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실험용으로 태어나 '평생' 갖혀살던 비글을 풀어주는 프로젝트 영상을 봤다. 이런 영상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생명에 대한 것이기에...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일이기에. 물론 생명도 생명 나름인 것 같긴 하다. 인간에 가까울수록 우리가 그 존엄성을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인간과 멀수록.... 곤총, 벌레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어려울 것이다. 불교에서 시도하긴 하지만... 여기에도 슈퍼맨 컴플렉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보호하자? 특별히 그런 일에 특별한 사명감이나 영감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는 엄청난 부담이다. 그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게 좋을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병자를 고치진 않으셨듯이... 내게 특별히 애틋하게 다가오는 생명, 이웃... 이웃 생명... 그것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적 사명의 핵심일 것이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 측은지심.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그것에 가장 큰 의미가 주어진다. 당연히. 일달 살려놓고 봐야지.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글. 자유를 주는 장면 그 자체는 감동적이지만... 그건 일회적인 사건일 따름이다. 비글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다친 야생동물을 치료한다. 치료해서 다시 야생상태로 돌려 보낸다.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야생동물은 돌아가자마자 포식자에게 잡혀먹일 수도 있다. 그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배제된 병자를 고쳐서 무리 속으로 다시 돌려 보냈다. 일시적 치유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자살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 생존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은 살리고 봐야 한다. 그것만으로 할 일은 충분하다. 그것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서 집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야생동물 구조, 갖힌 동물 풀어주기.... 하지만 그 이후 어떻게 같이 살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단지 살아남는 것 - überleben -,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존엄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 때로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니까. "생존의 정치에서 존엄의 정치로"(장은주)가 필요한가? 아니! 둘 다 필요하다. 생존의 정치는 그 나름대로 여전히 중요하고 존엄의 정치 역시 중요하다. 굶어주는 경우야 드물더라도 생존의 위협은 여전히 넓은 범위에서 존재하니까. 다만 생존의 정치만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의 그 생존과 존엄까지 고려할 여유가 있는 지금의 생존은 그 의미가 서로 같진 않겠다. 이전의 생존은 절대빈곤, 굶주림, 전쟁 같은 적나라한 폭력으로부터의 안전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 생존 혹은 이와 관련된 안전의 문제는 장애인 등 이전엔 아애 언급되지도 않았을 계층의 문제나 훨씬 더 럭셔리한 안전 문제로 부각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생존의 정치가 지배적이었다. 이제 생존의 문제도 다양해졌고, 존엄의 문제가 중요해지고 있다.
존엄하게 살기. 서로 존엄을 지키면서 살려면 똘레랑스가 필요하다. 톨레랑스는 관용이 아니라 참는 것.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도 그냥 참는 것. 참으면서 살기. 혹은 최소한의 합의는 만들어 놓고서 그밖에 대해서는 차이를 인정해버리는 것. 존중이다. 인격에 대한 존중. 생명에 대한 존중. 함께 살기. 자율성, 독립성을 인정하고. 따로 또 같이. 홀로 걷지만 함께 걷기. 그런 게 필요하다. 독립된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미성년자에게는 100%의 독립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최대한 보장하고. 자꾸 일치를 추구하다보면 갈등이 생긴다. 왜 같은 목표를 지향해야 하냐고.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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