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름에 대한 정신 톨레랑스의 우리말 번역 ‘관용’은 그리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한자어 ‘관용(寬容)’은 ‘너그러이 용서한다, 용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톨레랑스는 영어 단어 ‘tolerate’가 보여주는 것처럼 ‘싫은 것을 참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톨레랑스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싫은 것을 참는다는 뜻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싫은 것을 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바로 이 능력, 싫은 것을 참는 능력이야말로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톨레랑스(tolérance)
톨레랑스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프랑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가치이자 덕목이다. 우리말로 ‘관용’이라 번역되는 이 톨레랑스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아마도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다음 경구일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실제로 이 문장은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그의 전기 작가로부터 유래된 말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그러나 비록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문장은 볼테르의 관용 사상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문장으로 인정되어 그의 이름과 함께 회자된다.
이 톨레랑스의 정신은 이미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현대사회의 덕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전체주의적 획일주의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정신이야말로 다양성이 발현되는 현대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 됨’은 너무도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일단 오해가 자리 잡으면 그 피해는 실로 치명적이다. 가장 흔한 오해는 바로 ‘하나 됨’을 ‘같아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드라마 중 <체인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초등학교의 교사였던 아사쿠라 케이타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35세 최연소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원래 꼭두각시의 역할을 기대했던 정치가들의 예상을 빗나가 그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총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 미무역통상대표와의 마찰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총리는 미대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전 초등학교 5학년 선생님이었습니다. 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싸워요. 그럴 때마다 제가 항상 했던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도 잘 들어보고 서로 충분히 생각해 보자고. 그러면...” 바로 그 순간, 보좌관이 끼어든다. “서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나 총리는 보좌관을 바라보며 다른 말을 한다. “아니요, 상대방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면 짜증내고, 누군가 혼자 다르게 행동하면 따돌리거나 싸움을 하고... 하지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듯이 모두 다 각각의 생각과 사정이 있는 거죠. 그래서 전 아이들이 자신과 상대방이 다르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했습니다. 그런 뒤에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전해질까,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해줬습니다. 외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타 총리는 대화를 나누게 하는 목적이 화해나 이해가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받아들이지 못하고 싸우게 된다고. 케이타의 이 말을 듣고 난 후 한동안 그 의미를 곰곰이 씹었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강박관념처럼 ‘같아야 한다’는 노이로제에 걸려있다. 그러나 신앙도, 사상도, 습관도, 문화도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사람의 수만큼 다르다. 강박은 언제나 싸움을 부르고, 하나 됨은 결코 같아짐이 아니건만 좀처럼 이 강박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사실 다름에 대한 정신 톨레랑스의 우리말 번역 ‘관용’은 그리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한자어 ‘관용(寬容)’은 ‘너그러이 용서한다, 용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톨레랑스는 영어 단어 ‘tolerate’가 보여주는 것처럼 ‘싫은 것을 참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톨레랑스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싫은 것을 참는다는 뜻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싫은 것을 참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바로 이 능력, 싫은 것을 참는 능력이야말로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는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노래를 시작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의 시작이 오래 참음이라는 것,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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