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1일 수요일

"이철우 2000, 아시아적 가치와 한국의 법문화"  중 결론 부분.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요약하자면:

(1) 한국인이 소송을 회피하고 조화를 중시한다는 그런 선입견은 경험적 근거가 없다. 
(2) 국가 법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법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경쟁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법을 빈번히 활용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법의 적용을 배제하는 이중적 태도를 지닌다.
(3) 국민들은 법을 다루는 기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법적 담론과 법과정에 특유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 법 과정은 정치적 과정이 아닌 것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 실현을 위해 국가적 법제도를 활용하는 데 크게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법을 회피하지 않고 활발히 이용하는 것이 반드시 법을 존중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활용은 법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아시아적 법문화 담론에서는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조화와 화합을 존중하는 전통문화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이질적인 서양식 법제도가 강제로 이식된 결과 법제도와 문화적 태도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법을 피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강화되었다고 본다 (함병춘 1986). 그러나 일제시대의 법과 사회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그러한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기구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어 있던 일제시대에조차 사람들은 공식적 법제도를 활용하는 데 크게 망설임이 없었다 (Lee 1996).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제도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법과 법이데올로기를 정당한 것으로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단지 공리적 동기에서 법을 활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국민주권주의가 확립되지 않았거나 일제 때와 같은 식민통치하에서는 법의 정당성을 받아들일만한 정치적.제도적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보편적인 공법상의 주체로서 인정되는 오늘날에도 법은 외부에서 만들어져 부과될 뿐이라는 인식이 계속되고 있다. 94년 법의식조사에서도국회에서 만든 법은 국민인 우리가 만든 법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2% 이상이 별로 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법이 인민 스스로의 자기규제라는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법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익 실현의 수단으로서만 간주된다면법의 지배는 정착할 수 없다. 법적으로 확정된 권리뿐만 아니라 불명확한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비타협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태도의 한 반영이다. 고소와 고발 및 이에 대응하는 무고죄에의 문의가 남발되는 데에서 보듯이 경쟁 상대인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으로 법특히 형사법을 빈번히 활용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법의 적용을 배제하는 경향도 같은 태도에 기인한다.

한편 법적으로 확정할 수 없는 불명확한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자율적이고 폐쇄적인 법적 담론에 익숙하지 않거나 법적 담론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법적 담론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고려의 부족은 때때로 민주주의의 이름 하에 표출되기도 한다. 94년 법의식조사에서국민의 여론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무려 76.6%의 응답자는 바람직하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론정치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던 시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법을 다루는 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일 수도 있고 법의 해석과 적용이 국민의 의사에 합치되게 해달라는 주문일 수도 있지만 법적 담론과 법과정에 특유한 의사소통의 구조를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간의 생활관계는 연속성을 갖는 것이지만 법과정에서 다루어질 때에는 법적 담론의 내적 구조에 제약되어 단절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면 법과정은 정치과정과 혼동되며 법체계에는 불필요한 과부하가 작용하여 결국 법체계의 안정된 재생산구조가 파괴되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제고는더 많은 민주주의시민사회의 활성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더 정확히는 그것의 조건을 이룬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