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읽고싶은 책들이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한국에선 책 값도 싼 편이다. 몇 권을 사도 큰 부담없다. 심지어 한국어로 씌여져서 술술 읽힌다. 그래도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꺼야 할 급한 불이 한 쪽에서 활활 타고 있는 탓이다. 다른 한 편으로 드는 생각은... 언제까지 남들이 써놓은 책만 읽을래. 너도 뭔가를 발표하고 출판도하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훗. 그런 날이 오긴 할까?
Mundfaul... 아닌 Händefaul... 구구절절히 이야기를 늘어 놓기 싫어서 이야기 거리 하나 패스... 예의 그 카페에 나와 있다. 좋은 점 (1) 길 건너 맞은 편엔 중학교고 사람들 통행이 그리 많지 않은 동네 카페라 손님도 적은 편 --> 4인분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몇 시간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2) 커피 값도 저렴한 편 (3) 게다가 충분히 넓어서 다른 사람들 소음에도 덜 시달린다. (4) 브랜드 카페가 아니라서 더 정겹다.  (5) 심지어 분위기가 좋기까지... 

한동안 달달한 카페모카를 주문했는데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 30도를 가뿐히 넘기는... -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택.

얼마나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갈 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편안하다. 아. 주말인데 좀 놀아도 되지 않을까. 


2014년 5월 29일 목요일

읽기 좋은 글은...
(1)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제목만으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주제를 장악해야 한다.
(2) 독자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읽힐 글인지 분명하게 염두에 둬야한다.
(3) 주제에 대해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야 한다. 기존의 이야기, 주장과 구별되는 새로운 점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 이제 당신이 쓰려는 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무엇에 대한 글이지? 주제가 뭐야?
누구에게 읽힐 글이지?
그 주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와 어떤 주장들이 있지? 당신이 주장하는 바는 어떤 점에서 새롭지?
내가 좀 자세히 살펴 본 정부 통계로 자살통계, 범죄통계가 있는데 문제가 많았다. 경제통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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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학계는 기본통계 부실해…불평등 연구 미흡

"28일 경제학계에 따르면 2001년부터 진행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 이매뉴얼 사에즈 UC버클리대 교수 등이 고안한 '상위 1%의 소득집중도'를 통해 한국의 소득 불평등 척도를 따지는 작업이 2012년부터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낙성대경제연구소),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이들의 논문은 학계의 검증을 거쳐야 등재될 수 있는 학술지에 올라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검증절차도 밟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학계에서 정부, 통계청 등이 발표하는 지니계수, 2013년부터 발표된 신지니계수, 울프슨지수 등을 국제적으로 공인된 소득 불평등 지표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소득 불평등 척도가 한국에서는 결함이 크다는 점이다. 통계청 설문 결과를 통해 산출되는 지니계수는 고소득자들이 설문에 불성실하게 응하는 고질적 문제점 등으로 지난해 역대 최저수준(0.302)을 기록했다. 실제 소득에 기반한 납세자료를 가지고 조세재정연구원이 지난해 지니계수를 산출해 봤더니 통계청 발표치보다 10% 이상 높았다. 불평등이 정부 공식 통계보다 심하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학 교수는 "국세청의 통계를 학문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우리도 피케티처럼 과감하게 연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밥만 먹고 야구만 하는 사람들이지만... 중계와 언론을 통해서 관찰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적지 않은 시간 관찰하고 분석하다보면 쉽게 무시못할 정도의 식견을 갖게된다. 기아타이거즈가 갖는 문제는 분명한 것 같다. 감독이 가장 큰 문제다! 감독을 비난하는데 그치지 말고 뭔가 교훈을 얻어보자. 선동렬 감독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 리더로서 어떤 점을 고쳐야 할까?

- 전반적으로 팀분위기가 좋지 않다. 감독이 권위적인 편이라고 이야기한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 실력 좋지 않는 선수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실수를 했을 때 썩소 짓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비판을 많이 받아서 요즘은 그러지 않지만... 인터뷰에서도 자조적 이야기, 선수들 책망하는 얘기를 자주한다. 셀프 디스... 리더가 구성원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런 티를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내면... 그 어떤 구성원이 좋아할까.

- 비슷한 맥락이지만... 격려해서 가진 것 이상을 끌어내는 능력이 없다. 그런 점에선 김성근 감독이 탁월하다.

- 선수들을 믿지 못하고, 그런 표를 노골적으로 경기에서 드러낸다. 번트 사랑. 줄구장창 번트. 투수가 흔들리는 데도 아웃카운트 하나를 쉽게 헌납.

- 선수들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

- 그다지 스마트하지 못함.

감독은 (1) 스마트하거나 (2) 카리스마가있거나 아니면 (3) 친화력이라도 있거나...

미안한 얘기지만 선감독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가끔씩 뜬금없이 버럭 화를 내는 아버지 스타일이다. 분위기는 가라앉지만 왜 그런지 공감시키지 못하는 그런 버럭... 
맥북에어를 수 년째 쓰고 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아니지만 만족하면서 잘 쓰고 있다. 외형도 그렇지만 OS가 정말 깔끔하다. 윈도우와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특히 업데이트를 하고 나면 새 컴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을 줄 정도다.

좀 쌩뚱맞지만... 맥북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직접 돌아다니는 쇼핑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온라인 쇼핑은 좀 다르다. 관련 제품을 검색하고 비교해서 품질 대비 가장 싼 제품을 골라내고 주문할 땐 심지어 짜릿함을 느낄 정도. 오늘은 여름용 샌들을 주문했다. 시간을 많이 쓰기 싫어서 많이 고민하지 않고 주문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만족감. 주문을 취소 하고 다시 검색. 나름 괜찮을 물건을 발굴했다. 하지만 조금 더 검색한 결과 같은 제품을 특별기획전에서 무려 만원가까이 싼 가격에 파는 것을 확인했다. 이럴 때 쾌감이 극치에 이르고 뿌듯한 마음으로 인터넷 창을 닫는다.

하지만... 병원에 다닐 때만다 느끼는 바지만... 기회있을 때마다 한 푼 두 푼 아껴봐야 병원 한 번 다녀오면 몇 배의 금액이 소비된다. 한국에선 건강한게 돈버는 거다.

하지만 품질 대비 싼 제품을 고르는 행위는 단지 돈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 (레오 트로츠키 Leo Trotzki)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메가스터디 대표 손주은" 중에서..


Q. 너무 앞서 나간 말씀 같은데, 그럼 손 대표께서는 교육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육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죠.

Q. 파격적인 말씀인데요?

(...) 교육근본주의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하지만 자연주의적 관점피교육자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이 후자에 박수를 치죠. 하지만 전자가 없는 후자는 없어요. 예전에는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을 배우고 그 과정에 인지력이 확대되곤 했지만, 지금의 열린 교육은 솔직히 엉망이죠.

Q. 열린 교육보다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참교육이라는 말씀인가요?

시험을 잘 치르는 기술이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지식을 고스란히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한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값싸게 평가해요.

Q. 그건 사교육 업체의 대표로서의 인식입니까? 아니면 소신입니까?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요. 한국과 일본이 이번 WBC 결승에서 연봉이 100배나 되는 메이저리거를 이긴 것은 주입식 훈련의 반복에 의해 안정적 수비 포메이션이 나오고 안정적 타격을 하기 때문이었죠. 한국과 일본은 주입식 교육의 대표거든요. 한데 자율야구와 자율교육은 어느 날은 잘되고 어느 날은 엉망이 되죠. 우리의 입시결과주의가 일부 문제는 있지만 그로 인한 반복식 교육은 의미가 커요.

Q. 오히려 그 때문에 열심히 배워도 우리 학생들이 창의력이 없다는 평을 듣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주입식 교육은 우리 국가 능력의 기초였어요. 한국야구도 이렇게 된 것 아니겠어요. 저는 김성근 감독을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주입식 야구를 반복하고 거기다 정신력을 가미하는 거죠.

Q. 그것이 향후 우리나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평가하지 않나요?

10년 전 소니TV가 있는 집은 부자였죠. 지금 소니TV 있는 집은 돈이 없어 TV를 못 바꾼 집이죠. 10년 만에 삼성이 소니를 이겼는데 70년대 후반 서울대 공대생들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주입식 교육의 대표선수들이었죠.

Q. 글쎄요. 압축교육이 과거 우리를 앞서간 나라를 따라잡는 데는 유용했겠지만 그런 교육으로 앞서갈 수 있을까요?

우리 교육은 엄청나게 기초가 튼튼했죠. 오히려 그래서 가장 앞설 수 있었어요. 교육이 기본적 토대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말만 그럴듯하지 교육이 아니에요. 메가스터디를 두고 시험기계를 양성한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말은 우리 강의 한 번 들어보고 하면 좋겠어요. 우리 강의가 입이 쩍쩍 벌어지게 전달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교육이란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고, 그러려면 좋은 선생이 필요하죠.

Q. 아까 말씀하신 주입식 입시교육과 사고 확장은 모순 아닌가요?

입시는 단순 암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요. 그 과정에서 앎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는 아이들만 성공해요. 수능 문제는 엄청난 사고를 요구해요. 사고력 시험이죠. 언론도 수능 문제 한번 풀어보고 ‘수능식 반복교육’이라는 기사를 써야죠.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교육이 아니에요. 오히려 정치논리로 악용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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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의 학교 교육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체제로는 안 돼요. 교사들이 안전한 밥그릇을 유지하려는 관행부터 깨야 해요. 수업시간표가 교실에 붙어 있는 게 말이 되나요? 사교육은 듣고 싶은 과목을 듣고 싶은 선생에게 듣지만 공교육은 싫건 좋건 정해진 선생님이 들락거리죠. 사교육을 지나치게 욕하는 것은 공교육의 면죄부를 얻기 위한 작당이죠.

-> 이건 앞에서 한 얘기와 모순 아닌가? "교육근본주의" -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 - 이 필요하대매? 주입식 교육도 필요하대매? 필요한 것들을 교육자들이 판단해서 순서짜서 가르치는게 왜 문제가 되지? 학생들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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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강남 아이들이 최고의 성적을 내는 것은 역시 훌륭한 사교육 때문인가요?

천만에요.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데 강남·서초·송파의 입시 결과가 그만큼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순 숫자로 보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건에 비해 오히려 성과가 가장 낮은 곳이 이곳이에요.

Q. 투입된 노력이나 여건에 비해 성과가 나쁘다는 뜻인가요?

소득과 부모의 학벌 수준을 놓고 봤을 때 강남 1%와 지방 1%가 같지 않죠. 나도 강남 1%에 못 들어요. 그런 부모 수준에 사교육비 수준을 생각하면 강남의 입시 결과는 허무하죠. 그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교육의 효과가 있느냐는 회의가 들게 돼요. 냉정하게 볼 때 사교육이 입시에 미치는 영향은 많아야 25%이고, 결국 학생의 의지가 있느냐가 75%죠. 사교육이 입시 격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논리로 만들어진 허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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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솔직히 이렇게 달려온 인생이 행복하십니까?

나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은 근거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자기 의지로 되지 않는데, 행복이란 인간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아 만들어 낸 형이상학적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죠. 즉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에요. 저는 대신 ‘몰입의 평화와 성취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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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7일 화요일

"외신번역프로젝트"라는 페친(?)의 글. 공감, 공감...
(언급된 글은 New York Times의 Sunday Review "Faking Cultural Literacy" (by KARL TARO GREENFELD)

"지금 우리는 항상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야만 아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혹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읽어본 책, 본 영화도 아니면서 소셜미디어에서 주워들은 몇 마디로 아는척 하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전 자주 그랬습니다. 끊임없이 연결되고 대화를 나누는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아는척 해야만 하는 현실에 자주 마주쳤습니다.
지식의 출처와 접근성이 용이해진 까닭에, 아는척 하긴 쉬워졌지만 아는척 하기 바빠 실제로 알아야 할 노력은 기울이지 못한 듯 싶습니다.
유식한척 SNS에 내 자신을 뽐내봤자 달라지는건 아무 것도 없고 더욱 불안해진다는 사실.
가볍게 쓰여진 기고문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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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생각하기 싫어서 정보로 도피하는 경우가 잦다. 내 생각을 만들어내기 전에 남의 생각을 빌리려는... 검색하고 또 검색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충분히 검색하고 기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쌓이면 이젠 내 생각을 만들어야하는데... 그 시점을 지나서 또 검색하고 읽고 검색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도피하려는 심사에서... 이걸 끊어내지 못하면 별 볼일 없게 된다. 차라리 인터넷 검색하는 시간에 산책하는게 백번 나을 지도... 검색. 해 볼만큼 해보지 않았나? 해아래 새 것이 없지 않던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어짜피 그렇다면 스스로를 믿고 네 표현으로 네 생각을 과감하게 드러내야한다. 충분히 고민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 던지길...

비슷한 맥락에서... 세상엔 읽고 싶은 글이 너무도 많다. 고종석 선생의 새 책을 주문하려다 참았다. 김덕영 선생의 "환원근대"는 오늘 도착할 예정이고. 읽고 싶은 한국어 논문도 이미 넘치도록 받아 놓았다. 남이 쓴 재미있는 글들 읽으면서 독후감이나 일기같은 글이나 쓰면서 살면 안되나? 어떤 생각을 학문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이 강박...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같은 글이라도 지금은 만들어내야한다. 글에 대한 낭만도 사치.
원순씨는 참 독특한 인물이긴 하다. 전형적인 정치인, 행정가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안철수가 정치하겠다고 나선 이후로 한국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원순씨 서울 시장 만든 것이다.

오늘 한겨례 기사: "세월호, 시민이 원하는 ‘리더의 자질’ 바꿔놓아(고원, 기사 출처)"

"배심원단 좌담회를 관전하면서 서울시 지방선거가 또 하나의 선거 트렌드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심원들의 구성은 5 대 3 정도로 여당 성향이 우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관련해, 배심원들은 전반적으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대응을 들어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따로 있었다. 배심원들 자신조차 놀란 것처럼, 박원순 후보에 대한 배심원들의 평가는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긍정적 기류가 압도적이었다. (...) 야당 광역후보들 중 박 후보에게만 이런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게 했을까? 열쇠는 세월호 사건이 국민들의 의식·가치관에 미친 영향과 리더십 양면을 살펴보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배심원들은 무엇보다 예산투입형 전시성 개발정책에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각종 개발정책은 실패했으며, 정몽준 후보의 용산개발 공약도 임기 내 하지도 못할 일을 무책임하게 건드려 놓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불과 6년 전 총선에서 ‘뉴타운’ 광풍이 몰아치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들이 서울에서 박원순과 정몽준이라는 인물 대비를 통해 뚜렷한 선거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배심원들에게 각인된 박원순 후보의 강점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디테일한’ 것에 꼼꼼히 매달리는 스타일, 소통, 마을공동체 활성화 등의 노력들이 정 후보와 차별화되면서 세월호 이후 사회변화 트렌드와 맞물리고 있다. 사실 박 후보의 스타일은 여당만이 아니라 야당 후보들과도 차별화되는 면이 많다. 야당이라는 틀만 제거해버리면 개발·성장론으로 뼛속이 얼룩진, 속된 말로 ‘도긴개긴’이 얼마나 많은가. 서울시장 선거는 한국 사회가 새로운 정치시장의 국면에 진입하고 있고, 그 같은 트렌드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정책·전략마인드를 가진 지도자가 부상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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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고원 교수가 예측한대로 이는 세월호 효과일까? 좀 길게 보더라도... 겨우 6년 사이에 서울시민들의 문화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전형적인 야당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

드디어 맹목적 발전주의, 성장지상주의의 시대가 정점을 지난 것일까? 그런 흐름은 이미 보였다. 사실 생명윤리 논쟁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입소 논쟁 역시... 그렇게 불쑥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런 사건들은 사라지면서 발전주의에 조금씩 균열을 냈을 것이다. 그 힘들이 모여서 틈은 점점 더 벌어지고.. 세월호가 더 강력한 힘이 되고 있는지도... 부디 원순씨가 잘했으면 좋겠다. 노무현은 사실 인간적으로는 매력적이었지만 정책 면에서는 발전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였으니가. 황우석 사태도 그렇고. 원순씨는 그런 점마저 넘어섰으니. 원순씨를 잘 키워야 할 것 같다.
"마태효과"를 다룬 한겨레 오철우 기자의 글. (출처)

"불균등을 주제로 다룬 과학저널 <사이언스> 특집에서 한 사회학자의 글이 눈에 띈다. 셰위(위 시에) 미시간대 교수는 ‘비민주성: 과학계의 불균등’이란 글에서 개인과 연구기관, 그리고 국가 간 불균등이 10여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면서, 과학자 사회의 불균등 문제를 짚는다. 분석을 보면 국가 간 불균등은 세계화와 인터넷 등 영향으로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연구자 개인 사이, 대학 또는 연구기관 사이의 불균등은 커지는 추세로 나타난다. 그는 ‘승자독식’ 같은 현상마저 보인다고 진단한다. 박사 인력은 늘지만 보상·분배 체제는 제자리인 것이 불균등 심화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원문이 뭔가 찾아보니..


“Undemocracy”: inequalities in science (by Yu Xie)
-  Inequality, an intrinsic feature of science, has trended upward in recent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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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불균등은 줄어들겠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만 봐도 부상하고 있으니... 불평등의 종류가 바뀌고 있고...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차이는 국가 간 차이가 아니라 국가 내 여러 집단 간의 차이, 양극화일듯... 이건 뭐 마르크스잖아 결국. 국가가 획득할 수 있는 전체 부를 늘리면서 그 열매를 나눠먹는 메커니즘이 한계에 다다른듯. 과학에서도...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통풍 덕에(ㅠ) 좀 더 세밀한 혈액검사와 내부 기관들 초음파검사까지 받아봤다. 아주 심각하진 않지만 몇 가지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징후는 그동안 내가 느끼던 이상 신호가 의미있음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건강에 좀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고, 먹는 것도 신경쓰는 편인데도 이런 형편이라 한편 당황스럽지만 뭐 경고를 일찍 받았으니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스트레스 영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Dauerstress. 스트레스 종류라도 좀 바꿔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4년 5월 24일 토요일

모처럼 집에서 붉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시다. 안주는 포도와 딸이 더 이상 먹지않으려 드는 '맛있는 비타치즈'. 배경음악은 '어떤날'의 '초생달'. 조금 전 순록을 키우며 사는 유목민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봤는데 별이 빽빽이 박힌 북쪽 지방 하늘 모습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노래가 생각났다. '커다란 빌딩 사이 속' '하얀 초생달'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왜. 극에서 극은 또 통하는 법 아닌던가.

어머니가 대구에 내려가셨고 아내는 요즘 일이 많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극히 적어서 어제 금요일 저녁부터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다행히 딸은 아빠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지(?) 요구하는게 적은 편이어서 수월하다. 할머니나 엄마가 재울 때 칭얼거림이 심한데 오늘은 혼자 자러 들어갔으니.

통풍성 관절염도 발병의 급작스러움과 심각함에 비해서 최근 상태와 수치는 좋은 편이어서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수개월 전 이사한 집은 17층인데 집 앞 뒤가 통하는 구조라서 양쪽 문을 열어 놓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대신 차소리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없을 수 없지만...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암.

2014년 5월 22일 목요일

장애인 고용 관련 기업들의 행동을 decoupling으로 설명할 수 있을듯.
공적 제도는 바꾸지만 실질적 관행은 바꾸지 않는...

"Ederman(1992)은 미국의 일반기업들이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를 다루기 위한 부서를 설치하나, 자신들의 고용관행(hiring practices)을 바꾸지는 않는다... "
(1) 정책(policy)과 실행(practices)의 디커플링(분리 decoupling) 현상은 정책은 있지만 (혹은 도입했지만) 실행을 안 하거나 늦추는 경우를 가리킨다. (talk와 action의 분리, 혹은 공식구조와 비공식구조의 분리 )

(2) 다른 디커플링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실과 정책의 디커플링. 정책(혹은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 정책이 너무 이상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앞서 나갈 때. 이런 경우는 "정책과 현실의 괴리"로 주로 표현되는 것 같다. 디커플링(2)가 디커플링(1)의 원인이 될 수 있겠다. 이 경우 이 둘을 종합하면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정책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제정되어서, 제정된 정책이 제대로 집행될 수 없다." 물론 (1)과 (2)가 반드시 연계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비록 정책이 현실의 간극이 크지만, 막상 만들어진 정책이 일관성있게 적용, 시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은 추적하고 분석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무엇을 실행해야 하는지 그 내용이 분명하고 (정책, 법), 공공정책이라면 그것의 실행여부를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2)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현실을 반영하는 혹은 반영하지 못하는 정책이나 법을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심증은 간다. 그래서 사회학자가 떡하나 이런 표현도 쓰는 것이다. "법을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을 우리 사회의 법으로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법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하게 되고 법을 그 자체로 현실에 적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법의 적용을 강하게 강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장원호, 한국사회의 불신,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186쪽).

한국 복지국가를 디커플링 현상으로 봤던 논문도 (1)에 대한 것이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내 경우는 기존에 있던 정책이나 법의 실행이나 집행과정이 아닌 정책의 형성 과정 자체가 연구 대상이다. 이 경우 만들어진 정책이 정책을 둘러 싼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기존의 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과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이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정책은 대개 이러저러한 필요와 요구들 사이의 타협아니던가? 한국이건 독일이건... 그 과정에서 현실과의 간극은 불가피한 것이다. 물론 정도에 차이는 있을 테고, 그 차이가 (1)에 대해서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1)에 대한 국가별 차이는 더 큰 것 같다. 어떤 동기에서 얼마나 현실에 부합하게 만들어졌건 간에, 이미 만들어진 법이나 정책을 일관성있게 집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말이다. 독일은 매우 강력하게 이를 지향하는 편이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법치, 법에 의한 지배... rule by law...

(1) 문제를 다루면 좋겠는데....  생명과학규제 정책에 대해서 (1)은 오히려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다. 왜 이렇게 이 분야가 급성장하고 있지? 의료윤리, 생명윤리, 생명윤리정책, 관련 제도들? 내가 보기엔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는데도...

그러니까 현실과 정책의 간극이 있더라도 집행은 일관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한국의 현실인 것 같다. 뭐. 긍정적인 현상이다. 애초에 법/정책이 현실을 더 잘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정되면 일관된 실행, 집행 행도 더 잘 되겠지만...
결국은 문화지체인가? 사회구조와 문화로 구분하고... 사회구조를 바꾸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전에 형성된 문화가 사회구조는 바뀌었는데도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도전을 받으면서도 지속되고 있는... 물론 새로운 사회구조가 선호하는 문화가 있지만, 그것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문화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상충하는 것들이 공존하고 또 사회구조가 그것을 선호하기도 하니까.... 그런 속에서 어떤 문화가 선택되고 조화를 이루느냐에는 정답이 없다. 다양한 방식이 있을 뿐이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화지체'는 아니다. 문화지체는 벌써 방향, 정상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지체되어서 따라잡아야 한다? 변화된 사회 구조에 어울리는 문화가 있는가? 분명히 있다. 그런 점들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 방향이 서양의 쭉 앞서가고, 동양은 뒤에서 좇아가고.... 그것만은 아니라는 점. 서양의 경우에도 다양한 경로로 근대에 들어섰고, 상황에 따라 근대적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 문화가 들어서기도 하는 것이니까... (사실 그런 다양함이 근대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근대의 원형 Archetype이 없다는 것인데... 루만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고... 물론 루만은 우세성이라고 표현하지만... primacy.... Primat... "핵".) 어제 읽은 이철우 선생은 그런 걸 피하려고 하는 것 같고... 좋다. 나는 근대의 핵이 있고, 그 핵을 중심으로 다양함이 가능하다 정도로 정리하자.
나는 왜 쓰는가 (G. Orwell, Why I write)

왜 쓰는가? 쓰는 것도 쓰는 것 나름이지만... 이 경우는 공적인 행위로서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공적 영역에 제출하는... 글쓰기는 자신의 견해, 지식 등을 드러내는 행위다. 주제가 있어야 하고, 가능한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 내용이 흡사한 글이 없어야 한다. 뭐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나는 왜 쓰는가? 오웰은 그 동기를 네 가지로 나눴다.

1)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작가는 이 특징적 동기를 과학자, 예술가, 정치가, 법률가, 군인, 성공한 사업가-말하자면 인류의 꼭대기 부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한다. 인류의 대다수는 그리 격렬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는 않다. 대개 나이 서른쯤을 넘기면 사람들은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대체로 남을 위해 살거나 일상적 일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는 소수의 재능 있는 인간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고집센 인간들이 있고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진지한 작가들은 대체로 저널리스트들보다 더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은 덜 할지 모르지만.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이런 미학적 동기는 산문 작가들의 경우엔 대체로 미약한 편이지만 그러나 팸플릿 저자나 교과서 집필자까지도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어휘와 문구들을 갖고 있고, 이것들은 공리적 이유를 떠나 그를 매혹한다. 어떤 활자체를 쓰고 책의 여백은 어떤 크기로 할까 등의 고려도 그런 것이다. 철도 안내서의 수준을 넘는 책이라면 어떤 책도 이 같은 미학적 관점을 아주 벗어날 수 없다.

3)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

4)정치적 목적-<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오웰 자신의 동기는 이렇게 표현한다. "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어떤가? 내게 (1)은 크지 않다. (2)는 거의 없다시피하고, (3) 역시 그다지.... 그나마 가장 강한 쪽이 (4)인 것 같다. 다른 동기에 의한 활동은 이미 뛰어나고 빼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히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고... 내가 가장 답답하게 느끼는 분야가 "사회에 대한 거시적 기술"인 것 같다. 어쩌면 학부시절부터 줄곧 가졌던 답답함. 사회의 질서와 변화 과정을 어떻게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회이론들은 대부분 두드러지는 한두 특징만을 가지고 전체를 묘사하거나 아애 그런 설명으로 만족한다. 각종 "--사회"가 그렇다. 자본주의(사회), 위험사회, 정보사회... 최근에 그런 묘사는 더 소프트해져서... 피로사회, 단속사회... 그런 접근들, 그런 사회이론들이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이론을 자연과학처럼 법칙화하는 것도 불만족스럽다. 사회이론도 아니지만 통계적 접근들, 심지어 파슨즈 류도... 어떤 이론들은 '개념'에 매몰되어 버린다. 개념과 개념간의 관계가 명제고 또 이론의 핵이긴 하지만 사회이론에서 개념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개념이 생각을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서술적 연구, 역사적 연구가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 같다. 루만이나 베버가 가장 그에 가까운 것 같다. 루만은 사실 파슨즈류 개념 구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런 루만을 파고드는 행위들은 내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역사적 접근을 취하는 루만... 여하튼 이러저러한 사회이론과 역사학적인 접근을 통합해서 한국 사회, 이 시대의 질서와 변화를 크게 그리는 것. 그걸 하고 싶었다.
너무 원대한가? 여하튼... 희망사항은 희망사항이고... 현실적인 목표는 훨씬 더 소박하다. 좀 더 그럴듯하고, 새롭고, 참신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 그렇다. 참신해야 한다. 혁명적이진 않더라도....
황현산 선생의 이야기.


“지식은 ‘안 할 말’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 많이 쓰인다. 정부나 청와대 대변인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안 할 말’이나 ‘할 말’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람이 글과 공부를 오래 하면 상투적인 말을 피하게 된다. 부정직한 말, 대충 해버리는 말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글은 상투적인 말을 쓰지 않는 것"

“외국어를 어떻게든 (원문에 맞게) 번역하려다보면 우리 말의 숨은 힘들을 낡은 창고에서 기구 꺼내듯 해야 한다. 적당히 번역하려고만 하면 우리 말이 가진 힘을 다 이용할 수도 없다. 그 말들이 현실 속에 와 활동하게 만들면서 표현역량을 드높이고 현실의 사고 방법이나 체계까지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타자적 힘’이다.”

"‘직역’이 중요하다"
“번역할 필요가 있는 텍스트는, 다 도끼같이, 사람을 치는 힘이 있다” 
“아뽈리네르를 소월 시처럼 번역하려면 소월 시를 읽지 왜 아뽈리네르를 읽어야 하느냐”
“하나의 표현만 가지고는 여전히 그 사고방식, 세월호를 침몰시킨 사고방식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언어로 흔들지 않는 한 세상은 한치도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말의 ‘묵은 힘’을 찾아내 충격을 주고 골격을 흔드는 것이 번역의 가장 큰 장점일 수 있다.”
“글을 잘 쓰려면 강력한 자기 문체가 있어야 한다. 번역도 글을 잘 쓰는 것이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좌파여야 한다. 우선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두번째는 고통의 언어를 자기 말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게 바로 이런 좌파적 상상력이다.”

2014년 5월 21일 수요일

("이철우, 법에 있어서 '근대' 개념 - 얼마나 유용한가" 여기 저기에서... 그리고 덧붙임...)

바우만은 나찌즘이 근대성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철학에 바탕을 둔 서구적 근대성에 뿌리를 둔, 그것의 귀결이라고 본다. 루만은 나찌즘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바는 거의 없는 것 같지만, 기능적 분화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는 체계이론적 견해에 따르면, 나찌즘은 탈분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예외적인, 역행적인... 나찌즘 이전과 이후에 삽입된... 
기능적 분화는 여러 기능체계들 간의 조응관계를 상정한다. 한 체계의 독립분화가 다른 체계의 독립분화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호조응 혹은 상호상승 작용. 루만의 접근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추상적 이론, 역사학으로 따지면 '사관') 거기에 맞는 사실들로 살을 붙인 것과 비슷하다. 그럴듯하지만 찾으러들면 예외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법제의 관계... 베버는 형식적 합리성과 자본주의를 연관지은 바 있다. 자본주의가 시장에서의 예측가능성, 계산가능성의 제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낮은 수준의 형식적 합리성을 갖춘 법제를 가지고 있는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베버에게 고민을 안겨다 준 소위 '영국문제'(England problem)이다. 결국 베버는 '영국은 그 사법제도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최우위를 획득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나찌즘의 예가 보여주듯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반드시 결합하지 않는다. 전쟁 전 일본의 정치제제 역시 자본주의 발전과 양립하였다.
루만의 접근은 근대에 대한 '본질주의적' 규정의 대표적인 예다. 베버도 해당하겠지. 합리화.
이에 비교되는 경우가 "근대는 상이한 과정을 통해서 성취될 뿐만 아니라 그 귀결점 또한 상이한 형태를 취한다. 일본의 경우 합리화 없는 근대화를 대표한다." (John Clammer). Johann Arnason도 비슷한 입장. 하지만 이 경우도 '근대'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그림 없이는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또다른 본질 아닌가?  (클래머, 아나슨은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강조하면서도 근대에 대한 적극적 정의는 하지 않는다고...) 차이는 일차원적, 닫힌 모델인가 다차원적, 열린 모델인가에서 찾을 수 있을듯.

하나의 해결은... 근대성의 구조가 역사적 맥락에 따른 변이에 열려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같은 견지에서 전통적 배경에 의한 부분적 규정에도 열려 있다. 즉 문화적 전통의 다양성은 근대성을 향한 경로들은 물론 근대성의 형상들에 반영되어 있다.  --> 이건 루만 이론과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는 접근이다. 기능적 분화의 다양성. 나찌즘도 지역적 변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영국 문제" 역시 마찬가지고. 사회이론의 도움으로 사회와 역사를 다시 그리는 것 아니던가.

루만, 베버는 물론이고 심지어 클래머나 아나슨까지도 사실은 근대의 원형 혹은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비판은 Therborn, Routes to/through modenrity).

내 경우는 클래머, 아나슨적인 태도를 루만 체계이론에서 견지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듯. 진화론적 사고, 서구중심적 사고임을 인정하고... 그런 접근이 갖는 사회분석적 유용성이 크다는 점으로 그런 비판을 상쇄하려는... 단선적 발전경로를 전제하지만, 근대에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인정...


"이철우 2000, 아시아적 가치와 한국의 법문화"  중 결론 부분.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요약하자면:

(1) 한국인이 소송을 회피하고 조화를 중시한다는 그런 선입견은 경험적 근거가 없다. 
(2) 국가 법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법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경쟁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법을 빈번히 활용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법의 적용을 배제하는 이중적 태도를 지닌다.
(3) 국민들은 법을 다루는 기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법적 담론과 법과정에 특유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 법 과정은 정치적 과정이 아닌 것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 실현을 위해 국가적 법제도를 활용하는 데 크게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법을 회피하지 않고 활발히 이용하는 것이 반드시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활용은 법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아시아적 법문화 담론에서는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조화와 화합을 존중하는 전통문화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이질적인 서양식 법제도가 강제로 이식된 결과 법제도와 문화적 태도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법을 피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강화되었다고 본다 (함병춘 1986). 그러나 일제시대의 법과 사회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그러한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기구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어 있던 일제시대에조차 사람들은 공식적 법제도를 활용하는 데 크게 망설임이 없었다 (Lee 1996).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제도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법과 법이데올로기를 정당한 것으로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단지 공리적 동기에서 법을 활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국민주권주의가 확립되지 않았거나 일제 때와 같은 식민통치하에서는 법의 정당성을 받아들일만한 정치적.제도적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보편적인 공법상의 주체로서 인정되는 오늘날에도 법은 외부에서 만들어져 부과될 뿐이라는 인식이 계속되고 있다. 94년 법의식조사에서도국회에서 만든 법은 국민인 우리가 만든 법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2% 이상이 별로 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법이 인민 스스로의 자기규제라는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법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익 실현의 수단으로서만 간주된다면법의 지배는 정착할 수 없다. 법적으로 확정된 권리뿐만 아니라 불명확한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비타협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태도의 한 반영이다. 고소와 고발 및 이에 대응하는 무고죄에의 문의가 남발되는 데에서 보듯이 경쟁 상대인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으로 법특히 형사법을 빈번히 활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법의 적용을 배제하는 경향도 같은 태도에 기인한다.

한편 법적으로 확정할 수 없는 불명확한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자율적이고 폐쇄적인 법적 담론에 익숙하지 않거나 법적 담론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법적 담론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고려의 부족은 때때로 민주주의의 이름 하에 표출되기도 한다. 94년 법의식조사에서국민의 여론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무려 76.6%의 응답자는 바람직하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론정치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던 시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법을 다루는 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일 수도 있고 법의 해석과 적용이 국민의 의사에 합치되게 해달라는 주문일 수도 있지만 법적 담론과 법과정에 특유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간의 생활관계는 연속성을 갖는 것이지만 법과정에서 다루어질 때에는 법적 담론의 내적 구조에 제약되어 단절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면 법과정은 정치과정과 혼동되며 법체계에는 불필요한 과부하가 작용하여 결국 법체계의 안정된 재생산구조가 파괴되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제고는더 많은 민주주의시민사회의 활성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더 정확히는 그것의 조건을 이룬다."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김규항 선생이 페북에 올린 이야기

이적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이 과학적 사실인가를 두고 논쟁을 한다. 오늘 서구 신학계의 중론은 예수의 이적 가운데 질병 치유와 귀신 쫓는 이적들은 사실이지만 자연 이적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적이 사실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모조리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적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걸 입증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임을 입증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존경하고 신앙하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적에 가르침과 깨달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이적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게 더 큰 이적인가?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는 것.
문화 간 국가간 지역간 비교 연구에서는 대개 구분되는 문화에 동등한 가치를 놓고 비교한다. 동서문화 등등. 문화에 우열을 두기 힘들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이해되는 접근이지만... 실제로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 - 이 표현의 의미도 불분명하지만 - 은 문화의 내용 뿐 아니라, 아닌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느냐 뿐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 다양한 문화를 놓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 등에 오히려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한국 정치에서 흔히 관찰되는 국가주의, 발전주의, 성장지상주의 등의 문화는 다른 나라에서도 대부분 관찰된다. 서양에서는 다만 좀 더 다양한 문화가 등장하고, 즉 어휘가 풍부하고, 창고 속 내용물이 알차고 (문화는 '창고'), 다양한 내용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자주적인 결론을 내면서 문화가 축적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고로서의 문화 자체가 빈약한데다 자주적 결론이 아니라 외국의 결론은 가져다 쓰고... 문화적 역량이 축적되기 힘든 것이다. 차이의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문화의 내용이 "문화 정치"의 특징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정치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 정치"의 차이.

문화 내용의 다양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내용 간의 "제대로 된"(?) - 자주적? - 경쟁, 갈등도 아닌 것이다.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서로 이 지점은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차이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안을 놓고 싸우다가 나이를 들먹이면... 그건 싸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정치문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경제제일주의 등등. 그런 문화가 가져오는 문제점은 그런 문화에 기초해서 일관된 정책을 내놓는 것도 아니라는데 있다.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약속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테제는 문화가 아니라, 문화정치가 문제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질 들뢰즈


“차이 자체는 다양이 아니다. 다양은 주어진다. 그러나 차이는 그것을 통해 소여가 주어지는 것이다. 즉 그것을 통해 소여가 다양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차이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의 예지체에 가깝다” -서동욱, 31쪽.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우리가 흔히 ‘차이를 존중하자’고 말할 때 쓰는 관습화된 차이는 같지 않다. 후자는 ‘외적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개별자들(혹은 다양)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우리의 지성을 통해 개념적으로 경험된다. 반면 들뢰즈의 차이는 ‘내적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개별자가 그 개별자로서 발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감성을 통해 감지되는 비개념적 차이이다. 결국 들뢰즈는 동일성의 부수적인 도구로 전락한 차이를 넘어서서, 동일성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차이 자체를 고안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중산층 정의 한국: 경제적 기준으로만 프랑스 영국 미국은 다르다
'존경'은 벌써 위계적 질서를 인정하는 표현이다. '존경'이 아니라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도 '상호 존중'. 존경이 유교적 질서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대사회의 구조적 조건에 어울리는 질서는 아니다. 독립적인 개인과 독립적인 개인이 만나는 것이다. 이 개인들은 서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어떤 일원적인 질서를 상정하고 그 질서 속에 개인들을 구겨 넣을 때 엄청난 관계의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결정하는 궁극적 가치는 개별성, 독립성에 있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특정 관계의 위치로 확정될 수 없는...

개별성, 고유성을 무시하는 순간 바로 존엄성은 깨진다.

가족의 경우 "생존"의 공동체에서 "존엄"의 공동체로 넘어가야 한다. 존엄은 개별성, 개별적 차이의 인정에서 나온다. 느슨한 연대. 최소한의 공감대, 공동가치를 공유하고 나머지 차이는 똘레랑스, "오래참음"으로 견뎌야 한다. (어디까지 참을 것인가? '상호존중'이 아닌 '존경'에 대해서도? 세대가 차이를 어디까지 인정?)

개인은 개체로서 존엄성을 보장받으러면 그에 걸맞는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상호 존엄, 상호 존중의 원칙을 지키고, 개별자로서 '그가 선택한 그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각자의 길을 존중하고 격려하기. 그게 사랑의 공동체다. 총화단결해서 한목표를 항해서 전투적으로 매진하는... 미친 사회의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독려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이진경 목사님의 글은 정말이지 빼어나다. 이렇게 시원하고 정확할 수가.  옮겨두지 않을 수 없는 글을 또 발견.

"중요한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선택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리라."

내가 요즘에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주제 아닌가. 슈퍼맨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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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늦은 밤. 페이스북을 살펴보던 중 페친 한 분이 지금 EBS에서 영화 <미션>을 상영 중이라고 알려주신다. 롤랑 조페 감독이 연출한 강렬한 장면들, 엔니오 모리코네의 불멸의 음악, 로버트 드 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두 신부, 그들의 날카로운, 그러나 뜨거운 대립과 긴장...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채널을 맞추니 마침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제국주의 포르투갈의 잔인한 학살로 파괴되어가는 과르니족 마을에서 멘도자 신부는 총칼을 들고,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죽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 자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지금도 남미의 인디언들은 그들의 영토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믿음과 사랑으로 영감 받은 많은 사제들이 정의를 위하여 그들의 권리를 지키려 목숨을 걸고 그들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지는 성경 한 절.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 요한복음 1장 5절”

1986년 발표된 영화 <미션>은 당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특히 당시 기독교계의 중요한 논쟁에서 효과적인 예로 활용되기도 했다. 독재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거리를 메우던 시대, 최루탄 냄새가 일상의 공기를 채우던 시절,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진 화두는 바로 이것이었다: 자행되는 불의 속에서 기독교인은 폭력적인 저항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미션>에서 멘도자 신부는 남미의 원주민들을 위해 총과 칼을 들고 불의에 저항했다.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는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과 함께 총탄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과연 어떤 길이 옳을까? 유감스럽고도 위험하게 이 질문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독일의 본회퍼 목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미친 사람이 차를 몰아 인도로 뛰어들었는데 나는 목사로서 단지 시신이나 매장하고 유족들을 위로할 것인가? 나는 차로 뛰어들어서 그 미친 사람에게서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 내가 마침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말이다.” 본회퍼의 이 유명한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장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선택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리라. 정반대의 선택을 했음에도 <미션>의 두 신부는 둘 다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며, 둘 다 원주민들을 위해 죽었다. 하나님은 불의 앞에서 내가 어떤 행동의 결정을 내렸는가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 불의가 자행되는 자리에 과연 내가 있었는가로 나를 질책하시지 않을까? 여기가 하늘나라가 아닌 이상 불의는 언제나, 내 곁에서 자행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집 없는 이들의 대부 아베 피에르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 하나를 남겼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있다.”
의로운 질문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지금 불의로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있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나? 십자가 앞에서 부르던 찬송의 가사처럼 하나님은 최후에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른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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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그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간절함, 뜨거움. 거기에서 출발하기. 그것을 헁해 짧은 삶동안 매진 

- 권위적인 것, 강제하는 것,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반감, 분노.
- 자율성,정체성
- 동시에 차이를 유지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원칙을 발견하기. 질서. Ordnung
- 이 둘을 조화시키는 일

차이에도 여러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개별적 동등성을 인정한 후 발현되는 특성/성향의 차이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높낮이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계층 간의... 그리고 차이가 아닌 차별도 있고.

'하나됨'은 '같아짐'이 아니다.

차이와 통합의 통합

하나됨: Einheit 통일성?

같아짐: Gleichheit 동일?성
모든 일엔 원인이 있을까? 납득할 수 있을까? 그걸 추구하던 근대. 근대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리스도인들도 근대적 정신의 노예가 되어있다. 천박한 절대주의, 과학주의, 합리주의, 인과주의의 노예가 되어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 불확실한 것을 견디질 못한다. 확실해야 한다. 절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물론 신앙에 그런 차원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관주의 신비주의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그런 차원을 강박적으로 추구해서는 도대체 기독교가 기독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믿고 싶은 것들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믿는 것일 뿐이다. 불안한 마음에 뭔가 절대적인 것들을 붙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모든 경험, 지식들을 환원시켜서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 신앙에 적용되어야 할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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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목사님이 페북에 올린 이 글도 공감 백배다.
어쩌면 질문이 틀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이 당혹스런 질문이 다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듭니다. 이 물음은 감당할 수 없는 악이 우리를 부딪쳐 올 때마다 목 아래로부터 튀어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게 하셨나? 도대체 왜? 속절없는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살 수조차 없을 것 같아 그리 합니다.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일어나는 불행도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일단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나면 불행에 대한 신앙인의 대응책은 세 가지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믿거나, 현재의 불행은 미래의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행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불행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반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악과 불행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내게 죄가 있다한들 엄연히 나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멀쩡히 잘 먹고 잘 사는데 내 죄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전생의 죄까지 헤아려 봐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내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선한 하나님을 받아들일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이유를 묻는 ‘왜’라는 질문에 도무지 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답이 없다면, 어쩌면 질문이 틀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원인에 집착하는 생각을 부정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필경 네게 있으니 네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면 그가 다시 복을 주시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했던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했다’(욥 42:7)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제물에 그 피를 섞은 갈릴리 사람들과 사고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정하십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눅 13:1-5). 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 왜,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요 9:3) 말씀하시며 그 장애를 고쳐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요 9:4) 말씀하시면서.

‘왜?’라고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대답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병든 자를 치유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며,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절망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계시다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대답하십니다. 성경은 악의 근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악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소개할 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고 억울한 누명을 가득 뒤집어쓴 채 악에 맞서 묵묵히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잠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저 어두운 곳에서 생명과 희망을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면 선하신 하나님을 계속 믿고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악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듯 구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악을 대면하며 살아갈 이생의 삶에서 드릴 기도, 주님은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윤태영의 글쓰기 조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야기일 수도 있고 짧은 주장일 수도 있다.
이른바 핵심메시지이다.
독자들에게 핵심메시지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길든 짧든 이야기를 짧은 한마디로 압축하라.
그 한마디 문장을 수시로 반복하라.
시작도 그 문장으로 마무리도 그 문장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수미상관법(首尾相關法)이다."

생존과 존엄

아침에 실험용으로 태어나 '평생' 갖혀살던 비글을 풀어주는 프로젝트 영상을 봤다. 이런 영상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생명에 대한 것이기에...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일이기에. 물론 생명도 생명 나름인 것 같긴 하다. 인간에 가까울수록 우리가 그 존엄성을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인간과 멀수록.... 곤총, 벌레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다. 불교에서 시도하긴 하지만... 여기에도 슈퍼맨 컴플렉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보호하자? 특별히 그런 일에 특별한 사명감이나 영감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는 엄청난 부담이다. 그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게 좋을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병자를 고치진 않으셨듯이... 내게 특별히 애틋하게 다가오는 생명, 이웃... 이웃 생명...  그것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적 사명의 핵심일 것이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 측은지심.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그것에 가장 큰 의미가 주어진다. 당연히. 일달 살려놓고 봐야지.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글. 자유를 주는 장면 그 자체는 감동적이지만... 그건 일회적인 사건일 따름이다. 비글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다친 야생동물을 치료한다. 치료해서 다시 야생상태로 돌려 보낸다.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야생동물은 돌아가자마자 포식자에게 잡혀먹일 수도 있다. 그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제된 병자를 고쳐서 무리 속으로 다시 돌려 보냈다. 일시적 치유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자살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 생존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은 살리고 봐야 한다. 그것만으로 할 일은 충분하다. 그것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서 집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야생동물 구조, 갖힌 동물 풀어주기.... 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단지 살아남는 것 - überleben -,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존엄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때로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니까. "생존의 정치에서 존엄의 정치로"(장은주)가 필요한가? 아니! 둘 다 필요하다. 생존의 정치는 그 나름대로 여전히 중요하고 존엄의 정치 역시 중요하다. 굶어주는 경우야 드물더라도 생존의 위협은 여전히 넓은 범위에서 존재하니까. 다만 생존의 정치만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의 그 생존과 존엄까지 고려할 여유가 있는 지금의 생존은 그 의미가 서로 같진 않겠다. 이전의 생존은 절대빈곤, 굶주림, 전쟁 같은 적나라한 폭력으로부터의 안전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 생존 혹은 이와 관련된 안전의 문제는 장애인 등  이전엔 아애 언급되지도 않았을 계층의 문제나 훨씬 더 럭셔리한 안전 문제로 부각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생존의 정치가 지배적이었다. 이제 생존의 문제도 다양해졌고, 존엄의 문제가 중요해지고 있다.

존엄하게 살기. 서로 존엄을 지키면서 살려면 똘레랑스가 필요하다. 톨레랑스는 관용이 아니라 참는 것.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도 그냥 참는 것. 참으면서 살기. 혹은 최소한의 합의는 만들어 놓고서 그밖에 대해서는 차이를 인정해버리는 것. 존중이다. 인격에 대한 존중. 생명에 대한 존중. 함께 살기. 자율성, 독립성을 인정하고. 따로 또 같이. 홀로 걷지만 함께 걷기. 그런 게 필요하다. 독립된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미성년자에게는 100%의 독립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최대한 보장하고. 자꾸 일치를 추구하다보면 갈등이 생긴다. 왜 같은 목표를 지향해야 하냐고.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이진경 목사님의 페북 노트. 공감하는 바가 커서 옮겨둔다. 특히, 이 구절 마음 깊숙이 담아두고 싶다.

"사실 다름에 대한 정신 톨레랑스의 우리말 번역 ‘관용’은 그리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한자어 ‘관용(寬容)’은 ‘너그러이 용서한다, 용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톨레랑스는 영어 단어 ‘tolerate’가 보여주는 것처럼 ‘싫은 것을 참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톨레랑스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싫은 것을 참는다는 뜻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싫은 것을 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바로 이 능력, 싫은 것을 참는 능력이야말로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톨레랑스(tolérance)

톨레랑스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프랑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가치이자 덕목이다. 우리말로 ‘관용’이라 번역되는 이 톨레랑스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아마도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다음 경구일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실제로 이 문장은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전기 작가로부터 유래된 말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그러나 비록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문장은 볼테르의 관용 사상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문장으로 인정되어 그의 이름과 함께 회자된다.

이 톨레랑스의 정신은 이미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현대사회의 덕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전체주의적 획일주의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정신이야말로 다양성이 발현되는 현대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 됨’은 너무도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일단 오해가 자리 잡으면 그 피해는 실로 치명적이다. 가장 흔한 오해는 바로 ‘하나 됨’을 ‘같아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드라마 중 <체인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초등학교의 교사였던 아사쿠라 케이타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35세 최연소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원래 꼭두각시의 역할을 기대했던 정치가들의 예상을 빗나가 그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총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 미무역통상대표와의 마찰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총리는 미대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전 초등학교 5학년 선생님이었습니다. 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싸워요. 그럴 때마다 제가 항상 했던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도 잘 들어보고 서로 충분히 생각해 보자고. 그러면...” 바로 그 순간, 보좌관이 끼어든다. “서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나 총리는 보좌관을 바라보며 다른 말을 한다. “아니요, 상대방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면 짜증내고, 누군가 혼자 다르게 행동하면 따돌리거나 싸움을 하고... 하지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듯이 모두 다 각각의 생각과 사정이 있는 거죠. 그래서 전 아이들이 자신과 상대방이 다르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했습니다. 그런 뒤에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전해질까,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해줬습니다. 외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타 총리는 대화를 나누게 하는 목적이 화해나 이해가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받아들이지 못하고 싸우게 된다고. 케이타의 이 말을 듣고 난 후 한동안 그 의미를 곰곰이 씹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강박관념처럼 ‘같아야 한다’는 노이로제에 걸려있다. 그러나 신앙도, 사상도, 습관도, 문화도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사람의 수만큼 다르다. 강박은 언제나 싸움을 부르고, 하나 됨은 결코 같아짐이 아니건만 좀처럼 이 강박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사실 다름에 대한 정신 톨레랑스의 우리말 번역 ‘관용’은 그리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한자어 ‘관용(寬容)’은 ‘너그러이 용서한다, 용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톨레랑스는 영어 단어 ‘tolerate’가 보여주는 것처럼 ‘싫은 것을 참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톨레랑스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싫은 것을 참는다는 뜻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싫은 것을 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바로 이 능력, 싫은 것을 참는 능력이야말로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는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의 시작이 오래 참음이라는 것,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주일만에 나온 사무실. 내가 이를 악물고 인터넷을 끊고, 금단현상까지 겪은 후 허겁지겁 반가운 마음에 다시 접속해보니... 세상은 내가 관심주지 않아도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처럼... 이 사무실 역시 평온한다. 평온... 다시 인터넷 자장 속으로 들어와서 시선만 분산되고 있을 뿐...  다시 접속을 끊고 좀 집중해 보려 한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거든...

'호랑이사랑방'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 팬들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너무도 잘 안다. 죄다 공감가는 글 투성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게 인생이다. 뻔히 정답이 보이는데도... 고지가 바로 저기 보이는데도 그 길로 가기가 쉽지않은... "그냥 통과될 정도로만 써"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있네 뭐. 그냥 그대로만 써". 정답이다 정답. 그런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

선 감독의 성향은 바뀌질 않는다. 그 성향이 팀 상황과 잘 맞아떨어질 때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 김응룡 감독도 그렇고. 팀이 바뀌니 이 양반들이 죽을 쑤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다를까? 그 양반이라고 항상 좋은 결과를 냈던 것 아니니까. 물론 SK 이후 고양원더스까진 괜찮은 것 같다. 이 양반은 특히 성적이 신통찮은 팀을 맡아 팀이 가진 것 이상의 결과를 잘 내는 것 같다. 결론은... 개인의 성향과 조건들이 잘 맞아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 개인의 성향이 최적을 조건을 낼 수 있도록 조건과 환경을 잘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 성향을 바꿀 게 아니라...
인간관계는 어렵다. 다른 사람들 간 관계의 어려움을 보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가면을 벗기가 힘들다. "솔직하기"는 긍정적인 덕목으로 평가받을 때가 많지만... 그건 희망사항, 로망에 가깝다. 아니 도대체 "솔직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자체가 분명치 않다. 그렇다고 가면을 쓴다는 게 '위선'에 가깝다면 그것도 곤란할 터. 언제나 그렇듯 끊임없이 유동한 '최선'은 늘 그 중간 어디에선가 발견된다. '최선'의 궤적을 잘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고. 특히 부정적 감정은 최대한 감춰야 할 것 같다. 특히 그 부정적 감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사람 앞에선...

그리고 존경.... 존경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요구할 수 없는.

상호 간 기대와  감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드문 경우와 그런 순간을 충분히 즐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냥 살 수밖에... 가능한 최선의 궤적을 찾으면서...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오늘'도' 기아 타이거즈는 졌다. 삼성전 3연전 싹슬이 패. 다행하게도 중간중간 점수 등을 확인했을 뿐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은 투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네트워크 연결 상황 때문에... 이런 날 꼭 기아타이거즈팀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가 본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같이 혹평이고 독설이다. 심지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써놓은 사람들도 있다. 감독 탓도 적지않은 것 같지만 결국은 팀의 문제다. 매우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그걸 바꾸지 쉽지 않다. 팬들은 문제의 근원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성적 나쁜아이에게 왜 성적이 나쁘냐고 묻는 식이다. 개인의 성적을 올리기도 쉽지 않다. 하물며 팀이랴... 김성근 감독의 선수들의 최고치 이상을 뽈을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게 팀이고 팀의 힘이다.
통풍성관절염 쪽 전문 병원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검사를 위해 관절액을 뽑는 과정에서 심지어 흰 요구르트같은 요산결정을 뽑아내는 시술(?)을 받기도... 여하튼 시술과 더 '세게 처방해준' 약 때문인지 상태가 급격하게 좋아졌다. 일주일 정도 약으로 염증을 다스린 후 아마 본격적으로 요산 수치 관리에 들어갈 것 같다.

모처럼 아내도 시간을 낼 수 있어서 늦은 오후 팔당호수 쪽으로 드라이브 겸 저녁 먹으러 나섰다. 그동안 한국에서 찾아 다닌 음식적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 호수가 보이는 전경, 깔끔한 서비스와 인테리어, 음식의 질도 가격대비 괜찮고. 어쩌면 앞으로 자주 찾게될 것 같다. 집에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고...

'정치문화'를 생각하는데... 문화란 개념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아마 누구나 공감하긴 할텐데... 막상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냥 필요한대로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개념이 되어버린듯. 그 개념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지역 간 국가 간 정치문화의 차이를 루만의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 이번 주 여러 번 겪고 있는 민망한 상황. 약국을 여러 번 갔는데 그때마다 약봉지에 내 나이가 선명하게 찍혀져 나온다. 허걱....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는... 도무지 현실이어서는 안될 그런 나이인 것이다. 슬프고 민망하고 화도 나고... 뭐. 다 그런 것일테지. 아니... 그럴까? 다 그럴까?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닐까? ㅠㅠ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모처럼 움직일만해서 저녁 시간에 내가 즐겨찾는(^^) 카페에 나왔다. 당연히 인터넷 빵빵... 그래서... 당연히... 딴...짓... 게다가 무슨 계모임하는지 아줌마들 10여명이 몰려와서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 아줌마다움을 감추질 못하는... 그대들에게 어울리는 카페가 아닌데... ㅠㅠ

드문드문이지만... 야구를 보고야 말았다. 지는 경기를... 그것도 삼성에... 인터넷안되는 카페를 발굴해야 할까보다.

2014년 5월 15일 목요일

얼마나 많은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가?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인과적인가? 역사는 누적적으로 발전하는가? 긴 시간의 역사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건 "유혹"에 가깝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고.... 의미부여... 반드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 같은.... 역사는 절대적 존재, 역사의 신, 절대 정신 같은 초월적 존재, 개념의 자기 실현 과정일까? 목적, 의미를 갖는? 그렇게 믿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든다. 왜?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 아닌가? 10년 전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상관없다.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따위의 태도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어떤 목표를 갖고 일관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니. 그러니 결과를 놓고서라도 이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그런 시도들을 누구나 한다. 결과론... 야구 경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 여러 시나리오 중에서 결과에 비추어 그럴듯한 것을 꺼낸다.
한국사회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굳이 그런 질문을 해야 하나?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는 지식이 지금 사는 모습을 설명하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현재를 아는 것이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예측하는데 역시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 모델"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을 보라. 역사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과거-현재-미래... 그렇게 긴밀하지 않다. 그저 결과론적으로 일관성을 그려내고, 그를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편의적으로 선택할 뿐이다. 물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또 - 당연히 - 과거와 현재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없을 수도 없다. 대원칙을 얘기하는 것일 뿐.
정치사는 물론 과학사의 발전도 그럴 것이다. "인과성", "일관성", "설명"... 참 매력적이지만 허상인 것 같다. 쉬운 선택이기도 하고... "고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만이다.

나도 어지간히 인과성, 일관성을 추구했나 보다. 계량적, 통계적 접근이 아니었을 뿐...

누적적, 인과적, 총체적 역사관을 벗어나는 쪽이 바슐라르, 푸코 등인가? 루만의 경우는 약간 애매하다. 스스로는 이 쪽에 끼고 싶겠지만 - 비개연성Unwahrscheinlichkeit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가 - 사회 분화의 삼단계설 테제 등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력하다. "기능적 분화"처럼 어떤 원칙에 따른 역사 변화를 기술하는 계보에 있다보니 그렇기도 하고. 

그렇다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은 사실 공허하다. 왜? 어떤 구체적인 답변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쟁 자체를 피해가는, 사실은 아주 비겁한 질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싶은 그런 질문이 있는가?

2014년 5월 14일 수요일

페친 홍성수 님의 이야기:

"제가 15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 십수년은 더 연구할 주제를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썼던 모든 저작물에 깔려있는 문제의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특히 한국에서 법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가?"입니다. 법의 기능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법의 '자기 몫'을 잘 찾아야 법이 자기 역할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거고요. 한국사회에서는 법이 과도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 제 잠정적인 결론이기도 합니다."

흠. 멋질걸...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1. 오늘도 조금전까지 인터넷프리한 시간을 가졌다. 밤엔 생각보다 일찍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는데 아직 야구가 덜 끝난 것 아닌가. 다행히 영상을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허무하게 진 경기, 최종결과만 확인했어야 하는데... 기분이 좀 상했다. 당분간 인터넷프리한 삶을 최대한 즐기리라 마음먹는다.

2. 밤새 괴롭더니 아침엔 엄지발가락 쪽 통증이 더 심해졌다. 한 발로 다녀야 할 정도로... 다른 병원에 가서 스테로이드계 항염제를 처방받았다. 조금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글쎄 내일 돼 봐야 알 듯. 당장 통증이 사라지더라도 앞으로 관리할 일이 문제다. 약을 계속 먹어야 하나. 그러다 재발하면... ㅠㅠ
그런데 의사들이 잘 모르는 눈치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통증의학과를 가야 하나? 큰 병원?

3. 약기운 탓에 오후에 한 시간 정도 잤다. 오늘도 늦게 잠자리에 들게 될 듯.

현대 한국의 모습, 특성을 조선조의 역사적 경험으로 연결시켜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접근이 방식참 매력있긴하다. 하지만... 역사란 것이 워낙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특히 그 거리가 멀수록 원하는 것들만 임의적으로 발굴되어 현재 설명을 위해서 동원될 여지가 크다. 예를 들어 유교/유학은 동아시의 정체(?)뿐 급속한 경제성장을 설명하는데 동시에 사용된다. 차라리  개화기 이후의 경험에서 찾아낸 특징에서 연속성을 찾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기본적으로 칸트로 대표되는 유럽 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여 불교사상의 우위성을 논증했다. 즉 그는 진정한 자아, 개인적 도덕성 등 개체에만 치중하는 칸트 사상에 비해, 득도(得道)를 통한 개인의 궁극적 자유(, 해탈)와 일체 중생의 불성(佛性), 구제를 상즉상리(相卽相璃)의 논리로 조화시키는 불교사상이 월등히 우수하다고 논파하고, 불교의 개체자유론을 무시해 버린 량치차오를 비판하였다.  (박노자, 우승열패의 신화)

아닌게 아니라 불교도 매우 개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네. 근대? 근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