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의 원인을 민영화나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경향이 보인다.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한국적 특징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 한겨레 김우창 선생이 글을 읽으면서 그 원인 중 하나를 공공성, 공적 윤리의 저발달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신자유주의에 원인을 돌리는 시각으로...
1. "3류 대한민국의 진화 방안" (이도흠)
"왜 우리는 짐승이 되었는가. 신자유주의와 부패의 카르텔 때문이다."
2. "배는 우리 모두다" (한병철)
"이번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개인적 불찰로 인한 혹은 미숙한 선원의 처사로 인한, 그리고 한국이란 국가적 특성에 국한된 사고로 볼 것은 아니다. 이는 전 세계로 하여금 여러 진실을 알려주었다. (...) 물론 선장은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이 있다. (...) 그러나 이 사고에 있어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사람은 신자유주의 성향을 지니고 현대의 경영진을 맡은 전 대통령 이명박이다.
일반적으로 배의 수명은 20년이다. 그러나 2009년 기업 친화적인 이명박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는 30년으로 연장되었다. 이 새로운 법안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법안 수정으로 발현된 것이다. 만약 이 법안이 그대로 존속되었다면 해운업체는 이미 일본에서 폐선 처리된 18년 지난 이 배를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윤 추진을 위한 기업친화적 법안이 사고의 위험을 높였다. ‘비용을 낮추라, 효율적인 경제를 위해’ 이 신자유주의적 격언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한 비용 또한 각오해야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바다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구조활동은 부분적으로 개인적 책임에 달려있었다. 구조활동의 개인화는 비용을 낮추는, 즉 위험을 의미한다. (...) 이러한 조건이 책임의식이 부재를 낳았다. 대부분의 세월호 선박직 직원들이 비정규직이었던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기한이 명시된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다. 선장은 1년 계약직에 매우 낮은 수당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 어떤 권위 없이 이름뿐인 선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직업적 조건 속에서 그 어떤 의무나, 배와 연관된 유대감, 책임의식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러한 조건이라면 그들 스스로 가장 먼저 선박을 빠져나오는 것도 일면 당연하다. 근본적 살인자는 선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원인인 구조적 법적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한다."
배의 수명 연장 그 자체가 사고체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지. 물론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수명 제한을 둘 테지만... 배 수명을 규제하지 않는 국가도 있다고 하지 않은가.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 정규직이 승객 보호 같은 직업윤리에 더 투철할 것인가? 그런 면도 있겠지만... 이건 직업윤리를 떠나서 타인, 특히 약자 보호에 대한 보편적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3. "윤리적 책임과 인간적 사회" (김우창)
"이번의 사고에서 사람들의 분노는 관계 부서들의 일 처리 잘못에 못지않게, 그 잘못의 큰 부분이 도덕적 해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관계된다. 기술 정보, 그것을 현실에 옮기는 조직, 항로의 여러 조건에 대한 정보-이러한 점들에서 준비가 적절했던가가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 정보, 안전 운행 규칙 그리고 그것을 검사하고 감독하는 조직들은 일반적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준비가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한 것은 바로 윤리적 의식의 결여 때문이라는 느낌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지난 2월의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는, 지붕의 패널을 선정하고 볼트 하나를 박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도 성실한 윤리의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러한 의식의 결여는 담당 선원, 기업, 감독관청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분노가 큰 것은 이번의 사고에서 볼 수 있는 윤리성의 부재가 사회의 전반에 퍼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생활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비윤리성은,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서일망정, 자기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비윤리 인자(因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윤리의 뿌리는 개인의 의식과 행동에 있다. 주어진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위엄도 윤리적 행동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전체와의 교환을 통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실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그 관점에서도 사회 기구-정부와 사회 조직 자체가 윤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윤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윤리성에는 사회 성원의 삶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포함되어야 하고, 보다 높은 삶의 차원으로서의 공공의 공간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삶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월호 침몰에서 일어난 인간적 희생에 대한 제일차적 책임이 선장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스스로의 구명만 도모하고 승객들은 방기하였지만, 동시에 부하 선원들과 함께 탈출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독일 출신의 생태윤리학자 한스 요나스는 전통시대와는 다른 기술시대의 윤리를 밝히려 하면서, 윤리의 기본적인 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일이 있다. 칸트의 윤리학에는, 범상한 사람이라도 대체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옳게 행동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요나스 교수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윤리의식은 ‘근접한’ 사물과 사람과 단기간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만 효력을 갖는다. 과학기술의 많은 결정은 생태계 전반 그리고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윤리의식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먼 날과 먼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짐할 수 있는 원리로서 ‘책임 원리’의 개념을 정립하려 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 상황에서의 윤리적 감정을 이념으로 확대한다. 그러면서 그 정서적 기반이 되는 것은 생명 일반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보편적 정서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근접한 환경을 넘어갈 때, 윤리적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어려움은 행동 범위가 이웃을 넘어 큰 집단과 사회, 또는 추상적인 체제로 확대될 때도 생겨난다. 자연스러운 인간 심성으로는 이웃이나 동료를 넘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의 윤리적 책임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공감적 감정은 이성적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지속적 윤리의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원근(遠近)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보여준 것은 강렬한 비탄과 공감이었다. 이것은 국민적 단합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커다란 자원이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승화될 때, 그것은 사회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속적인 윤리의식이 된다.
사회 전반의 윤리의식은 적절한 교육과 문화적 개발로서 진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제도적 환경이다. 정부나 기업의 제도가 바른 윤리적 원리에 의하여 움직인다면, 책임 의식은 저절로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 될 것이다. 제도 가운데도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제도이다. 그것은 넓은 차원에서 윤리적 권위를 갖는 것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작은 공동체에서와 같이 사회 성원들에 대한 공동체적인 돌봄을 중심적 관심으로 갖는 것이라야 한다. 기업이 반드시 정부 기구와 같은 뜻에서 공공 목적을 위한 기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공 공간 안에 존재하고 움직인다. 기업도 공동체적 정서에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의 직업이 저임금 비정규직의 구분에 맞아 들어간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부터 직업과 관련하여 단호한 윤리적 결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할 수 있다. 직업의식이나 직업윤리는 대체로 오랜 봉직에서 길러지는 삶의 태도이다. 물론 소소한 개인 사정에 구속될 수 없는 것이 윤리적 당위라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리도 삶의 현실에 의하여 한정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체적으로 말하여,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기초가 없이는 좋은 사회의 이상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다 넓게 생각하여, 개인이나 사회와 정치 조직이나, 적어도, 그 근본에 있어서, 그 심성이 ‘삶에 대한 경외심’으로 열려 있지 않고는 인간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원래 규범적 접근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특히 체계이론가들은 규범적 통합 같은 아이디어에 손을 내젓지만... 그건 공적 질서에 대한 규범적 합의가 상식으로 자리잡혀있는 서양 "선진국" 지식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대한민국같이 "미개"한 나라에서는 공공성, 공공성에 대한 윤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공선을 위해서 개인의 이기심을 조절할줄 아는 사회. 짐승들만이 득실대는 사회가 아니라... 서양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운운해도 거기는 토양 자체가 한국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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