만을 탈구조주의적인 맥락에서 해석한다던지.... (U. Staeheli) [이것도 벌써 낡은 애기...].
하지만 창의적인 건, 새것을 선호하는 '신상증후군'과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외국이론을 선호하거나, 외국에서 유행하는 학술 담론 주제를 가지고 '들어오고', 외국 사례, 정책을 가져다 쓰는 건만큼 비창의적인 일도 없으니까...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노는만큼 성공한다" (김정운, 2005)

어제 천안에서 대구로 오는 기차 속에서 책 한 권을 독파했다. 베를린에서'13년 동안' '그 어렵다는 문화심리학을 공부하고 독일학생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석사과정) 교수인 김정운의...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을 워낙 소화하기 쉬운 문장으로 쉽게 써 놓아서 '먹물'들이 '시간죽일' 때 이용하기에 맞춤인 그런 책이었다. 구체적인 책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할 여유나 여력은 없지만, 몇 가지 느낀 점을 잊기 전에 기록해두려 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전달하려는 전문적 지식이 개인적 경험, 삶 이야기와 잘 맞물려서 '씨너지' 효과를 낸다. 심리학과 동료였던 하버마스 아들이 '수줍고 착실한 생리심리학'자라거나, 악셀 호네쓰가 하버마스의 사위라는 주변적인 정보를 흘리는데, 일종의 '후광효과'를 노린 것이리라. 그렇듯 자기 자랑격인 얘기들이 적지 않은데 동시에 중간 중간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기도해서 그렇게 밉상스럽게만 보이지 않는다. 얄미울 정도로 독자를 울렸다 웃기는 능력.
세상엔 세 종류 교수가 있다고 소개한다 (p.128). 1. 어려운 이야기를 무척 어렵게 하는 교수 2.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 3. 정말 쉬운 이야기를 아무도 못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 그러면서 스스로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자부함을 감추지 않는다.
가장 부러운 점은... 자신이 던지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것이 지금 한국 상황, 맥락에서 아주 잘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기업과 정부와 각종 매체에서 와달라고' 조른다는 얘기를 떡하니 써 놓을 정도로...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하는 얘기에 세상이 귀를 기울여 주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지식인에게 또 있을까...
흠. 그러고 보니 자기 자랑이 좀 심한 편이긴 하다. 자기 자랑 심하기로는 김용옥을 따라 갈 이가 드물텐데, 그의 경우 '학벌 컴플렉스'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기고, 서울대). 하지만 그역시 감출 법한 얘기 - 학벌 컴플렉스를 포함해서 - 도 곧잘하며, 스스로에 대해서 충분히 성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자기 자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에서도 그런 냄새가 낸다.
이 양반은 스스로 'B&G'를 하며 논다고 소개한다. 풀이한즉슨 '뻥 앤 구라'. 몇 가시 실례도 소개하고 있고... 입담이 좋은 것, 자기자랑,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는 능력, 구라, 뻥... 구분하기 힘든 얘기들이다.

p.s.) 본문 중에 "창의성의 원천은 '낯설게 하기'에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얘기를 여러 방식으로 변주,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 학문의 이해나 글쓰기 등에도. '놀람'의 효과를 줘야 한다.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언젠가 같은 제목으로 뭔가를 쓴 적이 있다. 아마 다시 저 제목을 떠 올린 지금과 비슷한 심리상태에 있지 않았을까... 정말 큰 일은 아니어도 떠올릴 때마다 괜히 다시 속이 끓는 그런 일이 있다. 특히 내 경우엔 내 상식으로 판단할 때 기대되는 행동이 있는데 - 정말, 상식적... - 상대방이 그런 기대를 깨 줄 때... 그 심리체계의 작동 메카니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화가 난다. 생각해 보면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비상식적 행동에 대해서 특히 분개하는 것 같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 유형에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 포함된다. 그 밖에 무례한 사람들도 싫어하는데, '무례'와 '배려할 줄 모름'은같은 말인가? 어쨌든 난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겐 기꺼이 무례로 갚아주는 편이다. 때로는 집요하리만큼...

푸코와 한국 근대성 연구

지난 수 년간 한국내 인문학 담론에서 떠 오르는 주제인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다룬 저작들을 살펴 보고 있는데, 그 지면들 사이에서 강하게 풍기는 푸코 냄새를 모른 채 할 수가 없다 (혹은, 들뢰즈도?). 푸코가 18세기 프랑스를 대상으로 했던 연구틀을 한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그대로 가지고 온 듯한. 국가 권력, 위생, 병리학, 감시의 시선, 타자, 탈영토화, 근대성의 주변 등등 자주 등장하는 표현 혹은 주제만 보더라도. 이진경, 고미숙 등의 '수유연구실 + 너머'에서 나오는 작업들, 현실문화에서 펴내는 책들, 권보드래, 천정환 등 국문학자들의 작업들, 민족주의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연구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진다. 조금 더 읽어야 한계를 찾아 낼 수 있을텐데... 체계이론을 가져와서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시 백지화는 범법행위”

정세균의 말이다 (한겨레 기사: 정세균 “세종시 백지화는 범법행위"). 이건 아주 좋은 구도 설정이다.'헌재'의 똘아이 짓, 미디어법 통과 및 개정 거부 등이 법률의 권위를 떨어트리는데 일조했고, 사실 이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법률은 여전히 구속력이 가장 높은 수단이며, '법치국가'는 합리적인 좌파나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인 지향점을 떠나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다. 헌법도 장식적인 기능에 머무르다 조금씩 공공 담론 속에서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고. 언제가 내가 칭찬했듯이... 서울시가 광장 집회를 거부할 때, 그 누군가 시원하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서울시 조례 따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고... 오늘 송영길은 대정부 질문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절차상 하자가 있는 언론관련법도 (헌재가) 유효하다니까 집행하는 총리가, 여야가 합의한 세종시법은 왜 안 지키냐". 정세균 씨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 당장 떠오르진 않지만 - 그네들도 법률 무시하는 행태를 어디 한 두번 보였겠는가마는... 그래서 정세균, 송영길의 이런 비판을 다시 비판하려면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박근혜가 행정중심도시 건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했을 때, 같은 당의 어떤 이는 그렇다면 대운하 공약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무식한 발언을 내뱉었는데, 공약과 법률의 차원도 구분 못하는 참 저질 판단력, 사고력을 보여준 행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외쳤던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아니었던가? 법에 대한 인식에 대해선 한국은 1970년 11월 13일에서 별로 멀리 가지 못했다.

ps) 내 지론이기도 하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내용,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거기에 대해서 합의를 추구하기 이전에, 절차, 수단, 평가 기준 등에 대한 합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한국사회'의 인식론적 전환

story telling, narrative 같은 표현은 사회과학 자료 분석 얘기하면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인데 한국 언론에서 자주 접한다. 특히, '마케팅'과 관련해서...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한국의 궁궐 담장이 왜 낮은지, 그 이유를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냥 담장도 멋진 관광자원이 된다거나, 일본엔 무척이나 비싼 전통주들이 있는데 술만 파는 게 아니라 술에 얽힌 이야기 - 얼마나 오래된 술도가라던지... - 를 함께 팔기 때문이다, 그런게 우리 막걸리엔 없다... 등등.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와인' 을 즐기는 사람들은 와인을 매개로 해서 이야기 거리가 엮고 결국 그것을 함께 즐기는 것 아닌가? 독일 맥주도 그런 반열에 껴줄 수 있을 정도로 묵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어찌 보면 '여행'도 결국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다. 유명한, 아닌 유명하다는 곳은 대개 이야기거리가 있다. 때로는 과장되어서... 그러니 막상 가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로렐라이 언덕). 이국적이거나 압도적인 경치가 아닌 곳을 안내해야 하는 여행가이드는 그러니까 열심히 입을 놀려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적어도 그 순간 뭔가 이야기거리가 있는 곳을 다녀왔다는 안도감을 줄 수는 있는 것이다 (언제가 나도 잘 모르거나 심지어 가보지도 않은 독일 여행지 가이드를 했었야 했는데, 열심히 얘기거리 외우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미술'감상도 이런 식이다. 변기 하나를 가져다 놓고서 작품이라고 우기는데 (뒤샹), 그걸 도대체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미술, 특히 현대 미술은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소비하는 거다.
이런 현대사회 맥락에서 '구성주의'적 인식론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학문의 현실의 반영이고, 학문은 또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장기한 한국을 떠나 있었던 내 눈엔 '한국사회의 인식론적 전환'이 너무도 분명하게 들어온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영웅이 된 과학자...

국민 영웅이 되어 날다가 추락한 과학자를 아시오... 그렇다. 황우석 이야기다. 하지만 동서고금 영웅이 된 과학자 목록은 꽤 길다. 황우석처럼 극적인 부침을 겪은 이도 포함해서...(예를 들어 구소련의 생물학자 리셴코).
오늘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다 "한 과학자의 죽음에 13억 중국이 울었다". 첸쉐썬(錢學森) 이란 원로과학자가 지난 달 31일 죽음을 맞이한 것 같은데. 기사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저장(浙江) 성 항저우(杭州) 시에서 1911년 12월 출생한 첸 박사는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를 1934년 졸업한 후 칭화(淸華)대 유학생에 선발돼 중국대륙이 혁명과 항일전쟁으로 들끓던 당시 미국으로 갔다. 1939년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우주 및 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에서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다. 그는 우수 두뇌 유출을 막으려는 미 당국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6·25전쟁에서 중국에 붙잡힌 미군 조종사와 1955년 교환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중 국방부 전략미사일 개발프로그램에 참여해 핵무기 및 우주개발을 ... "

"첸 박사가 중국인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우주과학에 대한 기여 못지않게 중국인에게 애국심과 자부심 등을 심어주었기 때문.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일한 기간은 모두 조국으로 돌아가 인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왜냐면 나는 중국인이니까”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인도 다 할 수 있다” 같은 말 들은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형적인, 아니 너무도 선정적인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레토릭이다. 이런 기사는 내 평온하던 속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과학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국경/조국이 있다"던 그 황교주님 말씀이 생각나서다. '전국민과학화'를 주창하시던 우리 박총통의 지령이 떠올라서다. '헌재' 수준이나, '조중동' 수준이나. 참...

영웅으로 만들어진 과학자는 적지 않다. 특히, 노벨상이나 최초로 뭘 발견한 사람들은 대개 그 반열에 쉽게 오르고, 또 최초 우주인도 대개 영웅, 적어도 유명인사로 대접 받는다 (최근 발견한 논문은 스웨덴 최초 우주인 Christer Fuglesang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이... "Gunnarsson (2009), The First Swede in Space - the making of f a public science hero" 1992년에 우주에 간 모양).
이제 위인전 따위는 얘들 손에서 뺏을 필요가 있는데, 진리만을 추구하던 숭고한 과학자상을 만들어내는 과학사 역시 서가에서 치워야 한다. 첸쉐썬 옹이 정말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는지 모를 일이다.

18세기 역사학자 비코(Vico)는 역사의 전개를 순화과정으로 보았는데 그 한 사이클은 이렇다: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 야만의 시대. 어이, 동아일보여, 좀 미련이 남더라도 '영웅 시대'는 이제 좀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ps)'영웅' 혹은 '열사(烈士)가 필요한 시대가 있다. 혼란기, 이념 갈등이 치열할 경우. 영우이 필요 없는 시기가 태평성대. 허나... 근대는 기본적으로 위기가 일상화된 시대다. 없는 싸움, 위기도 만들어 내야 굴러가는... 언론, 정치, 학문이 대표적. 위기라고 해야 대안(세력)이 필요하거나 재집권해서 안정시켜야 되고 (정치), 싸움이 있는 것처럼 구성해야 얘기가 더 재미있어 지고 (언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 태어난 체계 (학문).... 위기가 일상화되면 '인간의 시대'는 불가능한가?

'예능'이란 카테고리...

유선 방송에선 도무지 언제 적 최초 방영된 것인지 알기 힘든 묵은 영상들이 어지럽게 오고 간다. 그 유선 방송용 프로그램 시장에서 이른 바 '예능'프로그램이 가장 환영받고 있음은 不問可知... 내용을 보고서 재방인지 구분할 능력이 떨어지는 내겐 어짜피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어쨌든 어제 본 '패밀리가 떴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있어서 기록해 두고자 한다. 고정 출연자들이 있는데다 이승철이 초대 손님(?)이었다. 공교롭게 유재석을 제외하면 나머진 대부분 가수 출신이었다. 가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승철의 정체성은 '대선배'다. 개그맨 '출신'이자 프로그램을 이끌다시피하는 유재석에겐 그저 여러 손님 중 하나거나 '방송계' 선배 정도 (물론 '형님'이라고 부르긴 한다). 커뮤니케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중 출연자들이 가수와 개그맨이라는 정체성 중심으로 배치되기 시작하고, 유일한 개그맨 '출신'인 유재석이 소외되는 식으로 진행된다. 중간 중간 정체성에 대한 다른 해석이 충돌하는데... 유재석은 윤종신에게 '예능계' 후배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려 하고, 이승철은 가수라는 정체성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어하는 윤종신에게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이라고 하면서 배제하려고 한다.

'예능'이라는 장르가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이 흥미로운 사회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얘기한 적이 있었고, 그 특징 중 하나로 '고향' 장르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 '예능'이라는 새로운 - 혼성적인, 애매한... - 영역에서 빼어난 활동을 보이는 경우를 언급했다. 어쩌면 정반대에 위치시킬 수 있는 다른 특징을 발견했는데, 즉, '예능'이라는 새로운 장르에서도 '고향' 장르의 정체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니 '예능'은 바로 고향 장르와 긴장감 때문에 새로운 장르로서 유지될 수 있다.

비슷한 해석은 학문 커뮤니케이션에도 적용된다. 분과학문의 경계와 학제간 연구나 새로운 학문의 경계 혹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학제간 연구는 분과학문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때만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경계를 뛰어 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잡종적 현상이 많아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한된 복잡성만을 감내할 수 있기 때문에 익숙한 경계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부여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주목받고, 성공할 수 있는 유형의 활동이나 인간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고향 장르에 연결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면 장기적으로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예능'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만드는 핵심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한 울타리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감은 아닐지... [흡사 군대 내무반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도 비슷한...]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한국에서 루만에 대한 논의

비록 몸이 한국 땅에 있지만 바로 그때문에 루만이 한국에서 어느 정도로 소개되고 있고 학문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정보를 접하는 통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 어쨌든... 날이면 날마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열정으로서의 사랑' (새물결)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사회의 사회' 번역작업이 꽤 많이 진척된 것 같고, 다른 루만 저작에 대한 번역계획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다. 또 올 해 사회학대회에서 "루만의 위험사회론으로 본 2008년 인간광우병 파동"(문정환)이란 논문이 발표된 것을 오늘 확인했다. 루만 전문가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정성훈은 올 해 초 "루만의 다차원척 체계이론과 현대 사회진단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진보평론 여름호에 - 글 자체는 블로그에서 이미 본 적이 있지만 - "루만과 하버마스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를 발표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루만을 언급하고 있는 한국어 검색물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좋은 현상이다...
사실 이 글은 조금 전 문정환 글을 대략 읽어본 이후에 든 생각을 적어 놓으려고 시작했는데...
대략 80년대까지 루만 스스로도 기능적 분화로 정점과 중심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강조하였고, 그것 자체가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수용되었다. 여전히 정치나 국가 혹은 다른 극단에선 경제나 계급 중심적인 사회이론이 지배적이었으니까. '포스트모더니즘' - 대략 이렇게 표현하기로 하자 - 이 득세하면서 루만은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사회이론에서 여전히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주의자이면서 하버마스 식은 아니라 좀 참신한 면이 남아있긴 하지만, 루만의 기본적 착상은 포스트모드니스트나, 기든스 벡 같은 후기근대주의자들에게도 대부분 수용이 되어 버렸거나 결과적으로 비슷한 얘기를 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론 루만과 체계이론가들은 무엇보다 체계의 경계 유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구별이 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매우 고리타분, 혹은 이미 늙어버린 보수주의자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 "기능적 분화된 사회이다. 체계는 경계를 유지하게 되고, 그래서 위계적 통제나 합의의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건 80년대 후반 Oekologische Kommunikation을 출간할 때나 파격적으로 들리던 얘기라는 말씀. 내가 추적한 바로 일부 체계이론가들은 이미 교조적인 '기능적 분화' 주장을 떠나고 있다 (Bora 교수도 - 체계이론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진 않았지만 - 법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체계이론이 참신하게 들리는 경우는 어쩌면 기능적 분화를 '전제'하고서 바로 그 전제 때문에 이전에 익숙하던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사례들 아닌가 싶다. 왜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오히려 중요해지는가, 왜 기능분화에도 민족주의/국가주의/근본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는가, 왜 파편화된 사회에서 개인을 포섭/배제하는 메카니즘이 중요해지는지 등등. 혹은 역시 기능적 분화를 전제로 하고서 장기간 의미론의 변화를 추적하는 지식사회학적 작업이랄지 (한국 근대성의 기원 같은...). 여기에서 혼자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그 심정...]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大河武俠小說 少時悟路志 槪要

아래 글에서 언급한 인터넷 사이트 주인공이 Pepe인데, 실명은 모르겠으나 꽤 알려져 있는 사람인듯. "大河武俠小說 少時悟路志 槪要"란 꽤 오래 전에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글도 이 양반 '작품'인 모양이다. 흥미롭다.
들어가는 부분만 인용해 놓는다. "먼 옛날 중국 동부 독일사(獨一寺)의 청년 승려 갈막수(渴莫水)는 비록 생활이 다소 사치스럽고 문란하여 돈 쓰기를 물 쓰듯이 하였으나 무술수련에 나름대로 몰두하고 있었다.." 갈막수(渴莫水)라... ㅎㅎ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아서 논평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시도다.

ps) 예전에 루만을 중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나 찾아 본 적이 있는데... 확인해보니 "尼克拉斯 卢曼" 이다.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ps2) 'pepe'의 실명, 실체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랭카스터 대학 박사, 역서 「정체성 싸움」 등...).

만들어진... 상상된... 구성된... ' - 발견' '-탄생'

"만들어진 우울증" (크리스토퍼 레인, 한겨레출판)이란 책이 나왔나 보다. '만들어진...' 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표현인 모양이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원제는 뉘앙스가 다르다. "Shyness: How Normal Behavior Became a Sickness". 지난 해엔간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원제도 'God Delusion'이다. '만들어진...' 외에 수 년전부터 비슷한 느낌을 주는 표현이 책제목으로 자주 등장한다. 민족주의 연구 쪽에서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원제가 'Imagined Communities',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은 "The Invention of Tradition".

철학, 사회이론 쪽에서는 '사회적, 문화적 구성..'이라는 표현이 수십년 동안 지배적이다. 몇 전 년에 출간된 "The social construction of disease"라는 광우병 연구서 얘기를 들으면서, 흠, 이젠 좀 진부한 표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을 정도로. "Ian Hacking은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이라는 책에서 서구학계에서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이라는 말이 남용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정확히 무엇이 구성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Hacking은 또한 건축적 메타포인 사회적 구성construction이라는 말이 얼마나 마구 쓰이는지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한 대상에 사회적이라는 말을 쓴다던가, 아니면 구성되었다는 말을 쓰기 힘들 정도의 분석을 내놓으면서 건축적 메타포인 사회적 구성이라는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을 지적한다. (...) Hacking과 같은 학자는 '사회적 구성'이라는 말이 남용된다고 개탄을 하는데, 한국에는 일견 그런 거북하고 어려운 말을 사용한 책 제목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신 재미있게도 한국에서는 최근에 '탄생'이라는 메타포가 많이 쓰이고 있다.."

방금 이 구절을 인용한 인터넷 사이트는 고맙게도 '-의 탄생'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 이름을 모아 놓았다. 그 양반 추적에 따르면 국내서 중에서는 이진경의 <근대적 시. 공간의 탄생> (1997)이 선구적인 모양이다. 올 해 나온 '번역의 탄생'(이희재)가 있고. 서구학자 중에서는 푸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예컨대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푸코) [원제는 The Birth of the Clinic: An Archaeology of Medical Perception/ Naissance de la clinique. 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 혹음 '임상의학의 탄생'. 이진경과 푸코는 '친하니까' 푸코 영향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구성주의, 푸코류 포스트모던 대략 그런 전통에서 쓰기 시작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윗 사이트에서는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탄생'을 알려준다. 바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edie)! 포스트모던 사상의 선구자로 니체를 꼽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연만은 아닐 지도...
'-탄생'의 기원을 아날학파에게서 찾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탄생'의 개념이야말로 아날 학파와 심성사의 방법론을 대표하는 표제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푸코가 '탄생'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전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날 학파의 '배경'을 성공적으로 전유하고 매력적으로 자기화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으로서의 역사, 제도로서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심성으로서의 역사, '탄생'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훌륭한 키워드인 것. '
그 밖에 '탄생'을 달고 있는 책들로... '연옥의 탄생'(2000), '아동의 탄생' (2003),'개인의 탄생'(2006),원제도 'Die Entdeckung des Individuums'1997), '생각의 탄생' (2007)(원제는 'Spark of Genius' 1999), '젊음의 탄생' (이어령 2009).
'발견'은 '낭독의 발견' (KBS 1TV).
그 기원이 아날학파든, 푸코든, 아니면 니체든, 이 같은 '구성주의'적 제목달기가 한국에 유행하고 있다는 건 한국 지성사의 큰 변화를 보여주는 증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변화의 내용과 원인이 과연 무엇일지, 그것을 알아내는 건 분명히 재미있는 지식사회학적 과제다. [한 가지 추측은 이런 변화가 '한국 근대성/현대성의 특성, 기원 등에 대한 관심 증가와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것. 내가 요즘 접할 수 있는 종이신문인 '조선일보'에서도 '100년전 우리는'이란 제목의 연재물에서 20세기초 한반도 풍경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 가지 추측은 한국사회 매스미디어, 지성계, 혹은 공공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하는 인식론이 바뀌고 있다는 것. 리얼리즘에서 구성주의로...]

조금 다른 맥락에서... 최근 한국 민족주의 연구를 추적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인식 역시 놀라울 정도로 유연해졌음을 발견하고 있다. 딛고 서 있는 토대가 여전히 취약해서인지 '새 것'을 선호하고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참으로 역동적이고 용감한 (... )다 [이 괄호 안에 어떤 표현을 넣을 지 사회학도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민족? 국민? 어떤 집단에 이름을 붙이음로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 쉽지 않다. 아는 것이 병...].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내용에 대한 합의/ 방법, 수단에 대한 합의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서 발견한 광고 하나가 내 왼쪽 뇌 활동을 심히 활발하게 하고 그 생각을 드러내야겠다는 욕망까지 자극하였다. 다름 아닌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단 '조직'이낸 성명선데 제목은... "정부는 국무총리 소속 '민보상위'(약칭)의 반헌법적 반국가적 활동을 즉각 중지시키고, 해체하라"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대한 얘기다. 기이한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온순한 조직도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던 이 정부가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런 '불순한' 조직을 남겨두었다니... 우리 '자유민주주의' 수호신을 자처하시는 영감님들이 분개하시는 것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내 이 자리를 빌어서 강력히 요청한다. 우파 - 대파, 쪽파, 양파도 아닌 '우파' 혹은 '극우파' - 어르신들께서 제 명을 누리실 수 있도록 2mb는 하루속히 '민보상위'를 없애라. 그 뭐 어려운 일이라고 뭉기적 거리고 있는가. 그러니 대중들 눈치보는 '파퓰리스트'라고 욕을 먹지. 서울시장 시절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을 막고 싶다는 결기를 보이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결연함을 우리 어르신들이 기대하는 것 아닌가.

한국에선 흔히들 좌우갈등이 심하다고 얘기한다. 아니 좌우는 여전히 좀 걸끄러운 표현이라 - 좌빨, 극우보수, 이런 표현들을 대개 싸움을 걸고 싶을 때 쓴다 - 대개는 진보, 보수의 갈등 정도로 얘기된다. 전제군주나 파시스트 치하가 아닌 다음에야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는 건 오리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그 '총화단결' '전국민 동원'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서로 다른 생각, 가치의 공존을 불편해 한다. 정치인들이 하나 같이 '국민의 뜻' 운운하는 게 그래서 난 몹시도 못 마땅하다. 아니 '국민'이라는 이름을 여기 저기 가져다 붙이는 것 참 거슬린다. 누가 감히 '국민'을 함부로 얘기하는가? 언제 내게 물어 봤냐고... '국민 배우', '국민 여동생', '국민 훈남'... 그런 이름을 붙이는 집단의식은 '인민 배우' '인민 과학자' '인민 영웅' 만들어 내던 그 전체주의와 근본 다를 게 없다. 물론 '국민..'은 그저 웃자는 얘기라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느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발화행위는 그 자체로 현실이고 실천이다 (cf. 영화 'Die Welle'). 국민과학자가되어 버린 황모씨를 모르시오?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건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원리이고, 그런 '기본'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복잡한 현대 사회의 역량인 것이다. 하버마스도 바로 그 얘길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담론윤리'운운 하면서...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이전에 합의에 대해서 얘기하는 태도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 거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학문커뮤니케이션이다. 아주 이상화된 형태로 이해해서... 학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장치는 현상에 대한 설명, 이론에 논쟁, 토론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학문적 진술이 공유하고 있는 수단, 실험장치, 방법론에 대한 합의인 것이다.
정치는 대표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와서 대표적으로 싸우기를 기대하는 영역이다. 법은 정치나 기타 사회 영역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려주도록 기대되는 영역이다. 이는 '합의에 이르기 힘든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장치 중 하나이다.
우리의 '헌재'가 어제 보여준 모습은 찌질하기 그지없다. 국회에서 내린 결정에 문제가 많아서 '좀 대신 판단해 주십시오'하고 가져갔더니, 하시는 말씀...'음. 문제가 많긴 해. 하지만 니들이 알아서 할 문제야'. 밥은 드시고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삼권분립','법치', '공권력 보호',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대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듣보잡')나 '자유총연맹'(<-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의 투사가 되시더만...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헌법재판소... 뉘시더라?

지폐 위조 인정하나 화폐가치 있다는 꼴”
미디어법 헌재결정 뒤 야당·언론노조 관계자 기자회견에서 ‘조롱’ 쏟아져
뭐야, 무슨 말이야?…법 처리 과정 위법성 확인했는데 결과가 왜 유효?”


김어준씨가 노무현의 죽음 이후 '어느 신문이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노무현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는 '리얼 코미디'를 전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얘기 그대로를 그분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분노의 대상이 될 가치조차 없는 '분'들이다. 그냥 창피할 뿐이다. 2009년 10월,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그들과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헌법재판소? 도대체 뭐하는 데지?

ps) 패러디... 이런 일엔 정색하고 혈압을 높이기 보단,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오프사이드는 맞지만 골은 인정된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회사자금을 횡령했지만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훔친 물건이지만 소유권은 인정된다'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은 맞지만 메달을 박탈하지는 않는다'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것은 잘못이지만 점수는 인정된다'
'무단횡단은 잘못이지만 이미 길을 건넜으니 괜찮다'
'주가조작은 불법이지만 시세차익은 유효하다'
'위조지폐임이 분명하나 화폐로서의 효력은 없다고 할 수 없다' (노회찬)
'입대를 기피하는 과정에 위법 행위는 있었지만, 군 면제는 유효하다'
'대리시험에 커닝까지 있었으나 합격자 발표는 유효하다' (노회찬)
'똥이 묻은 것은 사실이지만, 빤스는 유효하므로 벗을 수 없다'

ps) 이럴 땐 헌재 스스로 과거에 내뱉은 말을 가지고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도 적절한 대응이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이 그런 점을 적절하게 잘 지적하고 있어서 읽을만하다 (여기).

익숙....

한국에 살려면 익숙해져야 할 일들이 있다. 먼저 자동차와 친해져야 한다. 골목길에서 사람과 차는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인간/비인간(자동차)을 구분하는 낡은 사고방식은 버려라. 자동차를 내 옆을 지나가는 동료 보행자 정도로 생각할 것. Latour가 보고선 씩 웃을 상황이다.
그리고 방금 경험했지만... 길거리에서 서 있는 아주머니들, 누군가 지나가면 시선을 주었다가 그 움직임에 맞추어 시선을 옮긴다. 때로는 상하로도 움직이면서... 눈은 게슴츠레하게 떠야 그 상황에 어울린다. 팔짱까지 끼면 더 좋고. 그 시선의 의미는... '내 영역에서 얼쩡거리는 저 족속의 정체는 무엇인고...' 정도로 해석된다. 위아래 좌우로 훓어내리는 탐색의 시선... 그들에게 익숙한 카데고리로 떠내기 힘든 나같은 족속에 대한 관심이 지대함을 드러내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뻔뻔함... 사람에 대한 Respekt 표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듯한 그런 시선. 익숙해져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loser 문학

영화 속 한 장면이었는데 영화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정말 영화에서 본 장면인지도 사실 불확실하다). 전후 문맥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 어쩌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빈곤한 기억력 하곤... - "You're a loser!"라고 외치는 그런...

'성공' - 대개 외부로 드러나는 척도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 을 삶의 지상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적 (혹은 근대적) 질서 속에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되는 일은 치명적이다. 우리 근대인은 어쩌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실패자, 낙오자로 평가받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도... 그러니 'loser'얘긴 많은 이들에겐 사실 실존적 문제다. 허나 '루저 문화'라고 하면 갑자기 다른 것들이 연상된다. 어찌 보면 우린 장기하 같은 'loser'를 꿈꾸는 지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더 잘 나갈 수도 있는... 운동권이라고 다 같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로쟈'에게서 확인한 얘기에 따르면 이외수를 '루저 문학'으로 설정하는 모양이다. 이외수 정도로 '성공'을 해야 그런 '루저 문학'이란 '라떼루'를 붙여주지, 정말로, 실존적으로 '루저'였다면 어땠을까? 루저 문학, 루저 문화는 '루저'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잠시 위로를 얻고 가는 휴식처이다. 그러니 장기하, 이외수 정도로 '성공'해야 - 아니 '출신성분'상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 그런 루저 문화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 (로쟈 포스팅은 여기)

로쟈가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인용해 둔다:

'한국문학의 다이어트-이외수 소설의 ‘대중성’에 대한 단상'이란 글에서 조영일 씨가 더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메인컬처로서의 한국문학은 90년대에 소프트-서브컬처 문학인 하루키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와 개인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즉 내면으로의 침잠 또는 과거로의 회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그와 같이 개인이 사회를 초월함으로써(즉 사회를 왜소화시킴으로써) 하드-서브컬처 문학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해, 오늘날의 한국소설공간은 루저loser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한 '전망(미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자, 소모적인 싸구려문화 속에서밖에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외수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일찍이 ‘루저소설’을 써온 소설가로서일 것이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문화 읽기: 루저(loser), 싼티, 굴욕, 찌질, 망가짐...

최근 텔레비전 문화 흐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던 차에 괜찮을 글을 한 편 만났다. 하재근의... (출처).

"스튜디오 안에서 항상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있는 신동엽은 과거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다. 그의 재능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천재적 예능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중은 비록 어눌하더라도 루저, 싼티, 굴욕 코드에서 사람냄새를 맡으며 위안을 얻고 있다."

그런 사례로 반지하방에서 마시는 싸구려 커피를 노래하는 장기하와 TV 프로그램으로는 '1박 2일', '무한도전'등을 들고 있다. "<무한도전>도 루저와 싼티의 집합체다.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등이 ‘대한민국 평균이하’라고 할 때 시청자는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이라고 느낀다." 이른 바 '싼티'전략... '사람냄새'를 내기 위해서 예전 같으면 숨기는 게 미덕이었을 아픈 과거를 기꺼이 '유머'의 소재로 제공한다 (이혼, 도박...). 또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뜨려면 망가져야 한다는 얘기도 자주 등장한다. 고현정이 그런 사례였고... '근엄하던' 남자 배우들도 망가져야 겨우 버텨나지 않는가. 노주현, 야동 순재 등 [예전 '최불암 씨리즈' 유행의 배경에도 이런 정서가 있었을 것이다". '무릎팍도사'는 바로 '스타' 망가뜨리기 그 자체를 컨셒으로 삼은 거고... 하재근 왈, 그 배경엔 이른 바 "2000년대 정서"가 있다는데...

"한국사회에서 2000년대를 표상하는 단어는 ‘양극화-민생파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생파탄이 20대 젊은이들에게 투영된 단어가 ‘88만원세대’다. 이제 풍요로움은 없다."

반면 '신비주의'를 지키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그런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심리는 '상수'이다시피 하니까 (장동건, 이현우...). 종합하자면 "막장적 신데렐라 코미디 판타지의 허황된 밝음과 루저, 싼티, 굴욕의 ‘찌질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출구 없는 불안, 양극화, 빈곤, 패배감 등이 이어지는 한 이 기이한 풍경은 계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전자는 대중에게 환상을 안겨주고, 후자는 위안과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뭐, 아주 기발한 발상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학문에 대해서도 기대되는 바가 아닌가? 황우석씨는 '소탈함''소박함'을 매개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 아닌가? 요즘'대중'은 - 이게 도대체 누구인가마는... -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거나 스스로 잘 소화하지도 못한 얘기로 버벅거리는 이른 바 '전문가''학자''교수''지식인'들에겐 심지어 '분노' 비슷한 것까지 느끼는 것 같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권위주의'를 배척하는 건 좋은데 '필요한 권위'마저 서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제다.황우석 논쟁, 디워 논쟁에서 보여 주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좀 고급스런 지식에 대한 동경이 없진 않은데 - 신데렐라 코미디와 '싼티'의 공존처럼 - 대신 소화하기 쉽도록 오물 오물 씹어서 입에 넣어주기를 기대한다. 그걸 잘 하는 대중적 지식인에 대한 열광 또한 대단한다. 대표적으로 김용옥, 진중권... 물론 이들은 예능인들과는 다르게 대중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채널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예능인-지식인

'예능'은 매우 독특한 카테고리다. 텔레비전 방송국 부서로 '예능국'은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부서로는 '드라마국', '보도(제작)국', '편성국', '시사교양국' 등). 하지만 그 예능국은 드라마, 뉴스를 제외한 다른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개그, 코미디, 가요 등 각종 '쇼'에 대한 것이었다. '예능'이 하나의 독립된 방송 장르처럼 사용된 역사는 - 내가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 그리 길지 않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주말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으로 광고를 했었는데, 그 프로그램이 아마 시초가 아닐까? '버라이어티', 그러니까 여러 장르가 섞였다는... 언제부터인지 드라마도, 개그도 아니면서 여러 분야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토크'를 하거나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방송거리'을 만들어 내는 - constructed reality - 그런 프로그램에 '예능'이란 표현을 붙이게 되었다. 현재 한국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와 '예능'이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학계에서도 학제간 연구, 학문간 융합, 통섭을 강조하거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혼성모방' 어쩌고 하더니 텔레비젼에서도 장르 간 혼성이 대세인 모양이다. 사실 그런 예능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만드는 건 '입심'이다. 유머, 재치의 향연장인데 정말이지 그곳에서 살아 남는 사람들의 '예능 본능' 혹은 내공에 놀랄 때가 있다 (거기에다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자막, CG등을 덧붙이는 '작가', PD들의 내공 또한 대단하다. 특히,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인 '라디오스타'의... 작가, PD들이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자주 관찰된다). 한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남자건 여자건 많은 말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어쨌든 입담 좋은 사람들은 '고향' 장르에서는 시원찮아도 예능에서 탁월함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출신 분야에서 시원찮다는 것 자체가 입담 소재가 된다. 그래서 성공한 대표적 사례가 '컨츄리 꼬꼬'의 멤버 탁재훈, 신정환 (연예인들의 '어두운' 과거도 소재거리다. 연예인 부부들끼리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그런 풍토를 두고 너무 '험악해졌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인데, 연예인들이 사적, 공적 영역을 넘나드는 것, 그건 시대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른 바 지식인들 중에서도 '예능'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미 나름 그건 계보가 있다. 왜 TV에 단골로 출연하던 박사님들, 교수님들 있잖은가. 조경철 박사 (천문학), 김정흠 교수 (물리학), 조문부 (새 박사), 하재봉 (영화, 연예?)... 허나 그들은 그들의 전문분야를 끝까지 안고 간다는 점에서 '예능인'이라고 얘기하기 힘들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쪽에 가장 가까이 간 인물로 '진중권' '김용옥'씨 정도를 꼽을 수 있을텐데... 아무리 그 진,김 선생이라고 하더라도 - 예를 들어 - '라디오스타'에 한 자리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식인들은 그 지식인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예능'에 끼워주진 않는다 (왕년 씨름선수였던 김만기 교수가 보이기는 하고 교수임이 대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나 씨름선수로서 정체성이 더 강한 경우다).
여하튼... 진중권씨가 어떤 강연에서 자신을 대중의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갖춘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평가해서, 그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다 여기에 이르렀다. 진 선생이 얘기한 내용을 그래돌 옮기면...

나 같은 경우는 좀 다르다. 나는 본래 의미의 지식인보다는 일종의 아이돌로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왔다. 옛날 지식인처럼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는 사람’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귀염둥이’다(웃음). 자기 대신 게임을 해서 그를 위해 싸우는 ‘캐릭터’가 된 거다. 내가 ‘진화한 먹물’인 셈이다. 독백형·지사형·선지자형의 전통 먹물은 씨도 안 먹히고, 지금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보면 철저하게 대화 구조로 풀어낸다. 저도 별명이 '횽아'다. 대중이 "중권 횽아를 괴롭히지 마라" 해버린다(웃음).

그 밖에 이 기사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그럴듯하다. '그럴듯하다'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붕붕 뜨는 얘기들이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의외로 쉽다. 그리고 덜 위험하다. 대개 현재 발언이 미래에 평가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현재적 의미가 높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자극을 주는, 혹은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그런 내용이 있는 더러 있다.

ps) 진선생의 얘긴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에 대한 기사, 발언을 읽거나, 접해 들은 뒤에 종종 찜찜함 기분을 갖곤 하는데, 불쑥 불쑥 던지는 큰 얘기들 사이에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 특히 그런 것 같다. 그런 논리적 일관성 부족을 현란한 언사로 덮는 건 아닌지...

귀속(歸屬)지위

며칠 전 집 근처 서점에서 겪은 일. 책을 주문하면서 내 주소, 이름 따위를 알려줘야 했다. 이름을 보던 주인장, 어디 정씨냐고 묻는다. "나주 정씬데요"라는 내 대답에, 그 양반 왈 "예, 저도 정씨라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집에 돌아온 후 그 상황을 '복기'(復棋/復碁?)해 볼수록 뭔가 찜찜했는데 결국 그 원인을 발견했다. 그 양반이 내 본관(本貫)을 물어봤으니 나도 물어봐 주는 게 예의바른 행동이라고 기대되진 않았을지...

그런데 어쩌나... 난 그 양반이 같은 본, 심지어 8촌 아저씨 뻘이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반가웠을 것 같지 않고, 그런 정보 자체가 전혀 궁금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와 연결되는 몇 년 전 에피소드 하나...

한국에서 독일 기업을 방문한 일행 (세 명)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호텔에서 처음 대면한 이후, 그 양반들이 이것 저것 묻기 시작. 독일 땅에서 유학생을 한 명 만났는데 그 사람을 과연 어떤 카데고리에 집어넣어야 할 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들이 '독일 유학생'이란 카데고리는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테니... 변죽을 울리는 Q/A 시간이 지나고, 알고 싶어서 입 안이 간질간질 하던 질문을 던진다.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내 답을 들은 그들의 표정에서 난 심지어 '회심의 미소' 비슷한 것을 읽었다. 이제서야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겠다는 안도하는 분위기... 재미있게도 일행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그 정보가 내게 좀 더 특별한 의미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보인 반응은 며칠 전 서점에서와 비슷했다. '아 그러세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오히려 반대 입장에 있었던 기억도 있다. 디플롬 과정에서 이행해야 할 '실습'(Praktikum)을 위해 '참여연대'에 '다니던' 시절. 오며 가며 상근 간사들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에 대해 어느 누군가가 '저 분도 독일에서 공부하셨는데'라고 하는 것.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독일 출신'에게 가서 '아, 독일에서 공부하셨어요. 저는 지금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 양반 반응이 참 서늘했는데...한 마디로 '그런 것 좀 그만 따지죠'. '어디 참여연대까지 와서 연고를 좇느냐'는 그런 반응으로 이해했다. 그 상황에선 '그 사람 참 까칠하네. 뭘 저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그런 것'을 덜 따지게 된다. 여기서 '그런 것'을 사회학 개념으로는 '귀속지위'라고 통칭할 수 있겠다.

(...) 사회학적 성찰은... to be continued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예능사회학: "산업역군 아이돌의 시대"

'아이돌','아이돌 그룹' 같은 표현이 언제부터 '어린' 스타들과 연결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영어 원뜻만 따지자면 - idol, 우상 -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늙은 우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허나... 이론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 한국에서 '아이돌'은 '어린' 혹은 '젊은' 층에게만 부여되는 호칭이다: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20대 후반만 되어도 더 이상 '아이돌' (혹은 '요정') 세대가 아니라는 것이 한 연예인/예능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3,40대 연예인들은 그들도 '예능인'이면서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을 방송에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일 정도로... (심지어 자신이 '아이돌'이면서 다른 '아이돌'을 좋아함을 감추지 않는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돌' 소비 메카니즘이 많아 달라졌다. 아이돌은 아이돌이면서도 - '전형적인' 혹은 '고전적인' - 아이돌이지 않기를 기대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듯). 어쨌든... 한국의 '예능인들'은 '아이돌'과 '아이돌'이 아닌 이들도 양분된다. 다른 언어권에서도 '아이돌'이 '어린 스타'로 이해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국에서 '아이돌'에 대한 이런 이해는 어쩌면 우리말 "아이'들'"과 발음상 가깝기 때문은 아닐지 억측을 제시해본다 ('아이돌'의 의미론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내 느낌으론 - '느낌'이다 - '스타' 혹은 '아이돌' - 그러고 보니 '스타 -> 아이돌'이 된 것일까? - 의 연소화는 세계적 추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아이돌 소비 계층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과 연결시켜서 설명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요즘 '아디돌'은 '기획사'가 만들어낸 '상품'이고 '행사'를 '뛰며' '회사''사장님'에게 충성해야 하는 존재임을 숨기지 않는다. 한 마디로 뻔뻔해진 것... 지나치게 돈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자본주의 정신'이 한반도 남부에 만개한 탓인지 '돈 밝히는 것'을 이젠 '우스개'의 소재로 삼는다 (cf. '라디오스타'). '라디오스타'에선 방송이 몇 개 줄었다, 출연료, 기획사를 찾고 있는 중이라던지... 이런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얘기들이 대화 내용을 지배하기까지 한다.
예능 담론의 변화는 다른 방향에서도 추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칭의 변화... 오빠, 누나, 동생... 이런 호칭을 '출연자'들끼리 거침없이 쓴다. 음. 이 역시 예전에 그러지 않았다. 작가 혹은 pd의 등장.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방송의 일부가 된다. 혹은 시청자의 반응이 다음 회 방송에 소재로 등장한다던지... 한 마디로 방송의 경계가 무뎌졌다. 그 자체로 - 1회분 방송 - 독립적, 완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 던졌다.

이런 한국사회 연예계/예능 담론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산업역군이 된 아이돌은... 어쩌면 이른 바 'IMF 사태' 이후 한국 자본주가 더 뻔뻔해진 탓은 아닐런지... '자본주의 정신'을 덮어주던 '정'같은 정서가 사라진 것.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심화와 예능인 담론의 '산업화'는 궤를 같이하는 현상은 아닐지... 방송과 비방송 혹은 방송의 세계(공적 영역)와 방송 바깥의 세계(사적 세계) 구분이 흐려진 것은 변화된 매체 환경 탓일 수 있다. 방송이 독점하던 영역이 좁아진 것. 쉽게 채널을 돌리고, 심지어 TV 매체 자체에 대한 인내심, 충성도가 높지 않은 시청자, 소비자들에게 자세를 낮추고, 목에 힘을 빼고 접근하는 것.

'동아닷컴' 기사를 읽은 후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78년생' - 이 경우 나이가 왜 중요한 정보인 것처럼 필자 소개에 등장하는지 묻고 싶지만 - '경영컨설턴트' 박지하씨.

"지금의 유명한 '사장님'들의 현역시절, 즉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 등이 현역에서 활동하던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데뷔할 때는 그렇게 어리지도 않았다. 물론 가수 뒤에 매니저가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원하는 사람의 이미지였지 지금처럼 '만드는' 사람들로 비춰지지는 않았다.

대중가요계는 남들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 직업이 '딴따라'라고 불리우며 괄시를 받던 시절을 지나오면서 일종의 '대중예술'이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연예인이 선호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뭔가 기존의 예술 분야의 공통점을 가지고 싶어했다. 싱어송라이터들이 가지는 뭔가 우월한 이미지는 여전히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예술의 전당'의 무대에 서고 싶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래서 TV에 나와서도 '사장님' '회사' '행사' 같은 이야기는 가능한 안 하려고 노력했다. 돈 이야기가 전면에 나오는 순간 이미지가 깨지니까. 비록 예술가 이미지를 따라가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 댄스그룹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적 이미지를 차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최소한 그에 반하지는 않는 것이 일종의 컨센서스였달까.

그런데 지금은 좀 각도가 달라졌다. '아이돌'이라는 기획사가 처음부터 키워낸 집단이 인기몰이를 하면서부터 '산업적 근면함'이 각광받는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했는가, 연습생간의 끊임없는 경쟁구도를 어떻게 이겨냈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춤 연습을 했는가가 테마가 된다. (...)

이제 스타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천재예술가를 지향하기보다 건실한 산업역군을 지향한다. 19세기에 시를 쓰기 위해서는 천재적 시인과 종이와 펜으로 충분했다면, 이제 인터넷으로 뮤직비디오 한 편을 보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기반구조가 필요한 것이다."


ps) '예능사회학'은 어쩌면 '우주사회학'과 더불어 이 분야 선구자로 나설 수도 있는^^ '소장 사회학자'의 블로그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胡蝶夢

낮잠을 자면서 꾼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었다... 莊子에 나오는 얘기다.
긴 시간을 흘려 보내고 이전의 그 공간으로 돌아 왔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또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변한 척 하는 것 같기도 한 - 나만 빼고서... cf. 영화 '트로만쇼' - 그래서 흘려 보낸 그 시간이 긴 꿈 같기도 한... 일종의 공간, 시간의 분리와 재결합이 일어나는 와중에 장자의 이 얘기가 생각났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스스로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다. 이러한 것을 물화(物化)라 부른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莊子(內篇)第2篇 齊物論[26])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2009 노벨 경제학상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평화상 수상자 정도가 내 평소 관심 범위 안에 있을까 그것 외엔 대부분 내 지적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회학과 사회과학으로 묶일 수 있어서 좀 가까울 법도 한 경제학상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진 않아서 대개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리곤 했다. 노벨경제학상은 원이름이 '알프레드 노벨 기념 스웨덴 은행 경제학상'(The Bank of Sweden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로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제정했다. 노벨의 유언에 의해 시작된 상이 아니라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지만 경제학도들이라면 자부심을 가질만 하겠다. 노벨사회학상,노벨정치학상은 없지 않은가? 어쨌든... 대학 시절에 '정치경제학' '경제학사' 쪽은 나름 들여다 보긴 했고, 'IMF 사태' 이후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을 심각하게 가져 보기도 했지만 노벨경제학 수상자들의 업적을 공감하며 이해할 정도로 주류경제학을 섭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올 해 수장자 '오스트롬' '윌리암슨', 이 양반들 이름은 왠지 친근한 것이다. 혹시 그 '오스트롬', 그 '윌리암슨'? 기대하며 내 문헌목록을 살펴 보았더니 동일인이었다. 그러면서 스며든 반가운(?) 마음의 생성 원인은?
내가 읽거나, 적어도 훓어 보긴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씀 ㅎㅎ - 이들의 논문은...

Ostrom, Elinor/ James Walker/ Roy Gardner (1992), Covenants With and Without a Sword: Self-Governance is Possible, in: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6 (2): 404-417.
Williamson, Oliver. E. (1981), The Economics of Organization: The Transaction Cost Approach. I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7: 548-577.

돌이켜 보면 지난 해 수상자 폴 크루그먼도 내겐 낯선 인물은 아니다. 90년대 말 한국 금융위기에 대한 소논문을 쓸 때 그의 견해를 참고한 적이 있고, Internatioanl Herald Tribune에 실린 칼럼도 가끔씩 읽었으니까. 하지만 크루그먼에 비해 오스트롬, 윌리암슨은 경제학자란 인상이 덜하다. 정치학, 사회학 저널에 논문을 싣기도 하지 않았나. 최근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노벨경제학상 선정의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갖지만 내 지식으로 그 이상 판단하기는 힘들다. 아래는 이번 수상자에 대한 한겨레 기사.

"미국의 여성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76·미국 인디애나주립대·왼쪽 사진) 교수와 신제도주의 경제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올리버 윌리엄슨(77·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오른쪽) 명예교수가 2009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12일(현지시각) “경제적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에 관한 연구의 공로를 인정해 이들을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오스트롬은 올해로 40년째를 맞는 노벨 경제학상의 첫 여성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오스트롬과 윌리엄슨이 공공경제학의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동수상은 시장의 불완전성과 공공성 문제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주목을 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스트롬은 개인의 사익 추구 행위 때문에 제대로 관리되기 힘든 목초지·산림·어장 등 공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공유 자원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을 하거나 시장을 통해 민영화해야 제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기존의 학계 정설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롬은 공동체 중심의 자치제도를 통한 협력체계가 공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역사적 실증과 게임이론 모델 등을 활용해 보여줌으로써 고전경제학의 오래된 믿음인 ‘공유지의 비극’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이론은 최근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로도 활용되고 있다. 1990년 나온 그의 대표적 저서 <거버닝 더 코먼스>(Governing the commons)가 <집합행동과 자치제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다.

윌리엄슨은 로널드 코스가 처음 제시한 ‘거래비용 이론’을 집대성한 학자로, 시장의 불완전성에 따른 ‘거래비용’ 때문에 기업이 존재하고 그 규모를 키워나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시장이 항상 효율적이라면 기업이 몸집을 늘릴 유인이 없지만, 시장의 불완전성에 따른 거래비용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줄이기 위해 기업은 거래를 내부화함으로써 조직을 점차 키워나간다는 것이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디지털 遊牧民/ 流浪人

휴대용 컴퓨터에 인터넷이 연결되니 독일에서 '작업하던' 것과 큰 차이 없는 환경이 갖추어진다. 노트북 컴을 들고다니는 것조차 번거롭다면 파일을 웹하드에 저장하고 '넷' 상에서 구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이용하면된다. 어떻게든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공간, 영토, 지역 경계를 쉬이 넘나드는 현대인은 또 다시 '유목민'이 되었(단)다. 첨단 IT기기를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이들을 '디지탈 유목민'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만국의 디지털 유목민들이여, 접속하라!

"1만년의 정착시대를 끝내고 새 유목시대를 열고 있는 종족이 바로 21세기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다. ‘디지털 노마드’가 보통명사처럼 쓰인 지 오래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정보기술(IT) 장비를 갖추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라고 예측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한술 더 떠 “우리는 다시 유목민이 됐다”고 선언했다. ‘디지털’과 ‘유목’은 피할 수 없는 새 인류의 운명이란 지적이다." (인용하는 문장은 경향신문 2004년도 기사에서 가져온 것. 좀 '된' 얘기를 퍼오자니 자못 멋쩍다. 어쨌든 최근 스스로 경험하면서 새삼 확인한 바니까... )

그러고 보니 '공간''영토'가 의미 없진 않다. 땅을 딛고 있는 공간이 아닌 '싸이버/ 가상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다를 뿐.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지만 좀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디지털 유목민'의 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남쪽 세계에 속한 인구는 ‘디지털 노마드’로 변신을 꾀하기는커녕 굶지 않기 위해 흙먼지길을 전전해야 하는 영구적인 유랑인으로 남게 될 지 모른다.
유랑의 삶은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계시민이 아닌 단순 무국적자의 혼란을 이미 한국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러기아빠를 흔하게 구경할 수 있으며, 가족 구성원이 2개국 이상에 흩어져 사는 ‘다국적 가족’이 드물지 않다. 교육시장의 저생산성 때문에 일어나는 ‘교육 노마드’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학교공동체 관념을 흔들고 있다
."

어째 이 몸은 유목민보다는 유랑인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확신'이 스물스물...^^

ps) 이 블로그의 새 이름 'from the(brave) new world'는 새롭게 정착한 이 영토를 가리키려는 의도로 사용했으나, 이주 경험을 통해서 디지털 유랑인/유목민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었다는 의미라고 '강변'해도 좋을 듯하다.ㅎㅎ

값싼 도시 풍경, 얕은 지적 풍경

늘 가지고 있었으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다음 더 굳어진 생각으로...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거슬리는 - 게 간판, 전봇대, 그리고 포괄적인 의미로 '色感, 美感'이다. 색과 '디자인'이 너무 화려해서 - 적어도 내 눈에는 - 촌스럽게 보이는 것들 투성이다. 우리가 워낙 화려한 색, 문양을 좋아하긴 했다. 한복, 단청, 조각보 등을 보더라도... 허나 이전엔 몇 가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자연색을 썼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간판, 생활용품, TV 세트 등 시선이 가는 곳마다 너무나 현란해서 '무척' 부담스럽다. 過猶不及... 한국미를 '절제의 미', '여백의 미'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건 한국'전통미'로 '철저하게' 한정해야 할 듯. 근대한국미는 '절제하지 못하는... 여백을 모르는 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이런 좀 '값싸 보이는' ('저렴한') 풍경은 다른 맥락에서도 관찰되는데 - 그런 경우에 '천박'(淺薄)이란 표현이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 특히 2mb 정부가 들어선 다음 더 자주 관찰되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꼽을 수 있겠다 (구체적 사례는 무궁무진하나 가장 따끈따근한 것으로 '나름' 진보 경제학자 정교수의 '소액용돈 천만원' 발언을 들 수 있겠다). 음... 어쩌면 내가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 혹은 '귀화인'의 '까칠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좀 야박한 감상을 내 놓는 지도 모르겠지만... 벗뜨... 역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쭉 좋아질 거라고 굳게 믿는다.

p.s.) 현정부가 '천박'이라면 노무현 정부엔 어떤 표현이 어울릴까? '촌스럽다'가 적절할 것 같다. '잊지말라 황우석'(이형기 지음, 2007) 이란 그 스스로 촌스러운^^ 제목을 단 책에서 이 표현이 되풀이되어서 등장한다. 내 판단으로 노무현 정부가 지향했던 바는 큰 줄기에선 옳았지만 유난히 과기정책에 대해선 촌스러움, 어쩌면 천박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과기정책 말고 FTA같은 것도 들 수 있겠다). '과학기술중심사회구축'이라는 '구호'도 그렇고... 황우석에 대해서 '마술'운운한 것은 그 절정이고. 아, '세계 최초 인간배아줄기세포 획득 기념 우표' 찍어낸 것, 황에게 경호원 붙여준 일 등은 세금으로 만들어 낸 코미디고. 김대중 정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제2의 건국 운동' 같은 유사 '새마을 운동'이 대표적. 황우석에 대해선 우리 DJ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제소에게 '진이'란 이름을 '하사'하신 것. '과학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식인, 지성인, 지도자, 한국에선 찾기 힘들다. '천박'을 '컨셒'으로 설정하신 우리 2mb정부야 말할 것도 없고. 척박/세련 얘기를 꺼낸 김에 역대 정부 세련도를 따져보자면 아무래도 DJ - 노무현 - 03 순인 것 같다. 하위 리그인 전두환 - 노태우 - 2mb 중에선 그나마 노태우가 좀 낫고 2mb 와 전두환이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시대 차이를 어느 정도는 고려해서...). 박정희야 워낙 독특한 시대였고, 그 이전은 비교하기 힘든 시대고...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is social media a fad?



독일유학을 가려고 마음 먹었던 시절에 유행했던'정보사회학'. 그런 논의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다. 다만 좀 에누리해서 들을 필요는 있을 듯. 여하튼 이는 여전히 펄펄 살아있는 주제인데 한국의 '정보사회학'은 아직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윗 주장('social media is not a fad')의 근거를 조금은 무너뜨리는 주장. Web 2.0 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는 Beitrag(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기고? ) 에 대한 평가 없이는 그 지적 능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Youtube 같은 경우 '방문자 수' 정보, Wikipedia의 경우 '운영위원회' 비슷한 게 있지 않나?

[이 두 Youtube Beitraege 존재에 대한 정보는 루만 메일링리스트에서 얻음]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의외성, 낯설게 하기...

사진을 볼 때 (혹은 읽을 때) 얻는 효과를 '의외성'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일상 속에서는 형형색색 움직임으로 인식되던 대상이나 현상을 정지된 상태, 특정 부분이 확대된 상태, 혹은 '흑백'으로 접할 때 느껴지는 낯섬, 혹은 참신함.
그림 중에도 그런 류에 속하는 것들이 있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림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대표적으로 마그리트의 그림. 하나만 소개하면...[The Listening Room, 1958.]



사과 모습이야 익숙한 그대로지만 그 사과가 방에 꽉 찬 모습이라... 그림을 보는 이로서는 혼돈스럽기도 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낯설게 보이는지 생각해 보게 되고... 이런 그림을 통해 도대체 무슨 '철학'을 전달하려 했는지 캐려는 '오버'는 좀 참아줬으면 하지만 (화가 스스로 자기 그림에 대한 지나친 해석을 경계했다), 마그리트 그림은 이런 효과를 주는 데에서는 탁월하다. 새로운 '무엇'을 주는 게 아니라 일상을 재발견하게 하는... (푸코가 가져다 써서 유명해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도...) . [브뤼셀에 '마그리뜨 미술관'이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몇 달 전에 읽었는데, 기회를 만들어 꼭 가고 싶다는...]

여행에서도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낯선 도시에 가서 이것 저것 새로운 정보, 지식, 경험을 얻어오기도 하지만 여행이 가져다 주는 효과의 핵심엔 '자기 발견'이 있다. 일상 속에서 감춰져 있던 내면의 어떤 모습이 낯선 환경에서 불쑥 튀어 나오는 그런 효과... 많은 노력, 시간, 물질을 들여서 떠난 여행에서 결국 '나'를 발견하고 오는 것... '자기객관화'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고... 최초의 '자아'는 스스로를 타자화 하는 데서 발견되고 (J.H. Mead), 그런 인식을 확장시켜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용력을 갖춘 사람들을 대개 '어른'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직 '아이'!). 낯선 상황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성찰의 순간을 즐기는 사람,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기꺼이 대면하려는 사람, 그게 '청년'의 모습이다.

'표절' 사회학

'표절'(剽竊 아이쿠 어려운 한자다)은 여러 영역에서 발견된다. 최근 'g드래곤'인가 하는 그룹 노래 표절 여부로 시끄러웠고, 학계 출신 공직자들에 대한 '검증' 과정에서 논문 중복게재와 더불어 '자기표절' 이 거의 짝으로 등장한다. 미술에서도 표절은 문제가 되지만, 유독 표절에 관대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성악'인다. 예를 들어... 파바로티와 똑같이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 당장 대가 반열에 오른다^^). 어쨌든.. 이제 그 표절 시비 대열에 '성직자'들도 끼워줘야 할 모양이다. 오늘 우연히 '설교 표절'에 대한 기사를 접한 것 (뉴스앤조이 기사).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목사들의 엉터리 학위 취득 과정 등 그 동안 더 센 이야기들에 단련이 됐으니까...]
제목을 '표절 사회학'이라고 붙인 건 표절 현상의 증가 (혹은 그 관찰의 증가)는 분명히 사회학적으로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형적인 근대화 결과일 수도... 특히, 근대성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개인주의'와의 연관성은 쉽게 떠올릴 수 있고. "Fälschungen. Zu Autorschaft und Beweis in Wissenschaften und Kunst" (Suhrkamp 2006)이란 책을 사 두고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아마 표절의 사회학 혹은 사회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이역(異域)만리 어느 지하 창고 속에서 광명을 다시 찾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ㅎㅎ

2009년 10월 6일 화요일

긍정, 낙관의 힘: 피그말리온 효과

아는 표현을 정확하게 쓰기, 모르는 표현은 그 어원을 찾기. 이는 취미라고 불러도 좋을 오랜 내 습관 중 하나다. 인터넷 덕에 어원찾기 같은 일은 정말 '식은 죽먹기'가 됐다. 오늘은 '피그말리온 효과'. 두 가지 근원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우선 심리학자 로젠탈(T.L.Rosenthal)이 1964년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했고, 그 표현은 다시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한 고대 그리이스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 얘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를 지켜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출처 1, 출처 2). 이 피그말리온 효과는 사실 주철환씨 인터뷰에 등장한 표현이라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겨레 인터뷰 기사). 참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내가 지향하는 '청년 같은 삶'의 전형 아닌가! [이 양반은 한 술 더 떠서 '童心'까지 내려가려고 하네...]

인터뷰 일부를 옮겨 놓는다.

-항상 주변에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어른들과 가깝게 지내기 싫어하는데.
"지금은 제 친구보다 친구의 아들딸들과 더 친하게 지냅니다. 친구들 만나는 것보다 젊은애들을 만나는 게 더 즐겁고 신나거든요. 많은 분들이 제게 젊은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비결을 묻는데 방법은 단순해요. 일단 돈을 써야 해요. 만나서 밥도 사주고 공연도 보여주면서 장터를 마련해줘야 그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죠. 또 포용력과 전문성도 필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값비싼 식사나 술을 사줘도 만나서 재미없거나 잔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르거나 다소 버릇없이 굴어도 '그럴 수 있다'라고 포용해야 하고, 그들에게 들려줄 전문 분야의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55세의 중년남성에겐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참 귀엽습니다.
"죄송하다뇨, '귀엽다'는 게 제겐 찬사예요. 전 귀여움으로 승부하거든요.(웃음) 제가 귀엽다면 그 비결은 동심을 유지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은 남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않고 나이로 누르려거나 지위로 무시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귀여움'으로 무장하고 다가서면 다들 마음이 편해지고 경계심을 풉니다. 어린아이만 귀여우라는 법이 있나요. 전 앞으로 60, 70이 되어도 귀여운 할아버지로 나이들고 싶어요. 다행히 송해, 이어령 선생 등 귀여운 어르신들이 주변에 많아 벤치마킹하려고 합니다. "

短見

인터넷과 TV가 오랫 동안 공존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종이신문 역시 인터넷의 위력에 휘청거리고는 있지만 쉽사리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신문에 났는데...'라고만 해도 발언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대에 비하면 '종이'신문의 위상 추락은 극적이까지 하지만...). 어쨌든... 종이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신문이 아니었더라면 보지 않았을 기사까지도 접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고, 알고 싶은 지가 분명한 세대에게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자기 관심 이외 영역을 접할 기회가 좁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주위에 '조선일보' ('디지탈 조선' 혹은 '조선닷컴'이 아니라) 밖에 없는 탓에 꼼꼼하게 보게 된다. 그러다가 오늘 접한 기사... 특파원 칼럼인데 제목이 '유럽좌파' (인터넷으론 여기에서).
앞 부분을 인용한다.

"'20 대 7'.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중 우파 정권과 좌파 정권 비율이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사회민주당(SPD)이 전대미문의 참패를 당하자, 유럽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좌파의 몰락'이 다시 핫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4일 총선에서 그리스는 사회당으로 다시 시계추가 움직였지만 유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좌파 후퇴' 쪽이다.

독일 사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2차 대전 이후 최저의 득표율(23%)을 기록하며, 무려 76석의 의석을 잃었다. 개표 이후 '표심'에 대한 분석결과는 사민당 지도부뿐 아니라 유럽 정치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사회주의 지지층인 청년, 블루칼라, 구(舊)동독지역 유권자들이 철저히 사민당을 외면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양반 무식해도 이렇게 무식할 수가... (이 게시물 제목은 短見이라고 좀 완곡하게 붙였지만 사실 이건 無識에 가깝다). SPD가 참패한 거야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게 독일 좌파의 몰락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오버'에 '무식'이 겹친 꼴이다.

한겨레 기사를 인용한다.
"오스카어 라퐁텐 의장이 이끄는 좌파당은 이번 총선에서 11.9%를 득표해 76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2005년 총선 당시 8.7%(53석)에 견주면 괄목할 성장이다. 2002년 총선에서 득표율 5%에도 못 미쳤던 좌파당은 이날 “우리가 장벽을 뛰어넘고 두자릿수 득표를 기록해 정당으로서 위상을 확립했다”고 환호했다. 좌파당은 기반인 동독 지역뿐 아니라 사민당의 ‘변절’에 실망한 전통 좌파 지지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겨레 기사는 SPD를 '중도좌파'으로 지칭하며 '좌파당'과 구분하면서 '무식'을 온천하에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자칭 '대한민국 일등신문', 부끄럽지 않은가? 적어도 아래처럼 얘기하는 연합뉴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럽 정치 지형에서 우파의 득세와 좌파의 쇠퇴가 가속화하고 있다. (...) '사민당의 몰락=사민주의의 몰락'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현대적 사민주의'라는 구호아래 섣부르게 중도로 나갔다가 정체성 위기로 역풍을 맞고 있는 것일 뿐 사민주의의 이념은 오히려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ps) 진보신당 유럽당원협의회에 실린 독일총선 '관전' 지침 (여기)도 참조.

뉴스: 인터넷과 텔레비전

모처럼 (^^) 9뉴스를 TV로 보면서 든 생각. 오랫 동안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TV 뉴스가 너무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30여분 동안에 전달되는 정보량이 터무니 없이 적다. 인터넷에선 우선 흥미로울만한 뉴스만 골라보게 되고 열었는데 기대만큼 흥미롭지 않다면 '클릭'해서 다음 뉴스로 넘어갈 수 있지만 TV 앞에선 정말이지 그 '상자' 앞에서 '바보'처럼 꼼짝없이 앉아서 방송사가 마련해 놓은 뉴스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하는데, 지루한 장면에선 '->' 버튼을 이용해서 빨리 넘겨버리고 싶다는 충동 말이다. 인터넷이 대신할 수 없는 TV 고유 기능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일지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자화상 (自畵像) [서정주, 1941]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ps) 이 작품은 시인이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출처는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역사가 되다 ... (2)

"독일에 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란 질문이 서서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면, 이젠 다른 질문에 익숙해질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언제 돌아가세요?" 하지만, 우리 영사미 옹께서 이미 오래 전에 "닭목아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복음을 설파하셨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금언도 전해져 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제 새벽을 깨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I will awaken the dawn! (Ps.57:8)"

2008년 2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이 블로그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글귀.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2009년 9월 25일 금요일

민족중심주의를 고백함

"nation"에 민족, 국가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ethnicity"도 민족, 인종, 종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nation과 구별하고, 또 인종엔 race란 단어가 있으니까, '종족'이 가장 적절한 번역어일 것 같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 이 언저리에 있는 말들은 하나 같이 쓰임새가 현란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더 각광받는 단어들 아니겠는가. 물론 지역적으로 한반도, 혹은 한반도의 남반부에서는 굳이 민족, 국가(국민), 인종, 종족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써야 필요성이 크지 않았고 그래서 심지어 "우리 나라" "우리 말글" 등등 "우리"라고 표현해도 통할 정도 아니던가. 그런 탓에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그런 '편견'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 사례를 하나 '고백'하면..
독일 유학 초기 "위험사회학" 수업을 담당하던 선생님 - 그 당시 '교수'가 아니었단 얘기다 ㅎㅎ- 과 개인 면담 시간에서 그 '업계'에서 나름 잘 나가던 S. Jasanoff 교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때 일이다. J 교수의 '얼굴'과 '옷차림'을 사진으로 봐서 알고 있던 나는 그 "외적 조건"을 기준삼아 "그 분이 '인도인'이죠?"라고 물어봤다. 선생님 왈, "아니. 영국인일 거야..." 영국에서 공부했던 이력도 알고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마음으로' 수용되진 않았다. '한 번 해병대면 영원한 해병대'도 아니고... '출신성분'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민족''인종'적 정체성을 판단하게 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특히 '한국인'에겐 익숙한 정체성 배치 방식이었던 것이다 (잠깐! 여기에서 '한국인'이란? ㅎㅎ).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아니 심지어 미국에서 태어난 2세라고 할 지라도 외양이 한국사람같고, 한국말 '비슷하게' 하면 한국인 취급을 해준다. 유승준 덕에 멀쩡해 보이는 한국인도 '미국인' 취급을 해 줄 수 있다는 대오각성의 쓰나미가 밀려 들기도 했지만... '출신성분'에 기초한 정체성 배치 기제는 여간해선 바뀌기 힘들 것 같다. 박노자씨가 장사하던 어떤 아주머니 (할머니?)와 얘기하던 중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인정해 주지 않다가 결국 '귀화 한국인'으로 인정을 받았다나 어쨌다나...
그리고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있다. 저 북쪽 사람들이 아닌 재일 동포 중에... 분단되지 않은 '조선'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물론 그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공적 도움은 남, 북 그 어디에서도 기대하기 힘들다.
여하튼, nationhood, ethnicity는 앞으로 지구 어디에서나 큰 사회적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 "우리"에겐 - 아, 여기에선 '우리'는? 난 도대체 누구를 '우리'로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어렵다... - 너무도 익숙한 민족중심주의적 생각 틀은 한 번에 모두 버리기는 좀 그렇고 - 여전히 '민족국가건설' 같은 '근대적' 과제가 남아있으니까 - 잘 고쳐서 써야 할 것이다. '우리'라는 '정체성'은 별로 나은 대안같진 않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우리말글'로 고쳐 부르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듣기에 나쁘진 않으나 그 '우리'의 해석 경계가 너무 열려 있어서 오히려 갑갑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ps) "the term ethnicity derives etymologically and historically from the ancience Greek ethno, meaning 'nation'" 흠. 어원학적으로 따져선 별 소득이 없다. 의미론으로 접근해야... 이 "ethno"는 "ethnomethodology"의 그 'ethno'이기도 하잖은가...

2009년 9월 24일 목요일

중심/ 주변

Zentrum/ Peripherie 라는 구분은 복잡성을 줄이는데 여러 모로 유용하고 실제로 알게 모르게 우리가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 구분은 우선 종속이론에서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 운운할 때 연상되는 그런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애해야 한다. 읽어야 할 논문이 너무 많다면 그 중에서 인용되는 빈도가 높은 논문을 읽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자주 인용되는 논문은 '명성'이라는 '장'에서 중심부에 위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중심/주변 구분은 대개 신분 질서 속에서 이해되어서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결정은 대개 귀족등 상층부에서 일어난다. 역사학에서, 역사 기술에서 '큰' 사건, 인물 등 중심부를 중심에 관심을 기울였던 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론 그런 '큰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를 강조하는 흐름이 없진 않다. "장기 지속"을 얘기하는 아날학파, 푸코, 문화사, 일상사 등. 그 동안 역사기술에서 배제되었던 이름없는 이들, 여성, '써발턴', 피지배자, 식민지 백성 등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제공하는 것, 혹은 복원하는 것, 절실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포스트모던"역사학이라고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허나 이런 노력이 기존 중심/주변의 구분이 갖는 제국주의적, 남성적, 지배적, 서구적 성격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것은 좋으나 그리고 난 이후에 별다른 설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때리고 비판할 '중심'이 건재해야 그것을 해체하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숙주 없는 기생충 같은 그런 신세는 아닌지... 이는 역사의 역설이라고 해도 좋을 듯. 서구 여성들은 어쩌면 60년대 여성운동이 한참 달아오를 때 가장 행복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선 90년대 일까?). 남성중심의 지배적 질서 (학문 포함)를 깨뜨리는 것으로... 민주화,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이고. 이는 "기생"의 운명이다. '주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루만은 한편으로 근대사회는 중심/주변 구분을 부차적인 것으로 자주 얘기한다. 근대 세계사회는 전근대처럼 지역적 차이나 신분 차이가 더 이상 중요한 구분이 아니고, 자족적인 여러 기능체계가 병렬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신분제에서 해방된, 다시 말해 개인화된 '개인'은 사회의 환경에 있다고 보니까. 하지만 근대사회에 대한 루만 이론에서도 중심/주변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데 그건 바로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 얘기하는 그 자리에서다. "Primat"라... 참 애매하고, 비판에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다른 방식의 분화를 인정한다는 것. 사회적 불평등, 남성/여성, 민족적, 인종적 분화 등등. 기능적 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분화 원칙은 기능체계를 가로 질러서 ("quer") 관찰된다는 것. 기능적 분화의 우선성에 대한 도전은 루만 스스로 제기했다. Inklusion/ Exklusion을 "meta code"로 보면서... inclusion/ exclusoin와 세계사회의 중심부/주변부 구분이 결합되면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래도... 어쨌거나 "Primat" de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가 가장 중요/우세하다고 강변하는 주장이 루만 전통 체계이론의 핵심적 주장인데,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서구중심적''남성적' '큰이야기' 등등 전형적인 비판이 제기될 것이고. 어쩌면 그런 학문적 비판, 비난의 대상으로서 현역에 있는 드문 이론이라는 점이 체계이론의 기능은 아닐지... 어제 우연히 Knorr-Cetina와 Luhmann이 별도로 행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루만은 늘 하던 자기 얘기를 반복하고, Knorr-Centina는 인터뷰 1/3 정도는 루만 비판에 할애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체계이론이 사회학에서 중심에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빌레펠트에서나 그렇지... 세계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루만을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보는 이들이 주류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변부에 위치한 체계이론은 '중심'에 더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고,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사람이었네': 체계이론이 '발견'한 인간(!?)

루만은 'Inklusion'이란 개념을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심리체계와 사회체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사용한다. 이때는 T.Parsons와 T.H.Marshall이 사용했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루만이 Inklusion/ Exklusion 개념쌍을 도입하고, 특히 Inklusion이 아닌 Exklusion에 '급'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개 1990년대 이후라고 얘기한다. 1990년대 초에 브라질 빈민가(favela)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 "eher unfreiwillig" Esser 2000:411 - '육체'로만 이해되고, 커뮤니케션의 영역, 즉 사회 바깥으로 배제된 인간들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여러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일화라 없던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 한 사건이 미친 영향이 그 정도 컸을지 의심스럽다). 이런 후기 루만의 '인간 발견'을 Esser(2000)가 매우 냉소적으로 비꼬았는데, "ein unfassbarer theoretischer Schock"이란 표현도 쓰고 학술 논문에서 발견하기 힘든 "unglaublich!"란 단어도 최소한 두 번 등장한다. Nassehi(2000)는 "마침내 인간을 발견했다고?"라고 의문부호를 달면서 '정통' 체계이론 입장에서 Esseer와 같은 맥락에서 Schimank등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정작 후기루만이 '인간'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것 같다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서...). 이전 논문에서는 "후기 루만의 인간 발견 테제"를 스스로 주장하는 것 같았고... (Nassehi/ Nollmann 1997).

- Esser, Hartmut (2000), Inklusion und Exklusion – oder: die unvermutete Entdeckung der leibhaftigen Menschen und der Not in der Welt durch die soziologische Systemtheorie, in: Oskar Niedermayer/ Bettina Westle (eds.), Demokratie und Partizipation.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407 – 146.
- Nassehi, Armin (2000), Endlich die Menschen entdeckt? Über einige Unschärfen im Diskurs um ‚Inklusion und Exklusion’. Vortrag auf dem Workshop „Inklusion und Exklusion“ an der Universität Mannheim am 6. Juli 2000 (pdf)
- Nassehi, Armin/ Nollmann, Gerd (1997) ‘Inklusionen. Organisationssoziologische Ergänzungen der Inklusions-/Exklusionstheorie’, Soziale Systeme 3(2): 393–411.

내 경우 공교롭게도 독일체류를 마무리할 즈음에서야 루만이 그의 이론 여정 끝에서 인간을 발견했음을 발견했다. Inklusion/Exlusion 얘기야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고 심지어 관련 논문을 여러 편 읽기까지 했지만 그 논쟁이 갖는 의미를 그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포함/배제 논쟁을 좇아가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루만은 그 이론 비행 여정에서 1984년 Soziale Systeme에서 가장 높은 고도로 날았고, 그 이후로는 점점 고도를 낮추어 왔다. 그럴수록 수학적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깔끔했던 체계 이론 비행기는 공격받고, 상처를 입어서 결국 착륙할 무렵렝 여기 저기 때운 흔적을 감추지 못한 고물이 되어버렸다. 한 쪽에서 고물비행기를 폐기처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체계이론가들은 그런 고물이라도 잘 고쳐서 쓰면 한참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얘기하고 싶은 욕구


좀 뜬금없을까, 이런 사진을 올리는 '짓'이? 웬 여배우 사진? 자, 그렇담 이제 이 사진을 올리기까지 내 의식의 흐름을 한 번 추적해 보기로 하자.

블로그에 무엇인가를 '올리고' 싶은 욕구, 그건 어쩌면 소통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 우화 속 그 주인공이 가졌을... 작가들은 대개 그런 욕망을 유난히 강하게 느끼는 이들 아니던가... 얘기하고 싶은 욕망... 그 소통에 대한 욕구의 내용은 결국 지금 내가 느끼는 바, 심정, 심리상태를 알리고, '공감시키고' 싶은 마음 아닐까? 그런 욕구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실제로 - 누가 알려주기 않아도 - 여러 방식으로 배출, 분출하고 있을 것이다. '잡담','수다'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표적 기제일 것이고 그럴 대상이 주위에 없을 때 인터넷, 블로그로 향하게 되는 것 아닐까? 사회학에서 쓰는 표현을 좇는다면... 이 경우 '블로그'는 '대화 상대'의 '기능적 등가물'(functional equivalence)이다. 익명의 상대에게 건내는 내 소식(메시지)...
여하튼.. 지금 내 심리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까 고민하던 중, 숙제하는 마음으로 가끔씩 들르는 '이동진의 영화풍경'에서 윗 사진을 발견하고선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을 얻었던 것. 이 사진을 올리면서 난 전도연이란 배우 '개인'에 대한 정보가 아닌 이 '사진'에서 내가 얻었던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 거다. 허나 '그림'이 그런 것처럼 이 '사진'이 주는 정보 역시 '글'과는 다르게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서 과연 내가 느낀 바가 전달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도연... 사실 잘 모른다. 아니, 특별히 자세히 알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배우였다. 물론 '밀양'에서 했던 연기는 어쨌든 높게 평가할만하고, '멋진 하루'에서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그리 깊이 있는 배우라는 생각을 해 보진 않았는데... 이 사진(과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다른 사진)은 매우 좋다. '사진발'로 돌리기 힘든 그 어떤 힘, 깊이가 느껴진다 (장진영도 비슷한 느낌을 전해주는 사진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런 사진발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다른 배우들 사진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느낌이 좋다. 난 단지 그 '느낌'을 전하고 싶은 거고... '해석'은 독자의 몫일 뿐이고... 관찰에 대한 관찰에 대한 관찰...
(사진 출처, 작가는 김현호)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정체성, 체계

교회 규정 검토하는 일을 마무리 하려고 열심히 논의하던 중 발견한 사실. 규정엔 '교인'과 '회원'이라는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이 비슷한 두 표현이 도대체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을까?
우선 '교인'을 다시 세 등급의 '회원'으로 구분하는 맥락에서 두 표현으로 사용된다. 교인을 정회원, 준회원, 아동회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하지만 '교인'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려면 '정교인', '준교인', '아동교인'으로 부르면 되는데, 굳이 왜 '회원'이라는 표현을 도입했을까?
 내 생각에 이는 서로 다른 체계에 준거하고 있는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 같다. 체계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교인'은 Vollinklusion을 전제로 하는 종교 (혹은 기독교) 라는 '기능체계'에 대한 것이고, '회원'은 구성원 포함/배제가 일상사인 '조직체계'에 대한 것이다. 규정 작성자가 이런 체계이론적 구분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상상하긴 힘들지만, 만약 내 견해에 일리가 있다면 이는 체계이론이 도입하고 있는 사회체계의 구분이 - 사회, 조직, 상호작용 - 현장에서 (vor Ort) 일어나는 개별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범주를 제공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체계는 그저 체계이론가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단위"(imagined unity)가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교회'일'을 하면서 '포함/배제' '정체성'등 사회학적 연관성을 떠올리는 이 '직업의식', 캬... 이런게 '사회학'의 매력이자 '사회학(도)/자'의 운명, 뭐 그런 것 아닐까. 문제라면 당사자들 빼곤 그 누구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얘길 주로 한다는...^^ 그 정도?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Bach, Sinfonia No. 2 in C minor (Glenn Gould)



모처럼 좀 쉬어가자는 순서(?!).
'비상시국'에 돌입한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는 음악이 있는데 바로 Glenn Gould가 연주한 Bach Iventions & Sinfonias. 유투브에 여러 곡이 올라왔는데 그 중에서 좀 느린 편인 Sinfonia No. 2를 골랐다. 좀 집중해야 할 때 배경으로 깔아 놓는 음악은 있는 듯 없는 듯 한 게 미덕인데, 그것에 딱 어울리는 앨범. 기름을 쫙 빼고, 별다른 양념도 하지 않은 담백한 '맛'을 전해주지 않는가... '바흐'답게...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Integration/ Inklusion

Lockwood: system integration/ social integration
Luhmann: Integration/ Inklusion (Exklusion)
- Integration: social systems, structural coupling...
- Inklusion: Menschen als Personen in Kommunikationszusammenhänge behandelt, addressiert...(cf. 1984, Verhätnisse zwischen pyschische und soziale Systeme)

Bourdieu(?): Integration = Inklusion
Habermas/ B.Peters: Integration durch Inklusion (참여-숙의 민주주의)
Luhmann/ Bora: Integration durch Inklusion? (eine offene Frage)

청년과 '어른'

'오빠와 아저씨를 구분하는 법'을 듣고서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청년과 어른 구분하기'다. 물론 여기에서 '어른'은 청년기를 지난 어른을 얘기한다. 청년과 어른이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너무 따지지 말자, 피곤하다^^ 그리고 ideal type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어른은 의견 갈등이 있을 때 자신의 생각, 판단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타인이 바꾸길 기대, 요구하는 이들이고, 청년은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 견해를 바꾸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 어른은 대개 청년에 비해 삶에 대한 생각, 태도를 바꾸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 때 치뤄야할 비용이 훨씬 크기 때문에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대신 '청년다움'은 잃게 될 수밖에...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은 - 학문이든 일상사든 - 易地思之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내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 평생 좇아야 할 길이고...

'박재범 논란'에 대한 경쾌한 혹은 좀 모자란 분석

김어준 씨의 '작품' (한계레 기사)

애국주의나 '파시즘'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박재범 발언을 문제 삼은 이들은 여러 부류가 있는데 (세 가지로 구분) "이 셋 중 가장 수가 많았던 건 첫 번째요 가장 먼저, 격하게 반응한 건 두 번째며 가장 본질과 거리가 있었던 건 세 번째였으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가 세 번째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두 번째는 세 번째의 이념을 차용해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세번째가 "아니 대한민국을 비하했다고? 있을 수 없지. 딱 그만큼. 이 순수하게 우파적, 보수적, 국가주의적 관점" 첫 번째는 "소비자로서의 반응. 우리 동네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했다고, 우씨." 두 번째는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수컷 경쟁자로서의 반응. 돈 많이 벌고 인기도 있고 미국 시민권도 있는데다가 군대까지 안 가는 자식이 뭐라고."
그런데 왜 세 번째 이념을 차용할까? 이게 재미있는 분석이고 민족주의에 대한 내 지론과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게 안전하니까.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애국’ 감성은,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공동체적 감수성이다. 그게 다치면 집단 반응하는 것까진 당연한 거다. 문제는 그 정도를, 우리 사회가 자율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 그런데 그런 감성의 존재 자체를 촌스럽고 위험하다 여기는 게, 비장한 책무인 줄 아는 흐름, 있다. 자신의 열패감을 애국주의로 치환하는 치졸한 수작들만큼이나 웬만한 ‘애국’ 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이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이런 '감'도 되지 않는 일을 크게 만드는 주범으로 몰고 가는 '언론'이 문제라는 건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김어준씨는 - 상대적으로 덜 만만한 - "먹물"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용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가르치려 '드는' '지식인''먹물'을 비난하는 대중주의적 정서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자신이 언급하는 그 '흐름'이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지 않는다는걸 모른다면 이건 그의 '지적 태만'이다.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파시즘

황우석 사태나 '디워' 사태 때 '대중독재', '유사파시즘' 같은 얘길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요샌 파시즘이란 표현이 '정권'에게 돌아간다. 이제 좀 균형이 맞게 된 건가? 노무현 때 같았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정도 시위가 일어났다면 또 대중독재 같은 표현이 등장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제 그런 운동은 파심즘적 정권에 대한 정당한 반대로 이해된다. 어쨌든 난 2mb 정부에게 '파시즘'이란 표현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황우석 때 대중들의 '열광'에 '대중독재' 같은 무시무시한 개념을 쓰고 싶지도 않다. 한국 사회,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 좋아지고 있다. 2mb 시대의 역할은 한 박자 쉬면서 우리 자화상을 한 번 그려 보게 하는 것 정도? 이게 우리 자화상이다. 최근 국정지지도가 5할을 넘어가는 그런... 슬픈 우리의 자화상...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체계이론과 STS

루만의 체계이론과 Science & Technlogy Studies 관계에 대해서 이미 적지 않은 논문들이 나와있다. 최근에 '발굴'한 G.Wagner(1998)의 논문을 읽던 중 눈에 띄는, 그러니까 정곡을 찌르는 비교점이 있어서 옮겨 놓는다.

"Soziale Systeme wie die Gesellschaft bestehen nicht aus Dingen, aber sie bauen auf ihnen auf. Der Satz, die Gesellschaft besteht aus Kommunikation, ist also eine extrem verkürzte Schreibweise einer vollständigeren Version...(SS 240). (...) Die STS interessieren sich aber nun gerade für diese Gesamtheit, sie wollen sie keinesfalls aus den Augen verlieren. Alles, was in einer Situation anwesend ist, sollte auch in seinem Anteil daran gewürdigt werden, und sei dieser noch so marginal. Die ommunikation wird nicht für wichtiger erachtet als die Telephone, die sie ermöglichen."(578f)
"Diesem Vollständigkeitsanspruch der STS scheint die kommunikationsfixierte Systemtheorie nicht genügen zu können" (582)

이렇게 루만과 STS를 서로 나란히 진행되어 교집합을 찾기 힘든 두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건 익숙한 설명방식이다. Wagn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만이 확장시킨 '인식','관찰' 개념에서 STS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Folgen wir hier Luhmann, läßt sich eine ganz neue Hierarchie von Fähigkeiten erstellen, die das Soziale unter sich ausmachen: Wer beobachtet, gehört dazu. Mit einem solchermaßen 'flach' ansetzenden Beobachterbegriff läßt sich ganz ausgezeichnet techniksoziologisch arbeiten." (582)

이후 Wagner가 설명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독해력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 왜냐면 그 스스로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Einer fruchtbaren Zusammenarbeit steht also vielleicht doch nicht soviel im Wege." (588)

여하튼 루만은 "die ältere Technikkritik"처럼 "Marginalisierung des Individuums durch die Technik"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 기술결정론에 가까운.. - "Tandem von Technik und Individualisierung, mit dem wir in die Nebel der Zukunft fahren" (1991b: 23) 같은 얘기로 그런 혐의를 피해보려고도 한다. 다른 관심, 즉 출발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애써 화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차이를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지만... 다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악수를 교환하고서 제 갈길을 가면 된다.

- Wagner, Gerald (1998), Niklas Luhmanns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und ihre Bedeutung für die Wissenschafts- und Technikforschung, Journal for History of Law (Rechtshistorisches Journal) 17: 574 – 588.

- Albertsen, N./ Diken, B. (2004), Artworks networks - field, system or mediators? Theory, Culture & Society, 21 (3): 35-58
- Farías, Ignacio (2005), Gebt mir einen Doppeldecker und ich werde die Stadt von dessen Dach aus verwandeln, in: die Stütze: Nr. 10 Oktober 2005: 5 – 8.
- Fuchs, Stephan/Marshall, Douglas A. (1998): Across the Great (and Small) Divides. In: Soziale Systeme 4 (1): 5-30.
- Lorentzen, Kai F. (2002), Luhmann goes Latour - Zur Soziologie hybrider Beziehungen. In: Rammert, Werner/Schulz-Schaeffer, Ingo (Hg.): Können Maschinen handeln? Soziologische Beiträge zum Verhältnis von Mensch und Technik. Frankfurt a.M./New York: Campus, S. 101-118.
- Noe, Egon/ Alrøe, Hugo Fjelsted (2006), Combining Luhmann and Actor-Network Theory to see Farm Enterprises as Self-organizing Systems. In: Cybernetics and Human Knowing, 13 (1): 34-48.
- Teubner, Gunter (2006), Rights of Non-humans? Electronic Agents and Animals as New Actors in Politics and Law, in: Journal of Law and Society 33(4): 497 – 521.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사진

" 그림이 덧셈이라면 사진은 뺄셈이다. 사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의 프레임 안에 잘라 넣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조선희)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정체성 - 가족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위치

질병관리본부가 2006~2008년까지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회복된 자살시도자 1천5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족구성원 또는 연인과 갈등’을 원인으로 든 사례가 46.5%를 차지했다고 한다. 반면 우울증을 포함 각종 정신건강 상태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다는 답은 14.1%에 그쳤다.

이런 통계치를 해석할 때는 항상 삐딱한 시선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선 자살 시도한 후 '실패(?!)해서' 응급로 후송된 경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기사에서도 "자살 사망자의 동기와는 다를 수 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을 덧붙이긴 했다). 또 기사에서도 연구자의 발언으로 소개되었듯이 "이같은 결과는 외국에 비해 우울증 치료를 많이 받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가족 간 갈등의 결과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것이지? 두 가지 카테고리 '가족 간 갈등', '우울증'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서라도 기사가 전하는 내용이 내 평소 관찰 혹은 상식에 비추어 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에 정보가 쉽게 수용된다.
생명윤리학자들도 비슷한 얘길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참여할 때 '정보를 제공하고서 동의'를 받는 절차가 있는데 ('informed consent') '서구적' 전통에서는 대개 '당사자'가 그 결정권자이다 (혹은 다른 의료시술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터이다). 현대 문명은 지역적 편차가 있겠지만 대개 개인, 개인주의, 개별 책임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경우도 그런 이해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개인의 동의 이외에 '가족'의 동의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실정'에 맞는 것이라고 생명윤리학자들은 얘기한다.

주체, 개인의 위치는 여러 좌표에서 설정되는데 - 계급, 체계, 지역, 학교 등등 - 특히 한국인들에 '가족'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맺어진 관계 속에서 갖는 위치가 무척 중요하다는 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얘길 좀 실감나게 전해주는 사회과적 연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다들 큰 얘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탓일까? including me....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정체성... 포섭/배제

나는 누구인가? 동서고금 이런 질문을 무수한 '사람들'이 던졌겠지만,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묻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건 지극히 '근대'스러운(?!) 현상임에 분명하다 ('근대'는 커녕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도 이미 낡아버린 이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에 '근대' 운운하는 '큰 얘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럽긴 하다. 계속 고민할 거리...). '개인'(individuum)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출생했으니까. (우리말 '개인'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번역어). 인간을 '개인''주체'로 보는 것, 개인의 탄생, 주체의 발견, 사실 이게 근대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권'의 탄생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스토리'다. 다른 정체성의 등장은 좀 더 역설적이다. 예를 들어 '시민'(권), 국민, 민족 같은 정체성은 개인, 주체 발견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인 기능적 분화의 뒷 이야기다. 기능체계는 모두 개인들이 각 기능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universalism). 여러 기능 체계마다 다른 '출입증'이 필요한 것. individuum 은 dividuum이 되었다. 정체성 혼란, 위기... 민족, 시민, 국민 등은 그런 '주체 분열'에 대한 긴급처방인 것이다 (루만 표현으로 transitorische Semantik).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구분을 할 수 없으니... '불평등'에 대한 기능적 요구.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혹은 근대적 의미로 재창조해낸다 (물론 체계 내부에서 다른 역할을 갖기에 주어지는 다른 정체성, 그것은 배제하고서라도... cf. Stichweh). 우선 "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어떤 대학 출신인지.. 학벌! 심지어 '지방대', '수도권대'라는 구분. 혹은 지역적 차별: 전라도, 경상도. 혹은 성에 기초한 정체성, 남성, 여성; 호모, 헤테로. 한국인, 외국인; 백인, 흑인, 이도 저도 아닌; 등등. 기능체계와 크게 관련 없는 여러 정체성들이 커뮤니케이션 재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체계이론은 '불평등'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능체계의 재생산은 '불평등'에 상당히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Luhmann, Nassehi). 그래서 조직 차원에서 포섭, 배제 메카니즘을 봐야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Nassehi).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직'을 통해서 다룰 수 있는 불평등, 정체성 제공 논의의 여지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아..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1) '국민''한국인' 혹은 '인종'(피부색깔)으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쉽게 무력화시키는. (2) 한국인들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게 '시민'이 아닌가 싶다. '공화국의 시민'. 국가와 계약을 맺은 그런 존재. 그 계약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시민'이라는 인식, 한국인이 아니라. 탁석산씨가 '시민국가'라는 개념을 제기했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 얘기일 것이다. 아, 생각이 come and go... here and there...

우리 안의 애국주의

풍경 1)

'2PM' 이라는 진영팍이 '키우는' 그룹에 '재범'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이란다. 그가 4년 전에 미국 인터넷 공간에 올린 글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결국 그룹을 탈퇴해서 미국(모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내가 잘 모르는 '청년'의 일이지만... 벌써 논쟁의 구도가 쫘악 들어온다. 한 쪽에서" 2PM 재범 탈퇴, 나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는 진정 '애국주의 아이돌'을 원하는가?"라고 묻고, 다른 한 쪽에선 "애국주의 희생양으로 포장하기에 바쁜 수구좌파"들 운운. 딴지에 실린 위 글은 명문장이다. 이제 쿨한 애국주의 2.0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반공협회, 자유총연맹, 해병대전우회 등과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황빠 중에서도 꽤 세련된 논리를 펼치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무식하게' '민족''국익'반미'만 지겹게 주장하지 않는다. 시민권, 인권, 생명윤리 등을 황우석 지지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nationalism as totalizing/unifying semantics). 이번 '재범 사건'은 한국 민족주의/국가주의/애국주의 논쟁의 전형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듯하다. 2000년 이후 관찰되는... 여기서 내 명제!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련되어질 뿐이다!"

풍경 2)

장선생의 블로그 글 "인터넷 자가진단 서비스..ㅎㅎ: 정당 선택을 도와 드려엽 Wahl-O-Mat"에서 안내된 곳으로 가서 여러 정책에 대한 내 견해가 어던 독일 정당의 주장과 가장 비슷한지 확인해 보았다. 장선생의 자평: "나는 맑스레닌주의 정당과 심지어 (그들의 세부적인 주장과는 무관하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해 마지않는데!...) NPD와 친화성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TT. (예상컨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의외의(?!) 결과에 살짝 놀랄(?!) 듯...ㅋㅋ...결과에 따르면...나에게 ...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TT)"에 자극받아 나도 한 번 해 볼 마음을 먹었다. 결과는... 경악... 충격...

다시 한 번 글을 살펴보니 "피질문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항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 과정을 빼 먹긴 했다. 어쨌든 그런 오차를 감안하고서라도 결과는 엽기적이었다. 8개까지 선택할 수 있는 정당 중 '왼쪽 지향'을 많이 넣긴 했지만...

MLPD 58 von 76 Punkten
DKP 58 von 76 Punkten
DIE LINKE 54 von 76 Punkten
NPD 54 von 76 Punkten
GRÜNE 50 von 76 Punkten
SPD 40 von 76 Punkten
FDP 32 von 76 Punkten
CDU/CSU 30 von 76 Punkten

맑스레닌주의당, 독일공산당이 공동 1위, 좌파당과 독일국민(민족)당이 공동 3위, 녹색당 5위, 사민당 6위... 일부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나름 '자유주의'적 입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한국에선 독특한 역사, 분단상황 때문에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쉽게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은 참 드문 것 같다. 임지현, 권혁범 같은 '분'들의 용기에 아무 힘껏 박수를 쳐드려도 부족함이 없을 듯...

허나 다른 '콘텐츠'가 충분히 확보되고, 확산되기 전에 '민족주의''국가중심성'은 쉽게 내팽개칠 수 없다. 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 되기 쉬우니까. 어쨌든 너무 한 쪽으로 쏠리는 걸 막을 필요는 있겠다 싶은데, 이번 결과를 보니 과연 내가 그런 얘기를 할 '마음''정신'무의식'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반성해 본다.

황우석 사태와 민족주의, 국가 중심성

... 그래서 황우석 사태와 과학 민족주의 관계가 어떠했다는 말씀? "황우석 사태"와 관련해서 지배적인 견해는 박정희에서 한 정점을 이루었던 과학 민족주의가 ('박정희 패러다임') 지속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내 모스크바 테제는... 이 사건은 그보다는 과학 민족주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박정희 시절엔 과학, 기술을 조국근대화에 동원하는 정부 주도 국가 이데올로기였다면, 민족 영웅으로서 황우석의 등장은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연구를 국가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언론, 정치 등이 가져다 쓰고, 그것이 다시 황우석의 발언을 강화시키고.. 등등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만들어 낸 co-product가 되었다 ('과학자','과학'의 민족주의화). 좁은 의미로 황우석 사태, 그러니까 황 지지 대중, 언론의 반응은 '갈등' 혹은 '사건'의 민족주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한편으로는 박정희 민족주의에 비해 지속성도 짧고, 충성도도 그리 높지 않은 반짝 즐기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스포츠민족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엄청난 지지의 '쓰나미'가 보여주듯이 '민족주의화된 사건 이해'의 폭발력, 다시 말해 배제하는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갈등이라고 얘기하기도 뭣한, 너무 일방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황우석 사태는 국가중심성의 약화를 보여주는 사례인가? 더 기능적 분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얘기해 주기에 한국 국가는 여전히 너무도 강하다. 구조적으로, 의미론적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 '국가'나 '정치'에 대한 지나친 기대 그리고 급실망의 반복은 한국이 얼마나 여전히 '정치 중심적 사회'인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타협'이 어렵고, 사생결단의 혈전의 장이 쉽게 되는 건 바로 이 과도한 기대 때문이다.
과학 민족주의(애국주의)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박정희 패러다임' 주장자들이 얘기에는 기실 과학 거버넌스의 다른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다: 성장주의, 과학만능주의, 결과지상주의 등등. 민족주의가 유지되지만 다른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박정희 패러다이 얘기하는 다른 "특성" 역시 사라지진 않았고 다만 그것이 생성되는 맥락, 환경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한국국가의 성격 변화:'발전국가'에서 '과학기술국가'로 (Uttam). 변화를 해 나가면서 국가중심성은 관철되고 있다. 보수, 진보에 큰 차이는 없다. 최근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소장 학자들의 정치지향성을 조사한 결과는 (표본 수 2^^) 이들 '국가중심적 사고' 정도가 예상 이상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안은? 쉽지 않다.
민족주의의 과잉이 염려되어서 탈민족주의를 실천하면 당장 담론의 공간이 비어 버린다. 채워 줄 "이념적 콘텐츠"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이다. '국가 혹은 정치중심주의' 역시,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국가'혹은 '정치'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아애 관심을 거둔다면 정말 한 줌의 세력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게 놔두는 꼬락서니가 된다. 2mb와 그 무리들은 멀쩡한 대낮에 사람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진부하지만 대안은 이미 나와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민주주의, 기능적 분화 같은 틀을 만들어 놓았다면, 이제는 '의미론' '담론' '콘텐츠'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가중심성 같은 지배적 관념을 대체할 "콘덴츠"를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유포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과잉의 뒷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해서 참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그 자체가 미끈미끈 잘 빠져 나가는 뱀장어 같은 개념이라 제자리에서 차근차근 뜯어보기 힘들기도 하다 ('banal nationalim' (Billig)에서 얘기하는 'empty signifier'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게다가 한국 민족주의를 얘기하는 그 맥락은 더 복잡하다. 대개 시중에 유통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견해는 대개 서구의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는 거라 한국 상황에 연결시키려고 하면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同牀異夢의 상황 같은... 그렇다고 루만처럼 민족주의를 철지난 모델로 치부하기엔 조국(^^) 상황은 여전히 너무도 긴박하다. 농담 삼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루만을 써 먹기 위해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민족사적 관점에서 '통일'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當爲'인데, 허나...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볼 것 같으면 억지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통일, 친북, 민족, 반민족 운운하며서 우리 '민족'의 힘을 빼느니 차라리 더 큰 틀에서 모두를 포괄해 버리는 건 어떨가. 임지현, 권혁범 등이 취하는 입장이 이 쪽 아닌가? 서구 학자들은 '민족주의'가 'empty signifier'라고 얘기하지만, 한국에선 그것더 없다면 얘기할 근거가 더 없다. 좌파(?) 쪽은 그나마 좀 낫지만 그것도 매우 '엘리트'적이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막상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르는... '민족주의 과잉' 이면엔 어쩌면 '사상' '철학' '성찰'의 빈곤일 지도 모르겠다. 2mb 정부와 '의식있는^^ 국민'과의 싸움, 국회의 치열한, 너무도 치열한 갈등의 내용은 너무도 부실하다. 우리의 너무도 강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민족의식, 애국심의 뒷면은 한마디로 - 좀 '오버'해 보면... - '無識'이다. '우리들' 사고와 담론의 질을 좀 높히기 위해서라도 통일이나, 통일 비슷한 무엇라도 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체계이론과 민족주의

...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의 단위로 보는 탓에 '근대 이후로 사회가 하나 있는데 그건 세계사회다'라고 주장하며, '공간성'엔 심드렁한 눈길만을 주는 체계이론... 기능적 분화 속에 '민족'이 '공식적으로' 들어 설 자리는 고작 근대 국가가 '민족국가'라는 정도? 지역적 분화나 민족적(national, ethnic) 분화에 대해서 루만이 언급한 구절들은 손에 꼽을 정도. 이후 슈티히베, 나세히, 얍 등이 좀 쓰긴 했지만 역시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딱히 더 쓸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기능적 분화을 으뜸가는(primär-) 분화원칙으로 삼는 현대사회는 중심이 없는고로 통합력이 매우 약하다. 민족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한다 (Nassehi 1990). 혹은 여러 체계에 각기 따로 포섭되어야 하는 (Multiinklusion) 현대인들이 겪는 정체성 위기, 그에 대한 '부가적' 의미론이라는 기능도 있고 ('identitätsbildende Vollinklusion von Personen in die Gesellschaft' ibd. S.274). 하지만 통틀어서 체계이론이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싸늘하다. 기능적 분화와 더불어 민족이 사라질 거라고 볼 필요도 없고, 민족은 기능적 분화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필요도 없다 (ibd. 275).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공존할 것 (Geser 1981).
루만의 견해는 좀 더 비관적이다.
"Man kann daher vermuten, daß wir uns heute in einer Auslaufphase dieser Idee befinden, in der sie mehr Schaden als Nutzen stiftet und in der Soziologie eines jener obstacles épistémologique bildet, die auf Grund vergangener Plausibilitäten die jetzt nötigen Einsichten blockierenä (GG 1055).
"Auslaufphase"란다. 막을 내리고 있다는.. 흠. 과연 그럴까?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될 'tansitorische Semantik'에 불과할까? 어쩌면 그건 루만의 희망사항일지도..
더군다나 한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면... 그게 결코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거다. [루만은 일본을 예외적인 경우로 언급하고 있다. 민족, 국가가 일치하면서 그 정도 규모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 (GG 1054f). 당연히 한국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특히 유럽 역사에서 '민족'은 '명백하게' 근대의 산물이었고, 요즘 EU 국가들 간 교류를 생각하면 루만의 '심정'도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해선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기 힘들 것 같다.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니까.

Geser, H. (1981), Der „ethnischer Faktor“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In: Schweizerische Zeitschrift für Soziologie 7: 165 – 178
Japp, Klaus P. (2007), Regionen und Differenzierung, in: Soziale Systeme 13(1+2): 185 – 195
Nassehi, Armin (1990), Zum Funktionswandel von Ethnizität im Prozeß gesellschaftlicher Modernisierung. Ein Beitrag zur Theorie funktionaler Differenzierung, in: Soziale Welt 41: 261- 282
Stichweh, Rudolf ([1994]2000), Nation und Weltgesellschaft. In: ders., Weltgesellschaft, Frankfurt a.M.: Suhrkamp, 48 – 65.

2009년 9월 8일 화요일

구성주의적 인식론

"Dass sinnhafte Identitäten (empirische Objekte, Symbole, Zeichen, Zahlen, Sätze usw.) nur rekursiv erzeugt werden können, hat weitreichende epistemologische Konsequenzen." (Luhmann, GG: S.47, 강조 kj)

어떤 대상의 정체성은 회귀적인 방식으로만 만들어진다는 주장... 바로 여기가 전통적인 존재론적 인식론과 구별되는 구성주의적 인식론, 인식론의 커뮤니케이션적, 언어적 전환의 출발점이다. 존재, 대상과 표상, 관찰의 관계를 동시성으로 인식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일상적으로는 옳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식론에 벗어나지 못하면 루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고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꽤 오래 전부터 유통되어 왔다. 지금까지 여러 버전의 '오리엔탈리즘' '옥시텐탈리즘'이 있었을 것이다. '서양 - 문명/ 동양 - 야만' 같은 구분 도식도 있었을 것이고.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자주 얘기하는데, 오늘 요즘 한창 뜨고 '계시는' - 동양식 존대?^^ - '다윈' 선생과 미시간대 사회심리학 교수인 '니스벳'의 가상 대화록에서 그런 내용을 발견했다 (여기). 사실 그 주장 자체로는 전혀 신선하진 않다. 다만 예로 든 사례들을 혹시 나중에 '써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흠. 우린 '먹는다'라는 표현을 이런 경우에도 쓰는 구나.'써 먹다'. 고 노통께서 '대통령직 못 해 먹겠다'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어쨌든 이런 구분법은 그럴듯 해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선뜻 동의해 주기는 꺼려지는 그런 주장이 (어쩌면 '체계이론'도 이런 인상을 주지 않나 모르겠다. 그래서 대개 '표면적으로 보아 그런 것 같긴 하나, 실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반론을 얻어 '먹게' 되는... Knorr-Cetina 교수가 'Unterkomplexitaet'라고 비판했던 그런 맥락... )결론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이 융합하고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쉽게 동의해 줄 수 있겠다.

니스벳=네. 미국과 중국 아이들에게 소, 닭, 풀을 보여주고 이 중 2개를 하나로 묶어보라고 해봤어요. 그랬더니 중국 아이는 주로 소와 풀을,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을 묶더군요. 중국 아이는 소가 풀을 먹는다는 관계적 이유 때문에, 미국 아이는 소와 닭이 동식물 분류상 같은 동물에 해당된다는 범주적 이유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물속 장면을 보여준 애니메이션 실험에서도 확인됐어요. 일본 학생은 물고기보다는 물속 배경을, 미국 학생은 물고기 자체를 더 잘 기억했죠. 동양인은 주변 환경에 기초해 개별 사물을 기억하는 관계적 사고를 하는 반면, 서양인은 배경과 개별 사물을 분리해 생각합니다.

다윈=전체론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차이로군요. 아주 새로운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니스벳=한 20년 전쯤에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중국계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불만을 품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한 충격적 사건이 있었어요. 미국인은 이 범죄의 원인을 그 학생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렸지만 중국인들은 그 학생의 주변 관계, 총기 구입이 쉬웠던 상황들을 언급하며 ‘상황론’을 들고 나왔지요.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맥락을 훨씬 더 중시합니다.

다윈=그러고 보니 동양인은 문화적으로 모두 ‘공자’의 후예들이랄 수 있겠네요. 유교는 개인의 개성보다 공동체 속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죠. 그런 전통이 요즘처럼 문화들이 서로 융합되는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고 과정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니스벳=의학 전통도 문화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허리가 삐끗해서 동양의 침술을 경험해 본 서양인이라면 다 느꼈을 거예요. 서양 의학은 병든 ‘부분’을 고치거나 도려내는 수술을 먼저 떠올리는 반면, 동양 의학은 몸의 전체 균형을 되찾아 질병을 치유하려 하죠. 부분과 전체, 개인과 집단, 분석과 관계, 본성과 상황, 추상성과 실용성 등은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키워드입니다.

다윈=솔직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이긴 합니다만 뭐랄까, 문화 간 생각의 차이를 입증한 이 연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처럼 들리지 않아요. 예컨대 선생의 연구 결과가 맞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도 가능하잖아요. 분석력과 개성적 사고에 상대적으로 능한 서양인들이 경쟁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더 적합하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계에서는 동양인들이 불리하다, 뭐 이런 결론 말입니다. 이건 좀 위험한데요….

니스벳=다른 건 다른 거죠. 하지만 서양인이 추상적 사고와 분석 능력에 상대적으로 뛰어나 과학적 탐구에 유리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동양인이 능한 실용적 사고와 관계적 사고로는 사회적 갈등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동서양의 문화가 서로 충돌하거나 한쪽으로(서양 자본주의 문화) 흡수통합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융합되는 흐름이죠. 서양인이 점점 더 동양의 문화를 찾고, 동양인이 서양의 경쟁적이고 개성적인 지배문화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는 상황 아닌가요?

다윈=이제야 독자들이 이 책을 ‘무경계5’로 뽑아줬는지 알겠어요. 동서양의 경계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 사고 과정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줬다는 뜻이겠네요. 독자들이 저보다 더 현명합니다. 고맙습니다. 차 더 하시겠어요?(More tea?)

니스벳=중국에서는 이 상황에서 ‘Drink more’라 말하죠. 서양은 범주를 타나내는 명사를, 동양은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를 더 빨리 배우고 강조한답니다. 하하.


윗 대화록이 실린 기사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런 내용을 다룬 니스벳의 책 '생각의 지도'(2003, 김영사)가 한국에 번역되어 있다 (부제: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원제: The Geography of Thought). 그 소개글 중 일부...

동.서 사고방식의 차이를 논증하는 책.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라는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을 뒷받침한다. 문화심리학자인 저자는 여타 학문에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생소한 동.서양인들의 심리적 차이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 학문으로 체계화했다.

동양은 전체를 종합하는 반면 서양은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동양은 경험을 중시한다면 서양은 논리를 중시한다. 동양은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한다면 서양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동양은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서양은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본다. 이런 분류는 쉽게 추측가능한 이분법이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기에 더욱 유의미하다
.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생의 의지, 승부욕, 어느 여배우의 죽음

비를 맞으면서 테니스를 쳤다. 난 승부에 대해서 '집착'(執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을, 딱 그 정도로만 승부에 '집중'한다. 아니, 그러려고 한다. 인생은, 사회는 생존경쟁이다. 아니 그렇다고들 얘기한다. 경쟁이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스포츠'아니던가. 그렇다면 스포츠에 임하는 태도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사이엔 강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인가? 장진영씨가 죽었다. 그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서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 다만 자기 일 즐기면서, 많이 '집착'하지 않으면서 살 것 같은 배우라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를 쓰고 살아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만 살아 남는 세계라면 좀 슬프지 않은가. 아니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면 너무 지루하지 않겠는가.

9월의 첫 날...

...이 아직 30분 남았다. 모처럼 비가 시원하게 내렸고. 한국 DJ들이 자주 썼던 표현을 빌자면... '가을을 재촉하는' 그런 비... 누가 뭐래도 이젠 가을이다. 茶를 마신다. Blutorange... 음악을 듣는다. Radiohead의 Creep. 요즘 심리상태가, 뭐랄까, 최적은 아니다. 조금 정돈할 필요가 있을 듯. 흠. 이건 너무 일기 같은 걸. 이 참에 아애 일기 '코너'를 하나 만들까보다. 어제 '것'도 '레이블'을 그 쪽으로 바꾸고...

2009년 9월 1일 화요일

8월의 마지막 날...

이번 달에도 10개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날 강박하다. 몇 개 쓸 거리가 분명히 있었는데 때를 놓쳤고 게다가 기록해 놓지 않은 탓에 도무지 떠 오르질 않는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찔러 보면... 우선 정치 쪽... 어제 일본에서 민주당이 수십 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 냈고, 빌레펠트에서 사민당 출신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또 독일 몇 개주 선거에선 좌파당, 녹색당, 자민당 등이 선전을 했다고 하고. 4주 정도 남은 총선에선 CDU/FDP 연정이 탄생할 지 지켜볼 일이고... 한국에선 남북관계가 풀리고 있고, 2mb씨 지지도가 오른다고 하고, 오늘 청와대 참모진을 재편했는데 돌고 돌아 결국 참여정부 비슷한 틀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들리고... 과학기술특보와 IT특보 신설 소식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정부가 나름 지난 두 정부와 차별화를 여러 방향에서 시도했는데 결국 '삽질경제'만이 a genuine policy made by 2mb로 역사에 남지 않을까 싶다. 수십조원들여 4대강 생태계 파괴하는 이 짓은 어쩌면 기네스북에 남을만한 '치적'이다. '바보스러운 정책' 같은 항목이 있다면... 유로화 환율은 좀체 떨어지질 않는데 한국 경제 성적이 가장 좋은 편이라고 한다. 음... 불가사의한 일이다. 분명히 어떤 음모나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가 있을 것만 같단 말이지.... 생각해 보니 며칠 전 부산대에서 박사 학위 없는 시간 강사들이 '짤렸다'는 얘길 듣고 뭔가 써 보려 했었던 것 같네. 울산대에선 최초로 교수 연봉제를 실시한다는 기사도 읽었고. 아, 요 며칠새 가을이 성큼, 정말 성큼 다가왔다. 해가 나와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 들고 있고, 아침 저녁 제법 춥다. 오늘 낮에 커피를 마시면서 햇볕이 드는 자리를 찾았을 정도로... 쓸 거리가 없다보니 이런 싱거운 얘기만... 그리고... 어쩌면 독일에서 마지막이 될 일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그런데 어째 마무리가 좀 시원찮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易地思之 그리고...

"나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나는 배부르든 배고프든, 풍족하든 궁핍하든, 모든 형편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빌 4:11 - 13, 우리말 성경)

易地思之, 즉,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기'는 나이를 먹을 수록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다. 선배, 후배 관계에서... 나는 때로는 선배가 되고, 때로는 후배 위치에 있게 된다. 아들이자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조카이자 삼촌이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내 상대방, 즉 (역시) 선배 혹은 후배가 느낄 심리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건 확실하다. 허나 '역지사지'를 좀 멋지게 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다른 처지를 고려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위치에 따라 삶의 원칙마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후배로서는 선배에게 복종하고, 선배로서는 후배들에게 권위적인... 이런 방식은 군대, 회사, 동문회 같은 조직생활에서 잘 먹히고, '사회생활 잘하겠다'고 칭찬받는 스타일이다. 허나 앞으로도 계속 칭찬받는 스타일일지 두고 볼 일이다. 내 생각엔 세상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 질 것이다. 또 역사적으로 뭔가를 이룬 인물들은 대개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원칙이 어떤 원칙이냐는 것인데... 때로는 주변적인 것까지 원칙이랍시고 지키려 '똥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본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못 갖춘 사람들. 易地思之하는 법을 못 배운 사람들이다 깊지 않은... (그런 경우 막상 결정적인 위가가 닥치거나 하면 또 그 원칙을 잘 내 던진다). 그와는 다르게 뭔가를 성찰하고, 다양한 시각을 고려하는 것 같은데, 막상 '알맹이'가 안보이는 경우도 있다. '본질적인 것'을 아직 못 잡은 경우. 그러니 일관성이 부족하여 말을 잘 바꾸지만 막상 스스로는 그렇다는 걸 잘 못 느낀다. 그리하야, 결론은... 여러 상황, 사회적 위치에 처해보고, 역사적 안목과 사람들 마음, 세상 이치 헤아리를 법을 익혀서, 즉 易地思之하여, 비본질적인 것에는 타협도 하고, 양보도 하고, 때로는 카멜레온 짓도 하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큼은 양보하지 말 것! (사후에 유독 커보이고 그 빈자리가 커 보이는 두 전직 대통령. 그들이 살아온 길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s) 易地思之: 이 표현은 《孟子》"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 " 이란 말에서 유래하지만,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쓰지 않는 made in Korea 성어라고 한다.

좋은 얘기, 벗뜨....

오래 전에 친구에게서 들었고 그 이후로 내가 애용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된 얘기인데... 세상 길이 온통 거칠다고 투덜대는 제자에게 선생님이 내리시는 말씀인즉슨... '가죽신을 신어라. 그러면 네 가는 모든 길이 부드러울테니...' 화엄경에 나온다는 "一切唯心造"를 떠올리게 하는 얘기이고, 대학 시절 주위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던 유물 변증법 입문서의 관점에서 보면 타파해야할 전형적인 '유심론'적 시각일텐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관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어쨌든... 이런 계몽적인 얘기의 뒷면은 곧 사람 마음 고쳐 먹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성찰일 게다.
벗뜨... 세상은 저대로 내버려 두고 늘상 내 마음만 고쳐먹어야 하나? 그렇담 도대체 어디까지 고집을 해야하고, 어떤 점을 지켜야 하나? 이렇게 딴지를 걸어보면 드러나듯이 서두에 꺼낸 얘긴 듣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인생의 한 측면에 대한 얘기일 뿐이다. 그냥 그 정도로 조절해서 들으면 된다. 속담, 좌우명, 어른들의 가르침은 대개 그런 식이다.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사랑...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2)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전제 조건이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 없다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그 반대로... 그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까?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하나님, 하나님 사랑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2009년 8월 16일 일요일

중국 통일의 원인: 뜻글자

프레시안에 연재되는 소준섭의 '正名論'에서 발견한 내용이다. 중국이 '넓은 땅', '다양한 민족'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한자라는 것. '뜻글자'이기 때문 어떻게 발음과 상관없이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물론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일 수는 없겠지만... 의사사통, 매체 등을 중시하는 '체계이론'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설득력있는 설명이라 하겠다. 문자, 의사소통 매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중국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뜻글자임'이 21세기적 의사소통 상황에서는 오히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이해되니 역사를 내다보기란 참 힘든 일이다.

"중국이 이렇듯 유럽처럼 분열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문자(文字)이다.
중국은 한자(漢字)라는 상형(象形) 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족들이 분산 거주하면서 발음상 상이함이 나타날 경우에도 뜻을 알 수 있는 상형 문자의 존재에 의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지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한자라는 중국의 상형문자는 발음상의 차이를 초월하여 동일한 함의를 표현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한자는 서로 상이한 언어를 가진 종족 간 교류와 결합의 유대(紐帶)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특히 중앙 왕조는 통일된 문자에 의하여 각 지역과의 안정된 정보 체계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 군사, 경제적인 결합이 보장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지리적으로 광활하고 교통은 불편했지만, 중국은 한자라는 문자에 토대하여 국토 통일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