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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목사님이 페북에 올린 이 글도 공감 백배다.
어쩌면 질문이 틀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
이 당혹스런 질문이 다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듭니다. 이 물음은 감당할 수 없는 악이 우리를 부딪쳐 올 때마다 목 아래로부터 튀어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게 하셨나? 도대체 왜? 속절없는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살 수조차 없을 것 같아 그리 합니다.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일어나는 불행도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일단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나면 불행에 대한 신앙인의 대응책은 세 가지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믿거나, 현재의 불행은 미래의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행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불행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반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악과 불행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내게 죄가 있다한들 엄연히 나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멀쩡히 잘 먹고 잘 사는데 내 죄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전생의 죄까지 헤아려 봐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내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선한 하나님을 받아들일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이유를 묻는 ‘왜’라는 질문에 도무지 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답이 없다면, 어쩌면 질문이 틀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원인에 집착하는 생각을 부정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필경 네게 있으니 네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면 그가 다시 복을 주시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했던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했다’(욥 42:7)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제물에 그 피를 섞은 갈릴리 사람들과 사고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정하십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눅 13:1-5). 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 왜,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요 9:3) 말씀하시며 그 장애를 고쳐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요 9:4) 말씀하시면서.
‘왜?’라고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대답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병든 자를 치유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며,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절망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계시다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대답하십니다. 성경은 악의 근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악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소개할 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고 억울한 누명을 가득 뒤집어쓴 채 악에 맞서 묵묵히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잠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저 어두운 곳에서 생명과 희망을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면 선하신 하나님을 계속 믿고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악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듯 구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악을 대면하며 살아갈 이생의 삶에서 드릴 기도, 주님은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왜?”
이 당혹스런 질문이 다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듭니다. 이 물음은 감당할 수 없는 악이 우리를 부딪쳐 올 때마다 목 아래로부터 튀어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게 하셨나? 도대체 왜? 속절없는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살 수조차 없을 것 같아 그리 합니다.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일어나는 불행도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일단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나면 불행에 대한 신앙인의 대응책은 세 가지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믿거나, 현재의 불행은 미래의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행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불행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반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악과 불행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내게 죄가 있다한들 엄연히 나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멀쩡히 잘 먹고 잘 사는데 내 죄 때문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전생의 죄까지 헤아려 봐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내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선한 하나님을 받아들일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이유를 묻는 ‘왜’라는 질문에 도무지 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답이 없다면, 어쩌면 질문이 틀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원인에 집착하는 생각을 부정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필경 네게 있으니 네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면 그가 다시 복을 주시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했던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했다’(욥 42:7)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제물에 그 피를 섞은 갈릴리 사람들과 사고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정하십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눅 13:1-5). 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해 왜,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요 9:3) 말씀하시며 그 장애를 고쳐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요 9:4) 말씀하시면서.
‘왜?’라고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대답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병든 자를 치유하고,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며,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절망에 빠진 자를 위로하고 계시다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대답하십니다. 성경은 악의 근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악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소개할 뿐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고 억울한 누명을 가득 뒤집어쓴 채 악에 맞서 묵묵히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잠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저 어두운 곳에서 생명과 희망을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면 선하신 하나님을 계속 믿고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악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듯 구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악을 대면하며 살아갈 이생의 삶에서 드릴 기도, 주님은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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